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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처절한 사랑 이윽고 월광검 소대풍이 싸늘하게 코웃음을 치고서 한마디 했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오?” 남의소녀는 이때 진원이 모두 상실되어 닭의 목을 비틀만한 힘도 없었다. 그녀는 다만 눈썹을 치켜세우며 조심스런 기색을 나타내었다. 그녀는 처연하게 웃더니 냉랭하게 말을 꺼냈다. “나의 그 두 시녀와 사형 한 분이 부근에 있어요. 이제 아마 곧 도착할 거예요.” 월광검 소대풍이 어이가 없다는 듯 박장대소했다. “허튼 수작 마오. 쓸데없는 소리에 불과하오. 호화사자(護花使者)는 모두 열양신곡에 의해 죽었소. 나는 그들이 영원히 오지 않으리라 믿소.” “아!” 남의소녀는 절망적인 소리로 길게 탄식을 했다. 그녀는 분명히 죽음의 위협을 한창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월광검 소대풍이 능청스럽게 나직한 소리로 물었다. “당신도 역시 두려움을 알겠소?” 그의 말에는 비꼬는 뜻이 숨겨져 있어 확실히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끔 했다. 남의소녀는 짐짓 모르는 척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개미 같은 하찮은 동물도 삶을 탐하거늘 하물며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야… …” 월광검 소대풍이 그녀의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안타깝다는 듯 말을 가로챘다. “낭자의 재치와 용모가 아깝구려. 나는 차마 손을 쓰기가 어렵지만, 그러나 이 일은 노부와 너무나 관계가 커서 어쩔 수 없이… …” 남의소녀는 싸늘하게 웃음을 지었다. “사람을 죽여서 입을 봉하자는 말 인가요!” 월광검 소대풍은 득의만면하게 긴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바로 그렇지. 역시 낭자는 지혜가 있어 내 뜻을 바로 알아맞히오. 나는 역시 금령대에서 일어난 이 피맺힌 일을 하나의 수수께끼로 만들어야겠소.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말이오.” 남의소녀는 그의 능글맞게 지껄여대는 모습을 보자 분노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 손을 한 번 써 봐요!” “나는 낭자가 죽기 전에 어떤 표정을 하는지 지켜보아야겠소.” 월광검 소대풍은 냉혹한 표정을 지었다.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흘리다가 느닷없이 앙천대소를 했다. 남의소녀는 그 꼴을 보다 못해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아주 대담하군. 흥! 하지만 당신의 계략은 또 쓸데없이 돼 버렸어요.” 월광검 소대풍은 지금껏 자신을 억제하여 비꼬아 주고 있었지만 이제 더 참을 수 없게 되어 오른손을 번쩍 쳐들었다. 남의소녀는 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미치광이처럼 내닫는 소대풍의 일격을 조용히 기다렸다. 이때 누군가 멸시하듯 냉소를 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마음은 독랄하게 썼지만 이 수수께끼가 벌써 풀린 것을 어찌 하리오?” 월광검 소대풍은 너무나 놀라 후딱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니 자기의 뒤에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벌써 한 사람의 문생(文生)이 업신여기는 듯한 눈초리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대풍은 놀라움을 감추며 껄껄 웃어댔다. “허허, 네 마침 알맞게 와 주었다. 내가 너도 함께 지옥으로 보내 주마.” 그는 말을 하자마자 회두시안(回頭是岸) 일 초를 펼쳐 매섭고 날카로운 바람소리를 일으키며 곧장 박애정의 가슴을 겨누어 낚아채 갔다. 순간 박애정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고의로 여자를 괴롭히려는 경박한 짓을 하려고 그러는 줄 알고 크게 꾸짖었다. “부끄러움도 모르는 천한 미치광이 같으니라고, 어디 한 번 죽는 맛이 어떤지 당해 봐요!” 박애정은 두 발을 약간 비스듬하게 디디고 쌍장을 나누어 영룡두갑(靈龍斗甲) 일 초로 전광석화같이 상대방에게 맞닥뜨려갔다. 신법이 괴이할 뿐 아니라 초식 또한 특이해서 현묘하기 짝이 없었다. 월광검 소대풍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이 일 초를 보자 깜짝 놀라 물러서며 손에 들고 있던 잔금섭혼신편을 떨쳐 연달아 삼 초를 쳐나갔다. 박애정은 잔금섭혼신편이 몰아쳐 오는 것을 보자 크게 놀라 안색까지 돌변했다. 급히 사납게 맞서지 못하고 옆으로 비스듬히 다섯 걸음 물러났다 이때 별안간 박애정의 몸이 옆으로 기울자 누군가에 의하여 한 팔이 붙잡혔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당한 나머지 가슴에다 일장으로 대고 재빨리 팔을 붙잡은 사나이를 겨누어 쳐냈다. 