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봉’으로 뜨고 <마파도 2>의 새로운 할머니로 투입되기까지 김지영은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다. 오랜 인내 끝에 뒤늦게 자신의 전성기를 열어가고 있는 그와의 만남 속에서 대기만성의 진정한 의미를 되물을 수 있었다.
주성철 기자 다른 영화 출연작들에 비하면 꽤 오랫동안 서울을 벗어나서 촬영했다. 김지영 아무래도 최근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공동주연이다 보니까 촬영일자가 길었다. 내 마음 같아서는 그 섬에 계속 눌러앉아서 촬영하고 싶었는데 다른 배우들 스케줄 때문에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너무 공기 좋고 경치 좋은 데라 항상 하루 전에 내려가서 자고 그 다음날부터 이틀 동안 촬영하고, 그 다음에도 다른 사람들보다 하룻밤 더 자고 올라가니까 일주일에 나흘은 그 섬에 있었다. 늘 내려가는 게 즐거웠다. 다들 나이는 많지만(웃음) 꼭 옛날 소꿉친구들 만나는 기분이었다.
주성철 기자 <마파도 1>의 출연진이 그대로인데 거기에 혼자만 새로 투입됐다. 부담감은 없었나? 김지영 1편 때 출연제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런 영화가 만들어지는지도 몰랐다. 1편 때 계속 호흡을 맞췄던 배우들 틈으로 들어가는 거라 힘들긴 했다. 새 직장 들어가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며칠 찍고 끝나는 것도 아니고, 몇 달씩 다 함께 호흡을 맞춰야 하는 거니까 어쨌건 다른 배우들하고 휩쓸려야 한다는 생각도 했고.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신인이라면 무조건 성실하게 밀고 들어갈 텐데, 내 기존 이미지나 스타일을 가진 채로 그 틈에 들어가야 하니까 그 흐름을 잘 파악해야 했다. 다른 배우가 강조될 때 가라앉고 내가 또 도드라져야 할 땐 가차없이 밀고 나가고, 그 밸런스를 맞추느라 애 많이 썼다.
주성철 기자 비슷한 연배의 꽤 많은 배우들이 출연하는데, 그들 중 평소 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나? 김지영 공교롭게도 정말 이전부터 친한 사람들이 없었다. 김형자 씨는 옛날부터 나처럼 영화를 많이 하던 배우인 건 알지만 같이 해본 적이 없었고, 아침드라마 같이 한 적이 있으면서도 함께 붙는 신이 아니었다. 여운계 씨와도 같은 드라마 한 적이 있는데 녹화날짜가 또 달라서 못했다. 김을동 씨와는 특집극을 한 번 같이 해본 적이 있는데 정말 착하고 심성이 고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시간을 두고 한번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긴 했다. 그러니까 실제로도 그 틈에 조심스럽게 끼어들어 휩쓸려야 했다.
주성철 기자 1편에서 김수미가 연기한 욕쟁이 할머니 캐릭터를 이어받은 것 같기도 하다. 욕은 원 없이 한 것 같나? 김지영 감독이 특별히 요구하거나 하진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마파도 2>를 하면서 많이 놀지 못한 것 같다.(웃음) 큰 멍석을 깔아줬는데도 여러 사람이 호흡을 맞춰야 하고 그 속에서 밸런스를 잡는 데 애쓰다보니까 마음껏 발산을 못한 아쉬움도 조금 남는다. '걸지게' 신명풀이를 해보고 싶었는데 다른 배우들에 묻어가느라 다 못했다. 나름 힘줘서 연기했던 건 닭 잡아먹는 신이었다.
주성철 기자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각 지방 욕은 물론 경상도, 전라도 사투리 등을 정말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실제 고향은 함경도로 알고 있는데? 김지영 대체적으로 언어를 잘 배우고 한 번 들으면 잘 기억하는 편이다. 내가 옛날 쭉 영화를 하다가 방송 쪽으로 오니까 시쳇말로 텃세가 세서 살아남을 방도를 찾으려 애썼다. 어차피 주연급을 하는 건 아니라 대책이 필요했던 거다. 그러면서 가만히 보니까 배우들이 사투리 실력이 부족하더라. 그래서 이를 갈면서 사투리를 배우러 다녔다. 지방촬영 가서 시간이 남으면 시장이라든가 논으로 밭으로 하여간 사람 많은 데 찾아다니면서 사투리를 익혔다. ‘그 사람 누구야?’ 그러면 한 아주머니가 ‘어, 이 사람 배우래’ 그러면서 일 거들어주고 말 시키면서 듣고 그랬는데, 지금처럼 얼굴이 팔린 상황이면 못 했을 일이다.(웃음) 내 머릿속에 녹음테이프가 있다면 아마 수천 개는 될 거다. 그렇게 세상일이란 게 공짜가 없다. 이후 점차 나를 그런 역할로 많이 써주셨고 난 최선을 다 했다. 어떤 사람들은 내 고향이 어딘가를 두고 내기도 하더라. 옛날에는 사투리가 어설퍼도 그런가보다 하면서 넘어갔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조금이라도 어색하면 딱 알아본다. 그것 하나로 극의 사실성이 확 떨어지는 것이다. 이제 시청자나 관객들이 우리 스승이다. 판단이 예리하다. 그러니 배우들이 예전처럼 어영부영해서는 안 된다.
