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제암리학살사건 발생
제암리학살사건이 일어났던 제암리 3·1운동순국유적지, 사적 제299호, 경기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 1919년 4월 15일 일본의 육군 중위 아리타 다케오[有田俊夫]를 중심으로 한 일본헌병들이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의 제암리교회에 마을 주민들을 몰아넣은 뒤 교회에 불을 지르고 무차별 사격을 가한 사건이 일어났다. 학살의 직접적인 원인은 3·1운동 여파로 제암리교회 청년들과 천도교 김상렬 등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이 벌인 만세시위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숨진 사람은 안종후를 비롯해 남자 21명, 여자 2명이며 인근 마을 팔탄면 고주리에서 김성렬 등 남자 6명이 학살당했다. 1982년 9월 29일 문화공보부는 경기도 주관으로 합동장례식을 치르고 희생자들을 순국열사로 추서했으며 이 지역을 사적 제299호로 지정했다.
[1985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잡혼금지법 철폐
1985년 6월 17일 남아공 최초 법적으로 결혼이 인정된 흑백인종 커플이 탄생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1985년 4월 15일 인종차별정책으로 악명높은 흑백인종간의 결혼을 금하는 잡혼금지법과 연애, 섹스를 금하는 배덕법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1984년 7월 의회 특별조사위원회가 양법의 폐지권고를 정부가 받아들인 결과였다. 남아공 정부는 인종간의 교류금지를 주요 정책으로 추진해왔지만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에 대한 국내외의 비난이 점증하고 무기금수, 경제제재 등에 의해 국제사회에서 고립됐기 때문에 이같은 결정을 내리게 됐다. 이 융화책은 남아공으로서는 획기적인 정책이었지만, 흑인의 참정권 권력이양은 여전히 인정되지 않았다. 이에 흑인의 반대시위가 걷잡을 수 없게 확산됐고, 10월에는 요하네스버그에서 흑인폭동이 발생했다.
[1980년]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사망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1980년 4월 15일 사망했다. 그는 역사의 흐름에 시시콜콜 간섭하고 참여하는 실천적 지식인으로, 행동하는 양심의 전형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하면서도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저지른 1956년의 헝가리, 1968년의 체코 침공에 대해서는 단호한 비판을 할 정도로 자립적 지성의 면모를 보였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범죄 심사를 위해 영국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이 창안한 국제 법정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말년에도 마오이스트계열의 기관지인 `인민의 기치`를 손에 들고 거리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던 사르트르였다. 1905년 6월 21일 파리에서 해군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사르트르는 2살 때 아버지를 잃고 외가에서 자랐다. 아프리카에서 인도주의적 의료활동을 펼친 오르간 연주자 슈바이처가 그의 외당숙이 된다.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3부터 4년간 독일에 유학했다. 유학기간 중 접한 후설의 현상학을 독자적으로 수용해 펴낸 책이 '존재와 무'이다. 1964년 노벨문학상을 받게 됐지만 '부르조아들의 상'이라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고,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계약 결혼’ 역시, ‘부르조아적 결혼’에 대한 저항이었다. 사르트르와 평생 동반자 관계를 유지한 보부아르는 이날 2만5천명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장례식에서 세상을 떠난 사르트르에게 장미 한송이를 건넸다. 두 사람은 현재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 나란히 묻혀있다.
