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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응선생 묘 일원(충남 기념물 90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도응선생 묘역 전경 |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지석리에 있는 고려 후기의 충신 도응 청송당 도응 선생과 그의 손자인 순손(順孫)의 묘이다. 도응은 조선 태조의 죽마지우(竹馬之友)로서 고려 말에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
▲ 묘역 하단 우측에 위치한 재실 |
▲ 묘역 하단 모습 |
태조가 조선을 세우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켜 벼슬을 버리고, 홍주 노은동(지금의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숨어살았다. 후에 태조가 친구의 정리를 생각해 상장군(上將軍)에 임명하는 등 다섯 번이나 불렀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태조가 그의 충절을 아름답게 여겨 청송당(靑松堂)이라는 호를 내렸다. |
▲ 묘역 하단에 좌측에 위치한 구 신도비 |
▲ 묘역 하단에 우측에 위치한 신 신도비 |
묘가 있는 예산군 응봉면 지석리는 도응이 말년에 은거하던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서 이웃한 마을인데, 홍성 쪽에서 내려오는 낮은 산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언덕의 기슭에 각각 도응 부부와 그의 손자인 순손(順孫) 부부의 무덤이 있다. |
▲ 묘역에서 내려다 본 재실과 신도비 모습 |
남향한 언덕에 동서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도응 부부의 무덤 앞 사이에는 ‘高麗忠臣星州都公膺之墓(고려충신성주도공응지묘)’라고 새긴 비석이 서 있다. 1993년에 무덤 앞을 정비하면서 땅속에서 대리석으로 만든 비석이 발견되었다. 앞면에 ‘高麗國重大匡門下贊成事星州都公諱膺之墓(고려국중대광문하찬성사성주도공휘응지묘)’, 옆에 ‘丙午八月日再重修(병오팔월일재중수)’라는 명문(銘文)이 있었다. |
▲ 도응 선생과 군부인 단양 우씨 쌍분묘 |
이로써 대리석재 비석은 무덤 축조보다 늦은 어느 시기에 세운 비석이고, 현재의 비석은 그 후에 다시 세운 것으로 추측되어 여러 차례 중수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 묘역 좌측면에 위치한 구 묘갈과 봉분 뒷편에서 바라 본 모습. 손자인 순손 묘는 어디 있는지 모르겠네요... |
비석 앞으로 한 쌍의 문인석과 망주석이 서 있으며, 망주석 사이에 석등이 있다. 언덕의 아래쪽에는 그의 14세손 되는 병택(秉澤)이 전(篆)을 하고 풍천(豊川) 임영호(任英鎬)가 쓴 신도비가 서 있다. 태조가 내린 왕지 4점과 녹폐 1점이 남아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
성주 도씨 종중 문서(보물 72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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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 이성계가 도응에게 하사한 사령왕지 4매와 녹패 1매 - 문화재청 사진 |
조선 태조 2년(1393)부터 6년(1397)까지 도응(都膺)에게 하사한 사령왕지 4매와 녹패 등 5매의 고문서이다. 고문서를 보면 도응위조봉대부전의소감사령교지(1393), 도응위선절장군흥위위좌령장군사령교지(1394), 도응위선절장군용우무위사좌령장군사령교지(1395), 도응위보공장군호용순위사간대장군사령교지(1397), 회사선절장군흥위위좌령장군사령녹패 등이다.
이 왕지에는 고려말 조선초의 관직이 섞여 있으며 ‘조선지보’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이것은 태종 이후에 ‘조선왕국지보’나『경국대전』반포 후에 사용된 ‘시명지보’와는 다름을 알 수 있다. 이것들은 조선 전기 관제의 변천과정, 새보(국왕의 도장)의 사용경위, 서체의 변천 그리고 고문서 양식의 변천과정을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
도응선생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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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표 ↑ 위에 보이는 쌍분이 도응선생 묘역입니다. 소재지 : 충남 예산군 대술면 이티리 산34 |
지도 좌측 하단의 화살표 위치에 도응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예산 수덕사 IC를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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