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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자료는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및 신순철(원광대 사학과 교수), 이진영(행정자치부 정부기록보존소 연구사)님의 도움으로,『실록 동학농민혁명사 (신순철, 이진영, 서경문화사)』의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Ⅰ. 동학농민혁명의 의의와 동학사상
1. 동학농민혁명의
- 동학농민혁명, 그 100년에 흐른 정신-
동학농민혁명은 동아시아의 질서를 재편한 '청일전쟁',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개혁인 '갑오개혁'이라는 대사건을 불러왔다는 것만으로도 우선 주목받을 사건이다. 그러나 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는 그런 외형에 있는 게 아니라, 농민혁명의 내용 자체에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그후 지금까지 100년에 면면히 흐른 정신은 무엇인가? 통치질서가 파탄에 처하고 일본 등 열강의 침탈이 자행되던 19세기말, 조선은 크게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안으로는 낡은 신분질서를 뜯어고치고 모든 민족 구성원이 평등의 원칙 아래 자유를 누리며 역사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 가는 개혁, 즉 근대화(近代化)가 필요했다. 밖으로는 이런 내적인 역사발전을 해치는 외부로부터의 힘에 대응하는 것, 즉 자주화(自主化)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당시 조선은 침략을 배격하는 자주적 입장에서 사회적 개혁을 이룩해야 했다. 이 시대적 과제를 실현하지 못하는 한, 조선은 어떤 형태로든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과제에 부응하기 위한 위정자들의 고민과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양반지배층의 위정척사(爲政斥邪 :조선 말기에 정학인 주자학을 지키고 사도를 물리치자는 유교의 벽이단 이념) 운동과 개화지식인들의 개화 운동이 그런 맥락의 노력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운동은 모두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양반층은 위정척사운동을 통해 자주권을 수호하고자 했지만 사회개혁은 반대했다. 개화세력은 개화운동을 통해 근대화를 실현하고자 했지만, 외세의 본질을 간과하고 침략세력과 결탁했다. 이런 한계 등으로 결국 두 운동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회적 모순과 외세의 침탈로 인한 폐해는 더욱 심각해졌고, 그 최대 피해자인 농민들이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나선 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이다. 그런 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실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시의 적절한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새 세상을 향한 농민 대중의 일대 항쟁인 동학농민혁명은 그렇게 시작되어 1894년 한 해 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되다가 30~40만 명의 희생자를 내며 끝났다. 그런데 이 혁명의 전개과정은 우연히도 우리의 한 해 농사와 꼭 닮았다. 농민혁명의 씨앗이 뿌려진 동학공인운동 기간은 해빙에, 고부농민봉기는 봄의 파종에, 3월 봉기는 여름의 경작에, 집강소 설치 및 재봉기 단행은 가을의 결실에, 그리고 9월 재봉기의 좌절은 농부가 떠난 겨울의 황량한, 그러나 새로운 농사를 기다리며 힘을 비축하는 들판에 견주어 봄직하다. 농민혁명 과정에서 농민군은 전근대적 모순과 부패의 척결 즉 근대적 사회개혁을 요구하고 실행해 갔다. 농민군은 사회적으로는 신분타파운동을 벌여 양반질서를 혁파하고 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다. 경제적으로는 조세 수취제도의 개선 등을 통해 영세한 농민과 상인, 수공업자 등 직접생산자들의 자립과 발전을 꿈꾸었다. 정치적으로는 왕정(王政)체제의 개선을 희망했다. 나아가 농민군은 일제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며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했다. 한마디로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조선이 안고 있던 절체절명의 과제, '사회개혁과 외세침탈 배격=자주 근대화(반봉건 반외세)'를 이루려 한 농민들의 일대 항쟁이었으며, 우리 근대사의 성패를 가르는 사건이었다. 국가와 민족의 뿌리인 농민들의 대항쟁은 불행하게도 일제의 무력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사건을 흔히 실패한 혁명이라 말한다. 그러나 우리 근대사의 큰 맥락에서 보았을 때, 이 사건은 광무년간의 사회개혁 및 항일운동․의병전쟁․3.1만세운동․상해임시정부․광복군 활동 등 농민혁명 이후에 전개되는 숱한 민족운동의 조직적․이념적 수원지였다. 18세에 동학 접주가 되어 이듬해 황해도 농민군의 선봉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이후 일본인 밀정 살해, 신민회 및 상해 임시정부 활동, 광복군 조직 등 민족지도자의 길을 걸은 백범 김구의 생애가 이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은 현대에 전개된 여러 민주화 운동, 즉 4.19 의거․5.18 광주민주화항쟁 등의 정신적 본령을 이룬다. 그런 점에서 농민혁명은 끝내 실패로 마무리된 사건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 이 사건은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대한 대중적 요구가 제대로 수용되지 못할 때, 부패한 지배세력이나 노골적인 외세침략에 대한 대중적 비판과 저항이 미약할 때, 그 공동체가 어떤 처지로 전락하는지를 현재의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 주는 경험이자 역사로 남아 있다.
2. 동학사상
가. 동학(東學)
동학은 1860년(철종 11) 최제우(崔濟愚)에 의해 창도된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신흥 종교이다. 당시 조선은 정치적으로 세도정치와 과거제도의 문란과 서구 제국주의 열강(列强:여러 강한 나라)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고, 사회경제적으로는 가톨릭교를 위시한 서학(西學)이 번성하였으며, 수취제도의 문란과 지방수령의 가혹한 수탈로 민중들의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제우는 새로운 도(道)를 구하고자 하였다. 동학은 보국안민(輔國安民: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 의식과 시천주, 인내천의 사상과 교리를 두 가지 큰 산맥으로 한 반봉건적, 반침략적 성격이 짙은 민중 기반적 구원의 종교였다. 특히, 동학은 그 시대 우리 나라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여러 가지 모순을 과감히 개혁, 변혁시켜 지상의 복락과 인류 평화에 기여해야 한다는 민족관을 내세워 민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동학은 양반사회의 해체기에 농민대중의 종교가 되면서 반왕조적인 사회개혁운동 성격을 띠었고,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하였으며, 그 뒤 3.1운동에서 나타난 민족주의 역량을 키우는 등 한국 근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나. 창도와 조직
최제우는 구세제민(救世濟民: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고통받는 민중을 구제함)의 큰 뜻을 품고 양산군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과 내원암의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간의 기도를 끝내고, 다시 고향인 경주로 돌아와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도를 계속하던 중, 1860년 4월 '한울님'의 계시를 받게 되었고, '동학'이라는 대도(大道)를 깨닫게 되었다. 최제우가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는 동학의 교명(敎名)과 영부(靈符), 그리고 주문(呪文)이라 한다. 동학이란 곧 서학에 대응할 만한 것으로 동토(東土)인 한국의 종교를 의미하며, 그 사상의 기본은 종래의 풍수사상과 유(儒)․불(佛)․선(仙:道敎)의 교리를 토대로 하여,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의 사상에 두고 있다. 영부란 백지(白紙)에 한울님의 계시에 따라 그린 일종의 부적(符籍)으로, 궁을형(弓乙形)으로 되어 있다. 주문은 13자로 된 본주(本呪)와 8자로 된 강령주(降靈呪) 등이 있다. 한편, 동학은 신분․적서(嫡庶)제도 등에도 반기를 들어 이를 비판하였으므로, 그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교리는 당시 사회적 불안과 질병이 크게 유행하던 삼남지방에서 신속히 전파되었다. 포교를 시작한지 불과 3~4년 사이에 교세는 경상도․충청도․전라도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이에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마찬가지로 불온한 사상적 집단이며 민심을 현혹시키는 또 하나의 사교(邪敎:사회에 해로운 작용을 하는 그릇된 종교)라고 단정하고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863년에는 최제우를 비롯한 20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혹세무민(惑世誣民:세상 사람을 미혹하게 하여 속임)의 죄로 체포되어, 최제우는 이듬해 대구에서 사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동학을 포교한 후 교세가 확장되자 접주(接主)제도를 만들었는데, 이 접주제도는 각 지방에 포교소로서 접소(接所)를 두고 그 접소에 접주(接主)를 두었다. 접주에게는 그 지방 교인들의 관할과 강도(講道), 새로운 교인의 포교활동을 담당하게 하였고, 접주 위에는 도주(道主)를 두어 접주를 통솔하도톡 하였다. 한편, 최제우의 뒤를 이은 최시형(崔時亨)은 접주제도를 확대 개편하여, 교인들의 일단(一團)을 포(包)라하고 여기에 포주(包主)를 두었다. 포주 위에 접주․대접주, 그 위에 도주․대도주를 두었다. 중앙에는 법소(法所), 지방에는 도소(都所)를 두기도 하였는데, 접주의 자격은 포덕실적(布德實績)에 의한 정수제(定數制)로 하였다. 즉 105명 이상 포교한 사람을 접주, 500명 이상 포교한 사람을 대접주로 하였다. 대도주는 성(誠)․경(敬)․신(信)․법(法)의 4자를 이름하여 4명이 있었다.
다. 경 전
동학경전은 최제우가 직접 지은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가 있다. 동경대전은 최제우의 도에 대한 가르침이나 종교적 수행을 담은 경편 등과 많은 시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학의 요체와 천도를 밝힌 글이다. 동경대전의 내용은 포덕문, 논학문, 수덕문, 불연기연의 4편과 주문, 팔절 등 각종 시구들로 순한문본으로 되어 있으며, 용담유사는 가사체의 형식으로 동학의 교의를 보다 보편적으로 폭넓게 접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최제우의 가르침을 노래로 지은 것이다. 용담유사의 내용은 교훈가, 안심가 등의 8편과 부록으로 검결이 있으며 순 한글로 되어 있다.
라. 기본교리
① 한울님관
신에 대한 관념은 유신론적 입장과 범신론적 입장으로 구분할 수 있는 데 동학의 한울님관은 유신론적인 입장에서 보는 초월적(超越的)인 신, 범신론적 입장에서 보는 내재적(內在的)인 신이라는 관념을 반대 일치의 변증법적 논리로써 동시에 포용하고 있다. 즉 한울님은 창조주이면서도 만물 속에 계시면서 모든 일을 간섭하고 명령하시는 무형의 이치 기운이며, 대우주의 대정신, 대생명이 되는 것이다.
② 후천개벽관
최제우는 한글경전 '용담유사'에서 인류 역사를 크게 두 시대로 구분하여, 창도 후의 새 시대를 후천(後天)이라고 하고, 구시대를 선천(先天)이라고 하였다. 후천개벽은 선천운수(先天運數)가 지나고 후천운수(後天運數)가 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후천운수는 5만년이며, 공간적으로는 인간생활의 전면적 변혁이 시작될 때라 한다. 선천시대의 종교란 천계(天界)의 한울님을 순종하며 천상의 극락을 누리려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지만, 후천시대의 종교는 인계(人界)에서 한울님을 모시는 지상극락을 누리게 된다고 한다. 또 선천시대는 존비귀천(尊卑貴賤)의 계급주의이지만, 후천시대는 평등주의를 원칙으로 하며, 이에 따라 정치․사회의 제도까지 바뀌어져 국기(國基)가 바로 서고, 모든 사회의 불안이 제거되는 지상극락의 이상사회가 이룩된다고 한다. 그는 지금까지의 혼란한 시대가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종말론(終末論)을 주창하면서도 다가오는 새 시대야말로 이상시대가 될 것이라는 낙관적 종말론을 주창했다. 최제우 자신이 확립한 동학사상이야말로 오만 년 동안 지속되어온 지금까지의 문명을 해체시키고 다시 오만년 동안 지속될 새로운 문명을 열기 위한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우주 본체인 무극의 신령스런 능력)라고 천명한다.
③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
동학은 사람을 시천주(侍天主)의 존재로 본다. 시천주란 글자 그대로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뜻으로, 모든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음으로써 살아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신령한 한울님 마음을 가지고 있고, 이 한울님 마음이 우주에 가득 차 있는 한울님 기운과 끊임없이 기화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사람의 형체라고 말한다. 결국 시천주(侍天主)의 인간관은 사람에게 있어 정신이나 육신은 모두 한울님 마음과 한울님 기운을 모시고 있는 존재라는 앎에서 비롯된다. 또한, 사람은 한울님을 모신 존재이기 때문에 평등하면서도 존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간관에 의하여 '사인여천(事人如天:사람을 하늘처럼 섬긴다)', '인내천(人乃天)' 등의 사상도 등장하게 된다.
Ⅱ. 혁명의 전사(前史), 동학농민혁명을 향하여
1. 동학농민혁명은 왜, 어떻게 일어났나
가. 농민혁명의 시대적 배경
19세기 후반 조선은 통치질서의 파탄을 맞았고, 그런 가운데 농민들은 가혹한 수탈에 시달렸다. 조선 팔도의 농민들이 예외 없이 이런 형편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산업의 거의 전부가 농업이던 때, 농업의 중심지였던 까닭에 호남지역의 농민들은 보다 극심한 수탈을 겪어야 했다. 어떻든 수탈과 궁핍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마을을 떠나거나 유리걸식(流離乞食:정처 없이 떠돌며 빌어먹는 일)하는 소극적 형태로 또는 관에 소장을 올리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또는 물리력을 동원한 봉기의 형태로 저항하였다. 농민들의 무력 봉기를 민란․민요․농민봉기․농민항쟁이라 부르는데, 이것이 농민 저항의 대표적인 형태였다. 기본적인 생존권을 요구하는 농민들의 무력 봉기는 19세기 내내 전개되었으며, 19세기의 후반인 철종과 고종 때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이렇듯 농민들의 저항은 1세기 가량이나 계속되었지만, 그들의 생계 여건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을 뿐더러 더욱 악화되는 가운데 1894년을 맞게 된다.
