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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와 당[唐]과 요동[遼東]의 불함산[不咸山]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으로 발길을 옮기며 제[第] 삼[三]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으로 전하는 반만년 조선사[朝鮮史]의 역사서[歷史書]는, 근대[近代]의 조선[朝鮮] 말엽까지 다소 혼란[混亂]스럽고 의아스러운 기록[記錄]들이 있었으나,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의 강역[疆域]과 우리 역사[歷史]의 근본[根本] 흐름에 있어서는 크게 어긋남이 없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사서[史書]와 고지도[古地圖]을 포함하여 당대[當代]에서 가르치고 있는 역사[歷史]는, 역사서[歷史書] 원전[原典]에 실려 있는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는 상관없이, 왜곡[歪曲]과 조작[造作]과 거짓과 위선[僞善]으로 얼룩진 망국[亡國]과 망발[妄發]의 역사[歷史]일 뿐이다.
지나간 세월의 당[當] 시대에 살던 선대[先代]들이 남긴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을 무시하고, 식민[植民]의 잔재[殘在]로 얼룩지고 거짓으로 날조[捏造]된 역사[歷史]를, 의문[疑問]하나 제기하지 않고 가르치는 행위[行爲]는, 어떠한 이유[理由]로도 설명[說明]되고 이해 될 수 있는 사안[私案]이 아니다.
조선사[朝鮮史]의 후예[後裔]들이 반도[半島]의 한국[韓國]에서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은, 역사[歷史]의 사실[事實]대로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또한, 역사[歷史]의 사실[事實]과 진실[眞實]은, 이를 은폐[隱蔽]하고 가린다고 해서 없어지고 묻혀지는 것이 아니다.
암흑[暗黑]의 세월이 지나고 광복[光復]을 맞이하여 바로 세워져야 할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는, 가증[可憎]스럽고 망국[亡國]으로 치닫는 식민사학[植民史學]을 쓸어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더 고착[固着]화 되는 비운[悲運]을 맞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라에 정도[正道]가 사라지면 국가[國家]를 위태[危殆]롭게 하고 난[亂]을 일으키는 간신[奸臣]배들이, 하늘을 찌를 듯 기세[氣勢]를 올리며 세상[世上]을 어지럽히고, 혼란[混亂]을 일으키며, 국가[國家]와 백성[百姓]들을 망국[亡國]으로 치닫게 하는 실예[實例]들을, 역사[歷史]는 우리들에게 이를 생생[生生]히 보여주고 있다.
역사[歷史]는 천하[天下]의 정도[正道]와 직결 된다. 역사[歷史]속에는 성현[聖賢]의 도[道]와 선대[先代]의 가르침과, 천하[天下]에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이치[理致]와, 조상[祖上]의 숨결과 그 정신[精神]과 혼[魂]이 담겨져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으로 발길을 옮기며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작금[昨今]의 현실[現實]을 돌아보면서, 정도[正道]와 사도[邪道]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인간[人間]으로서 옳고 그름이 없어져 가는 세상[世上]을 바라보며 의연히 통탄[痛嘆]을 금[禁]할 수가 없다.
천하[天下]를 통일 했다는 진[秦]나라가 망[亡]할 때,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했다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故事]가, 수[數] 천년[千年]의 세월이 흘러 오늘날에도 생생히 전[傳]해지고 있는데, 오늘날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고 벌어지는 각종[各種] 행태[行態]들은, 이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가 소위, 중국[中國]이라고 부르고, 사서[史書]에서 중국[中國]이라고 기록[記錄]하고 있는 나라들은 어디에 위치[位置]하고 있었을까 ? 그 중에서도 고구려[高句麗]와 일전[一戰]을 벌였던 당[唐]나라는 어느 지역[地域]을 차지하고, 어느 지역[地域]에 중심[中心]을 두고 있었을까 ?
신라[新羅]의 말기[末期]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당[唐]나라에 들어가서 학문[學文]을 닦고, 당[唐]에서 벼슬을 하였으며, 문장[文章]으로 천하[天下]를 뒤흔든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문집[文集]을 보면서, 당[唐]나라의 실체[實體]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 문집[文集] 하나 만으로도 지금 세상[世上]에 나와 돌아다니는 고지도[古地圖]라고 하는 것들과, 변조[變造]된 사서[史書]에 맞추어 역사[歷史]를 해설[解說]하고 있는 내용들이, 얼마나 황당무계[荒唐無稽]하고, 거짓과 위선[僞善]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인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기[記]
보안남녹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
交趾四封 圖經詳矣 然而管多生䝤 境邇諸蕃 略採俚譚 用標方誌 安南之爲府也 巡屬一十二郡 峯驩演愛陸長郡諒武定武安蘇茂虞林 羇縻五十八州 [중략]
교지[交趾]의 사방[四方] 봉강[封疆]은 도경[圖經]에 상세히 보인다. 그런데 관내에는 생료[生䝤]가 많고, 국경[國境]은 제번[諸蕃]과 가깝다. 그래서 대략 민간에 전하는 그 지역의 이야기를 모아서 부문별로 상세히 기록[記錄]해 보고자 한다.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는 12개 군[郡], 봉[峯] 환[驩], 연[演], 애[愛], 육[陸], 장군[長郡], 양[諒], 무정[武定], 무안[武安], 소[蘇], 무[茂], 우림[虞林]을 거느리고, 58개 주[州]를 관할한다. [중략]
府城東至南溟四百餘里 有山橫亘千里而遙 邃穴深巖 爲䝤窟宅 蠻蜑之衆六種 星居隣諸蕃二十一區 管生䝤二十一輩 水之西南則通闍婆大食之國 陸之西北則接女國 烏蠻之路 [중략]
부성[府城] 동[東]쪽에서 남[南]쪽으로 바다까지 400여 리[里]요, 산[山]이 천리[千里]에 가로 걸쳐서 멀리 벋어 있다. 깊숙한 암혈[巖穴]은 요인[䝤人]이 거주하는 곳이다. 만단[蠻蜑]의 무리 여섯 종족[種族]이 분산해서 거주하는데, 제번[諸蕃] 21개 구역과 이웃하면서, 생료[生䝤] 21개 부락을 관할하고 있다. 물의 서남[西南]쪽은 사바[闍婆]와 대식국[大食國]의 나라로 통하고, 육지[陸地]의 서북[西北]쪽은 여국[女國]과 오만[烏蠻]으로 가는 길과 접해 있다. [중략]
曾無亭堠 莫審塗程 跂履者計日指期 沈浮者占風定信 二十一國鷄犬傳聲 服食所宜 大較相類 管內生䝤 多號山蹄 或被髮鏤身 或穿胸鑿齒 詭音嘲哳 姦態睢盱 [중략]
그동안 정후[亭堠]가 없었기 때문에 노정[路程]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발로 다니는 사람은 날짜를 헤아려 기한을 정하고, 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바람 기운을 점쳐서 약속을 정한다. 21개 나라는 닭과 개의 소리가 서로 들리고, 의복과 음식의 습성[習性]도 대개는 서로 비슷하다. 관내[管內]의 생료[生䝤]는 흔히 산제[山蹄]라고 부른다. 머리를 풀어 헤치기도 하고 문신[文身]을 하기도 하며, 가슴을 뚫고 이를 뾰족하게 갈기도 한다. 그리고 괴상한 소리를 내며 조잘거리기도 하고, 간교[奸巧]한 눈빛으로 노려보기도 한다. [중략]
固恃險阻 各稱酋豪 遠自漢朝 迄于隋季 荐興邊患 頗役遐征 馬將軍標柱歸時 寸分地界 史摠管倒碑過後 略靜海隅 [중략]
그들은 지세[地勢]가 험조[險阻]한 것만을 굳게 믿고서 각기 추호[酋豪]라고 일컫고 있다. 멀리 한[漢]나라 때로부터 수[隋]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변경[邊境]에서 자주 환란[患亂]을 일으켜 자주 원정[遠征]하는 일을 벌이곤 하였다. 마 장군[馬將軍]이 기둥을 세우고 돌아오면서 땅의 경계[境界]가 조금 분정[分定]되었고, 사 총관[史摠管]이 비석[碑石]을 넘어뜨리고 지나간 뒤로 해우[海隅]가 약간 안정되었다. [중략]
然後使電母雷公 鑿外域朝天之路 山靈水若 偃大洋沃日之波 安南經岝口 天威神功所開 播在遠邇 遂得絶蠻諜之北窺 紆漢軍之南戍 [중략]
