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구약성경 인용)
요한복음 12장 37-40절『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호 로고스 에사이우 투 프로페투)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테 아코에 헤몬)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브라키운 퀴리우 티니 아페칼뤼프데) 하였더라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테튀플로겐)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에포로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이아소마이 아우투스) 하였음이더라.』
이는 이사야 6장 9-10절의 인용의 글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웃시야는 남과 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 중, 남유다 왕국의 11번째 왕이다. 그는 16살이 되던 해인 주전 790년부터 739년까지 52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렸다. 웃시야 왕은 하나님을 잘 믿는 왕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형통하게 만드셨다. 그러나 웃시야 왕은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했지만 산당은 제거하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향했다. 백성들은 여호와의 전에서는 이방신을 믿지 않았지만 지방의 산당에서는 이방신에게 제사를 했던 것이다.
웃시야왕은 “하나님의 묵시를 잘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대하26:5) 그러나 웃시야왕은 그의 통치 말년에 제사장에게만 허용된 제사장직을 범함으로서 신성 모독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당시 제사장이었던 아사랴가 제사장 중 용맹한자 80 명을 데리고 따라 들어가 저지하였으나, 웃시야왕은 권력을 이용해 저지하는 제사장들에게 떠나라는 명령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계속 제사행위를 했는데, 결국 하나님의 진노로 문둥병에 걸려 왕좌에서 물러나 죽기 전까지 별궁에서 거하는 불행을 겪게되었다.(왕하15:4-7, 대하26:16-23)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비참하게 삶을 마감해야 했던 웃시야 왕이 죽은 그 해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이사야는 신비한 경험을 했다. 하나님께서 높은 보좌에 앉으셨고, 스랍 천사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있었는데, 이사야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스랍 천사 하나가 제단에서 불이 붙은 숯을 젖가락으로 가지고 와서 이사야의 입에 대니 악이 제하여지고 죄가 사해졌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선지자 중에 누구를 보내야 할 것인데, 누가 갈것인가 물으니 이사야가 자기가 가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사야 6장 9-10절의 말씀을 하시면서 성읍들이 황폐할 때까지라는 것이다. 6장 13절에서『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이 땅이 황폐해 질 때까지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고 영적 귀가 없어서 듣지도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씨가 있다는 말로 끝난다.
예수님의 비유를 들은 자들은 주의깊게 말씀을 들었는데, 들을 귀를 가진 자들 즉, 진정 진리를 찾는 자들은 그것을 찾을 것이고, 더 많은 것을 누릴 것이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그들의 불신과 무관심을 통해 이사야의 예언을 이룰 것이다.
마가복음 4장 12절, 누가복음 8장 10절은 마태복음 13장 14-15절과 같은 역사적인 맥락을 묘사하고 있다. 요한복음 12장 40절의 말씀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 마지막 주의 그 분의 사역에 적용한다. 예수님의 승리의 입성 사건은 이미 일어났고, 자신이 많은 표적을 행하셨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을 믿지 않는다고 청중에게 말씀하고 있다.
사도행전 28장 26-27절에서도 이사야서 6장 9-10절의 말씀이 인용되고 있는데,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바울은 전한 말씀에 단지 일정한 수의 사람들만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고, 나머지 청중은 믿기를 거부했다. 바울은 그들의 조상이 불신으로 이사야의 말씀을 성취했던 것처럼 그들도 불신으로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복음이 이제 이방인들에게로 갈 것이라고 바울은 확언했다.
이사야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거부했고, 그래서 그가 전한 말씀이 성취된다. 이사야의 말씀은 유대지도자들이 바울의 메시지를 거부했던 기원 후 61년 다시 성취되는데, 신약의 이사야 6장 9-10절의 사용에 대한 종합적 증거는 두가지 중요한 진리를 제공한다. 예수님의 비유들은 두가지 목적을 이루는데, 첫째, 들을 귀를 가지고 있고, 그 분의 가르침을 적용했던 사람들은 좀 더 많은 계몽을 받고 좀 더 많이 이해하게 된다. 그 분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자들은 그들이 가진 적은 것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둘째, 세기를 걸쳐 내려보면서 각각의 세대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그렇게 할 때 그들은 이사야의 말씀을 재차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그럼으로서 더 많은 것을 얻는 것이다.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거룩한 씨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부정한 입술을 가진 이사야가 스랍천사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었지만, 백성들은 이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예수님도 수많은 표적으로 유대인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전했지만 듣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경고의 말씀을 하시고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고, 십자가의 사역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육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죽음 앞에서는 연약해지는 모습을 본다. 죽어있는 그루터기에서 거룩한 씨가 나왔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부활생명이 나온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황폐화된 이스라엘을 나타내지만, 오늘날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도저히 불가능한 그루터기에서 거룩한 씨가 나오듯이 십자가의 죽음에서 영광스러운 부활생명이 나온다는 것을 믿는 자는 영안이 열리고, 영적 귀가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달아 고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2장 37-40절의 내용은 마치 하나님이 고의적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으나, 백성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려는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스스로 죄인의 모습으로, 그루터기에서 한 거룩한 씨가 되어 백성들에게 구원의 메시야로 등장하시는 것이다. 백성들은 메시야(그리스도)를 거부했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정하신 뜻을 실행하시는 것이다. 그 뜻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다.
오늘날에도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을 외쳐도, 신도들 중에는 들을 귀가 없는 자들은 이를 믿지 않는다. 마음이 황폐헤질 때까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것이 믿음인데, 그들 마음에는 현재적 부활이 마음에 와 닫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은 마치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처럼 강하게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