(1) 농민층의 양극화
18세기를 넘어서면서 조선사회는 이앙법(移秧法)이라는 새로운 농사법의 발달로 커다란 경제적 변동에 직면하였다. 이앙법은 농지이용도를 높이고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도왔다. 이런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농업경영에도 뚜렷한 변화를 불러왔다. 농업노동력의 절감과 생산력의 증대라는 변화를 잘 활용한 지주나 농민들은 경영 규모를 확대해 갔다. 한편 생산력이 발전하는 가운데 상품화폐경제도 급속히 발달하여 농촌경제는 장시(場市:시장)와 연결되었다. 농산물의 상품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일고 있던 새로운 농업경영 즉 광작(廣作: 확대된 경작 형태)이나 상업적 농업(商業的 農業:시장을 상대로 한 농업)에는 일부 자작농이나 소작농이 참여하여 부를 축척하고 부농 또는 서민지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소수 지주나 상인에게 토지와 부가 더욱 집중되고,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상실하는 현상을 낳았다. 요컨대 조선후기 농업 경제상의 변동 속에서 농민층은 소수의 부농과 지주, 그리고 다수의 빈농으로 양극 분화해 갔던 것이다. 이처럼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바탕으로 19세기 후반 농민층은 양극단으로 분화되었고, 이는 조선사회 전반을 크게 동요시켰다.
(2) 조세 수취제도의 모순과 문란
18세기 중반 이후 조선의 세금제도는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이라는 삼정(三政)체제로 확립되었다. 그런데 이 조세 수취제도는 제도 자체에 모순을 안고 있었는데, 모순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얼마를 수탈했느냐는 것이라기보다 누가 냈느냐는 것이었다. 이 시기 세금은 평민층, 즉 직접생산자인 자․소작농에게 집중적으로 부과되고 있었다. 토지세를 말하는 전정(田政)의 경우, 토지소유주인 지주가 아니라 직접생산자 즉 지주에게 세를 물고 토지를 빌어 농사짓는 소작인에게 집중 부과되었다. 16세에서 60세까지의 양인 장정에게 부과된 군정(軍政)의 경우도 양반은 면제되었다. 환곡(還穀)의 경우 애초에는 춘궁기(春窮期:보리고개)에 관곡(官穀:관아의 곡식)을 싸게 빌려주어 농민들이 굶주림을 면하도록 하는 빈민구제책이었다. 그러나 그 이자를 국가재정에 충당하면서부터는 국가고리대의 성격을 띄었는데, 이 역시 일반 농민들에 부담되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세금거두는 일을 담당한 수령과 아전은 중앙지배층과 결탁하여 자의적이고 무제한적인 수탈을 일삼아 농민들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처럼 삼정이라는 국가의 조세 수취제도는, 그 잘못된 구조와 파행적인 운영으로 직접생산자인 농민층의 성장을 가로막았을 뿐 아니라 생계 기반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3) 정치세력의 부패
19세기초 순조 대에 이르러, 왕실과 연결된 소수의 몇몇 집안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기형적인 정치형태인 '세도(勢道)정치'가 헌종, 철종대로 이어졌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한 후, 왕권의 회복을 도모한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안동 김씨를 비롯한 세도 권력가들을 숙청함으로써 세도정치는 끝나는 듯하였다. 그러나 10년 뒤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민비의 집안인 여흥 민씨에 의해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들의 파행적인 정치운영은 만성적인 국가재정의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중앙정부는 부족한 재정을 지방관청의 재정으로 충당하였고, 재정이 줄어든 지방관청에서는 각종 잡세의 부과나 환곡, 고리대 등을 통하여 재정을 보충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자연히 봉건권력에 의한 농민수탈은 더욱 강화되었고, 이것은 19세기의 만성적인 삼정수탈의 계기로 작용하였다. 국가재정의 위기를 농민수탈의 강화를 통해 모면해 보려는 국가의 정책이 바로 삼정 문란을 야기시켰고, 그 가운데 세금의 부담은 자꾸만 빈농층에게 집중되어 갔던 것이다. 민씨정권은 통제력의 이완으로 지방관리의 부정을 통제할 수 없었을 뿐더러 오히려 탐관오리(貪官汚吏 :욕심이 많고 행실이 깨끗하지 못한 관리)를 대량으로 양산하며 관리의 수탈을 조장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부패구조의 최종적인 희생자가 일반 농민이었음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4) 열강의 경제적 침탈
1876년 조선은 일본의 무력적 위협에 굴복하여 전혀 준비되지 않은 가운데 문호를 개방하였다. 개항이후 조선은 일본과 무역을 시작하였는데, 조선의 수출품은 주로 농수산물과 귀금속이었다. 수입품은 일본산 면포와 생필품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런 대외 무역구조는 곧바로 조선의 농업, 수공업 기반을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 수출입의 절대량을 차지하던 일본은, 값싼 식량의 필요에 의해 조선의 쌀을 수입하였다. 다량의 쌀 유출은 쌀이 모자라던 조선에 심각한 쌀 부족 현상을 불러왔고 이는 쌀값 앙등(昻騰)으로 이어졌다. 쌀값의 앙등은 소수 지주에게는 더 많은 이익을 의미했으나 임금노동자들에게는 생계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결국 지주들이 막대한 토지를 집적해 가는 반대편에서 영세한 자․소작농들은 생활기반인 집과 토지마저 상실하고 몰락해 갔다. 수공업(手工業: 간단한 도구와 손을 사용하여 생산하는, 작은 규모의 공업)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값싼 외국산 면포(綿布:무명)는 가내수공업 단계에 있던 조선의 면포시장을 순식간에 잠식했고, 그 결과 조선의 면포산업은 몰락단계에 놓였다. 값싼 생필품의 수입 역시 조선의 수공업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상업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1887년부터 외국상인들 특히 청․일 상인들이 조선에서 활발한 상업활동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활동은 영세한 조선 상인의 활동 기반을 위협하였다. 결국 아무런 대안과 준비 없는 문호개방 속에서 농촌의 양극 분화는 심화되었고 영세한 수공업자와 상인들은 경제적으로 몰락하거나 외국자본의 손아귀에 놓이는 결과에 처하였다.
나. 농민혁명 주체세력 형성
(1) 19세기의 농민봉기, 그 한계와 의미
19세기 사회․경제상은 한결같이 농민 대중의 삶을 위협하는 것이었고, 이에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다양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농민봉기가 집중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철종 때였다. 철종 13년(1862) 한 해에만 37개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났는데, 이를 통칭하여 '임술민란'이라고 한다. 임술민란을 지역별로 보면, 경상도 16개 지역, 전라도 9개 지역, 충청도 9개 지역, 경기도․황해도․함경도 각각 1개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결국 정부의 농민봉기를 근본적으로 수습하기 위해 모색된 방안이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기 위한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의 설치이고 삼정이정절목(節目)의 반포였다. 이정청의 설치 직후에 정부의 의도대로 봉기는 가라앉는 듯했다. 그러나 삼정을 부분적으로만 개선하겠다는 데 그쳤고, 반포된 지 석 달도 못되어 시행이 중지되고 말았다. 결국 삼정의 폐단은 계속되었고 1년 뒤인 고종1년(1864)부터 농민봉기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여, 고종 25년(1888)부터는 전국적으로 만연하였다.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고종대의 농민봉기는 전국에서 60여 차례에 걸쳐 발생하였다. 철종대의 봉기가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발생한데 비해 고종대의 봉기는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고종대에는 일반 봉기와 달리 수령을 살해하고 왕조에 반기를 드는 병란(兵亂)적 성격의 봉기가 전개되기도 하였다. 1871년 경상도 영해부(寧海府)에서 일어난 영해민란 또는 영해 이필제(李弼濟) 병란이 그대표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봉기를 통해 삼정의 폐단과 수세 담당자인 지방관리의 부정행위를 바로잡으라고 요구하였다. 즉 농민들의 요구는 국가의 조세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시기 농민들은 지주와의 문제나 신분관계의 문제는 주목하지 못한 한계를 보인 것이다. 더불어 19세기 농민봉기는 봉기 상호간에 연계를 맺지 못하고 개별적이었으며, 지도부가 농민층에 뿌리 박지 못함으로써 봉기가 지속적․조직적이지 못했고 자연발생적 경향을 보였다. 이런 한계로 농민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19세기 백여 차례에 걸친 농민봉기는 대규모 농민항쟁이 일어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시켰다. 또한 농민봉기의 실패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 한계를 극복하는 지도자가 성장하는 계기를 주었다. 결국 19세기 농민봉기는 갑오동학농민혁명을 꽃피워 내는 토양이 되었던 것이다.
(2) 농민혁명 주체세력의 성장
당시의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농민대중은 일찍부터 봉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그것이 지닌 한계였다. 거의 대부분의 농민봉기는 한 개 군현(郡縣:옛 지방 제도)을 단위로 일어나서 그 지역을 넘어서지 못했고, 내용도 삼정의 폐단과 관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 조세 따위를 가혹하게 거두어 들여 백성들을 못살게 들볶음) 시정을 요구하는 정도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갑오동학농민혁명은 농민봉기의 그런 한계를 규모와 내용 등 모든 면에서 훌쩍 뛰어넘는 대규모 농민항쟁이었다. 그러면 갑오동학농민혁명이 19세기 농민봉기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게 한 주체적 동력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당시 농민대중의 사회변화와 개혁에 대한 강렬한 욕구에서 온 것이지만,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요인은 다음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동학(東學)'을 주목하자. 1860년에 창도된 동학은 대중 지향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농민대중과 탄탄하게 결합하며 빠른 속도로 확대되었고, 1890년대 초에는 충청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조직망을 형성하였다. 이런 동학의 조직망은 1894년 농민항쟁의 조직적 토대가 되었고, 이로서 농민혁명은 19세기 농민봉기가 보여 온 지역 분산적인 한계를 순식간에 극복하였다. 둘째, 전봉준(全琫準)․손화중(孫化仲)․김개남(金開南)을 비롯한 전라도 동학교단의 변혁 지향적 인물들의 활동이다. 이들은 사회변화와 개혁에 대한 욕구를 농민대중과 공유하는 한편, 사회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동학을 종교사상의 자리에 안주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사회 변혁의 장으로 이끌어 냈다. 이를 통해 비로소 1894년에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2. 동학의 창도와 공인운동
가. 동학의 확산과 억압
19세기 후반 조선사회는 안팎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안으로는 통치질서의 파탄으로 농민대중의 삶이 피폐되고, 밖으로는 서양의 침략 위협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는 현실에서 농민대중들이 의지할 만한 곳마저 마땅치 않을 때 새로운 종교가 창도되었다. 1860년 경주에 사는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유교 사상의 한계를 극복하고 서양 열강의 정신적 배경인 천주교에 대항하고자, '유․불․선(儒․佛․仙) 3교의 장점을 융합하여' 만든 동학(東學)이 그것이다.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인간평등사상과 새 세상이 열린다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사상을 근간으로 하였는데, 그 요지는 신분에 관계없이 그 누구나 동학에 입도하여 성․경․신(誠․敬․信)을 다하면 시천주(侍天主)를 이룰 수 있고, 그와 같이 사람들이 천운(天運)에 순종하고 천도(天道)에 합치하면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 조화롭고 정의로운 새 세상, 즉 지상천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동학은 이와 함께 질병의 치료와 길흉에 대한 예언 등 현실구복적인 요소를 포함하였고, 척왜양(斥倭洋:일본과 서양을 배척함)의 민족적인 사상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동학은 당시 농민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의식과 염원을 그대로 수용하여 체계화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동학은 창도되자마자 농민대중의 환영을 받으며 순식간에 경상도 일대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동학을 체제를 위협하는 학문으로 지목한 조선정부가 1863년 12월 최제우를 체포하여 이듬해 3월 '어두운 곳에서 무리를 모으고 평세에 난을 꿈꾸었다'는 죄목으로 처형하고 그의 제자들 다수를 유배 보냄으로써 동학은 불법시 되어 지하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최제우가 처형된 후 동학교단의 지도자가 된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은 정부의 탄압을 피해가면서 동학 전파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에 힘입어 동학은 1860년대 말 주로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 산간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재건하였다. 그러나 최시형이 1871년 영해 이필제 병란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면서 동학은 또 한차례의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이후 강원도 깊숙한 곳으로 숨어든 최시형은 이곳에서 "동경대전(東經大典)", "용담유사(龍潭遺詞)" 등 경전을 간행하고 제의(祭儀:제사의 의식)와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하는 등 동학교단의 기틀을 다졌다. 그리고 1880년대 초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으로 중앙의 정치상황이 극심한 혼란에 빠져, 정부가 동학과 동학교도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펼 수 없는 틈을 타고 동학은 충청도로 활발히 전파되었다. 전라도의 경우는 1880년대 중반에 익산 등지에 동학이 뿌리내리기 시작하여 80년대 후반 들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880년대 중엽 이후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중심으로 동학교도들이 급격히 늘어나자, 이 일대 각 고을의 수령과 아전, 토호(土豪:지방에 웅거하여 세력을 떨치는 호족)들은 정부의 동학 금지령을 빙자하여 교도들의 재산을 다투어 수탈하였다. 이런 수탈에 대해 1890년대 이전까지 동학교도들은 체포되면 속전(贖錢: 죄를 면하려고 바치는 돈, 일종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거나 체포를 피해 달아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대처하였다. 그러나 교세가 급격히 늘어나고 조직화되었고, 탄압과 수탈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가혹해지는 상황에 이르자, 동학교단은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변모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확장된 교세를 바탕으로 이른바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이라고 불리는 동학공인(公認)운동을 공개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 동학 공인을 위한 공주, 삼례집회
동학교단의 첫번째 집회운동은 서인주(徐認周), 서병학(徐炳鶴) 등의 주도하에 1892년 10월 충청도 공주(公州)에서 열렸다. 이 달 20일경 공주에 모인 1,000여명의 동학교도들은 충청감사에게 소지(所志:관청에 올리는 소장․청원서․진정서)를 올려, '지방관들의 학정을 그치게 하고 임금께 최제우의 신원을 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감사 조병식은 '동학은 정학이 아니라 사학이다. 동학을 금한 것은 조정의 일이므로 감영에 호소할 일이 아니다'는 답을 내려 동학 공인을 임금에게 올려 달라는 요구는 거부하였다. 하지만 충청도 각 지방에 공문을 내려 '동학을 금단하는 과정에서 자행되는 폐단을 일체 중지할 것'을 명령하였다. 비록 신원의 염원은 이루지 못했지만, 이는 단지 동학교도라는 이유로 지방관들로부터 공공연히 수탈 당해야 했던 동학교도, 동학교단으로서는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과에 고무된 동학교단은 전라감영에도 소지를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동학교단은 10월 27일 전라도 삼례역에 도회소(都會所)를 설치하고 각 지방의 동학간부에게 경통(敬通:동학교단내의 공문)을 보내어 교도들을 거느리고 삼례역에 모이라고 지시하였다. 11월 1일에는 전라도 대부분 지역과 그밖에 수원 등 각지에서 온 동학교도 수 천명이 삼례역에 집결하였다. 이들은 2일에 전라감사에게 소지문을 제출하였다. 그런데 주목할 사실은, 이때 소지문을 제출한 이가 전봉준이었다는 점이다. 즉 삼례집회부터는 뒷날 농민혁명을 주도하는 전봉준 등 전라도의 동학 지도자들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지문의 취지는 '최제우의 신원과 동학교도에 대한 수탈중지'를 강력히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라감사는 해산하라는 답서를 내려보냈을 뿐이었다. 다만 충청감사처럼, 전라감사 역시 각 읍에 공문을 내려 '동학금지를 핑계로 한 관속배의 (동학교도에 대한) 재물 수탈을 일체 금하라'고 지시하였다. 이 지시는 동학포교의 불법성을 재확인시키면서 교도들에 대한 수탈을 엄히 다스리라는 것이었다. 이에 동학지도부는 공식해산을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동학교인 일부는 복합상소와 같은 적극적인 대책 수립을 요구하였던 것 같다. 이런 강경한 움직임은 동학 집회운동의 성격 변화를 예고하는 것으로써, 이를 이끈 것은 바로 전봉준을 비롯한 전라도의 동학 지도자들이었다.
