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의 길이 염불 】
/ 해주 스님
이번 법회에는 항상 부처님을 가까이 모시는데
가장 우선되는 염불수행 공덕에 대해서,
화엄경 선재동자가 성취한 염불문을 통해 살펴볼까 한다.
한 해의 시작은 지난해의 끝남이 있기 때문이다.
시작과 끝은 서로 연이 되어 있는 것이다.
끝이 없으면 시작이 없고 시작이 없으면 끝이 없다.
그래서 시작과 끝은 둘이면서 둘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보이는 것,
삶과 죽음, 생사와 열반등이 다 그렇다.
이들이 둘이 아님을 확실히 알면서
새 인연을 맞아
새해를 열 때 보리심의 공덕행을 크게 펼칠 수 있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생로병사의 길을 가고 있다.
생사문제는 여전히 생사대사라고 하듯이 큰 문제다.
요즈음 생로병사 중 늙음과 병듦의 문제가 더욱 크게 자리하고 있다.
수명이 길어지고 의학이 발달돼 아는 병도 많아졌다.
그래서 잘 사는 것이 잘 죽는 것과 같다는 문제의식이 높아졌다.
웰다잉, 존엄사 등에 대한 자각이 깊어진 것으로 알 수 있다.
생노병사 문제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가하신 동기다.
그 문제를 해결하신 방법이 수행이고,
그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 부처님의 성도, 깨달음이다.
부처님 수행을 해야겠다고 서원한 분이 보살이다.
우리의 삶은 중생의 삶과 보살의 삶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보살은 보리살타의 준말이며, ‘보디’와 ‘사트바’를 합친 말이다.
보디는 보리, 즉 깨달음을 의미하며,
사트바는 유정, 즉 중생으로 이해한다.
보리살타는 깨달음이 붙은 중생으로,
깨달을 중생과 깨달은 중생으로 볼 수 있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등은 깨달은 중생으로,
이미 깨달았지만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 내려온 분이다.
보통 보살의 의미는 깨달을 존재다.
“부처님처럼 되겠습니다, 성불합시다”라는
원을 세우고 실천하는 분이다.
중생의 길은 생사업을 짓는 윤회의 길이며,
보살의 길은 공덕을 지어 깨달음의 길로 가거나 가게 한다.
결국 중생이 발보리심하면 보살이 된다.
이처럼 깨달음을 이끄는 보살을 선지식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처럼 부처님 가르침대로
깨달음의 길을 가는 이상적인 보살의 모델은 누구일까.
<화엄경>에서는 ‘보장엄동자’와 ‘선재동자’를 들고 있다.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보살’이 아닌
‘동자’라고 불리는 것은 세속에 찌들지 않고
처음 불법에 들어가 물러나지 않으며
끝없는 보리심의 원력을 쉬지 않고
회향하는 열정을 지녔다는 의미가 있다.
두 동자 중 선재동자는 일생성불을 보이는 원생보살로서,
부처님 회상으로부터 오신 문수보살을 만나 발심해
선지식을 역참함으로서 보살도를 통해
부처님의 일체지를 얻게 된다.
구법의 첫 발을 딛게 되는
선재동자와 문수보살이 처음 만나는 시점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선재동자는 금생에 성불했다.
불자들은 금생에 성불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선재동자는 문수보살을 두 번 만나게 된다.
처음은 문수보살이 아직 발심하지 못한 선재를 찾아가시고,
두 번째는 발심한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을 찾아간다.
문수보살은 선재의 구법이 처음 염불문으로 성취되도록 인도하고 있다.
문수보살이 선재를 안내한 첫 선지식은
공덕운(功德雲) 비구 스님이었다.
선재동자가 그 스님을 통해 처음 해탈한 문이 염불이다.
염불은 부처님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염불, 염법, 염승을 다 염불이라고 하고,
신·구·의 삼업으로 다 염불한다.
염불은 부처님에 의지해 수승한 행을 이룰 수 있다고 해서 중시된다.
선재동자도 염불문을 통해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염불 수행은 어떻게 해야 할까.]
■ 신도들은 시방삼세 모든 부처님을 찾는다.
어떻게 찾을까. ‘일념(一念)’으로 한다고 답한다.
온 마음을 다 모아 일념으로 염불하면 삼매에 든다.