주성철 기자 그럼 언제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오게 됐나? 김지영 나는 해방둥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해방이 됐고 그때 서울로 왔다. 사실 원래 가족이 다 서울 사람들인데 우리 세 자매만 함경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제에 못 이겨 북으로 피난을 가 있다가 내려온 거다.
주성철 기자 연기자의 꿈을 꾸게 된 건 언제쯤인가? 김지영 난 생전 연기자의 꿈을 꿔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가 ‘넌 성격도 곧고 거짓말도 못하니까 법조인이 돼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난 꼭 법관이 되겠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런데 그게 6.25가 터지면서 다 무산됐다. 어쨌건 그렇게 어려서부터 유랑극단이니 영화니 하는 거 구경 간 적도 한 번도 없고 소위 딴따라라는 것과는 완전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옛날 그 유명하신 배우 김승호 씨와 형님 동생 하던 사이였다. 가끔 우리 집에서 술도 드셨고. 그러고 6.25가 끝나고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니까 집에서 시집 보낼 생각을 하더라. 그땐 뭐 있는 집 애들이야 대학 보낼 생각을 했겠지만 대부분 열일곱, 여덟 살 때 시집가고들 했다. 난 그게 너무 싫은데 암만 해도 가만 있으면 시집가게 생겼더라.(웃음) 그래서 피신할 요량으로 김승호 아저씨한테 쫓아가서 일을 시켜달라고 했다. 그래서 작은 역할이나마 연기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주성철 기자 완전히 딴따라의 삶과 무관하게 살아가던 사람이 어떻게 쉽게 적응할 수 있었나? 김지영 처음부터 쉽게 적응했던 건 아니다. 다만 결혼하기 싫어서 시작한 일이라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김승호 주연, 김수용 감독의 <상속자>에서 특별한 배역도 없이 그저 대사 몇 마디 있는 가족, 친지 역할로 데뷔했는데 나를 참 마음에 들어 하셨다. 중요한 역할은 아니라도 대사를 잘 한다고 그때부터 김수용 감독님 문예영화 같은 데 대부분 출연하게 됐다. 주변에서 칭찬을 많이 해주시니까 ‘내 속에 그런 끼가 있었던 건가?’하고 궁금해 하긴 했다. 그러면서 어쨌건 이 일로 내가 굶어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한 거지.(웃음) 그 다음으로는 임권택 감독님하고도 영화를 많이 했다. 거의 전속처럼 한때 매 작품 빠지지 않고 출연했는데 연기자로서의 인정이라는 면에서 임권택 감독님 영화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조연, 단역 가리지 않고 다 시켜주셨고 배우로서 노력하고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분이다.
주성철 기자 최하원 감독의 <초대받은 사람들>(1981)로는 대종상 시상식에서 특별연기상을 받기도 했다. 영화배우로서 오랜 활동의 결실이었던 것 같다. 김지영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영화다. 천주교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영화인데, 천주교 신자로서 자식들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배반할 거냐 말 거냐 하는 극한 상황에 놓인 사람이었다. 매 맞아서 깨진 거 입술 부르튼 거 등 분장도 일일이 다 했다. 또 눈이 충혈 돼야 하는 장면이 있어서 미친 척하고 호랑이기름을 구해다 발랐는데 정말 눈알 빠지는 줄 알았다. 해외에는 눈 충혈 되게 하는 안약이 있다는데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 그런 게 있었나 뭐.(웃음) 하여간 정말 공들였던 작품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나를 대종상 여우조연상감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떤 미친 사람이 그걸 뺏어서 자기 작품에 줬다. <초대받은 사람들>에 함께 출연했던 원미경과 내가 그렇게 나란히 주연, 조연상을 놓친 거다. 오죽하면 심사위원들이 너무 아깝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합의를 해서 특별연기상을 줬다. 그런 상이 아마 그때 처음 생긴 걸로 알고 있다.
