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 93년 9월 9일 화요공부방
□김제원 교무님 설법
오늘은 수심결 21.22장을 하겠습니다.
오늘도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마음이 부처다, 부처를 다른 곳에서 구하지 말고 내 마음안에서 구하며
견성과 신통을 혼동하지 말아라 오롯하게 하다보면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데
깨달으면 신통이 바로 나타나느냐?
수양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돈오를 했다고 할지라도 점수과정, 닦음이 필요하다 것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제 21장 참다운 마음이란
汝- 若信得及하면 疑情이 頓息하리니 出丈夫之志하면 發眞正見解하야 親嘗其味하야 自到自肯之地則是爲修心人의 解悟處也라 更無階級次第일새 故로 云頓也니 如云於信因中에 契諸佛果德하야 分毫不殊하야사 方成信也라 하니라.
여-약신득급하면 , 그대가 만약 나의 말을 듣고 믿음을 얻으면
신이 마음에 사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정이 돈식하리니 , 모든 의심이 완전히 쉬게 될 것이니
깨치지 못한 믿음은 이거구나 하고 마음을 정하는 것입니다.
깨침을 바탕한 믿음은 확실하구나, 이 스승님, 이법을 한번 믿어보자
이것도 신득급(信得及)입니다.
보통사람들은 반만 믿고 느낌만큼 믿고 아는 만큼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이라는 것은 깨끗한 것입니다.
백지 수표와 같은 것입니다.
자기가 적당히 하면서 신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신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이 크기와 깨달음의 크기가 비례하고 있습니다 .
신이 크면 클수록 깨달음도 많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기각막힌 신의 원리입니다.
왜 신을 삐딱하게 바라보냐?
뉴스를 통해서 듣습니다. 사이비다.
그런 소리를 듣고 신이 확실한 사람은 거기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신이 불확실하거나 탐욕심이 있는 사람은 종교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깨끗한 마음입니다.
출장부지지하면, 이로부터 대장부의 뜻이 확실하게 서게 되고
대장부라는 것은 남자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원이 확실한 것입니다.
공자님이 입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뜻을 세운 것입니다.
나는 내 인생을 어떤 포부로 살겠다.
나는 진리를 반드시 깨닫겠다.
나는 조금한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큰 일을 해봐야 겠다.
그것이 장부지지입니다.
겨우 생각하는 것이 집하나 장만하고, 아이들 잘 키우고 하는 것이 장부지지가 아닙니다.
우리 엄청난 은혜 속에 살고 있습니다.
엄청난 부모의 은혜, 천지의 은혜, 주위의 사람들 은혜, 국가사회의 기관에 엄청난 은혜를 받고 살고 있는데 겨우 생각하는 것이 집하나 장만하고, 아이들 잘 키우고 살겠다는 것은 이치를 너무 모르고 무식하며, 주위에 피해를 주는 사람입니다.
동기상응(同氣相應)
내 마음이 오롯하게 사심이 없으면 내 주위에 청정한 기운이 동하는 것입니다.
내가 불만을 가지고 비판의식을 가지고 뭔가 삐딱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묘하게 유유상종으로 그러한 기운이 모이고,
우리 법문에 보면 원망생활하는 사람은 미물 곤충에게서도 해를 입는 다고 하였습니다.
긍정적 사고를 하라고 해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은혜를 알고 살라는 것입니다.
내가 숨 쉬고 먹고 마시고 하는 것이 그것이 없다면 어찌 내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한 생각만 더 해 보자는 것입니다.
발진정견해 하야 , 사리에 대한 옳은 견해를 갖게 되어
옳은 견해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이 아니라 사은을 바탕으로 한 견해입니다.
제가 보면 어떤 사람은 예쁘고 어떤 사람은 얄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예쁘게 보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자기 스스로가 깨치고
이 마음이 부처다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무아요, 대아의 삶은 사는 것입니다.
설사 내가 깨치지 못할 지더라도, 거기에 믿음을 가지고,
갈망하고 사모하고 동경하고 거기에 마음을 간절히 원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항상 중심이 자기인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동기상응으로 그런 사람만 모읍니다.
스스로 크지를 못합니다
여러분 보세요
젊을 때 어느 사람이 커요?
조용하게 이쁘게 구석에서 간부한번도 하지 않고 있는 아이들이 옛날에는 예뻤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사은의 은혜를 반도 못 갚습니다.