다. 광화문 복합상소와 괘서사건
동학교단은 동학 공인운동에 대한 교도들의 요구가 잇따르고, 동학공인을 지방감영에 호소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정부에 복합상소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동학교단은 삼례집회 직후, 복합상소운동을 계획하고 있다고 각지에 알린 다음, 12월 6일 복합상소에 대비한 도소를 충청도 보은 장내리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12월 중순께 정부에 소장을 올려, 동학이 이단이 아님을 역설하고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관리들의 수탈이 극심하다고 하면서 정부의 공평한 조처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상소에 정부의 대답이 없자, 동학교단은 서울로 올라가 복합상소를 하게 된다. 복합상소는 2월 11일부터 시작됐다. 박광호를 중심으로 한 참여자 40여명은 3일 동안 상소문을 받들고 광화문 앞에 나아가 엎드려 호소하였다. 동학의 공인을 정부에 정식으로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상소절차가 잘못되었다며 상소 접수조차 거부하였고, 고종은 14일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안주하면 원하는 바를 따라 해주겠다'는 내용의 구전(口傳: 말로 전함)을 내렸다. 이는 사실상 해산명령과도 같은 통고였다. 이처럼 교단은 궁궐 앞 복합상소에서도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이후 오히려 "이단을 내세워 야료를 부리는 자들은 선비로 대우할 수 없으며 국법에 따라 죽임을 내릴 것이다"는 전교(傳敎:임금이 내리는 명령)와 함께 상소 주동자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뒤따랐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1892년 10월부터 벌여 온 신원운동은 복합상소에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함으로써 일단 원점에 서게 된 셈이다.
한편 복합상소가 진행되는 기간과 그 직후에 서울의 외국 공사관과 교회당에 서양인과 일본인을 강력하게 배척하는 괘서(掛書)들이 나붙었다. 2월 14일 미국인 선교사 기포드의 학당에 붙은 괘서를 시작으로 한달 여 동안 잇따라 발생한 괘서사건은 국내외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서울에서 발생한 외국인 위협 괘서는 4건으로, 미국인 선교사 집에 2건, 프랑스, 일본 공사관에 각 1건의 괘서가 붙었다. 이 괘서들은 서양의 기독교 침투와 일본의 세력확장에 강한 증오심을 담고 있었다. 괘서가 모두 익명으로 된데다 당시 배외(排外)감정이 조선사회 전반에 퍼져 있었기 때문에, 괘서의 내용만으로는 이 배외운동을 주도한 세력이 누구인지 단정짓기는 어렵다. 그러나 복합상소가 전개될 때, 삼례에 모여 있던 이들이 전라감사에게 '동학을 사도(邪道)로 칭하지 말고 외국 선교사와 상인을 모두 나라 밖으로 쫓을 것이며 탐학한 지방관리를 제거하라'고 요구한데 이어, 그 일부가 상경했다. 이 점을 고려하면, 괘서사건은 동학교단의 온건하고 합법적인 상소운동에 만족하지 못했던 이들, 즉 전봉준을 비롯한 전라도 동학교단의 혁신적 지도자들이 주도했음이 확실하다.
라. 보은, 금구집회
광화문 복합상소 직후 교단의 중심세력은 동학도소가 있는 보은과 청산 등지로 내려갔다. 최시형은 곧바로 팔도의 모든 교인들은 보은 장내리로 모이라고 지시했고, 1893년 3월 11일 전라, 경상, 충청, 경기, 강원 등지에서 수만 명이 집회에 참석하였다. 이 집회에서는 "척왜양창의(일본과 서양을 배척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킴)"라는 외세배격의 정치적 기치가 전면적으로 드러났다. 이에 당황한 조정은 충청감사 조병식을 파직하고 집회 군중을 해산시킬 선무사(宣撫使)로 어윤중을 보내어 온갖 회유와 협박을 하면서 고종의 칙유문(勅諭文 : 임금이 몸소 타이르는 글)을 발표하자, 집회 주동자 일부가 이에 동조하여 무력하게 해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보은 집회를 통하여 민권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종교운동에서 벗어나 정치적 방향의 성격을 보이고 있는 점에 의의를 둘 수 있다.
보은집회와 동시에 금구에서도 상당한 규모의 집회가 열렸다. 금구집회에는 수천 명이 모였는데, 이들 역시 보은에 모인 군중이 해산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흩어졌다. 금구에 모인 군중들이 어떤 활동을 펼쳤는지는 직접적인 자료가 없어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금구의 집회군중은 척왜양을 내세우기는 했으나 보은집회 지도부의 미온적인 노선에 적극 공감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아직은 그 실상이 낱낱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금구집회는 보은집회보다 한층 정치적 지향이 강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것은 삼례집회 이후에도 흩어지지 않은 채 서울의 괘서사건을 조종했던 전봉준 등 전라도의 동학 지도자들이었다. 요컨대 동학의 집회운동 과정에서 전봉준 등 전라도의 동학 지도자들이 서서히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고, 이들은 강력한 정치적 지향으로 무장한 가운데 집회운동의 성격을 변화시키며 새로운 차원의 활동을 향해 갔던 것이다.
Ⅲ. 3월 봉기, 고부에서 전주성까지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은 대체로 4단계, ① 고부농민봉기(1894년 1~3월) ② 3월 봉기(3~5월) ③ 집강소시기 (5~9월) ④ 9월 재봉기(9~12월)로 구분된다.
1. 고부농민봉기
가. 사발통문과 봉기계획
전라도 고부군은 드넓은 평야와 해안까지 끼고 있어 곡창지대인 호남에서도 물산(物産)이 풍부하기로 손꼽히던 곳이다. 이곳에 1892년 4월 28일 조병갑(趙秉甲)이 군수로 부임한 이래,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농민들을 수탈하였다. 그의 수탈 방법은 원래 있던 보(洑: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둑을 쌓고 냇물을 끌어들이는 곳)를 허물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새 보를 만든 다음 그 농민들에게서 수세(水稅)를 거두었고, 예전에 태인현감을 지낸 자기 아버지 조규순의 공적비를 세운다며 고부 농민들로부터 돈을 빼앗았으며, 돈 가진 자들을 불효(不孝), 불목(不睦:사이가 서로 좋지 않음), 음행(淫行), 잡기(雜技:여러 가지 노름) 등 갖가지 죄목으로 엮어 가둔 후 속전을 받고서야 풀어 주는 등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1893년 11월 고부의 농민들은 불법적 수탈을 벗어나기 위해, 전봉준을 추대하여 관에 제출할 소장을 써 달라 하고 대표 40인이 조병갑을 찾아가 수세를 줄여 달라고 진정하였다. 그러나 감면을 진정한 군민들은 도리어 붙잡혀 처벌을 당하는 곤욕을 치뤘다. 이에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의 송두호(宋斗浩)의 집에서 은밀한 계획을 모의하였다. 전봉준 등 20명의 동학교도가 모여 추진한 이른바 '사발통문(沙鉢通文)' 거사계획이었다. 이 사발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리 리집강 좌하(各里 里執鋼 座下)
우 (右)와 같이 격문(檄文)을 사방에 전하니 여론이 물끓듯하였다. 매일같이 난망(亂亡)을 부르던 민중들은 곳곳에 모여서 말하되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나서야 백성이 한사람이나 어디 남어 있겠나'하며 그날이 오기만 기다리더라.
이때에 도인들은 선후책(善後策)을 토의 결정하기 위하여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가(宋斗浩家)에 도소를 정하고 매일 구름같이 모여 차례를 결정하니 그 결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고부성을 점령하고 조병갑을 목 베어 죽일 것.
一. 군기고와 화약고를 점령할 것.
一. 군수에게 아부하여 백성을 침탈한 탐리(貪吏)를 엄하게 징벌할 것.
一.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나아갈 것.
이는 매우 강력한 무력봉기 계획이었는데, 이 통문에는 특별히 주목할 내용이 담겨 있다. 그것은 이전의 민란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군수살해, 전주감영 점령과 서울 진격'이 계획되었다는 점이다. 즉 전봉준 등은 고부농민봉기 계획단계에서부터 기존의 농민봉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확대된 봉기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봉기 계획은 인근 지역 농민들의 동참이 없이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에 전봉준은 인근 무장현(茂長懸) 손화중을 주목하였다. 손화중은 전봉준과 이미 삼례집회 단계에서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전라도에서 최대의 동학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손화중의 세력 형성과정과 규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을 보자. '1892년 8월의 일이다. 전라도 무장현 선운사 도솔암 남쪽 수십 보쯤 되는 곳에 50여 척이나 되는 층암절벽이 있고, 그 절벽 바위 전면에는 큰 불상 하나가 새겨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 석불은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검당선사의 진상(眞像:참 모습)이라고 하며 그 석불의 배꼽 속에는 신기한 비결(秘訣)이 들어 있다고 하며 그 비결이 나오는 날은 한양이 다된다(몰락한다)는 말이 자자하였다. ……(손화중 휘하의 동학교인들이) 석불의 배꼽을 도끼로 부수고 그 속에 있는 것을 꺼내었다.' 이처럼 '손화중 포(包)에서 무장 선운사 석불 속에 있는 비결이라는 것을 꺼낸 이후, 무장․고창․영광․장성․흥덕․고부․부안․ 정읍 등 여러 고을 사람들이 이민(吏民:지방 아전과 백성)을 물론하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손화중의 세력 확대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농민혁명 직전의 사회 분위기 즉 새 세상이 열렸으면 하는 농민들의 기대와 무장일대의 강경한 분위기 등을 느낄 수 있다. 전봉준으로서는 이런 손화중의 동참을 이끌어 내야 했고, 이를 위해 12월 비밀리에 무장으로 내려가 손화중을 만났다. 하지만 '무장회동'에서 전봉준은 손화중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제1차 응징 대상인 군수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전임발령이 나자, 통문의 서명자 집단의 거사계획은 당분간 보류되는 상황을 맞게 됐다.