그런 뒤에 번개와 우뢰로 하여금 외역[外域]에서 조천[朝天]하는 길을 뚫게 하였고, 산신령과 물귀신으로 하여금 햇빛을 가리는 대양[大洋]의 거센 파도를 잠재우게 하였다. 안남[安南]은 작구[岝口]와 천위[天威]의 길을 경유하는데, 신[神]의 공력으로 개통되었다고 원근[遠近]에 소문이 퍼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만이[蠻夷]의 첩자[諜者]가 북쪽을 엿보는 길을 끊어 버리고, 한[漢]나라의 군대가 남[南]쪽을 지키는 수고를 덜 수 있게 되었다. [중략]
所謂蘊先見之能 察未來之事 呼吸而陰陽不測 指蹤而神鬼交馳 實爲天工人其代之 斯實可爲異矣 聊補所闕 敢貽將來 時翠華幸蜀之三載也 [중략]
이는 이른바 선견[先見]의 능력을 깊이 쌓아 미래[未來]의 일을 살핀 것으로, 호흡하는 사이에도 음양[陰陽]의 조화[造化]를 헤아릴 수 없고, 한번 지휘하면 신[神]과 귀신[鬼神]]도 서로 치달린다고 하는 것이니, 실로 하늘의 일을 사람이 대신 행한 것인 만큼, 이것이야말로 기이[奇異]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에 나름대로 빠진 부분을 보충[補充]하여 감히 후세[後世]에 전[傳]하는 바이다. 지금은 취화[翠華]가 촉[蜀에 행차하신지 지 3년째 되는 해이다. [중략]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기[記]
서주 나성도기[西州羅城圖記]
西州羅城 四仞高 三尋闊 周三十三里 乃今淮海太尉燕公所築也 粵若梁州別壤 蜀國雄都 內跨犍牂 外聯蠻蜑 左臨百濮 右挾六戎 咽喉之控引寔繁 唇齒之輔依難保 [중략]
서주[西州]의 나성[羅城]은 높이가 4인[仞]이고, 폭이 3심[尋]이고, 주위가 33리[里]이다. 이 성[城]은 바로 지금의 회해[淮海] 태위[太衛]인 연공[燕公]이 쌓은 것이다. 이곳으로 말하면, 양주[梁州]의 특별한 지역이요, 촉국[蜀國]의 웅장한 도읍[都邑]으로서, 안으로는 건장[犍牂]을 걸터앉고 밖으로는 만단[蠻蜑]과 연결되며, 왼쪽으로는 백복[百濮]에 임하고 오른쪽으로는 육융[六戎]을 끼고 있다. 교통의 중심지[中心地]로 왕래가 매우 많지만, 순치[脣齒]의 보의[輔依]가 되는 것은 보장하기가 어렵다. [중략]
公鄆行次咸陽 除授西川節制 遙銜睿略 倏達成都 于時驃信屯兵 逼郊隊而纔踰一舍 黔黎失業 焚里閭而何啻萬家 彼則擧國而濟師 此則闔城而受弊 外熾崑岡之焰 噀酒無能 內枯疏勒之源 指梅何益 莫非枕倚墻壁 誰堪擐執甲兵 [중략]
공이 운성[鄆城]에서 함양[咸陽]에 도착했을 때 서천 절제사[西川節制使]에 제수되었다. 이에 멀리 임금의 책략[策略]을 받들고서 급히 성도[成都]에 도달하였다.
이때에 표신[驃信]이 교수[郊遂]에 바짝 다가와서 겨우 일사[一舍] 를 남겨 놓고는 군대를 주둔시켰다. 백성[百姓]은 생업[生業]을 잃었고 민간의 불탄 집도 1만 가호[家戶]가 넘었다. 저쪽은 온 나라가 힘을 기울여 군대를 동원하였고, 이쪽은 하나의 성 전체가 고스란히 피해를 당하고 있었다. 밖으로 곤강[崑岡]의 화염이 거세게 치솟았으니, 술을 내뿜어서 끌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안으로 소륵[疏勒]의 냇물이 고갈되었으니 매실[梅實]의 신맛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장벽[墻壁]에 몸을 기대고 누워 있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그 누가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으려 하였겠는가 ? [중략]
所謂有非常之人 然後有非常之事 有非常之事 然後有非常之功 是以 非常者固非常人之所覬也 [중략]
이것이 이른 바, 비상한 사람이 있은 뒤에야 비상한 일이 있게 되고, 비상한 일이 있은 뒤에야 비상한 공을 세우게 된다. [有非常之人 然後有非常之事 有非常之事 然後有非常之功]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그러므로 비상[非常]한 공[功]은 실로 상인[常人]이 넘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다. [중략]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당장[堂狀]
하입만사회장[賀入蠻使廻狀]
漢使傳詔 則星廻象林 蒙王奉琛 則雲集龍闕 能擧羈縻之術 果悛倔強之心 若非聖上德叶棄瑕 化敷柔遠 則何以感鐻耳鏤身之衆 啓隳肝瀝膽之誠 [중략]
한[漢]의 사신[使臣]이 조서[詔書]를 전하매 사성[使星]이 남만[南蠻]의 상림[象林]에 감돌고, 몽왕[蒙王]이 보옥[寶玉]을 바치매 채운[彩雲]이 용궐[龍闕]에 모여듭니다. 기미[羈縻]의 계책[計策]을 제대로 거행하여 강퍅한 심술[心術]을 고치게 하였으니, 결점을 덮어 주는 성상[聖上]의 덕[德]과 먼 지방을 회유[懷柔]하는 교화[敎化]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귀에 구멍을 뚫어 고리를 매달고 몸에 무늬를 새겨 넣는 무리들을 감동시켜서, 간담을 쪼개 속마음을 토로하는 정성을 보이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 [중략]
某比者南尋銅柱 西鎭劍關 曾施上將之謀 免辱大君之命 今則遠聆盛事 倍切歡心 陳賀末由 無任欣抃云云 [중략]
모[某]는 그동안 남[南]쪽으로 동주[銅柱]를 찾고 서[西]쪽으로 검각[劍閣]의 관문[關門]을 진수[鎭守]하면서 상장[上將]의 지모[智謀]를 베풀어 대군[大君]의 명[命]을 욕되지 않게 하려고 하였는데, 지금 멀리서 성대한 소식을 듣고 보니 기쁜 마음이 갑절이나 더 절실해지는바, 어떻게 하례할 길이 없이 환희하는 심정을 금할 수가 없기에 이렇게 장문[狀文]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중략]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별지[別紙]
유주이가거대왕[幽州李可擧大王]
靑氈帳一口 金銅裝鉸具
청전[靑氈]의 장막 1구[口], 금동[金銅]으로 장식한 교구[鉸具]
右伏蒙恩私 特賜惠賚 委之專介 衛以壯夫 遙陟危途 得張官舍 不假棟梁交構 能令戶牖全開 出觀則一朶蓮峯 入玩則千重錦浪 [중략]
은혜[恩惠]를 베푸시어 특별히 보내 주신 위의 선물을 잘 받았습니다. 전담하는 사자[使者]를 보내면서 장부[壯夫]에게 호위하게 하여 멀리 위험[危險]한 길을 건너가 관사[官舍]를 설치하게 하였습니다. 굳이 들보와 기둥을 세우지 않고도 문을 전부 열어 놓게 할 수가 있으며, 나가서 보면 한 송이 연꽃 봉오리와 같고, 들어와서 구경하면 천겹[千裌]의 비단[緋緞] 물결이 출렁입니다. [중략]
莫不衒沙漠之奇模 駭江淮之衆聽 臥龍竊譽 固當高枕無憂 虜豹成功 必可運籌決勝 唯期剋捷 全賴庇庥 荷戴所深 啓陳何及 伏惟云云 [중략]
사막[沙漠]에서 기이한 모양을 자랑하매 강회[江淮]의 대중[大衆]이 듣고서 놀라지 않음이 없습니다. 와룡[臥龍]의 영예[榮譽]를 훔치면서 진실로 걱정 없이 높이 누워 있기에 합당하고, 노표[虜豹]의 공[功]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장막[帳幕] 안에서 필승[必勝]의 전략[戰略]을 강구할 것입니다. 오직 승첩[勝捷]을 올릴 수 있다면 이는 전적으로 비호[庇護]해 주신 은혜 덕분이라고 할 것이니, 깊이 감사드리는 이 심정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운운. [중략]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별지[別紙]
유주이가거태보[幽州李可擧太保]
安南開海路圖一面
안남개해로도[安南開海路圖]1면[面]
西川羅城圖一面 並八幅紫綾緣
서천나성도[西川羅城圖] 1면[面], 모두 8폭[幅], 붉은 비단[緋緞]으로 선을 두름
頃者銅柱南標 金墉西建 開八百里之險路 則雲將驅石雷師劈山 築四十里之新城 則水神滲泉地媼供土 蓋乃感忠誠於上鑑 標壯觀於外藩 敢言簡在帝心 實匪率由人力 [중략]
지난번에 동주[銅柱]를 안남[安南]에 표시[標示]하고, 금용[金墉]을 서천[西川]에 건립[建立]하였습니다. 800리의 험로[險路]를 열 때에는 운장[雲將]이 바위를 굴리고 뇌사[雷師]가 산을 쪼개었으며, 40리의 신성[新城]을 쌓을 적에는 수신[水神]이 샘을 파고 지온[地媼]이 흙을 제공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상감[上鑑]에 대한 충성심[忠誠心]에 감동하여 외번[外藩]에 장관을 드러내 보여 준 것이니, 제[帝]가 굽어살피신 것이라고 감히 말할 뿐이요, 인력[人力]으로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중략]
고운[孤雲] 선생은, 시[詩]와 문집[文集]의 기록[記錄]들을 통하여 당시[當時]의 상황을 여러 가지로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이러한 내용들의 지역[地域]이 고지도[古地圖]라고 하는 여러 종류[種類]의 지도[地圖]와 얼마나 부합[符合]되고 맞는 것일까 ? 답은 전혀 아니다. 이다. 이는 자연환경[自然環境]의 하나만을 가지고 이를 논증[論證]해도, 고지도[古地圖]라고 하는 여러 종류의 지도[地圖]들은, 이에 부합[符合]될 수 없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史實]을 삼척동자[三尺童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수[數] 천년[千年]의 세월동안 일관[一貫]되게 기록[記錄]을 전[傳]하고 있는 수많은 역사서[歷史書]들의 설명과도 그 내용이 상반[相反]되고 있으며, 근세[近世]의 역사[歷史] 기록[記錄]과도 크게 어긋나고 있다.
