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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늘 가슴을 열리게 만드는 마력이 숨어 있다. 반복이란 습관과 도발이란 괴리 사이에 매몰되어 하루 또 하루를 살다 보면 버겁다는 의식이 실타래처럼 풀리기 시작한다. 일상이란 삶의 환경 속에서 멀리 바라다보며 느끼고 있던 동경의 대상을 내 안으로 끌어 모으는 것이 여행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동경의 껍질을 벗겨내는 일은 흡사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꽃밭을 날아다니는 자유의 향취를 닮으려는 의도가 다분하다는 생각이 자신의 생각이다. 용평을 다녀온 지 먼 시간이 흐른 것 같지만 가만히 시간의 흐름을 따져 보면 그리 먼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계절적인 요인만으로 가눔 한다면 억겁의 시간이 스치건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는 형편이다. 매몰찬 바람이 모든 것을 쓰러트리고 깊은 함정을 파 놓은 정적만 감도는 겨울 웅덩이, 그 쓸쓸함의 유혹을 이겨내고 꽃과 신록의 빛이 만들어 낸 생명의 환희가 짙은 계절적 향취와 더불어 다시 생명의 길을 열어나가는 시기로만 따져 본다면 흘러간 시간은 가물거리게 된다. 손주는 늘 여행의 시간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한다. 요즈음 아이들은 형제가 없고 나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늘 고독한 입장이다. 타인의 손에 맡겨진 채 자라나는 아이들은 특히 혈육 간에 느낄 수 있는 사랑이 부족한 것이다. 아이들 내면에 깔려 있는 잠재된 의식은 도외시 한채 모든 것을 물질적 보상만으로 다하려 하니 아이들은 점점 혈육에 대한 정에 대하여 편견을 갖고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조금이라도 덜어내 주기 위하여 손주와 철 따라 계획한 여행은 좋은 결정이었다. 이번 여행의 태마는 남해 봄바다를 마음에 수채화처럼 그리기였다. 더불어 나라를 구한 성웅 이순신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개인적인 이익보다 사회에 이익, 그리고 국익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깨달음의 사유를 하는 시간을 갖기로 한 것이다.
출발 전일 오후 늦은 시간에 도착한 외지의 식구, 함께 자고 아침에 일어나 7시에 출발선을 잡았다. 5시 40분에 일어나 슬며 시 미리 쌓아 놓은 Back-peack 두 개를 들고 차에 실어 놓고 차를 다시 정비 상태를 재 점검하기 시작하였다. 타이어 공기압력, 오일 적정량, 전조등을 비롯하여 후미 등을 살피고 냉각수, 세척용수, 와이퍼 작동, 핸들 조향감, 연료, 전방 카메라 작동 여부, 각종 계기 작동 여부 등을 확인, 완벽하였다. 다시 올라 가 가족들의 짐을 전부 옮겨 트렁크에 실은 후 지하 주차장을 서서히 빠져나왔다. 주행거리 계기는 지금은 0이지만 여수에 도착하였을 때 400km라고 찍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를 이야기할 때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말한다. 함경북도 최북단에서 서울까지 천리, 서울에서 남해안까지 천리 그리고 제주도까지 천리를 합하여 삼천리라 부른 것이다. 오늘 우리 일행들이 가야 할 거리가 바로 천리 길이다.
라마다 플라자 바이 윈덤이 오늘 최종 목적지다. 이곳이 우리들의 베이스 켐프다. 체크인이 15 시인 관계로 도착 후 점심은 호텔 주변 식당에서 해결하는 것으로 하고 하행하면서 만나게 되는 휴게소 3곳을 선정하여 간략한 휴식과 간식을 챙기는 것으로 하였지만 1시간 정체로 오전 시간을 빼앗겨 정안 휴게 소외 1곳 만으로 변경한 후 후 여수에 도착하여 이순신광장과 주변을 탐방하기로 계획을 잡아 두었다.
호텔 위치를 확인 후 부근 향일암으로 가는 국도변에 있는 동백 한정식을 찾아 점심을 해결한 후
다시 차를 몰아 돌산대교를 건너 이순신 광장을 찾았다. 맛도 음식의 양도 부족함이 없던 집이었는데 역질의 영향으로 2년 고난의 시간을 보낸 덕에 그런지 옛날보다 너무 판이하였다. 그러나 이해가 쉽게 되었다. 지금 시대적 상황을 모른척한다는 것은 너무 이기적인 심성이 아닌가! 다시 돌산대교를 넘어 이순신광장에 가기 위하여 주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린 후 가족들을 먼저 길을 건너가라고 한 후 돌산대교 북단을 사진에 담아 두었다.