빚쟁이로 살다가 죽는 겁니다
이 시대는 정시대가 아닙니다
겨우 적당히 보시주의로 산다는 것은 은혜를 아는 사람도 인과를 아는 사람도 아닙니다
마음의 힘도 없고 마음의 원리도 모르고 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친상기미하야 , 진리에 대한 맛을 친히 체험하여서
미라는 것은 도라는 맛입니다.
자도자긍지지즉 , 자기가 자기의 깨달음을 옳게 여김에 이르면
자기 스스로가 자긍지지에 도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입니다.
독로(獨露) 자리입니다.
이것이 오지 유아자리입니다
자긍지지가 잘못하면 자만심, 아만심, 편협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는 자와 타가 하나인 자요.
무아의 자요, 자타불이 (自他不二) 의 자요 우주와 하나되는 자라는 것입니다.
습관과 업력에 형성되어진 자가 아닌 그것을 넘어선 자라는 것입니다.
성품자리의 그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시위수심인의 해오처야라. 이것이 수도인의 깨달음을 얻은 자리이다
마조스님이 계셨습니다.
그 사람 밑에 영주라는 지역에 법산 성사라는 분이 마도도일의 제자입니다
마도도일이 법문을 하는데, “즉심시불(卽心是佛)이다 ”는 법문을 하셨습니다.
부처라는 것이 마음이라고도 할 것도 없는 공적영지, 텅 비어서 광명이구나
이것을 마음이라고 하는구나.
작용하는 마음이 아니고, 작용하는 이전자리를 말하는 구나
그래서 보림공부를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공부를 하고 있는데 어떤 스님이 오셨습니다.
“스님, 요새 스님의 선생님이신 마도선생님이 이런 법문을 하십니다. ”
“뭐라고 말했냐? ”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다”라는 말로 대중을 거느리고 계십니다. -비심비불(非心非佛)
그러니깐 그 소리를 듣고 늙은이가 사람을 어지럽히는데 그칠 날이 없구나라고 하면서 욕을 합니다. 미쳤다는 소리입니다. 자기의 선생을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비심비불(非心非佛)이 틀렸다는 이야기죠.
마음이 부처인데,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라고 하니깐 틀렸다는 것입니다.
즉심시불(卽心是佛)을 신해(信解)라고 씁니다.
확실히 믿고 그 자리를 안 것입니다.
그러니깐 스승님이 잘 못 전달해도 넘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늙은이는 미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긍지입니다.
확실한 믿음이 있다면 주위에서 뭐라고 해도 그것은 진리요, 법입니다
인과가 확실히 있다는 것을 믿고, 영생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죽어버리면 다 끝나버려, 무슨 공부야, 인과 누가 안다냐 하면서 살살 옆에서 긁는 것은 아닙니다.
자긍지지가 못한 것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과격하게 말하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강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긍지지라는 것은 의지가 확실해서 의혹된 소리를 해도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
자긍지지가 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해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갱무계급차제일새, 다시 계급과 순서가 없다는 것이니
공적 영지한 그 마음자리에는 텅 비어서 계급과 순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처인 그 자리에는 텅 비어서 이것이다 저것이다가 없는 것입니다.
고로 운돈야니 , 그러므로 단번에 깨달았다고 하나니라.
텅비어서 충만한 자리를 돈, 깨달은 자리이다.
여운어신인중에 , 그러므로 말하기를 확신하게 된 이유가
10가지 심인(心因)이라는 것은 우리가 법위등급이 있듯이 공부의 과정 속에서 있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부처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도, 점수의 과정 속에서 또 공부의 단계가 있습니다.
대자리, 근본자리에는 단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점수 과정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중에 10가지의 단계가 있는 것입니다.
첫째가 신심 입니다.
불교에서는 52位가 있고
원불교에서는 3급 3위가 있습니다.
보살이 수행하는 단계를 52위로 해 놓고 거기에 10가지의 심인이 있습니다.
신심, 염심, 정진심, 혜심, 정심, 불퇴심, 호법심, 퇴양심, 계심, 원심
그 중에 첫째가 바로 신심입니다.
계제불과덕하야 , 모든 부처님의 깨치신 내용에 비추어 보아
분호불수하야사, 털끝만큼도 다르지 아니하여야
방성신야하니라 , 비로소 참다운 믿음을 이뤘다 하셨다
이것이 비로소 성심입니다.