이러한 모순[矛盾]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역사[歷史]를 근본[根本]으로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담고 있는 지도[地圖]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서[歷史書]와 부합[符合]되지 못하는 것은, 역사[歷史]의 사실[事實]과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근본[根本]으로 만들어진 지도[地圖]가 아닌,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기 위하여 의도[意圖]적으로 만들어진 고지도[古地圖]이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고지도[古地圖]라고 하는 자체가 스스로 조작[造作]된 허구[虛構]의 지도[地圖]라는 사실[事實]을, 반증[反證]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서[歷史書]의 내용들을 충족[充足]시키지 못하고, 이에 부합[符合]되지도 않으며, 모순[矛盾]으로 가득 찬 이러한 고지도[古地圖]을 어떻게 역사[歷史]를 담고 있는 고지도[古地圖]라고 믿을 수 있을 것인가 ?
자연환경[自然環境]과 기후[氣候]의 변화[變化]와 인간[人間]이 살아가는 풍속[風俗]과 산천[山川]의 지세[地勢]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설령 변한다고 해도 서서히 진행[進行]되는 것이지, 단기간에 변하지 않는 것이 천지[天地] 자연[自然]의 섭리[攝理]다.
왜곡[歪曲[된 역사[歷史]의 해설은, 지금의 베트남을 안남[安南]이라고 하는데, 당시[當時]에 그 지역[地域]에서 살며, 당[唐]나라에서 관직을 받고, 당시[當時] 당[唐]나라의 실정을 몸소 겪으며, 당[唐]나라의 지리[地理]를 누구보다도 자세히 알고 있던 고운[孤雲] 선생이 남긴 기록[記錄]들은, 지금의 베트남 지역[地域]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어찌 하겠는가 ?
당[唐]나라 시대[時代]의 안남[安南]이 있던 곳은 지금의 베트남이 아니라, 천산[天山] 총령[葱岭]의 서[西]쪽인 아프카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의 국경[國境]이 겹치는 지역[地域]과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인도의 일부 지역[地域]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식국[大食國]이 어찌 베트남의 서남[西南]쪽에 있었으랴 ! 대식국[大食國]은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에도 대규모의 사절단[使節團]을 보내왔다.
마원[馬援]이 교지국[交趾國]을,.......... 정벌할 때, “무더운 날씨에 독한 장기[瘴氣]가 풍겨 나와 솔개가 하늘을 날다가 물 위로 툭툭 떨어졌다.[下潦上霧 毒氣熏蒸 仰視鳥鳶跕跕墮水中]라는 고사가 전한다. 동관한기[東觀漢記] 마원[馬援]
깊숙한 암혈[巖穴]로 된 동굴에서 요인[䝤人]들이 거주하였다. 이러한 오래된 유적[遺跡]들은, 지금도 아프카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인도 북부, 파키스탄의 지역[地域]에 상당히 많이 남아 있으며 그 원형[原形]이 보존[保存]되어 있다. 그리고 고대[古代]의 성곽[城郭] 유지[遺址]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러한 성곽[城郭] 유지[遺址]의 대부분은, 이슬람 문명[文明]과는 관계없는 동방[東方]의 형식[形式]과 일치[一致]하고 있다.
또한, 서북[西北]쪽은 역사[歷史]의 전설[傳說]처럼 회자[膾炙]되는 여국[女國]으로 가는 길과 접해 있다고 하는데, 이는 대륙사[大陸史]에서 말하는 여국[女國]의 위치[位置]에 대한 설명[說明]과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이 지역[地域]들은 굿이 자연환경[自然環境]과 기후[氣候]를 말하지 않더라도 현재 전하고 있는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만을 가지고도 ,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을 고증[考證]하고 이를 증명[證明]하고도 남음이 있다.
서역[西域]과 동방[東方]의 성[城]을 축조[築造]하는 방식은 확연히 다르다. 동방[東方]은 대체적으로 사각의 성[城]을 축조[築造]하고, 이중으로 된 옹성[甕城]을
만들어 성[城]을 견고[堅固]히 하지만, 서역[西域]의 성곽[城郭]들은, 그 형태[形態]나 성[城]을 축조[築造]하는 방식[方式]에 있어서, 동방[東方]의 성곽[城郭]들과는 완연히 다른 방식[方式]을 취하고 있다.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하는 서역[西域]은, 천산[天山]을 넘어 그 서[西]쪽 지역[地域]인 중동 지역[地域]을 포함하여 카스피해가 있는 광범[廣範]위한 지역[地域]을 말하는 것이지,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지역[地域]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십[十] 수년[數年]전에 이들 지역[地域]의 여러 나라들을 역사[歷史]의 길을 따라 조사[調査]하면서, 길게 탄식[歎息]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것은 다름이 아니라 고대[古代]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은 모두 이슬람 문명[文明[과는 관계가 없는 동방[東方]의 문명[文明]과 일치[一致]하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오래전에 우리나라의 공영 방송에서 고[古] 미술[美術]을 가르치는 모[某] 대학[大學]의 교수가, 지금의 인도 북부[北部]에 나타나는 고구려[高句麗]의 무용 벽화[壁畵]에 대하여 설명[說明]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모[某] 교수는 인도의 현지[現地]에 다녀와서, 반도[半島]의 북부[北部]와 동북[東北] 삼성[三省]의 고구려[高句麗]의 벽화[壁畵]를, 인도에 있는 고구려[高句麗]풍의 벽화[壁畵]와 비교 설명[說明] 하면서, 반도[半島] 북부[北部]의 고구려[高句麗]가 인도의 북부[北部]까지 교류[交流]를 하고 있었다고 강의 하듯이 설명[說明]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허나 고구려[高句麗]가 반도[半島]의 북부[北部]에 있었다면 그러한 벽화[壁畵]가 인도의 북부[北部] 지역[地域]에 그려질 수 있었을까 ?
