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지, 이번 필리핀 여행 어땠어요?"
현충일 아침에 모두들 늦잠을 자고 나서 식탁에 앉아 아점을 먹고 있는데 막내아들 바다가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바다는 아직 고등학교 1학년이라 그런지 수험생 분위기는 어디 갔는지 없고 세월아 네월아 하며 느긋한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다.
옆에 앉아 있던 벗씨가 그 질문에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생기 있는 표정을 짓는다.
바다는 평소에 워낙에 말이 없는 아들이라서 무뚝뚝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니 벗씨는 신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내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대뜸 나서서 대답을 하기 시작한다.
"응, 그거 말이야. 얘기해 줄까? 엄청 재미있었지."
"뭐가요? 말이 통해요?"
"말이 통하지, 처음엔 어색해서 아무 말도 못 했는데 나중엔 잘 되더라. 그냥 막 들이대었지뭐."
나는 그저 옆에서 벗씨와 아들이 시작하는 대화를 들으며 웃고만 있었다.
벗씨는 물 만난 고기 마냥 신명나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지난 6월 1일부터 4일까지 3박 4일간 필리핀 마닐라 근처에 있는 '팍상한'과 '따가이따이'를 다녀오고 나서 처음으로 여행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야기 상대를 찾아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바다가 말을 먼저 걸어왔으므로 열변을 토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영어는 그냥 '하우머치?', '와이?', '오케이', '땡큐'면 그만이야. 더 이상 필요 없어. 다 알아듣는다고."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밥 먹다가 말고 바다가 쳐다본다.
"진짜야, 난 처음부터 막 이야기를 했어. 문법 같은 것 필요 없어. 단어 하나씩만 막 이야기하면 돼. 그래도 다 알아들어. 그랬더니 너거 아부지는 나만 쳐다보대? 하루 이틀이 지나도 말 한 마디 안 하고?"
내가 필리핀 여행을 하면서 용기가 나지 않아 영어 한 마디 못 하고 있었던 것을 계속 눈여겨보고 있던 벗씨가 우리 바다한테 다 털어놓고 있었다.
"우리 바다는 이처럼 외국 여행 가면 영어 잘 할 거라. 그치, 바다야?"
"꼭 그렇지는 않아요."
"그래도 너희들은 회화 위주로 영어를 배우잖아. 우리는 문법 위주로 배웠는데."
"우리가 뭐 회화 위주로 배워요? 마찬가지지요."
대답을 하는 폼을 보니 우리 바다도 외국인과의 대화는 자신이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번에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서 만난 서울 사는 관광객 중에서 고등학생과 대학생처럼 보이는 다 큰 따님 둘과 여행을 온 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분 말씀에도, '아이고. 말도 마세요. 난 우리 딸내미 기대하고 여행 왔는데, 내보다 못 해요. 못 해. 글쎄. 내가 미친다니까요.' 라고 하면서 우리들 앞에서 크게 실망한 표정으로 자식들 원망하는 것을 봤다.
이번 여행의 경우에도 벗씨는 비록 단어 한 개씩을 구사하는 대화였지만 자신감 있게 영어를 했다는 것을 자랑삼아 아들 앞에서 한 번 더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아들한테도 자신감을 가지면 안 되는 게 없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말이다.
"그리고 바다야. 이번 여행에서 제일 큰 수확은 뭔지 알아?"
"그거야 내가 모르죠. 뭔데요?"
"그건 말이야. 너거 아부지한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거다."
난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는 것을 느낀 순간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퍼뜩 짐작이 갔다.
"너거 아부지는 하루 이틀이 지나도 말 한 마디 못 하고 있었거든. 겁이 나서 말이야. 자기가 하는 영어가 문법적으로 맞는지 자신이 없었던 거야."
"그런데요?"
"응, 그런데. 이틀째 저녁에 '마차 사건'이라고 하는 사건이 있었어. 거기에서 너거 아부지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거야."
"왜요?"
"마차를 타고 시내를 여행하는 기회가 생겼는데 그 때 그 사람들하고 '한 판 목숨을 건 싸움'이 벌어진 거야. 그걸 해결하려고 내가 떠듬떠듬 이야기를 하니까 말이 안 통했던 거지. 난 한 단어씩만으로 이야기를 하거든. 그러니까 대화가 안 되었던 거야."
