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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평생교육회원을 대상으로 한 '歲寒圖(세한도)' 강의
나는 오늘 은빛 평생교육원 회원들을 대상으로 진주 박물관 강당에서 ‘歲寒圖(세한도)에 대한 이해’라는 주제를 가지고 강의를 했다.
강의에 앞서 은빛 평생교육회장이 나에게 ‘회원들의 수준이 높으니 그것을 감안하여 연수를 준비했으면 한다.’고 귀띔을 해 주었다.
은빛 평생교육회는 진주 문화원 산하 직능 단체 조직이고, 또 연수 장소가 진주 박물관이기에 그것을 고려하여 연수 주제를 정했다.
연수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파워포인트를 만들어 USB에 담아 연수 장소로 갔다.
그런데 빔 프로젝트와 연결된 컴퓨터에 내가 저장해간 USB를 연결하니 열리지 않았다. 저장을 잘못하여 컴퓨터 바탕 화면에 있는 바로가기 파일만 저장하고 내용은 빠뜨린 것이다.
도서관에 있는 딸에게 전화로
“택시 타고 빨리 집에 가서 메일로 컴퓨터 바탕 화면에 있는 파일을 보내라”고 했다. 그런데 메일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아이디가 소멸되어 열리지가 않았다. 정말 난감했다.
이미 강의 시간이 되었다. 하는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세한도 복사본 족자를 가지고 갔었다.
회원들 앞에서 먼저 양해를 구했다.
“사실 오늘 파워포인트로 자료를 많이 준비를 했는데 여의치 않아 세한도 그림을 가지고 강의를 진행하겠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사실 저도 당황스럽습니다.” 라고 말한 후 세한도가 그려진 족자를 직접 보여주었다.
이 그림은 몇 년 전에 진주 박물관에서 문화재 해설을 하면서 방문객을 안내하는 유능한 동기 한분이 있는데 그분이 이 세한도 복사본을 나에게 선물로 준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국보 180호입니다.
문화재는 원칙적으로 공공기관에서 감정가를 매기지 않는 것이 통례인데, 사설 기관에서는 간혹 감정가를 매기기도 합니다. 몇 년 전에 사설 기관에서 세한도를 감정하고 그 가치를 매긴 일이 있었는데 가격이 무려 186억 원이었습니다.
(사진1)의 세한도(歲寒圖)를 언 듯 보면 구도가 엉성하고 원근감도 분명하지 않은 졸작처럼 보입니다.
나무 네 그루의 묘사나 집 한 채를 그려 놓은 수법을 보면 전문가가 그린 그림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냉정하게 그림만으로 가치를 따지면 몇 만원에 지나지 않으리라 생각되어집니다.
그 그림의 가치를 100배로 높인 것은 그림 오른 쪽 위에 적힌 ‘歲寒圖’란 제목과 받을 사람 藕船(우선)과 그림을 그린 사람 阮堂(완당)의 낙관일 것입니다.
(사진2)는 표제 부분을 오려 낸 것입니다.
제목 ‘歲寒圖(세한도)’는 설 전후의 추위를 이겨낸 그림이란 뜻입니다.
‘歲寒(세한)’이란 말의 근원은 논어 子罕(자한)편에 나옵니다.
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 (자왈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
‘歲寒(세한)’이란 제목을 붙임으로 인해 그림 속의 나무는 소나무와 잣나무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로로 쓰인 글 ‘藕船是賞(우선시상)’에서 藕船(우선)은 이상적의 호입니다.
‘藕船(우선)’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입니다. ‘阮堂(완당)’은 추사 김정희의 또 다른 호입니다.
해석하면 ‘歲寒圖(세한도)’ 이 그림을 藕船(우선)에게 阮堂(완당)이 찬양하여 준다.‘
세한도 아래에 쓰여 있는 발문의 뜻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먼저 추사 김정희의 일생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영재였습니다. 증조부는 영조임금의 사위였고, 아버지 김노경은 병조판서였습니다. 24세 때에 아버지를 수행하여 청나라에 갔는데 그곳에서 많은 문사들과 사귀었고, 또 스승으로 모신 사람도 있었습니다. 청나라 사람들도 추사의 글씨를 무척 좋아해 자연스럽게 교분을 두텁게 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추사 김정희는 34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병조참판 등 여러 관직을 맡았습니다.