사진을 잡은 후 바로 길을 건너가려다 섬찟한 기운이 느껴져 다가 가보니 우리 민족의 아픔이 가득 담긴 애한이 서린 평화의 소녀상이 눈에 띈 것이다.
시대적인 아픔의 상징, 위안부~ 나라를 잃은 서러움이 오버랩되면서 슬픔이 몰려왔다. 대륙 끝에 매달려 버티고 살아온 백의민족 한국인, 가슴에 안고 있는 수많은 역사는 늘 마음에 날카로운 비수가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이 서려있다. 패자는 늘 승자들이 요구하는 굴욕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는 아픔이 바로 역사다. 남한산성에 갇혀 지내다 도저히 견딜 수 없자 결국 삼전도로 나가 승자가 요구하는대로 항복의 예를 치른 후 돌아가는 청 태조를 따라 불모로 세자 부부와 수많은 양인들 처자들이 청국의 노예로 끌려간다. 그리고 세자 부부의 노력으로 노예에서 풀려 나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그들에게는 화냥년이라 치욕이 붙어 다니게 된다. 패자는 늘 굴종의 인고가 따르기 마련인 것이다. 가만히 다가 가 손을 잡아 보았다. 소녀가 겪었던 아픔이 파도가 밀려오듯 전이되어 나를 아픔의 시간으로 이끌어 주었다. 순간 성웅 이순신 장군이 목숨을 바쳐 지킨 나라를 어처구니없게 빼앗긴 결과가 소녀들을 치욕의 늪 속으로 빠져들게 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나를 매몰시켜 나갔다. 다시는 반복되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이 강하게 느껴졌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치밀한 계획 아래 시작되었다. 속수무책으로 패전을 거듭하던 초반의 전투는 조선의 모든 이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혼돈의 시기를 제 자리로 돌려놓기 시작한 인물은 성웅 이순신 장군이셨다. 장군께서는 1545년 태어나 1598년 전쟁 중 생을 마감하게 되신다. 여수지방과 인연은 1591년 2월 전라좌수사로 부임하면서부터다. 장군께서는 일본의 대규모 도발적 침략을 알아차리고 만반의 대비를 착실히 해나갔다.
장군께서 전쟁 중 그 사실을 상세하게 기록한 일기, ‘난중일기’에 잘 드러나 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적극적으로 군사를 모아 조련하거나. 여러 가지 군사 기물과 시설을 점검하고 해전에 능한 병사와 선박을 확보해 나갔다. 특히 거북선 건조에도 힘을 기울였으며 1592년 2월 8일에는 “이날 거북선에 쓸 돛 베 29 필을 받았다. 정오에 활을 쏘았다”는 기록이 보이며, 2월 25일에는 “날이 저물어서야 방답(防踏)에 이르러 공사의 예를 마치고 무기를 점검했다. 장전(長箭)과 편전(片箭)은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걱정했으나 전투선은 어느 정도 완전해서 기쁘다”는 기록도 보인다. 4월 12일에는 거북선 제작을 끝내고 선상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시험 발사하였다. 고 적었다.
당시 장군께서 군사들을 지휘한 역사적 현장이 현재 전라남도 여수시 있는 진남관(鎭南館)이 그 현장이다. 전라좌수사 재직 때 이순신이 지휘본부는 진해루였으나,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 의해 불에 타 없어진 후 당시의 삼도수군통제사 이시언이 진해루 자리에 진남관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후 건물이 불에 소실되자 숙종 때 전라좌수사 이제면이 1718년 이순신 서거 12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세우게 된다. 진남관의 관문에 세운 망해루(望海樓)는 진남관 쪽에서 여수 시내를 바라보며 서 있는데, 일제에 의하여 식민지 시절 철거된 것을 1991년 4월 복원하였다.
진남관에서 바다 쪽으로 내려오면 장군의 동상과 거북선 모형을 전시한 이순신 광장을 만나볼 수가 있다.
천리 길을 달려와 마주한 여수, 많은 발전으로 해양도시 다운 모습으로 여행자를 반겨 주었다. 과거에도 오동도를 비롯하여 동백을 찍으러 무수하게 찾았던 지역이었지만 당시의 일들은 빛바랜 추억으로서 아련하게 마음을 적셔 주었다. 시간이 남아 있으면 미래지만 흘러가면 추억에 담 속으로 고이기 마련인 것이 시간의 역사다. 노년의 시간 중심에 서 있는 것이 나에 대한 현실이지만 여행은 이를 극복하게 해주는 것 같다. 동행하고 있는 딸도 중년이 되었고 손주 또한 점점 소년기를 벗어나려는지 목소릴 톤이 굵어지고 어깨도 두툼해지기 시작하였다. 햇수로 3년, 역질로 제한적인 생활 영향으로 몸이 많이 불었다. 현재 운동으로 체중을 조절하기 시작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수영을 어릴 적부터 배워 꾸준히 해오다 역질 창궐로 폐쇄하는 바람에 멈추게 되었는데.. 이러한 관계로 호텔 선택에 1 순위가 실내 수영장 설비가 된 곳이었다. 마침 라마다 호텔에 수영장이 있어 선택하게 된 것이다. 내일 야간 케이블카를 타기 전 수영 일정이 있는 상태다.