"그래서요?"
"그걸 계속 지켜보고 있던 너거 아부지가 너무나 답답했던지 '주어, 동사, 목적어'로 된 완전한 문장으로 들고 나온 거야. 드디어 이틀만에 입을 뗀 것이지. 호호호."
"그래서 아부지가 잘 하시던가요?"
"응, 내가 아무리 말해도 안 먹히던 것이 너거 아부지가 완벽한 문장으로 길게 이야기하면서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니까 드디어 굴복을 하더라고. 그래서 무난히 해결이 되었지."
"아, 예."
바다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을 보니 뭔가가 대리 만족을 느끼는 모양이다.
목숨이 걸렸다는 과장된 얘기를 듣다가 문법적으로 온전한 문장과 대화로 사건이 해결이 되었다는 말에 여린 마음을 가진 바다가 어찌 안도감을 보이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아부지 영어는 <거침없는 하이킥>에 나오는 ‘이순재식 영어’인 셈이었지. 머릿속으로만 문법구조가 맴도는 영어 말이야. 막상 말은 못 하면서."
"그러면 어머니 영어는 거기에 나오는 ‘나문희식 영어’네요? 용기 있게 막 했으니까요."
"그렇다고 보면 된다. 호호호."
옆에서 듣고 있자니 민망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해서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번 여행에서 제일 큰 수확은 너거 아부지가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가졌다는 거지. 그 사건 이후론 자기가 먼저 나서서 모든 일을 하려고 나섰으니까 말이야. 호호호."
아들 앞에서 처음으로 필리핀 여행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재미있는 모양이다.
나는 식사를 끝낸 후 이 자리를 모면하려고 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인사차 뒤따라 나오면서 하는 모자간의 얘기가 들린다.
"근데요, 어머니! 목숨이 걸렸다는 그 '마차 사건'이 뭐예요?"
"응, 그건 이따가 저녁에 아부지 돌아오시면 한 번 물어봐."
2007년 6월 6일
멋진욱 김지욱 서.
첫댓글 필리핀 여행기는 6편까지 쓸 예정이라고 합니다. 멋진윤.
어! 공무원 아자씨도 갔네? ㅎㅎ 좋~았겠다. 어쩐지 요 며칠 수성구청이 좀 헤매데요... ^^
공무원 아저씨 한 목소리 하대요? 어휴 웃겨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 대신 필리핀이 떠나갔습니다요. 히히.
하하하!!! 눈에 선 합니다.
아부지는 그렇~~~~게 하이킥 보지마라고 뭐라 카시고는 제목부터 '이순재식 영어와 나문희식 영어'라고 하면서 꼭 젊게 사시는 것처럼..ㅋㅋ 나는 집에서 아부지때매 하이킥 본 적이 없어서 무슨 말인지 모를 뻔 했네. -다래
사랑하는 다래야, 잘 있지? 난 하이킥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롱, 얘기 들었을 뿐. 여기서 만나니 반갑네? 잘 있어. 히히.
그리고 아부지 글의 문제점이라면(??) " " 안에 대화체가 너무 현실성이 없어요. 우리 말투가 아닌것 같아요. 어색한 서울말처럼 보인다고나 할까? ㅎㅎ
사투리 많이 없앴다. 자꾸 사투리 많이 쓴다고 해서리. 히히.
바다야! 니 진짜 멋있는 비평가네. ㅎㅎ 맞습니다. 맞고요.
다래가 하이킥을 모르다니,,ㅋㅋ 아! 긱사에는 테레비가 없구나. 우리 테돌이 어쩌냐.히히
학교 참 잘 보냈다. 테레비젼이 없는 곳. 히히.
그단새 글을...이제쬐끔 정신이들었구만 . 대단하셔.
어제가 노는 날이라서 회사에 출근해서 썼습니다. 아직 세 편 더 써야 되는뎅. 시간이 나질 않네용. 히히.
히히 내가 어느새 바다가 되어버렸지 - 다래
그러게나게 나도 잠시 헷갈렸다는..-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