주성철 기자 그 외에 또 기억에 남는 영화들이 있나? 김지영 지금 생각해보면 <초대받은 사람들> 외에 <길소뜸>(위 사진)(1985), <아다다>(1987) 이렇게 3편의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비중이 작았던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캐릭터도 뚜렷했고 만족도도 높았다. 그런데 또 그 두 작품도 안 좋은 기억이 있다. <길소뜸>으로도 다시 한 번 대종상 여우조연상 후보로 올랐는데 또 이상한 사람 하나가 내 상을 뺏어서 후보에도 안 오른 사람을, 남편이 죽어서 위로차 줘야 한다고 해서 줘버렸다. 그런 정말 불운의 시대가 있었다. 당시 그 정도였으니 상의 권위가 생길 리 있겠나. 그렇게 계속 인정은 받았지만 상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주성철 기자 그럼 <아다다>는 또 왜? 김지영 <초대받은 사람들> <길소뜸> 다 그런 식으로 상을 뺏겼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 약이 올랐다. 그래서 임권택 감독님을 찾아가 나 정말 화가 난다, 감독님 작품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상 한 번 받고 싶다 그렇게 간곡하게 얘기했다. 감독님도 사정을 잘 아시니까 <아다다>에서 감히 시어머니라는 큰 역할을 주셨다. 역시 또 잘 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후보로도 당연히 올라가는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또 한 감독의 작품 두 개가 나란히 후보로 못 오른다는 이상한 규정을 만들어버렸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지. 그때 임권택 감독님이 같은 해 <연산일기>도 만들었을 때라 <아다다>는 아예 여우조연 후보에서 누락됐다. <아다다>는 당시 감독상, 연기상 다 휩쓸 만큼 잘 만든 영화라 너무 안타까웠다. 오죽하면 화천공사 박종천 대표님이 화가 나서 그 뒤로는 한국영화를 안 만들겠다고 하시면서 외화수입만 하셨을까. <아다다>뿐만 아니라 <만다라> <족보> <길소뜸> 등 흥행성 없어도 좋은 한국영화들을 꾸준히 만드셨던 멋진 분인데 말이다. 공교롭게도 그런 규정 만들고 한 사람이 또 예전 내가 상 못 받게 한 사람이기도 해서, 얼마나 열 받았는지 불 싸지른다고 휘발유통 들고 그 사람 집에 찾아가기도 했다.
주성철 기자 <공포의 외인구단> 시리즈에서 엄지 엄마 역할도 기억에 남고, 하여간 정말 꾸준히 한 해도 쉬지 않고 영화를 했다. 공백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데 그 원동력이 뭔가? 김지영 원동력이라면 일하는 즐거움이고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인정받을 때의 쾌감이 있다. 게다가 그렇게 인정받다보니 내게 큰 역할을 주지 않더라도 일단 내가 출연하면 안정감이 생긴다고 느끼는 감독들이 많았다. 그래서 신인 감독들이 나를 많이 찾아줘서 좋았다. 배창호 감독 <꼬방동네 사람들>, 박광수 감독 <칠수와 만수>도 했고 이후에 이장호 감독 작품도 많이 했다. 그러면서 내가 괜찮은 배우인가, 하는 생각도 가끔 들어서 뿌듯했다. 그래도 중간에 공백기가 있긴 했다. 4.19, 5.16 지나면서 연기하기 힘든 시대가 왔고 그때 난 또 두 아이의 엄마였다. 그래서 연기 접고 아이나 키우자고 했는데 애들 아버지가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전세 뽑아서 병원비, 약비 다 댔는데도 쉬이 낫지를 않더라. 그래서 배운 게 도둑질이라 당장 먹고 살아야 해서 다시 영화를 한 거다.
