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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새벽 26
서현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한 눈에 들어오는 하진을 보며 웃는다.
아침에 검은 정장 바지 위에 옅은 푸른색 셔츠를 받쳐입은 하진을 보면서
서현은 하진에게 푸른색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칭찬에 인색하지 않은 서현의 '언니, 오늘 많이 이뻐요.'라는 말에
하진은 멋적은 웃음을 지으며 핸들을 쥐었다 놓았다 했다.
걸어오는 서현을 보면서 하진이 손을 들어보인다.
팔꿈치 아래까지 걷어올려져 있는 셔츠 소매는
하진이 오전 업무를 열성적으로 해치웠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 하다.
- 언니, 금방 내려온다고 해놓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 아니. 매일 아침의 기다림에 단련돼서 이 정도는 가뿐하지.
- 으읏.. 더 미안하게 만들 거예요?
- 미안하라고 한 말이니 마음껏 미안하게 생각하도록.
가끔씩 무표정하게 던지는 하진의 농담이 서현은 즐겁다.
- 이거 사죄의 뜻으로 드릴게요. 봐줘요.
서현은 두 손바닥을 펼쳐 쭈욱 내밀며 웃음을 빼어문다.
손바닥 위엔 초컬릿이 올려져 있다.
내게 주려고 했던 것이 초컬릿이었나?
하진은 단 음식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단 것 뿐만이 아니라 맵고 짠 자극적인 것보단 심심하고 담백한 음식을 선호한다.
- 초컬릿 먹는데 언니 생각이 나서요.
하진이 선뜻 집어들지 않자 서현은 얼른 덧붙여 설명한다.
그제서야 하진은 슬며시 웃으며 초컬릿을 집는다.
- 잘 먹을게.
- 언닌 초컬릿을 싼 은박 포장지 같아요.
하진의 의아한 표정에 서현은 잠시 생각하는 듯 입술을 쫑긋 내밀며 눈을 깜박인다.
- 설명하긴 힘들어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헤헷. 언니 저 이만 올라가볼게요. 어어, 같이 타고 가요!
서현의 외침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다가 열린다.
서현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다가 잠시 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드느라
지나가던 사람과 어깨가 부딪힌다.
- 저런..
하진은 한쪽 눈을 감으며 중얼거린다.
- 미안해요!
서현은 우렁찬 목소리로 사과를 하고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쏙 들어간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서현이 생긋 웃음을 보낸다.
하진은 검지와 중지로 이마를 긁적이며 소리내어 웃는다.
정말 못 말리겠다, 꼬마야.
*
- 서현씨, 멋지던데? 샤프하고 이지적이고.
그래서 전에 내가 사촌동생 소개해 준다고 했을 때 뺐구나?
사무실로 들어서는 서현에게 동료가 의미 있는 웃음을 보낸다.
- 네?
- 누구야? 애인? 두 사람 잘 어울리던데?
- 누구요?
- 에이, 아까 로비 지나가면서 봤어. 이실직고해봐.
- 푸후! 하진 언니 말씀하시는 건가보네요.
하진이라는 이름에 도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영민이 고개를 들어 서현을 바라본다.
- 언니? 여자야?
- 네. 그렇게 안 보여요?
- 음.. 그러고보니 여자 같기도 하다.
요샌 왜 꽃미남이니 뭐니 해서 여자 같이 곱상한 남자도 많아서 착각했어.
후훗.. 부럽다. 요즘은 양성성을 가진 사람들이 어필하잖아.
딸이라고 인형 사주고 아들이라고 자동차 사주는 것도 옛말이지.
우리 언니도 딸 하나 낳아서 잘 키울 거라고 애한테 하는 거 보면
아주 팔방미인 만들려고 난리도 아니에요.
발레에 검도에 웅변에 영어에. 말도 못 해. 애 잡지 잡어.
아.. 무슨 얘기하다가 갑자기 이런 얘기하고 있지?
아, 그래. 아무튼 아까 그 사람 매력 있더라.
나 고등학교 다닐 때 보이쉬한 친구 하나 있었는데 갑자기 걔 생각나네.
애들한테 인기 정말 많았어. 물론 나도 좋아했고 말이야. 다 한 때지 뭐.
아아. 여고시절.. 돌아가고 싶다. 소녀의 로망!
수다를 떨던 동료는 아련한 표정으로 눈을 감으며 두 손으로 턱을 받친다.
- 그 소녀 어디 갔대요? 본 사람 없대요?
서현은 쿡쿡 웃으며 책상 앞에 앉는다.
- 그러게. 소녀는 어디로 가고 노처녀 명찰만 남았네.
엄마 등쌀에 이번 주말에도 선 보러가요.
동료는 지겹다는 듯 이마에 주름살을 만들며 눈을 뜬다.
- 에엣. 스물 일곱이 무슨 노처녀예요? 너무해요.
- 몰라요. 일 하는 게 차라리 낙이지. 에휴.
동료는 펜을 집어들고 머리를 책상 위로 푹 숙인다.
서현은 그런 그녀를 보며 웃다가 영민과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 해보인다.
- 서현씨, 아까 프로젝트 자료 다시 보여주시겠습니까?
영민은 웃으며 안경을 고쳐올린다.
- 네.
서현이 프린트 된 서류를 들고 영민의 책상 앞에 선다.
- 서현씨, 아까 경화씨랑 얘기할 때 하진.. 이라고 한 거 같은데 맞는지요?
