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마음 통하는 고향친구로 은행지점장이 있다. 친구는 본디 상고로 진학했다가 폐결핵 걸린 선배와 함께 자취하다 같은 병에 걸려 학업을 쉬게 되었다. 나는 중학교를 나와 객지로 유학가지 못하고 시골 고교에 진학해 한때 방황했다. 나도 휴학 후 복학하면서 질병으로 한 해 쉬고 고향 학교로 돌아온 친구와 자연히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우리의 십대 후반은 정체성 혼란기였다.
그때 누가 끌어주고 밀어주는 사람이 곁에 없었다. 그런 열악한 조건에서 친구는 병역의무를 마치고 지방대학으로 진학했다. 친구는 성실성을 인정받아 학생회장이 되어 리더십을 발휘했다. 나는 이태 더 묵어 늦깎이로 교육대학을 진학했다. 당시는 고등학교 마치고 웬만한 수준이면 말단 행정공무원은 되었다. 조금 더 노력해서 국립사범대나 교육대학을 졸업하면 교단에 설 수 있었다.
친구는 대학을 끝내고 국책은행서기가 되어 바닷가 작은 도시로 갔다. 나는 교육대학에 다니면서 현역복무를 갈음하는 군사교육도 같이 받았다. 졸업과 동시에 예비역이 되었다만 임용적체로 한 해 쉬게 되었다. 말이 임용적체지 학점이 좋은 동기들은 먼저 발령받았다. 예체능까지 만능이어야 하는 교육대학 학점을 내가 잘 받았을 리 없다. 나는 늦게야 밀양 얼음골로 발령이 났다.
총각시절 나는 바닷가 친구를 찾아가고, 친구는 산골학교로 나를 찾아오기도 했다. 나는 친구가 근무한 바닷가 도시로 신혼여행을 가서 지는 청춘을 아쉬워했다. 나는 친구 결혼식장에서 자작 축시를 한 수 읊어주기도 했다. 그간 세월이 흘러 우리는 식솔을 불린 가장이 되었다. 친구와 나는 일터에서도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 오래 전 내가 창원으로 이사 왔더니 먼저 와 있었다.
예기치 않은 이이엠에프가 왔더랬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가까운 사람이 끼친 금융사고가 압박해 왔다. 친구는 나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헤아려주었다. 당시는 고금리로 모두가 힘든 시기를 보낼 때였다. 친구는 법과 제도가 허용한 범위 안에서 나를 도와주었다. 나는 세상 물정 모르고 작은 아파트 하나를 분양 신청했더니 친구는 극구 말렸다. 높은 금리에 중도금 이자도 부담된다 했다.
오두막 전세를 전전하던 나는 친구 덕으로 건령이 좀 되고 융자를 받았지만 아파트를 하나 장만했다. 매매물건에서 이사까지 친구가 길을 안내해주지 않았으면 어림없었다. 나는 책을 한 쪽 읽거나 글을 한 줄 쓰는 데는 남만큼 할 수 있었다. 등기나 융자업무에 관해 아는 바 없으니 친구가 모두 해결해 주었다. 나는 달랑 이삿짐만 날랐다. 그 아파트에 살고 있는지도 십년이 지났다.
친구는 언제가 안식년처럼 외국연수랍시고 일 년 정도 바깥바람을 쐬고 오기도 했다. 나한테 그렇게 고마운 친구는 내가 근무학교를 장유로 옮겨왔더니 신도시 지점장으로 따라 왔다. 가까이 있을 때는 가끔 안부 나누고 얼굴을 보았다. 친구가 올봄 인사이동 때 시내 지점장으로 영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는 일이 다르고 서로 바쁘다보니 자주 연락하고 만날 처지 아니었다.
친구는 그간 골프에도 푹 빠져 있었다. 닭장 같은 연습장 수준을 벗어나 필드에도 더러 나간다고 했다. 친구는 실내 사무실만이 아니라 파란 잔디가 객장일 수 있을 테다. 그러니 골프가 건강을 생각한 여가활용만이 아니라 치열한 영업실적을 쌓아가는 생존수단이지 싶다. 언제부턴가 친구는 골프 예찬론자가 되어 있었다. 신이 내린 지상의 스포츠 가운데 골프가 최고라고 했다.
곧 칠월이 다가오고 방학이다. 문득 고향친구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 친구 만나러 상남동에 한 번 나가야겠다. 서울 강남만큼 물 좋다는 창원 상남동이다. 중년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견주어보고 싶다. 우리 사이 손익계산서가 무슨 소용 있겠나마는 느긋하게 마주앉고 싶다. 내가 건넬 막걸리 잔과 숲이 주는 효험에 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싶다. 양주보다야, 골프보다야. 2009.06.23
첫댓글 친구야... 잔 부딪는 소리 벌써 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