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피의 문제다. 아버지가 아침마다 구역질을 하는 수준까지 가시지만 술을 찾듯이.
막내아들 : 아버지 제가 효도할 때까지 건강하셔야 하니 술 그만드세요.
아버지 : 니가 효도? 그럼 한 100년은 더 살아야 안 되겠나?
막내아들 : 그럼 한잔 드세요.
아버지 : 그래 이기 효도다. 올해부터 안 묵을라켔는데 니가 주서 한잔만 묵는다.
새해 첫날에도 그렇게 술을 따라 드렸다. 술은 피의 문제다.
오늘아침
2006년 1월 31일 1시 15분경
내 최대의 단점은 민감하다는 것이다. 옆에 누운, 나이 34세, 미혼, 키 170가량, 몸무게 65가량, 직업 소설가/편집자, 고향 제천, 이름 최봉자(본명 최봉준)인 사람이 코를 곤다. 아, 시계를 보니 4시간밖에 못 잤다. 일어나 어제의 흔적을 개수대에 넣는다.
밥이 없다.
"밥할까?"
"아니 안 먹을래."
형님~ 정말 고맙다.
나 : 오늘 영화나 볼까?
봉자 : 어떤 거?
나 : 음, <그때 그사람들>이랑 <수취인 불명>이랑 에비 그 뭐냐. 에비... 디카프리온지 카프린지 나오는 거.
봉자 : 지난번에 두 개 보는데도 힘들더라. 세 개씩 못 봐, 피곤해. 하나만 보자.
나 : 그럼 보지 말자.
컴퓨터를 켠다. 뭔가 해야 할 것 같다. 음, 향기방에 글을 남긴다.....
*어*제*
2006년 1월 30일 20시 30분경
손전화를 눌러대기 시작한다. 멀리 있는 후배에서부터 가까운 동료까지.
몇몇 후배들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이것들이! 글쟁이 몇몇은 이미 취해서 혀가 꼬부라지고, 의리 없는 놈들은 다음에 보잔다.
한 명도 못 건졌다. 그래 오늘은 술을 포기한다. 되도록 혼자 술을 마시진 않으리라. 폐인 같은 풍모도 흉하지만,
혼자 마시면 역시 술맛은 덜하다. 술을 포기하고 모든 유혹을 잠재우고 당사로 향하는데, 그제서야 전화받지 않았던 후배놈들이 차례로 전화를 해 그간의 두절에 대한 변명과 전화받지 못한 상황과 근황과 원황에 대한 안부와 심지어 직업과 연애 고민까지 뱉어내기 시작한다. 아, 뒷북의 고수들이여... 그렇게 네 통의 전화를 받고 나니 당사무실 이다.
2006년 1월 30일 21시 30분경
당사에 도착했다.
사무실에 뭔가 한보따리 있다......
돼지머리 누른 거, 곶감, 쑥떡, 조청, 등등. 이쯤되면 술을 참는 건 더 이상 술에 대해서도, 이것들을 먹어라고 준 이 에 대해서도, 돼지머리와 곶감과 쑥떡에 대해서도 예의가 아니다. 집에서 쉬겠다던 선배 최봉자한테 전화를 다시 건다.
나 : 형 안 오면 다신 안 놀아줄 거야!
형 : 나도 그러길 바래.
나 : 술 많이 없어 괜찮아, 와.
형 : 글쎄~
2006년 1월 30일 22시경
안 온다더니 빨리도 도착했다. 산사춘 2병에 소주 1병 반... 소주 반 병은, 소주 간 맞추느라 내가 먼저 홀짝했다. 이야기를 시작한다. 처음엔 음악이 문제였다. 나는 심수봉을 듣자고 했다.
나 : 형 오늘은 심수봉이 필요해.
형 : 난 패티김이 좋은데.. 이런 거 좋네. 영어라서 못 알아먹는 거.. 이거 듣자.
나 : 형 술 잘 마셨어. 이제 형 집으로 돌아가 주라.
형: ..........
심수봉을 듣는다. 정치적 입장은 맘에 안 들지만, 노래는 좋다. 아아아 서정주도 이광수도 까짓 심수봉과다. 심수봉의 목소리엔 내가 긁어낸 심연이 있는 것 같다. 그래, 있는 건지 있는 것 같은 건진 모르겠다. 술을 마시는 동안 심수봉과 노동의새벽(민중가요) 헌정 앨범을 번갈아 들었다. 노동의 새벽.. 한때는 시가 각별했고, 최근엔 그걸 건네준 손이 각별했고, 지금은 그 모든 걸 음악으로 듣는다.