나. 고부농민봉기의 전개와 해산
익산군수로 전임발령이 난 군수 조병갑은 전임지로 부임하지 않고 계속 고부 관아에 남아 있으면서 전라감사 김문현을 통해 재취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사이 전봉준은 사발통문의 거사 의지를 누르고 전주감영에 다시 수세감면을 비롯한 폐정을 호소했으나 김문현은 이들을 몰아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조병갑은 고부군수로 재임명되었다.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재임명된 하루 뒤 드디어 고부군민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즉 고부의 농민 5백여 명이 1월 9일 예동(禮洞) 마을에 모여들었고, 10일 말목장터에서 봉기하여 그날로 고부관아를 점령하였다. 이들은 무기고를 헐어 무장하고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풀어 주었으며 창고를 열고 양곡을 꺼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또 새로 쌓은 만석보(萬石洑)를 헐어 버리고 탐학(貪虐:탐욕이 많고 포학함)한 향리를 처벌한데 이어 조병갑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도주한 뒤였다. 관아에서 나온 농민들은 말목장터에 진을 치고 전열을 정비하였다. 사발통문의 3개 결의내용이 실행된 것이다.
농민군은 1월 25일 백산(白山)으로 진을 옮겼다. 백산은 비록 해발 47m에 불과한 낮은 산이지만 고부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고, 부안, 김제, 정읍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삼한 이래로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말목장터는 많은 사람이 모이기 쉽고 교통도 편리하지만 반면 관군의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지형이 불리했기 때문이다. 농민군은 집결과 감시에 유리한 백산을 근거지로 하여 2월 23일 고부군을 재차 점령하는 등 봉기를 한 달여간 이어갔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고부군민이 백산에 진을 치고 있는 동안 조정에서는 고부군수 조병갑을 나문정죄(拿問定罪:죄인을 잡아다 신문하고 죄를 판단하여 결정함)하고 전라감사 김문현은 월봉삼등(越俸三等:3등급의 봉급을 줄이는 징계)하라는 왕명을 내리고 다시 용안현감 박원명을 고부군수에 새로 임명하는 한편 장흥부사 이용태를 사건조사 및 수습 책임자 격인 안핵사에 임명했다. 2월말쯤 고부군수로 부임한 박원명은 농민군의 세력에 눌려 그들의 해산을 위해 타협하는 방책을 택했다. 박원명의 설득에 농민군의 기본세력이 해산하기 시작한 데 이어 그 동안 눈치만 살피며 고부에 들어오지 않은 안핵사 이용태가 박원명의 수습책을 오히려 모두 뒤엎고 봉기 참가자에 대한 탄압을 자행했다. 봉기 참가자를 색출, 갖은 횡포와 잔인무도한 탄압으로 봉기에 참여한 사람을 살육했다. 마침내 농민군은 3월 13일 완전 해산하게 되었고 전봉준 등 지도부는 무장의 손화중 包로 피신, 두 달여 동안에 걸친 봉기의 횃불은 내려졌다. 그러나 그 혁명정신과 의지는 보다 새로운 투쟁의 불씨를 당겼으니 이른바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들불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2. 무장기포와 백산대회
가. 무장기포
고부에서 도피한 전봉준은 무장현의 손화중을 찾아갔다. 고부에서도 동학교도에 대한 이용태의 만행이 자행되었고, 여러 지역에서 봉기 조짐을 보이는 데다 전봉준의 설득이 계속되자, 손화중은 마침내 봉기를 결정지었다. 3월 16일 무장현 동음치면 구암리 당산마을 일대에 손화중 휘하의 농민군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준비를 마친 농민군은, 마침내 3월 20일 무장현 당산에서 창의문(倡義文: 布古文이라고도 함)을 낭독하고 기포하였다. 전봉준 등의 지도부가 만천하에 밝힌 거사의 대의명분은 창의문(倡義文)에 응집돼 있다. 다음은 무장창의문의 전문이다.
세상에서 사람을 귀하게 여김은 인륜(人倫)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부자(君臣父子)는 인륜의 가장 큰 것이라.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곧으며 아비가 사랑하고 자식이 효도한 후에야 비로소 집과 나라를 이루어 능히 무궁한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인효자애하고 신명성예하시니 현명하고 어질며 정직한 신하가 보좌하여 정치를 돕는다면, 요순의 교화와 문경의 정치를 가히 해를 보는 것처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신하 된 자들은 나라에 보답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한갓 봉록과 지위만을 도둑질해 차지하고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아첨과 아양을 부려 충성 된 선비의 간언을 요망한 말이라 하고 정직한 신하를 일러 비도(匪徒)라 하니, 안으로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에게 사납게 구는 관리가 많아서 백성들의 마음이 날로 더욱 나쁘게 변해 가고 있다. 안으로는 삶에 즐거움이 없고 밖으로는 보호할 방책이 없다. 학정은 날로 커 가 원성이 그치지 아니하여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분수가 드디어 무너져 하나도 남지 않았다.
관자(管子)가 이르기를, "예의염치(禮義廉恥)가 펴지지 못하면 나라가 곧 멸망한다" 했는데, 지금의 형세는 옛날보다도 더 심하다. 공경(公卿) 이하로 방백 수령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로움은 생각지 않고 한갓 자기 몸을 살찌우고 제 집을 윤택하게 하는 것만 생각하여, 사람을 뽑아 쓰는 곳을 재물이 생기는 길로 보고 과거 보는 곳을 교역하는 저자거리로 만들었다. 허다한 뇌물은 나라의 창고에 넣지 않고 도리어 사사로이 저장하였다. 나라에는 쌓인 빚이 있는데도 이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교만하고 사치하고 음란하게 놀면서 두려워하거나 꺼려하는 바가 없으니 온 나라가 어륙이 되고 만민이 도탄에 빠졌다. 수령들이 재물을 탐하고 사납게 구는 것이 까닭이 있는 것이니, 어찌 백성이 궁하고 또 곤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쇠잔해지는 것이다. 보국안민의 방책은 생각하지 않고 밖에 향제를 세우고 오직 혼자만 온전 하려는 방책에 힘쓰면서 녹봉과 지위만 도둑질하고있으니, 어찌 옳은 이치이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초야에 버려진 백성이나 임금의 땅에서 나는 음식을 먹고 임금이 주신 옷을 입고 있으니, 가히 앉아서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온 나라가 마음을 같이 하고 억조창생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여 이제 의기를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죽고 사는 맹세를 하노니, 오늘의 광경은 비록 놀라운 일이나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움직이지 말고 각자 그 생업에 편안하여 함께 승평한 일월을 빌고 모두 성상의 덕화를 바랐으면 천만 다행이겠노라.
창의문이 세상에 알려지자 농민들은 적극 호응하였다. 일개 군현 단위의 농민봉기가 아니라 전국적인 농민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 백산대회
3월 20일 무장현을 떠난 전봉준, 손화중의 농민군은 21일 고창현을 거쳐 22일 흥덕현의 사포와 후포, 23일 부안현 줄포를 지나 고부에 이르렀다. 이들은 고부군을 점령하고 향교와 관청 등에서 하루를 머문 다음, 24일 전략지인 백산으로 진을 옮겼다. 무장현을 출발, 고부군으로 향해 가던 전봉준․손화중은 봉기한 사실과 부대의 일정을 태인현(泰仁縣)의 김개남 등 주요 농민군 지도자에게도 전달했고, 이에 김개남도 휘하의 세력을 이끌고 태인현을 출발하여 3월 24일 경에는 백산에 합류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휘하의 농민군이 집결, 연합 농민군이 완성되었다. 이 백산대회에는 고창, 무창, 흥덕, 정읍, 태인, 금구, 김제 등지 즉 호남 우도 지역의 농민군이 총 봉기한 양상을 보였으며, 이들이 3월 봉기 기간 내내 농민군의 주력을 이루었다. 이 연합 농민군은 3월 25일 백산에서 전봉준을 총대장(總大將)으로, 김개남, 손화중을 총관령(總管領)으로, 김덕명과 오시영을 총참모(總參謀)로, 최경선을 영솔장(領率將)으로, 송휘옥과 정백현을 비서로 정하는 등 그 지휘체계와 조직을 세우는 한편, 격문(檄文: 널리 세상사람들을 선동하거나 의분을 고취시키려고 쓴 글)과 4대 명의(名義:명분과 의리), 12개조의 기율(紀律:도덕상으로 여러 사람에게 행위의 모범이 될 만한 질서)을 잇따라 발하였다. 먼저 격문을 보자.
우리가 의(義)를 들어 이에 이른 것은 그 본 뜻이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가운데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의 위에다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내쫓고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에게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의 밑에 굴욕을 받는 소리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을 것이나.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무장창의문이 백성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기 위해 유교적 이념체계 안에서 봉기의 명분을 찾은 데 비해, 이 격문은 봉기에 나서는 자신들의 뜻과 의지를 적극적이고 잔혹하게 밝힌, 이를테면 농민혁명의 출사표(出師表:출병할 때 그 뜻을 적어서 임금에게 올리는 글)와도 같은 성격을 띄고 있다. 또한 "첫째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마라. 둘째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 셋째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다. 넷째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귀(權貴: 권세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를 모두 없앤다"는 내용의 4대 명의는 일종의 행동강령으로서, 이는 농민봉기의 목적과 방향이 보국안민과 외세축출 그리고 탐관오리의 제거에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12개조 기율은 농민군의 군사행동 원칙이라 할 수 있다.
1. 항복하는 자는 대접한다.
2.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3. 탐학한 자는 추방한다.
4. 순종하는 자에게는 경복한다.
5. 도주하는 자는 쫓지 않는다.
6. 굶주린 자는 먹인다.
7.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그치게 한다.
8. 빈한한 자는 진휼한다.
9. 불충한 자는 제거한다.
10. 거역하는 자는 효유한다.
11. 병든 자에게는 약을 준다.
12. 불효자는 죽인다.
이상과 같은 격문과 4대 명의, 그리고 12개 기율의 포고는 바로 본격적인 농민혁명의 선포였다. 백산에 모여 모든 준비를 마친 연합 농민군은 곧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를 목표로 북상하여, 3월 26일 고부군 백산, 예동에서 태인현 화호 신덕정리로 나아갔다. 29일에 태인 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 전주로 곧바로 가기 위해 4월 1일 태인에서 금구현 원평으로 나아갔다. 이처럼 농민군이 대규모로 봉기하여 전주로 진격해 오는데 놀란 감사 김문현은 사태를 정부에 보고하였다. 그런 한편 전주성의 관군으로 하여금 서문과 남문을 지키도록 조처하고, 2일에는 서문 밖 용머리고개를 지켰다. 그리고 곧 고부, 부안, 정읍 등지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두 길목인 원평의 청도리 앞길과 금구의 대로를 지켰다. 금구현 원평까지 진출해 있던 농민군은, 관군이 전주 입구를 지키고 있는 데다 또 관군 10,000여명이 내려온다는 소식이 들려 오자, 3일 부대를 3대로 나누어 남하하였다. 1대는 부안현 서도면 부흥역으로, 1대는 태인현의 인곡, 북촌, 용산 등지로 내려왔고, 나머지 1대는 원평에 일시 잔류하였다. 4월 4일 원평에 남아 있던 농민군이 부안으로 내려와 이미 부안에 와 있던 농민군과 합세하여 그 날로 부안현을 점령하였다. 부안현을 점령한 것은 전봉준, 손화중이 이끄는 농민군이었으며, 이때 태인의 용산 등지에 머문 농민군은 김개남이 이끌고 있었다.
3. 황토재와 황룡촌 전투
가. 황토재 전투
부안현을 점령한 농민군은 4월 5일 부안 성황산으로 진을 옮긴 후 고부 천태산을 넘어 6일 고부 도교산(황토산)에 진을 쳤다. 태인에 있던 김개남 부대도 6일 도교산으로 진을 옮겨 전봉준․손화중 부대와 합류하였다. 전주 길목을 지키며 농민군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관군도 추격을 시작하였다. 농민군이 남하하자 관군 역시 4월 6일에는 황토재 아래 진을 쳤다.
