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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답하는 염불위빠싸나
이 질의 응답은 염불위빠싸나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쌍윳따니까야》 11권과 《능엄경》의 ‘이근원통’을 중심으로,
아짠 차 스님과 그의 스승인 아짠 문, 도반인 아짠 마하 부와 스님의
법문들과 ‘티벳염불관법’ 등에 근거하여(필자의 견해 첨부) 엮은 것이다.
[문] 왜 염불위빠싸나수행을 해야 합니까?
순수위빠싸나수행이 정통계보가 아닙니까?
[답] 그 선택은 자신의 성향과 근기에 달렸다고 봅니다.
붓다께서도 순수위빠싸나가 맞지 않으면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중지부경》‘행도장’에서도 위빠싸나수행을 먼저 하고
사마타수행을 하는 경우, 사마타수행을 먼저 하고
위빠싸나수행을 하는 경우, 사마타와 위빠싸나를 연결해서
수행하는 경우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집중력이 뛰어난 사람은 순수위빠싸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정신통일법인 사마타수행을 겸해서 수행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정견(正見)과 집중력이 갖추어져 있으면,
6개월 내지 1년만 수련해도 10년, 20년간 수행한 사람들의
평균 수준을 뛰어넘을 수 있음을 종종 보아 왔습니다.
사마타수행에는 40가지 주제가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염불이나 호흡수련이 잘 맞는 것 같습니다.
태국에서도 붓다의 공덕을 기리는 ‘붓다누삿띠’수행과
위빠싸나를 연결한 ‘염불위빠싸나’수행이 가장 선호되고 있는
수행법들 중 하나입니다.
‘붓도’ 염송 시에는 붓도의 4가지 뜻인 깨달음을 이룬 붓다,
벽지불이나 아라한, 내 안의 탐ㆍ진ㆍ치가 없는 청정한 마음,
반야지혜인 ‘아는 마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행해야 합니다.
[문] 염송은 방편이지 않습니까?
[답] 예, 물론 방편입니다. 수영에 능숙한 사람은 홀로 강을 헤엄쳐
건널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보트가 필요합니다.
헤엄쳐 건너는 사람은 위빠싸나만으로 수행하는 사람에,
보트로 건너는 사람은 사마타와 위빠싸나를 병행하여 수행하는 사람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 보트가 사마타수행인 셈입니다.
그러나 일단 육지에 올라서면 보트도 수영능력도 필요 없게 됩니다.
법(Dhamma)조차도 벗어나야 할 대상이니까요.
[문] ‘붓도’ 염송 시 무엇을 대상으로 삼는지,
‘붓도’ 염송으로 사념처(四念處)수행이 가능한지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붓도’ 대신 다른 명호를 염송해도 되는지요?
[답] ‘붓도’ 염송을 통해서도 몸, 감각, 마음, 법을 여실히 보는
사념처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붓도’ 염송법은 다음의 5가지 방법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첫째, ‘붓도’를 소리 내어 염송하여 귀로 들으면서 합니다.
둘째, ‘붓도’를 소리 내어 염송하든, 마음속으로 염송하든 간에
‘붓도’를 일으키는 마음을 봅니다.
셋째, ‘붓도’를 염송하면서 호흡을 관찰하거나 경행을 합니다. ─
호흡에서 일어나는 사념처나 경행 시의 발의 감촉, 지 ‧ 수 ‧ 화 ‧ 풍의 변화와
이와 연계된 느낌(受), 인식(想), 반응(行), 식(識)을 봅니다.
넷째, 위의 세 가지 방법 중 어느 것을 택하든,
감정과 마음상태의 변화를 관합니다.
관찰이 더 예리해지면 무의식(bhavaṅga)까지 관찰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붓도’를 염송하면서 여래십호(붓다의 10가지 칭호)를
하나하나 떠올리며 그 공덕을 찬양합니다.
이때 반야인 ‘아는 마음’으로 여래십호를 떠올리는 마음을
관찰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붓도’ 대신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관세음보살’,
‘옴마니반메훔’ 등을 염송해도 무방합니다.
