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보네 에세이 76
기억의 정원을 거닐며
내일을 가꾸다
노년의 하루는 고요하다.
창밖의 햇살은 느리게 흘러가고,
바람은 오래된 나뭇잎을 스치며
지나간다.
그럴 때면 마음이 저절로 과거로 향한다.
젊은 날의 웃음, 그리운 얼굴,
바람에 흩날리던 목소리들이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마음 속에서 다시 빛을 낸다.
남들보다 디지털 문화를
일찍 접해 카메라를 들었고,
고향 관련 카페를 열어
수천 명의 회원이 모였다.
고향 사람이라면 누구나 찾아오는
그 공간은 내게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고향 사랑의 터전이었다.
그때의 나는 참 열정적이었다.
아무런 보수나 대가를 바라는 것도 아닌,
오직 내 고향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매일 같이 사진을 정리하고,
글을 올리고, 찾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선물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까지 생기고
참 곡절도 많은 시절을 보냈다.
차츰 디지털 세상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진화하는 문화와 디지털 공간이
주목받는 세상으로 변해갔다.
사람들은 더 빠르고 더 가벼운 곳으로
하나둘 옮겨갔고, 그렇게 변해 가는
디지털 문화의 흐름속에
이제는 그 시절의 열정이 추억이 되어,
조용히 나를 감싸는 온기가 되었다.
나이가 들면 가까운 일보다
오래된 기억이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고 한다.
어제 먹은 점심은 가물거려도
젊은 날 어느 골목의 냄새는
지금도 코끝에 남아 있으니,
참 신기한 노릇이다.
아마 그 시절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뜨겁게 살았기 때문이리라.
뜨겁게 새겨진 것들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그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삶의 열정이 남긴 흔적이며,
지금의 나를 이루는 자아의 뿌리다.
그러나 회상은
언제나 아름답지만은 않다.
추억을 들추다 보면
철부지 시절의 씁쓸한 감정이
불쑥 고개를 든다.
그때의 나는 너무 서툴렀고,
지금 세대의 눈으로 보면
참 올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미숙함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조금 더 단단해지고,
조금 더 따뜻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문득 이런 두려움이 든다.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
추억 속에 고정된 채 박제된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대적 격차와 이해되지 않는
문화 앞에서, 나도 모르게
지나간 방식이 옳다고
혼자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곁에 있는 손주들의 언어를,
그 아이들의 세상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시대는 멈추지 않는다.
과거의 기억을 품되,
생각과 마음은 지금의 문화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진정한
노년의 품격이 완성된다고 믿는다.
추억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더 아름답게 살아가기 위한
다리가 되어야 한다.
그 시절의 시행착오와 후회는
결국 나를 성장시킨 삶의 밑그림이었다.
그 그림이 완성되어 가는 지금, 나는
그때의 나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그 서투름 속에서도 나는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나는 천성적으로
이윤을 남기는 사업가 기질이 못된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현실적 감각보다
사람과 이야기, 추억을 남기는
일에 더 마음을 쏟았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가난한 서민이지만,
그 대신 마음에 쌓인 디지털 감성은
아직도 분명 늙지 않았다.
손해를 보더라도 부끄럽지 않았고,
작게 살아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런 삶이 나를 지켜주었고,
그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살아 있게 한다.
노년의 회상은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다시 확인하는 의식이며,
"나는 살아냈다"는 조용한 선언이다.
세월이 저문 들판 위에,
오래된 기억들이 꽃처럼 피어난다.
그 꽃들은 시들지 않는다.
그리움은 고요한 강물처럼 흘러,
지나온 날들을 하나씩 비추며 말한다.
"너는 참 잘 살아냈다.
그리고 기억한다.“
이제 나는
그 기억의 정원에서 천천히 걷는다.
바람이 스치면, 오래된 향기가 피어난다.
그리스인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저승에는 두 갈래의 물길이 흐른다고 —
하나는 레테,
모든 것을 잊게 하는 강이요,
하나는 므네모시네,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는 여신의 샘이라고
그들은 죽은 자에게 물었다 한다,
잊음의 강물을 마실 것인지,
기억의 샘물을 마실 것인지.
그러나 사랑으로 새겨진 추억은
망각의 강조차 쉽게 지우지 못한다 했다.
너무 깊이 새겨진 것들은
강물에도 씻기지 않고
가라앉은 채로 남아,
문득문득 수면 위로 떠오르는 법이니까.
나는 이제 안다,
내가 어느 물을 택했는지를.
나는 잊기보다
기억하는 쪽을 택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밤새워 사진을 정리하고,
글을 올리고,
이야기를 남기는 줄 모른다.
므네모시네는 아홉 뮤즈의
어머니라 했으니,
어쩌면 내가 써온 글들도,
그 오래된 여신이
내게 들려준 선물이 아닐까?
기억한다는 것은 붙드는 것이 아니라,
그 위를 건너가는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추억은
지나간 시간을 붙드는 게 아니라
지나온 시간에 속삭이는
고마움이었다.
"그리고 나는 안다 —
노년의 시간은 잊혀진 것이 아니라,
완성된 시간이라는 것을.
기억의 정원을 거닐며,
나는 내일의 정원을 다시 가꾼다.
그것이 삶이 아니던가."
2026.8.9.
배규택
#기억의정원 #시보네에세이
#노년의품격 #삶의회상
#인생에세이
"지나온 길목마다 마주친 풍경 위에,
이 글의 온기와 닮은 작은 문장들을
가만히 얹어두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참 그랬었지' 하고
나지막이 미소 지을 수 있는
따스함이기를 바랍니다.
카페 게시글
Essay
시보네 에세이 76 / 기억의 정원을 거닐며 내일을 가꾸다
배규택
추천 0
조회 121
26.08.10 00:08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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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보네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도 조금씩 성장하는 느낌을 받으며
새로운 세계를 알게되는 밑거름이 되었지요.
참 힘든 일을 격으면서도 지금까지
"내 고향 풍기" 카페지기로 활동 할 수 있는 것을
풍기인이라면 그 고마움을 알지요.
지역의 소식을 알리고 직접 발로 뛰며
카페에 기여한 공이 크다는 걸 압니다.
누그라도 견디기 힘든 일을 격으면서도
카페를 지키고 몇천명의 회원들에
쉼터가 될 수 있도록 지켜주신 것 박수를 보냅니다.
시보네님의 노고가 아니라면 "내고향 풍기"라는
카페는 존재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마음의 양식을 지금까지 공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카페가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늘 건강하셔야합니다.
오늘 행복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