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발이 분분한 저녁 답, 가쁜 숨을 몰아 사천왕문 안으로 들어서니 북을 두드리는 스님의 장삼자락이 희뜩희뜩 날파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때때로 몸 안에서 일어나는 갈애渴愛와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미망을 떨쳐내려는 듯 북채를 잡은 젊은 승려의 손길은 자유자재 종횡무진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조였다가 풀어지고 풀어졌다가 다시 조여드는 힘찬 가락이 '둥둥둥' 개밥바라기별이 떠 있는 능선을 타고 춤을 추었다. 한참 동안 가람의 정적을 뒤흔들어 놓던 북소리가 칼로 자른 듯 끊기었다. 사위 또한 언제 무슨 소리가 들렸었냐는 듯 시침을 떼었고 단일하게 다가오는 어둠을 품었다. 북을 치던 스님도 북채를 제자리에 놓고 총총히 전각 뒤로 사라지자 범종은 장중하게 뒤를 이었다. 나는 장승처럼 서서 어두운 골짜기, 갈피마다 스며드는 범종의 여운을 따라 나섰다. 잡힐 듯 다가왔다가 가물가물 멀어지는 울림은 끝내 한 인간이 내젖는 영혼의 손사래를 길 위에 버려둔 채 사방으로 잦아들었다. 두 번 세 번 당목이 종판을 울릴 적마다 한기가 목덜미를 타고 몸속으로 파고들었고, 오소소 소름에 진저리를 쳤다. 운판이 울고, 속을 비운 목어도 울었다. 사물이 저마다 제 소리, 제 울음을 끝내자 이번에는 대웅전에서 스님들의 저녁예불송이 들려왔다. 예불을 이끌어가는 목탁소리를 뒤로 관음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긴 머리 중생이 잿빛 승복 속으로 끼어들기란 여간한 배짱이 아니고는 몸 둘 바 없고 민망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관음전 격살문 고리는 얼음장이었다. 문고리뿐만 아니라 실내에 고여 있던 냉기도 먹잇감을 만난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무릎이 풀썩 꺾였다. 충청도 내륙 깊숙한 산골에서 표충사까지 오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버스와 기차와 택시를 번갈아 타고 표충사 관음전까지 찾아온 몸뚱이가 천근이라도 되는 양 무거웠다. 누워 잠들면 바닥에서 우담바라가 피어나 내 몸을 떠받들어 줄 것만 같았다. 그 곳은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을 지니신 관음전이 아니던가. "관세음보살이시여. 이 중생을 궁휼이 여겨주소서." 나의 기도는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풀썩 꺾인 무릎을 세울 줄도 모르고 눈을 들어 관세음보살을 올려다보았다. 적당하게 살 오른 앞가슴, 나붓이 내려 깔은 고운 눈매, 입가에 어린 자애로운 미소가 몸을 일으키고 싶은 충동을 일게 했다. 가까스로 오금을 펴고 절을 올리려는 순간 깜짝 놀랬다. 술항아리처럼 이불을 둘러쓴 하나의 형체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천장에 달린 연등의 희미한 불빛이 조명처럼 그를 비추고 있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방석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이불을 둘러쓴 스님은 오만하다 싶을 만치 꼿꼿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마치 부정한 여자가 제당祭堂에 쳐 놓은 금줄을 넘어선 듯 민망하여 합장만 올리고 물러나왔다. 그리곤 원주스님을 찾아뵌 후 객실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사하촌에서 산채정식을 먹고 올라온 터여서 따로 저녁상을 받는 불편함을 덜었기 때문이다. 잠이 오지 않았다. 추위와 여정에 지친 몸은 나른하기 이를 데 없었건만, 정신은 점점 또렷해지기만 했다. 관음전 스님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 속에서 말문을 닫고 극한으로 자신을 몰고 가는 저 행위는 무엇을 위함인가. 존재의 확인인가. 