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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안씨 경술보(庚戌譜,1790)의 변무(辨誣)와 발문(跋文) - 안정복(安鼎福)
광주안씨 경술보(庚戌譜, 1790년)에 기록된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변무(辨誣)」에서 지금 세상에 전하는 말이 우리나라 안씨가 중국 이씨에서 기원한다는 기록을 앞에 두고 뒤이어 맹랑하고 근거가 없으므로 믿게 될까 두려워 이 조항을 뽑아 변무(辨誣)를 지어 바로 잡는다고 했다.
변무(辨誣) : 사리(事理)를 따져서 억울(抑鬱)함에 대(對)하여 변명(辨明)함.
농서라는 말만 빠졌지, 1790년 안정복이 쓴 변무(辨誣)를 보면 중국의 이씨에서 우리나라 안씨 성이 기원했다는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중국이씨에서 순흥 죽산 광주안씨 3문중이 유래했다는 기록(또는 말)이 1790년 이 땅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물론 안정복은 이 같은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순암은 광주안씨 시조 안방걸로 부터 12대 기록도 또한 변무한 것임에도 광주안씨 문중에서는 안씨동원에 대해서는 부정하면서도, 광주안씨 12대 결세 기록은 받아들여 세대를 합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순암 안정복이 의도한 변무를 받드는 올바른 태도는 아닐 듯 하다.
당시 안정복이 안씨 3파... 즉, 죽산, 광주, 순흥...가 중국에서 온 이씨(李氏) 성에서 유래했다는 기록을 봤기 때문에 이와 같은 변무의 글을 기록으로 남긴 것 아니겠는가?
安氏三派 謂自中國來姓李 當新羅景文王時 有兄弟三人曰 枝春 葉春 花春 平倭亂有安國之功 故賜姓安氏 三人改名 邦俊 邦傑 邦俠 分封竹山廣州 廣州傳十餘世 又分順興 今刊譜首板別錄國信以下十二代卽是也
안씨(安氏) 3파가 중국에서 온 이씨(李氏) 성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신라 경문왕 때에 지춘(枝春), 엽춘(葉春), 화춘(花春)이라는 형제 3인이 왜란을 평정하여 나라를 평안케한 공으로 안씨(安氏)를 사성(賜姓)받고, 방준(邦俊), 방걸(邦傑), 방협(邦俠)이라 개명(改名)하여 죽산(竹山)과 광주(廣州)로 분봉(分封)하였다. 광주(廣州)는 10여 세를 지나 다시 순흥(順興)과 나누어지니 지금 간행하는 족보 별록의 국신(國信) 이하 12대가 그것이다.
변무(辨誣)
今世傳 安氏三派 謂自中國來姓李 當新羅景文王時 有兄弟三人曰 枝春 葉春 花春 平倭亂有安國之功 故賜姓安氏 三人改名 邦俊 邦傑 邦俠 分封竹山廣州 廣州傳十餘世 又分順興 今刊譜首板別錄國信以下十二代卽是也 此甚孟浪無據 且其官名 與麗誌年代不合 其僞書無疑矣 且思簡公序文 有首記中國安氏之所由本末 記東方安氏之異其貫者云 則豈有姓李賜姓之理乎 向來 押海丁氏 宜寧南氏 皆爲僞譜 此亦類是 恐有後人傳以爲信 故拔此條 作辨誣以正之.
