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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덕룡 소개
양평에서 태어나 1985년 《현대문학》(평론), 2002년 《시와시학》(시)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소리의 감옥』 『하멜서신』『다섯 손가락이 남습니다』, 저서로 『환경위기와 생태학적 상상력』 『풍경과 시선』 등이 있다.
〈김달진문학상〉 〈발견문학상〉 〈편운문학상〉 〈백호임제문학상〉 〈백호임제문학상〉 〈김준오시학상〉 등을 수상했다.
신덕룡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우리는 모두 떨림을 간직하고 있다. 인간도 그렇고, 인간을 둘러싼 모든 생명들도 마찬가지다.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에, 조금씩 다르지만 때로는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에게 밀려드는 ‘바깥’을 받아들인다. 견딤과 설렘이 교차되는 순간에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그 떨림의 순간들이 신덕룡 시인의 시 세계 한가운데에 배치되어 있다. 지금 수많은 이유로 분열과 대립을 거듭하고 있는 우리에게, 신덕룡 시인의 시집 『단월』은 우리가 다시 연결되어야 할 이유를 바로 이 작은 울림들을 통해 알려준다.
목차
책 속으로
한동안 비구름이 머물렀던 자리에
배추무름병이 몰려왔다
그늘 속으로 파고들었다
밑동이 썩어가는데도 텃밭의 배추들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말없이 버티다 어느 순간 픽 쓰러져
땅의 일부가 되어가는 중이다
뒤가 없다
우주의 한 모퉁이를 돌아가면
어딘가에 빈자리가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완결(完結)」 전문(본문 28쪽)
쇠백로 한 마리가 우두커니 서 있다 가느다란 발목 주위로 자잘한 흔적을 남기며 지나가는 바람과 일렁이는 금빛 물살들
스윽 고개를 쳐드는 검은 부리 끝에서 파닥거리는 햇살 몇 줄기 반짝,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하다 영문도 모른 채 물고기의 한 생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더 씻어 낼 것도 헹굴 것도 없는 산속이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바깥은 아니다
평생 들일과 함께 허리가 굽은 아랫집 노인이 걸어가는데 중무장이다 마스크로 단단히 입과 코를 가린 기세와 달리 발걸음은 허청허청
안간힘치고는 참 헐겁다 냄새도 형체도 없이 에워싼 불운에 속절없이 당하지 않겠다는, 등 뒤가 텅 비었다 무언가 예고 없이 드나들어도 모를 만큼 넓다
-「단월」 전문(본문 44쪽)
복사꽃 피었다
지난밤에 봄비가 다녀갔거나
꿈속이 유달리 부산스럽지도 않았다
이게 뭐지
의심을 품을 만한 것도 없었는데
땅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 풀피리를 불었던 거다
그 소리가 너무 작고 흐릿해
먼 길 가던 어둠 혼자 귀를 기울이다가
이른 아침이 되어서야
삼켰던 숨을 길게 몰아쉬었을 뿐이다
세상이 출렁 한꺼번에 들렸다 가라앉은 뒤
느닷없는 고요
겨우내 움츠렸던 가지 끝에
작은 떨림들이 소란소란, 엉겨 붙었다
-「접속」 전문(본문 60쪽)
저수지로 가는 길에
버들강아지와 눈을 마주쳤다
얼음장을 딛고 선 맨발로
온몸이 저릿저릿 미간을 찡그릴 만한데
무표정이다
감을 잡지 못한 듯
반쯤 뜬 눈으로 전후 사정을 짚어보는
궁리 앞에 꼴깍, 숨을 삼켰다
-「입춘」 전문(본문 88쪽)
기찻길 옆
한때는 창고로나 쓰였음직한 집이다
온갖 잡동사니들을 들어낸 뒤
비뚤어진 창문과 허름한 벽
초등학교 시절의 작은 의자들만 남았다
투둑 툭 툭
바람벽을 두드리는 겨울비 소리
어떤 기억들은 몰려가는 세월에 기름칠을 하는지
삐걱거리던 의자에 박은 못대가리가
반질반질 윤이 났다
여기저기 바람 들 데 많아 쪼그리고 앉은
마음들이 이내 그윽해졌다
후후 불어가며
국밥을 떠먹는 자세들이 똑 닮았다
-「원조 국밥집」 전문(본문 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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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삶의 주변과 마음의 갈피들을 쓰다듬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의 언어들