[1949년]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
인천상륙작전중인 한미연합 해병대원들 1949년 4월 15일 대한민국 해병대가 경상남도 진해의 덕산비행장에서 해군 출신 장병 380명(장교 26명, 하사관 54명, 사병 300명)을 기간으로 창설되었다. 해병대는 소규모의 독립부대로 출범했지만, 6·25전쟁 이전의 공비토벌작전과 6·25전쟁 중의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해병대는 휴전 직후인 1954년 2월 1일 병력수 1만 9,800명인 여단으로, 그 이듬해인 1955년 1월에는 상륙사단으로 증편되었다. 해병대는 1973년 10월 해병대 개편계획에 따라 사령부가 해체되고 해군의 상륙전부대로 예속되었다가 1987년 해병대사령부가 다시 창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43년] 미국의 소설가 제임스 Henry James 출생
1843년 4월 15일 태어남 / 1916년 2월 28일 죽음 제임스는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예리한 관찰을 토대로 독자적인 시점의 문학을 개척한 미국의 소설가이다. 처음부터 산문소설의 대가였던 그는 소설의 형식을 확대하고 매우 개성적인 방법과 문체를 뚜렷이 아로새긴 창의력 넘치는 혁신가였다. 그러나 난해한 문장과 애매모호한 주제가 많아 일반 독자로부터는 외면받는 등 그의 명성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으로 한정되기도 했다. 1943년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 이후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 더욱 폭넓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영국과 미국 비평계가 동시에 인정하는 최고수준의 작가로서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는 51년 동안의 작가 생활에서 총 150편이 넘는 장·단편소설과 비평, 기행문 등을 남겼다.
[1910년] 주시경, <국어문법>(박문서관) 간행 한힌샘 주시경(周時經, 1876∼1914) 선생은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나라가 식민지로 떨어지기 전에 국어문법을 확립하여 보급해야 함을 절감하고 국어국문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연구결과를 저서로 발간하였다. 1906년에 『대한국어문법』을 발간하고, 1908년에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을 발간하였다. 1907년 1월에 지석영(池錫永)이 의학교 안에 국어연구회를 설립할 때 이준(李儁)의 추천으로 그 연구위원이 되어 연구에 종사하였다. 또한 주시경이 정부에 제출한 상소가 채택되어 1907년 7월 8일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가 설치되자 그 연구위원이 되어 가장 뛰어난 연구보고서 『국문연구안(國文硏究案)』을 제출하였다. 1909년에는 전국민에게 국문을 교육하기 위한 교과서로 『국문초학』을 간행하였고, 1910년 4월에는 『국어문법(國語文法)』을 간행하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그해 10월 우리나라 고전을 간행 보급하기 위하여 광문회(光文會)에 가입해서 『훈몽자회(訓蒙字會)』 등의 고전을 교정하여 『훈몽자회재간례(訓蒙字會再刊例)』를 간행하고, 이와 함께 『국어사전(國語辭典:말모이)』의 편찬작업에 최초로 착수하였다. 1914년에는 『말의 소리』를 간행하여 국어음운학의 과학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의 이러한 선각적 국어국문 연구에 의하여 우리나라의 언어와 한글이 재발견되어 애국계몽운동기에 과학적 국어문법이 처음으로 확립되게 되었다.
[1931년]신학자 서광선 徐洸善 출생 1931. 4. 15 평북 강계~.
1978년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냈고, 1981년 현대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1983년 기독교학회장, 1990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제5공화국 당시 신학의 사회참여를 주장하여 한때 해직교수가 되기도 했다. 저서에 〈지성·세속·신앙〉·〈현대사회와 종교〉·〈사랑의 하나님〉·〈한국기독교의 새인식〉·〈종교와 인간〉 등이 있다.
[1916년] 신학자, 감리교 목사 박대선 朴大善 출생 1916. 4. 15 경북 의성~. 1940년에 일본 간사이학원대학[關西學院大學] 영문과를 거쳐 1942년 동 신학부를 졸업했다. 그 후 1955년에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68년에는 고려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1974년에는 일본 국제기독교대학에서 명예인문박사, 1981년에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1984년에 일본 간사이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 등을 받았다. 1945~50년 평양 성화신학교 교수, 1951년에 육군본부 군목(軍牧), 1955~64년 감리교신학대학 교수, 1964~75년 연세대학교 총장, 1965년에 기독교연합회 회장, 1970년에 기독학생회 이사장, 1971~74년 서울 YMCA 이사장, 1972년에 대한유도연맹회장, 1973년 대한태권도연맹 회장 등을 지냈다. 1991년 현재 신애교회 목사 및 한국선명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으며, 저서로 〈구약성서개론〉·〈대학과 국가발전〉 등이 있다.
