신문과 잡지는 우리 생활의 일부다. TV가 많이 보급되기 이전에는 더욱 밀접한 관계로 우리 일상과 함께 했다. 신문은 주로 새로운 소식으로 우리의 눈과 귀가 되었지만 잡지는 일반 상식 더불어 여행, 등산, 레저, 취미, 탐방, 문화 등 심층 취재는 일반 독자들의 관심사 였다. 연예가 소식을 비롯해서 표지 모델이나 화보 광고는 청소년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 가운데서도 펜팔 코너는 청소년들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기웃거려 보았다.
주부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여성동아」, 「주부 생활」, 「여원」, 「여성조선」은 연말에 가계부 등을 부록으로 주면서 더욱 인기가 많았다. 농어민을 대상으로 한 「새농민」, 「새어민」, 「농민 생활」, 「최신 원예」, 「바다」 등 특정인을 대상으로 발행한 잡지도 그 분야 종사자들에게 새로운 기술을 보급하는 등 전문지로서 인기가 많았다. 종합 교양지 격인 「신동아」, 「월간 조선」, 「월간 중앙」, 「사상계」 등은 두께도 있었지만 정치, 경제에 관한 지식인들의 견해를 접할 수 있었다. 순수 문예지 성격인 「현대문학」, 「문학춘추」, 「문학」 ,「문학과 지성」, 「중앙문학」은 신춘문예 등을 준비하는 문학도들에게 관심의 대상 있었다. 연말이면 연례행사처럼 신춘문예 공모에 응해 보았으나 준비가 부족하여 매번 보기 좋게 낙방하고 말았다. 정말 웬만큼 준비해가지고는 등단이 어렵던 시절 이었다.
집집마다 잡지가 한 두 권 씩 없는 집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잡지를 구독하는 가정이 많아서가 아니다. 과월호라도 연재소설이나 광고 등을 보고 또 보는 등 돌려가며 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가십란에는 황당한 사건들을 실어 재미를 더 했기 때문이다.
완행열차는 대구에서 서울 까지 10시간은 족히 결렸다. 속도도 느렸지만 간이역까지 다 세우다 보니 오래 걸릴 수 밖에 없었다. 복잡한 통로를 비집고 삶은 계란과 오징어와 땅콩을 싣고 다니는 홍익판매원 아저씨는 「주간경향」, 「주간조선」, 「주간한국」, 「주간여성」 등 인기 있는 주간 잡지도 함께 팔았다. 이들 잡지는 가판대 인기 상품으로 당시 판매부수 100만부를 자랑하기도 했다. 특히 「선데이 서울」 이라는 잡지는 통속과 욕망이라는 이름의 열차 내 대표적 인기 잡지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표지 모델이 반 누드차림으로 찍은 선정적 자태가 압권이었다. 대대분의 기사내용도 선정적 기사가 대부분 이었다. 뿐만 아니라 연재소설도 판매 부수를 늘이기 위하여 선정적 내용으로 넘쳐 났다.
임예진이라는 배우는 10대 시절 사랑스런 외모와 뛰어난 연기력으로 남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임예진은 중학교 시절부터 귀엽고 깜찍한 외모로 주목을 받았다. 그 이유는 당시 학생들에게 인기 있었던 잡지 「여학생」의 모델로 활동하면서 인기를 얻어 자연스럽게 연예계에 데뷔하였다. 특히 잡지 연재소설의 인기는 대단하여 김말봉 같은 작가는 저널리즘 스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잡자가 통속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진위와 시비를 가려내자는 계몽과 사상의 뜨거운 시대적 잡지도 있었다. 소위 지성인들의 서가를 빼곡이 채웠던 「개벽」, 「사상계」, 「창작과 비평」, 「씨알의 소리」, 「뿌리깊은 나무」, 「현실과 과학」은 지식인의 필독서처럼 읽혀져 읽지 않은 사람은 술자리 등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기 십상이었다.
