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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 목자라
에스겔 34:11-16, 20-24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올해 교회력으로 마지막 주일이다. 색동교회의 특징은 교회력을 바르게 지키는 교회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상인데, 남다른 대접을 받는다. 앞으로 더 잘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든다.
교회력 마지막 주일은 ‘영원한 주일’ 또는 ‘왕국주일’(하나님 나라)이라고 부른다. ‘마지막’은 끝이 아니다. 마지막의 어원은 ‘맏이맏’인데, ‘맏이’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제일 큰’ 또는 ‘첫 번째’라는 뜻이다. 멀리 내다본다면 마지막은 다시 출발하는 커다란 시작이다.
오늘은 영원한 주일이다. 영원한 주일은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인생이 자신의 ‘삶과 죽음’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그리스 작가 니코스카잔차키스는 “인생은 너무나 짧은 섬광 같지만, 충분하다”고 했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누구나 인생의 길이와 의미에 대해서는 회한이 있게 마련이다.
이 주간에 우리는 세상을 떠난 가족과 지인을 추모한다. 색동교회의 경우 지난 5월 20일, 너무 일찍 하늘나라로 가신 문홍빈 권사님을 추념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또 그 이전 4월 16일, 세월호에 갇힌 채 배와 함께 가라앉은 304명의 무고한 희생자들도 정녕 잊을 수 없다. 지금은 누구나 추모용 노란리본을 알고 있지만, 노란리본 달기 운동은 2007년 문 권사님과 안양 YMCA에서 맨 처음 시작한 일이다. 우리가 기억해 주어야 한다.
이 주간은 자기 인생을 돌아보는 절기이기도 하다. 내 인생의 성적표를 따져보기도 하고, 또 점점 가까워지는 생애의 종점을 묵상하는 절기인 것이다. 죽음은 내 스케줄과 상관없이 찾아온다. 누구도 자신의 종말을 장담할 수 없다.
세상은 얼마나 ‘흔들리는 터전’과 같이 불안하고, 인생은 어찌나 ‘깨어지기 쉬운 항아리’처럼 유약한가!
영원한 주일은 사람은 임시적인 공간과 한시적인 시간을 사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이제라도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어 살라고 일깨워 준다. ‘돌아갈 곳이 있으면 인생은 여행이고 돌아갈 곳이 없으면 그의 인생은 방황이다’라는 말이 있다. 내 인생의 목적지를 확인하는 때가 바로 영원한 주일이다.
은총의 삶은 지극히 단순한 일로부터 시작한다. 교회력과 내 생활 시간표를 일치시켜보라. 하나님의 달력, 그 구원의 시간 속에 나를 포함시키라. 어둠이 깊을수록 내 삶의 시계와 인생의 나침반을 확인하는 일은 더없이 긴요한 일이다.
1)
오늘 말씀은 ‘내가 네 목자라’이다. 선한 목자에 대한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선한 목자에 대해 누구나 잘 알고, 좋아한다. 대표적으로 구약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와 신약 요한복음 10장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11)는 가장 사랑받는 말씀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자. 나는 선한 목자를 따르는가? 양은 짐승들 중에서 목자에게 절대 의존하는 존재다.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양에 대한 고정 관념인 ‘순결, 희생, 온순, 순종’의 이미지들은 사실 무능력의 다른 말들이다.
모세가 자기 백성을 염려하면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 27:17)라고 간구한 일이나,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막 6:34)신 마음은 양의 형편을 잘 이해하게 한다.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가장 오래된 성화를 꼽으라면 바로 ‘선한 목자’이다. 가장 오래 전에 그린 선한 목자는 주후 3세기 경, 로마 산 칼릭스투스 카타콤 벽에 남긴 작품이다. 그 선한 목자는 수염 없는 젊은 목동의 모습이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이다.
박해 받던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에게 희망을 준 그 ‘선한 목자’ 벽화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를 찾으시고, 구원하신다는 믿음이 담겨있다. 그 믿음이 그들을 박해와 고난의 상황에서 이겨내도록 하였다. 바로 ‘길 잃은 나’야말로 하나님의 최우선 관심사에 포함되어있음을 믿는 믿음이다.
선한 목자에 대한 모든 작품은 누가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비유 ‘잃은 양을 찾은 목자’(눅 15:4-6)가 모델이다. 이 비유는 참 상식 밖의 진실을 들려준다. 그래서 믿을만하다. 목자는 멀쩡한 99마리는 들판에 두고, 겨우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 그런 상식 밖의 목자는 과연 누구인가?
한 목동이 100마리의 양을 돌보던 중 단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 양이 어리석은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니, 목동이 부주의 한 탓 일게다. 말 못하는 양에게 잘못을 뒤 집어 씌워서는 안 된다. 사방이 텅 빈 들판에서 긴급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어느 틈에 늑대가 노릴지 모를 일이다. 그 목동은 긴급한 상황에서 어떻게 했는가?
당장 99마리를 들판에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섰다. 매우 상식 밖의 판단이 아닐까? 나머지 99마리라도 제대로 지키는 일이 우선이지, 겨우 한 마리의 어린 양을 찾겠다고? 정말 예수님다운 이야기다. 어떤 의미일까?
예수님이 비유에서 ‘잃은 양 한 마리’는 단순한 한 마리가 아니다. “나의 잃은 양”(눅 15:6) 1마리는 100마리를 대표한다. 지금 잃어버렸기에 가장 긴급한 구조가 필요하고, 그런 우선순위 때문에 목동에게는 전부를 걸만한 존재다. 선지자 나단의 비유를 보면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삼하 12:3)는 가난한 사람에게 있어 품 안의 딸이며, 전 재산이었다.