추사 김정희가 어려운 길을 걷게 되는 단초는 추사의 아버지(김노경)가 윤상도 옥사 배후 조종자로 몰리면서 추사가 1840년부터 1948년까지 9년 동안 제주도 서귀포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됩니다.
조선시대의 제주도 유배(流配)는 죽음의 여정입니다.
유배를 갈 때에도 어렵지만 풀려나도 망망대해(茫茫大海)를 건너 무사히 다시 돌아오는 일도 장담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위리안치(圍離安置)라는 형벌은 유배형 가운데도 가장 혹독한 것으로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나무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형벌입니다.
추사가 어려움에 처하자 친하게 교류하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외면할 적에 오직 위안을 준 사람은 사랑하는 제자 이상적(李尙迪)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우선 이상적은 중국에 사신가는 사람들을 수행하여 통역을 하는 譯官(역관)인데, 22회나 중국을 다녀 온 사람입니다. 중국에 갔다가 돌아 올 때마다 책과 붓과 먹과 벼루를 사서 유배 생활을 하는 추사에게 보냈습니다.
1841년에는 추사의 스승인 옹방강이 친필로 지어 쓴 책 8권을 사서 보냈고, 1843년에는 황조경세문편 120권을 사서 보냈습니다. 추사는 이 책들로 새로운 문물을 접하면서 어려운 시기를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歲寒圖(세한도)는 1844년 유배간지 5년 되는 해에 그린 그림입니다. 이때 추사 나이 59세였습니다.
(사진3) 한자의 발문을 해석하면 대략 이러합니다.
지난해에는 <만학>과 <대운> 두 문집을 보내주더니 올해에는 우경의 <문편>을 보내왔도다.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것도 아니고 천만리 먼 곳으로부터 사와야 하며 그것도 여러 해가 걸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쉽게 단번에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세상은 흐르는 물살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도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松柏]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 했는데,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요 후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
아! 쓸쓸한 이 마음이여! 완당노인이 쓰다.
추사 김정희가 쓴 위의 발문 또한 세한도의 가치를 몇 십 배 높인 것입니다.
한편 제주도로 유배를 가서 2년간 부인과 주고받은 언문 편지가 40여 통에 달했습니다.
부인 이씨는 추사선생이 제주도로 귀양간지 2년 후인 1842년 11월 13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추사는 그런 사정도 알지 못하고 별세 다음날인 14일과 18일에도 연달아 부인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고는 두 달 뒤인 이듬해 1월 15일에야 추사선생께 도착을 했고. 추사선생은 뒤늦게 부인의 별세 소식을 전해 듣고
애통해하며 悼亡(도망)이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那將月姥訟冥司(나장월모송명사) : 어찌하여야 달 노파와 저승에 송사하여
來世夫妻易地爲(래세부처역지위) : 내세에는 남편과 아내, 처지 바꿔 태어나리.
我死君生千里外(아사군생천리외) : 나 죽고 그대 살아 천리 밖에 남는다면
使君知我此心悲(사군지아차심비) : 나의 이 슬픈 마음을 그대가 알게 하리라.
한편, 歲寒圖(세한도)를 전해 받은 이상적은 눈물을 흘리면서 추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나 이익을 쫒지 않고 스스로 초연히 세상의 풍조에서 벗어났겠습니까?
다만 보잘 것 없는 제 마음을 스스로 그칠 수 없어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작품 오른 쪽 귀퉁이에 '길이 스승님의 가르침과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뜻을 담아 장무상망(長毋相忘)이 새겨진 인장을 찍어 스승을 향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남겼습니다.
장무상망(長毋相忘)이란 ‘오랫동안 서로 잊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내용 중에서 압권인 것은 세한도를 받은 이상적은 그것을 청나라에 가지고 가서 추사와 교류하던 문인들에게 보여주고 그림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을 청나라 문사들 16인이 각자의 소감이 담긴 글을 써서 두루마리 형태로 그림 아래에 첨부를 했습니다. 그 후 우리나라의 문사들도 참여했는데 길이가 15m 정도입니다.
이 첨부 글 또한 세한도의 가치를 몇 십 배 상승시킨 것입니다.
