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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15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광복주일 * 홍지훈 목사
마태복음 7:15-23
어느 길로 갈 것인가?
사람은 누구나 길 위에 서있습니다. 실제로 차를 타고가든 걸어가든 우리는 매일 길을 나섭니다. 그리고 정해진 목표를 향해서 나가갑니다. 공직에서 사역하는 분들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퇴직을 합니다. 그래도 인생을 계속됩니다. 외적 인간이 매일 길 위에 서서 걷고 있듯이, 우리의 내면세계도 마찬가지로 길 위에서 걷고 있는 중입니다. 만일 우리가 젊은 사람이라면 앞으로 길을 걸어야 할 시간이 많이 남아있을 것이고, 만일 우리가 노인이라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인생 이모작이라는 말도 부족해서 삼모작이라는 말로 우리의 인생의 시간이 참 길어진 것을 표현합니다. 얼마 전에 잠깐 유행한 노래 중에 <백세인생>이라는 가요가 있습니다. 굉장히 단순한 노래인데, 그 노랫말이 독특해서 유행한 적이 있지요. 이런 가사입니다.
육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칠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
팔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 만하여서 못 간다고 전해라.
구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 테니 재촉 말라 전해라.
백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
마지막 노랫말이 “건강하게 살아요.”로 끝납니다. 그러니 늙어가는 인생이라고 하더라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는 의미가 담겼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은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언제나 길 위에 서서 걷고 있는 인생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걷는 길이 “어떤 길”이냐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어떤 길을 걷고 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자기가 해온 일들과 하고픈 일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무슨 일을 하며 살았느냐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다 다른 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 등급을 매기는 것은 선한 방법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매우 존경을 받는 직업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일을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거나, 혹시라도 양심에 매우 거리낄 만한 일을 하고 있다면, 그는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해야합니까?
반대로 누가 보기에도 힘들고 고달픈 일을 감당하며 살고 있지만, 그 분의 노고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된다면, 그는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당신은 어떤 길을 걷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내가 걷는 이 길이 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덕이 되고 도움을 주는 일인지? 아니면 그저 나 혼자 잘 사는 길을 걷고 있을 뿐인지 생각해야합니다.
1945년 8월 15일 꼭 76년 전입니다.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광복절이기도하고 교회는 광복주일로 지킵니다. 그날이 오기까지 어떤 사람은 민족을 해방을 위한 투쟁에 나서서 고난의 길을 걸었고, 어떤 사람은 일본의 지배 아래에서 안위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마음 따로 행동 따로 살았겠지요. 그래도 속으로 어떤 길을 걸어야하는지 다 알고는 있었습니다.
세계 2차 대전이 종결되는 바람에 겨우 얻게 된 해방이라서, 우리는 해방과 동시에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이념을 지닌 국가의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또 우리 민족이 걸어야할 길이 갈라집니다. 결국 동서의 냉전은 우리에게 좌우익의 극한대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분단은 결국 민족 간의 전쟁으로 이어졌고, 우리는 이념의 대립이 사람의 목숨을 쉽게 빼앗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결국 민족이 서로 증오하게 되었지요. 교회는 일본의 지배아래에서도, 그리고 공산주의의 지배아래에서도 늘 감시와 박해의 대상이었습니다. 교회도 그래서 길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다시 오늘의 성경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앞에 넓은 문과 넓은 길, 그리고 좁은 문과 좁은 길에 대한 짧은 경구가 나온 후에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매우 연관성이 높다고 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넓은 길은 사람이 많이 걷는 길이고, 좁은 길은 사람이 별로 찾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넓은 길은 멸망의 길이고, 좁은 길은 생명의 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매우 선호하는 인기 있는 길을 따라가면 종착점이 멸망이고, 반대로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고 인기도 없는 길은 그 종착점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한 번 생각해 보지요. 큰 교회에 가면 예배당도 크고, 문도 넓고, 사람도 많습니다. 우리교회는 반대로 좁습니다. 그래서 “거기는 멸망이고, 여기는 생명”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큰 착오를 범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크기를 비교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 속마음을 보라는 것입니다. 무슨 생각을 가지고 그 길을 가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속마음은 미움으로 가득한지, 겉으로는 용서를 말하지만 속으로는 정죄하고 있는지, 겉으로는 자비를 말하지만 속으로는 저주하고 있는지, 겉으로는 겸손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교만한 마음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짓 예언자들이 그러기 때문입니다. 겉은 양의 탈을 썼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이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경의 시대로 가면, 지금 “거짓 예언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마태복음이 기록된 마태공동체에 들어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지도자들일 것입니다. 교회사 지식을 활용하면, 그들은 바로 영지주의자들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은사주의자들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이 거짓 예언자들은 화려한 언변도 있고, 예언이나, 기적 같은 것들을 보여주는 능력이 있던 사람들로 보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말합니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는다고 말입니다.