사 총관[史摠管],.......... 수[隋]나라 행군총관[行軍摠管] 사만세[史萬歲]가 남녕[南寧] 만이[蠻夷] 찬완[爨翫]의 반란[反亂]을 평정하던 도중에 제갈량[諸葛亮]의 공적을 기록[記錄]한 비석[碑石]을 보았는데, 그 뒷면에 만세[萬歲] 뒤에 나보다 나은 자[者]가 여기를 지나갈 것이다.[萬歲後 勝我者過此]라고 새겨 있었다. 이에 사만세[史萬歲]가 좌우로 하여금 그 비석[碑石]을 쓰러뜨리고 진격하게 했다는 기록[記錄]이 전한다. 북사[北史] 사만세열전 [史萬歲列傳]
해외[海外] 36국,.......... 가운데 천흉민[穿胸民]의 이름이 나오는데, 한[漢]나라 고유[高誘]가 천흉[穿胸]은 가슴 앞에서 등까지 구멍을 뚫는 것이다. [穿胸 胸前穿孔達背] 회남자[淮南子][지형훈[墬形訓]
사천[四川]의 촉국[蜀國], 성도[成都] 교지[交趾], 안남[安南], 절서[浙西], 절동[浙東], 양절[兩浙], 강회[江淮], 형주[荊州], 강주[江州], 양주[梁州], 옹주[雍州], 교주[交州], 광주[廣州], 익주[益州], 영주[寧州] 등은, 모두 사막[沙漠]이 있는 천산[天山] 총령[葱岭]의 서[西]쪽 지역[地域]에 있었다. 이 지역[地域]이 바로 당[唐]의 안남도호부 [安南都護府]가 있던 지역[地域]이다. 그러므로 고운[孤雲] 선생은, 사막[沙漠]에서 기이한 모양을 자랑하매 강회[江淮]의 대중[大衆]이 듣고서 놀라지 않음이 없었다고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에서 동[東]쪽으로 강회[江淮]에 이르는 지역[地域]들이 과거에 사막[沙漠]이 있었던 지역[地域]이란 말인가 ? 우리의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는 자들은, 이러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에 대하여, 일언반구[一言半句]의 설명도 없다. 설명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닫고 있는 내용들은 아예 이를 쑥 빼버리고, 왜곡[歪曲]과 위선[僞善]과 거짓으로 가득 찬 식민사학[植民史學]의 잔재[殘在]만을 들고 나와, 이를 주입[注入] 시키고 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로 유명한 제갈양[諸葛亮]과, 한[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남만[南蠻]을 정벌[征伐]한 공로[功勞]로 유명한데, 이들이 역사[歷史]에 일화[逸話]를 남긴 지역[地域]은, 총령[葱岭]을 넘어 그 서[西]쪽]과 서남[西南] 지역[地域]이다. 지금의 베트남이 안남[安南] 지역[地域]이라고 하는 자들은, 역사[歷史]의 원전[原典] 기록[記錄]과는 하등[何等]의 관계[關係가 없는, 그 들만의 거짓 주장[主張]일 뿐이다.
도은집[陶隱集]
舟行自高郵湖 過范光,白馬二湖 奉懷東亭,圃隱二位先生
배를 타고 고우호[高郵湖]에서 출발하여 범광[范光]과 백마[白馬]의 두 호수[湖水]를 지날 적에 동정[東亭]과 포은[圃隱] 두 분 선생을 생각하며 짓다.
고우성[高郵城] 아래에서 돛을 편 일엽편주 高郵城下片帆張
백마[白馬]의 긴 호수[湖水]가 범광[范光]과 접했어라 白馬長湖接范光
끝도 없이 까마득한 두 눈 가득 푸른 물결 滿目滄波渺何限
우리 선생의 가슴속은 이보다 더 넓고 깊으리라. 先生胸次更汪汪
포은선생문집권지일[圃隱先生文集卷之一]
고우호[高郵湖]
남[南]으로 돌아와 유유히 오유[遨遊]하나니 南歸日日是遨遊
호수[湖水]의 청풍[淸風]에 일엽편주를 보내노라. 湖上淸風送葉舟
양안[兩岸]의 줄[菰]과 부들[蒲]은 다함이 없는데 兩岸菰蒲行不盡
또 명월[明月]따라 아름다운 물가에 머문다. 又隨明月宿芳洲
조선사[朝鮮史]를 말살[抹殺]하기 위하여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한 자들이 주장[主張]하는 강회[江淮]지역은,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속에서 어느 지역[地域] 이었을까 ? 이곳은 바로 고려[高麗]의 강도[江都]였으며, 조선[朝鮮]의 강도[江都]가 있었던 인근[隣近] 지역[地域]이며, 조선[朝鮮]의 경상도[慶尙道] 지역[地域]이었다. 역사[歷史]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김수로왕[金首露王]의 가락국 [駕洛國] 지역[地域] 이었으며, 삼한[三韓]의 고토[古土]였다.
도은[陶隱]과 포은[圃隱] 선생이 노닌 고우호[高郵湖]는, 지금도 그 이름 그대로, 대륙[大陸]의 남방[南方] 지역[地域]인 장강[長江]의 하구[河口]에 있는 남경[南京]의 바로 북[北]쪽에 위치[位置]하고 있다. 이 지역[地域]이 어떻게 중국[中國]의 강회[江淮] 지역[地域]이 될 수 있을까 ?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이 교차하는 시기에, 도은[陶隱]과 포은[圃隱] 선생은, 남[南]쪽으로 내려와 영남도[嶺南道]의 고우호[高郵湖]에서 노닐었는데, 이곳은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는 자들이 말하는 강[江]과 회[淮]의 지역[地域]이다.
이 지역[地域]에는 지금도 조선사[朝鮮史]에서 말하는 바다와 같은 큰 호수[湖水]들이, 그 물길 그대로, 그 자리에서 흐르고 있으며, 산천[山川]의 형세[形勢]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 한 치의 차이도 없고, 성곽[城郭]을 비롯하여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도, 역사서[歷史書]의 설명과 일치[一致]하고 있다. 명[明]나라의 남경[南京]이라는 지금의 남경[南京]은, 고려[高麗]의 강도[江都]이며, 조선[朝鮮]의 강도[江都]였다.
명[明]나라는 이곳으로부터, 서북[西北]쪽으로 만리[萬里]의 먼 북방[北方] 지역[地域]인 요서[遼西]의 순천부[順天府] 지역[地域]에 있었다. 한[漢]나라의 교지[交趾], 당[唐]나라의 안남[安南], 당[唐]나라의 교지[交趾], 명[明]과 청[淸]나라의 안남[安南]과 교지[交趾]는, 청[淸]나라가 망[亡]할때까지 변함없이 그 지역[地域]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심전고[心田稿]
유관잡록[留館雜錄]
유책록[留柵錄]
象出於桂林象郡 設機捕之 讀皇帝詔書 諭以不殺 則輒服聽 卽地釋械 亦可以馴 [중략]
코끼리는 계림[桂林] 상군[象郡]에서 나는데, 틀을 놓아서 잡는다. 황제[皇帝]의 조서[詔書]을 읽고 죽이지 않는다고 타이르면 곧 복종[服從]하여 들으며, 그 자리에서 틀을 풀어 주는데 또한 길들일 만하다. [중략]
世傳象見天子 則屈兩膝 見諸侯王則屈一膝云 我世祖大王 以首陽大君 奉使入燕 八象皆拜跪 亦可異也 [중략]
세상에[世上]서 전하기를, ‘코끼리는 천자[天子]를 보면 두 무릎을 꿇고, 제후왕[諸侯王]을 보면 한쪽 무릎을 꿇는다. 고 한다. 우리나라 세조 대왕[世祖大王]이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있을 때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연경[燕京]에 들어갔더니, 8마리의 코끼리가 모두 절하여 무릎을 꿇었다고 하니 또한 이상한 일이라고 하겠다. [중략]
昆陽之戰 交趾之役 皆馴而騎之 蓋其性善解人意故也 [중략]
곤양[昆陽]의 싸움과 교지[交趾]의 싸움에 다 코끼리를 길들여 타고 싸웠다 하니, 대개 그 성품[性品]이 사람의 뜻을 잘 이해[理解]하기 때문이다. [중략]
심전고[心田稿]
유관잡록[留館雜錄]
유책록[留柵錄]
孔雀出南交諸郡 五色玲瓏 軆艶尾長 我國之用於笠飾者 皆假造染色者也 [중략]
공작[孔雀]은 남교[南交]의 여러 고을에서 나는데, 오색[五色]이 영롱[玲瓏]하여 몸이 곱고 꽁지가 길다. 우리나라에서 갓의 장식[裝飾]으로 쓰는 것은 다 가짜로 만들어 물들인 것이다. [중략]
심전고[心田稿]의 저자[著者]는 1800년[千八百年]대를 살면서 조선[朝鮮]의 순조 [純祖] 시대[時代]에,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의 일원으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심전고[心田稿]에서 말하는 교지[交趾]와 남교[南交]는, 안남[安南]과 남만[南蠻]을 말하는 것인데, 안남[安南]과 교지[交趾]는, 한[漢]나라 이래로 청[淸]나라에 이르기까지 본래의 그 지역[地域]에서, 변동[變動]이 없었음을 확인[確認]시켜주고 있다.