신은 믿음의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고 할 때, 마음을 뭐로 묶는 거죠?
신은 마음을 정(定)하는 것입니다.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박았다는 것은 요동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을 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심은 심근(心根), 뿌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바람이 불고 뭐라고 해도 그 뿌리는 흔들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을 법을 담는 그릇이라고 합니다.
각산님께서 들어오셨는데, 정산종사님께서 큰 법기(法器)가 왔다,
39세 때 돌아가셨는데 출가위셨습니다.
제가 교당에 있을 때, 각산님께 한번 강의를 들으신 분은 빠져 나가지를 못했습니다
각산님께서 쓰신 교전공부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 아직도 넘지를 못합니다.
각산님은 신은 확실하셨습니다.
저울질하고, 여우같이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은 신이 확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신이 확실하고 중요합니다.
특신급이 넘어서 상전급 정도를 가야합니다.
특신에서 그릇을 제대로 키우면 바로 출가위까지 갑니다.
성성식의 기초가 특신급에서 이루어 집니다.
특신에서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중근기에 99%가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중근기(中根機) ,
상근기는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바로 깨치는 것입니다., 육조대사, 대종사님이 이에 속합니다.
대부분이 중, 하근기에 속합니다.
하근기는 시키는 것은 예,예하면서 합니다.
중근기는 어느정도 영리해서 자기가 잣대를 재면서 99%가 퇴교를 하고 범부 세계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의심을 하는 원동력이다.
철학과 종교의 차이는,
철학은 의심을 통해서 밝혀지는 것을 믿습니다.
어떻게 보면 의심은 의심으로 계속 가는 것입니다
종교는 진리를 내 놓고 그것을 믿어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계속해서 믿어라 하는 것은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의심을 하면, 내 쫒겨납니다.
원불교는 그 믿음을 바탕으로 분발심을 가지고 이 뭐꼬 이 뭐꼬를 통해서 의심이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의심을 해결하는 원동력이 신입니다
세 번째는 계율을 지키는 근본이다 .
신은 자기의 주장보다는 진리의 말씀, 법의 말씀, 스승님을 가르치는 지도에 의해서 가능하면 거기에 맞추어서 하는 것입니다.
담배를 못 끊고 계속 다닙니다. 그런 사람은 특성이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거 하나떄문에 여러 가지가 곤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을 보면
미신(迷信)
광신(狂信)
불신(不信)
정신(正信)은 서원과 함께하는 믿음입니다.
정신이 제대로 되면 따라서 오는 것이 있습니다.
편안해 지는 것입니다. 정(定)을 했기 때문입니다.
밝아지는 것입니다.
통해지고 나중에는 낙이 오는 것입니다.
신락, 이거 무섭습니다.
초발심이 서 버리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믿음과 서원이 큰 만큼 깨달음도 크게 되는 것입니다. 정비례하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생 속아버렸다고 하고 내가 하라는 것을 해 봐라”하셨습니다.
그 다음,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신해해신(信解解信)
믿어서 알아지고 알아지기 때문에 그 믿음이 확신해 지는 것입니다.
그 전에, 심신앙신(深信仰信)
깊은 믿음입니다. 교법이나 우러는 것입니다.
초반에 모를 때는 이것이 필요합니다
정산종사님, 나는 이 법으로 반드시 성불 할 것을 믿었다 하셨습니다
대종사님을 만나시고, 이 스승님보다 큰 스승님이 없다
정산종사님을 두 번 시켜본 적이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저 사람들을 내 주머니에 넣어 놓고 다니겠다고 할 정도로 신이 대단하였습니다.
신이 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解)로 되어야 합니다.
해가 되기 위해서는 그 전에 스승이나 교법을 통해서 간절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깊어지면 묘합니다.
지혜가 밝으면 깨달아진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성리가 뚫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깨끗한 마음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믿지 않으면 깨끗하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원불교에서는 광신, 미신이 없습니다.
신이라는 것은 앎이라는 것을 반드시 동반하고 비례합니다.
먼저 의지와 포부를 가지고 믿음을 세우고, 원력을 바탕으로 수행의 길로 들어가서 깨달음을 얻어지고 깨달음이 자긍지지까지 가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확실하게 부처가 될 수 있다
인과와 영생의 진리는 확실하다,
이것은 그 누구나 시대의 변화를 주장하더라도 이것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참 이치라는 것입니다.