도교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3대로 나누어 세 봉우리에 불을 놓고 관군과 대치하였다. 7일 새벽 세 곳의 불 중에 가운데 봉화만 남고 양쪽의 불이 꺼지자 관군은 농민군이 잠든 것으로 판단하고 기습 공격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공격을 기다린 농민군은 양쪽에서 관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앞쪽에서 협공, 즉 삼면을 포위하여 관군을 대파하였다. 관군의 기습을 예상한 농민군은 협공의 계책으로 관군을 격퇴한 것이다. 반면 농민군이 관군을 먼저 공격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누가 먼저 공격하였든, 이 싸움에서 농민군은 적절한 책략까지 쓰며 승리를 거둔 반면, 감영군은 큰 피해를 입고 참패하였음은 명백하다. 황토재전투에서의 승리는 농민군에게 큰 의미가 있다. 관군과의 첫 전투에서 거둔 큰 승리였고, 농민군은 이로써 기세를 올리며 전라도 일대로 세력을 넓혀 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셈이기 때문이다.
한편 전라감사의 보고를 받은 정부는 4월 2일에 홍계훈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조선시대 국가에 변란이 있을 때, 이를 평정하기 위해 임시로 보내던 신하)로 임명하여 병정을 이끌고 전주로 내려가게 하였다. 홍계훈이 이끄는 800여명의 경군은 인천에 도착하여 4일 함선을 타고 호남으로 출발, 6일 군산에 이르렀고 7일 전주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경군이 전주에 이른 시각은 이미 감영군이 패한 뒤여서 관군의 전력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하였다.
나. 농민군의 남하
황토재 전투에서의 승리로 농민군의 사기는 드높았다. 그런데 이들은 북상하지 않고 오히려 남하하는 길을 택했다. 관군을 격파한 후에도 남하한 것은 전주에 경군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선을 넓혀 세력을 확대하려는 농민군의 뜻도 담겨 있었다.
농민군은 7일 당일에 정읍, 고부 삼거리로 이동하였다. 8일에는 흥덕과 고창을 점령하고, 9일에는 무장을 점령하고 이곳에서 삼일간을 머물며 전열을 정비한 다음에 12일 영광, 16일 함평을 차례로 점령하고 21일에는 장성 월평리에 도착했다. 이때 장성에는 고부에서부터 남하해 온 농민군 이외에 전라좌도 일대의 농민군도 집결하여 그 숫자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농민군은 이동 과정에서도 체계와 규율을 유지하며 당당한 위세를 자랑하였다. 이 같은 위세를 보이며 농민군은 점령한 군현 모두에서 감옥을 부수어 억울하게 갇힌 자들을 풀어주고 무기고를 헐어 무장했다. 또한 관아의 세금장부를 압수하고 탐학한 아전들을 처형 또는 처벌하였다.
한편 홍계훈은 전라감사에게 영을 내려 향병을 동원하여 순창ㅡ담양ㅡ광주ㅡ나주에 방어선을 구축하라고 한 뒤, 15일에 경병 본대를 거느리고 금구, 태인(18일)ㅡ정읍(19일)ㅡ고창(20일)ㅡ영광(21일)으로 남하하였다.
다. 황룡촌 전투
4월 23일 농민군과 경군 선발대는 장성 황룡촌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날 경군 선발대, 즉 대관 이학승이 이끄는 300여명이 월평리의 삼봉 아래에 모여 있던 농민군을 공격함으로써 싸움은 시작되었다. 경군의 포격으로 순식간에 50여명을 잃은 농민군이 후퇴하자 경군은 뒤쫓으며 공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삼봉에 오른 농민군은 곧바로 위로부터 맹렬한 반격을 가했고, 경군은 대대적인 공격에 밀려 결국 패주하였다.
황룡촌 전투는 장태가 사용되었다고 해서 장태싸움이라고도 한다. 장태는 원래 닭을 키우는 데 쓰이는 닭구장태 만드는 법을 이용해 제작된 것으로, 농민군들은 이 장태 안에다 짚을 넣어서 불을 붙인 뒤 수백 개를 경군 쪽으로 굴려 화력을 소모시키고 그 뒤에는 농민군들이 따라붙어 경군에 접근 공격했다고 알려져 있다. 경군은 영광 쪽으로 길을 따라 퇴각하면서 신촌리 뒷산 까치골 능선(현재 황룡면 신호리)에서 농민군과 마지막 접전을 벌였다. 이곳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경군 대관 이학승이 전사했다. 황룡촌 전투에서 경군은 이학승을 비롯하여 적지 않은 사상자를 냈고, 농민군은 나라의 정예부대마저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4. 전주성 점령과 청,일의 개입
가. 전주성 점령
경군마저 격파한 농민군은 빠른 걸음으로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농민군의 당장의 목표는 전주성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전주는 감영의 소재지며 전라도의 수부(首府)일 뿐 아니라, 풍패지향(豊沛之鄕: 건국자의 고향)으로서 태조 이성계의 영정(影幀)을 보관한 경기전(慶基殿)과 시조(始祖) 및 시조비(始祖碑)의 위패를 봉사한 조경묘(肇慶廟)가 있는 영지(靈地)였다. 따라서 전주는 조선정부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봉기를 확대하려는 농민군에게 있어서도 상징적으로나 실질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사발통문거사계획 단계에서부터 전주가 주 공격목표가 된 것도, 농민혁명의 시작과 함께 관군의 거점이자 농민군의 1차적 점령 목표가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남하하던 농민군이 감영병과 경군을 격파하고 전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북상하고 그 뒤를 홍계훈이 하루 차이로 쫓아옴으로써, 이제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전주성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전라감영 전주가 농민혁명의 중심무대로 떠오른 것이다. 전주성은 김문현이 4월 18일자로 이미 파면되었고 후임 감사 김학진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으며 감영병은 홍계훈을 따라 남행하였으므로,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26일 농민군은 전주 삼천까지 진격하여 하룻밤을 머물렀다. 전주성 공략의 채비를 마친 2~3만여 명의 농민군은, 이튿날 전봉준, 김순명을 비롯하여 아기장수 이복용과 박선봉장 등의 지휘하에 서문밖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들은 용머리고개에서부터 일자로 진을 펼치며 전주성을 압박하였다. 4월 27일 전주 서문밖 장날, 장터 건너편 용머리고개에서 대포소리가 터져 나오며 수천 방의 총소리가 일시에 시장판을 뒤엎었다. 별안간 난 포소리에 놀란 장꾼들은 정신을 잃고 서문과 남문으로 물밀듯이 들어가는 바람에 동학군들은 장꾼들과 섞여 문안으로 들어서며 한편 고함을 지르며 한편 총질을 하였다. 이때 전봉준 대장은 천천히 대군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들어와 전주성에 무혈 입성하였다. 이로써 농민군은 조선왕조의 발상지이자 전라도의 수부(首府: 한 도의 감영이 있던 곳)인 전주성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는 동학농민혁명의 전투에서 거둔 최대의 승리였으며, 정부에 대한 전면적 저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 청,일의 개입
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경악한 정부는 이원회를 양호순변사(兩湖巡邊使:조선시대 군무를 띠고 변경을 준검하던 특사. 주요 임무는 변방의 전반적 상황을 순찰하는 것임)로 임명하여 병력 1,400명을 인솔하고 전주일대의 농민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긴급대신회의를 연 끝에
청군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청나라는 병력을 곧바로 조선에 보냈다. 그리하여 2일부터 7일까지 청군 2,500여명이 충청도 아산만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국을 끌어들인 것은 망국의 화(禍)를 스스로 재촉하는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청국의 파병은 오래 전부터 조선 진출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출병 빌미를 제공한 것이었다. 일본은 '일본공사관에 병사 약간을 두어 경비한다'는 제물포조약 제5관을 억지 근거로 내세우고 '조선 내 일본공사관원과 일본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조선정부의 요청이 없는데도 5월 4일 출병을 통보하였다. 이에 당황한 조선정부가 일본의 출병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일본은 아랑곳하지 않고 6일부터 12일까지 약 6,300여명의 병력을 조선에, 그것도 서울을 코앞에 둔 인천에 상륙시켰다. 이제 조선정부는 안으로는 농민군을 진압하고, 밖으로는 청․일 양군을 철수시켜야 하는 이중의 문제에 봉착하였다. 이 청․일 군대의 조선 진주는 농민혁명, 나아가 근대 한국 및 동아시아 역사의 전개에 커다란 굴절을 가져온다.
5. 완산전투
홍계훈의 경군과 농민군은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 전주성을 둘러싸고 거의 매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이것이 이른바 완산전투이다.
하루 차이를 두고 농민군의 뒤를 쫓아온 경군은 28일 정오 무렵, 용머리고개를 넘어 완산(完山)에 진을 쳤다. 완산은 최고봉이 해발 186m 밖에 안되지만 전주성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어 홍계훈은 1,500여명의 군사를 건지산, 기린봉, 오목대, 황학대 등에 배치하였다. 길게 포위망을 형성하며 전주성을 에워싼 것이다. 그리고 본영은 용머리고개 남쪽 산 중턱에 설치하는 등 전투 준비를 마쳤다. 군진을 형성함과 동시에 경군은 전주성을 향해 포를 쏘아 댔고, 이에 맞서 농민군 수백 명이 서문과 남문으로 나와 완산칠봉의 경군을 공격하였다. 완산전투의 첫 싸움에서 농민군은 적지 않은 손실을 입고 패배하고 말았다. 29일에는 농민군이 북문을 열고 나와 황학대를 공격하였으나 경군의 화포공격에 백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물러났다. 5월 1일 농민군이 남문을 열고 경군을 공격했으나 이때에도 경군의 화포공격으로 300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2일에도 경군은 전주성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고, 이에 농민군은 서문을 열고 나와 용머리고개의 경군을 공격했으나 또 다시 화포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1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채 물러났다. 전주성을 배경으로 한 농민군과 경군의 최대의 격전은 5월3일에 벌어졌다. 농민군은 이날 아침 10시경부터 서문과 북문으로부터 돌진하여 사마교(司馬橋: 현 다가교 자리)와 부근의 하류를 건너 유연대(油然坮: 현 기전여고 북서쪽 최고봉)를 공격하였다. 농민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유연대 부군의 경군은 남쪽으로 달아났다. 농민군은 이를 추적하여 다가산을 점령한 후 다시 남진하여 용머리고개를 가로질러 경군의 본영이 있는 곳까지 육박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은 여기에서 경군 본영으로부터 대포공격을 집중적으로 받아 용장 김순명, 아기장수 이복용을 비롯하여 200~500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내고 성안으로 물러났다. 이때 전봉준은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으며, 전투는 오후 6시경에야 끝이 났다. 4월 28일에서 5월 3일까지 벌어진 완산전투에서 농민군은 전력상 커다란 손실을 입었다. 그리하여 황토재전투․황룡촌전투․전주성 점령 등으로 치솟았던 농민군의 사기는 크게 꺾였고, 궁지에 몰린 가운데 내부의 동요마저 이는 상황이었다. 3일 이후로 더 이상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6. 폐정개혁안과 전주화약
가. 폐정개혁안
완산전투 과정에서 홍계훈은 전라도내 각 군현에서 군사을 징발하고 정부에 지원병을 요청하는 등 강공책을 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주성에 효유문을 보내어 농민군의 해산을 재촉하는 양면책을 썼다. 반면 완산전투의 결과, 농민군은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관군은 속속 증원되는데 비해 농민군은 오히려 고립되어 외부로부터 지원이 끊어지고 싸움에도 패하였으며 식량도 떨어져 갔던 것이다. 또 내부의 동요마저 일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4일 '너희들이 바라는 바를 들어주겠다'는 홍계훈의 글이 전달되었다. 이에 전봉준은 홍계훈에게 소지문과 함께 27개의 폐정(弊政: 폐단이 많은 나쁜 정치)개혁 조목을 적어 임금에게 보고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일종의 타협안을 제시한 셈이다. 이때 농민군이 요구한 내용 가운데 14개 조항이 전봉준의 판결문에 나와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전운소(轉運所)를 혁파할 것.
2. 국결(國結)을 더하지 말 것.
3. 보부상의 작폐를 금할 것.
4. 도내 환전(還錢)은 구 감사가 거두어 갔으니 민간에 다시 징수하지 말 것.
5. 대동미를 상납하는 기간에 각 포구 잠상(潛商)의 미곡 무역을 금할 것.
6. 동포전(洞布錢)은 매호(每戶) 봄 가을로 2냥씩 정할 것.
7. 탐관오리를 모두 파면시켜 내쫓을 것.
8. 위로 임금을 가리고 관직을 팔아 국권을 조롱하는 자들을 모두 축출할 것.
9. 수령은 자기의 관할지역 안에 입장(入葬)할 수 없으며 또 논을 거래하지 말 것.
10. 전세(田稅)는 전례를 따를 것.
11. 연호 잡역(烟戶 雜役)을 줄여 없앨 것.
12. 포구의 어염세(漁鹽稅)는 혁파할 것.
13. 보세(湺稅)와 궁답(宮沓)은 시행하지 말 것.
14. 각 고을에 수령이 내려와 백성의 산지(山地)에 늑표(勒標)하거나 투장(偸葬)하지 말 것.
나머지 13개 조항은 판결문에 기록되지 않아 그 내용을 단정할 수 없지만 이전에 농민군이 올린 각종 요구안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복원하고 있다.
