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는 결코 녹녹치 않았다. 자신의 몸 하나를 추스리는데도 그리 만만치 않았다.
“마땅히 취직할 데도 없고, 자본이 부족해 무엇하나 번듯하게 차릴 수도 없더군요.”
1992년 12월 육군 대위로 6년간 군생활을 마친 이영존씨.그렇다고 그냥 죽어지낼 수는 없는 일. 그는 날마다 밖으로 돌아다녔다. 하릴없이 돌아다닌 것은 아니었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어떤게 유행인지를 살폈다. 머리 속은 항상 어떻게 살아야하냐라는 화두로 꽉 차 있었다.
그가 사회에 나와 처음 손 댄 것은 분식점. 저자본에 차릴 수 있는 거의 유일이다시피한 업종인 게 선택 이유였다. 또한 특별한 기술도 필요가 없었고, 매출 단가는 낮았지만 사람들이 북적거린다는 점이 매력이었다.
분식점 장사는 그러나 오래 끌지 않았다. 1년이 채 안돼 팔아 넘기고 당시 유행하던 치킨집을 차렸다. 치킨집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잘되는 것도 안되는 것도 아닌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것 또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때려치웠다.꼬치구이집도 해봤지만 별무신통.
이번에는 중국집에 취직했다. 철가방을 들고 뛰어다닌지 6개월.“마음이라도 편할까해서 배달원 생활을 해봤는데 전혀 그렇지 않더군요.”
그렇다고 배달생활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배달생활 중 우연히 만난 사람으로부터 피자기술을 배운 것이다.
“당시 거금인 300만원을 주고 피자기술을 배웠지요. 여기에 나름대로 제 기술을 가미했지요.”
1996년 1월 월세방을 빼서 인천 작전동에 10평규모의 가게를 열었다. 상호명은 ‘오레또.’우리말 발음대로 풀이하면 오랫동안 영업하고 싶다는 뜻을 내포한 상호였다. 1년 이상 끌어본 장사가 없었던 이 사장의 비원이 담긴 상호이고도 했다.
오레또는 처음부터 이사장의 바램을 저버리지 않았다. 저가의 피자에 신속한 배달로 오레또는 작전동 주민들로부터 개장첫날부터 인기를 끌었다. 주변에서 가게를 내달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1997년이 되자 이사장은 오레또 가맹사업본부를 차렸다. 가맹사업의 주요 지역은 인천을 중심으로 한 서부 수도권. 욕심을 내다보면 지방까지 권역을 확대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폭발적이지 않지만 단골고객이 장점인 배달피자 전문점의 한계를 그는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욕심자제는 오레또의 생명을 길게해주는 요인이 되었다. 1997년말 나라가 IMF위기를 겪자 피자시장에 변화가 생겼다. 무모하게 가게를 확장한 고가 피자집부터 문을 닫았다.
“오레또는 IMF위기를 무난히 넘겼지요. 배달전문 소형매장으로 가게임차비용 부담을 줄인데다, 저가의 피자로 고정 소비자들을 확보한 탓이지요.”
이 사장은 그러나 오레또에 그리 만족하진 않았다. 사업을 전국으로 확장할 수 없는 아이템이라는게 불만 요인의 첫째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가맹점은 꾸준히 늘어났다. 97년 대여섯개로 시작한 가맹점이 2000년을 넘어서 면서 10개, 2001년 20개 그리고 2002년에는 30개를 넘어섰다. 이 대목에서 이 사장은 변신을 시도하게 된다.
“피자시장에 무언가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피자는 이미 대중화되어 피자헛으로 대표되는 다이닝피자와 도미노피자로 대표되는 배달전문 사이에서 차별화된 피자를 찾게 되었습니다. 바로 정통적인 이탈리아 피자에서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해답의 실마리는 잡지였다. 우연히 펼쳐든 이탈리아 음식관련 잡지에서 장작불을 이용해 피자를 굽는 사진을 보는 순간 ‘바로 이것이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곧바로 이탈리아 나폴리로 연락,피자내용을 확인하고 장작구이 시설을 찾았다. 다행히 국내에 몇몇 업소에서 장작구이시설을 이용한 요리를 선보이고 있었으며 반응 또한 괜찮았다.
이 사장은 다시 피자기술자로서 팔을 걷어붙였다. 이탈리아 정통 피자맛과 한국인의 입맛을 절충한 피자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반년만에 일반 빵과 비교하여 저지방 저칼로리의 건강 다이어트 식품이라 할 수가 있는 피자가 탄생했다.
장작불로 직접 굽는 게 아니라 온기로 3분동안 굽는 장작구이 피자는 첨가재료에 따라 멕시코피자,해물피자,하와이안 피자 등 12가지가 나왔다.
“참나무 향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장작구이 피자는 담백한 맛이 특징입니다. 화덕 안의 열기로 익히기 때문에 제품이 담백하면서도 쫄깃합니다. 시제품 시식 때 노인들도 좋아하더군요.”
맛과 메뉴의 차별화가 분명하다고 판단한 이 사장은 컨설팅업체를 선정, 본격적인 가맹사업준비에 들어갔다. 오레또에서 벌이지 못한 사업확장의 꿈을 장작구이 피자에서 찾으려는 열망이 작용한 것이다.
“연초 장작구이 피자를 주아이템으로 하는 ‘피자나모’프랜차이즈를 탄생시켰습니다. 나모는 나무의 옛말로 재료의 특색인 장작을 활용한 상호입니다.
캐릭터는 피노키오를 만든 제피트 할아버지를 참고로 했지요.”
이 사장은 이에 앞서 2002년7월에는 경기 시흥에 유통회사인 ‘코스피’를 설립했다.코스피 설립은 본격적인 피자 프랜차이즈사업을 전개키 위한 물류시스템의 완비를 뜻한다.
2003년 2월 인천시 부평구에 피자나모 본점이 오픈됐다. 피자나모는 피자뿐만 아니라 자체 개발한 카르보나라,봉골레 비앙코 등 10여 종류의 스파게티도 취급했다.
1일 평균 100만원대를 기록하고 있는 피자나모 본점 매출에 힘입어 이 사장은 3개월만인 5월에 안양1번가에 피자마노 2호점을 개점했다. 이어 경기도 안선시에 3호점을 개점했다. 이 사장은 연내 30호점정도 피자나모 오픈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창업이 주춤하고 있는 요즘 피자나모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피자나모의 강세는 맛의 차별화, 탄탄한 프랜차이즈 시스템의 완비외에 주 고객층에 맞는 가격정책 등을 꼽을 수있다.
주 고객인 10대 후반에서 20대 사이의 고객들을 위해 가격을 스파게티는 2900∼5900원대,피자는 7500∼8500원대 등 중저가로 유지했다. 또한 색다른 볼거리인 화덕을 통한 피자굽는 모습도 고객을 유인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전역후 사회적응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지요. 완벽을 추구하는 군생활과 효율을 추구하는 사회생활과의 접목은 지금도 힘들지요. 그 조화를 위해 속알이를 많이 한 탓에 속병은 얻었지만 제대로 된 사업체도 만든 것 같습니다.”
피자나모 성장기에 주목할 점이 있다. 이 사장에게 피자기술을 판 사람 현재 오레또 가맹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같은 재료로 여러 사람에게 밥상을 차려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밥상차리기 바쁜 사람도 있다는 점은 곰곰이 생각해 볼만한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