제 22장 깨달은 뒤에 닦는 내역
問- 旣悟此理인댄 更無階級이어늘 何假後修하야 漸薰漸成耶이까 答- 悟後漸修之義를 前已俱說이어늘 而復疑情을 未釋하니 不妨重說이라 汝須淨心하야 諦聽諦聽하라 凡夫- 無始曠大劫來로 至於今日히 流轉五道호대 生來死去에 堅執我相하야 妄想顚倒와 無明種習으로 久與成性일새 雖到今生에 頓悟自性이 本來空寂하야 與佛無殊나 而此舊習을 卒難除斷故로 逢逆順境에 瞋喜是非가 熾然起滅하야 客塵煩惱가 與前無異하나니 若不以般若로 加功着力이면 焉能對治無明하야 得到大休大歇之地리오 如云頓悟雖同佛이나 多生習氣深이라 風停波尙湧하고 理現念猶侵이라하며 叉(고)禪師- 云往往利根之輩가 不費多力하고 打發此事하면 便生容易之心하야 更不修致라가 日久月深하면 依前流浪하야 未免輪廻라하시니 則豈可以一期所悟로 便撥置後修耶아 故로 悟後에 長須照(찰)하야 妄念이 忽起어든 都不隨之하고 損之叉損하야 以至無爲하여야 方始究竟이니 天下善知識의 悟後牧牛行이 是也니라
문-기오차리인댄 , 묻기를 이미 성리를 깨쳤을진댄
갱무계급이어늘 , 다시 계급이 없다고 하였거늘
하가후수하야 , 어찌 닦는 것을 빌리며
점훈점성야이까 , 점점 익히며 점차 이룬다고 하셨습니까.
왜 다시 점수라는 것이 필요하냐?는 것을 묻습니다.
답-오후점수지의를 , 대답하기를 깨달은 뒤의 점점 닦는 뜻을
전이구설이어늘 , 앞에서 이미 다 설명하였거늘
이복의정을 미석하니 , 아직도 의심을 풀지 못하였으니
부방중설이라 , 거듭 설명하겠노라.
여수정심하여 , 그대는 마음을 온전히 하여
체청체청하라 ,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으라
여수해서 체청체청해라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아까 믿음은 깨끗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스승님의 말씀을 깨끗하게 듣고, 비우고 들어라, 상(相)을 놓고 들어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은 이것을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공부를 잘하려면 공부를 잘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요령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은 처음에 정법에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것은 경전입니다.
그런데 경전은 봐도 잘 모릅니다.
결국은 법설을 듣게 됩니다.
이것을 청법이라고 합니다.
스승이 법을 설했을때, 학위자가 청법을 잘해야 하는데 청법에는 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도가 없는 사람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14년 전에 원남교당에 있을 때였습니다
큰 교무님이 훈련을 갔습니다.
“오늘은 대타가 나왔습니다. 제가 홈런을 칠지, 안타를 칠지 모르겠지만...” 하고 법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끝났습니다.
법당 끝나고 나가서 인사를 합니다.
호타원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나를 좋아하셨습니다.
그 분이 오시더니 교무님 오늘 홈런입니다., 오늘 좋아버렸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어땠을까요?
제가 기분이 상했습니다.
저는 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저는 진리를 대종사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여기에 포커스를 초점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여기에 앉아 있는 사람의 마음에 쏘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아따, 부교무님 잘하네 하고있습니다.
초점이 반사되어 온 것입니다.
여기에 앉아 있는 사람은 저 법문, 우리 며느리가 들으면 딱 좋겠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앉아서 왜 저렇게 설명한다냐 합니다.
청법을 할 수 있는 생명이 있습니다.
다른 생명들은 기운을 전달받을 수 없습니다
법문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사람 밖에 없습니다
유스호텔을 갔는데 사진을 보니깐 새 무리들을 찍은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생명이 많은 곳이 어딘 줄 아세요?
허공, 땅속, 물속, 땅위입니다.
수 많은 생명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많은 생명이 있는 것은 허공입니다.
여기서 생명은 몸을 받은 생명, 몸을 받지 못한 생명까지 포함합니다.
그 다음에 물속과 땅속입니다
그 다음이 땅위입니다.