여수 시에서는 이순신 광장을 만들면서 임진왜란과 관련된 이순신과 여수 이야기, 해전도 등을 화강암으로 쌓아 세운 후 음영으로 상세하게 적고 그려 놓았다. 손주를 불러 세워 읽도록 하고 부족한 부분은 설명을 해 주었다.
장군에 삶의 기반은 세 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충남 아산, 전남 여수, 경남 충무가 이에 속한다. 충남 아산은 현재 현충사가 있어 장군님에 대한 소상한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어 찾는 여행객들에게 늘 감동을 준다. 그리고 여수 전라좌수영은 조선 성종 10년(1479)에 최초 설치되어 고종 32년(1895)까지 400여 년간 조선수군의 주진(主鎭)으로서 남해안 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의 수군 영(水軍營)이었다. 특히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이충무공이 거둔 해전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한 국난극복의 본거지로서 조선수군의 최고사령부였으며, 이후 지역의 정치와 행정의 중추가 되었다.
설영(設營)될 당시의 수군 영(水軍營)의 면모 갖추고 출발하였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크게 변모하게 된다. 「난중일기」에 축성에 관한 기록이 자주 나타나는데 1591년에 충무공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부임하면서 한층 더 정비되었다. 또한 헌종 13년(1847)의 허 섬의 「호 좌수영지에는 전라좌수영의 영성(塋城)과 병력, 군량미, 병기 등이 상당한 규모로 기록되어 있어서 조선 후기까지도 여전히 중요한 수군 영으로서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종 32년(1895) 이후 방치되다가 일제 치하가 되면서 영성과 관아 건물은 훼손되어 사라지기 시작한다. 1916년의 해면 매축(海面埋築)과 민가 조성의 영향으로 영성(營城)의 인멸을 더욱 가속화시키면서 전라좌수영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생애 가운데 장수로서의 덕과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구국 제민의 뜻을 편 때가 전라좌수영과 인연을 맺은 8년간(1591~1598)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8살(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우리 수군의 활약으로 전세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49살(1593년 8월)에는 조정에서 전라 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삼아 권한을 많이 주어 활약케 하였 쓰나 53살(1597년 3월)에는 왜군과 원균의 모함으로 투옥되었다가 백의종군의 억울함도 당하기도 하였다.
53살(1597년 8월)에는 다시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으며 54살(1598년 11월)에는 순천 외곽으로 후퇴한 소서행장의 퇴로차단작전을 명나라 장수 진린과 더불어 강행하던 중 1598년 11 월 19일 미명에 여수반도 건너편 남해도 관음포 앞바다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 본가는 부인께 맡기고 77살의 노모(변 씨 부인)를 아산에서 전라좌수영 근교 古音川(현 여수시 웅천동 송현 부락)에 모셨다. 이곳은 본영에서 20리 남짓하여 노모의 안 후를 살피기 쉬운 거리인 데다 충무공의 군관으로 있는 정대수장군 댁 초당인지라 안심하고 모실 수 있는 곳이었다. 장군의 난중일기중에서 노모에 관한 기록은 88일분을 남기고 있어 그의 효성을 짐작할 수 있다. 임란 3년째 갑오년 정월에는 노모와 설을 같이 지내며 "어머님을 뫼시고 함께 한 살을 더하게 되니 이는 난리 중에도 다행한 일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모친 생신 때 전쟁 중이라 직접 가 뵙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기고 있음을 기록에 남겼다.