아니면 대중가요만큼이나 식상하게 나도는 '이 뭐꼬'란 애매모호한 물음을 붙잡고 있는 것일까. 댓돌 위에 놓인 털신 한 켤레의 고독한 정물은 "천상천하 유아독존唯我獨尊"을 외치던 석가의 꿈이 아니었던가. 10년 전의 일이다. 엄마 몰래 출가한 아들을 만나기 위해 친구는 나를 앞세우고 법주사를 찾아갔다. 봄비가 내리는 날이라 각 전각은 물론이요, 금동미륵대불 앞마당도 텅 비어 있었다. 큰 스님 하명을 받고 희견보살상 앞으로 나온 사미승은 어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땅만 내려다보고 있는 그는 피골이 상접했다. 어미는 목부터 메었다. 1년 동안 아비도 없이 자란 자식의 행방을 알지 못해 애가 잦고 피를 말리었다. 덥썩 껴안고 뒹굴어도 시원찮을 만남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다가서는 어미의 손길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저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입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합장의 짧은 인사만 남기고 획 돌아서는 아들의 몸에선 찬바람이 일었다. 그도 그럴 것이다. 은사와 여러 사부대중들 앞에서 삭도로 머리를 자를 때 핏줄과의 인연을 가차 없이 잘라냈을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잘라냈을 것이다. 오로지 제 정체만 남겨 놓고. 어깨를 들먹이는 친구의 슬픔을 온전히 내 몸으로 받아들이던 날의 하늘은 온통 아픔으로 일렁이었다. 자욱자욱 떼어 놓은 걸음마다 눈물이 고였다. 대학입시에 낙방한 아들이 어미 몰래 숨어든 곳이 부처님 무릎 밑이었다. 자식은 구도를 목적으로 어미와의 연을 끊을 수 있겠지만, 세상의 모든 어미에게 자식이란 존재는 죽는 날까지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사랑의 연자매다. 다음 날 아침에도 관음전 댓돌 위에 놓인 털신 한 켤레의 정물은 변함없었다. 닷새간 용맹정진에 들어갔다니 닷새 동안 그는 가부좌를 풀지 않을 것이다. 한 번도 격살 문을 열지도 않을 것이며, 한 마디 말은 물론 음식도 입에 대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랬다. 천왕산 얼음골에서 은거중인 그도 아무도 모르게 출가를 결심하고 한 밤중의 벽에 걸린 괘종시계를 떼어내어 노자를 마련했다. 싯다르타가 제왕의 자리를 포기하고 마부를 앞세워 카빌라성을 떠나듯, 시계를 끌어안고 부모형제가 잠든 밤을 택하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섰다. 직지사 녹원스님 문하로 들어간 그는 몇 년을 생식으로 버티었고, 삼복염천에 하루 3천배의 고행을 자처하기도 했었다. 자신의 몸을 구도의 도구로 삼는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단지斷指을 결행했다. 검지와 엄지에 기름절인 무명천을 칭칭 감아 불을 붙였다. 입에 솜을 물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아픔을 견디지 못해 끝내는 혼절하고 말았다. 기름과 살과 뼈가 타는 자욱한 연기 속에서도 끝까지 손가락 두 개가 끊어지는 것을 보고야 마는 도반들과 사형들은 또 얼마나 지독한가. 그 후, 그는 절집에서도 박학다식한 승려로 이름을 떨쳤고, 한 때는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역사서와 경전을 번역하기도 했으나 출가승이 할 일이 못되었던지 인도로 가선 만행을 일삼다 돌아왔다. 그리곤 스승 유의태가 제자 허준에게 자신의 시신을 해부케 하던 골짜기에 토굴을 마련하고 은거 중이었다. 그런 그를 만나겠다고 불원천리를 분별없이 달려왔던 것이다. 얼음골로의 산행을 포기했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종무소에 들려 내복과 털실로 짠 목도리를 맡기고 돌아섰다. 천왕산 얼음골 쪽으로는 눈길도 보내지 않았다. 맹세코 다시는 그를 찾아 나서지 않을 것이다.
(김애자 님의 수필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