[1912년] 북한의 최고권력자 김일성 金日成 출생
1912. 4. 15 평남 대동~1994. 7. 8 평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조선노동당 총비서, 조선노동당 군사위원회 위원장, 국방위원회 위원장 등의 직책을 맡았다.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古平面) 남리(南里)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이다. 아버지는 김형직(金亨稷), 어머니는 강반석(康盤石)이고, 김철주(金哲柱) ·김영주(金英柱)는 친동생이다. 어려서 부모를 따라 만주 지린성[吉林省] 푸쑹[撫松]으로 이사하였고, 1926년 지린 육문(毓文)중학에 입학하였으나 1929년 중퇴하였다. 그 뒤 소련에서 특무공작요원 훈련을 받고 1945년 소련군 소좌가 되었다. 8·15광복과 더불어 소련군을 따라 평양으로 들어와 김영환(金英煥)이라는 가명으로 정치공작을 폈는데, 그해 10월 14일 소련군 사령관 로마넨코가 평양 시민들 앞에서 ‘김일성 장군’이라고 그를 둔갑시켜 소개한 뒤부터 김일성으로 행세하였다. 처음에는 자신을 제6사단장 및 제2방면 군장이던 김일성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1949년부터는 동북항일연합군과의 관계를 내세우지 않고, 만주사변 후부터 독자적인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여 일제와 싸운 것처럼 날조된 정치적 선전을 하였다. 그는 소련군의 힘으로 조선공산당 북조선조직위원회 책임비서,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내각수상, 인민군 최고사령관을 맡고, 원수 칭호까지 썼다. 중앙인민위원회 겸 국방위원회 위원장 등 최고위직을 지냈다. 남조선노동당 등의 국내파와 소련파 중 반대파인 옌안파[延安派] 등을 숙청하여 권력체제를 구축하였다. 1994년 7월 8일 심근경색증으로 사망하였다.
[1452년] 이탈리아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출생
이탈리아의 화가·건축가·조각가(1452~1519). 피렌체의 빈민 출신으로 화가, 군사 토목 고문 등의 경력을 쌓은 후, 프랑스 왕조에 6년간 초빙되었다. 예술 활동에서는 회화에 <암굴의 성모>, <성모자>,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따위를 그렸고, 자연 과학에서는 해부학·새의 비행 따위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그 외에 천문학, 물리학, 지리학, 토목학, 조병학, 생물학 따위에서도 독창적인 연구 및 발명을 하였고 음악에도 뛰어난 소질이 있었다. 예술과 과학에 대한 수기·기록 따위를 남겼으며,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 수교후 터키 첫 방문 2005년 오늘, 노무현 대통령이 1957년 수교 후 우리나라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터키를 공식 방문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세제르 대통령, 에르도안 총리와 잇따라 회담을 갖고 경제교류와 투자증진, 정보기술, 방위산업분야 등 양국간 실질 협력관계 강화 방안에 대해 집중적으로 협의했다. 또 터키와 가까운 이라크 내 자이툰 부대의 원활한 활동과 안전을 위한 협력체제 구축도 논의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특히 한국전에 참전한 오랜 혈맹국인 터키와 유대를 더욱 강화하면서 이슬람권에 우리나라에 대한 우호적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힘썼다.
[2004년] 제17대 총선, 16년 만에 여대야소 등장 대한민국 17대 총선은 대한민국 제17대 국회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이다. 2004년 4월 15일에 실시하였고 총 299명(지역구에서 243명, 비례대표인 전국구에서 56명)을 선출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새천년 민주당 당적 이탈과 열린 우리당 창당, 한나라당의 불법 대선 자금 수수, 그리고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건들이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이 치러졌다. 이번 총선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과거 지역구 투표율에 따라 전국구 의석을 배정하던 방식을 탈피하여 지역구 투표와 비례대표 투표를 분리한 1인 2표제를 최초로 도입했다는 점이었다. 총선 결과 전국 선거인수 35,596,497명 중 21,581,550명이 투표하여, 투표율은 60.6%를 기록하였으며 이는 지난 16대 총선의 투표율 57.2%와 비교하면 높고, 2002년 대선의 70.8%에 비교하면 낮은 수치이다. 지역구 선거결과 한나라당 100석, 민주당 5석, 열린우리당 129석, 자민련 4석, 국민통합21 1석, 민주노동당 2석, 무소속 2석 획득 비례대표 선거결과 한나라당 21석, 민주당 4석, 열린우리당 23석, 민주노동당 8석 획득 총합계 열린우리당 152석으로 당시 원내 제1당, 한나라당 121석으로 제2당, 민주노동당 10석으로 제3당.