2006년 1월 30일 22시 30분경
출판계 이야기를 시작한다. 선배가 한때 출판인이었나? 밥을 버는 수단이 자신의 존재방식을 결정하는 세상. 그래~ 맞다... 선배는 출판인이었고, 그중에 편집자였고, 사실 그것보다는 물통인이었다. 선배가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정원에 물주는 것이 주업무이듯. 아, 물통 갈아끼우기..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누차 들었다.
첨엔 바지를 다 적셨다가 나중엔 한 손으로 갈아끼운다고 자랑까지 한다.
나 : 요즘 김기택 시집 잘 나가지 않아요? 김기택은 일류지.
형 : 내 꺼보다 안 나가. 곧 정과리, 김수영(문학과지성사 주간 이름), 원종국문학상 받을 거야.
나 : 히히 형 오늘 주무시고 가세요. 근데 상금부터 주면 안 될까?
아주 길고 지루한 문학이야기가 벌어지는 동안, 나는 충청도 특유의 그 긴 인타바리를 참고 견디며 건너느라 무진장 괴로웠다.
나도 말이 느리지만, 원종국은 충청도 중에서도 대표선수다. 보통 사람이 300타 정도의 말을 한다면, 나는 200타쯤 될 것 같은데 원종국은 50타 정도다.
원종국과 대화하는 동안 나는 수도하는 기분이 든다. 참고 기다리고 참고 기다리고...
아, 누군가 은행원들이 모이면 문학을 이야기하지만 문학인들이 모이면 돈 이야기를 한댔던가. 그런데 최봉자는 이야기 내용도 은행원 수준이다. 그것도 지독히 돈 느리게 세는 은행원이다.
2006년 1월 30일 00시 30분경
영화이야기를 시작한다. 냉정한 은행원이 먼저 경험담을 푼다.
형 : <마음이> 봤는데, 비디오용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나 : 좋다던데...
형 : 잘 만들긴 했어. 무리하지도 오버하지도 않고. 근데 그 수준이야.
나 : 형 영화를 분석할려고 보지? 글쟁이들이란... 쩝. 먼저 느껴봐. 다들 좋다는데 왜 그래?
형 : 사람들이 대체로 영화에는 관대하지. 글에는 냉정하면서 말야.
나 : 음. 형 말이 다 맞는 것 같아요. 역시 글쟁이야......
.
점점 기분이 좋아져야 하는데, 이쯤에서 둘 다 술에 집중한다. 술만 자꾸 들어간다.
2006년 1월 30일 01시 30분경
술이 떨어졌다. 저기 장식장 비스무리한 데 와인인지 뭔지가 있다.
누가 선물한거 같은데, 누가 선물한 건지 언제 받은 건지, 누구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와인을 먹어본 일이 있어야지. 난 그것이 술인지 사이다인지 잘 구별하지 못한다. 그걸 꺼내고 병따개를 찾는다.
형 : 야, 이건 병따개로 따는 거 아냐. 코르크야. 빙빙 돌리는 거 어디 있을 거야 가져와.
나 : 머가 이리 복잡노. 그런 거 본 적 없는데...
한심하다는 듯 나를 쳐다본다. 싱크대를 뒤져 뭔가를 들고 와선 얼굴이 벌개지도록 코르크를 잡아당겨서 딴다. 나는 새 잔을 들고 와 술을 따른다.
먼저 한잔을 쭉 들이킨다.
형 : 이것이 맥준 줄 알아? 이렇게 가득 따르면 어떻게 해?
나 : 그냥 원샷해. 따라주기도 귀찮아. 야, 맛있네. 다음엔 이거 한짝 사서 이렇게 마셔야겠다.
형 : 이거 한짝 사려면 시집 1000권 팔아야 돼. 그냥 소주 마셔.
나 : 정말? 뭐이래.. 마셔도 취하지도 않는구만.. 술은 도수 높은 순서대로 비싸야 돼. 안 취하는 게 술이야?
형 : 내가 왜 너 안 만나는지 알지?
2006년 1월 30일 2시경
정치이야기가 시작된다. 오늘은 북한이다. 최봉자는 잡학다식하다. 지나가다 보이는 간판에 대해 뭐하는 데냐고 물으면 줄줄이 나온다.
그러나 말이 느린데다 설명도 길게 하니.. 궁금한 게 있으면 각오를 단단히 하고 물어야 한다.