신덕룡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단월』이 출간되었다. 1985년 《현대문학》 평론, 2002년 《시와시학》 시부문으로 데뷔한 시인은 ‘낮게 공명하는 풍경’들을 문학이라는 공간 속에서 재현해 왔다. 평론집 『풍경과 시선』을 통해서는 시간과 공간과 사물의 ‘연결’을 기록했고, 시집 『소리의 감옥』부터 『다섯 손가락이 남습니다』로 이어지는 시적 여정을 통해서는 우리 주변의 낯선 것들로부터 낯익은 슬픔들을 발견해왔다. 그가 문학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보는 세계에는 작고 외로운 하나의 개체가 세상을 움직이는 핵심적인 동력이 되는 순간들이 담겨 있다. “지금은 너무 낮고 아득해서 잘 들리지 않지만, 그러나 결코 지울 수 없는 마음의 길”(고재종) 앞에서의 작은 울림들이 신덕룡 시인의 시 세계를 창조하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떨림을 간직하고 있다. 인간도 그렇고, 인간을 둘러싼 모든 생명들도 마찬가지다.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에, 조금씩 다르지만 때로는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에게 밀려드는 ‘바깥’을 받아들인다. 견딤과 설렘이 교차되는 순간에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그 떨림의 순간들이 신덕룡 시인의 시 세계 한가운데에 배치되어 있다. 지금 수많은 이유로 분열과 대립을 거듭하고 있는 우리에게, 신덕룡 시인의 시집 『단월』은 우리가 다시 연결되어야 할 이유를 바로 이 작은 울림들을 통해 알려준다.
근대적인 경계를 넘어선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모색
신덕룡의 시는 우리를 ‘인간’이 중심인 세계 너머로 데려간다. 그의 시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성찰함으로써 자연과 비인간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흔들어 놓는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사변이 아닌 일상적 차원에서 행해진다는 것, 특히 ‘양평’이라는 공간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얻은 감각이라는 사실이다. 시인은 한 지인(知人)을 “땅의 신자”라고 표현하는데, 이처럼 농사를 짓는 사람과 대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은 ‘땅’에 대한 감각 자체가 전혀 다르다. 도시인들에게 ‘땅’은 아직 건축물이 들어서지 않은 미사용 공간이거나 평당으로 가치가 매겨지는 부동산일 뿐이다. 거기에는 생명에 대한 관심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반면 “우주적으로 모든 걸 다 품고 있는 이 땅에/바칠 수 있는 건 땀밖에 없다는 걸/숨을 쉬듯 그냥, 안다”(「성대 아재」)라는 표현처럼 농사꾼에게 ‘땅’은 지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직관적인 이해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그냥, 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정신’이 아닌 ‘몸’을 통해 감각되는 것이다. 신덕룡의 시에서 이러한 농경적 감각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사유로 제시된다.
뒤뜰의 풀숲이 수상해서
울타리를 쳤다
이쪽과 저쪽이 생겼다 이쪽은 안쪽이고 저쪽은 바깥이다 촘촘한 철망이라 바깥이 안쪽을 넘보거나 비집고 들어오지 못한다 입 꽉 다문 채 몽둥이를 들고 서 있는 것처럼 확실해졌다 서 있는 등 뒤 역시 바깥이라는 건 미처 몰랐다 오늘 아침, 처마를 받치고 있는 기둥 아래 햇볕 환한 섬돌 곁에 꽃뱀 한 마리 똬리를 틀고 있었다 말끔하게 벗겨진 불안의 민낯이다 처음부터 마음먹지 말았어야 했다 안팎을 가르고 끙끙 앓는 것보다 터놓고 지내는 게 나을 뻔했다 너무 빨랐다
- 「이쪽과 저쪽」 전문(본문 16쪽)
신덕룡의 이번 시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경계’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다. 그것은 도시적 삶이 만들어 놓은 인간(문명)과 자연의 구분, 즉 인간이 주체이고 자연은 대상이라는 구분이 지워지는 경험으로 구체화된다. 가령 「아련이」의 화자는 자신의 집에 찾아와 먹이를 요구하는 들고양이를 보면서 “주인과 객의 경계는 벌써 넘었다”라고 진술한다. 또한 「건너뛰다」의 화자는 누군가 막아 놓은 물꼬를 터서 물길을 바꾼 후 “어디선가 쩝쩝거리는 소리가 나더니/벌컥벌컥 물을 들이켜는 소리까지 보태졌다/기갈 든 어린모들이 내는 소리였다”라는 진술처럼 ‘모=생명’이 물을 흡수하는 소리를 듣는다. 전자에서 ‘경계’가 들고양이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불신’의 문제라면, 후자에서 그것은 논과 논 사이에 존재하는 소유권의 문제이다. 두 작품 모두에서 시인은 기존에 존재하던 분할/경계가 해체되는 장면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데, 전자에서 그것이 인간과 고양이가 함께 살아가면서 상호 신뢰하는 종횡단적 아비투스로 이어진다면, 후자에서 그것은 모와 물의 결합(“기갈 든 어린모들이 내는 소리”)이라는 공동체적인 장면으로 연결된다. 