[1990년] 스웨덴 출생의 미국 영화배우 그레타 가르보(Garbo, Greta) 사망
←〈카미유〉(1936)에서 가르보 [Garbo, Greta, 1905.9.18~1990.4.15] 본명은 그레타 루이자 구스타프손(Greta Louisa Gustafsson). 스웨덴 스톡홀름 출생. 1922년 백화점 점원이었다가 영화계에 데뷔, 1923년 《예스타 베를링의 전설 The Story of Gosta Berling》의 주연으로 뽑혔다. 1925년 감독 모리츠 스틸레르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할리우드 MGM의 인기스타로 오랫동안 은막의 여왕으로 군림하였다. 우수(憂愁)를 머금은 듯한 미모와 어딘지 불행한 면모가 엿보이는 쓸쓸한 분위기는 그녀 자신까지도 폐쇄적인 성격으로 만들었으며, 1928년 연인인 감독 모리츠 스틸레르의 죽음은 그녀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었다. 36세 때 연예계에서 은퇴, 뉴욕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무성영화시대의 대표작으로 《육체와 악마 Flesh and the Devil》(1927) 《안나 크리스티 Anna Christie》(1930) 등이 있으며, 유성영화시대 이후의 대표 주연작으로 《마타하리 Mata Hari》(1931) 《그랜드 호텔 Grand Hotel》(1932) 《크리스티나 여왕 Queen Christina》(1933)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1935) 《춘희(椿姬) Camille》(1936) 《니노치카 Ninotchka》(1939) 등이 있다.
1961년 한국-포르투갈 국교 수립
포르투갈은 남북한 동시 수교국의 하나이다. 한국과는 1961년 4월, 북한과는 1975년 2월 국교를 맺었다. 1973년 6월에 한국의 주(駐)포르투갈 대사관이 개설된 데 이어 1977년 12월에 무역협정이 체결되었고, 사증면제협정(1979), 경제·산업 및 기술협력 협정(1985), 문화협정(1990), 투자보장협정(1996), 이중과세방지협정(1997), 항공협정 가서명(2000)이 체결되었다. 1993년 10월 대통령 소아레스가 방한하여 최초의 양국 정상회담을 가졌다. 2000년에는 총리 안토니오 구테레스가 방한하였다. 한국에서는 1987년 국무총리 노신영, 1999년 국무총리 김종필이 포르투갈을 방문하였다.
[1865년] 에이브러햄 링컨(Lincoln, Abraham) 미국 대통령 피살
← 1860년 2월 27일, 링컨의 유명한 쿠퍼 유니온 연설을 한 날, 뉴욕시에서 촬영한 사진 1865년 4월 14일 밤, 링컨 대통령이 워싱턴 DC에 있는 포드극장 2층에서 연극 ‘우리 미국 사촌’을 관람하고 있을 때 한 사내가 2층 대통령 박스석에 들어섰다. 링컨은 5일 전 남군의 로버트 리 장군이 북군의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함에 따라 남북전쟁이 사실상 끝났다고 판단, 연극을 보며 머리를 식히고 있었다. 사내는 수개월 전부터 링컨을 납치하려 했으나 기회가 닿지 않아 살해 쪽으로 방향을 바꾼 남군 출신의 미남배우 존 윌크스 부스였다. 부스가 슬며시 링컨의 뒤로 다가가 데린저 권총의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링컨은 곧 고꾸라졌지만 총소리도, 부인 메리의 비명소리도 연극에 몰입한 관객들의 폭소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밤 10시13분경이었다. 같은 시각 수어드 국무장관도 집에서 부스의 공범에 의해 피격됐다. 부스는 근처에 있었던 레스본 소령에게까지 칼을 휘두른 뒤 1층으로 뛰어내려 “시크 셈퍼 티러니스!(Sic semper tyrannis!)”를 외쳤다. 남군의 주 무대인 버지니아주의 구호 “독재자의 것은 독재자에게로!”라는 뜻의 라틴어였다. 현장을 벗어난 부스는 남쪽으로 도주하던 중 4월 26일 발각돼 살해됐고, 링컨은 밤새 치료를 받았으나 이튿날인 4월 15일 오전 7시20분경 숨을 거뒀다. 시신은 4년 전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를 태우고 고향을 떠나 워싱턴으로 달려왔던 기차에 실려 다시 그의 고향 스프링필드로 돌아갔다. 56세였다.