땅위 중에 사람의 수는 얼마가 안됩니다. 그 생명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 중에 불법을 만난 사람, 마음이 부처라는 즉심시불이라는 것을 공부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사람이 청법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만이 청법을 듣고 제도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 권도편 1장에 보면,
법문을 들을 때 듣는 사람의 마음의 정도에 따라서, 평범한 말이 소중한 법설이 되기도 하고,
애를 써서 설한 법문이 범상한 말이 되기도 하나니라. 그러므로, 법을 듣는 이는 먼저 돈독한 신성
과 극진한 공경을 바치고 무조건 봉대하는 심경으로써 한 마디라도 그 말씀을 헛된 데에 돌려 보내
지 아니 하리라는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들어야 그 법이 깊이 감명되어 길이 잊혀지지 아니하며
실지 경계에 활용되어 실다운 이익을 얻나니라.
법문을 들을때 온전한 생각으로 새겨들어라.
새겨 듣기 전에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라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현장스님은 법을 구하기 위해서 인도까지, 넘어서서 불법을 배우고
그 말을 배워서 반야심경을 번역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 정산종사님은 스승을 찾고 법을 배우기 위해서 경상도에서 전라도까지 옵니다
우리는 교당도 가깝고, 한자도 아니고 법문도 쉽게 하고, 쉽게 한글인데 오지도 않고 와서도 졸고 앉아있습니다. 그러면 실지 경계가 왔을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법문을 들을 때 오롯한 마음으로 들으면 서로 은혜가 됩니다.
제가 원남에 있을 때 어떤 분이 계셨습니다.
제가 법문을 할 때, 녹음테이프를 여기에 두십니다.
아주 갈망하는 마음으로 듣습니다.
녹음 테이프가 집에 몇 만개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돈 많은 분 중 하나입니다.
명절 때 챙길 사람이 수백명입니다. 유념 다 해서 챙깁니다
우리가 청법을 할려면 사람으로 태어나서 부처님 법을 만나서 제도를 해야 한다는 서원을 가지고 갈망을 가지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되잖아요.
시내에다가 모두 교당 세워놨잖아요
그런데 부처님 당대에 어떤 사람이 질문합니다
“부처님, 나는 부처님 법문을 들으면 이렇게 환희심을 듣고 좋은데 저 사람들은 왜 이렇게 부처님을 비방할까요?”
저 해를 봐라, 동녘에 해가 뜰 때, 우선 꼭대기를 비추고 그 다음 해가 서서히 뜨면서 높은 산에 비추고 해가 뜨고 나면 대지 평야에 비추는 것이다.
땅의 고하에 따라서 빛이 달라지듯이 우리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보살이 알아 듣고, 성문이 알아듣고,
그 다음이 중생이 듣고 그 다음에 무연중생까지 연결이 됩니다.
부처님의 법문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심근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수행품 25장에 들으면
<법설이나 강연을 들을 때에는 반드시 큰 보화나 얻을듯이 정신을 고누고 들어야 할 것이다 >
제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대입입시 설명회를 하다보니깐 거기에 사람이 붐빕니다.
여기는 사람이 붐비지가 않네요
제가 문제가 있는 건가요?
법문을 들을 때에는 요령을 잡지 못하고 들으면 효과가 없습니다.
첫째, 내 공부와 내 경계와 대조해서 온전한 생각으로 새겨들어라
누가 이 법문을 들으면 좋겠다가 아닌, 내 마음의 내 경계에 대조하는 것입니다
제가 법문을 할 때 제 마음에 대조하면서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자연반조가 되는 것입니다.
오롯하게 하면 자동적으로 솟아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좌산님께서 법문을 듣는데 듣고 듣고 또 들어서 들리지 않을 때까지 들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의식 세계를 뛰어 넘어 무의식 세계까지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서가모니 부처님은 49년간 법을 설해 놓고 나는 한 법도 설한 적이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청청 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산 종사님께서 권도품에
법문을 들을 때 마음을 비워라. 비우라는 것은 믿음으로 들어라는 것입니다.
법문을 들을 때, 저 말씀을 또 하시네, 내가 안다, 너무 어렵다, 너무 쉽다라고 생각하면서 듣지마라
모르고 알든 그냥 들어라 하는 것입니다
학식이라는 것은 모르면 모릅니다.
도가는 몰라도 신성이 뛰어나면 뚫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학식을 넘어선 지혜의 세계이기 때문에 간절하고 오롯하면 일자무식도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큐가 좋다고, 학벌이 좋다고 대가에 큰 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울대 출신 출가 하신 분이 많은데 큰 도인이 없습니다.