다만 시인은 이 장면이 ‘꿈’이라는 단서를 달아둠으로써 경계를 횡단하는 일이 쉽게 성취되는 것은 아님을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용시는 이러한 ‘경계’에 대한 사유를 ‘이쪽’과 ‘저쪽’의 관계로 변주하고 있다. 추측건대 시인은 풀숲 저편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려는 온갖 짐승들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울타리를 쳤을 것이다. 알다시피 울타리를 치는 행위는 특정한 구역을 방어하는 것이지만, 또한 ‘이쪽’과 ‘저쪽’이라는 경계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경계의 논리 안에서 ‘저쪽’과 ‘이쪽’은 이미-항상 동시에 만들어진다. 이 경계는 공간적으로 표현하면 ‘이쪽’과 ‘저쪽’, ‘안’과 ‘바깥’이 되고, 존재론적으로 표현하면 ‘우리’와 ‘그들’로 표현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경계의 논리는 그 내부에 타자성에 대한 배제와 동질성에 대한 긍정을 함축한다. 그런데 다음 순간 시인은 자신이 “서 있는 등 뒤 역시 바깥”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준 것은 처마 기둥 아래에 똬리를 틀고 있는 “꽃뱀 한 마리”이다. 정리하자면 시인은 ‘뱀’으로 대표되는 짐승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안’과 ‘바깥’을 구분하는 울타리를 쳤으나, 어느 순간 ‘바깥’에 있어야 할 뱀이 ‘안’에 있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뱀’은 ‘바깥’에 속하는 것이니 시인은 ‘뱀’이 있는 곳, 즉 자신이 서 있는 등 뒤 역시 ‘바깥’이라고 인식한 것이고, 그 순간 뱀이 위치한 공간은 ‘안’이면서 ‘바깥’인 곳, ‘안’과 ‘바깥’의 경계가 무너지는 혼종적(hybridity)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장면은 공간이 아니라 주체의 관점에서 다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나’라는 중심은 ‘너’가 선행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나’는 ‘나 아닌 것’과의 구분을 통해서만 성립되는 인칭대명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와 ‘너’의 이러한 존재론적 얽힘은 각 존재의 위치에 따라 재규정할 수도 있다. 즉 ‘너’의 위치에서는 ‘나’가 곧 바깥이라는 것이다. 시인의 의도가 이러한 존재론적 상호성에 있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두 가지 방식의 해석 모두에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갖고 있는 ‘이쪽’과 ‘저쪽’, 혹은 ‘안’과 ‘바깥’의 구분은 위태로워진다. 시집 전체로 확장하면 이러한 경계의 해체는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이 무화되는 현상의 변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가령 ‘봄’이 되어 찾아온 새를 가리켜 “함께 놀아나자는 수작이니 어디서 왔냐고 묻지 않는다”(「3월」)라고 말할 때, 여기서의 ‘묻지 않음’은 ‘나’와 ‘너’,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지 않겠다는 태도의 표현이다. 또한 “내가 사는 집은/담장이 없어 까치발로 기웃거릴 일 없고/대문조차 없으니 걸어 잠글 것 없다/훤히 내다보이는 산야 또한 내 집 안마당이다”(「척」)라는 진술에 등장하는 ‘담장’과 ‘대문’이 없는 집 역시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해체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사람들의 태생을 구별하는 경계는 돌고개 마을 앞 명성천인데 구불구불 경기도와 강원도를 넘나들며 흐른다”(「소리산(小理山)」)라는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자연의 질서에 맞춰 살아가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읽힌다. ‘자연’에도 일정한 경계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산천에 무슨 금 그을 일” 같은 인위적 방식의 경계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시인은 석산리 주민들이 ‘다리’를 놓고 경기도와 강원도를 넘나드는 모습을 “경계를 지우며 산다”라고 표현한다. 이처럼 시인은 유독 ‘경계’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기에 그는 태풍에 쓰러져 죽은 나무와 산 나무가 뒤엉켜 있는 풍경에서도 “생사의 경계가 말끔하게 지워진 자리”(「무엇이라 해야 하나」)에 시선을 집중한다.
