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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 장군(黃進 1550~1593)】 "임진왜란 승전 위대한 호랑이"
임진왜란하면 대한민국 국민 거의 100%는 우선 성웅 이순신 장군님을 떠올릴 것이며, 그 다음에 이순신 장군을 삭탈관직 및 백의종군시킨 선조 그리고 이순신 장군님의 친구로 알려진 유성룡,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끄신 도원수 권율 장군님등을 연상된다. 거기에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알려진 한산도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을 꼽는다.
그런데 일본측에서는 임진왜란에 대해서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고 한다. 중국을 정복하겠다는 야심에 바탕을 둔 일본정부 최초의 대규모 대외침략 전쟁이었음에도 일본 내부에서 임진왜란은 패배한 전쟁으로 인식하는 점이 작용한 듯하다.
우선 28만의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음에도 일본으로 온전히 살아돌아간 일본군은 8만 정도였고, 특히나 자신들이 조선보다 월등하게 우위일거라고 생각한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님께 완전 박살이 났다는 점에서도 일본역사에서 임진왜란은 그냥 지나가는 수준이다.
다만 한가지 재밌는 점은 그래도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을 평가할때, 일본 입장에서는 우리가 승리를 거둔 3대 대첩에서 패한 전투보다는 우리에겐 다소 낯선 웅치 이치 전투에서의 패배를 자신들이 조선을 정복하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으로 꼽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으로 들어가야만 식량을 확보하고 더불어 후방에서 이순신을 압박해서 조선해군을 물리친 후 자신들이 구상한 수륙병진 작전을 실현할 수 있었는데, 바로 일본 육군이 전라도 지역으로 들어가는 두 곳에서의 패배로 인해 그들의 구상이 완전히 엉망이 되었고 그로인해 일본역사에서는 웅치 이치 전투를 임진왜란을 통틀어 가장 뼈아픈 전투로 기록하고 있는거 같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가장 뼈아픈 전투로 기억하고 있는 웅치 이치 전투를 승리로 이끄신 황진 장군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한다.
황진 장군님은 1550년 아버지 황윤공과 남양 방씨 방응성의 딸 사이의 2형제중 차남으로 현재의 전라북도 남원에서 출생하셨습니다. 조선 세종대왕때 영의정 황희 정승의 5대 손으로 명문가의 자제분이셨습니다. 1576년 선조9년 별시 무과에 병과 16위로 급제하셨습니다. 황윤길 김성일이 일본 사정을 파악하기위해 조선통신사가 되어 일본에 갔을때 황진 장군님도 같이 갔다고 합니다. 직위가 직위인만큼 아마도 호위무사 역할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에 다녀온뒤 황진 장군님은 황윤길이 예상한바와 같이 일본이 반드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확신하고 이때부터 무예단련에 집중하셨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황진을 동북현감으로 삼았다. 황진은 무인으로는 문자는 알지 못하자 용략이 있었다. 그는 김성일을 따라 일본에 다녀와 왜변이 장차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매일 공무가 끝나면 곧바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부지런히 익혔다 (선조 수정실록 25권)" 참고로 문자를 알지 못했다는 의미는 정말로 일자무식이란 뜻이 아니라 문관수준의 박식함이 부족했다는 의미다.
웅치전투가 시작됐을때, 이복남과 정담이 결사항전을 벌였고, 이와중에 정담은 결국 전사하였으나 이복남은 남은 군사를 수습해서, 전주에서 동쪽으로 10여리 떨어진 안덕원으로 후퇴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황진 장군의 군대가 도착해서 일본군의 배후를 공격해서 일본군이 후퇴하게 된다. 즉 일본군은 사실 웅치까지는 돌파했으나 황진 장군때문에 안덕원을 돌파하지 못했고 그로인해 전주를 지켜내게 된 것이다.
정담은 황진과 나주판관 이복남, 전주만호 황박(의병장) 등과 함께 웅치에 머물며 방어 태세를 갖췄는데,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황진에게는 남원 방어를 위해 잠시 내려가라고 명했다가 다시 귀환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런데 이 사이에 웅치로 일본군이 밀어닥쳐 일본군 수천 명이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정면으로 돌진해왔는데 이복남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활로 쏘아 죽인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정담은 부하 장수가 후퇴를 권했음에도 ‘차라리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차마 내 몸을 위해 도망하여 적으로 하여금 기세를 부리게 할 수는 없다.’며 끝까지 활로 쏘며 저항했으나 일본군에 포위돼 전사했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7월 1일 무오 2번째기사 )
다행히 이복남이 남은 군사를 수습해 전주에서 동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진 안덕원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으나 상황은 여전히 어려웠다. 이때 황진의 군사가 도착해 일본군의 배후를 공격해 물러가게 했다. 즉, 일본군이 웅치까지는 돌파했으나 안덕원을 돌파하지는 못한 것. 징비록에서는 당시 주장인 이광의 공으로만 언급되었으나 포저집과 계곡집, 강한집, 고대일록 인명록에서 황진이 안덕원에서 왜군을 물리쳤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강한집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 왜노들이 전주를 침범하자 공이 말을 달려 안덕원에서 왜노들을 크게 격파하고 우두머리를 활로 쏘아 죽였으니, 이로부터 왜노들이 감히 전주의 경계를 범하지 못하였다" 이 전투의 공로로 황진 장군님은 종5품인 훈련원 판관으로 승진을 하셨고, 남은 병사들을 모아서 이치고개로 향했다. 일본군이 이치에 도착하여 조총을 쏘며 달려들자 황진 장군님은 부하 장수인 공시억 등과 함께 고지에서 맞서 싸웠고, 다른 부하 장수인 위대기는 매복으로 일본군을 급습하였다.