특히 그가 모함에 빠져 투옥된 뒤 노모가 고음천에서 소식을 듣고 선편으로 아산 고향으로 올라오는 도중에 풍랑조차 만나 고통 끝에 82살로 숨을 거두었을 때 이 소식을 들은 공의 애달픈 마음, 그러나 금부도사의 재촉에 못 이겨 백의종군길을 떠나야 했던 공의 심정은 난중일기를 읽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호텔로 가기 전 아이스크림 전문점으로 몰려 갔다. 한낮의 기온이 여름 날씨였다. 아이스크림을 먹은 후 손주가 찍어 준 사진이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호텔로 출발하였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3시경, 체크인 시간이 되어 호텔로 가 예약된 한실로 들어 가 짐을 풀고 오후 일정을 소화하기 위하여
해양 레일 바이크 현장으로 쏜살 같이 달려갔다. 시간이 촉박하여 겨우 도착하여 관리자에게 양해를 구한 후 마지막 손님의 자격으로 해안선을 달려 나갔다. 터널을 향해 달리는 길은 내리막이라 속도조절이 필요하였다. 반환점에 도착하자 회전판을 돌려 되돌아갈 수 있도록 구조를 변경해 주어 원점회귀가 가능하였다. 되돌아가는 길은 오르막이라 건각을 세우고 힘차게 페달을 밟아야 한다. 레일 바이크를 달리면서 바라보는 해안선이 상당히 아름다웠다.
여수 해양 레일바이크는 국내 최초로 전 구간이 해변을 따라 운행되는 코스로, 마래터널 안에 들어가면 LED조명의 환상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인체공학을 바탕으로 설계된 레일바이크는 페달과 좌석의 거리를 사용자로 하여금 조절 가능하며, 남녀노소 누구나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 레일 총길이는 4.1km, 터널구간은 600m이며, 운행 소요시간은 약 1시간이다. 관리자 대표께서 손수 찾아와 찍어준 사진이다.
마지막 주자가 되어 바이크를 탄 후 바로 옆 해안가를 끼고 서 있는 커피점과 펜션이 아름다워 다가 가보았다. 건물 옆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면 해안선 따라 걷는 아름다운 길이 나온다. 몽돌 해안과 검은빛 모래가 펼쳐지는 곳이다. 오후 7시 30분까지 돌산대교 아래에 있는 크루즈 선착장으로 가야 한다. 오늘 일정 마지막이 바로 1시간 15분가량 여수 밤바다를 운행하는 쿠르즈 승선 일정이다. 서둘러야 했다.
레일 바이크를 타기 위하여 외곽으로 돌아 만성리 흑사 해수욕장을 지나 레일 바이크 탑승장에 도착하였다. 탑승 후 만성리 모래사장으로 접근하였다가 돌산대교 아래에 있는 야간 크루즈를 타기 위하여 가기 위하여 이번에는 마래 터널 길을 선택하였다. 1926년 식민지 시절 일본에 의하여 수탈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터널로서 총길이 640m에 높이 4.5m 암석층을 이루고 있는 곳을 중국인과 한국인들이 망치와 정을 이용하여 만든 국내 유일한 암반 터널이다. 차선은 1차선으로 중간에 5개의 피난시설을 갖고 있어 맞은편에 차가 다가오면 피난하며 운행할 수 있도록 하였지만 차량 운행이 증가함으로써 신호등을 설치하여 푸른 신호등이 들어오면 쏜살같이 달려 나가야 한다. 그리고 붉은 신호등이 켜지면 터널 5m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다 푸른 신호등이 들어오면 진입하도록 규정해 놓고 있다. 한국인과 중국인을 포함하여 3000여 명이 동원되어 일제 강압에 의하여 노동 착취된 결과물인 마래터널 모두 두 곳인데 한 곳은 레일 바이크 터널로 사용 중이다. 마래터널에는 괴담이 전해져 오는데 그것은 바로 통행인은 누구나 돌을 들고 지나가야 한다고 한다. 터널을 들어서면서 돌을 들고 들어가서 나온 후 돌을 던져 쌓아 놓아야 한다는 괴담인데 이것은 바로 공사관계로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을 추모하기 위한 일이 아닌가 한다.
시간이 부족하여 저녁을 거른 후 미남 크루즈를 타고 여수 밤 봄바다를 유영하기 위하여 선착장에 도착하여 대기하다 8시 정각에 출발하여 돌산대교 아래를 지나 이순신 광장을 지난 후 해양공원 앞바다를 지나서 이순신대교 아래를 지난 후 돌아서 낭만포차가 열리는 바다 옆을 지나면서 뱃고동 소리를 길게 내며 뱃 길을 열어 나가 다시 선착장에 21시 15분에 도착하였다.
산기슭 너머로 보이는 건물이 바로 우리들이 묵고 있는 라마다 호텔이다.
돌산대교 야경.
봄 바다 밤바람은 찼다. 그러나 야경만큼은 아름다웠다.
거북선 대교 야경이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저녁을 매식하는 것을 포기하고 호텔로 돌아와서 간단하게 요기하고 휴식을 취하기로 하였다. 하루가 빠르게 지나갔다. 천리길을 달려왔고 도착 즉시 촌음을 아껴 사용하며 첫 째날 일정을 소화시켰다.