그러자 청풍검 선우철은 준수한 표정에 빙그레 웃음을 띠며 급히 물러났다. 박애정은 상대방을 알아보자 가슴이 섬뜩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하여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선우철이 호탕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형장은 잠시 물러나 계십시오. 나 청풍검이 월광검법을 구경하겠소.” 그는 이렇게 말하고 다시 소대풍을 향해 말을 계속했다. “소 노대, 가부가 이번에 중상을 입으신 것은 오로지 당신의 수작으로 빚어진 것이오. 나는 비록 출신이 도장맹이지만 당신의 사람됨을 지극히 미워하오. 중원 무림의 동도(同道)들은 오늘부터 당신을 적으로 삼을 것이오!”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그는 벌써 청풍검초를 발휘하였다. 그러자 몇 줄기 하얀 광채가 일어나서 월광검 소대풍의 전신에 있는 사혈을 향해 급히 뻗쳐갔다. 월광검 소대풍은 이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섬뜩했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이 많아지는 것을 알았기에 자기가 갖은 곤란을 무릅쓰고 베푼 수법이 벌써 수포로 돌아가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물러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무겁게 말을 꺼냈다. “비록 천하 무림의 눈과 귀를 막을 수는 없게 되었지만 그러나 물건은 이미 내 손에 들어왔다. 이해득실을 따지자면 결코 나에게는 손실이 많지 않은 셈이다. 이제 다만 내가 비보를 파헤쳐 내기만 한다면… …” 그는 말을 하다 말고 하얀 광채가 거의 몇 치 앞에 다가오자 발을 앞으로 내디디고 몸을 비틀어 상대방의 청풍검을 피했다. 그리고는 오른손으로 휙 소리가 나도록 신룡출운(神龍出雲) 일 초를 펼쳐 매섭게 공격해왔다. 장풍의 매서운 기세는 산을 무너뜨릴 듯 바다를 뒤집을 듯 그야말로 강맹하기 짝이 없었다. 청풍검 선우철은 공력이 기절(奇絶)하여 당대 고수의 대열에 들었으나 월광검 소대풍이 워낙 일대의 마두이기에 소대풍의 공력이 그보다 훨씬 높았다. 그는 감히 사납게 그에게 부딪쳐 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급히 신형을 물리치고는 청풍검을 거두고 기본적인 수세를 취하며 산악과 같이 우뚝 섰다. 월광검 소대풍은 그가 이런 자세를 취하는 것을 보고 길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한 걸음 먼저 물러가겠다.” 그는 신형을 한 번 떨쳐 마치 무지개처럼 번쩍 움직여 급히 지령보 쪽을 향해 달려갔다. 청풍검 선우철이 다급한 어조로 외쳤다. “노적(老賊)은 달아나지 마라. 우선 잔금섭혼신편을 남겨 놓아라.” 하얀 광채가 번쩍이는 순간 이미 유운비검(流雲飛劍)의 절기를 발휘하여 그는 바로 월광검 소대풍을 뒤쫓아 갔다. 이때 박애정이 남의소녀의 곁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상처가 어떤가요?” 남의소녀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괜찮아요. 오늘 만약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살아남지 못했을 거에요.” 박애정이 쓸쓸하게 웃었다. “오늘 만약 좋은 운수가 아니었다면 내 어찌 이런 솜씨를 쓸 수 있었겠소?” 이렇게 말하면서 시선을 비류신에게 돌렸다. 이때 비류신의 기혈은 숨을 쉬는 것이 약간 무거워 보이는 것 외에는 조금도 부상을 입은 것 같지 않았다. 남의소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의 공력은 내가 상상한 이상이었어요. 오늘 만약 선천이 고의로 나를 놓아주지 않았더라면 그 뒤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는 나로서도 상상할 수 없어요.” 도장맹주 선우휘는 몸을 약간 움직이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비류신 역시 깨어났다. 뒤이어 지신도 소대천, 풍운류랑인 고화룡이 정신을 차렸다. 갑자기 귀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금령대 아래쪽에서 두 번 울려 사람들의 심신을 진동시켰다. 금령대 위의 군웅들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순천진인과 신독괴살수가 머리를 산발한 채 안구가 불거지고 입가에는 선혈을 흘리면서 마치 미치광이처럼 쌍쌍이 금령대 위로 덮치듯 올라왔다. 박애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하는 수 없이 두 팔에다 공력을 끌어 모아 은근히 경계 태세를 취했다. 무공이 절정에 이른 두 명의 고수들은 안색이 맹수같이 흉악하니 그 모습은 마치 여러 사람들을 씹어 삼킬 듯 했다. 