이 같은 방법들 중 ‘붓도’만 염송하는 경우는 사마타수행이 되며,
아나빠나삿띠 등의 사념처와 연계하여 무상 ‧ 고 ‧ 무아를
관찰하는 경우는 염불위빠싸나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문] ‘붓도’ 염송수행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시오.
[답] 첫째, ‘붓도’를 소리 내어 염송하여 귀로 듣는 경우는,
티벳 염불관법(졸저,《보면 사라진다》 참조)처럼 수행해도 됩니다.
즉, 수행이 깊어져서 ‘붓도’소리가 이근(耳根)과 부딪치면서
소리를 듣는 이식(耳識)이 일어나고 그에 따른 감각[受]ㆍ
소리의 크기ㆍ높낮이ㆍ길이 등의 특징과 그 감각을 인식하는 상(想),
그에 따른 마음의 반응[行]이 일어나게 되면 이를 관찰합니다.
소리와 소리 사이에 무엇이 일어나는지도 관찰합니다.
둘째, 마음속으로 일으키면서 수행할 때는, 끊임없이 일으키는
‘의도’와 그 마음상태를 주시(sati)하는 노력(viriya)을 이어 감으로써,
그에 따르는 칠각지(七覺支)에서 무상ㆍ고ㆍ무아를 관찰합니다.
물론 첫 번째 방법처럼 오온 관찰도 가능합니다.
이때는 ‘붓도’가 법(法)이 되고 이를 아는 주체가 의(意)가 되며,
법과 의와 동시에 식(識)이 일어나 그에 따르는 수ㆍ상ㆍ행의
관찰이 가능해집니다.
셋째, ‘붓도’를 염송하면서 호흡이나 경행, 여타 다른 일을 할 경우는
염송과 함께 이제까지 자신이 수행해 온 방법대로
사념처 관찰을 해 나가면 됩니다.
또는 ‘붓도’를 ‘아는 마음’으로 대체해서 호흡이나 경행을 관찰해도 됩니다.
이 수행이 깊어지면 붓도가 ‘아는 마음’이 됩니다.
넷째, 위의 세 가지 중 어떤 수행을 하든, 가슴 부위에 마음을 두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감정과 마음상태의 변화, 그 원인 등을 관찰합니다.
다섯째, 여래십호를 떠올려 하나하나 새기면서 내 마음도 본래는
여래와 같으며 미워하는 타인의 마음도 그러함을 알아차립니다.
이러한 여래십호를 떠올리는 마음상태도 알아차립니다.
여래십호를 10분 정도 마음에 새긴 후에는 붓도를 수행대상으로 삼아
주시하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뒤쪽의 ‘수행체험기’ 참조)
위의 다섯 가지 수행법 중 어느 것을 행하더라도 저절로 순일하게
망상 없이 잘되면, ‘붓도’ 염송 없이 단지 관찰만 해도 됩니다.
특히 위빠싸나 16단계 중 네 번째, ‘생멸에 관한 지혜’의 단계를
넘어서게 되면 더 이상 염송이 필요치 않게 됩니다.
이들 다섯 가지의 방법 중 어느 것을 택해 수행해도 무방하며,
골고루 바꾸어 가면서 수련해도 됩니다.
[문] ‘붓도’ 염송 시, 망상이 일어나면 어떻게 물리쳐야 합니까?
[답] ① 망상이 일어나는 것을 즉각 알아차린 후,
망상에 신경 쓰지 말고 ‘붓도’를 더 빠르게, 더 크게 소리 내어
염송하든가, 마음속으로 염송합니다.
② 그래도 망상이 따라붙으면 수행대상을 (앞에서 설명한 5가지 중에서 선택하여)
다른 것으로 바꿉니다.
③ 망상이 일어나는 원인을 살펴봅니다. ‘붓도’관찰을 놓쳤거나,
오온을 ‘나’로 착각하는 데서 기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온 중 어느 것을 ‘나’로 인식하는지, 12연기를 통해 순관합니다.