"김종필이 없으니 재미가 없어" 이 한마디로 시작한 정치이야기. 북한의 권력세습이 화두다.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형 : 그런데도 북한을 옹호할 수 있는 거야?
나 : 누가 뭐래요? 세습은 잘못이지. 근데 그게 전부는 아니니까. 북한이 처한 상황을 전체적으로 봐야죠.
형 : 북한의 핵심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체를 규정할 수밖에 없는 거야. 골통 주사파야.
나 : 주사파? 형 정형근 동생이지? 용갑이 친구지?
2006년 1월 30일 3시경
술이 모잘랐다..... 약속이나 한듯 편의점으로 발걸음이 가고 있었다.....
*다*시* 아*침*
2006년 1월 31일 11시경
새벽 3시 집이 코앞이긴 하지만 자고 가기로 한다. 당사무실은 여관 수준이다. 누구나 와서 자고 간다.
11시 반에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끊자마자 나비처럼 화장실로 가 세수를 했다. 그때쯤 꾸역꾸역 일어난 형에게 최고의 라면을 먹이기로 한다.
라면 2개에 계란 1개, 파 20센치, 청량고추 1개, 애호박 4토막, 마늘 조금 넣고 끓여준다.
형 : 언제 일어났어?
나 : 9시. 형 코고는 것 땜시 잠 설쳤어. 코에 나팔을 붙여놨나....
형 : 그럼, 지금이 11시 반이니, 2시간 반 동안 나 욕하고 있었던 거야?
형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이제 설겆이를 해야 하고, 쓰레기분리수거를 해야 하고, 청소를 해야 하는데, 다들 퇴근할 때가지 개겨볼 작정이다.
요즘 향기 카페를 전용 홈피처럼 이용한다. 어떤 사람의 글을 애정을 가지고 자주 읽으면 그 사람의 문장을 따라간다.
문장은 마음의 결이다. 결국 그 사람의 마음의 결을 닮아간다. 요즘 내가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술은 피의 문제다. 생득적이고 생래적이다. 우리 아버지는 평생 밥을 한번도 지어보지 않았다.
밥하기보다는 술마시기가 유전적으로 우성이다.
첫댓글 오늘도 오향 불밥 PD님께서 기사를 재미나게 쓰셨군요.....^^암만 해도 술은 조은것 같어요 ㅋㅋㅋ나는 언제 술 한번 마셔보...술구경 안헌지가 한 참 ?네요-"-
저는 이제 그만 먹고싶어요~ 주위에서 저를 가만 두질 않으려 합니다. 충격이 아직까지 남아서일까요? 오늘은 몹시 졸려서 전화기 끄고 일찍 좀 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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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돌연변이죠.... ㅡ.ㅡ; (먼 소린지...) 난잡해요? 정리 해서 보기 쉬워라구.. 시간까지 넣어 줬는데... 반건조 곶감이 너무 맛있네요..... 두고두고 사무실에서 먹을려다가 나중에 다시 가면 맛도 못볼꺼 같아 몇개 가져와서 지금 먹는데~ 내일 볼일 보는데는 이상없어야 할텐데.... 그러면서 자꾸 손이 갑니다.... 안나오면 파야죠뭐~
곳감 많이 먹지 마세요... 절대루... 곶감에 무슨무슨 성분이~ 변비를 만든답니다. 지독한 변비.... 어릴때 곶감을 처마에 주렁주렁 달아 놓은거 많이 빼먹고는 화장실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읔... 상상만해도... 찢어지는 아픔.....
ㅋㅋㅋㅋ 전 곶감 좋아하는데..ㅋㅋㅋㅋ 없어서 못먹지요... ㅋㅋㅋㅋㅋ 글 잘읽엇어요...^^ 술을 먹는이유를 설명한거 같은..^^ 불밥님은 생각보다 ..깊이가 무지 깊어요... 자꾸 자꾸 이미지가 달라지는군요..ㅋㅋ
제가 쩜 멎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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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들 저를 실제로 보는 사람들은 동안
이라고들 합니다... 캬 캬 캬
흠..동안이라고요? 그래요??? 저도 조금은 동안인데.ㅋㅋㅋㅋㅋㅋ
술로 채운 인생 술로 망한다...오늘도 술로 밤을 세우고 틱텍톡...쩝
몽이님이 생각하시는만큼 제가 술꾼이 아닙니당.. ㅠ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일겁니다요~ 으흐흐흐흐... 근데.. "틱텍톡" <== 이게뭔지 단무지 이후로 하나 더 궁굼하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