주성철 기자 영화배우로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에 방송국도 문을 열었는데 탤런트 시험은 보지 않았나? 김지영 시험은 안 쳤고 섭외는 많이 들어왔다. 일단 아무 역할이라도 소화가 다 가능하니까 많이 찾았겠지. 당시 이순재, 전운, 김무생처럼 탤런트로 먼저 선보인 배우들이 영화계로도 많이 넘어갔다. 그때만 해도 소위 스타급 배우라고 하는 사람들이 프롬프트 없으면 대사도 잘 못하는 등 제대로 훈련 안 된 사람도 많았으니까 그들이 영화계에서도 맹활약한 거다. 그러다보니 영화인들이 방패막이로 영화배우들에게 드라마 출연하지 마라, 방송국 가면 제명이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제명한다고 하니까 겁나서 순진하게 따랐지 뭐. 그래서 몇 번 나를 찾아와서 출연해달라고 했는데 거절했다. 그렇게 한 10년을 지내다가 1982년인가 그때 처음으로 MBC에 가서 <수사반장>을 했다. 그때부터 일이 막 들어왔다. 눈에 띄는 주연급 외에도 중요한 역할들이 많으니까 일거리가 참 많았다. 이후에 KBS에서 <울밑에 선 봉선화>라고 일주일짜리 역할을 맡게 됐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다. 김재순 PD가 ‘당신 같은 탤런트가 왜 이제 나타났냐고 그러면서 누구누구 건방떨지 말라’고 소리치고 다녔을 정도였다. 그래서 일주일짜리 역할이 드라마 끝까지 갔다. ‘끝순네’ 역할이었는데 이름 그대로 끝까지 간 거다.(웃음) 요즘 인터넷 댓글처럼 방송국으로 ‘끝순네 파이팅’ 그런 편지나 엽서도 참 많이 왔고 행복했다. 그때부터 월화, 수목, 주말, 아침드라마 할 것 없이 거의 일주일에 8, 9개 드라마를 동시에 했던 것 같다. <우리는 중산층>처럼 주인공을 맡게 된 드라마도 있었고. 그렇게 또 10여 년을 보냈다.
주성철 기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연배우가 아닌 상황에서 그 오랜 세월을 버텨오기가 힘들었을 것 같다. 매니지먼트도 없던 시절 아닌가? 김지영 그땐 매니지먼트는 물론 기성복도 없던 시절이었다. 우리 같은 배우는 협찬 같은 거 꿈도 꿀 수 없었지. 그런데 당시 제법 나간다 하는 배우들은 다들 매니지먼트라는 것 대신 자기 단골 양장점이 있던 시절이었다. 우리처럼 단역 하던 사람들은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을 수 없었다. 주로 미군들 제품이 있는 구제품 시장이나, 누가 돌아가셨다 하면 버리기 아까워서 내다 파는 그런 데 보따리 싸들고 가서 옷을 구했지. 전차 타고 다니면서 그 옷들 다 짊어지고 다니느라 정말 고생했다. 거기에 비하면 요즘은 정말 연기만 하면 되는 시절이지 않나. 참 좋은 시절이다.
주성철 기자 최근 뒤늦은 전성기를 맞게 된 시발점이 본명 그대로 나왔던 드라마 <여고시절>과 작년 연기대상을 안겨준 <장밋빛 인생>이 아닐까 한다. 김지영 <여고시절>은 뒤늦게 투입됐는데 늘 해보고 싶어 했던 시트콤이라 좋았다. 그거 하면서 내가 푼수기가 좀 있긴 있구나 하고 느꼈다.(웃음) 사실은 굉장히 내성적이고 낯선 사람과 얘기도 잘 못하는데 말이다. 애드리브를 막 해도 좋고 대사도 굳이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할 필요도 없어서 정말 자유로웠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는 그 드라마만큼 예쁜 머리, 분장, 소품 마음껏 해본 적이 없었다. 이전에는 주로 억척스런 아줌마 그런 걸 많이 했는데 굉장히 고급스럽게 나온 첫 번째 역할이라 기억에 남는다. <장밋빛 인생>은 ‘미스 봉’이라는 인상적인 별명도 남겨줬고 큰 상까지 받게 돼서 너무 기뻤던 작품이다.
주성철 기자 2007년 신년 계획이 있다면 뭔가? 김지영 잠시 드라마를 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그동안 쉬지 않고 드라마를 했는데 역할은 적어도 나한테는 유독 대사를 많이 준다.(웃음) 그게 너무 머리에 쥐가 나서 어쨌건 올 상반기에는 영화만 하려고 마음먹었다. 김진성 감독의 <열한번째 엄마>에 캐스팅됐고, 장진 감독의 <아들>에는 귀휴 나온 차승원의 치매 걸린 엄마로 나온다. 두 영화 모두 기대되는 작품들이다. 지금껏 언제나 그래왔지만 어떤 역할이든, 주어지는 대로 매번 새롭게 연기의 맛을 음미하고 싶다.
▶프로필 1938년 함경북도 청진 출생 | 영화 <짝코> <초대받은 사람들> <길소뜸> <아다다> <기쁜 우리 젊은 날> <남부군> <우묵배미의 사랑> <아라한 장풍대작전> <나의 결혼원정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마파도 2> 등 | 드라마 <육남매> <여고시절> <눈사람> <야인시대> <장밋빛 인생> 등
사진 김대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