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사 청풍루...]
6.25사변 전에 천왕문과 해탈문, 그리고 소설루가 있던 자리에 지어진 112평의 대형 누각으로, 1980년 봉선사 신도들의 조약돌모으기 불사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건물로, 1층은 종무소겸 사무실로, 2층은 설법전으로 사용되며, 1층 통로에는 사천왕탱과 금강탱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 외부는 사면에 걸쳐 4기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남쪽에는 여초(如初) 김응현(金膺賢)이 쓴 청풍루 편액이 걸려 있고, 북쪽에는 시암(是庵) 배길기(裵吉基)선생이 쓴 설법전 편액이, 서쪽에는 심은(沁隱) 전정우(全正雨)가 쓴 불천회관이, 동쪽에는 진성(眞性)스님이 쓴 중해운집(衆海雲集)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청풍루의 모든 편액과 주련 조각은 지장사(地藏寺) 도서(都序)스님이 하였으며, 단청과 벽화는 하정거사(霞亭居士) 박정원(朴貞元)이 조성하였다.
[봉선사 장독대...]
[봉선사 삼신각(산령각, 북두각, 독성각)...]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月初 스님이 1926년에 건립한 이후 봉선사에서 한국전쟁 때 소실되지 않은 유일한 전각이다. 건물의 정면에는 ‘北斗閣’, ‘獨聖閣’, ‘山靈閣’ 등의 현판을 달았으나 일반적으로 삼성각으로 부르고 있다. 내부에는 1903년 元興寺에 봉안했다가 옮겨온 칠성탱과 독성탱, 그리고 1973년에 조성한 산신탱을 봉안하였다. 삼성각에는 세분의 성인을 모시는 곳으로 그 중 한분인 칠성각 편액으로 북두각(北斗閣)이라 적혀 있다. 삼성각의 편액 중 하나로 '산령각(山靈閣)'이라 적혀 있다. 산령이란 산신을 일컫는 말이다.
[봉선사 관음전...]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999년 건립하였다. 관음전은 원래 노전 스님이 머무는 노전채였는데, 한국전쟁으로 전소된 후 정부의 지원으로 발굴조사를 거쳐 복원하여 관음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관음전 내부에는 닫집을 갖춘 감실형의 불단이 있으며, 불단 내부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과 1999년에 금어 하정(霞亭) 박정원(朴貞元)이 조성한 관음탱이 있다.
[봉선사 운하당...]
관음전 아래에 있는 정면 7칸, 측면 6칸의 팔작건물로, 1963년에 능허, 운경 두스님이 복원하였으나 근래 화재로 소실되어 2003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운하란 구름과 노을이라는 뜻으로서 납자와 단월이 항상 구름같이 모여 복과 혜를 닦는 곳이란 뜻이다. 이 건물은 예전에 일명 승당(僧堂)이라 하여 스님들이나 신도들이 모여 수행과 집회를 할수 있는 큰방과 스님들이 거처하는 작은방, 공양을 위한 공수간으로 구성되었으나, 현재는 대중방으로서 스님들의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다. 편액은 건물 남쪽에 봉선사, 동쪽에 운하당이라는 2기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모두가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의 글씨이다.
[봉선사 사자상...]
[판사관무헌(주지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998년에 복원하였다. 어실각(御室閣)으로 인해 봉선사 주지는 조선 왕실로부터 봉향판사(奉香判事)의 작위를 수여 받았는데, 판사관무헌은 역대 봉향판사(주지)가 머물던 곳이었다.
[봉선사 공양간 문위엔...]
[봉선사 공양간 선열당...]
[봉선사 감로수우물...]
[봉선사 큰법당이...]
[봉선사 큰법당앞뜰...]
[봉선사 연지...]
[봉선사 연지옆엔...]
[봉선사밑 연지에는 청사초롱이 줄지어 축제 분위기를...]
봉선사가 오늘날‘敎宗大本刹’로서의 이름을 드높인 것은 현대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데에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를 설립한 月初 스님과 한국불교역경사에 있어 빛나는 업적을 남긴 耘虛龍夏 스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1551년 교종의 수사찰로 지정된 이래 머물렀던 수많은 敎宗判事들과 근대의 월초스님, 현대의 운허스님의 노력은 오늘날 봉선사를 敎宗大本刹으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였던 것이라고 코리아템플에서 전해준다. 무더운 여름에도 시원한 사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