그밖에 2004년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 두번째로 통과 2004년 ‘요술공주 새리’ 작가 요코야마 미쓰테루 별세 2004년 박종호 최다경기 연속 안타 아시아 신기록 수립 2003년 일본에서 범죄를 저지른 한국인 범죄자 일본에 첫 신병인도 2003년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아부 압바스 체포 2002년 중국 여객기 김해서 추락 2000년 산불로 강원도 고성군-삼척시-강릉시-동해시와 경북 울진군,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 1999년 대한항공 화물기, 중국 상해 홍차오공항 인근에서 추락 1999년 프로야구선수 LG김용수, 국내 첫 100승-200세이브 대기록 달성 1998년 킬링필드의 주범 폴 포트 사망 1997년 메카 순례자 캠프서 대형 화재 발생 1994년 세계무역기구(WTO) 협정 서명 1992년 수혈로 AIDS감염된 20대 자살 1991년 한국-투르크메니스탄, 통상경제협력협정 체결 1991년 기초의회 개원-지방자치제 30년 만에 부활 1991년 기초자치단체의회 개원 1991년 도서상품권제도 시작 1990년 평화방송(PBC) 개국 1989년 영국 힐즈버러 축구장서 축구팬 난동 1989년 호요방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 사망 1988년 아프가니스탄 평화협정 제네바에서 체결 1986년 미국, 리비아에 테러보복 폭격 1983년 도쿄 디즈니랜드 개원 1982년 교회산업선교회,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에 성명 발표 1982년 이스라엘, 이집트에 시나이 철수 후 평화보장 명문화 요구 1981년 워싱턴포스트지, 퓰리처상을 수상한 ‘지미의 세계’ 기사가 허위기사라고 보도해 파문 1980년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사망 1979년 전(前) 수도여고 교사(고상문씨) 노르웨이에서 납북 1978년 상공부, 대폭 수입자유화 조치 발표 1977년 금수산 의사당(주석궁) 준공 1970년 호남고속도로 기공 1969년 미국 정보기 EC-121 동해 상공서 북한 대공포에 피격 추락. 31명 사상 1969년 공화당, 양순직 등 항명의원 5명 제명 1967년 YMCA(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회관 완공 1966년 북유럽 일대 폭설 1966년 한국은행, 적립식 정기예금제 실시 1964년 시리아군 반란 1964년 그리스-터키 키프러스섬에서 총격전 1962년 유럽공동시장 설치 1959년 덜레스 미국 국무부장관 사임 1959년 세계탁구대회 소녀부서 조경자 우승 1958년 제1회 아프리카 독립제국회의 가나 수도 아구라서 개최 1958년 제4차 한일회담 개최 1954년 일본-필리핀 배상예비협정 조인 1953년 제2차 한일회담 개최 1951년 전국에 전염병 만연 1943년 미국에 원자폭탄 제조를 위한 연구소 개소(소장 오펜하이머) 1919년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일제(일본군경)의 만행 1885년 영국, 러시아 남진 저지 위해 거문도 불법 점령 1849년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 사제 서품 1843년 미국의 소설가 헨리 제임슨 출생 1809년 독일의 수학자 그라스만 출생 - 벡터 미적분학 발전 1469년 인도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융합을 꾀하여 일어난 시크교의 창시자 나나크 출생 1412년 경회루 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