또한, 남만[南蠻]과 경계[境界]을 접하고 있었던 서천[西川]의 촉[蜀] 지역[地域]과, 강회[江淮], 양절[兩浙] 등, 지금의 중국[中國] 장강[長江] 연안의 여러 지명[地名]들은, 모두 천산[天山]을 넘어 그 서[西]쪽 지역[地域]에 있었던 지명[地名]들이었음이 선대[先代]의 기록[記錄]으로 들어나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에서 공작[孔雀]의 서식지는, 주로 인도와 인도네시아이며, 미얀마까지 포함된다. 중국[中國]의 안남[安南], 교지[交趾], 그리고 그들이 남만[南蠻]이라고 부르던 지역은, 지금의 파키스탄과 인도, 아프카니스탄, 이란 등의 지역[地域]을 말하는 것이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안남국[安南國]의 사신[使臣]
내가 연경[燕京]에 들어가서 안남국[安南國]의 사신[使臣]을 보았는데, 관디[冠帶]의 제도[制度]가 우리나라와 똑같았다. 그 단령[團領], 흉배[胸褙], 서대[犀帶], 망건[網巾] 따위가 모두 대동소이하였고, 사모[紗帽]는 우리나라의 악공[樂工]들이 쓰는 것과 같았는데 앞뒤에 금화[金花]를 장식하였다. 그 사람들은 키가 작고 까무잡잡하며 글을 잘하고 글씨에 능하였는데, 글씨는 진대[晉代]의 서체[書體]를 숭상하였다. 관직[官職]은 학사[學士]와 시경[寺卿] 등의 벼슬이 있는데 중국[中國]을 본뜨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었다. [중략]
아, 한번 중화[中華]의 문물[文物]이 오랑캐의 풍속[風俗]으로 바뀌어 버린 뒤로는 변발[辮髮]과 홍모[紅帽]가 중국[中國] 땅에 두루 가득하여 한관[漢官]의 점잖은 위의[威儀]는 어디에서고 찾아볼 곳이라곤 없어졌는데, 이제 안남[安南] 사람들을 보니 그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이 오히려 명[明]나라의 옛 제도[制度]를 전하고 있었다.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이 안남[安南] 사신[使臣]들을 보았는데, 공적으로 모이는 자리가 아니면 망건[網巾]을 착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중략]
임하필기[林下筆記]
이역죽지사[異域竹枝詞]
안남국[安南國]
네 성씨 교대로 국토 전하는 건 송[宋]나라 때 시작 四姓替傳肇宋時
한 해에 농사를 두 번 짓고 상제[喪制]를 중요시하네 農成歲二重喪祠
화기[火器]를 잘 만들고 관디[冠帶]는 당[唐]나라 제도를 따랐으며 善治火器冠唐制
부녀들은 금환[金環]을 가지고 귀천[貴賤]을 알아본다네 婦女金環貴賤知
안남[安南]은 옛날 교지[交趾] 땅으로, 본래는 당[唐]나라에 예속되었었다. 송[宋]나라 때에는 정씨[丁氏], 여씨[黎氏], 이씨[李氏], 진씨[陳氏]가 서로 왕위[王位]를 전하였다. 그곳 경작지[耕作地]에서는 1년에 농사를 두 번 짓는다. 관디[冠帶]는 당[唐]나라의 제도[制度]를 따른다. 부인의 귀와 띠에 다는 금환[金環]은 크고 작은 것을 가지고 등급을 나누었다. 백성[百姓]들은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중요시하고 화기[火器]를 잘 만들었다. [중략]
남만[南蠻]의 무리들이 침략[侵略]해 들어왔던 서천[西川]의 촉[蜀] 지역[地域]은, 안남[安南]과 가까운 지역[地域]에 있었다........... 이곳으로 말하면, 양주[梁州]의 특별한 지역이요, 촉국[蜀國]의 웅장한 도읍[都邑]으로서, 안으로는 건장[犍牂]을 걸터앉고 밖으로는 만단[蠻蜑]과 연결되며, 왼쪽으로는 백복[百濮]에 임하고 오른쪽으로는 육융[六戎]을 끼고 있다............ 춘추좌씨전 [春秋左氏傳]을 살펴보면, 초[楚]나라를 포함하여, 주[周] 왕조[王朝]의 시대에 활거하던 전국칠웅[戰國七雄]의 나라들은, 동국[東國]인 천산[天山]의 이동에는 있지도 않았다.
춘추좌씨전 [春秋左氏傳]에 나오는 여러 만족[蠻族]과 융족[戎族]들은, 지금 중국[中國]의 대륙[大陸]에 있는 장강[長江] 유역[流域]의 종족[種族]들이 아니다. 그리고 근세[近世]의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대신[大臣]과 유학자[儒學者]들이 남긴 역사[歷史]의 수 많은 기록[記錄]들은, 황제[黃帝]로 부터, 요순[堯舜], 하[夏], 은[殷], 주[周], 진[秦]나라, 한[漢], 당[唐], 원[元], 명[明], 청[淸]나라에 이르기까지 요동[遼東]과 요동[遼東]의 서[西]쪽에 있었다고 일관[一貫]되게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
하[夏], 은[殷], 주[周] 삼대[三代]의 역사[歷史]만을 보더라도, 그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된 역사[歷史]의 무대와, 그 역사[歷史]에 나오는 종족[種族]들은, 지금의 카자흐스탄과과 천산[天山]을 중심[中心]으로, 그 주위에 있었던 종족[種族]들이다. 조선[朝鮮]의 선유[先儒]들은 많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는데, 지금의 중국[中國] 대륙[大陸]은, 삼한[三韓]의 78개국[七十八個國]이 있던 지역[地域]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마한[馬韓]이 고조선[古朝鮮]의 정통[正統]을 이었다고 적고 있다.
공이 운성[鄆城]에서 함양[咸陽]에 도착했을 때 서천 절제사[西川節制使]에 제수되었다. 이에 멀리 임금의 책략[策略]을 받들고서 급히 성도[成都]에 도달하였다.
이때에 표신[驃信]이 교수[郊遂]에 바짝 다가와서 겨우 일사[一舍] 를 남겨 놓고는 군대를 주둔시켰다.
표신[驃信]은, 남만[南蠻]의 왕[王]을 말한다. 만단[蠻蜑]의 종족[種族]이 있는 안남[安南]은, 서천[西川]에 있는 촉[蜀] 지역[地域]의 성도[成都]와 인접[隣接]하고 있었다.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에는, 중국[中國]의 전촉왕[前蜀王]인 왕건[王建]의 릉[陵]이 있다고 한다. 이를 영릉[永陵]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이 지역[地域]에 있지도 않았던 촉[蜀]나라가, 어찌 왕[王]의 무덤을 이곳에다 만들었을까 ?
히말리아의 산맥[山脈]을 넘어 만리[萬里]의 동[東]쪽에 와서 왕[王]의 무덤을 만들었다니, 당시[當時]의 당[唐]나라나, 촉[蜀]나라 사람들은, 하늘을 날고, 수[數] 만리[萬里]의 먼 길을 제집 드나들 덧 하던 신인[神人]이었을 것이다. 중국[中國]이나 한국[韓國]이나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는 자들은, 수[數] 천년[千年]전 사자[死者]의 이름도 스스럼없이 둔갑[遁甲]을 시키니, 실로 전지전능[全知全能]하여, 지금 살고 있는 세상[世上]이 그지없이 영화[榮華]롭고 하늘과 땅도 뒤바꿀 수 있는 묘한 자들일 것이다.
고구려[高句麗]는 요동[遼東]의 패권[覇權]자였다.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를 기반으로, 천하[天下]를 호령했다. 지지[地誌]에 따르면,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는, 고조선[古朝鮮]의 고토[古土]이며, 기자[箕子]의 조선[朝鮮] 지역[地域]이며, 이를 이어 고구려[高句麗]가 일어나 천년[千年]의 대제국[大帝國]을 건설한, 제국[帝國]의 터전 이었다.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는, 무너진 우리의 역사[歷史]를 바로 세우는 그 분기점[分岐點]에 서 있는 중요[重要]한 지역[地域]이다. 요동[遼東]은, 조선사[朝鮮史]의 강역[疆域]을 분명[分明]히 하고,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의 실체[實體]를 정확히 파악[把握] 할 수 있는, 근원[根源]을 지니고 있는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이 깊은 지역[地域]이다.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은, 요동[遼東]과 인접[隣接]하고 있었으며, 근세[近世]의 조선[朝鮮]의 말기까지 서도[西都]이며, 서북[西北]의 거진[巨鎭]으로, 중국[中國]의 여러 나라들과 국경[國境]을 마주하고 있는 지역[地域]에 위치[位置]하고 있었다. 조선사[朝鮮史]의 평안도[平安道]가 있는 서[西]쪽은, 역대[歷代]로 중국[中國]이라고 하는 나라들이 위치[位置]하고 있었던 지역[地域]이다.