간밤에 무언가 다녀갔다
솔솔 재미 붙여가며
애써 가꾼 땅콩밭을 몽땅 파헤쳐놓고
늦봄에 땅을 갈아엎고
두세 알씩 정성 들여 씨앗을 묻은 뒤
텃새들 눈을 피해
종이컵까지 씌워 싹을 틔우고 여름내 보살폈는데
깊이 잠든 사이
일궈놓은 살림이 거덜 난 것처럼 허망했지만
태연과 무심을 가장하면서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았다
따지고 보면 같은 산자락에 울도 없이 얹혀살면서
주인이니 도둑이니 하는 말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짐짓 불편한 동거일 뿐이라고 다독일 수밖에 없다
길 위에서 온몸으로 비와 바람을 맞고
이편과 저편을 나누고
상처받을 때마다 결의를 다지고 살았던
짐승의 시절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하는 것이다
봄 여름을 잊고 가을 한 철 목 빼고 기다리다가
허기진 놈부터 배불리 먹었다면
다행이다, 먹고 남긴 것들
추려 담을 그릇 또한 클 이유가 없겠다
- 「불편한 동거」 전문(본문 80~81쪽)
신덕룡의 시에서 ‘자연’은 균열도 없는 이상적 세계가 아니다. 그의 시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 역시 무갈등 상태가 아니다. ‘안’과 ‘밖’, ‘이쪽’과 ‘저쪽’,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경계가 해체되는 순간을 사유하는 것은 ‘자연’을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 세계로 표상하는 것과 다르다. ‘자연’이 인간의 특정한 관념이 투사된 객관적 상관물로 전락할 때, 그것은 관념적인 언어적 표상에 불과하게 된다. 하지만 신덕룡의 시에서 자연과의 관계는 관념이나 신념의 차원을 벗어난 지점에서 사유된다. 농사에 의해 매개되는 자연과의 관계는 결코 추상적일 수가 없다. 실제로 “버릇처럼 신념을 앞세우던 때가 있었다//신념과 손잡은 결기란 타오르는 불꽃이나 시퍼렇게 날을 세운 칼날 같아서/가까이하면//데이거나 피 흘린다는 걸 몰랐다”(「돈키호테를 읽는 밤」)라는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시인은 대도시를 벗어나 농사를 지으면서 ‘신념’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체득해나가고 있다. “농약 없이 텃밭의 채소를 가꾸고/소식하며 살겠다는/내 의지 또한 수시로 흔들리는 걸 붙잡지 못한다”(「역공(逆攻)」)라는 말처럼 현실에서의 농사는 인간에게 의지나 신념 이상의 무엇을 요구한다. 시인이 ‘자연’과의 관계를 ‘불편한 동거’라고 표현한 이유도 여기 있다.
인용시에서 시인은 자연의 타자성, 즉 타자로서의 자연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밤사이 ‘무언가’가 나타나 시인이 애써 농사 지은 땅콩밭을 몽땅 파헤쳤다. 농사꾼에게 이러한 경험은 결코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처음에 시인은 이 타자의 침입에 대해 분노한다. 애써 가꾼 농사가 한순간에 헛수고가 되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때의 ‘자연-동물’은 “오랫동안 쌓인 불신의 뿌리가 뽑혀버린 거기, 등 대고 누워 봄볕을 희롱하는 놈의 뺨이 참 뽀얗다”(「아련이」)라고 말할 때의 그것과는 층위가 다르다. 여기서의 ‘자연-동물’은 ‘나’가 제어 능력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나’의 무능력을 고스란히 확인시킨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타자이다. 이러한 자연의 타자성은 “사납게 돌아가던 예초기의 날 앞에 대책 없이”(「풀독」) 쓰러진 풀들이 시간이 지난 후 시인의 몸에 “도대체 참을 수 없는 가려움과 쓰라림”을 남기는 “은밀한 복수”를 하는 장면이나 여름날 한바탕 소나기가 내리면 예초기가 훑고 간 자리에서 “숨겨놓은 발톱들/우우우, 새파랗게 날을 세”(「숨겨놓은 발톱들」)우고 다시 성장하는 잡초의 형상 등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신덕룡의 시에서 ‘자연’은 결코 무력하고 순응적인 대상이 아니다.