- 네. 왜요?
- 내가 아는 사람인 거 같아서 반가운 마음에..
영민이 자료를 대충 보고 덮으며 말한다.
- 허대리님, 하진언니 아세요?
- 대학동창. 그런데 서현씨 사적인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 뭔데요?
- 그 친구.. 아니, 됐습니다. 사적인 얘기는 사석에서 하죠.
영민이 서류를 서현에게 건넨다.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네. 하고 웃고는 돌아서는 서현에게서 좋은 냄새가 난다.
안경을 닦는 척 하며 서현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바라보던 영민은 지갑에 넣어둔 하진의 명함을 꺼낸다.
- 많이 보고 싶었다, 이 녀석아.
하진의 명함을 들여다보며 작게 중얼거리는 영민의 입가로 미소가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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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등장인물들 이제서야 다 나타났군요. ^^;
여러분. 새벽에는 잠을 잡시다.
지금 깨어 계시는 분께는 저의 뽀뽀를 드리렵니다.
그러니 후다닥 이불 속으로 숨으세요. 후후..
그들의 새벽 27
5월 들어서 하진의 부서는 정신 없이 바쁘게 돌아간다.
하진의 책임 하에 진행되어 봄에 새로 선보인 웹진이 좋은 반응을 보이는 탓이다.
여 팀원 한 명이 막간의 브레이킹 타임을 이용해 초컬릿을 돌린다.
- 팀장님, 주말에 자료조사차 코엑스에 갔다가
백화점에 들렀는데 맛있어 보여서 샀어요. 드셔 보세요.
하진의 책상 위에 고급스럽게 포장된 한 알의 초컬릿이 놓인다.
문득 며칠 전 서현이 준 초컬릿이 생각난다.
발렌타인 데이를 5월로 옮겨야 겠군.
- 고마워요.
하진은 서랍을 열어 며칠 전 서현이 준 초컬릿을 꺼낸다.
슈퍼마켓에서 흔히 볼 수 있는 1000원짜리 초컬릿이다.
팀원이 준 것 대신 서현이 준 초컬릿의 조금 딱딱한 곽을 벗긴다.
곽을 벗긴 초컬릿은 얇은 은박에 싸여있다.
- 언닌 초컬릿을 싼 은박 포장 같아요.
초컬릿을 싼 은박 포장이라..
서현의 말을 되뇌이며 하진은 초컬릿을 들어 이리저리 돌려본다.
얼굴을 비춰보기도 한다.
은박을 벗기자 얇은 종이는 파스락 거리며 찢어진다.
네모난 초컬릿을 뚝 분질러 입 안에 넣는다.
달다. 입 안에서 진득하게 녹아내린다.
하진은 초컬릿을 녹여먹으며 은박 포장을 구겼다가 다시 펼쳐본다.
- 초컬릿을 싼 은박 포장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죠?
종종 하진은 시간과 공간에 상관 없이, 회의 중이 아니더라도 아이디어를 내어 놓을 때 질문을 던진다.
그곳이 화장실이건 회식 자리이건 간에.
이런 하진에게 익숙해진 팀원들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버릇처럼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 섬세하고 여린 사람이요?
한 팀원이 볼펜으로 머리를 가볍게 긁으며 답한다.
- 차갑지만 달콤한 사람은 어때요?
초컬릿을 쌌던 종이에선 달콤한 향이 나잖아요.
그리고 은색은 그 자체가 차가운 느낌이니까.
다른 팀원이 책상 위로 편하게 두 다리를 뻗어 올리며 말한다.
누구도 개의치 않는다.
- 난 은색이 좋더라. 서늘하게 빛나잖아요.
- 은박은 은색이 아니라 은백색 아닌가요.
- 같은 색 아닌가요?
- 다르죠. 은색은 은빛이고 은백색은 은빛이 도는 흰색이죠.
- 음. 헷갈리는데. 그럼 초컬릿을 싼 은박은 은색인가요 은백색인가요?
- 은박이라고 했으니까 은색이겠죠. 아님 은백박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 그건 통용되는 용어일 뿐일지도 모르죠.
- 그런데 은백색 갈치. 은빛 갈치. 고등어의 은백색 배. 고등어의 은빛 배. 모두 다 통용된다구요.
- 그 색깔 참 모호하네.
- 지금 색깔 얘기하는 건 아니잖아요. 정확하게 짚으면 초컬릿을 싼 은박 포장지죠.
- 그러니까 모두 포괄하기 전에 세부적인 부분을 짚어봐야죠.
나무 보다가 숲 못 본다지만 일단 숲 안 보이면 나무라도 먼저 보자구요.
- 은박지가 뭡니까. 알루미늄을 얇게 늘여 편 것을 말하죠.
알루미늄은 금속. 예전에 화학시간에 은백색의 광택을 띤다. 라고 배웠던 기억 나네요.
- 어.. 그럼 일단 은백색이라고 하고요. 광택이 나는 이유는 뭘까요?
- 화학 전공자 여기 있습니다.
한 남자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책상에 걸터 앉는다.
긴 말을 하기 전 그의 습관이다.
성이 나씨인 그의 별명은 나서기다.
하진은 그가 나서기 전에 질문을 취소했어야 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진은 오히려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바꾼다.
나서기씨의 일장 연설이 시작된다.
- 우선 전자 바다 모형에 대해서 아셔야 할 것 같군요.
전자 바다 모형이란, electron sea model이라고 하는데요, 금속결합의 모형입니다.