학벌이 낮은 분이 계신데 법문을 얼마나 잘하시고, 교화를 얼마나 좋으신지...
도가에서는 학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업가는 도시에서 나고 도인은 시골에서 난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으로 들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느냐를 해결하기 위해서 법문을 듣기 때문에 천만사의 일보다
간절하게 구하는 마음으로 들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활용할 대중을 가지고 들어라
일을 잘하는 사람은 하나를 설명하면 두 개 세 개를 압니다.
아마 그런 경험이 있을실 겁니다.
경계가 오면 자기도 모르게 확 솓아오르는 것입니다.
정산종사님께서 너무 적지 말라, 지혜가 열리면 싹 생각난다고 하셨습니다.
적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서 자료 기록할려고 하지 말고 오롯한 마음으로 듣다 보면 저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일때 나오는 것입니다.
자, 정심, 깨끗한 마음
기도할 때에도 정심 재계하옵고 합니다.
몸도 재계하면 더 좋지만 정신 재계하옵고 합니다
불신하는 마음, 분별성, 주착심으로 하면 안됩니다.
제가 학생들을 보면 공부 잘하는 사람은 선생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 사람은 똥멍청이가 아니면 연고대까지 갑니다.
이렇게 해라. 숙제 이렇게 하라 그대로 하면 잘 합니다
계교심이 있는 사람은 못갑니다.
범부-무시광대겁래도 지어금일히 , 범부가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유전오도호대, 다섯 가지 세계에 굴러다니면서
생래사거에 견집아상하야 . 나고 죽을 때에 아상을 굳게 잡아서
아상(我相)이라는 것은 무아가 아닌, 나다라는 실체가 있고, 상이 있는 것입니다.
수상행식,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식을 일으키는 나라는 뭔가가 있는 것이 아상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몸이 나가 아니다가 무아라고 생각하고 정신이라는 실상이 있어서
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외도이고 범부이며, 절대로 성자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조견오온개공, 오온하는데 개공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알아듣고 하는 것이 무엇이 들어서 알아듣냐?
나라는 실체가 있느냐?
수상행식이 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고급중생입니다.
하급중생은 몸이 나인줄 알고 몸에 치장을 합니다.
수상행식이라는 것도 여여자연하여 수상행식 할 뿐입니다.
지난주에 거울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거울에 비친 것이 나냐, 거울은 나를 비춰줄 뿐입니다.
비춰진 나가 나인 줄을 알고 아상이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돈있는 나, 학벌이 있으면 학벌이 있는 나, 아는 것이 있으면 아는 나,
이것이 법이라고 생각하는 법에 집착하는 나가 모두 아상입니다.
견집아상하는 사람은 망상전도(妄想顚倒) 하게 되어있습니다.
진실이 아닌 것이 망입니다.
나라는 것은 상이 없는 무상이며 무아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나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가 있기 때문에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본말전도, 가치가 전도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망상을 누에가 고치집을 만드는 것과 같다라고 합니다.
계속해서 생각에 생각에 꼬리를 물어서 자기의 굴레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없는데, 있는 내가 주인이 되어서 전도가 되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4전도에 대해서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망상전도와 , 망상과 뒤집힌 생각
무명종습으로 , 무명의 갖가지 습관들이
구여성성일새 , 오래도록 굳어져 자기 성격이 되었으니
나는 그런 것 못해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자기가 자기에게 속아 버린 것입니다.
본래 자기는 못나지도 잘나지도 않는 나 입니다.
그런데 나는 못났다고 잘났다고 생각하는 나로 굳어진 것입니다.
무명이 바로 식이인연의 첫째입니다.
불보살들은 무명이 명으로 밝게 비춰져서 자성을 공적영지로 비추는 것입니다.
공적영지로 비추기 때문에 12인연을 굴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보살과 중생의 차이인 것입니다.
결국은 무명이라는 것은 요란하고 어리석고 그른 마음입니다.
이것이 오래가면 습관이 된 것입니다.
성품에서 정신이 나오고 정신에서 마음이 나오고 그 마음이 분별성으로써 습관의 주착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딱 경직된 마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수도금생에 돈오자성이, 비록 금생에 문득 깨닫기를 자기 본성이
본래공적하야 , 본래 텅 비고 고요하여
여불무수나 , 부처님과 더불어 다름이 없음을 알았으나
이차구습을 졸단제단 옛 습관을 갑자기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제가 너무 피곤해서 낮에 잠깐 졸았습니다.