잠깐 사이
한 세상이 뒤집어졌다
폭탄이라도 맞은 듯 갈가리 찢겨나간 집과 바람에 흩날리는 검부러기들 방금 전까지 입 벌리고 짹짹거리던 붉은 살덩어리들
둥지의 적요와 주검이 한껏 숨죽이며 내쉬는 숨결 사이로 바람보다 빠르게 하나둘 스쳐 가는, 마냥 의심할 수밖에 없는 용의자들
곱씹어 되새기는 오목눈이의 눈망울에
수만 가지의 표정들이 맺혔다
나락에 떨어졌다가 바닥을 치고 올라왔다는 말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그건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이들의 허언일 뿐이라는 듯
제 안의 울음통을 다 비워버린 어미 새는, 작은 발로 꾹꾹 제 가슴을 눌러가며 바닥을 만들고 있다
-「바닥」 전문(본문 70~71쪽)
신덕룡의 시에서 인간에 대한 자연의 관계를 ‘타자성’이라고 말한다면, ‘자연’ 그 자체는 ‘공존’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의 ‘공존’은 도살장으로 끌려간 짐승이 남긴 “생의 잔해들”(「축분(畜糞)을 뿌리며」)인 축분(畜糞)처럼 ‘삶’과 ‘죽음’이라는 대척적인 영역이 순환의 형식으로 뒤엉킨 상태일 수도 있고, 개별적인 생명체가 하나의 전체 안에서 아름답게 공존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시인이 ‘자연’의 세계에서 가장 자주 목격하는 것은 공존의 윤리라는 사실이다. 가령 「모색(暮色)」에서 시인은 해 질 녘의 어스레한 빛을 배경으로 노인과 아이가 걸어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어린아이가 앞장서 걷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분주하게 뒤를 따라가는 장면, 시인은 이 풍경을 가리켜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라고 진술한다. 반면 이 시에서 ‘자연’의 세계에는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은 크고 작은 나무와 반짝이던 나뭇잎들이 희고 붉고 노란 꽃들이 부드러운 먹빛으로 분해되어 마침내 한통속이 되고 있으니 아름답다느니 치졸하다느니 따지거나 눈에 거슬릴 것 하나 없는 시간이다”라는 진술처럼 일몰의 시간 속에서 모든 것들은 개체로서의 특성보다는 ‘한통속’이 되어 하나의 풍경을 연출한다. 시인의 시선에 이 풍경은 아름다움이나 치졸함 같은 가치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상태로 경험된다. 여기에 개구리의 떼울음과 뻐꾹새의 울음이 뒤섞이면 짧은 순간이나마 세상은 원초적 풍경에 근접한다. 이러한 ‘공존’의 질서에 대한 관심은 신덕룡의 시에서 자주 목격된다. 산까치들이 사과를 쪼아먹는 장면을 “아침부터 몰려온 산까치들에게/사과나무가 제 몸을 기꺼이 내주고 있다”(「슬하(膝下)」)라고 표현할 때, 독거노인이 저녁 밥상을 차리면 새와 들고양이가 몰려와 나뭇가지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는 모습을 “산속까지 길을 풀어 놨는지/풀숲을 전전하던 새와 들고양이들까지 몰려와/작은 나뭇가지 위에 또 그 아래/죽 둘러앉는다”(「밥상」)라고 표현할 때, 여기에는 ‘공존’의 감각이 개입되어 있다.