금속은 대체로 이온화 에너지가 작죠.
이온화 에너지 ionization energy란, 원자로부터 가장 약하게 결합된 전자
즉, 원자가전자, 다시 말해 valence electron를 떼어내는데 필요한 최소의 에너지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금속은 이 이온화 에너지가 작기 때문에
원자가전자가 (+)전하를 띈 원자의 핵심부에 약하게 끌려 있는 겁니다.
그러면 금속원자들은 원자가전자를 쉽게 방출할 수 있겠죠?
그러면 이 방출된 전자는 금속원자의 핵심부 사이를 자유롭게 돌아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원자 핵심부를 결합시키는 일종의 접착제 열할을 하죠.
이렇게 자유롭게 움직이는 전자를 자유전자, free electron 이라고 합니다.
즉, 이 자유전자가 자유롭게 흐르는
'전자의 바다속에 원자의 핵심부가 규칙적으로 배열된 것과 같은 구조'
를 하고 있어 이를 전자 바다 모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전자 바다 모형은 금속의 광택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 전자바다 모형속의 자유전자들이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광범위한 파장의 빛을 흡수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 자유전자들이 흡수한 파장의 빛을 다시 방출하는 거죠.
즉, 이 자유전자들이 반사한 여러파장의 빛이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여러가지 색이 합쳐지면 우리눈에 비치는 색은?
물론 흰색이죠, 그래서 우리 눈에는 은백색의 광택을 띠는 것으로 보이는 겁니다.
- 아, 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유 전자가 빛을 반사하기 때문이란 거죠?
- 그렇죠.
- 그런데 현석씨 자유 전자가 빛을 모두 반사하는 건가요?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 물론 아니죠. 거울이 100% 전반사를 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인 거죠.
거울은 입사한 빛을 98% 반사하고 나머지 일부를 흡수합니다.
흡수한 것이 반사한 것에 비해 세발의 피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울이 전반사한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금속도 오는 빛을 다 반사하지 못하죠.
물론 다른 물체에 비하면 반사율은 높겠죠.
하지만 거울보다는 반사율이 약간 떨어집니다.
전반사한다면 흰색을 띤다고 느끼겠지요.
그래서 금속은 흰색보다 약간 어두운 은백색으로 보입니다.
- 여러부운~ 처음에 유팀장님께서 하신 '초컬릿을 싼 은박 포장 같은 사람'
이라는 말씀은 다분히 시적이고 은유적이잖아요.
과학적 접근은 여기서 접는 게 어때요?
- 하지만 좋은 힌트가 됐어요.
자명한 과학적 현상을 시로 전환할 수도 있잖아요.
빛을 반사하는 사람. 그러나 빛나는 사람.
빛을 모두 반사하는 것은 아니기에 흰색은 아닌사람.
하지만 빛을 모두 반사하는 것은 아니기에 빛을 품고 있는 사람. 어때요?
거기다가 초컬릿의 달콤함까지 겸비한다면?
- 어우. 추상적이다.
- 처음부터 팀장님의 질문이 추상적이었어요.
- 디자인 측면에서 봐도
은박지는 종이나 비닐 포장에 비해 고급스럽고 깨끗하다는 느낌을 줘요.
- 맞아요. 게다가 은박지는 포장을 하면 원래의 모양과 각이 그대로 유지되잖아요.
은박 포장된 제품은 형체가 온전하지만
종이나 플라스틱으로 포장된 제품은 눌러 붙어있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되구요.
이런 특성을 상징화 한다면 대충 그림이 나오죠. 어떤 사람인지.
- 이거 다 종합한 사람에게서 초컬릿만의 그 독특한 고유의 향이 난다?
그것도 초컬릿에서 직접 나는 향이 아니라 스며든 옅은 향이겠죠?
대체 어떤 사람인 거죠?
팀원들이 내놓는 제각각의 의견을 흥미있게 듣던 하진은 힐끗 손목 시계를 본다.
시간이 꽤 흘렀다. 이쯤 마무리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 잘 들었습니다.
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본다.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와있다.
낯설지만 어디선가 본 번호다.
한 번 본 것을 잘 잊지 않는, 좋은 기억력을 가진 하진은
며칠 전 영민이 준 명함에 찍혀있던 번호라는 것을 금세 기억해낸다.
통화를 눌러 영민에게로 전화를 건다.
- 팀장님?
핸드폰을 귀에 갖다대고 있는 하진을 팀원이 의아한 목소리로 부른다.
하진 역시 왜요? 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 팀장님께서 뭔가 생각하신 것이 있지 않나요?
팀원들은 기대에 찬 눈을 하고 있다.
- 아.. 심심해서 물어봤습니다.
- 예? 심심해서요?
- 궁금해서가 더 맞겠군요.
나서기 나현석은 넥타이를 휙 졸라매고 머리를 긁적이며 책상에서 내려온다.
신호가 오래 울린 후에야 영민이 전화를 받는다.
- 어. 그래 하진아.
반가움을 담은 목소리.
- 아까 전화 했더라.
아무렇지도 않게 통화를 하며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하진을 보며
팀원들은 뭔가 허탈한 표정을 짓는다.
- 유팀장님을 허무 개그의 일인자로 명명하도록 하죠, 우리.
- 솔직히 이번엔 웃기지도 않았는데요.
- 그래도 유팀장님 스타일 재밌잖아요.