남의소녀가 길게 탄식을 했다. “두 사람의 마음은 이미 열양신곡과 절명곡에 의해 훼손되었어요. 그러니 적인지 우군인지 가릴 수도 없이 그들의 몸에 접근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헤치려 할 것이니 먼저 그들 두 사람을 죽여 버리는 것이 상책일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은 모두 그들로부터 해를 입을 거예요. 박 노제, 어서… …” 박애정은 그녀의 특별한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녀가 말 속에 담고 있는 뜻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장내에서는 인성을 상실한 두 마두에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뿐이어서 다른 사람은 이 둘을 제압할 힘이 없다는 것이었다. 박애정은 도장맹주 선우휘의 구멍이 다섯 개 난 괴검을 주워들고 말했다. “낭자, 마음을 놓으시오. 두 사람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는 두 소매를 바람으로 활짝 펼치더니 급히 두 줄기 하얀 광채를 쏘았다. “으악!” 비명과 동시에 순천진인의 몸이 갑자기 지면으로 거꾸러졌다. 또 다시 하얀 광채가 폭발하여 나타나고 처절한 외침이 일자 신독괴살수의 커다란 머리가 땅으로 굴러 떨어졌다. 하얀 광채가 사라지고 청풍검 선우철은 벌써 단검을 소매 속에다 거두어들인 뒤 태연자약한 태도로 미소를 지었다. 박애정은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누가 당신더러 대신 수고해 달랬소? 정말 쓸데없이 나에게 인정을 많이 베푸는구려. 그래 가지고… …” 말을 하던 중 갑자기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는지 움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신 스스로 이 순간 어찌 이런 말로써 신분을 탄로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두 볼이 붉어져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청풍검 선우철이 코웃음을 쳤다. “나는 결코 당신 때문에 손을 쓴 것은 아니요. 사실 여러 사람들의 안위를 염려하여 그런 생각을 한 것… …” 남의소녀가 속을 빤히 알겠다는 듯 냉소를 쳤다. “입으로는 달작지근한 말을 지껄이지만 뱃속에는 칼이 들어있는 사나이로다!” 이 말에 청풍검 선우철은 몹시 당황하였다. 그녀가 너무나 당돌하게 자기를 무시하고 말했기 때문에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몸을 돌려 도장맹주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선우휘는 이미 운기조식이 끝난 듯 사랑하는 아들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표정이 한 번 격동하더니 입을 열었다. “철아, 이 아비는 너를 못 볼 줄 알았구나.” 선우철 역시 격동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아버님, 이 자식은 하마터먼 급살당할 뻔했사옵니다.” 이렇게 말하며 그는 손을 뻗쳐 선우휘를 부축했다. 부자 두 사람은 곧 몸을 일으켜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선우철은 비류신을 향해 말을 꺼냈다. “비형, 나는 먼저 가겠습니다. 그렇지만 가부의 상처가 낫는 대로 나는 곧 비형을 찾아서, 정말 어느 하늘가에 있더라도 꼭 찾아서 같이 천하를 호령해 볼 작정이오.” 비류신은 두 부자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쓸쓸히 웃으며 대꾸했다. “소제는 잠시 부주의해서 하마터면 주화입마(走火入魔)할 뻔했소. 이제 가까스로 몸을 움직일 수는 있지만, 그러나 두 분을 전송하지 못하는 것을 널리 양해해 주오.” 선우휘와 선우철은 동시에 그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고 몸을 돌이켜 멀리 사라져 버렸다. 남의소녀는 별안간 고화룡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건넸다. “고화룡, 당신도 역시 나를 따라 궁으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풍운류랑인 고화룡은 처음에 무슨 말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한 듯 두 눈을 껌벅거리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억지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그러지요, 소저.” 남의소녀는 불현듯 무엇을 생각한 것처럼 눈에서 기이한 광채를 뿜어냈다. 그리고 뚫어지게 비류신을 바라보았다. 얼마 뒤 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비 노제, 우리는 언젠가 또 나중에 만날 기회가 있을 거예요. 아! 사랑과 한은 본래 무슨 엄격한 차이가 있는 게 아니에요. 