그 다음 날 2시가 되니깐 몸에 힘이 쫙 빠지는 것입니다.
몸이 참 신기 합니다.
우리 정산종사님은
제1의 천성, 자성
제2의 천성, 습관
제3의 천성, 환경
미국에서 스티븐 콥이라는 사람은 운명은 습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돈오를 했지만 점수 과정이 정말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점수과정에 더 공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성을 먼저 깨쳐야 합니다
자성을 깨치지 못하고 습관을 하면, 그 습관이 하나의 형식이 되는 것입니다.
나쁜 놈의 습관이라고 하는 것은 자성을 모르고 습관을 녹이는 것입니다.
경계 따라 마음의 또 나왔구나 하는 사람은 습관이 녹아지는 방법으로 하는 것입니다
식망현진(息妄顯眞) , 망념이 생겨 났을 때, 놓고 놓고 쉬고 쉬면 망념이 알아서 쉬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원리입니다.
망념이 쉬면 진성이 솟아 오르는 것입니다.
수승화강 , 물기운이 올라오면 불기운이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진성이 올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건강할 때 견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21살 짜리와 70대와 50대가 견성하는데 한마음입니다.
통계를 놓고 보면 몇 배가 걸립니다.
젊을 때 해야 합니다.
부처님과 다름이 없는 것을 깨닫는 것은 사실은 시작입니다. 완성 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원리를 아는 통찰입니다.
마음의 실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바로 부처구나, 마음이 텅 비어서 공적 영지한 것을 알 뿐이지,
그것이 완성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견성이라는 것은 신호탄일 뿐입니다.
고로 봉역순경에 , 그러므로 순경 역경을 만남에
진희시비가 , 성내고 기뻐하고 옳고 그른 마음이
치연기멸하야 , 불꽃처럼 일어났다 없어지고
객진번뇌가, 경계에 따른 번뇌 망상이
여전무이하나니 , 깨닫기 전과 별로 다름이 없을 수가 있나니라.
순역이라는 것은 마음이 걸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잘풀리는 것입니다.
역이라는 것을 팍팍하게 힘든 것입니다.
순경은 싹싹 풀리는 것입니다. 내가 보니깐 역경은 나를 키우는 것이 되고,
순경에는 거의 대부분 녹아나는 것입니다.
제가 보니깐 우리 교당에 열심히 나오는 사람은 시간이 많이 남아서 열심히 나오는 사람은 적습니다.
오히려 돈 벌기 바쁘고, 몸이 더 아프고 하면서 시간을 조절해서 나오는 분이 더 많습니다
제가 군대에서 교전을 6번을 봤습니다.
특히 언제 봤냐? 이등병 때 더 많이 보았습니다. 힘드니깐 더 많이 보았습니다.
말년에는 시간이 남았어도 족구하고, 장기 두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생각하니깐 웃겼습니다
바쁘고 힘들 때 교전을 더 많이 보고 ,
역경 힘들 때는 마음을 챙깁니다
가난하면 도심이 증가하고 배가 부르면 도심이 줄어든다 하였습니다.
보통 사람은 직장이 힘들고, 돈이 없고 해서 교당에 못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어서 못 나오는 것입니다.
일이 잘 풀리면 자기가 잘 해서 그런 줄 압니다.
설사 깨쳤다 할지라도, 순경 역경이 오면 마음이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경계를 당하면 공부 찬스, 공부할 기회입니다.
기도도 일이 잘 풀리면 기도 잘 풀린다고 놀아버리면 안됩니다.
중생들은 좋았다 나쁘다 좋았다 나쁘다 계속 시소를 타는 것입니다.
보살들은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약불이반야로 , 만약에 지혜로써
반야는 깨친 지혜, 인과와 불생불멸을 깨쳐서 아는 것입니다.
성품의 광명, 자성의 광명입니다.
가공착력이면 , 공들임을 더 하고 힘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언능대치무명하야 , 어떻게 어두운 마음을 다스려서
득도대휴대헐지지리요 , 크게 쉬고 크게 쉬는 경지에 이르리요
휴휴암 자성문, 좌선을 하면 쉬고 쉬는 진공, 공적이라고 합니다.