이상적 자손들이 보관하고 있던 세한도는 일제 말의 어려운 때를 만나 경매에 나왔고, 일본인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일본으로 넘어간 세한도를 되찾아온 손재형의 일화는 감동적이었습니다.
1940년대,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는 옛 유물이 마구 거래되는 암흑기였습니다. 이때 추사 김정희를 흠모하는 일본의 한 학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후지쓰카 지카시'교수입니다. 그는 김정희의 수많은 작품들을 수집하는데 노력을 기우렸습니다.
1940년 초반, 경성제국대학에 동양철학 교수로 있던 후지쓰카 지카시는 경매에 참여하여 마침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그림을 손에 넣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선의 고서화 수집가 손재형은 어떻게든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찾아오고 싶었습니다.
손재형은 후지쓰카 지카시 교수에게 접촉하여 김정희의 세한도를 넘겨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후지쓰카 지카시는 추사 김정희가 좋아서 수집한 것이므로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넘겨줄 수 없다고 냉정하게 잘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1944년 일본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국보급 유물을 넘겨줄 수 없었던 손재형은 거액의 자금을 마련해서 일본까지 찾아가게 됩니다.
그 때 일본은 연합군의 공습에 의해 매우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손재형은 위험을 각오했던 것입니다. 손재영이 찾아갔을 때 후지쓰카 지카시 교수는 쇠약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한도를 사겠다는 부탁에는 냉정했습니다.
손재영은 그래도 아랑곳 않고 석 달이 넘도록 끈질기게 문안을 갔습니다. 손재형의 끈기와 정성에 마침내 후지쓰카 지카시도 감복했습니다. 후지쓰카 지카시는 세한도를 손재형에게 넘기면서 진정으로 세한도를 보관해야 할 주인은 당신임을 알았소. 라는 말을 남기고 별다른 대가 없이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불굴의 노력으로 손재형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그림을 양도 받아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연합군의 공습으로 후지쓰카 지카시의 집이 불탔습니다. 그가 수집했던 추사 김정희의 다른 작품들도 많이 소실되었던 것입니다. 하마터면 우리의 문화재 세한도가 한줌의 재로 변할 뻔 했던 것입니다.
영화의 장면처럼 극적인 순간을 넘기고 한국으로 돌아온 세한도지만, 그 후에도 역경은 계속되었습니다. 손재형이 정치에 발을 딛게 되면서 자금 압박을 받게 되고 끝내 고리대금업자에게 담보로 넘어가게 됩니다. 돈을 갚을 수 없게 된 손재형은 소유권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것이 수장가 '손세기'에 의해 인수되어지고 그의 아들 손창근이 그것을 국립중앙박물관에 영구 의탁 보관하게 함으로써 지금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손창근은 세한도 외에 많은 김정희 작품을 기증했습니다.
일본의 후지쓰카 지카시의 아들들도 자신들이 소장하고 있던 김정희의 작품들을 한국 정부에 기증을 했습니다.
세한도는 대표적인 문인화입니다.
문인화란? 시를 잘 짓고, 글을 잘 쓰고, 문예를 잘 하는 선비들이 자기의 생각을 함축하여 간략하게 표현한 그림인데, 특히 여백의 미를 잘 살리는 것이 그림의 묘미입니다.
화공들이 자세하게 표현하는 기법과는 다른 경지를 추구하는 예술인 것입니다.
세한도에는 상대가 권력이 있든 없든 한결같은 마음 자세를 가진 이상적,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그림으로 표현한 김정희, 끈질긴 정성을 인정할 줄 아는 후지쓰카 지카시, 우리 문화재를 사랑하여 보존하려고 노력한 손재형, 함께하는 소중함을 실천한 손창근의 이야기가 한 폭의 그림 안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그림은 유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마음이 응축된 불후의 예술품입니다.
참고로 사진 두장을 첨부합니다.
첫 사진은 강릉 오죽헌 사랑채에 걸려있는 추사 김정희가 쓴 주련 글이고,
두 번째 사진은 현재 진주 박물관이 위치한 옛날 사진입니다.
첫댓글 준비한 자료가 없어도 이렇게 명강의로 끝낸 김교장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덕분에 추사선생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세한도와 함께 자세히 알게되어 곱단 말도 드려야겠네요.
당신이 보석같은 내 친구라서 정말 자랑스러워요.
늘 건행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