노제의 마음속에 사랑이 있으면 곧 그것이 사랑하는 것이고, 한이 생기면 그것이 곧 한 이구요. 하지만 노제는… 너무 정을 쏟아 일하지 마세요.” 박애정의 얼굴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해 일정하지 않았다. 마치 어떤 하나의 일을 결정하기 직전의 그 고심하는 경우에 부딪친 것 같았다. 풍운류랑인 고화룡은 남의소녀에게 동행할 뜻을 표하고 이제 그녀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큰 호통소리가 들렸다. “멈추시오!” 비류신의 얼굴에 살기가 역력하게 어려 있었다. 그는 꼿꼿하게 몸을 세우고 노한 눈을 부릅뜨고 남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부리부리한 눈에서 노기어린 광채가 뿜어 나오고 있었다. 남의소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냉소를 쳤다. “당신은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비류신은 차가운 음성으로 대꾸했다. “고 선배를 남겨 두시오!” 그의 무뚝뚝한 대꾸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마구 깔깔대고 웃었다. 아주 그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는 그런 태도였다. “좋아요, 하지만 당신은 그를 붙들지 못할 걸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정말 유유히 혼자 갔다. 비류신은 자신도 모르게 어리둥절해졌다. 한쪽 곁에 서 있던 박애정 역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회의에 찬 눈길을 그녀의 등 뒤에다 못 박고 있었다. 오도 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던 고화룡이 얼굴을 씰룩거리면서 처참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어떤 결심을 한 것 같았다. “비 노제, 이 일은 당신과 관계없는 것이오. 그러니 노제는 더 이상 상관할 생각을 마오. 게다가 우리들 사이의 은원 관계는 다른 사람이 절대로 간섭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오. 노제의 이런 따스한 정은 다만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겠소.” 말을 마친 뒤 그는 신형을 솟구쳐 급히 남의소녀를 따라갔다. 비류신은 그가 기어코 고집을 꺾지 않는 것에 대해 탄식을 하면서 고개를 들어 한가로이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는 천만가지의 생각과 정서가 뒤얽히고 맴돌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는 혼자 중얼 거렸다. “아! 이 일의 내막이야 어떻든 내 기어이 고 선배를 구해야겠다.” 갑자기 비류신의 뒤에서 끔찍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이 소리는 비록 귀를 찢을 듯 날카롭기는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결코 남자의 웃음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비류신은 대경실색해서 고개를 돌려보았다. 박애정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듯 원한의 기색을 띠고 사나운 눈초리로 자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비류신은 얼떨떨함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 “이 형장은 알 수 없는… …” 박애정이 냉소를 터뜨렸다. “고개를 들고 나를 똑똑히 보시오!” 비류신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토록 큰 소리를 치는 까닭이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아예 아랑곳 하지도 않고 마음속으로 불쾌하게 여기며 코웃음을 쳤다. 이윽고 그는 냉소와 함께 싸늘한 두 눈길로 자색의 번개처럼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비류신은 깜짝 놀랐다. ‘박애정이 꼭 누군가와 닮았는데… …’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싸늘하고 오만하게 코웃음을 쳤다. “나는 아직 일을 다 끝내지 않았소. 그러니만큼 나에게는 이렇게 영문도 모른 채 당신과 다툴 한가한 시간이 없소.” 그는 말을 끝내자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듯 서슴지 않고 몸을 돌이켜 걸음을 옮겼다. 이때 인영 하나가 번쩍이자 어느새 박애정이 비류신의 앞을 가로 막았다.