- 난 유팀장님이 아이디어 제안할 때 던지는 질문들이 좋아요.
신선하고 독창적이잖아요.
- 그건 저도 그래요.
오늘은 처음에 질문만 하시고 한 말씀도 안 하셨지만
평소엔 핵심을 캐취해서 뭔가 이끌어낸다니까.
제가 하는 대답들에 제가 감탄하게 만들어요.
- 이른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인가요?
- 워커홀릭 유!크라테스네요.
팀원들은 웃어대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간단하게 통화를 끝낸 하진이 사무실로 들어오며 한쪽 귀를 긁는다.
상사가 자리를 비우면 도마 위에 올려진다는 사실을 하진은 눈치 채지 못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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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이가 본 하진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후후.
오늘은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대신 읽어주시느라 수고하셨어요, 라고 말할게요;
웬 나서기씨의 화학 강좌란 말인가?
모두 좋은 날 되어요. ^^
그들의 새벽 28
- 여기!
멀찍이서 영민이 손을 들며 큰 목소리로 하진을 부른다.
먼저 도착한 영민은 이미 한 잔 걸치고 있다.
- 먼저 일작했다.
탁자 위엔 빈 맥주 병이 놓여있다.
- 그래.
하진이 자리에 앉자 영민이 잔을 건네고 술을 따른다.
일단 술을 받은 하진은 재킷을 벗어 옆 의자에 걸쳐둔다.
- 오늘따라 왜 그렇게 맥주가 먹고 싶은지.
너 전화 끊고나서부터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간절하더라.
영민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든다.
하진도 웃으며 잔을 부딪는다.
*
- 하진아, 너 그거 생각 나냐?
- 뭐?
- 끼니와 맞바꾼 맥주.
- 후후.. 잊을 수가 없지.
스무살 찌는 듯한 여름, 유난히 맥주를 마시고 싶었던 날이었다.
라면을 사려던 돈으로 큰 마음 먹고 맥주를 샀던 날이었다.
하진이 살던 쓰러질 것 같은 한옥 집엔 주인집 대청마루에 냉장고가 놓여있었는데,
씻는 동안 잠시 냉장고에 넣었다 꺼내어 시원하게 마실 생각으로
맥주를 나눠 담은 컵 두 개를 냉동실에 넣었다가 깜박 잠이 들어버렸었다.
깨어나 황급하게 냉동실 문을 열었더니 맥주가 꽝꽝 얼어 있었다.
맥주는 얼른 마시고 싶고 이놈의 얼어버린 맥주는 녹을 생각을 안 하니
입맛만 다시던 하진은 냉장고 옆 바닥에 놓인 고물 전자레인지를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다.
주인집 아저씨가 어디선가 주워와서 열심히 닦았던 그 전자레인지다.
하진은 쪼그리고 앉아 얼어버린 컵을 집어넣고 아주 잠시 전자레인지를 돌렸다.
몇 모금이라도 마실 요량이었다.
그러나 이게 웬 걸. 고물 전자레인지가 괜히 고물이겠는가.
몇 초 돌리지도 않았는데 꺼내본 맥주는 뜨끈하게 한 번 끓인 상태가 되어버렸고,
하진은 마루에 걸터 앉아 뜨거워진 컵을 손에 쥐고 한 모금 마신 뒤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물로 씻었는데도 금방 다시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그게 어떤 돈인데. 김빠져버린 맥주라도 시원하게 마셔야 겠다.
하진은 다시 냉동실에 컵을 집어 넣고 좁은 마당 한 구석의 그늘에 앉았다.
- 학생 미안한데 이거 버스 정류장까지만 같이 들어주겠는가?
두세번 왔다갔다 하면 될 거 같은데, 기력도 딸리고
올라 온 사이 누가 훔쳐갈지도 모르겠고.
주인집 아저씨가 집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새롭게 행상을 시작한 아저씨 손에는 큰 보따리 두어 개가 들려있다.
냉동실에 넣어둔 맥주를 뒤로 한 채 하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음날까지 맥주를 까마득히 잊어버렸는데,
아침에 작은 회사에서 경리 일을 보는 주인집 딸이 하진의 방문을 마구 두드렸었다.
- 얘, 너 이거 뭐니? 너가 그랬지?
주인집 딸의 손에는 작은 유리 조각이 들려 있었다.
알고 보니 맥주가 밤새 다시 꽝꽝 얼어 싸구려 유리컵이 터져버렸던 것이었다.
주인집 냉동실은 깨진 컵과 그 내용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 누가 남의 집 냉장고 함부로 쓰래? 깨끗이 쓰면 또 몰라. 어휴.
- 미안하다. 치워줄게.
- 됐어, 얘.
투덜거리며 누렇게 낡은 냉장고를 보란듯이 열심히 문질러대는
그 아이의 등 뒤에서 하진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었다.
- 야.. 너 그 날 이후로 호프집 아르바이트 했잖아. 맥주 실컷 마시겠다고.
- 후훗, 그랬지.
- 그 때 매일 니가 집어 온 마른 안주 먹는 것도 낙이었다.
그 때 먹은 마른 오징어며 육포며 다 지금 먹는 어떤 안주보다 맛있었지.
- 나도 그땐 남은 맥주를 감로수라고 생각하면서 많이도 마셨지.
- 우리, 그놈의 맥주 이제 실컷 마실 만큼 많이 컸다, 안 그러냐?
영민은 기분 좋게 맥주를 들이킨다.