그런데 스님들은 ‘무심(無心)’으로 한다고 한다.
무심은 망념이나 망상이 없는 것이다.
일념 염불과 무심 염불은 다를까.
일념으로 삼매에 들면 나와 부처님이 하나가 된다.
그러면 나도 없고 부처님도 없게 되는데 이를 무심염불이라 한다.
화엄교에서는 염불문을 다섯 단계로 구분한다.
궁극적으로는 같은 경계다.
염불삼매를 해서 나도 부처님도 없는 단계가 세 번째 단계다.
여기에 그 이전 두 단계와 이후 두 단계가 있다.
■ 첫 번째 염불문은 부처님뿐인 염불이다.
우리는 부처님이 계신 곳이라고 하면 극락세계를 떠올린다.
여기 법당은 극락세계인가.
부처님을 모신 자리가 불국정토다.
하지만 우리는 법당에 있음에도
사바세계에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 마음에 부처님을 모시면 가는 곳마다 정토다.
부처님뿐이다. 이렇게 하는 염불이 첫 번째 염불문이다.
■ 두 번째 염불문은 오직 마음뿐인 염불이다.
생각하고 뵙는 부처님은 모두 자기 마음에 의해서 한다.
내가 찾는 부처님은 내 마음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오직 마음인 염불문, 이를 유심(唯心)이라 한다.
내 마음에 의해, 내 마음대로, 내가 마음먹는 대로
부처님이 출현하는 장엄세계가 펼쳐진다.
이처럼 오직 마음뿐인 염불문을 말한다.
내가 마음먹은 대로 투사한 세계이므로
내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것이 염불이다.
내 마음이 청정해야 부처님이 나타나고
아름다운 세계가 드러나는 것이다.
곧 내 마음을 닦는 것이 염불이다.
한 겨울 얼어버린 연못의 얼음은 본래 물이다.
얼음이 물이 되려면 열을 받아 녹아야 하듯이,
내가 본래 부처님의 마음과 다르지 않음을 알고 스스로 다스려야 한다.
마음을 다스리는 마음 수행의 길이 염불이다.
마음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선법으로 마음을 붙들고, 법수로 마음을 씻어내고,
정진으로 마음을 흔들리지 않게 하며,
인욕으로 마음을 평탄하게 하고, 지혜로 마음을 밝게 한다.
부처님의 지혜마음인 자기 마음을 바로 보고
발현시키는 것이 마음 닦은 것이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여래지혜 마음이다.
하지만 지혜의 묘용을 나타내려면 공덕을 지어야 한다.
■ 세 번째 염불문은 앞서 설명한 대로 염불삼매의 무심염불이다.
■ 네 번째는 심불무애(心佛無碍) 염불이다.
마음과 경계가 걸림 없는 염불로 언제나 마음이고 항상 부처다.
신불무애는 은현자재(隱顯自在)하다.
■ 마지막 염불문은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표현한다.
부처님만 찾는 것이 염불이 아니라,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운전하는 모든 것이 다 염불이다.
이렇게 되면 내가 바로 법성불(法性佛)이고 오척법성신(五尺法性身)이다.
의상스님의 가르침으로
오척(五尺) 범부의 몸이 곧 법신(法身) 그 자체라는 것이다.
원융무애한 것을 법성이라 하는데,
내가 중생이 아니고 오척법성신으로 원융하게 되면
모든 것이 내가 된다. 전체가 법성신으로서 부처가 된다.
내가 곧 부처인 것이다.
염불하는 내가 바로 오척법성신으로서 본래 부처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 내가 염불하는 것은 오척법성불이 염불하는 것이니,
부처가 부처를 염불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 생을 기다릴 것 없이 염불을 하면
지금 바로 이곳이 온통 부처님뿐인 불국토가 된다.
이것이 오척법성신이 염불하는 염불수행이다.
이 오척신(중생의 몸) 그대로, 몸 바꿀 필요 없이,
기다릴 것도 없이, 장소 옮길 것 없이,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어떤 존재이든지
염불 공덕을 짓는다면 선재동자의 해탈경지에 이를 수 있다.
-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해주스님 신년대법회 법문
- 그림 / 주명자화백 - 문인화(蓮)
- 범능 스님 / 나무아미타불
[출처: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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