공적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적이라는 것은 기멸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에 기멸이 없습니다.
번뇌가 없는 것이고 고요합니다. 그 자리에 쉬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조용하고 한가롭습니다.
그 자리를 거닐어야 합니다.
그 자리를 대적광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피곤할 때 좌선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저는 좌선을 하고 나니깐 힘이 나고 할 일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피곤했다고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피곤해서 죽어버렸으면 진작 죽어버렸습니다.
여운 , 옛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돈오수동불이나 , 부처와 더불어 다름이 없음을 돈오하였으나
다생습기심이라 , 많은 전생에 익힌 바 습관 업력이 깊은지라
풍정파상용하고 , 바람은 잤으나 물결은 더욱 출렁이고
이현염유침이라하며 , 성리는 보이나 잡념은 더욱 침노한다고 하였으며
설사 성리를 깨쳤다 할지라도 경계에 따라 생기는 번뇌는 당연한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의 소자리입니다.
차고선사-운 또 종고선사가 말씀하시기를
왕왕이근지배가 , 왕왕 영리한 무리들이
부비다력하고 타발차사하면 , 힘들이지 않고 성리를 깨치면
편생용이지심하야 , 닦는 것을 쉽게 생각하여
이것이 무섭습니다.
의외로 견성을 하고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견성을 하고 중간에 중근병이 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갱부수치라가 , 다시 닦는 일에 정성을 들이지 않다가
일구월심하면 , 날이 오래가고 달이 깊어가면
의전유랑하야 , 무명의 물결에 흘러서
미면윤회라하시니 , 윤회의 고통을 면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즉기가이일기소오로 , 어찌 한번 깨달은 것으로
편발치 후수야아 , 뒤에 닦는 것을 방치하겠는가
장수라는 것은 오래 오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좌선을 조금 해 놓고 안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 년했냐? 1년했다고 합니다.
조찰이라는 것은 습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성을 봐서 습관을 녹여버리는 것입니다.
다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자성자리는 본래 습관도 없다,
무시습기로 생겨난 것은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기 때문에 조찰이라는 것입니다.
원불교로 말하면 삼학 공부입니다.
내가 설사 깨달았다고 해도 이것은 완성이 아니라 공부의 시작이기 때문에
반조공부, 주의공부, 조견공부, 대조공부, 유무념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목수가 먹줄과 잣대를 얻었기 때문에 이제 집을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야 겨우 아기를 낳은 것입니다. 아기를 낳고 가르쳐야 하고 먹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바로 견성을 했다고 해서 내 마음이 공부의 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망념이 홀기어든, 망념이 홀연히 일어나면
도불수지하고 , 도무지 망념에 따르지 말고
손지차손하야 , 망념을 덜고 또 덜어서
이지무의하여야 , 무위의 지경에 이르러야
무의는 해탈의 세계입니다.
방시구경이니 , 바야흐로 마음 닦는 구경처라고 하나니
천하선지식의 , 천하의 마음공부하는 선지식의
오후목우행이 시야니라 . 깨달은 뒤의 목우행이 바로 이것이니라.
깨달은 뒤에 공부가 이런 것이다
목우라는 것은 소를 키우듯이 우리의 마음을 키운다라고 합니다.
소가 우리의 마음입니다.
감사합니다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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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마음공부방 ◆
930909_수심결과 마음공부10 <21,22장>_허석교우님강연_김제원교무님 설법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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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9.10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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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연님 빠른 등재와 자세한 기록에 늘 감사합니다
오늘따라 법문과 음악이 참 좋습니다. 이연교우~ 감사해요~!
이날 교무님 설법 듣고 특히 청법의 도.. 부분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다시 듣고, 다시 듣고, 오롯이 듣는 그 마음속에 깨달음이 있다는 말씀.. 저는 오랫동안 화요공부방을 참석하면서 그런 마음을 잃은 건 아닌지 생각했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그 시간과 공간을 함께 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큰 것 같습니다. 읽거나, 보거나 하는 것과는 또 다른 것 같아요. 같은 시간, 소리의 파동을 발하는 사람과 파동을 인지하는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인연인지요. 초발심이 부처를 이룬다고 하셨으니 처음 화요공부방에 참석하였던 그러한 깨달음과 떨림의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야겠어요.
순명교우님 화이팅~! 젊음의 굳건한 힘이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