여행 둘 째날
아침에 일어나 창 밖을 바라보자 여수 시내 전경이 들어찼다. 고요한 바다 수면과 더불어 물 밖에 모든 것들도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오늘도 분주한 하루가 될 것이다. 모든 채비를 끝낸 후 아침을 먹기 위하여 호텔 식당으로 내려갔다.
평소 선호하는 중심으로 선택하여 먹어 두었다. 음식은 먹는 순간부터 열량으로 바뀌면서 에너지가 된다. 여행 중 보통 쌓여가는 여독으로 컨디션이 불규칙하게 변해가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는 숙면과 음식 섭취 그리고 일정을 끝낸 후 온욕을 중심으로 피로를 풀어주는 것이 좋다. 이는 여행을 오랜 세월 해온 자로서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다. 불면과 과도한 음식과 음주는 오히려 여행에 방해가 되는 것이다. 또한 과도한 여행 스케줄도 경계해야 한다. 오늘 일정은 한 공간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걷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식사를 끝낸 후 9층 객실로 올라오다가 상층부에 마련된 전망대 구경을 가자는 제노의 제안이 있어 올라가 보았다.
북쪽 방향은 여수 해안이 멋지게 해양도시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었고
서남 방향은 향일암으로 가는 길이 가지런히 보였으며 호텔 옥상에서 시작하여 해안선으로 급격하게 떨어지는 집라인 시설이 있는 곳이다. 보는 이들의 마음을 서늘하게 해 준다. 내려간 후 호텔로 돌아오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될 덴데 걱정하고 있던 차 짚라인을 이용한 사람들을 모아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다시 끌어올리는 모습을 보고 안심이 되었다. 내일 떠나기 전 이용해 볼까 한다.
호텔에서 제공해 주는 커피를 받기 위하여 커피점에 들렀다가 다시 돌산대교를 건너 여수 해안 시내로 나갔다. 여수 해안에는 2개의 대교와 3곳의 광장이 있는 곳이다. 이순신 광장, 해양공원, 낭만포차 광장이 바로 그곳이다. 대교는 돌산도와 여수를 잇는 다리로서 돌산대교와 거북선대교가 있다. 돌산도는 도시구획이 잘 정비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돌산대교 준공을 기념하며 만들어진 돌산공원은 일몰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며 여수가 자랑하는 해상 케이블의 출발점이며 회귀 점이다. 육지와 돌산섬을 연결하는 멋진 관광자원이다. 케이블카 밑바닥이 투명한 것도 있어 탑승자에게 공포감을 촉발시키기도 한다. 우리도 저녁을 먹은 후 늦은 시간 탑승을 계획하고 있다.
여수 여객선착장과 어물 종합시장, 그리고 이순신 광장 사이에 마련된 해안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킨 후 이순신 광장에서 해안공원까지 걸으며 투어를 하였다.
고소 1004. 벽화 마을을 찾았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나는 서울의 발전사와 함께 삶을 이어 온 사람이다. 산비탈에 집을 짓지 않고 사는 것이 불문율이었는데 한국동란을 겪으면서 이북에서 남하한 사람들이나 외지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산비탈까지 집들이 들어서게 된 곳이 많았다. 이후 양성화되어 아파트로 공동 개발되거나 단독주택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부산지역도 피난민들의 영향으로 산비탈마다 마을이 형성되게 된다. 짐작하건대 여수도 또한 그러한 역사에 의하여 형성된 마을이 고소 1004 마을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앞섰다. 산비탈을 이용하여 정착된 마을의 길을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는 가파른 형세였다. 차량 진입은 불가능하고 걸을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된 골목길이었다.
2009년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조성 초기 1,004m의 골목길을 벽화로 장식하였기 때문에 고소 천사마을로 명명되었다. 현재는 1,650m 10개 구간으로 각 구간마다 여수의 역사, 문화, 생활 및 지역 이야기를 담고 있다.
좌수영다리를 건너 진입할 수 있는 진남 관문, 이순신광장과 연결되는 이순 신광 장문, 해양공원 낭만포차 구간에서 접근할 수 있는 낭만포차 문과 종포 문, 총 4개 구간에서 들어갈 수 있다.
식객의 저자, 하영만 화백의 벽회도 보인다.
고소 1004 벽화 마을을 탐방 후 해양공원을 둘러본 후 제노와 딸이 걷는 것이 불편하다 하여 주차장으로 가 낭만포차 지역을 차량으로 이동하여 탐방을 이어가기로 하였다.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우선 점심을 해결하기로 하고 포차 18호 집을 선택하여 찾아들었다.