목은집[牧隱集]
송서상서동귀[送徐尙書東歸]
말 머리의 압록강[鴨綠江]은 초록빛이요 馬頭鴨水綠
나그네 등 뒤엔 연산[燕山]이 푸르네 客背燕山靑
눈보라 길 삼천리[三千里]를 가자 하니 風雪三千里
석양이면 장정[長亭] 단정[短亭]을 거치리라 夕陽長短亭 [중략]
목은집[牧隱集] 목은시고 제2권
안주강[安州江]
평안도[平安道[ 북[北]쪽 웅번[雄藩]으로 형세 가장 강하고 安北雄藩勢最強
물은 대동강[大同江] 물과 아울러 길이 흐르는데 大同江水並流長
바다는 서벽[西壁]과 연하여 남국[南國]으로 통하고 海連西壁通南國
산은 동린[東隣]에 솟아 북방[北方]으로 들어가누나 山聳東隣入北方
푸른 나무 역루[驛樓]에선 일찍이 피서[避暑]를 했고 綠樹驛樓曾避暑
띳지붕 관사[官舍]에선 잠시 향을 불살랐었지 黃茅吏舍暫焚香
소싯적엔 몇 번이나 시[詩] 읊으며 지났던고 少時幾度吟詩過
오늘 아침에 또 팔구[八句]의 단장을 읊조리네 八句今朝又短章安州江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정외구홍절도관북영중공칠월부북영[呈外舅洪節度關北營中公七月赴北營]
관북[關北] 진영에 계시는 장인 홍[洪] 절도사[節度使]에게 올리다. 공께서 7월에 북영[北營]으로 부임[赴任]하였다.
마상[馬上]에서 변방[邊方] 노래 새로 지어 부르는데 馬上新翻出塞歌
불함산[不咸山] 산중 빛은 용하[龍河]에 닿았으리 不咸山色接龍河
대장기는 곧바로 마천령[磨天嶺]을 제압하고 牙旗直壓磨天嶺
보검 기운 아스라이 슬해[瑟海] 물결 맑히누나 寶劍遙淸瑟海波
말갈[靺鞨]의 마을 빛은 가을 뒤에 고요하고 靺鞨村光秋後靜
여진[女眞]의 봉홧불은 눈 속에 지나가리 女眞烽火雪中過
찬 진영에 미인[美人]의 술 마시지 말으소서 寒營莫飮西姬酒
오늘날에 장군[將軍]께선 백발이 성성하시니 今日將軍白髮多
담헌서[湛軒書]
연로기략[沿路記略]
연기[燕記]
自義州渡江時 有五所搜驗 向晡過江 三江氷雪如陸 行十里秉炬 露宿于九連城 翌日 中火于金石山 又露宿于葱秀 [중략]
의주[義州]에서 강[江]을 건널 때에 다섯 군데에서 조사[調査]를 받았고, 하오 4시가 다 되었을 때에야 강[江]을 건넜는데, 삼강[三江]의 얼음과 눈이 육지[陸地]를 걸어가는 것 같았다. 10리쯤 가니 횃불을 잡아야 했다. 구련성[九連城]에서 노숙[露宿]하였다. 다음날 금석산[金石山]에서 점심을 먹고 또 총수[葱秀]에서 노숙[露宿]하였다. [중략]
盖柵外百餘里 空其地以隔兩界 其山水林藪。猶是東國風土 砂麓明媚 往往山回路轉 依然有鷄鳴犬吠之聲 其金石山矗拔環擁如屛 葱秀有石壁 壁下有川 宛如平山之葱秀 故我人所命名也 其露宿也 上房有蒙古行幕 [중략]
대개 책문[柵門] 밖 백여리[百餘里]는 그 땅을 비워 두어 두 나라의 경계[境界]를 떼어 놓았는데, 그 산천[山川]과 숲들은 우리 동국[東國]의 풍토[風土]와 같아 사록[砂麓]이 훤하게 아름다웠고, 이따금 산[山]이 돌고 길이 굽어진 데에서는 으레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금석산[金石山]은 솟아나 병풍처럼 둘러 있고, 총수[葱秀)]에는 돌벼랑이 있으며, 벼랑 아래로 내가 흐르는데, 흡사 평산[平山]의 총수[葱秀]와 같으므로 우리 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붙인 것이다.
노숙[露宿]할 때에 상방[上房]으로는 몽고[蒙古] 행막(行幕)을 사용하였다. [중략]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송한교리치응응사연서시위서장관[送韓校理致應使燕序時爲書狀官]
國於長城之南五嶺之北 謂之中國 而國於遼河之東謂之東國 東國之人而游乎中國者 人莫不歎詑歆豔 [중략]
장성[長城]의 남[南]쪽, 오령[五嶺]의 북[北]쪽에 나라를 세운 것을 중국[中國]’이라 하고, 요하[遼河]의 동[東]쪽에 나라를 세운 것을 동국[東國]이라고 한다. 동국[東國] 사람으로서 중국[中國]을 유람[遊覽]하는 것을 감탄[感歎]하고 자랑하고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중략]
열하일기[熱河日記]
도강록[渡江錄]
6월[六月] 24일[二十四日] 신미[辛未]
앞서 용만[龍灣]의주[義州館] 에서 묵은 지 열흘 동안에 방물[方物]도 다 들어왔고 떠날 날짜가 매우 촉박하였는데, 장마가 져서 두 강물이 몹시 불었다. 그동안 쾌청한 지도 벌써 나흘이나 되었는데, 물살은 더욱 거세어 나무와 돌이 함께 굴러 내리며, 탁류[濁流]가 하늘과 맞닿았다.
이는 대체로 압록강[鴨綠江]의 발원[發源]이 먼 까닭이다. 당서[唐書]를 상고[相考]해 보면, 고려[高麗]의 마자수[馬訾水]는 말갈[靺鞨]의 백산[白山]에서 나오는데, 그 물빛이 마치 오리머리처럼 푸르르매 ‘압록강[鴨綠江]이라 불렀다. 하였으니, 백산[白山]은 곧 장백산[長白山]을 말함이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이를 ‘불함산[不咸山]이라 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백두산[白頭山]이라 일컫는다. 백두산[白頭山]은 모든 강[江]이 발원[發源]되는 곳인데, 그 서남[西南]쪽으로 흐르는 것이 곧 압록강[鴨綠江]이다.
또 황여고[皇輿考]에는, 천하[天下]에 삼대수[三大水]가 있으니, 황하[黃河]와 장강[長江]과 압록강[鴨綠江]이다. 하였고, 양산묵담[兩山墨談]에는, 회수[淮水] 이북은 북조[北條]라 일컬어서 모든 물이 대하[大河]로 모여들므로 강[江]으로 이름 지은 것이 없는데, 다만 북[北]으로 고려[高麗]에 있는 것을 압록강[鴨綠江]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대체로 이 강[江]은 천하[天下]에 큰 물로서 그 발원[發源]하는 곳이 시방 한창 가무는지 장마인지 천리[千里] 밖에서 예측[豫測]하기 어려웠으나, 이제 이 강[江]물이 이렇듯 넘쳐흐름을 보아 저 백두산[白頭山]의 장마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하물며 이곳은 예사의 나루가 아님에랴 ! [중략]
열하일기[熱河日記]
성경잡지[盛京雜識]
추[秋] 7월 초10일[七月初十日] 병술[丙戌]
혼하[渾河]의 이름은 아리강[阿利江]이요, 또는 소요수[小遼水]라고도 부른다. 장백산[長白山]에서 흐르기 시작하여 사하[沙河]와 합하고, 성경성[盛京城] 동남[東南]을 굽이쳐 흘러 태자하[太子河]와 합하며, 또 서로 비끼어서 요하[遼河]와 합하여 삼차하[三叉河]가 되어 바다로 흐른다.