혹은 붓도와 붓도 사이에서 그 의도와 의도 이전을 의관하면서
붓도를 염송합니다. 이 원인이 잡히면 망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④ 망상의 본성을 살펴봅니다. 망상은 객관과 주관으로 조건 지어져 있습니다.
즉, 대상이 있는 생각은 대상이 있는 결과를 낳으며, 무상ㆍ고ㆍ무아의 다른 양상입니다.
‘붓도’와 관찰 외에는 모두가 망상입니다. ‘붓도’를 염송하면서 망상을 주객으로
분리하여 관찰하면 즉각 사라집니다.
⑤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과 ‘붓도’를 염송하는 마음을 동시에 관찰하여
어느 쪽이 강한지, 둘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그 다음에 주의를 ‘붓도’를 염송하는 마음 쪽으로 집중시킵니다.
⑥ 여래십호를 외우며 하나하나 그 뜻을 헤아려 보면서 자신의 마음도
붓다와 똑같다는 것을 마음속에 각인 시킵니다 ─
‘깨달은 중생이 붓다이고 깨닫지 못한 붓다가 중생이다.
고타마 싯달타도 깨닫기 전에는 나와 똑같은 속인이었다.
나 역시 깨치면 그 분처럼 붓다가 될 수 있다.’
대참회를 한 후 용맹심으로 마음속의 붓도를 더 깊이 예리하게
관하면서 염송합니다.
⑦ 그래도 망상이 사라지지 않으면, 입으로든 마음속으로든
최대한 큰소리로 ‘붓도’를 염송하며 머리의 불을 끄듯이 최선을 다합니다.
결국 노력이나 힘이 기법을 앞서게 마련입니다.
물론 둘 다 겸한다면 금상첨화이겠지요.
[문] ‘붓도’ 염송 시, 온 몸에 기(氣)가 돌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답] 사마타수행이든, 위빠싸나 수행이든 일념에 들면
기(氣)는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직 의식이 오염되지 않은) 갓 태어난 아이들은 기경팔맥이
저절로 원활하게 돌아가듯이 말입니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본수행을 이어 가거나, 기를 지 ‧ 수 ‧ 화 ‧ 풍과
수 ‧ 상 ‧ 행 ‧ 식으로 나누어 삼법인(三法印)으로 관찰하면
기(氣)는 빛으로 바뀌며, 이 빛을 무상ㆍ고ㆍ무아로 관찰하면
빛은 사라지고 무아삼매에 들게 됩니다.
이때 지혜가 잘 계발된 수행자는 빛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무아삼매에 들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관찰하는 것이 여의치 못하면, 기(氣)에 집착하거나
기(氣) 수행을 외도로 비판하게 됩니다.
똑같은 물도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제 팔정도와
12연기에 대한 확고부동한 정견입니다.
정견 없이는 어떤 수행법도 위험하지만, 일단 정견을 갖추게 되면
어떤 수행법을 택하든 무방합니다.
[문] ‘붓도’와 ‘아는 마음’의 상관관계는 어떠합니까?
[답] ‘붓도’ 염송수행이 깊어지면 ‘아는 마음’과 ‘붓도’가 하나가 됩니다.
그 관찰 대상에서 무상 ‧ 고 ‧ 무아를 예리하게 계속 봐 나가야 합니다.
금강경에서는 모든 상(相)이 상이 아님을 볼 때 여래를 본다고 했습니다.
대상과 아는 마음의 실체가 드러날 때 붓도의 실체도 드러납니다.
[문] 주시(sati)와 분명한 알아차림(sampajanna)과 지혜(pannā)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답] 경전에서는 주로 양자 사이의 관계 ─ 주시와 분명한 알아차림(《장부경》중
《대념처경》), 지혜와 관찰(《반야심경》),
주시와 지혜(《대념처경》중 7각지)를 다루고 있지만,
아짠 차 스님은 이 셋을 함께 활용합니다.
