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수분 공소 (순례지/성지) 성지설명
간략설명: 전통 한옥 양식에 서양의 바실리카식 평면을 결합한 성당
도로주소: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뜬봉샘길 51-3
전북 장수읍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남원 쪽으로 10분 남짓 달려 고갯마루를 향하다 보면 오른쪽 산기슭에 마을이 보인다. 물뿌랑구(물뿌리) 마을이라고도 하는 수분리(水分理) 마을이다.
비가 내리면 고갯마루를 경계로 빗물이 갈라져 한 줄기는 섬진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다른 한 줄기는 금강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2005년 6월 18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된 장수 본당 수분 공소는 마을 앞쪽 산자락에 붉은 색 함석 슬레이트 지붕을 하고 있다. 공소 뒤뜰에 세워져 있는 대형 예수성심상은 멀리서도 이곳이 천주교 건물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해준다. 예수성심상은 2003년 공소 신자들이 공소후원회의 도움을 받아 세운 것이다.
공소로 들어가니 뜻밖에도 건물이 2동이다. 1920년 초 대구대목구장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주교가 공소를 신축할 경우 방 2개가 딸린 강당을 더 짓도록 지시한 데 따른 것이라고 한다. 사제 수급이 원활해지면 공소에 사제를 파견해 본당으로 승격시킬 요량으로 사제관을 미리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수분리가 속한 장수 지역에 언제부터 교우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1850년대경 최양업(崔良業, 1821-1861년) 토마스 신부가 전라도 지역에서 사목 활동을 하던 시기에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지역 중의 하나였으며, 이춘경이라는 교우가 1866년 병인박해 이전에 이곳에서 살았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병인박해 이후에는 박해를 피해 전국에서 피난 온 신자들에 의해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수분리 북쪽 골짜기인 막골과 남쪽 골짜기인 운학동에도 교우들이 피신해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수분리에 공소가 지어진 것은 1913-1915년쯤이다. 당시 수분리를 관할하던 함양 본당 초대 주임 이상화(李尙華, 1876-1957년) 바르톨로메오 신부와 진안 어은동 본당 초대 주임 김양홍(金洋洪, 1874-1945년) 스테파노 신부는 두 본당의 인접지인 무주 · 남원 · 임실 등지의 선교를 위하여 중간 지점인 장수면 수분리에 사제가 쉬어갈 강당과 사제관(침실)을 건립하였는데, 이는 이후 본당 설립의 기틀이 되었다.
하지만 관리가 부실해서 허물어질 위험에 처하자 1921년 공소 건물을 전면 개축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공소 신자들은 28km 떨어진 함양에서 흙기와를 구해 고개를 세 번이나 넘어가며 지게로 날랐고, 목재는 4km 떨어진 금천 앞산에서 육송을 구해 옮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