按始祖以下缺世 無文獻 可徵 而其有缺世 則信矣 以侍御史公 爲一世 (번역문) 지금 세상에 전하기를 “안씨(安氏) 3파가 중국에서 온 이씨(李氏) 성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신라 경문왕 때에 지춘(枝春), 엽춘(葉春), 화춘(花春)이라는 형제 3인이 왜란을 평정하여 나라를 평안케한 공으로 안씨(安氏)를 사성(賜姓)받고, 방준(邦俊), 방걸(邦傑), 방협(邦俠)이라 개명(改名)하여 죽산(竹山)과 광주(廣州)로 분봉(分封)하였다. 광주(廣州)는 10여 세를 지나 다시 순흥(順興)과 나누어지니 지금 간행하는 족보 별록의 국신(國信) 이하 12대가 그것이다.” 이는 심히 맹랑하고 근거가 없다. 또 그 관직명이 여지(麗誌, 고려사 등을 말함)와 연대(年代)가 맞지 않아 그것이 위서(僞書)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사간공(思簡公 安省, 1344~1421) 족보 서문의 첫머리에 중국 안씨(中國安氏)의 유래 본말을 적고, 이어 동방 안씨(東方安氏)의 관향이 다른 자 등을 기록하고 있으므로 어떻게 이씨(李氏)가 사성 받았을 리가 있겠는가? 저번에(向來) 압해 정씨(押海丁氏)와 의령 남씨(宜寧南氏) 모두 위보(僞譜)를 만들었는데, 이것도 그런 류이다. 후인들에게 전해져 믿게 될까 두려운 고로 이 조항을 뽑아(拔此條) 변무(辨誣)를 지어 바로 잡는다.
살피건데 시조이하의 결세는 징빙(徵憑, 증거로 보임)할 문헌은 없어도 결세가 있는 것은 사실이므로 이제 시어사공(侍御史公, 安綏)으로 일세(一世)를 삼는다.
1900년 간행된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선생의『순암집(順菴集)』18권에 순암(順菴)이 쓴 광주안씨(廣州安氏) 경술보(庚戌譜, 1790년)의 발문(跋文)이 남아있다.
출처 : 동경대학교 - 광주안씨 병인보(丙寅譜, 1866)에 실린 내용임
族譜跋 庚戌(1790) 230_177b
吾安受姓廣州。自麗初已然。而無大譜。在古尙矣無徵。國初。思簡公先祖爲譜三卷。譜佚不傳。幸有序文存焉。凡例䂓模。槩可知矣。自後宗人各自爲派。以相傳繼而已。鼎福曾祖別檢,同知兩府君。皆有合譜之意。書未及成。王考兩棄齋府君及我先君繼述先志。收牒于京外宗族。亦未卒業。後來英廟戊午。嶺中宗丈義亨氏發論。遂成全譜。今刊本是也。觀於諸序文。可知矣。若無戊午本。吾安不過爲庶姓而止耳。豈不大幸哉。當時修譜時。余亦以年少後生。參論於執役之列。此譜之行。今踰五十年矣。不惟子孫繁衍。其中有未及考信而多有訛謬者。安佐郞景漸。聦明博洽之人也。辛丑年間。貽書于余曰。吾家全譜之流行。果是前古未行之事。而間有商量者。於京於鄕。吾二人不更修整。則似無後來之取信。何不及今爲之。余乃不辭而當之。只欲出草本一二件。分置兩家矣。不幸佐郞君已逝。余以衰癃病廢。又無相議之人。將欲置之。不意湖西宗人尙成銳意唱論。發文於諸宗。各收名下錢。以爲必成之地。但貧宗力弱。工價太重。多有不稱意者。是可恨也。然今此譜之成。出於至公無私之意。諸宗若能體此意而不忘一氣骨肉之義。雖庶派。亦能推此意而無復䟽外自別之心。則程子所謂收宗族厚風俗。亶在是矣。幸各勉之哉。 (번역문) 족보발(族譜跋) 경술년(1790)
우리 안씨가 광주(廣州)에서 성을 받은 것은 고려 초부터 이미 그러하였는데, 대보(大譜)가 없어서 상고에 대해서는 징험할 길이 없은 지 이미 오래이고, 국초(國初)에 사간공(思簡公 안성(安省,1344~1421)) 선조가 족보 3권을 만들었는데 그 족보는 없어지고 전해지지 않지만 다행히 서문이 남아 있어서 범례와 규모를 개괄적이나마 알 수가 있다. 그 뒤로는 종인(宗人)들이 각자 파별로 만들어 전하고 이어올 따름이다.