선택한 메뉴는 고심을 하다 해물 삼합을 주문하였다. 친정 엄마가 직접 철 따라 어물을 잡아 직접 보내 준 재료로 만든 음식이라 다른 집 보다 신선도가 높아 맛이 다르다는 음식에 풍미가 있는 집이라 선택한 집이었다.
성웅 이순신 장군의 이름을 빌려 음식물의 이름을 만들고 이를 판매한다는 자체가 개인적인 정서와 달라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망설인 것이다. 상술이라는 것 귀신의 이름도 빌려 쓴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그냥 거북선 삼합이라 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임란 삼합이라고도.... 아무튼 늦은 점심을 챙긴 후 시간으로 보니 오후 일정 때문에 다시 돌산으로 건너가야 하였다. 이곳에 낭만 포차는 저녁에 많은 이들이 찾는 포차가 거북선대교 아래에 열리는데 이들이 만들어 손님들에게 제공하는 음식이 다채롭다. 특히 바닷가 가까이 붙어 있어 주홍빛 천막 투명 비닐 창으로 보이는 밖에 해안 풍경이 술 맛돠 어울려 낭만적인 포차의 정경을 그려내는 곳이다.
돌산으로 돌아온 후 늦은 오후 일정을 위하여 제노는 방에서 쉬고 손주와 딸과 함께 호텔 수영장으로 내려갔다. 손주가 사회적 영향으로 동안 수영장을 갈 수 없었다. 이번 여행을 빌려 수영을 하며 몸을 풀어 다시 수영을 하려는 의도가 있는 모양이다.
햇빛이 가려진 날씨 환경이라 날은 많이 찼다. 수중 온도를 인위적으로 올려놓은 곳을 선택하여 들어 간 후 몸을 풀며 시간을 보내다. 손주가 수영장으로 건너가는 것을 본 후 따라 가 하는 모습을 참관해 보얐다. 대회에 나가 4등까지 한 적이 있다. 수영장 마주 보며 서서 짧은 동영상을 만들어 보았다. 한기가 섞인 바람이 불어 춥게 느껴졌다. 콧 뿔이라도 걸리면 운행을 책임지고 있는 자로서 낭패일 것 같아 동영상을 찍은 후 샤워장으로 가 정리하고 먼저 방으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한 참 시간이 지난 다음 손주가 들어왔다. 잠시 후 여수 서쪽 하늘가에 노을이 들듯하더니 하늘에 구름이 뒤덮자 노을의 낌새는 사라졌다. 저녁을 먹기 위하여 돌산대교 건너 직진 후 좌측 봉산동 맛 집을 찾아나 섰다. 호텔 측에서 제공한 맛집 정보를 제노가 받아다 하여 찾아가기로 하였다. 현지에 도착하니 식당 옥호가 같은 집이 두 곳이나 있어 혼선을 주었지만 매의 눈으로 제노가 정확하게 구별해 내었는데 주차할 자리가 없어 크게 원을 그리며 돌았다. 그리고 문을 닫은 카센터에 차를 데려하다가 혹시 주인이 급하게 사용할 경우 불편 줄 것 같아 다시 골목길로 나와 주차된 다른 차 꽁무니에 간신히 주차를 한 후 걸어서 식당에 다시 도착하였다. 옥호는 정다운이었다. 참 정겨운 이름이다. 그러고 보니 얼핏 방송을 통해 본 듯한 기억이 떠올랐다.
관리자가 안내해 주는 대로 자리에 우선 앉아서 입구 벽면에 걸린 메뉴판을 본 후 백반으로 시켰다. 그리고 실내를 살펴보자 실내 인테리어가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으며 제법 손님들이 가득하였다. 주혁이가 먹을 것이 없다는 듯 딸 걱정 어린 이야기를 습관처럼 하였지만 손주는 늘 적응을 잘하는 편이다. 게장 맛이 일품이었고 갓김치 또한 맛깔스럽고 다른 음식들도 환상의 여수지방 맛을 보여 주고 있었다.
여행 중에 맛보는 특산 재료로 그 지역의 고유 맛을 내어 제공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여행의 추억으로 고스란히 남게 된다. 보고, 자고, 먹는다. 이것은 정주하는 삶의 터전에서 일상이지만 객지에서 맞이하는 것은 색다른 감정을 일깨워 준다. 경험은 신비감이 이미 사라진 후에 감정이지만 모든 것이 경험이 제외된 또는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우선 기대감이 충만된 상태이기에 결과치가 좋으면 감동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음식은 제맛을 지녀야 입맛도 살아나고 감정의 맛도 피어오르게 되는 것이다. 너른 평야와 풍부한 해산물 산지를 갖고 있는 호남은 식탁 맛과 문화가 남다른 고장이다. 기억에 남을 저녁을 챙긴 후 오늘 끝 일정을 위하여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대교를 건너 거북선 대교 사거리에서 유턴을 하여 돌산공원 언덕으로 올라갔다. 해상 케이블카를 타기 위함이었다.