사실 영민은 좋은 집안 환경과 남부럽지 않은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하진 앞에서 그런 티를 내지 않았었다.
하진의 도움을 청한 뒤 늘 이유를 만들어 밥을 샀고 술을 샀다.
영민이 말 하지 않아도 하진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 너 명함 보니까 홍보대행사 팀장이더라.
- 그래.
- 활동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 아니냐.
- 필요하지. 사람을 많이 만나고, 대인관계가 아주 좋아야하고, 처세에 능해야 함.
- 흐흣. 스스로 스물아홉 유하진의 처세술 점수를 매기면?
- 비위는 저 아래에 깔아두고 10점.
- 하하하. 0점 아닌 게 어디냐.
- 0점이었으면 이미 관뒀을테고 버티기 노력 점수로 10점.
나중에 돈 좀 더 벌면 다른 일 하려고.
- 음.. 그래.
- 세상물정은 많이 배웠지. 여러가지에 능통해야 할 수 있는 일이라 저절로 그렇게 되더라.
하진은 다 그런 것 아니겠냐는 표정으로 웃는다.
영민은 하진의 웃음에서 9년의 세월을 느낀다.
여전하면서도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너 지금 딱 보기 좋다. 그 때 너 50kg은 나갔었냐?
비쩍 말라서 눈만 번득였는데. 지금은 여유 있어보이고 멋지네.
하진은 당시 학교 앞 떡볶이 집에서
오뎅 한 꼬치와 국물을 다섯 번 퍼마시는 것으로 저녁을 대신하곤 했었다.
멀쑥한 키와 나뭇가지처럼 여윈 몸을 가졌던 시절이었다.
- 여유야.. 굳이 자신 없어할 필요 없으니 그런 거고.
눈은 굶으면 원래 번득이게 되어 있어. 집중 심취해도 그렇고 수련해도 그렇지.
- 그래. 나도 미국에서 공부할 때 채식하면서 아침 명상 좀 했는데 눈빛이 많이 달라지더라.
기가 모여서 눈에서 빛이 나오고 들어가는 걸 알겠더라고.
- 악착같은 집중이나, 광신도의 눈빛이나, 대덕고승들의 청정한 눈빛 다 다르지. 기의 종류와 질이 다르니까.
- 흣. 첫 번째는 욕망 욕심에 집중, 두 번째는 몰두 몰아, 세 번째는 초월?
- 그래, 나는 그 첫 번째 이유로 눈이 번질 거렸던 거겠지.
그런데 넌 그런 내게 좋은 눈빛이라고 했고 말이지.
- 너 처음 봤던 날 생각 난다.
네가 강의실로 들어서는데 등이 서늘해지면서 머리에 종이 울리더라고. 하하.
난 그런 사람 처음 만나봤거든. 네 눈빛에 얼어버린 거지.
- 그런가.
영민은 처음에 하진을 곱상하게 생긴 남자라고 생각 했었다.
좋은 친구로 두고 싶은 호감으로 그녀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진은 늘 바빠보였고 늘 혼자 다녔다.
그러나 주변엔 여학우들이 잘 따랐다.
하진은 그들에게 기본적으로 친절했지만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듯 했다.
영민은 학교 앞을 지나다가 노점에서 오뎅을 먹고 있는 하진을 우연찮게 본 날 그녀를 뒤따랐다.
그녀는 오후 시간 동안 전단지를 돌리고 집으로 향했었다.
영민은 그 날 하진이 어디에 사는 지를 알게 되었다.
- 몸은 건강하고?
- 넌?
영민의 물음에 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되묻는다.
- 나야 보시다시피 건강하지. 강골이잖냐. 너 걱정 많이 했다.
잘 지내겠거니 하면서도 살아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지. 워낙 험하게 살아서.
- 집에서 한 푼도 안 들고 나와서, 아니 삼십원 들고 나와서
스무살 때부터 혼자 벌어구르며 살았는데
10년 동안 죽을 고비 두 번 넘겼으면 나쁘진 않지.
- 두 번?
- 한 번은 너도 알 거고 한 번은 스물 중반에 복통이 와서.
- 그랬군.
하진의 뒤를 쫓았던 날 영민은 하진의 집 문 앞에 걸터 앉았다.
이 녀석과 친구가 되고 싶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삶을 사는 사람에 대한 천박한 감상인 것인가.
그건 아니다. 물론 아니야. 이 녀석에겐 뭔가 있다.
이토록 알 수 없는 강한 호기심과 끌림을 주는 녀석은 만난 적이 없다.
너의 무엇이 내가 이렇게 어이 없는 짓을 하게 만드는 것일까.
미행을 하고 집 앞에서 기다리는 내 모습이라니.
영민은 그 날 새벽 비탈진 골목 아래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수많은 생각으로 밤을 지샜다.
먼 동이 터오르는 것을 지켜보며 영민은 하진에게 친구가 되자고 말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아침이 밝고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하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인집 딸인 듯한 여자가 아침 일찍 출근을 하며 '저 찾아오셨어요?'라고 물었다.
영민이 이곳에 사는 친구를 기다리노라고 말하자
여자는 흥흥거리며 비탈진 길을 구두 굽으로 조심스레 짚으며 내려갔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몇 시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영민에게
'학생 누구 찾아왔어?' 라고 물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주머니가 몇 번이나 하진의 방문을 두드리며 불렀는데도 기척이 없었다.