그는 크게 노하여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무서운 눈초리로· 앞을 가로막은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박애정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풀 죽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당신은 정말 나를 잊어 버렸군요.” 비류신은 상대방의 쓸쓸한 모습을 기이하게 여기며 말했다. “나는 확실히 알 수가 없소.” 갑자기 찰싹찰싹 잇달아 두 번의 맑은 음향이 울렸다. 비류신은 뜻하지 않게 귀 언저리를 세차게 맞고 화가 치밀었으며 한편으로는 멍하여 어쩔 줄 몰랐다. 잠시 후 그는 정신을 차리고 무섭게 부르짖었다. “당신이 감히 나를 때리다니!” 그는 참지 못해 커다란 손바닥으로 박애정의 왼뺨을 번갈아가며 대 여섯 번이나 세차게 때렸다. 박애정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그는 처참하게 한 번 울부짖더니 얼굴을 감싸 안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비류신으로서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결과였다. 칠 척 체구의 당당한 사나이가 이토록 형편 없으리라고는 짐작을 못했다. 뺨을 몇 번 맞는다고 눈물을 줄줄 흘릴 줄이야. “내 이럴 줄 미리 알았더라면 이 따위 사나이를 결코 때리지 않았을 텐데.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나이를… …” 박애정은 마치 무협(巫峽)의 원숭이가 울부짖듯, 두견새가 피눈물을 흘리듯 처량하게 흐느껴 울며 좀처럼 그칠 줄 몰랐다. 원망스러워 내뱉는 말 또한 울음으로 범벅이 되어 제대로 알아들을 수조차 없었다. “때리시오. 실컷 때려 나를 죽이시오. 죽는다면 차라리 당신의 무정 때문에 겪는 고통보다도 차라리 더 나을지 몰라. 비류신, 나를 더 때려 주오.” 비류신은 뜻밖에도 이런 상황에 부딪히자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은 보아하니 아무래도 가벼이 눈물을 흘릴 그런 비천한 무리는 아닌 것 같군.혹시 이 위인은 나와 동병상련의 관계에 있는 사람인가? 그래서 차마 입을 열어 말하지 못할 한스러운 정이 있는 것이 아닐까… …’ 여기까지 생각을 하자 그는 얼른 겸연쩍은 얼굴로 말을 꺼냈다. “형장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감정이 상했소?” 박애정은 그 말을 들으니 더욱 마음이 쓰라렸다. 마치 칼에 에이는 것 같아서 전신에 경련이 일어났다. 그는 눈물이 어린 눈으로 원망스럽게 비류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정말 명실 공히 여인의 마음을 저버리는 사람이오.” 그는 말을 끝내자 대뜸 머리에 쓴 문생 건(巾)을 벗었다. 순간 윤기 흐르는 긴 머리채가 바람에 날려 수면에 얼굴을 내미는 부용처럼 비류신의 눈앞에 나타났다. 비류신은 너무나 놀라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실로 천만뜻밖의 일이었다. 박애정은 결국 비녀를 꽂는 대신 건을 쓰고 남장을 한 여인이었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 박애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처참하게 웃었다. “나는 홍부용이에요. 비천한 일생의 여자에요. 당신의 안중에는 아무런 가치도 서지 않는 그런 사람이에요.” 비류신은 마음 가득한 죄스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확실히 그녀를 너무 모른 체했다.하지만 자기는 강호에 빌을 디딘 이래 쓰라린 경험을 한데다, 비할 수 없는 한스러운 정을 지닌 몸인데 어찌 일개 소녀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자위했다. 그는 약간 두려워하는 듯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홍 남자의 마음은 정말 깨끗하고 순결하오. 나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거늘, 감히 어찌… …” 만화신검 홍부용은 비류신을 본 뒤 그의 모습을 마음 깊이 새겨두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고아한 개성을 존중하고 때때로 그의 위엄을 갖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곤 했다. 그녀는 비류신과 함께 수로에서 생사를 같이 한 이래 더욱 그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비류신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그 기한(奇恨)을 씻을 수 없었으며 그 원수를 잊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그녀의 사랑을 딱 잘라 거절해 버렸던 것이다. 만화신검 홍부용은 그에 대한 사랑으로 상처가 심한 나머지 이미 비류신에 대한 마음은 저주에 가까웠다. 