15. 균전어사(均田御史)를 혁파할 것
16. 각읍 시정(市井) 각 물건에 분전수세(分錢收稅)하는 것과 도고명색(都賈名色)을 혁파할 것
17. 백지(白地)징세와 사전(私田) 진결(陳結)을 거두지 말 것
18. 대원군을 국정에 간여토록 함으로써 민심을 바라는 바대로 할 것
19. 진고(賑庫)를 혁파할 것
20. 전보국(電報局)이 민간에 대해 폐해가 크니 혁파할 것
21. 각읍 관아에서 필요한 물종(物種)은 시가(時價)에 따라 사서 쓰도록 할 것
22. 각읍의 아전을 돈으로 임명하지 말고 쓸 만한 사람을 택할 것
23. 각읍 이속들이 천금(千金)을 축냈으면 그 자를 처형하고 친족에게 징수치 말 것
24. 오래된 사채를 수령이 끼고 억지로 거두는 것을 모두 금단할 것
25. 동학교도를 무고히 살육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 동학과 관련되어
갇힌 이는 모두 신원할 것
26. 경저리(京邸吏)와 영저리(營邸吏)에게 주는 료미(料米)는 과거의
예에 따라 삭감할 것
27. 각국 상인들이 포구에서 장사하고 있으니 도성(都城) 시장에는
출입을 금하고 아무 곳에서나 함부로 행상하는 일을 금하도록 할 것
농민군이 요구한 내용은 농민들이 봉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봉기를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목적이 절절히 담겨 있는 이 27개조 폐정개혁안의 내용은, 크게 보아 ① 가렴주구를 일삼는 탐관오리의 처벌과 제거 ② 삼정의 개선과 부당한 세급징수의 원천적 철폐 ③ 대원군의 국정 참여 ④ 외국상인의 불법 활동 금지 등으로 집약된다. 즉 농민군은 당시대의 정치, 사회, 경제적 모순의 총체적 철폐를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농민군이 기존의 체제와 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해체하기를 요구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말하자면 농민군은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신분제의 철폐 요구를 명문화(明文化)하지 못했다. 또한 이와 밀접하게 결부된 지주와 소작간 토지문제의 해결(실제로 농사짓는 농민이 토지경작권 또는 소유권을 갖게 하는 것)을 요구하지 못했다.
나. 전주화약(全州和約)
농민군의 요구에 대해 홍계훈은 5일에 '여러 가지(폐정개혁) 조목을 들었으나 모두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들어줄 수 없다 하고, '무기를 반납하고 성문을 열고 해산하라'는 답변을 내렸다. 이와 동시에 '목숨을 구하려거든 성문을 열고 나가라. 결코 쫓아가 잡지 않을 것이며 또 각 고을에 알려 해치지 않도록 하겠다.'이라는 방문을 내걸었다.
이에 대해 농민군이 6일 홍계훈에게 전령을 보내 신변보장을 요구하자, 홍계훈은 신변보장을 약속하였다. 농민군은 폐정개혁과 신변보장을 철수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홍계훈이 신병보장을 약속함으로써, 양측은 농민군의 전주성 철수와 정부측의 농민군 신변보장에 있어서는 타협을 본 것이다.
그러나 농민군은 곧바로 철수하지는 않았다. 철수의 조건으로 제시한 폐정개혁에 대한 문제를 홍계훈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농민군은 7일과 8일 소지를 올린 후 전주성의 동, 북문을 열고 나왔다. 이때 홍계훈과 농민군 사이에 신변보장 뿐 아니라 폐정개혁 상주(上奏: 임금에게 말씀을 아룀)에 관한 약속이 있었는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철수하기 전에 폐정개혁안에 대한 상주약속도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즉 양측은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하고 홍계훈은 농민군의 신변을 보장하고 폐정개혁안을 임금께 올린다'는 조건으로 타협을 맺었던 것이다. 이른바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면 양측이 타협하여 화약을 맺은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농민군의
입장에서 보면
첫째, 완산전투의 패배로 인한 전력상실과 사기 저하, 그리고 고립에
따른 전세의 불리,
둘째, 폐정개혁에 대한 기대,
셋째, 보리수확과 이앙 준비에 바쁜 농번기 등이 있었다.
그러나 양측의 입장을 고려하면, 화약을 맺은 배경은 무엇보다도 청, 일군대의 조선 진주라는 상황변화였다. 청․일군대의 개입은 농민군도 원하지 않던 일이었고, 정부 역시 일본군의 개입을 원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청․일 군대를 조선에서 철병시키는 것이 급선무였고, 그러기 위해서 무력진압이 아니라도 최대한 빨리 농민군을 철수시키고 전주성을 회복해야 했다. 전주화약은 양자의 이와 같은 입장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농민군이 철수하자 홍계훈은 8일 행정질서를 정돈하였다. 또 한편으로 그는 '전주성을 수복했고 순변사가 거느린 평양영의 병정도 전주에 곧 들어올 것이니, 청국 군대가 전진하는 것에 대해 다시 처분해 달라'는 보고를 조정에 올렸다. 농민봉기가 수습되었음을 알린 것이다. 그러나 농민군의 전주성 철수가 농민군의 해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전주성에서 물러난 후로도 농민군은 여전히 전라도 각지에 모여 있었다. 경군이 홍계훈, 이원회와 함께 서울로 돌아간 것도 농민군을 완전히 진압했다고 보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일본 군대가 가까이 있는 서울의 상황이 더욱 급박하였기 때문이었다. 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철수하고 경군이 전주성을 수복한 후 귀경하였지만, 그것은 청․일군대를 철수시키고자 한데서 온 변화였을 뿐이다. 농민혁명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외세의 간섭으로 국면이 전환된 가운데, 전라도에서는 관과 농민군 사이에 직접적인 전투가 없는 소극적인 대치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Ⅳ. 집강소, 무르익는 혁명의 희망
1. 전주성 해산 이후 농민군의 동향
5월 8일 전주성에서 나온 농민군은 둘로 나뉘어, 1대는 김제, 부안, 고부, 무장 방향으로, 1대는 금구, 태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전봉준은 금구와 김제를 거쳐 10일 태인에 이르렀고, 손화중은 8,9일경 약 2,000여명을 거느리고 흥덕을 경과하여 무장방향으로 향했다. 전봉준은 태인에 머물다가 13일에 남쪽으로 내려갔다. 전봉준과 행로를 같이 하던 김개남도 이 무렵 전봉준과 헤어졌다.
이후 전봉준과 김개남은 각각의 농민군을 이끌며 전라도 전역을 휩쓸었다. 그런 가운데 전주화약의 내용 즉 신변보장과 폐정개혁의 실행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농민군의 세력이 날로 증강되자 순변사 김학진은 6월 7일 적극적인 수습 방안의 하나로 집강안(執綱案)을 제시하였으나, 농민군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었던 만큼 농민군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라도 전역에서 농민군의 세력이 증대되어 갔고 일부 지역에서는 보다 강경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6월 21일에 벌어진 일본군의 궁궐(경복궁) 점령사건이었다. 일본군의 궁궐 점령사건이란 농민군의 전주성 철수 즉 내정(內政)이 안정되었음을 들어 조선정부가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하자, 억지로 내세운 명분마저 잃은 일본이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라고 협박하던 끝에 비상수단으로써 궁궐을 점령한 사건을 말한다. 일본군은 이 후에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갑오개혁 정권을 세우고 내정을 간섭하는 한편, 아산만에 있던 청군을 공격하여 청, 일 전쟁을 도발하며 노골적으로 침략야욕을 드러냈다.
2. 일본의 공작과 청,일전쟁
일본은 1870년대부터 조선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즉 1871년 일본에는 이른바 정한론(征韓論:1870~73년 무렵 일본정부 내에서 고조된 한국침략론)이 등장하였다. 이 정한론은 일본 국내의 불안한 정세에 대한 관심을 대외로 돌려 해결하려는 메이지정권의 정책이 세워지면서 곧바로 구체화되었다. 그 첫 시도는 1875년 운요호사건에 이은 1876년의 강화도조약으로 나타났다.
이후 일본은 대륙 팽창욕을 드러내며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유지하려는 중국과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보문제를 두고 대립하였다. 조선을 둘러싼 양국의 첫 대결은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 때로 이어졌다. 두 사건을 계기로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진출의 기회를 노렸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1894년 5월 청군의 조선파병은 일본으로서는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따라서 일본은 조선의 요청이 없었는데도 청국과 동시에, 더 많은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하지만 청,일 군대의 출병 직후에 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철수함으로써, 조선의 정국은 일본의 기대와는 일단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조선정부는 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철수했으므로, 즉 내정이 안정되었으므로 일본군은 철병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철병을 거부하는 한편, 청과 분쟁을 일으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였다. 조선정부는 청군의 철병도 요구했으나 역시 일본군의 증강을 앞세워 거부하였다. 조선정부는 양국군대를 철수시키기 위해 조선 주재 서양 각국의 공사들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러시아, 영국과 미국 등이 중재에 나섰으나, 일본은 열강의 모든 조정안을 거부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도발하고 조선을 장악하기 위한 계획을 서둘러 세워갔다. 즉 일본은 '조선국왕을 포로로 잡아 조선정부를 장악하고(1단계) →조선정부를 압박하여 청국 군대의 축출을 일본에 의뢰케 하며(2단계) → 조선의 의뢰를 기다려 청군을 공격한다(3단계)'는 계획을 세워 이를 실행해 간 것이었다. 일본은 6월 21일에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 일본군은 용산에 있는 병력을 출동시켜 궁궐 출입문을 폭약으로 부수고 들이닥쳤다. 이것이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이다. 조선정부를 장악한 일본은 고종을 협박하여 아산에 있는 청군의 철퇴를 일본에 의뢰토록 강압하였다.
이렇게 개전(開戰)의 구실을 만든 일본군은 아산만 앞 풍도에 주둔한 청군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이로써 청,일 전쟁의 막이 올랐다. 풍도(豊島,경기 안산시 대부동(大阜洞)에 딸린 섬) 기습공격과 충청도 아산, 성환 전투에서 청군은 패퇴하였다. 청․일전쟁에서 가장 큰 전투는 평양에서 전개되었다. 청군 2만여 명과 일본군 12,000여명이 평양성을 사이에 두고 격전을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청군을 궤멸시킨데 이어 대동강과 압록강 앞 바다의 해전에서도 승리하였다. 평양전투에서 참패한 청군은 패배를 거듭하며 9월말 조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일본군은 공격을 늦추지 않고 중국대륙까지 계속 진격해 갔다. 중국의 봉천성, 여순항, 산동반도를 점령한 일본군이 지무까지 장악하자 청은 백기를 들었다.
이처럼 청․일전쟁은 일본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고, 이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이 같은 청․일전쟁의 결과, 중국은 수천 년 간 이어온 동아시아 패권자의 자리를 일본에 내주고 경제적 파멸에 접어들었다. 또한 조선은 일본 자본주의의 원료공급지로 또 그들의 자본제 상품시장으로 전략하였고 끝내는 식민지가 되었다. 반면 일본은 팽창주의적 산업화에 성공하는 한편, 대내적인 불만을 한꺼번에 해소하면서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권자로 떠올랐다.
3. 일본의 내정간섭과 갑오개혁
농민군의 전주성 해산 이후에 일본은 자신들이 만든 내정개혁방안강목을 조선정부에 제시하며 내정개혁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일본의 내정간섭을 강력히 거부하고 독자적인 개혁을 추진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교정청(校正廳)의 설치를 결정하였다. 교정청은 12개조의 개혁안을 정하고 이를 각 지방에 통보하였다. 요약하건대 탐관오리를 제거하고 잘못된 조세수취를 바로잡겠다는 것으로, 이는 농민군이 그 동안 줄기차게 요구해 온 폐정개혁 요구항과 대부분 일치한다. 정부는 농민군의 요구를 받아들여 불만을 무마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힘을 쏟았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정청은 불과 며칠 뒤에 벌어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직후 철폐되어 개혁안은 시도조차 되지 못하였다.
섭정(攝政: 임금이 직접 통치할 수 없을 때, 임금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나선 대원군은 민씨 일파를 축출하고, 일본의 권고를 받아들여 최고권한을 가진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립했다. 이 군국기무처는 행정과 입법기능을 가진 개화파 정권의 실체였다. 개화파 인사들은 군국기무처를 통해 국가의 개혁사업을 펴 나갔으나, 이는 사실상 일본의 직․간접적인 통제하에 이루어졌다. 군국기무처는 189개의 개혁안건을 포함 약 210건의 의안(議案)을 심의 통과시켰다. 군국기무처가 이때 추진한 개혁을 갑오개혁(甲午改革) 또는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 부른다.
군국기무처는 개혁책을 발표했는데, 이 가운데 일부 내용이 농민군이 주장한 폐정개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주목된다. 또한 노비제를 혁파하는 등 법적으로 신분제를 철폐함으로써 우리나라 근대개혁의 효시로 손꼽히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일본의 간섭과 조정을 등에 업은 채 시행된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그나마 시간이 흐를수록 근대 개혁적인 정신마저 후퇴하고 말았다. 이처럼 일본은 청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의 내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또한 일본은 전쟁 중에 조선에서 많은 경제적 이권을 강탈하였다.