사랑의 결실을 맺는 꿈의 장소라는 선전용 하트가 눈 길을 끌어 손주를 세웠다. 사랑은 어느 한 사람, 년령 대에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랑은 포괄적이다. 생명을 지니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존중 받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너와 나 사이에 특히 젊은 나이에 존재하는 강렬한 사랑도 필요하지만 잔잔한 애정어린 마음으로 상대를 모듬고 지켜보고 관심갖으며 쏱는 사랑은 인간애의 최고인 것이다. 사랑한다는 마음은 애정에 마음도 박애의 마음도 정을 주고 받는 마음도 같은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바로 평화와 연결 짓게 된다. 인간에게서 송두리째 사랑을 지워 버린다면 인간은 저절로 소멸의 과정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자연이 죽으면 인간도 죽는 것처럼 말이다.
할머니는 늘 손주 등 뒤에 숨고 싶은 모양이다. 이런한 잠재적 마음은 바로 아이가 바르게 자라 누구에게나 귀감이 되도록 성장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의 발로 일 것이다. 하긴 어른은 자신을 내 보이지 않고 뒤에 숨어서 사랑으로 키우는 모습일 때 아름다운 어른으로 비쳐 주는 것 같다.
숲 울 떠나 해상으로 나가자 고도감이 심하게 다가왔다. 저 아래 보이는 불빛이 상당히 먼 거리다.
거북선 대교 아래 낭만포차도 보이고
표류하여 조선에 입국하게 된 하멜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하멜등대도 아름답게 다가왔다.
해상 게이블 카가 지나가는 하늘 길 좌측 여수 밤 야경 모습이다. 고소 1004 벽화마을이다.
가는 길에 강풍이 부는 곳이 몇 군데 있어 케이블카가 상당히 흔들려 공포감을 준다. 바다 위에 들어서면 속도를 아주 천천히 운행하여 보기 좋은 야경과 더불어 공포감을 모아주기도 한다.
건너 승차장에서 하차 후 로비로 걸어 내려가 재 수속을 밟은 후 다시 탑승하게 만들어 놓았다. 다시 걸어서 오른 후 재 탑승하여 다시 돌산 공원 방향으로 되돌아왔다. 바닥에 발을 딛자 안도의 호흡이 느껴지면서 맥박도 정상으로 돌 온 듯한 느낌이 살아 났다. 공포에서 벗어났다는 심리적 안도감 일 것이다.
세 째날
여행 마지막 날이다. 계획한 대로 여행 동선을 고집하면 극심한 여독에 시달릴 것 같은 생각이 깊어져 마음 고생을 하며 여행 동선을 재구성 하며 아침을 맞이 하였다. 예정대로라면 통영까지 탐방 후 귀경할 계획이었지만 여수에서 통영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약 2시간 정도 소요된다. 그리고 통영 곳곳과 한산도까지 살핀 후 귀경한다면 당일 운전하는 시간만 약 8시간 이상 소요될 수 있다. 지금 자신의 나이를 고려한다면 과도한 생각이다. 하루 일정이 더 있다면 가능하겠지만 2박 3일로서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다. 귀경하면서 아산 현충사를 탐방하는 것으로 변경하거나 구례나 남원에 들러 노고단이나 광한루를 경유하여 가는 것으로 변경한 후 서로의 의견을 듣고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결론은 아산은 서울과 가까운 거리이니 언제나 갈 수 있겠지만 구례나 남원은 먼 거리인 관계로 다시 오려면 어려우니 올라가는 길, 고속도로에서 가장 가까운 남원을 선택하기로 하였다.