이때의 주시는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분명한 알아차림은 그 대상을 면밀히 관찰하여
무상 ‧ 고 ‧ 무아와 인과의 흐름을 보는 것이고,
지혜는 무상 ‧ 고 ‧ 무아에서 벗어나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주시의 깊이와 분명한 알아차림의 상태까지 볼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총 쏘기에 빗대어 본다면, 목표물(망상)을
총으로 겨냥하는 것을 주시, 정조준하는 것을 분명한 알아차림,
발사해서 맞히는 것을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사진촬영에서는 대상을 포착하는 것은 주시, 대상에 정확히
초점을 맞추는 것은 분명한 알아차림,
대상을 있는 그대로 찍는 것은 지혜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덕목들을 잘 활용하면 수행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붓도’ 수행에서는 ‘붓도’ 자체가 주시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분명한 알아차림이나 ‘지혜’가 ‘붓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뒤쪽의 ‘수행체험기’참조)
[문] ‘아는 마음’을 다시 아는 것은 어떤 경우입니까?
[답] ‘아는 마음’은 식(識, vinannā), 인식(想, sannā),
지혜(慧, pannā)에 공통적으로 존재합니다.
‘식’은 분별하여 아는 것이고, ‘인식’은 마음에 떠오르는 상(想)이나
그 상의 특징 등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지혜’는 무상ㆍ고ㆍ무아를 알아차려 망상을 제거하여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폐를 볼 때, 지폐인 줄 알아차리는 것은 ‘인식(想)’,
지폐가 얼마짜리인지 아는 것은 ‘식(識)’,
이 지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아는 것은 ‘지혜(慧)’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수행에서는 ‘상’이나 ‘식’의 아는 마음을 주시(sati)로 봅니다.
물론 이때의 ‘주시’ 또한 ‘아는 마음’입니다.
(초보자들은 이와 같이 ‘식’을 주시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식도 생멸하고 주시도 생멸합니다. 생멸하는 식이나 상을 끊임없이 주시함으로써
주시(아는 마음)를 거듭 일으켜 나가야 합니다.
하나의 주시가 계속해서 또 다른 주시를 일으키는 식으로
반복해 나가다 보면 삼매가 계발되어, 주시(아는 마음)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거듭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수행이 본격적으로 향상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수행이 좀더 깊어지면, 주시의 대상인 아는 마음(식이나 상)을
주시하면서 분명한 알아차림으로 관찰하는 것을
반야지혜(배후에서 지켜보고 있는)로 알게 됩니다.
‘붓도’ 염송 시에는 소리를 대상으로 삼아 소리에서 일어난
이식(耳識)을 주시로 알아차리거나, 붓도를 생각의 대상인 법(法)으로 삼아
그 의식을 알아차려도 됩니다. 이 모든 과정들을 (배후에서 지켜보고 있는)
반야지혜로 알게 됩니다.
남방불교에서는 이 반야지혜도 생멸한다고 보지만,
북방불교에서는 반야지혜를 불생불멸하는 것으로 봅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해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문제야말로 오늘날의 불교도가 풀어나가야 할
핵심과제 중의 하나라 할 것입니다.
주시(sati)로써 식(아는 마음)을 관찰하는 것을 지혜로 알아차리는 것이
7각지(七覺支)중의 염각지(念覺支)이며, 이 단계에서 더 나아가면
‘아는 마음’으로 12연기를 관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지점에 이르러야 비로소 ‘위빠싸나에 눈뜨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문] ‘붓도’ 염송이나 좌선을 할 때, 무릎이나 몸에 통증을 느끼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 ① 통증을 무시하고 최대한 인내하면서 ‘염불위빠싸나’를 이어나갑니다.
② 통증을 관찰합니다. 가장 심한 통증을 포착하여 그 변화를 관찰하면서 ‘붓도’를 염송합니다.
③ 느낌과 원인인 촉(觸), 촉의 원인인 지 ‧ 수 ‧ 화 ‧ 풍의 부딪침을 함께 관찰하면서
‘붓도’를 염송합니다. ‘붓도’ 염송이 깊어지면 통증은 사라지고 ‘붓도’만 이어집니다.
이때는 붓도에서 12연기를 관찰합니다.
④ 통증[고통]을 피하려 하는 마음상태를 관찰합니다.