4. 집강소의 설치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소식을 접한 순변사 김학진은 민족적 위기를 명분으로 삼아 농민군 지도부에 회담을 제의하였고, 김학진과 전봉준은 7월 6일 전주에서 회담을 가졌다. 전주회담에서 전봉준과 김학진은 정부와 농민군이 협력하여 전라도내의 안정과 치안질서를 바로잡기로 약속하였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행방법으로서 각 군현에 집강소(執綱所)를 전면적으로 설치 운영하기로 합의하였다. 회담을 마친 전봉준은 김학진과의 합의에 따라 전주성안에 전라좌우도 대도소를 설치하고, 각 군현 단위로 집강을 두도록 하였다.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가 전면적으로 설치 운영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로써 농민군의 최고지도자 전봉준은 기존질서와의 타협을 실행에 옮긴 것인데, 이것은 관과의 타협으로 농민군의 세력을 보존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군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데 뜻을 둔 것이었다.
전봉준은 이어 남원으로 내려갔다. 그 이유는 남원을 점령한 채 관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시종 강경한 투쟁을 벌이던 김개남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7월 보름 경 전봉준과 김개남은 남원대회를 열었다. 이때 남원에는 수만 명이 모였고, 김개남 역시 남원대회 직후, 그간 보여 온 강경한 행동을 중단하고 임실 산중에 은둔함으로써, 일단 소극적인 입장에서나마 회담의 결과를 지지하였다. 이로써 전라도는 전주 감영을 중심으로 한 행정체제와 전주대도소를 중심으로 한 농민군의 집강소체제가 양립하였다. 이 틀은 7월초에서 8월 하순까지 유지되었다. 이 체제 내에서 농민군은 전주대도소를 기반으로 정국을 주도적으로 운영해 갔다. 이 같은 집강소의 설치 운영은 전라도에 국한된 것이었고 또한 일시적인데 그쳤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집강소는 농민들이 자신의 힘과 의지로 지방 단위에서나마 행정력을 장악하고 이를 인정받은 것이었다. 집강소를 통한 농민의 권력 참여는, 그것이 비록 불완전한 형태였다고 할지라도, 한국 근대사의 새 장을 연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집강소의 운영은 농민혁명에서 거둔 가장 큰 성과라고 평가할 만하다.
Ⅴ. 9월 재봉기, 일본군에 가로막힌 꿈
1. 삼남 각지의 척왜 봉기
6월 21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에도 전봉준 등 주력 농민군은 타협적인 집강소체제를 성립시키고 그 체제를 유지하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이와 달리 전라, 충청, 경상도의 여러 지역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는 척왜 봉기가 그치지 않고 일어났다. 경복궁이 점령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호남 각지에서는 즉각 척왜 봉기가 일어났다. 6월 27일 함열의 농민군이 금구, 김제, 옥구 등지의 농민군과 함께 재봉기하였고, 6월 29일 무장의 농민군 500~600명이 봉기하였다. 6월말 경에는 강경 일대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농민군이 봉기하였고, 7월 초순 함열,웅포의 농민군 300여명이 봉기하였다. 7월 9일 부안 농민군이 충청도 서천관아에 돌입하여 무기를 빼앗아 돌아갔다. 그리하여 농민봉기는 7,8월부터는 삼남전체로 퍼져 나갔다. 특히 청,일전쟁 과정에 일본의 내정간섭과 인적, 물적 자원의 징발이 심해지면서 봉기는 크게 확대되었다. 이 무렵 충청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일어난 농민봉기의 사례를 보자. 7월 6일 충청도 노성, 7월 12일 경상도 대구, 7월 14일 경상도 곤양, 7월 17일 충청도 연기, 한산, 7월말 경상도 고성, 7월 28일 경상도 사천, 8월 1일 공주, 8월 2일 경상도 산청, 10일 영천, 20일 울산, 언양, 김해, 8월 중순 문경일대, 8월 12일 천안, 8월 21일 충청도 충주, 8월 24일 경상도 안동, 29일 경상도 문경에서 봉기하였다.
이처럼 7~8월 사이 삼남 각지에서는 척왜봉기와 더불어 폐정의 교정을 요구하는 봉기가 잇따라 일어났다. 이들 봉기의 대부분은 척왜와 폐정개혁을 동시에 수행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7~8월 삼남일대의 봉기는,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주력 농민군이 상황 주시에 힘을 기울일 때, 이에 적극 따르지 않는 일부 지역의 농민군이 그 지역 지도자의 지휘 아래 봉기한 것이다. 또한 3월 봉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각 지역의 농민들이 주력 농민군의 동향에 관계없이 일본군의 침략에 반발하며 봉기한 것이다. 이런 각지의 척왜 봉기는 주력 농민군의 진로에 큰 영향을 미친다.
2. 재봉기 결정과 준비
일본군의 내정간섭에 맞선 각지 농민군의 공격적인 활동에 호흡을 같이 한 것은 김개남이었다. 7월 하순부터 임실에 머물며 집강소 체제에 협조하던 김개남은, 8월 19일 남원 교룡산성 등의 병기고를 헐어 군기를 장악하고 부호의 돈과 곡식을 거두어 들이게 하였다. 그리고 25일에 다시 남원에 들어왔다. 그는 동헌을 도회소로 삼는가 하면 체제를 정비하고 무장을 강화해 갔다. 이때 그의 휘하에는 전라좌도 일대에서 7~8만여 명에 이르는 엄청난 수의 농민군이 모여들었다. 김개남이 이 같은 움직임을 보이자 전봉준은 집강소 체제를 유지하며 농민군의 역량을 보존하는 가운데, 중앙정국의 추이를 지켜보자는 신중론을 편 것이다. 그러나 김개남은 전봉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또한 손화중의 설득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개남은 전봉준․손화중과 차이를 보이며, 재봉기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전격적인 재봉기 결정과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대원군의 밀사파견과 밀지 전달이다. 대원군은 비록 일본군의 등에 업혀 정계에 복귀했으나, 그는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며 삼남에서 의병을 불러오는 방안 등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일본의 권고 등으로 농민군에게 '해산하라'는 효유문을 내리는 때를 이용하여, 8월 25일경 전라도의 농민군 등에게 밀지를 비밀리에 내려 보냈다. 삼남 각처의 양반과 보부상뿐 아니라 농민군까지 다같이 창의(倡義)하여, 일본군을 치고 나라를 구하라는 것이다. 밀지는 전라도의 일부 유림에게도 전달되었으나, 유림들은 농민군과 행동을 같이 할 수 없다며 호응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로써 대원군은 농민군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대원군의 밀지는 7일 남원의 김개남에게 전달되었고, 전봉준도 삼례로 나와 밀지를 전달받았다. 이후 전봉준은 손화중 등에게 지시를 내리는 한편, 본격적으로 재봉기 채비를 갖추어 갔다. 이처럼 전봉준이 재봉기를 결정지은 계기 역시 대원군과의 연합이 구체화된 데서 찾을 수 있다. 9월 재봉기의 근본적인 배경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의 내정간섭 심화였고, 제1의 일본군 축출이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8일경 재봉기를 서둘러 확정짓고 준비에 들어갔다. 이렇게 각지에서 무장한 농민군은 전봉준과 김개남 휘하로 모여들었다. 전라도의 농민군 10만 여명은 3월 봉기 때와 비슷하게 전봉준과 김개남의 세력으로 형성되었다.
3. 북상, 서울을 향하여
마침내 전봉준이 이끈 동학농민군 주력부대가 1894년 9월 다시 봉기의 횃불을 들었다. 전라도 삼례(參禮)를 재기포지로 삼은 동학농민군이 전주성 해산 이후 4개월 여만에 재무장한 것이다. 재봉기의 분위기는 무르익었으나 전봉준은 곧바로 북상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재봉기, 즉 북상은 10월 12일경에야 이루어졌다. 북상이 늦어진 이유는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움직이기가 어려웠고 새 곡식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충청도 일대 농민군의 합류를 기다린 것도 큰 요인이었다. 전봉준으로서는 북상의 진격로에 있는 최시형 휘하의 충청도 동학교도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최시형은 동학교인에 대한 관군과 민보군(민간 주도의 반농민군)의 가혹한 침탈이 계속되고 자신의 휘하에서도 봉기 요청이 빗발치듯 이어지자, 마침내 봉기를 요청하는 손병희 등에게 명을 내렸다. 최시형의 명이 떨어지자 충청도내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9월 재봉기 때는, 농민군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던 전라도와 마찬가지로 충청도도 사실상 전지역이 농민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봉기한 농민군 모두가 최시형이 있는 보은으로 모인 것은 아니다. 상당수 지역의 농민군은 보은에 집결하지 않고 해당지역에서 세력을 이룬 가운데 해당 관아를 점령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또한 이들은 인근 지역의 농민군과 힘을 합쳐 주변지역을 공격함으로써 북상하는 주력 농민군을 측면 지원하였다. 충청도 일대의 농민군이 대대적을 봉기하여 집결하자, 최시형은 10월 11일경에 이 사실을 전봉준에게 알렸다. 이에 전봉준은 4,000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삼례를 출발하여 10월 12일 논산에 도착하였다. 손병희가 이끄는 농민군도 보은을 출발하여 15일경에는 논산에 합류하였다. 거의 같은 때인 14일 김개남은 8,000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원을 떠나 16일 전주에 도착하였다. 한편 삼례에 올라와 있던 최경선은 전봉준과 상의한 후에 광주, 나주로 가서 손화중과 함께 일본군의 해로를 통한 협공에 대비하였다. 이렇게 10월 16일까지는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의 농민군이 총동원되었다. 그리하여 전봉준, 손병희는 북상하고, 김개남은 북상군의 거점지인 전주에 남아 다른 날에 대비하며, 손화중과 최경선은 후방을 수비하는 총력전의 형태를 갖추었다. 10월 중순에는 실질적으로 무력 봉기할 수 있는 체제가 완성된 것이다. 이제는 본격적인 북상이 시작되었다.
한편 개화파 정권은 9월 9일 이두황을 장위영 영관, 성하영을 경리청 영관으로 임명하여 경기도와 충청도로 내려보냈다. 이어 21일 농민군 진압을 도맡을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을 설치하고 도순문사(都巡撫使)에 신정희, 선봉장에 이규태를 임명하여 농민군을 진압토록 하였다. 10월 11일 서울을 출발한 이규태는 남하 도중에 일본군 1대와 합류하였다. 그는 휘하의 군대를 미리 공주 일대로 진군시킨 데 이어 자신은 24일 공주에 도착, 이후 공주전투에서 관군을 지휘하였다. 이와 별도로 이두황은 장위영병을 지휘하며 경기, 충청도 일대의 농민군과 잇따라 접전을 벌이며 남진하였다. 일본도 9월9일 농민군 진압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8일 일본군대를 보내어 농민군 진압을 돕겠다고 나섰고 21일 조선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10월 9일에는 농민군 진압을 전담할 일본군 1개 대대병력이 인천에 도착했다. 이 일본군 1개 대대는 15일 각각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세 방면으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4. 전국 각지의 봉기와 전투
9월초 전라도에서 농민군이 대대적으로 재봉기하고, 이어 충청도에서 농민군이 총봉기하였다. 이들 봉기를 앞뒤로 경상, 강원, 경기, 황해도에서도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9월 재봉기 때는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의 농민군이 힘을 합쳐 북상 길에 올랐고, 이와 별도의 조직을 이룬 가운데 경상, 강원, 경기, 황해도의 농민군이 봉기하였다. 사실상 조선 전역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봉기한 농민들은 일본군과 맞서 싸우며 반일(反日)항쟁을 전개하는 한편, 지역에 따라서는 매우 강력한 사회개혁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9월 재봉기 당시에는 조선 전역은 항일구국 운동과 사회개혁 운동의 물줄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가. 경상도
경상도는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한 곳이다. 이후 관의 극심한 탄압으로 이 지역에서 동학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지만,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교도들은 지하에 숨어 비밀 조직을 유지하였고 1894년에는 그 세력을 표면에 드러내며 농민봉기에 나섰다. 경상감사 조병호에 따르면, 9월말 경까지 경상도에서는 71개 군현 가운데 무려 60여 군현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경상도 지역의 봉기는 지역과 성격에 따라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경상도 북서부 지역과 지리산에 접한 남서부 일대이다.
먼저 경상도 북서부 지역으로 이 일대 농민군은 비교적 독자적인 활동을 벌였다. 예천은 3월부터 수접주(首接主) 최맹순의 지휘하에 농민군이 활동을 시작했다. 얼마 뒤 최맹순은 7만여 명의 농민군을 모았으며 접이 설치된 지역이 48개소에 이르렀다. 예천의 농민군은 예천읍내를 제외하고 대부분 지역을 수중에 장악하였다. 이때 예천읍내에는 양반과 향리층을 중심으로 민보군이 조직되어 있었고, 8월 28일 민보군의 기습으로 농민군은 크게 패전하였다. 상주에서는 김현영의 지휘를 받는 농민군이 여름부터 활동했다. 상주 일대의 농민군은 9월 최시형이 기포령을 내리자, 읍내 점령에 나서서 9월 22일 상주와 선산(善山)관아를 차례로 점령했다. 그러나 28일에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10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상주와 선산읍에서 물러났다. 전라도 무주와 충청도 영동을 연결하는 교통로인 김산 일대의 농민군도 도집강 편보언의 지휘를 받으며 3월부터 활동하였다. 9월 25일 최시형의 기군령(起軍令)을 받고 총집결한 김산의 농민군은 김산을 장악하였지만. 대구감영의 남영군이 10월 5일 김산에 진주하면서 활동을 멈추었다.