나의 증조 별검(別檢, 안신행(安信行))·동지(同知, 안건행(安健行)) 두 부군(府君)이 모두 합보(合譜)할 뜻을 두었으나 책이 미처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조부 양기재 부군(兩棄齋府君, 안서우(安瑞羽,1664∼1735))과 우리 선군(先君, 안극(安極, 1696~1754))이 선지(先志)를 계술하여 경외의 제족들에게서 보첩을 수합하였으나 역시 일을 끝마치지 못하였다. 그 후에 영묘(英廟) 무오년(1738)에 영남에 사는 종장(宗丈) 의형(義亨)씨가 반론을 하여 드디어 전보(全譜)를 이룩하였는데, 이번에 간행한 본이 바로 이것이니 여러 서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무오본(戊午本)이 없었다면 우리 안씨는 서성(庶姓)에 불과하고 말았을 것이니,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당시 수보(修譜)를 할 때에 나도 나이 어린 후생으로서 일하는 대열에 끼었는데, 이 족보가 간행된 지 이미 50년이 넘었다. 그간에 자손이 더 번창했을 뿐만 아니라 그 중에는 미처 상고하지 못하여 잘못된 대목도 있다.
좌랑(佐郞) 안경점(安景漸, 1722~1789)은 총명하고 박학한 사람이다. 신축(1781) 연간에 나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우리 집안 전보(全譜)가 유행된 것은 실로 전고에 못했던 일이지만 중간에 다시 살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서울과 시골에서 우리 두 사람이 다시 수정을 하지 않는다면 후손들이 취신(取信)할 길이 없게 될 것이니, 어찌 지금 서둘러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이에 사양하지 않고 일을 담당했는데, 단지 초본 1, 2본만 만들어내어 두 집에 나누어 보관해 둘 작정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좌랑군이 이미 죽고 나는 병폐(病廢)하여 다시는 상의할 사람이 없으므로 그대로 내버려두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호서(湖西)의 종인(宗人) 안상성(安尙成)이 의욕을 갖고 창론(唱論)하여 제종에게 통문을 해서 각기 명하전(名下錢)을 거두어 반드시 성취할 계획을 하였다. 다만 종중은 가난하고 힘이 약하고 공가(工價)는 너무나도 비싸서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많으니 이것이 한스럽다. 그러나 이 족보가 이루어진 것은 지공무사(至公無私)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여러 종족들이 만약 이 뜻을 헤아려서 한 기운을 받은 골육지친의 뜻을 잊지 않는다면 비록 서파(庶派)일지라도 이 뜻을 미루어 스스로 소외감을 느끼고 자별(自別)하는 마음을 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자(程子)가 말한 “종족을 거두고 풍속을 후하게 한다.”는 것이 실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바라건대 각기 힘쓸지어다.
안경점(安景漸, 1722∼1789) 조선 후기 문신·유학자. 자는 정진(正進)이고, 호는 냉와(冷窩)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동만(東巒) 안상한(安翔漢)의 현손이며, 아버지는 안신형(安信亨)이다. 1771년(영조 47)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였으며,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문인으로 관직을 버리고, 관동(關東)의 산수를 유람하고 돌아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과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은거한 서실을 '취변재(聚辯齋)'라 칭하고 강학(講學)에 힘을 썼으며, 경예(經禮)의 학식이 높아 세상에 알려졌다. 문집으로 《냉와집(冷窩集)》이 전하는데, 서문은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짓고 갈명(碣銘)은 진성(眞城) 이가원(李家源)이 지었다. 《냉와집》에는 이상정(李象靖)·안정복(安鼎福)과 문답한 80여 조의 예설(禮說)과 1774년(영조 50) 7월 21일에 이진택(李鎭宅)과 함께 서울을 출발해 38일 간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며 쓴 《유금강산록(遊金剛山錄)》 등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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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원장님은 꼬박 날밤을 새시는 것 같아요! 정열이 대단하십니다. 애족하시는 원장님의 마음이 전해옵니다. 감사합니다. 많은걸 배우고 생각하도록 하십니다.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