"그때는 적병이 이미 안덕원(安德院)에 도달해 있었으므로 제장(諸將)이 모두 피하여 퇴각하였는데, 공이 곧장 안덕원으로 달려가서 적병을 요격(邀擊)하고 대파하여 거의 모두 섬멸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장(敵將)이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그 졸개들이 시체를 싣고 갈 틈도 없어서 길옆에 묻어 두고 달아났으니, 이것이 7월 초의 일이었다. -포저집"
선조실록에서는 이치전투에서 황진 장군님의 활약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 적이 낭떠러지는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은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쏘는대로 맞지 않는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까지 피비린내가 났다. 이날 황진이 총탄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자 권율이 장사들을 독려하여 계속하게 하였기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에 이치전투를 첫째로 쳤다"(선조수정실록 26권)
연려실기술에는 "황진이 나무에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고, 적의 진격이 멈추고 황진을 목표로 집중사격을 가하여 황진이 부상을 당하자 적이 연속으로 뛰어 들어와 우리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려 하므로 권율이 후퇴하는 자를 참하니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고 황진도 부상당한 몸으로 다시 싸우니 군사들이 일당백으로 싸워 적이 크게 패하여 병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이렇게 황진 장군이 부상까지 당해가면서 이치 전투에 승리하고 동북으로 돌아가는데 백성들이 나와서는 황진 장군이 아니었다면 어찌 전주가 무사하였겠습니까하고 칭송했다고 한다. 일본승 화안이 조선에 와서 연위사인 이성구에게 자신들이 전쟁중에 가장 크게 패한 곳으로 웅치 이치 전투가 첫째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실록에서도 권율과 함께 이치 전투에서의 황진 장군의 공을 최고로 꼽았다. 이 전투이후 왜군은 전쟁이 끝날때가지 다시는 전라도를 공격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충청병사로 승진한 황진 장군은 1593년 6월 7백명의 부하를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온다. 황진 장군은 21일부터 28일까지 진주성 방어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25일에는 직접 의관을 벗어던지고는 백성들과 함께 토산을 쌓아 적을 격퇴시켰고, 28일에는 적이 공격해오자 직접 지휘를 하셔서 대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이날 격퇴한 성벽 밖의 적 동향을 살펴보시던중 시체 속에 숨어있던 왜군 병사 한명이 총을 쏘았고 이때 황진 장군 왼쪽 이마를 관통당해 즉사하면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실록에는 황진 장군의 전사소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왜란이 있는 이후로 모든 장수 가운데 행군에 법도가 있고 사졸에 솔선하여 옛날 명장의 풍도가 있는 자로는 모두가 황진을 추중하여 으뜸으로 꼽았는데, 재주를 다 발휘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조야에서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선조수정실록 27권)
한편 황진 장군님의 전사소식을 접한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황진이 죽었으니, 나랏일이 어긋나게 됐다"고 하시면서 탄식했다고 한다. 이처럼 황진 장군의 공훈과 영웅담을 보면 조선 역사상 육군의 장수로써는 최고의 용장으로 불리워도 손색이 없음에도 너무 젊은 나이(43세)에 순국해서 그런지 인지도는 굉장히 낮다.
그러나 웅치 안덕원 전투, 이치전투에서 황진 장군과 그의 휘하 공시혁, 위대기 장군과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하나로 뭉친 의병들의 혁혁한 공훈이 아니었더라면 호남도 가혹한 왜란을 피해갈 수 없을 것입니다.
훗날 황진의 손자인 황위가 비석을 세우면서 당대의 문장가로 유명한 우의정 장유에게 묘비글을 써줄 것을 부탁했는데, 장유도 평소 황진을 높이 보았는지라 사양하지 않고 글을 썼는데 다음과 같다.
"열장부(烈丈夫) 우리 황공 씩씩한 풍모에 출중한 무예 강궁(强弓) 그대로 명중되고 힘은 범과 같았어라. 충성으로 방패 삼고 의기(義氣)로 병장기 삼았나니 삼군을 뺏을 수 있을망정 이 뜻은 어지럽힐 수 없었도다. 진주성 지키는 일은 공의 직분이 아니었지만 한 번 승낙한 이상 죽을 줄 알고도 뛰어들었지. 왜적이 새까맣게 기어오르고 포성은 잇따라 진동하는데 포위된 열흘 동안에 하루에도 열 번을 더 싸웠어라. 공이 큰소리로 부르짖자 병든 사졸 떨쳐 일어나고 악다문 입 피로 물든 얼굴 귀신도 통분하여 울부짖었지. 성을 짓누르는 흉악한 기운 공의 이마를 꿰뚫은 흉탄에 거목[大樹]이 쓰러짐에 금성탕지도 함께 무너졌네. 공은 죽어도 죽지를 않아 늠름히 생기가 흘러넘쳐서 하늘을 찌르는 의열(義烈)의 그 기운 무지개를 쏘고 천둥이 울리도다. 공의 혼령 하늘로 올라가고 체백(體魄)은 땅속에 묻혀 있나니 비석에다 이 비명을 새겨 후대에 공의 풍모 전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