“결과”가 좋아 보인다고 해서 현혹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는 이어서 덧붙입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마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어록을 현재적으로 바꾸면, “신앙인의 외적조건을 모두 갖추었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고 확인된 것은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주님을 인정하고 따라다니지만, 주님은 말합니다. “글쎄, 하나님은 당신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실까?” 그 의미는 이것입니다. 신앙의 길에는 “왜곡된 길”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그 사람들이 이무리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다고 해도, 주님은 “나는 당신들을 모른다!”고 주님은 잘라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제가 자주 경험하는 일입니다. 신학교에서 예배시간에 외부 강사를 매주 초청합니다. 조금 이라도 특별한 강사를 모시려고 애쓰지만,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좁은 길을 걸어가는 목사님들은 찾아내기가 참 어렵습니다. 어렵사리 소개를 받아서 연락을 드리면, 대부분 초청에 감사하다고 말하면서도 거절합니다. 거절의 이유는 한결 같습니다. “나는 그런 큰 자리에 갈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저는 그런 대답을 들으면 더 모시고 싶어서 가슴이 콩닥콩닥 뜁니다.
저는 그분이 왜 그런 대답을 하시는지 그 이유를 압니다. 우리가 신학교 다니던 시절에, 학교 채플에 초청되는 외부강사들은 대부분 큰 교회 목사님들이었습니다. 목사님들은 빈손으로 오지 않고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하여 그날 점심을 제공해줍니다. 우리는 공짜로 점심을 먹는 날이 종종 있었습니다. 고마운 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날 설교에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가 사실은 더 중요합니다.
신학생들이 제일 싫어하는 설교는 “자기 자랑”입니다. 두 번째로 싫어하는 설교는 “공부 열심히 해봤자 목회와 상관없으니 기도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설교입니다. 세 번째로 싫어하는 설교는 자주 “반말”이 등장하는 설교입니다. 그렇게 설교평가를 하면서 신학교를 졸업했지만, 그중에서 일부는 자기 자랑과, 반말을 일삼는 목회자가 되어서 다시 신학교 강단에 돌아옵니다. 교수가 되어서 예배참석 했는데, 정말 가끔, “시간은 이 때 뿐이니 공부 열심히 하라.”는 설교를 들을 때 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오는 것처럼, 진실한 예언자는 자기의 업적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만일에 예수께서, “나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하고 나에게 말씀하신다면, 우리의 대답은 이런 질문이 되어야합니다. “주님,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적도 행하고, 예언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많이 쫓아 낸 것을 모르십니까?” 이런 항변을 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셈이 되고 맙니다. 이런 대화양상은 불행하게도 지난 2000년 세월동안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습니다.
오죽하면 중세 말에 인문주의 신학자 에라스무스(Erasmus)가 <율리우스 추방>이라는 풍자문학으로 교황 율리우스가 천국 문에서 배척당하는 이야기를 썼겠습니까? 율리우스는 천국 문을 막고 있는 베드로에게, 자기가 로마 출신이라고 자랑하고, 교황을 여럿 배출한 자기의 가문을 자랑하고, 전쟁으로 교황의 지경을 넓힌 자신의 힘을 자랑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답하지요. “그렇게 열심히 한 것의 백분의 일이라도 당신은 <기도>하며 살았는가?”라고 말입니다.
