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시죠? 하늘은 높고 바람은 선선한 가을입니다.
독서하기보다 산책하기에 딱 좋은 계절이죠. 혹은 책을 들고 나가서 공원 벤치에 앉아 바람을 즐기며 독서를 해도 좋을 거-예요.
자, 그럼 이번에 추천할 소설을 소개하도록 할게요.
도서명: 저스티스 1~3권
저자: 장호
* 이 책은 넓은마을 도서관 1번 소설에 4번 추리 부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소개글 서평
이 책을 다운받은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다. 저스티스(justice)라는 이 도서명 말이다. 제목이 한글로 써 있기는 하지만, 이거 다들 아시다시피 정의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이다. 그리고 나는 ‘정의(justice)가 들어간 책을 읽고 감상을 남긴 적이 있다. 그 이름하여 ‘정의(justice)란 무엇인가’라는 그 심오한 사회과학 도서를 말이다.
정의, 저스티스, 아주 낯익은 단어가 제목으로 등장한 탓인지 저절로 손이 갔고, 무심코 소개글을 보았으며, 어느 순간에는 DN 명령어와 숫자를 입력해 다운받고 있었다.
‘저스티스’를 둘러싼 법정 공방
“얼마나 마음을 열었느냐고 물은 겁니다. 한국어의 함의가 풍부한 것이 제 잘못은 아니죠. 만나서 뭐 할 거라고 생각했나요? 쎄쎄쎄?”
소설은 크게 두 축으로 나뉜 정의를 대변하며 시작한다. 우선 스타 변호사 이태경이 등장한다. 그는 재판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상대방의 인격에 치명상을 입히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이다. 수려하고 빈틈없는 말발로 재판 승소율 99.9%를 자랑한다. 물론 변호사는 기본적으로 의뢰인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직업이다. 심지어 의뢰인을 위해서라면 위법성 여부도 그냥 묻고 눈을 감을 수 있는 직종이 그 직업이다. 그럼에도 태경은 그 정도가 심하다. 그에게 법정은 쇼를 펼치는 무대, 재판은 간교한 말장난으로 정의를 흐리는 쇼맨십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그는 스타 변호사이자 속칭 비리 변호사였다.
그러나 태경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약자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을 위한 법조인이 되고자 힘겹게 공부해 변호사가 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법을 악용하는 권력자들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에 좌절했고, 자신을 무너뜨렸던 권력의 정점에 서기 위해 결국 재계 거물과 손을 잡게 되었다. 그는 송엔터의 한류 스타 장준일의 성폭행 사건 변론을 맡아 논리적이고 진실을 추구하는 변론보다 자극적인 이미지와 공허한 프레임 ‘빅토리아 시크릿 검은색 망사 속옷’으로 무죄를 받아낸다.
태경에게 정의란 껍데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뿐이다. 무너져 짓밟히는 추상적인 개념일 따름이다.
“운동하죠. 그런데 너 만지라고 한 건 아닌데, 그리고 너 매일 이 시간 때마다 이러죠? 주먹을 크게 휘두르면 그만큼 허점이 많지. 하하하. 일어나 변태.”
한편 여기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서준미 검사 되시겠다.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냉철한 엘리트이자 꼴통 폭탄이다. 정의 구현을 목표로 사건이 있는 곳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과잉기억증후군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의 천재이기도 하다. 사실 그녀는 여자가 봐도 반할 만한 인물이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자신의 엉덩이를 만진 변태의 손을 콱 움켜잡고 따박따박 따지다가, 결국 도망가는 변태를 추격 끝에 호쾌한 유도 기술로 체포한다. 활동파 검사가 드문 이 시대에서 서준미는 거의 이단아 취급을 받는다. 또 은근 4차원이라 보는 이로 하여금 대체 어떻게 사법연수원 수석을 했는지 의구심을 갖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보다 검사다운 검사라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준미에게 정의는 고결한 가치, 지키기 위한 것, 결코 퇴색되지 않는다.
“뭐가 있긴 있는데.... 이렇게 벌레가 꼬이는 거 보니까.”
“벌레?”
“돈벌레.... 맞잖아?”
“말에 가시가 있네.”
“발라서 먹어.”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지닌 서준미 검사와 화려한 언변과 승부사 기질을 가진 이태경 변호사, 그 둘이 법정에서 만난다. 송엔터테인먼트의 송대기 사장, 그 뒤의 실세인 황룡 건설 현준오 회장과 얽힌 양대기 폭행 사건으로 인해서.....
태경은 과거의 약자들을 위한 정의를 포기하고 불의의 편에서 양철기를 빼내야 한다. 그것이 현 회장의 지시이기 때문이다. 현 회장은 악마, 자칫 과거의 연인이었던, 지금도 그의 마음에 남은 준미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 때문에라도 그녀를 막아야 한다. 자신은 더럽혀진 인간이지만 그녀만큼은 다르기에 태경은 최선을 다해 부딪힐 작정이다.
한편 준미는 송엔터테인먼트의 신인 여배우 장영미의 실종 사건을 파던 와중에 그 배후에 황룡 건설 현준오 회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를 둘러싼 살인을 비롯한 굵직한 불법들을 드러내기 위해 과거 연인이었던 태경과 맞선다. 그녀는 양철기 재판을 미끼로 대어를 낚을 수사를 시작할 셈이다.
그렇게 둘의 법정 공방, 여배우 실종 및 재계와 연예계, 법조계의 온갖 비리가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 과연 어둡고 냄새나는 자들의 추악한 민낯이 밝혀질 수 있을까?