호텔식으로 조식 후 제노가 필요한 선물을 몇 가지를 구매하기 위하여 여수 어물 중앙 시장으로 갔다. 상품 구매는 세 명이 가는 것으로 하고 나는 주차장에서 대기하며 차량을 점검해 보았다. 타이어 압력, 보충수, 연료, 엔진오일상태, 조향장치 정상작동 여부, 각 계기판 작동 관계, 전조등을 비롯하여 후 등, 점멸등을 체크하고 마지막으로 안전벨트 상태도 살폈다. 그리고 고속도로 통행 카트 잔금 내용도 확인한 후 연료 보충 시기와 통행카드 보충 휴게소로서 정한 휴게소가 제일 적당하다는 판단을 하고 결정해 두었다. 그리고 남원 광한 루 일정을 미리 계획한 후 소요시간을 가눔해 놓았다. 마지막으로 서울 도착 예상시간을 정한 후 저녁을 함께 먹을 식당까지 제노와 딸과 함께 미리 정해 둔 것을 생각하며 귀경시간은 오후 7시면 충분하였다. 그리고 식당 부근 서점에 들러 제노가 손주에게 선물할 책 1질까지 결정해 두었기에 책을 구매하여 선물한 후 집에 도착하면서 여행은 종료되는 것이다. 차량 점검 후 시간이 남아 주차장 밖으로 나와 이순신광장을 걸어 보았다. 어제와 달리 날은 쾌청하였다.
소녀의 시선으로 소녀에 그리움에 사무친 마음을 가눔하며 소녀의 고향을 바라보듯 마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빈 의자에 누구를 앉혀 놓아야 소녀에게 위로가 될까? 하는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 그분은 바로 소녀를 낳아준 어머니가 아닐런지 모르겠다. 우리는 역사가 반복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륙의 끝에 매달리듯 붙어 있는 한반도의 나라 한국, 그리고 그 지척에 각종 자연재해를 두려워하며 버티며 살고 있는 해양국가 일본, 고대사 만큼은 일본이 한국에 콤플렉스가 존재하고 대신 한국은 일본에게 근대사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우리에게는 일본은 필요악의 존재가 아닌지 모른다. 지정학적으로나 이념적 현실로서 만 본다면 협력관계가 있어야 할 처지가 아닌가 한다.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북한의 결속을 보고 끝없이 핵보유의 야망으로 핵무기 발전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북한을 보면 우리 또한 자유주의 체제와 상당한 결속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광장 앞에 놓인 거북선을 바라보며 성웅 이순신 장군을 떠 올렸다. 호국의 맹장인 이순신 장군, 마침 우리들의 여행 일정인 28일이 477회 탄신일이었다.
여수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 및 1593년 8월 최초의 3도 수군통제사로 제수돼 부임한 곳이다. 3도 충남, 전남, 경남 수군을 지휘한 최고 사령부인 본영으로써 임진왜란을 승전으로 이끈 국난 극복의 본거지가 여수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울산, 부산 통영 등 임진왜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3도 수군 통제영으로서 여수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전쟁을 원활하게 수행하고 통제하기 위하여 한산도로 통제영을 옮겨 전쟁을 효 과적으로 수행하였다. 이러한 결과가 통제영에서 제자를 뺀 후 지역의 이름을 통영이라 한 것이다. 진정한 호국의 인물은 언제나 필요하고 국가의 간성인 군은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도 이번 여행은 손주에게 많은 의미가 깃든 여행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시장에 갔던 일행들이 돌아와 여수 외곽으로 차를 몰아나갔다.
오랜만에 찾아온 광한루, 우린 서문 쪽으로 접근하였다. 먼저 한복을 빌린 후~~
엄마랑 멋진 깜보 사이인 손주
자라 바위에 앉아 장원급제 꿈울 꾸었을까?
모든 여행 일정은 광한루에서 종결되었다. 이제는 안전하게 귀경한 후 일상으로 돌아 가 각자 주어진 삶을 자신의 방식대로 그려 나가야 한다. 늘 선함으로 시작하고 매듭짓는 정의로운 선택을 하고 나눔의 가치를 실천하며 살아가야 한다. 삶이라 하는 것은 그 출발은 연(緣)에 의하여 시작된다. 으리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신과 연관되는 것들과 촘촘하게 연결의 끈을 갖고 살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사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인정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사랑하고 배려하고 살아간다면 제대로 된 삶을 구현하게 되는 것이다. 천천히 국도와 고속도로를 교차해 가며 가장 합리적인 길을 선택해가며 귀경길을 잡아 나갔다. 안성을 도착할 즈음 경부고속도로의 소통성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다른 대안을 찾을 것인가 고민을 거듭하다 오산 즈음 왔을 때 차량 속도를 가늠하여 계속 직진을 선택하였다. 올바른 판단이었다. 편안하게 서울 톨게이트를 통과 후 마지막 JC에서 잠시 정체성이 있었지만 예상한 대로 저녁을 나누고 책을 사준 후 여유롭게 도착할 수 있었다. 손주는 다시 새롭게 계획되는 여행을 기다릴 것이다. 살아 있는 한 가족들과 함께 하는 여행을 위한 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다들 감사하고 수고 많으셨다는 말을 아끼지 않고 들려주었다. 나 또한 수고 많이 하였다는 답을 놓치지 않고 말을 답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