아주머니는 벌써 나간 모양이라며 돌아섰지만 분명히 영민은 밤 새 문 앞에서 기다렸고 하진을 보진 못했었다.
미심쩍은 마음에 미닫이 방문의 허술한 잠금장치를 부수고 들어가자
하진은 연탄가스를 마시고 쓰러져 있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 그 때 뇌에 산소 공급이 안 돼서 뇌세포가 반은 죽은 거 같다.
가스 먹고 난 뒤로 멍청해져서 좀 우울증 왔었는데. 후후.
- 하하. 그래 너 그때 엄청 암울했었지. 생각 난다.
병원까지 기껏 업고 뛰었더니 깨자마자 나한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더니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꺼져라..'고 했잖냐?
생명의 은인한테 그게 할 소리냐.
하진을 업고 달리면서 영민은 알게 됐다.
하진이 여자라는 사실을.
- 나중에 고맙다고 했다? 지난 일로 이러기냐?
- 하하하.. 그래. 지금은 그 때 생각하면 웃지만 그 땐 당황스러웠지.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해서.
- 후후..
- 그 때 너 정말 똑똑했어. 이렇게 잘 될 줄 알았다.
- 가스 먹기 전에 만났으면 천재 취급받았겠군.
원래는 본 거 잘 안 잊었는데 지금은 맨날 뭐 찾는다.
그 땐 머리속이 뭘 딱 생각하면 앨범식으로 영상이 나와.
그래서 시간대별로 내 느낌별로 그게 자동으로 저장되는지
그 장면이나 책이면 어느 사진 아래 무슨 글 이런 식으로 사진처럼 보였는데
가스 먹고 난 뒤론 정리 오랫동안 안한 서랍같이 되더라.
죽어라 먼지 풍기면서 뒤져야 되더라고.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머리까지 안 따라주니까 힘들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오래 돼서 원래 이러려니 하고 살지.
- 크흣.. 하진아. 그 때 그건 생각 나냐? 비 오는 날에...
하진과 영민은 지난 추억과 지금의 삶을 오가며 긴 시간의 회포를 풀어낸다.
말 수가 적은 하진도 오늘 만큼은 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술병은 비어가고 취기가 기분 좋게 오른다.
영민은 어느새 넥타이를 풀어놓고 셔츠 단추를 하나 열었다.
하진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시계를 끌러놓았다.
스무살의 하진과 영민이 마주 보고 웃는다.
스물 아홉살의 하진과 영민이 좋은 안주를 앞에 두고 권커니 자커니 술을 나눈다.
밤은 천천히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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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맥주가 매우 마시고 싶어진 낡은 수첩입니다.
담배도 바닥났군요.
편의점은 멀군요.
약간의 갈등 중인 새벽..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
그들의 새벽 29
- 이렇게 웃으면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하고 살았다.
그래도 서울 땅 처음 밟던 날 네 생각 제일 먼저 나더라.
길 걷다가 우연히라도 한 번 보고 싶었거든.
그게 또 벌써 몇 년 전이냐..
영민이 안경을 벗어 탁자 위에 올리며 말한다.
그의 눈은 술기운으로 약간 붉어져 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하였다.
외모와 표정이 변하고 마음이 변하였다.
이렇게 되기까지 9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렇게 얼굴을 맞대기까지
필요했던 것은, 견뎌야만 했던 것은 오로지 세월이었다.
그 시절 하진과 영민은 공인된 캠퍼스 커플로 불리울 만큼 늘 함께 다녔다.
하진의 보이쉬한 외모 덕에 CGC라고 하여 캠퍼스 게이 커플이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었다.
영민은 타인들의 그런 평가가 나쁘지 않았고
하진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도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영민과의 소문은 자신을 향한 여자 동기들의 호기심을 잠 재우는 데 적절한 효과가 있었으므로 편했다.
영민은 하진에게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여성적인 매력을 발견해갔고
그런 하진에게 점차 친구 이상의 감정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
유난히도 파아란 하늘에 하얀 실구름이 걸려 있었던 그 날.
하진은 과외를 가기 전 남는 시간을 이용해
그늘 진 곳의 야외 탁자 앞에 앉아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영민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 젠장할! 이준후가 아주 나를 엿 먹였어.
영민이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지며 하진 앞에 털썩 앉는다.
- 제길~ 이교수님이 뭐라셔?
하진은 책에서 눈을 떼며 묻는다.
- 빌어먹을! 그 자식한테 님자 붙이지 마.
지적 수준이 그 정도면 인격이 반은 따라야 할 거 아냐.
- 니미~ 오시려는 지 장독깐에 두꺼비가 울어쌌네.
하진의 농담에 인상을 구기고 있던 영민이 큰 소리로 웃어버린다.
- 뭐냐. 내가 두꺼비냐.
그래, 내가 '뉘 집 자식인지 인물이 훤한 게 떡두꺼비네' 라는 말은 많이 듣고 자랐다.
하진은 못 들은 척 다시 책 위로 눈을 돌린다.
- 님만 오면 되겠군? 아.. 날씨 좋구만. 내 님은 오시는 중인가.
영민은 하늘을 한껏 올려다보며 중얼거린다.
그리고 천천히 젖혔던 고개를 바로 하며 하진을 바라본다.
하진의 짧은 머리카락이 엷은 바람에 흔들린다.
남방 위로 드러난 하진의 목선에 눈길이 이르자 영민은 황급히 시선을 떨군다.
탁자 위에 올려진 손가락.