그래도 통증이 사라지지 않으면 마음상태와 붓도를 일으키는 마음을 보면서
붓도 쪽으로만 집중합니다.
⑤ ‘붓도’를 큰소리로 염송하거나 나직하게 읊조리면서
그 소리의 진동이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관찰합니다.
⑥ 이제까지의 방법들로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으면, 자세를 바꿉니다 ─
‘붓도’를 염송하면서 자세를 바꾸고자 하는 ‘의도’를 알아차리며 자세를 바꿉니다.
[문] ‘붓도’ 염송을 통해서도 ‘안팎’을 동시에 관찰할 수 있습니까?
[답] ‘붓도’ 염송을 통해 내 마음속의 붓도를 보게 되면 타인의 마음속의 붓도도 보게 됩니다.
‘안’은 6근(六根: 눈 ‧ 귀 ‧ 코 ‧ 입 ‧몸 ‧ 생각의 주체)을,
‘밖’은 6경(六境: 모양 ‧ 소리 ‧ 냄새 ‧ 맛 ‧ 감촉 ‧ 생각의 대상)을 이릅니다.
6근과 6경이 만나서 6식(六識: 眼識 ‧ 耳識 ‧ 卑識 ‧ 舌識 ‧ 身識 ‧ 意識)이
일어남으로써 안팎이 동시에 관찰됩니다.
‘붓도’를 염송하는 소리가 이근(耳根)에 부딪혀 이식(耳識)이 일어나고,
‘붓도’를 일으키는 마음에 의해 ‘붓도’가 법(法)이 되며,
이를 ‘아는 마음’이 의(意)가 되는데, 이때의 식이 의식(意識)이 됩니다.
이러한 식(識)들을 ‘붓도’로 알아차릴 때 ‘안팎’이 동시에 관찰됩니다.
관찰이 깊어지면 6식이 일어나기 전의 무의식 상태인 ‘바방가(bhavaṅga)’도 포착됩니다.
즉 12연기의 관찰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안팎’을 무상 ‧ 고 ‧ 무아로 보아
탐 ‧ 진 ‧ 치가 사라지게 되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이 가능해져
자비행 속에서 바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지혜와 자비가 완성됩니다.
이것이 바로 붓도의 삶입니다. 본래 공(空)한 붓도의 지혜와 자비로,
하나 속의 전체, 전체 속의 하나(一中一体多中一)가 구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주만유를 서로 연(緣)해서 일어나는 상즉상관(相卽相關)으로 보는 ‘
법계연기’에서 이르는 ‘안팎’입니다.
[문] 관념적인 염불과 실상염불(實相念佛)은 어떻게 구분합니까?
[답] 관념적인 염불은 오온에 바탕을 둔 빤냐따(pannātta)로,
세속적 속성을 지닌 염불이며, 실상염불은 반야지혜에 바탕을 둔 빠라마따(paramattha)로
자신과 일체제법의 진실한 자성(自性)인 법신을 관하는 참다운 염불입니다.
남방 《아비담마》에서는 빠라마따를 ①마음(識), ②수(受)ㆍ상(想)ㆍ행(行) 등의
마음의 작용(心所), ③물질(色), ④ 열반으로 보며, 북방 《아비담마》에서는
반야와 열반을 빠라마따로, 오온과 12연기는 빤냐따로 봅니다.
범부는 빤냐따에 의거해 무지와 탐욕 속에 살아가고,
수행자는 빤냐따인 오온과 12연기의 흐름을 ‘아는 마음’인 붓도를 통해
무상ㆍ고ㆍ무아로 알아차림으로써 탐ㆍ진ㆍ치를 제거하여 자비행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일례로, 염불 시에 염불소리나 서원, 염불대상에만 집중하면 관념적 염불,
소리든 서원이든 염불형상이든 무상 ‧ 고 ‧ 무아를 알아차리면서 행하면 실상염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상염불에서는 서원도 집착함이 없이 이루어져 자비로 환원될 수 있습니다.