그러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녀는 결국 이름까지 박애정(博愛情)이라 고치고 기막힌 비분을 안고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사랑하는 낭군 비류신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그녀는 비류신에게 형언할 수 없는 일종의 고충이 있어서 그렇지, 결코 그의 진정은 이렇게 박절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다. “난륜(亂倫), 난륜이다!” 눈에 거슬려 오는 이 글자, 귀를 아프게 하는 그 소리. 정말 비류신의 속마음은 난륜의 큰 죄로 찢어지는 듯했다. 아무리 하늘에 빈다 해도 용서받지 못할 큰 죄를 그는 저질렀다. 그의 어미와 육체적 관계를 맺지 않았던가! 그는 날마다 고통의 심연 속에 빠져 처절한 죄의 상황을 돌이켜 보았다.이것은 본래 그의 본의는 아니었다. 그러나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홍부용은 쓸쓸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비류신, 당신은 정말 독살스러운 마음을 가진 사나이군요. 당신은 나를 속였어요. 당신은 내 마음은 빼앗아갔어요. 아니, 나의 모든 것을 가져갔어요. 만약 당신과 내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토록 슬픔이 지긋하겠어요?” 비류신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순간 몹시도 고통스러웠다. 다만 그러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악착스레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기왕 아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연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거예요? 혹시 나의 용모가 너무 못 생겨서 당신의 짝이 될 자격이 없단 말이에요? 비류신, 나는 당신을 원망해요. 하지만 당신을 사랑하기도 해요. 당신은 항상 나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고, 그러나 당신에 대한 사랑보다는 원망이 더 많이 차지하는 것 같아요.당신은 나의… 아시나요?” 말이 여기에 이르자 나중에는 거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 목소리는 작아질수록 그만큼 그녀의 비통함도 더해졌으리라. 여자란 확실히 이렇게 마음이 좁다. 사랑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영원히 인내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여인은 애정을 잃으면 무슨 말이든 다 입 밖으로 뱉어내야 속이 시원한 모양이다. 홍부용이 지금 바로 그런 심경이었다. 비류신 역시 그녀의 지극한 정을 느끼자 온갖 느낌이 동시에 엇갈리며 일어났다.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자 한에 한이 쌓여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날카로운 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왜 말을 하지 않는 거예요?” 비류신은 얼떨떨하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눈을 껌벅거리며 되물었다. “당신은 나보고 무슨 말을 하라고 하오?” 홍부용은 매서운 말투로 대꾸했다. “말하면 안 될 어떤 사정이 있는가 보군요?” 비류신은 마음속이 움찔했다. 이 한마디 말은 다시 비할 바 없는 음한의 감정을 일으키게 했다. 그는 지금까지 내내 참아왔다. 다만 그녀에게 약간 죄스러운 느낌이 있을 뿐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 그는 정말 분노가 치솟았다. 그는 사나운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입 닥쳐!” 그녀는 서슴지 않고 대꾸했다. “당신이 말을 못하게 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 말할 테에요.” 비류신은 너무도 화가 난 나머지 그녀에게 쏘아붙였다. “네가 감히!” “무엇이 감히 란 말인가요?” “시끄러워… …” 비류신은 오만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미 자기의 불길 같은 분노를 누를 길이 없어 손을 들어 홍부용의 뺨을 쳐갔다. 이 일장은 분노에 휩싸여 내뻗친 것이기에 조금도 사정을 봐준 것이 아니었다. 홍부용은 그의 기세를 보고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정말 지독해요.” 그녀는 이 한마디를 할 뿐 피하거나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냥 앞가슴을 위로 떡 버티고 눈을 감은 채, 목을 길게 빼고 그의 손을 기다렸다. 비류신은 움찔했다. 그는 속으로 깊이 탄식하면서 도리 없이 손을 움츠려 들었다. “네 감히 이 노마님의 마음을 건드리려 하다니!” 그와 동시에 홍의의 아름다운 여인이 눈썹을 치켜 올리고, 노하지 않아도 저절로 위엄을 느끼게 하는 그런 자태로 나타났다. 