한국에서 펜팔이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는 전쟁이 끝나고 국제 교류가 증가함에 따라 펜팔이 보편화되기 시작 했다. 펜팔은 전쟁 후유증인 문화적 냉전이 극복되고 국제적 우정을 증진하는 수단으로 사용 되었다. 청소년들이 외국어를 배우고 이국의 문화를 이해하는데서 출발하여 글로벌 소양과 국제적인 이해 증진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엔 펜팔 문화가 유행처럼 번졌다. 이때 잡지는 펜팔의 가교 역할을 했다. 우리 세대 가운데 펜팔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1960년 대 후반 베트남 전쟁 기간에는 엄청나게 성행했다. 우리는 위문편지라는 명목 하에 의무적으로 펜팔을 경험한 세대이다.
이러한 펜팔 문화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청소년들 사이에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학생들이 많이 보는 잡지에는 펜팔을 원하는 청소년들과 학생들의 주소가 몇 페이지 고정적으로 수록 되어 있었다. 그 시절엔 대부분의 잡지를 부모 몰래 숨어서 보았다. 부모들 생각에는 잡지는 학교 공부와 상관없는 유해한 것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우리들 가운데는 펜팔이 영어공부와 우표 수집에 필요하다고 해서 부모님 허락을 받고 시작하기도 했다.
펜팔은 주로 잡지와 신문이 매개체였다. 관심 있는 친구들은 자신의 신상과 주소를 게재하여 상대방을 찾았다. 이시기에는 많은 학생들이 펜팔에 참여 했으며 일부이지만 결혼까지 이르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펜팔은 연애편지다.‘라는 등식이 성립되던 시기였다. 펜팔 덕분에 문장 실력이 좋아진 것도 사실이다. 한국의 문인들도 국제펜클럽한국본부를 통해 국제무대에 진출했다.
물론 펜팔은 주로 이성적 교제가 많았으나 우정을 쌓기위한 펜팔도 있었다. 학생용 교양 잡지로는 「학원」이 있었으며 「진학」은 순수 학생 잡지로 주요대학 예상 문제 등을 수록하면서 학생 전문지로서 특히 고등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학생들과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인기가 높았던 대부분의 잡지들은 팬팔코너 때문이었다. 펜팔란이 문제가 된 것은 주소나 이름은 사실이었으나 직업은 회사원, 학생 등이 대부분 있으나 대부분 사실과 다르게 기재하였고 다르게 기재하여도 요즈음 결혼상담소처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고향 친구가 내가 다니던 직장 근처에서 자영업을 했다. 퇴근길에 우연히 만나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하여 식당엘 갔다. 친구의 손에는 잡지가 한권 들려져 있었으나 눈여겨보지 않았다. 술자리가 길어지고 친구가 화장실을 간 사이 심심해서 잡지를 펼쳐 보았다. 모든 잡지의 펜팔 주소는 대부분 그 잡지의 뒷부분에 편집되어 있었다. 그 부분이 접혀 있어 자연스럽게 펼쳐보다가 감짝 놀랐다. 친구의 이름과 주소가 기재되어 있었고 직업란에 교사라고 적혀 있었다. 직업을 속여 기재 했으나 주소 등으로 친구임을 직감했다. 대학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놈이 교사라고 써 놓으면 못쓴다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기분을 망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결혼을 위해 혼수가구를 보러 갔다. 그 당시에는 집을 사서 신혼생활을 출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부엌 딸린 방 한 칸이 대부분 이었으나 두 칸 정도면 훌륭했다. 그러니 크고 좋은 가구가 아닌 임시로 사용할 값이 저렴한 가구를 구입하는 것이 대부분 이었다. 그러나 장롱만큼은 주요 혼수품 이었다. 제법 그럴싸한 가구점에 장롱을 구입하기 위해 들렸더니 낮 익은 얼굴이 사장 있었다. 펜팔을 하던 그 친구였다. 아름답고 상냥한 여직원도 두고 제법 큰 규모로 운영하는 가구점 이었다. 그 여직원이 팬팔로 사귄 여성이며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귀띰해 주었다. 묻지도 않았으나 대학까지 졸업했다며 자랑스러워 했다. 그 이후에도 가구를 바꿀 때 마다 친구를 찾았다. “교사보다는 가구점 사장이 낫지요?” 라는 개구지고 농 섞인 나의 질문에 친구 부인은 미소만 짓는다.
첫댓글 수고 하였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