하지만 ‘불편한 동거’라는 말처럼, 공존이 늘 아름다운 상태인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자연’의 세계가 언제나 평화롭고 안온한 것만은 아니다. “꽃들의 전쟁에는 휴식이 없다”(「절정」)라는 표현처럼 자연은 때때로 ‘전장’이 되기도 한다. 「바닥」은 이러한 자연적 세계의 비정함에 주목하고있다. 여기에서 시인은 ‘오목눈이’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바닥’이라는 비유를 통해 진술하고 있다. 폭탄을 맞은 것처럼 “찢겨 나간 집”, “바람에 흩날리는 검부스러기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입 벌리고 짹짹거리던 붉은 살덩이들”이 의미하는 것은 오목눈이의 둥지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잠깐 사이/한 세상이 뒤집어졌다”라는 진술을 통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둥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잠깐 둥지를 비웠다가 돌아와 이 황망한 사태를 목격한 어미 새의 심정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시인은 다만 “작은 발로 꾹꾹 제 가슴을 눌러가며 바닥을 만들고 있”는 어미 새의 모습을 환기할 뿐이다. 하지만 ‘자연’의 세계에서 이러한 사건은 자연 질서의 일부분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배추무름병을 앓는 텃밭의 배추들이 “말없이 버티다 어느 순간 픽 쓰러져/땅의 일부가 되”(「완결(完結)」)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집의 표제인 ‘단월’은 시인이 거주하고 있는 지명(地名)이다.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그곳은 인간과 자연이 ‘불편한 동거’를 지속하고 있는 곳이다. 시인은 그곳을 “더 씻어낼 것도 헹굴 것도 없는 산속이지만/그렇다고 세상의 바깥은 아니다”(「단월」)라고 소개하고 있다. 대도시와 달리 ‘단월’에서는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의 거리가 매우 가깝다. 그렇다고 거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자연이 각자의 방식으로, 때로는 공존하면서 살아가는 곳이 바로 ‘단월’이다. 그런 점에서 ‘단월’은 고유명이 아니라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가리키는 일반적 기호라고 이해할 수 있다.
최근 ‘인류세’라는 단어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기후 위기를 설명하고도 있는 이 단어는 화석연료에 의존한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자연이 파괴되고 그로 인하여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는 문명사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20세기 후반까지 인류는 ‘세계’를 자신들이 건설한 문명과 동일시했고, 그런 사고에 따르면 인공적인 생산물 이외의 것들, 가령 기후, 환경, 동식물 등은 인류 문명의 진보를 위한 도구, 즉 ‘그것(Es)’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인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그리고 그것들의 위상을 전면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신덕룡의 시가 펼쳐 보이는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관계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읽을 때 한층 큰 울림을 갖는다. 근대 문명을 뒷받침해온 철학자들에게 ‘자연’은 인간을 위한 ‘그것’이 되지 못하는 한 결코 ‘세계’로 간주되지 못했다. ‘근대’는 ‘자연’을 인간세계를 위한 재료나 배경으로 이해하는 것이 상식이었던 시대였고, 온갖 인공물로 채워진 대도시는 그런 인식의 귀결점이었다. 하지만 인류는 기후 위기라는 새로운 현실 앞에서 자연에 대한 인식을 전면적으로 수정해나가고 있으니, 신덕룡의 시는 일상적 경험과 감각의 차원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선취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쑥, 솟아올랐다
술렁이는 바람은 폭풍우의 전령이지만
고요 속에 갇혔다
폭설과 시린 별빛들
불타던 태양의 기억까지 다 끌어모은
저 꽃대는
제 안에 쌓아 올린 다이너마이트의 뇌관에
불이 곧 댕겨진다는 걸 안다
부르르 떤다
멀리까지 한 소식 전할 것이다
-「칸나」 전문(본문 108쪽)
신덕룡의 시집에는 실존적인 고독과 ‘자연’과의 연대, 즉 근대적인 경계를 넘어선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모색이 혼재되어 있다.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고독’이라는 기호가 한층 도드라져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연’을 무력한 도구적 대상으로 인식하는 근대적인 태도를 넘어선 지점에서 새로운 삶의 윤리를 구축하려는 시인의 사유는 조금 더 의미심장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신덕룡의 시에서 ‘자연’이 순응적이기보다는 역동적이라고 말한다면, 그러한 생명의 역동성을 가장 명징하게 표현한 작품은 바로 「칸나」라고 말할 수 있다. “쑥, 솟아올랐다”라는 간명한 진술 외에는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칸나’의 생명력. 그 여린 생명은 자신의 내부에 “폭설과 시린 별빛들/불타던 태양의 기억까지 다 끌어모은”으로 요약되는 폭발력을 응축하고 있다. 이 생명의 사건은 이 세계가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물만으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세상에는 인간의 의지가 제어하지 못하는 또 다른 생명이 존재하며 인간은 자연적 지구라는 터전 위에서 이 생명들과 공존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일깨워준다. 그런 점에서 칸나는, 자연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출처 교보문고 고www.kyoboboo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