올바르게 관찰하면서 염불하면 안팎을 동시에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붓도를 염송하면서 걸을 때도, 범부들은 과거 생각이나 미래의 계획 등의
망상에 휩쓸리거나 이쪽저쪽을 두리번거리면서 공염불만 남발하게 됩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걸을 때도 붓도가 일어나는 흐름을 관찰하든가 아니면
붓도 자체가 알아차림이 되어, 걸을 때의 발의 감촉, 몸을 움직일 때의
지 ‧ 수 ‧ 화 ‧ 풍의 변화, 그때 일어나는 감정과 마음상태의 생멸의 흐름 등을
있는 그대로 붓도의 아는 마음으로 보게 됨으로써, 욕망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신과 타인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창조적인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자신의 본래 마음은 (깨달음의 완성인) 붓도의 마음상태와 같고
타인의 본래 마음도 마찬가지임을 계속해서 관합니다.
따라서 자만심을 드러내며 남을 비판하는 얘기는 저절로 피하게 되며,
대화 중의 자신의 마음상태나 의도가 고(苦)를 일으키는 쪽으로 흐르고 있는지,
아니면 나 자신과 상대방을 평화로움 속으로 이끄는 쪽으로 흐르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얘기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실질적인
‘살아 있는 염불’로 빠라마따의 한 전형이라 할 것입니다.
[문] 어리석음과 욕망으로 뒤덮인 범부가 어떻게 붓도의 고향인 열반으로 가는
반야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까?
[답] 지금 앉아 있는 엉덩이의 촉감을 관찰해 보십시오.
바닥과 엉덩이가 닿아 있는 부분을 주시해보면, 감촉(受)이 있고,
그 감촉이 좋은지 싫은지를 인식하는 상(想)과 그에 대한 반응(行)이 있고,
판단ㆍ분별인 식(識)이 따릅니다.
그리고 이들(受 ‧ 想 ‧ 行 ‧ 識)을 주시(sati)하여 그 변화를 관찰하는 반야가 있습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도 생각의 대상(法)과 그 주체(意),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의식(意識)과 그에 따른 느낌, 인식, 반응, 판단, 분별이 따릅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객관적으로 주시하여 그 구성요소들의 변화[無常]속에서
괴로움[苦]과 실체가 없는 무아(無我)를 알아차리는 지혜가 있습니다.
수행 초기에는 식의 흐름과 지혜의 흐름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명칭을 붙이면서 알아차리십시오.
‘촉감, 촉감…’ 혹은 ‘생각, 생각…’, ‘붓도, 붓도…’ 하면서 일단 대상을 객관화하면,
의식의 흐름과 아는 마음인 지혜가 쉽게 구분될 것입니다. 이 지혜는 붓도와 일체를 이룹니다.
누구나 조금만 노력하면 이와 같이 구분해서 관찰할 수 있습니다.
수행 초기부터 반야지혜의 흐름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즉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위빠싸나 수행자들은 수행초기부터
오온의 흐름과 반야지혜의 흐름을 구분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위빠싸나수행의 위대한 특징입니다.
[문] 수행법을 자주 바꾸어도 됩니까?
[답] 우선 왜 수행을 해야 하는지, 올바른 깨달음에 대한 정견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어떤 수행법을 택했다면 자격을 갖춘 지도자 밑에서
적어도 3년 이상은 최선을 다해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도 별다른 진전이 없다면 자신에게 맞는 다른 수행법을 찾아보도록 하십시오.
오랜 세월 동안 오직 그 수행만 해 왔다고 해서, 어떤 큰스님의 수행법이라고 해서
무조건 맹신해서는 안 됩니다. 붓다께서는 위빠싸나수행이 잘 안되면
그에 앞서 사마타수행부터 하라고 이르셨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정견을 갖추고 사념처와 삼법인을 근간으로 삼아
탐ㆍ진ㆍ치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어떤 수행법이든 일단 시도해 보십시오.
가능하면 경륜 있는 지도자와 상의해서 수행전통이 계승되어 온 수행법으로 바꾸는 게 좋습니다.
수행전통이 이어져 오는 수행법들은 그 나름대로의 특징과 법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목숨까지 걸 수 있는 정진력입니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 내 안에 고요, 내 안의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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