혼하[渾河]를 건너 몇 리를 가서 토성[土城]이 있다. 그다지 높지 않고 성[城] 밖에는 검은 소 수백 마리가 있는데, 그 빛깔이 아주 새까맣게 옷칠한 듯하다. 또 1백[一百] 경[頃]이나 되는 큰 못이 있는데, 붉은 연꽃이 한창이고 그 속에는 거위와 오리 떼가 수없이 떠다닌다. [중략]
신지비사[神誌秘詞]에서는 평양[平壤]을 백아강[(白牙岡]이라고 하였다. 왜 평양[平壤]을 백아강[白牙岡]이라고 하였을까 ? 평양[平壤]을 백아강[白牙岡]이라고 한 이면[裏面]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평양[平壤]에서 남[南]쪽으로 아득히 바라보이는 묘향산[妙香山]에는, 흰 빛이 구름을 감도는 암석[巖石]으로 된 석산[石山]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그 위용[威容]을 자랑하며, 아득히 펼처진 평원[平原]을 가로질러 평양[平壤]을 내려다보고 있다.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은 이러한 지역[地域]에 위치[位置]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경[西京]을 백아강[白牙岡]이라고 말한 것이다.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금석산[金石山]]을 지나 총수[葱秀]에서 노숙[露宿]하였다.고 하였다............. 금석산[金石山]은 솟아나 병풍처럼 둘러 있고, 총수[葱秀)]에는 돌벼랑이 있으며, 벼랑 아래로 내가 흐르는데, 흡사 평산[平山]의 총수[葱秀]와 같으므로 우리 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붙인 것이다.
한국[韓國]의 반도[半島]에는 남[南]과 북[北]을 모두 포함하여, 이 총수[葱秀]라고 불릴만한 지역[地域]이 단 한군데도 없다. 지금의 중국[中國] 대륙[大陸]도 통털어, 이 총수[葱秀]라고 불릴만한 지역[地域]은, 세 곳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요동[遼東]을 지나, 요서[遼西]로 들어서면서, 총수[葱秀]라고 말할 수 있는 지역[地域]이 하나 더 있다.
당시[當時]에는 조선[朝鮮]의 사신[使臣]들이 연경[燕京]을 오고 갔으니, 이 총수[葱秀]라고 말할 수 있는 지역[地域]을 거처 연경[燕京]으로 발길을 옮겼다. 당시[當時]에는 4곳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지금 이곳은 카자흐스탄의 영토[領土]가 되어 있다.
이 총수[葱秀]라고 불릴만한 4곳의 지역[地域]중에,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 부합[符合]되고 일치[一致]되는 곳은 두 지역[地域]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평산[平山]의 총수[葱秀]이며, 또 하나는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바로 금석산[金石山]의 인근[隣近]에 있는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이 노숙[露宿]했던 총수[葱秀]이다. 이러한 지역[地域]이 총수[葱秀]라고 불리우는 것은, 그 특이한 자연[自然]의 경관[景觀] 때문이다.
이 지역[地域]에서 서[西]쪽으로 카자흐스탄에 이르기까지 수[數] 천리[千里]사이에는, 지금도 검은 소들을 많이 키우고 있다. 총수[葱秀]가 있는 이 지역[地域]은, 벨루하산의 바로 서남[西南]쪽이 된다. 백두산기[白頭山記]에서 백두산[白頭山] 서남[西南]쪽은 요동[遼東]이라는 기록[記錄]은 맞는 말이다. 이는 연행록[燕行錄] 뿐만 아니라, 조선사[朝鮮史]의 여러 기록[記錄]들과도 어긋남이 없고, 특히 이 지역[地域]의 산천[山川]과 자연환경[自然環境],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이 우리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과 일치[一致]하고 있다.
조선사[朝鮮史]의 평안도[平安道]는 이 지역[地域]에 자리 잡고 있었다. 평양[平壤]을 [西京], 서도[西都]라고 한 것은, 조선팔도[朝鮮八道]의 서[西]쪽에 위치[位置]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양[平壤]을 서북[西北]의 거진[巨鎭], 관서[關西], 서관[西關]이라고도 하는데,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에서는, 서[西]쪽의 지역[地域]이기 때문이다.
함경도[咸鏡道]를 동북면[東北面]이라고 하는 것은, 고려[高麗]에서, 백두산[白頭山] 준령[峻嶺]이 남[南]쪽으로 내려오고, 서남[西南]쪽은, 평안도[平安道]가 위치[位置]하고 있으며, 백두산[白頭山] 준령[峻嶺]의 동북[東北]쪽은, 함경도[咸鏡道]가 자리 잡고 있어서, 동북면[東北面]이라고 처음으로 부르기 시작 했다고, 역사서[歷史書]는 기록[記錄]하고 있다.
이를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는 자들이 함경도[咸鏡道]를 반도[半島]의 동북[東北]쪽에 심어놓고, 동북면[東北面]이 마치 나라의 동북[東北]쪽에 있었던 것처럼 오도[誤導]를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可憎]스럽지 않은가 ? 일제의 간교[奸巧]하고 악랄[惡辣]한 수법은, 반도[半島]의 북[北]쪽에 만주국[滿洲國]을 세운 것이다. 지금 세상[世上]에 나와 돌아다니는 고지도[古地圖]란 고지도[古地圖]는, 모두 이렇게 표기[表記]를 하고 있다.
과연 고지도[古地圖]는 역사[歷史] 사실[史實]을 담고 있는 지도[地圖]일까 ? 많은 사람들이 고지도[古地圖]라고 해서 이를 신봉[信奉] 하는데, 어느 사서[史書]가 고지도[古地圖]와 일치[一致]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단언컨대 고지도[古地圖]는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기 위하여 치밀[緻密]히 조작[造作]된 허구[虛構]의 지도[地圖]라는 것이다.
알타이산맥의 벨루하산 서남[西南]쪽에서, 연행록[燕行錄]의 기록[記錄]을 따라, 연행록[燕行錄]에서 설명하는 다수의 유적[遺跡]을 찾았는데, 그 중의 하나를 소개 한다면, 요하[遼河]의 상류[上流]에서 광녕[廣寧]까지 돌로 긴 담장[長牆]을 쌓았다고 하였다. 이는 변경[邊境]의 경계[境界]를 표시[表示]하기 위하여 쌓았다고 하는데, 그 지역[地域] 사람들은 장성[長城]이라고 부른다. 이 돌로 쌓은 담장[長牆]의 장성[長城]은, 지금도 당시[當時]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광녕[廣寧]으로 뻗어 있다.
이러한데도 백두산[白頭山]이 반도[半島]의 북[北]쪽에 있다고 할 것이며, 지금의 북경[北京]이 연경[燕京]이라고 할 것인가 ? 연행록[燕行錄]에 기록[記錄]되어 설명하는 내용 중에, 천리[千里] 대야[大野]의 요동[遼東]에 대한 기록[記錄]들은 거의 일치[一致]하고 있다. 그러나, 한양[漢陽]을 출발하여 의주[義州]까지의 여정[旅程]은, 많은 분량[分量]이 삭제[削除] 되었거나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되었다.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는, 이렇게 역사서[歷史書]는 물론, 문집[文集]까지도 온전히 전[傳]해지는 것이 거의 없으니, 우리가 우리의 역사[歷史]의 본 모습을 찾아 바로 세워야 하는 이유[理由]와 대의[大義]는, 더욱 분명[分明]해 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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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요동요서의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같군요.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요동요서의 정확한 위치를 말입니다.
우리 카페에서, 그동안 번역해 본 원전에서, 조선사를 나름대로 번역 해석한 바로, 어느 곳일까 정말 망서렸는데, 오늘 님의 글을 보니, 대략 윤곽이 나오는 것 같군요. 당나라의 위치는 우리 카페에서 주장한 위치와 거의 같은 곳이군요. 고생많이 하셨습니다. 직장에서 일하다가 댓글을 씁니다. 집에 가서 다시 한 번 정독해 보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리며,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천산 히말라야의 동쪽이 동국이라는 말이 이글에서 다시 한번 힘을 얻는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최남석님의 성원과 관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이 함께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많은 부분이 우리 카페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일치합니다. 특히 환국고려님께서 그 먼곳까지 직접 답사한 내용과 조선사의 내용이 같은 것이라는 내용에서는 놀라움이 큽니다. 전 그곳에 가보지 못했으니 오직 머리속에서만 뱅뱅돌 뿐이니까요. 대륙의 원전도 보는 방향에 따라 주옥같은 내용이 있다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반도사관이나 식민사관에서 교육받은 내용을 머리에서 지워버려야 한다는 제약이 있습니다. 글 잘 보았습니다.오늘 저녁에 푹 잠을 잘수 있을 것 같군요. 좋은 글 감사드리며, 대내 평안하시고 건강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글 잘보았읍니다.