평화목교우 여러분,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좁은 길일 때도 있고, 넓은 길일 때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길이 넓고 좁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길에서 멸망을 볼 것인지 아니면 생명을 볼 것인지의 차이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분명히 우리가 걸어가는 길속에서 생명을 발견하게 도와주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나도 생명의 길을 걷고, 동행자도 생명을 찾도록 도와주는 그런 길 말입니다.
76년 전 우리 민족이 해방을 맞으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광복주일을 맞아서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념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동시에 오늘은 <세계교회와 함께 하는 한반도 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이기도 합니다. 예년처럼 이번에도 NCCK(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가 북한의 조선 그리스도교 연맹(KCF) 제안한 기도문으로 설교마침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함께 기도드릴 때에, 이 민족과 교회가 세상을 멸망이 아닌 생명의 길로 이끌어 나가는 역할을 감당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주님,
우리는 이 땅을 사랑합니다.
북과 남, 남과 북의 민民이 자신들의 고유한 역사를 일구어온 터전,
울고 웃던 삶의 모든 기록이 아로새겨진 대지,
이 땅 한반도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주님,
이 땅 한반도가 신음하고 있습니다.
채 아물지 않은 분단의 상처 때문입니다.
둘로 나눠진 민족은 서로를 미워하며 수십 년을 허비해왔습니다.
이념이 달라 그어놓은 물리적 경계가
이 땅을 전쟁과 폭력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내면에 좁히기 힘든 간극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땅의 갈등과 분열을 먹이 삼아 기생하는 이들이
평화를 향한 발걸음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들의 긴장관계는 종식되지 않고,
고스란히 민民의 삶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십시오.
분단의 상처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서로를 미워하며 비난하기를 멈추고,
그 자리에 평화와 공존의 씨앗을 심게 하옵소서.
이념이 그은 경계와 내면의 간극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해소되게 하옵소서.
평화를 막아서는 모든 이들의 욕망이 무너지게 하옵소서.
안보의 이름으로 행하는 군사훈련을 멈추므로,
더 이상 이 땅 한반도가
전쟁과 폭력의 광풍에 휘말리지 않게 하옵소서.
더불어 주님,
북과 남, 남과 북의 교회가 화해와 평화의 소명에 앞장서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신앙이 아니라,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기도하며 헌신하는 화해의 신앙을 추구하게 하옵소서.
북과 남, 남과 북의 하나 됨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행할 바를 알게 하시고,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결단하고 실천하게 하옵소서.
평화의 주님,
광복 76주년을 맞이한 오늘,
진정한 해방을 성취하기 위해 북남, 남북통일의 불씨를 살리려고 합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공존은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성취해야할 그리스도인의 소명임을 고백합니다.
비록 분단의 철조망이
북과 남, 남과 북의 그리스도인들을 갈라놓았으나,
주님 안에서 우리의 영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하며,
이 땅의 평화를 위한 고난의 먼 길을 함께 걸어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작은 길로 들어가라" 는 오늘의 말씀은 어쩌면 실체없는 것에 대한 구함 보다는 우리생활속의 작은것에 대한 진실적 구함을 더 생각 하라는 말씀 같읍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발표한 남북한 교회 기도서는 약간의 정치적 성향을 띄는것 같읍니다
어느나라 이건 국방력 증진은 필수 이다는것을 다 아는것 인데 유독 남한의 것에 대한 비난만 있고 북의 핵에 대한것은 없는 변향적인 정치적 느낌이 있고
구체적으로 남한의 부 양극화와 북의 인권에 대한 언급이 있었으면 많은 공감이 있으리라 생각 됩니다
바라건데 사랑을 핑계삼아 정치적 편항성을
안 띄웠으면 하는 바람이고 기독교의 정신을 삶에 좀더 구체적으로 심어주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