이렇듯 모든 성화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어린 양을 어깨에 멘 목자의 모습은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곧 임마누엘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2)
선한 목자는 언제나 양들과 동행한다. 그는 위기가 닥치면 목숨을 걸고 자기 양떼를 보호한다.
모든 목동의 모범교사는 다윗이다. 소년 다윗은 사울 왕 앞에서 자신의 무용담을 이야기하면서, 자신감이 넘친다. 바로 자신이 얼마나 새끼 양 한 마리일망정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애썼는가를 말할 때는 왕의 안전에서도 자부심이 넘친다. 만약 사자가 새끼 양을 물어 가면 그는 쫒아가서 사자의 수염을 잡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다고 하였다(삼상 17:35-36).
모든 목자들이 그렇게 자신의 의무에 당당한 것은 아니었다. 본문 에스겔 34장은 악한 목자와 선한 목자를 비교한다.
먼저 악한 목자에 대해 고발한다.
‘악한 목자는 병든 양을 고치지 않고, 상처 받은 양을 싸매어 주지 않고, 쫓긴 양을 돌아오게 하지 않고, 잃어버린 양을 찾지 않는다. 그는 포악(채찍과 폭력)으로 양을 다스린다’(겔 34:3-4).
그 목자는 살진 양을 잡아 고기와 기름을 먹고, 털로 옷을 만들어 입으면서도, 양떼를 돌보지는 않는다. 양의 형편을 살피는 일에 무심하고 또 냉정하다. 들짐승에게 쫒기고 사방으로 흩어진 양들을 위해 목숨을 걸기는커녕, 발뺌하기 바쁘다.
에스겔이 고발하는 악한 목자들은 당시 이스라엘 최고 지도자들에 대한 비유이다. 성경의 평가는 단호하다. 만약 한 마리 양이라도 방치하는 목동이 있다면, 그는 목자로서 자격이 없다. 본연의 자기 의무를 방기했다면, 그건 목동인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다. 과연 오늘의 목자 된 이들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가?
목동은 무능하지 않다. 아무리 어린 목동일지라도 필수적으로 ‘지팡이와 막대기’를 준비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지팡이는 양을 인도할 때에 사용하는 지혜의 도구이고, 막대기는 쇠 조각을 박아 넣은 방어용 무기이다.
능력 있는 목동은 두 가지 무기와 함께 자신의 목숨까지 담보하면서 위험을 물리치고, 평화를 가져온다. 진정한 목자의식만이 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오늘 그런 선한 목자의 부재가 한탄스럽다.
선지자 에스겔은 하나님이야말로 선한 목자이심을 고백한다.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11-12).
선한 목자는 악한 목자와 정 반대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신다. ‘내가 흩어진 양들을 모으리라. 산과 시내에서 좋은 꼴을 먹이리라. 편안히 눕게 하리라’.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16).
하나님은 친히 자기 양의 목자가 되겠다고 하신다. 마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시편 23편의 고백을 다시 듣는 듯하다.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이유는 양을 알기 때문이다. 양에 대한 목자의 완전한 지식이다. 이 지식은 깊은 관계를 의미한다. 목자가 양을 아는 것은 깊은 관계성에 의한다. 목자와 양이 서로 통하는 쌍방적 지식이다. 좋은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를 따른다. 이렇듯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이러한 완전한 인격적 관계가 있다.
하나님은 악한 목자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벼르신다. 하나님은 연약한 양들을 무자비한 목동들로부터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 심판은 정의에 기초하고 있다.
“나 곧 내가 살진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서 심판하리라”(20).
그리고 하나님은 화평의 언약을 맺으시고, 평화로운 삶 한가운데로 초대하신다.
예언자의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전한다.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24).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선한 목자이시다. 다음 주일부터는 대림절이다. 우리는 선한 목자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품는다. 그 분은 나의 참 목자 되신다. 우리 시대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목자이시다.
3)
엊그제 읽은 기사이다. 선한 목자의 모습을 느낀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네덜란드의 한 어머니가 자기 19살 난 딸을 구출하기 위해 시리아에 있는 이슬람 수니파의 근거지에 잠입해 들어갔다가 겨우 딸을 구해왔다는 내용이었다.
모니크란 이름의 여성은 자기 딸이 터키 출신 네덜란드 군인에게 속아 여권도 포기한 채 시리아로 가버렸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딸이 떠난 곳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전쟁터 한 복판인 ‘이슬람국가’(IS)의 수도 락까였다. 이슬람국가는 SNS를 통해 선전전을 펼쳐 외국으로부터 많은 지원병을 끌어 들였는데, 어린 딸도 로빈훗 같은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국가’에 도착하자마자 딸은 속은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결혼도 금방 파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기 엄마에게 역시 SNS를 통해 구조를 요청하였고, 어머니는 딸을 구하러 위험을 무릅쓰고 터키 국경을 넘어 전쟁터로 들어갔다. ‘이슬람국가’는 특히 여성에 대해 무자비한 극단주의 무장단체였다. 어머니는 이슬람 여성이 걸치는 ‘부르카’로 얼굴과 온 몸을 숨긴 채 락까로 숨어드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딸을 데리고 다시 터키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사람들의 만류에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해야만 한다. 그것이 옳은 일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정말 보기 드믄 선한 목자의 모습이 아닌가? 어머니는 뭐든지 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선한 목자는 우리가 들어오고 나가며, 누울 자리까지 살피시는 분이시다.
‘내가 네 목자라!’
목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신의 평강과 영혼의 평안, 그리고 삶의 평화를 약속하신다. 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권능은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내 삶과 우리의 역사에 개입하심을 믿고, 간구하라.
예수님의 비유 ‘잃은 양을 찾은 목자’는 해피엔드로 끝난다. 목동은 그 한 마리를 마침내 찾았고,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인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생명을 허락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