이 사람은 바로 천하에서 그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하는 빙화동주(永花洞主)이며 홍부용의 스승인 백화선녀(百花仙女)였다. 그녀가 신형을 멈추자 홍부용은 벌써 그녀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흐느껴 울었다. 가슴 가득 북받쳐 오르던 억울함과 갖가지 회포가 모두 울음소리를 통하여 발설되기 시작했다. 백화선녀는 비류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부용, 저자가 바로 그 사람이냐?” 만화신검 홍부용은 가볍게 고개를 끄떡일 뿐 계속 흐느껴 울었다. 비류신은 여자가 비통하게 흐느껴 우는 것을 제일 싫어하기 때문에 싸늘하게 코웃음을 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백화선녀는 그가 자기를 거들떠보지도 않자 자신도 모르게 크게 노하여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순식간에 한 층의 서리가 그녀의 얼굴을 덮은 듯 무겁게 차가워지면서 그녀는 한 걸음을 옮겨 홍부용을 밀어버렸다. 그녀는 냉랭한 소리로 꾸짖기 시작했다. “그 오만한 태도를 보아하니 전문적으로 여인을 망치는 위인이라는 것을 알겠다. 이 노마님은 평생에 후배와 더불어 손을 쓰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오늘 제자를 위해 할 수 없이 전례를 깨뜨려야겠다.” 비류신은 그 말을 듣자 한층 더 화가 치밀었다. “흥, 일부러 농담할 필요는 없지 않소? 당신에게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위맹한 재간이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소.” 그리고는 쌍장으로 수세를 취하니 그 위세는 백화선녀에 의해 조금도 피해를 입을 것 같지 않았다. 백화선녀는 싸늘하게 비웃었다. “나의 제자가 어디가 못나서 그래 여태껏 백안시했느냐?” 비류신도 역시 냉소와 함께 대꾸를 했다. “천하에 사나이들이란 해변의 모래알보다도 많소. 당신의 제자는 어찌하여 남자를 고르지 않고 하필 왜 나를 사모하여 끈질기게 버리지 않는 것이오? 이것이 빙화동의 규칙이오?” 백화선녀는 오히려 비류신에 의해 말문이 막혀 한동안 대꾸를 못했다. 그녀는 숨을 거칠게 쉬며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파렴치한 녀석, 너는 죽어 마땅하다.” 붉은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바람을 내며 옥장(玉掌)을 펴서 바로 비류신을 향해 거머쥐어 갔다. 곁에 있는 홍부용은 상심하여 애간장이 다 녹는 것 같았다.그녀는 마침내 실신하여 하늘을 우러러 슬프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너무나 처절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등골이 오싹하게 할 정도였다. 분명히 그녀는 그가 아니면 시집을 갈 수 없는 애정의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 같았다. 비류신이 조금 전 그렇게 냉혹한 말을 하며 악의를 덧붙이기까지 한 까닭은 사실 자기 자신의 입장이 난처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홍부용의 꽃다운 마음을 비통하게 자극했던 것이다. 비류신은 백화선녀가 손을 뻗쳐오는 것을 보자 길게 부르짖고는 손을 휘둘러 삼 초를 쳐냈다. 백화선녀가 코웃음을 쳤다. “너 어디 한 번 죽어봐라.” 그녀가 옥장을 젖히니 온 하늘을 뒤집는 듯한 경기가 허공을 깨뜨리는 소리와 함께 세차게 몰아쳐 왔다. 이것이 바도 천하 무림 인물들의 간담을 싸늘하게 하는 매살장이었다. 분명 자기의 뛰어난 재간을 발휘했다. 별안간 이때 만화신검 홍부용이 숨이 넘어가는 듯 무섭게 소리쳤다. “스승님, 그를 상하게 하지 말아요!” “그는 여태껏 네게 아주 냉정하게 대했거늘 아직도 너는 그에게 정이 남아 있단 말이냐.” 백화선녀는 홍부용의 말에 대꾸를 하고는 오히려 손에다 삼성의 진력을 더했다. 눈앞에 벌어진 상황으로 보아 확실히 그녀는 비류신을 사지에 몰아넣어 마음의 한을 씻으려는 것 같았다. 휙 하는 소리가 나는 순간 홍부용은 비명을 지른 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감히 눈을 바로 뜨고 볼 수 없었다.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짐과 동시 비류신의 신형은 허공으로 붕 떠올랐고 홍부용은 소스라치게 놀라 경악의 탄성을 질렀다. 백화선녀는 비류신을 격퇴시켜 멀리 날려 보내기는 하였으나, 그와 동시에 자신의 팔목 역시 시큰거려 맥을 못 추게 되자 내심 크게 놀랐다. 비류신은 본래 부상을 당한 몸인지라 상대방의 신랄한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곧 기절하고 말았다. 이때, 한 줄기 인영이 번쩍하더니 그야말로 번개보다 빠른 동작으로 비류신을 들어 안았다. 백화선녀는 매서운 눈초리로 뜻밖의 출현자를 노려보며 앙칼지게 외쳤다. “누구냐?” 