왼 손으로는 책의 한 면을 가볍게 누르고 오른 손으로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다.
- 영민아.
누군가의 호명에 영민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든다.
명우가 대자보를 말아 쥐고 환하게 웃으며 서있다.
- 어.. 명우야.
- 넋놓은 표정으로 뭐 하고 있어? 성수 선배가 너 찾던데.
아 그리고 오늘 동아리 방에서 여섯시까지 보기로 한 거 알지?
- 음.. 성수형이 나 찾으면 뻔하지.
백 원 주면서 담배 사오고 남는 걸로 밥 먹으라고 할 걸.
- 후훗. 자보 좀 붙이라고 찾는 걸 거야.
나도 예대에 자보 붙이려고 들고 가.
- 그건 홍보 담당이잖아. 네가 왜?
- 행사 준비로 다들 바쁘잖아. 서로 돕는 거지 뭐.
어차피 예대 가는 길이니까. 그런데 영민이 너 오늘 좀 삐딱하다?
- 명우야. 이 오빠가 오늘은 심기가 불편하시다.
날도 좋은데 님은 안 오시고오. 여기서 한량 노릇이나 하려네.
성수 형한테 나 봤다는 말 하지 마라. 이 오빠 오늘 잠적이다.
- 푸후. 그럼 계속 한량 하세요, 오라버니. 뒷 일은 책임 안 져요.
명우가 말아 쥔 자보를 흔들고 걸어간다.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하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명우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 목소리가.
- 음?
- 목소리가 예쁘네.
하진의 시선을 따라 뒤로 고개를 돌려본 영민은 다시 하진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 명우 목소리?
- 어.
- 어디 집중하면 누가 부르는 소리도 못 듣더니..
너도 오늘은 날도 좋고 님 없는 쓸쓸한 마음에 글이 눈에 안 들어오나보지?
- 책에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들리더라고.
대화 내용이 아니라 선율같은 음색이.
하진이 스스로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눈길을 돌리려는 순간 명우가 갑자기 돌아선다.
하진과 명우의 눈이 마주친다.
툭.
일정한 속도로 뛰고 있던 심장이 순간 멈춘다.
하진의 눈을 마주하고 명우가 걸어온다.
약간의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지만 명우 역시 눈을 돌리지 않는다.
- 영민아.
숨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하진은
명우가 영민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다른 곳을 쳐다본다.
- 왜?
- 나 동방 열쇠 화분 밑에 숨겨두는 거 깜박하고 들고나와버렸어.
나 지금 수업 있거든. 너 한량이니까 할 일도 없잖아. 열쇠 좀 부탁해.
명우가 열쇠를 영민의 손에 쥐어주고는 잰 걸음으로 걸어간다.
하진의 눈은 다시 그녀의 뒤를 쫓는다.
- 야. 나 오늘 잠적이라니까.
- 부탁해!
명우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친다.
하진과 다시 눈이 마주친다.
- 안녕!
명우가 하진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뛰어간다.
- 뭘 그렇게 봐?
명우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하진은 그제서야 영민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 명우.. 라고 그랬나?
- 응. 최명우. 피아노 전공이고.
우리 동아리에서 선배들의 사랑을 아낌 없이 받고 있는
한 마리 고고한 학이자 한 떨기 고결한 백합. 하하. 인기 많아 명우.
- 그래?
- 어. 퀸카지. 다른 과랑 다른 학교에서도 좀 유명한 걸로 아는데.
애인은 없는 모양이더라고.
- 그렇군. 너도 저 친구한테 관심있어?
- 전혀.
- 그럼 앞으로도 눈독 들이지 말길 바란다.
- 왜?
하진이 명우에게 여자로서 질투를 하는 것이라고 지레 짐작한 영민은 기분이 좋아진다.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면이다.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만 같다.
영민은 그런 하진이 귀엽기만 하다.
- 내가 관심 있거든.
- 하하하. 아.. 날씨 좋다.
- 농담 아닌데. 왜 웃지?
- 알았다 알았어.
영민은 싱글벙글 웃음을 참지 못한다.
- 뭐가 그렇게 좋아? 이교수님한테 엿 먹더니 정신이 나갔나보군.
- 앞 내에 고기 낚고 뒷 뫼에 산채 캐어
아침 밥 좋이 먹고 초당에 누웠더니
지어미 잠 깨어 이르되 술 맛 보라 하더라!
아흐.. 진짜 낙원이다. 안 그러냐?
- 한량인 지 홈리스인 지 계속 진행하라고. 내일 보자.
하진은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명우와 시선을 마주 했을 때의 심장의 반응이 지워지지 않는다.
처음 있는 일이다.
하진은 이 낯선 사건을 되새기며 고개를 숙이고 걷기 시작한다.
농담으로 뱉은 즉흥 시조.
님이 오시려는 지 장독간에 두꺼비가 우는구나.
그리고 정말로 님이 왔다.
스무살 가을.
유난히도 파아란 하늘에 하얀 실구름이 걸려 있던 날의 일이었다.
그들의 새벽 30
그 후로 하진은 영민의 동아리 일에 관심을 보였고
바쁜 시간을 쪼개어 때때로 함께 동아리 일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영민은 그것이 하진의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진은 명우와 친해져 갔고 이들 셋은 곧잘 함께 어울렸다.
명우를 가운데 두고 셋이 함께 거리를 걸으면 시선은 집중 되곤 했다.