정의가 무너지고 있는 오늘, 그럼에도 저스티스는 영원하리라!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그 무엇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 - 에밀졸라”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참 고전적이다. 일단 소재부터가 참 그렇다. 조폭, 권력형 비리, 검사와 형사, 재계의 불법, 성폭행, 연예계의 뒷면과 인간의 악의로만 빚여진 미친 사이코, 대기업의 횡포, 끝으로 정의까지. 한국인이 대대로 좋아하는 자극적인 소재들을 몽땅 끌어모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싸구려틱하지는 않다. 그런 소재를 큰 솥에 넣고 팔팔 끓여서 만든 진국인 사골이다. 담긴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 장면 전환이 빠르고 스피디해서 현대적인 감각을 잘 녹여냈다는 인상도 든다. 재계 거물을 추적하며 벌어지는 내용을 전체 85개 장으로 구성했다고 하는데, 각 장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과 그들의 사정이 긴장감과 몰입도를 상승하게 한다. 특히 서준미와 이태경, 현준오 회장 등의 주요 인물뿐 아니라 그 외의 공장 노동자 지선과 유정, 불우한 청소년 서인 등 여타 인물들까지 세밀하게 배경을 쌓아올림으로써 설득력 있는 인물들, 개연성 높은 사건 묘사 등이 장점이다.
또한 가습기 사건과 치약 사건이 떠오르게 하는 욕실 청소세제 파동과 재벌 기업의 반도체 공장에서 벌어진 피부암 발병 사건은 우리 사회의 실제 모습을 반영하는 듯해 법정 수사물로서의 현실감을 한층 더한다.
그렇지만 범인이 누구인가, 머리와 머리의 두뇌 싸움 같은 걸 기대할 조건은 되지 않는다. 일단 1권 중반쯤부터 범인이 은근슬쩍 나오기 때문이다. 현 회장을 뛰어넘는 배후 인물, 그의 정체를 따로 적지는 않겠다. 내 서평에는 ‘스포일러’가 좀 많은 편이니까.
단지 태산 그룹 부회장, 수려한 외모와 탁월한 능력의 그 인물이 얽혔다는 점만 쓰겠다.
이렇게 엮인 게 많아서 그런지, 소설에서는 ‘나쁜 일 대잔치’가 벌어진다. 정말 뭐 하나에 이어서 또 다른 사건의 연속이다. 소설이란 건 현실을 기반한다는데, 우리나라에 이렇게 쓰레기가 많았나 싶을 지경이다. 읽다가 쌍시옷이 들어가는 욕설이 저절로 튀어나올 정도니 추가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런 면만 보자면 이 작품은 불량 식품이다. 자극적인 소재에 눈이 가고, 손이 당겨서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고, 나쁜 사건과 나쁜 인물을 보면서도 다음에는 또 뭐가 나오려나 싶어 멈추지 않고 계속 읽게 된다.
그렇지만 또 마냥 조미료 범벅된 작품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저스티스’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좌절되어 무너진 정의의 이태경과 온갖 외압에도 굴하지 않는 정의의 서준미로 대변되는 이 ‘저스티스’야말로 이 소설의 주요 키워드라고 해야겠다.
“새벽의 눈을 잊지 않기로 한다. 곧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차가 다니면서 더러워지겠지만 처음 내리던 그 순간의 눈을 잊지 않기로 한다.”
다른 모든 문장들, 모든 대사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다. 모든 것은 처음에는 괜찮은 그 무엇이었을지 모른다. 비리 변호사 이태경도 시작은 인권 변오사였지 않은가. 단지 그 무엇이 꺾이고 좌절되고 부서졌을 뿐이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지 못했고, 회복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잇지 말아야 한다. 새벽 내린 눈은 하얬음을. 누군가의 발에 밟히고, 담뱃재가 쌓이고, 바퀴 자국으로 인해 더럽혀져도. 처음에 내렸던, 새벽에 쌓인 맑은 차가움에 포근한 그 눈은 무구한 순백이었다는 것을.
세파에 휘말려 더러워질지언정 그것은 잠시일 뿐이다. 녹아서 흐르고 흐르다 보면 다시금 맑은 물이 되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그것은 하늘로 올라가 또다시 새벽의 하얀 눈이 될 것이다.
정의가 꺾이고, 누군가는 그 좌절된 정의에 상처입고, 시궁창처럼 더럽혀질지라도, ‘저스티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하다.
왜냐하면 소설 끝에서 불의한 정의에 상처입은 서인의 마지막 걸음이 그 점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태경으로 인해 큰 상처를 받았으나 그 자리에 멈추지 않는다. 또 서울지검에서 전주로 좌천을 당했지만 끝끝내 수사를 포기하지 않은 서준미 검사도 정의의 단면을 시사한다. 끝으로 무너진 정의에서 눈을 돌린 채 살다가 자신이 만든 결과를 직면하고 책임을 지려 나선 이태경 변호사 역시 똑같은 것을, 저스티스를 그리고 있다.
정의, 그것이란 지키기 어렵고, 손에 닿지 않으며, 오늘과 같은 세상에서는 꺾이기 쉬운 무엇이 되었다. 그럼에도 때때로 불의에 굽히고, 애써 정의를 외면한 채 살더라도, 결국에는 저스티스를 위해, 그 누구라도 나설 수 있기에, 정의가 무너지는 오늘에도 저스티스는 영원할 것이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3권 분량이나 되는 이 기나긴 이야기가 탄생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인 총평을 적자면 자극적인 소재 속에 의미를 담으려 노력한 작가의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TV 드라마로도 나왔다고 하는데, 솔직히 영상보다 책이 더 재미있을 것 같은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