바람같이 나타난 청의여인은 날카로운 어조로 대꾸하였다. “당신은 그런 것을 물을 자격이 없어요.” 이때 만화신검 홍부용이 백화선녀를 향해 황망히 외쳤다. “그 여자가 바로 청색혈마에요.” 백화선녀는 돌면 깔깔대고 웃었다. “호호홋… 난 또 누군가 했지. 알고 보니 최근 무림 천하에 쟁쟁한 명성을 떨친 청의 여협이구먼! 으흠,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더니 여태 소문으로만 듣다가 막상 대하고 본 즉 실로 감개가 무량하이.” 청색혈마는 비류신의 얼굴이 온통 새까맣게 변하고 입 가장자리에는 아직도 핏자국이 번져있는 터라 적이 원망스러운 듯 백화선녀를 노려보며 쌀쌀맞게 따져 물었다. “왜 이 사람에게 이토록 엄중한 부상을 입혔지요?” 백화선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가셨다. “부상을 입히든 말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 청색혈마는 비류신을 다시 땅 위에 내려놓더니 애상과 분노가 뒤범벅이 된 묘한 표정을 지은 채 처절하게 부르짖기 시작했다. 홍부용은 그녀의 처절한 부르짖음에 동정을 금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기 스승인 백화선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재촉했다. “스승님, 이제 그만 가시지요.” 백화선녀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청색혈마를 노려보며 언성을 높였다. “버르장머리 없이 고인(高人) 앞에서 인사도 않는구나. 이런 법이 어디 있지?” 일순 청색혈마는 오른손을 쳐들어 보이며 서릿발같이 차가운 냉소를 머금었다. “이게 무엇인지 아시나요?” 그녀가 내보인 손바닥은 유난히도 깨끗하여 마치 백옥으로 다듬은 것처럼 광택이 났다. 백화선녀는 청색혈마가 그런 거동을 취하자 내심 소스라치게 놀랐다. ‘음… 빙선일월장(永禪日月掌)!’ 그녀가 신음을 하듯 이렇게 뇌까리자 청색혈마는 냉담하게 말을 막았다. “그래요! 나는 빙선일월장으로 당신을 죽여야 되겠어요!” 백화선녀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녀는 무림칠절 중 네 번째에 속하는 고수로서 매살장이라는 절예를 지녔으나, 빙선일월장과는 비교도 안 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놀라움과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백화선녀는 두려움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았다. “당신은 빙선일월장이 얼마만큼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최소한 육성 내지 칠성이오. 좌우간 당신쯤은 전혀 힘들이지 않고 물리칠 수 있으니 그런 줄만 알아요.” 이 한마디는 백화선녀를 더욱 질리게 하였다. 그녀는 빙선일월장의 세력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 기묘한 장법은 이백 년 가까운 전통을 지닌 절학으로써 강호의 일류 고수들 중에서도 그 절묘한 장법에 맞서 대항할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었다. 방금 청색혈마가 말한 최소한 육성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절묘한 장법을 이미 육성 이상이나 연마했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 위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백화선녀는 내심 무척 불안했지만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고 냉담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좋소! 그럼 손을 쓰시오!” 그녀는 수십 넌 간에 걸쳐 꾸준히 수련해 온 내가(內家)의 진기를 모두 끌어올린 채 매우 단정하고 침착한 태도를 취하고서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그들 두 여협의 일거일동을 주시하던 만화신검 홍부용은 사태가 이에 이르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일찍이 비류신, 선우철 등과 함께 묘지에 갔을 때 청색혈마의 잔인한 수법과 심후하기 이를 데 없는 공력의 위세를 직접 목격하였기 때문에 자기들 사제 간이 아무리 기를 쓰고 상대해 봐야 도저히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청색혈마가 사사건건 비류신을 극진히 위하는 점으로 보아 그들의 관계는 아무래도 보통이 아닌 듯하였다. 그런데 지금 비류신은 백화선녀에 의하여 엄중한 부상을 입었으니 청색혈마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할 것인가? 본래 무공이 시원치 못한 인물이라도 일단 격노하게 되면 상상 외로 무서운 법인데 하물며 청색혈마와 같은 절세적인 고수야 말해서 무엇 하랴.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