천하의 삼대수(三大水)라 하는 황하,장강,압록은 현 중국동부에 있는 (누구나 다 아는 황하, 장강)두 강은 아니라는 말씀이신지요.... 황여고에 나온다는 이 말은 명나라의 장천복(張天復)이 지은 지리서로 알고 있고 환국고려님은 명나라를 천산 서쪽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황여고에 나오는 천하의 삼대수는 현 신강성이나 중앙아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안남도호부는 조선의 부평군을 말하는 거 아닙니까?
베트남은 운남이잖아요. 거기도 안남 도호부던가요?
헤깔리네요. 안남도호부는 세종실록지리지에 부평군으로 나오던데요.
문무 선생님, 최남석 선생님, 격려와 성원에 감사 드립니다. 요동과 평양, 함경도와 백두산, 요동과 요서, 요서와 연경 등, 조선사의 역사에 관계된 수 많은 역사의 진실들이 모두 들어나게 될 것입니다. 대륙사와 조선사의 기록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역사의 진실들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 할 것입니다.
사실 조선사에 있어서, 관북, 관서, 서해도, 요동과 백두산을 찾아 이를 고증하고 증명 한다면, 우리의 역사인 조선사의 절반은 바로 세워지게 되는 것이겠지요.
문무 선생님, 최남석 선생님의 댁내에 두루 평안 하시고, 항상 건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맑은 영혼님, 감사합니다. 압록이 천하의 삼대수라고 하는 것은, 황여고 뿐만 아니라, 조선의 선유들도 익히 알고 있었으며, 이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황하와 장강은 압록이 아닙니다. 압록이 동으로 흐른다는 시와 기록도 있지만, 이러한 기록들도 모두 맞는 기록 들입니다. 순암 선생이 동사에서 옛 사람들은 불함산에서 발원하는 물을 모두 압록이라고 칭 했을 것이라는 말을 하면서, 주자가 압록을 천하의 삼대수라고 한 것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흐르는 흑룡강의 물이 동해로 들어가는데, 이를 압록으로 보고 천하의 삼대수라고 했을 것이다, 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동해는 바이갈호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이칼호수는 조선사에서 동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기록을 남긴 당시에도, 불함산에서 발원하여 사방으로 흐르고 모이는 거대한 물길을 다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한가지를 첨언 한다면 불함산의 물이 바이칼호수로 들어가고, 바이칼 호수의 물은, 다시 서북으로 돌아와 북해로 들어가는데, 압록강의 물과 물길이 통하고 있습니다.
맑은 영혼님 댁내에 항상 평안과 건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마포대사님 감사 합니다. 고운 선생이 말하는 안남은, 한나라의 안남, 당나라의 안남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대에 운남은, 안남과 같은 지역에 있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명과 청나라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왜곡된 역사에서, 베트남 지역을 안남이라고 하기 때문에, 운남이 따라 다니는 것 입니다. 안남도호부가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부평군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 들어 봅니다. 지리지를 보고 찾아 보겠습니다.
마포대사님 댁내에 두루 평안 하시고, 항상 건강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환국고려님 계원필경인가요? 혹시 여기에 최치원이 전주최씨들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나오나요?
제가 예전에 최치원이 쓴 글에서 전주최씨와 이야기를 하는 장면에서 "우리 최씨들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즉 최치원은 전주최씨이고 강태공의 후손이라는 주장 같아서요. 그 부분이 궁금합니다.
혹여 아시면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보학에 관심이 많다 보니 한문은 짦고 알고 싶은 것은 많고 그러네요..^^!
@마포대사 강태공[姜太公]의 후손이 황제[皇帝]가 하사[下賜] 하신 나라를 사양하고, 제[齊]나라의 최읍[崔邑]에서 살았다. 이리하여 최[崔]라는 성씨[姓氏]를 가지게 되었다. 최씨[崔氏]는 예맥[濊貊]의 지역에서 살았다. 그 선조[先祖]는, 한[漢]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다. 수[隋]나라가 고구려[高句麗]를 침략 할때, 많이 죽었다, 당[唐]나라 때에, 전주[全州] 금마[金馬]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전주 최씨[崔氏]가 된 기록이 전하고 있습니다. 마포대사님께서 말씀하신 계원필경의 내용은, 고운선생문집권지이[孤雲先生文集卷之二]에 있는, 진감 화상 비명[眞監和尙碑銘]의 내용을 말씀 하시는 것 같습니다.
@환국고려 진감 화상 비명[眞監和尙碑銘]의 내용중에, 역기이인재[亦豈異人哉], 이분이 어찌 우리와 다른 사람이겠는가. 선사시야[禪師是也], 선사[禪師]가 바로 그분이시다. 라는 구절을 말씀 하시는 것으로 사료 되는데, 진감선사 이 분이 전주 최씨라고 합니다. 경주 최씨와 전주 최씨의 시조에 대한 내력은, 고증할 문헌이 부족하여 이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의 혜소전[慧昭傳]에서도, 그 선조는 한[漢]나라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경주 최씨는 신라 건국설화의 한분인 소벌도리를 시조로 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경주 최씨와 전주 최씨의 시조를 강태공으로 보는 분도 많이 계신다고 합니다.
지리지에 안남도호부는, 세 곳이 나옵니다. 전라도[全羅道] 전주부[全州府], 안남 도호부[安南都護府], 전주부[全州府]
고부군[古阜郡],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경기[京畿],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의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등이 나오는데, 이중에서 고부군의 영주[瀛州], 전주부의 완산[[完山], 부평도호부의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 길주목[吉州牧] 등으로 그 지명을 고처온 것으로 나열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계양도호부의 계양은 중국의 장강 남쪽에 있으며, 전주도 그 인근 지역 입니다.
또한 참고 삼아 말씀 드리면, 전라도의 나주는, 당시에, 언어가 다른 종족들이 많이 오고가는 번잡한 지역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경기 부평의 안남도호부는 한때,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 시키고, 다시 부평도호부로 강등 시겼다고 하는데, 길주는, 관북인 함경도에 있었습니다.
현재 전하고 있는 사서[史書]를 보는 어려움이 바로 이러한데에 있는 것 입니다. 후대에 역사서를 보는 사람들이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사서[史書]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세월이 하수상하더라도 오늘 할 일은 해야겠지요. 대륙사나 조선사, 기타 많은 서적들을 보면, "반도조선"이란 많은 의문이 있다라는 것을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께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나, 반도의 학자님들은 욕하거나 말거나, 무조건 반도에 조선을 넣지 못해 안달을 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그들은 역사학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자들인데.......? 정말 안타깝다는 말로는 너무 부족하고......한바탕 욕해보고 싶지만 내 입이 더러워 질 것 같군요. 이들은 왜 그럴까요? 명예? 하잖은 권력? 먹고 살기 위해? 의리때문에? 아니면 돈때문에? 답답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우리의 무너진 역사를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개인의 직업을 떠나, 자신을 희생해 가며, 조선사 역사의 진실을 찾아 가는 분들은 많지 않으나, 중단하지 않고 전진을 계속하는 것은, 천하의 대의를 위해서, 선대와 조상님의 가신길을 흐리지 않고 이 땅위에 올바로 들어내며, 잃어버린 선대의 기상과 정신과 혼을 바로 찾고, 식민사학에 자아를 상실하고 잃어버린 혼을 되찾아, 미래에 오는 후대 들에게, 천년대계의 길을 닦아서, 다시는 이러한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
다산 선생이 말년에, 낙향해 있으면서, , 삼국사기를 보충하고 개작 편찬하여, 조선사 역사의 비루함을 떨쳐 버리고, 잘못 기술 된 역사서를 바로잡아 이를 간행하여, 천하의 명산대천에 보관하지 못한 것을, 크게 탄식하고 아쉬워 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정조대왕이 살아 계실 때, 천하의 학자를 모아서 이루지 못한것을 탄식 했는데, 이제 선생이 가신지도 수 백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금 세기에 조선사의 역사를 바로 세운다고 하더라도, 이를 마음에 담고 같이 길을 가는 분들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
그러나 우리의 역사인 조선사를 바로 세워 놓는다면, 금세기나 후대에, 선대의 위대하고 찬란한 문명을 다시 일으키고, 이 나라 이 땅을 천하의 밝은 문명을 지닌 강국으로 만들자가, 반드시 나올 것입니다.
오늘날의 현실을 돌아보면, 탄식이 저절로 나오고, 희망이 없는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천지 자연의 섭리와 천하의 흥망성쇠는, 차면 기울고 기울면 다시 차는 것이 겠지요.
계원필경은 필사본으로 알고 있는데 과연 원본 이상으로 가치가 있을까요? 또 중국과 동국조선을 나누고 계시는데 어떻게 이해를 할지 아리송합니다. 좋은정보 감사드립니다. 항상평안하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