하진은 자신이 한 인간에게 이토록 집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스무살 겨울이 시작될 무렵 하진은 명우로부터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세상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은 듯 가슴이 벅차 올랐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열 여덟 즈음부터 태우기 시작한 담배를 명우의 나무람으로 끊었고
바쁜 생활은 여전했지만 마음만은 여유로웠다.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다.
생활의 일부에 명우를 포함하기 시작했고 점차 명우는 생활의 전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늦은 밤, 하진은 명우를 바래다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 이제 오냐?
영민이 하진의 집으로 향하는 비탈진 길의 계단 꼭대기에 걸터 앉아 있었다.
- 어, 여기서 뭐 해?
- 너 기다렸지.
- 왜.
- 보고 싶어서.
- 재밌네.
하진이 영민의 옆에 앉으며 웃는다.
-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여긴 야경 하나는 끝내주는 구나.
- 아아!
하진은 두 손을 입가에 대고 불빛들이 일렁이고 있는 어둠 속으로 크게 소리를 지른다.
- 너 요새 완전히 날아다닌다? 기운이 펄펄 넘치네.
- 응, 좋아.
- 아아아!
영민도 크게 외쳐본다.
둘은 서로 마주보고 피식 웃는다.
침묵이 흐른다.
영민은 하진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앞을 바라보고 있는 하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몰라도 꽤 기분이 좋아보인다.
영민도 앞으로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연다.
- 하진아.
- 어.
- 나 너 인간적으로 좋아한다.
- 느끼하군. 일수 걷으러 온 날이냐. 오늘 왜 이래?
- 좋아한다 해도 말이 많네.
- 알았다. 나도 좋아한다. 됐는가?
- 그리고.
- 또 뭐.
- 그리고 한 사람의 남자로 여자인 널 좋아한다.
짧지 않은 침묵이 흐른다.
영민의 심장은 긴장으로 심하게 쿵쿵거리고 있다.
- 별로 재미 없는 농담이네.
거절인가.
영민은 피식 웃는다.
- 뭐 특별히 원하는 게 있는 건 아니야.
너 연애 할만한 여유 없다는 것도 알고 있고. 부담 주고 싶지도 않고.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걸 말하는 거지. 난 너 기다릴 자신 있다.
나중에 연애할 마음 생기면 그 때 1순위로 나를 먼저 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 정도 자신감은 가져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나 괜찮은 녀석 아니냐?
하진은 난감한 기분으로 한참동안 앞을 바라본다.
- 영민아.
- 응?
- 나 좋아하는 사람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이랑 사귀고 있고.
- 그..래..?
- 마음 접어라.
- ...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그리고 이미 사귀고 있다고?
영민은 당혹감으로 얼굴이 뜨거워진다.
- 그런데.. 왜 말 안 했는데? 나를 친구로도 생각 안 한 거냐.
- 숨길 마음은 없었어.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얘기 할 생각이었지.
- 내가 아는 사람이냐?
- 응.
- 누..군데?
하진은 잠시 피곤하다는 듯 손바닥으로 마른 세수를 한다.
- 명우.
- 뭐? 잘 못 들었어. 누구라고?
영민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하진을 쳐다본다.
- 최명우.
- 지금 농담 따먹기 하냐.
- 농담 하는 걸로 보이나 보지?
하진의 표정은 진지하다.
하지만 하진은 늘 농담도 진지한 표정으로 한다.
영민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알 수 없다.
영민은 무릎 위에 팔을 괴고 이마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생각에 잠긴다.
그러고보니 그렇다.
하진이 명우에게 보이는 친절과 배려들.
명우 얘기를 할 때 하진의 표정들.
종종 과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영민은 고개를 든다.
- 진짜구나?
하진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
멍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는 영민의 옆에 하진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
- 너, 레즈..
영민은 훅, 하고 숨을 내뱉은 뒤 말을 바꾼다.
- 동성애자란 말이냐?
- 그런 말은 모르겠고 내가 명우를 좋아한다는 건 알겠다.
- 어릴 때 남자를 좋아해본 경험은?
- 無
- 어릴 때 여자를 좋아해본 경험은?
- 설문조사 나왔냐.
-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봐.
- 有
- 그렇군. 난 아예 가망 없는 거네.
영민은 씁쓸하게 웃는다.
하진은 침묵한다.
- 완전히 바보 짓 했군. 하하.
- ...
- 진작에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가는 마음 붙잡을 수도 있었을텐데. 이게 뭐냐.
- 그런 거 생각 안 하고 살았어. 살기 바빠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 야.. 기분 참 묘하다. 비참한 것도 아니고.. 뭐냐 이 기분은? 후후..
-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아님, 위로 해줘야 하는 건가.
- 시끄러 임마. 갑자기 아주 비참해지고 있는 중이니까 말 걸지 마라.
하진은 피식 웃는다.
- 영민아.
- ...
- 고맙다.
- 거 되게 시끄럽네.
- 넌 괜찮은 녀석이야. 그런데 시력은 많이 안 좋은 거 같다.
- 안경 바꿀 거다. 됐냐.
- 후후..
하진은 영민이 고맙다.
자신에게서 여자를 볼 만큼 매력을 느꼈다는 사실.
깔끔한 영민의 성격 답게 물러서는 태도.
친구로서 자신의 성향을 인정해 준 것.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 날 하진과 영민은 알지 못했다.
영민의 하진을 향한 마음은 이성으로 제어할 만큼 작지 않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