경상도에서 농민군이 세력을 형성한 또 다른 지역은 지리산에 접한 남서부 일대이다. 이 일대는 순천, 광양 등 전라도지역 농민군과 깊은 관계에 있었는데, 특히 하동과 진주는 농민군이 세력을 크게 떨쳤던 곳이다. 하동의 농민군은 여름부터 이미 미약하게나마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광양 등지에서 활동하던 영호(嶺湖)대접주 김인배의 도움으로 7월에 하동에 도소를 설치했지만, 곧 민보군의 습격을 받고 광양을 밀려났다. 8월 29일 김인배는 휘하 농민군과 하동 농민군 수천명을 하동과 광양의 길목인 섬진 나루터로 이동시켰고, 하동의 민보군이 이에 맞섬으로써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싸움에서 농민군은 큰 승리를 거두어 하동부를 장악하였다. 이후 하동의 농민군은 김인배의 행로를 따라 진주로 옮겨갔다. 농민군의 하동에서의 승전은 사천, 곤양, 진주 등 인근 지역 농민군을 고무시켜 여러 지역에서 봉기가 이어졌다. 진주지역의 농민군은 손은석의 지휘를 받으며 4월말부터 활동했는데, 이들은 곧바로 관군의 공격을 받고 큰 피해를 입었다. 이들은 이후 활동을 멈추고 있다가 9월 들어 김인배가 하동을 공략하자 이에 호응하여 재봉기에 나섰다. 9월 8일 농민군 진주대회를 마친 이들은 10일에 또 방문을 내어 다같이 항일투쟁에 나서자고 호소하였다. 이 대회는 진주의 농민군과 하동에서 김인배가 이끌고 온 전라도 농민군이 힘을 합쳐 연 것이며, 이때 진주읍내에는 충경(忠慶)대도소가 설치되었다. 남해에서는 9월 11일 농민군이 봉기하였고 사천에서는 13일 약 800여명이 봉기하여 관청을 불태우고 무기를 빼앗았다. 15일에는 1,500~1,600여명의 밀양 농민군이 관아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 일본 병참부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15일에는 곤양 농민군이, 16일에는 고성 농민군이 읍내를 점거하였다. 이렇게 봉기한 군현의 농민군은 진주성으로 향했다. 17일 하동의 농민군 수천 명이 진주성에 들어온 데 이어 18일에는 김인배가 이끄는 전라도 농민군 천여 명이 다시 진주성에 들어와 진주성에는 4,000~5,000명의 농민군이 집결하였다. 이들은 9월말까지 진주 인근 등을 오가며 활동을 벌였다. 이들 경상도 남서부지역의 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 연합부대와 10월 10일부터 진주 일대에서 두 차례의 접전을 벌였으나 패하였다. 이어 진주 수곡면에 다시 집결한 농민군은 14일 일본군과 고승산성에서 필사적인 항전을 전개했지만, 200여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내고 패하고 말았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다시 하동으로 와서 10월 22일 일본군, 관군과 접전하다가 패전하였고, 김인배도 광양을 돌아갔다. 그러나 이 같은 과정에서 농민군의 공격을 대구-안산 사이에 있는 일본군 전선이 모두 파괴되기도 하였다.
나. 강원도
강원도의 농민봉기 역시 크게 두 세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충청도 제천․청주 등지의 농민군과 연계해서 활동한 강원도 남부지역 농민군의 활동이고, 또 다른 하나는 홍천 대접주 차기석이 홍천 지역의 농민군을 이끌고 벌인 내륙지역의 활동이다. 강원도의 경우, 3월 봉기 때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고, 농민군의 조직적 봉기는 9월초에 나타난다. 9월초 충청도 제천․청주의 농민군과 강원도의 영월․평창지역 농민군이 연계하여 일제히 봉기하였다. 이들은 평창에 집결하여 인근의 정선 농민군들과 합세, 수천의 대군을 이룬 뒤 9월 4일 강릉대도호부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점령했다. 그러나 농민군은 9월 7일 민보군의 습격을 받아 20~3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대관령을 넘어 평창으로 물러났다. 강릉부에서 물러난 이후로도 농민군은 평창․영월․정선 등 대관령 서부지역을 장악한 채 계속 강릉을 위협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11월 4일 평창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100여명의 희생자를 내었고, 그 패전으로 강원도 남부지역의 농민군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홍천지역에서는 대접주 차기석이 이끄는 농민군이 활동하였다. 홍천의 농민군은 남하하여 충청도 일대의 농민군에 합류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9월 최시형에 기포령에 따라 이들은 남하를 시도했으나 강원도 지역 민보군과 관군의 방비에 막혀 결국 홍천으로 돌아왔다. 10월 11일 홍천군 내촌면에 집결한 이들은 이날 관곡 창고가 있던 동창일대를 공략한 후 강릉으로 진군해 갔다. 이 홍천의 농민군은 10월 21일 맹영재가 이끄는 민보군과 홍천 장야촌에서 마주쳐서 접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서석면 풍암리 자작고개로 퇴각했다. 이들은 여기서 22일에 또다시 관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지만, 800여명에 이르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패전했다. 봉평 내면까지 퇴각한 농민군은 11월 11~14일까지 일본군을 중심으로 한 군대와 맞서 싸우다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것이 강원도 지역에서의 마지막 항쟁이었다
다. 경기도
경기도 지역 농민군의 활동 역시 9월 재봉기가 시작되는 9월에 들어서야 비로소 나타났는데, 그나마 세력과 활동이 매우 미약한 편이었다. 9월 초순 어느 곳에서 봉기한 농민군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들이 죽산과 안성을 침범하였다. 용인 직곡과 금량 등지에서도 농민군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가 21일 이두황의 기습을 받아 20여명이 체포되고 나머지는 흩어졌다. 9월 25일에는 농민군 수천 명이 음죽(陰竹) 관아를 포위 점령하고 군기를 빼앗아 갔다. 27일에는 이천의 농민군이 일본 병참소의 공격을 받아 30명이 체포되고, 지도자급 10명이 처형당했다. 29일에는 안성, 이천의 농민군 수만 명이 충청도 진천을 점령하여 관사와 관속을 결박하고 무기고를 헐어 군기를 빼앗았다. 29일 안성 등지 농민군의 충청도 진천 공격은, 용인, 죽산, 안성, 음죽, 이천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경기도 지역 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을 피해 충청도 지역으로 남하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경기지역에서 농민군의 조직적인 봉기는 거의 사라졌다. 대신 이 지역 농민군은 충청도 농민군과 합류해 진천, 충주, 음성, 괴산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경기도 지역 농민군이 경기도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충청도 쪽으로 남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곳이 서울의 인접지역이어서 초기부터 일본군과 관군의 강력한 진압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라. 황해도
황해도 역시 9월 재봉기가 시작된 이후 본격적인 봉기가 이루어졌다. 황해도에서는 9월 들어 서해연안의 여러 군현에서 농민군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다. 10월 6일 농민군 수만 명이 감영인 해주의 취야장터에 모여 폐정(弊政)을 적어 제출한 뒤 일단 해산했다. 그러나 이들은 임종현의 지휘 아래 다시 모여 해주 감영을 점령했다. 농민군은 관청을 부수고 포를 쏘고 군기를 탈취하고 문서를 불사르고 판관 등을 결박 구타했다. 한편 해주를 점령한 농민군 이외에도 황해도 지역 곳곳에서 농민군이 활동했다. 재령의 농민군 2,000여명은 10월 26일 쌀을 사들이기 위해 파견된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28일에는 일본인 2명을 죽였다. 이들은 11월 1일 일본군과 접전을 벌이다 15명의 희생자를 내고 흩어졌다. 10월 27일에는 풍천의 농민군 수천 명이 봉기하여 풍천부를 점령하였고, 11월 4일에는 평산일대의 농민군이 일본군을 공격한 뒤 평산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평산․김천일대의 농민군은 곧 서울에서 파견된 일본군에게 쫓겼다. 해주 감영에서 물러났던 농민군은 황해도 곳곳의 관아를 잇따라 점령했다. 11월 11일에는 500~600명의 농민군이 강령현을 습격하여 일본군과 싸웠고, 13일에는 신천의 농민군이 일본군과 접전했다. 황해도 일대의 농민군은 13일 송화현, 문화현, 평산부, 조니진, 오우진, 용매진을 점령하였고, 14일에는 장연부, 신천군, 장수산성, 수양산성을 점령했다. 농민군은 15일에는 옹진 수영을 공격하고, 17일에는 연안부를 공격했다. 또한 19일 은율현과 21일 백천군을 공격하였다. 이처럼 황해도 각지에서 기세를 올리던 농민군은 다시 해주 감영 공격을 대대적으로 준비했다. 그리하여 11월 20일 취야장터에 수천 명이 모였고 24일에는 수만의 농민군이 총집결하였다. 이들 농민군은 11월 27일 해주감영을 총공격하였다. 이때의 농민군은 재령, 신천, 문화, 장연, 옹진, 강령 등지에서 집결한 3만여 명에 이르는 연합부대였다. 해주성 공격의 선봉장에는 당시 동학접주이던 백범 김구도 있어 주목된다. 그러나 농민군은 격전 끝에 2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후퇴했다. 해주 전투에서 패배한 황해도지역 농민군은 이후 이듬해 1월까지도 산발적인 항쟁을 벌였으나 곧 기세가 꺾였다. 황해도는 경기 이북에서 농민군 활동이 가장 격렬했던 곳이다. 감영이 농민군 수중에 들어간 사례는 동학농민혁명 전체 과정에서 전라도를 제외하고 황해도가 유일하다. 2개월 여의 항쟁으로 끝났지만 황해도 지역 농민군의 위세는 삼남지방에 못지 않았다. 이처럼 대단한 세력을 형성했음에도 황해도지역 농민군은 인근 지역과 연계하지 못한 채 독자적으로 활동한 한계를 보였다.
5. 공주전투, 우금치의 좌절
10월 21일경 논산을 출발한 전봉준과 손병희의 농민군은 공주를 눈앞에 두고 23일부터 잇따라 일본군 및 관군과 전투를 벌였다. 공주성을 둘러싼 전투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이보다 며칠 전인 21일 충청도의 농민군이 목천 세성산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는 공주의 측면을 장악하여 관군의 남하를 견제하고 농민군의 진격로를 확보하려는 것이었으나 농민군은 패하였다.
논산을 거쳐 노성에서 공주로 들어오는 길은 경천으로 해서 판치(板峙, 널치)를 넘어 효포(孝浦), 웅치(熊峙, 곰티,능티)를 경유하는 길과 이인을 거쳐 우금치로 들어오는 길이 있다. 이때 농민군은 노성에서 2대로 나누어 전봉준이 이끄는 1대는 판치-효포-웅치로 공주의 동쪽을 공격하고, 나머지 1대는 이인으로 나아가 공주의 남쪽을 공격하는 전략을 썼다.
공주성을 둘러싼 공방전은 크게 두 번 치뤄졌다. 1차전투는 10월 23일~25일 사이에 벌어진 이인․효포․웅치 싸움이며 2차전투는 11월 8일부터 4일간 계속된 우금치(牛金峙) 혈전이다.
공주전투는 23일 이인에서 시작되었다. 이날 이인을 점령한 농민군은
구완희의 순영병, 성하영의 경리청병, 스즈끼(鈴木彰) 소위가 지휘하는 100여명의 일본군과 만났다. 농민군은 일․관(日․官)연합군의 공격을 받자 인근 취병산으로 후퇴하여 반격전을 폈다. 이들은 여기에서 몇 차례의 공방을 주고 받았는데, 날이 저물면서 농민군에 밀린 관군은 10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공주쪽으로 달아났다. 첫 접전에서 농민군은 승리를 거둔 것이다.
24일에는 효포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곳을 지키던 관군이 23일 밤
금강을 건너 대교리 일대의 농민군을 치러 나간 틈을 타고, 전봉준의 주력군 1대가 이곳을 급습한 것이다. 전날 이인에서 패주한 관군은 포를 쏘며 농민군의 진격을 막아섰다. 양쪽의 공방은 해가 지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25일 날이 밝는 즉시 농민군은 전봉준의 지휘 아래 웅치를 공격하였다. 이에 일․관(日․官)연합군은 강력하게 방어하며 맞섰다. 웅치전투의 상황은 농민군에 불리했다. 이규태의 본진이 모리오(森尾雅一) 대위의 일본군 100여명과 합세한 데다 대교에서 돌아온 부대까지 가세해서, 진압군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세력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23일부터 25일까지의 전투는 일종의 전초전인 셈이었다. 승패가 확연히 갈린 것은 아니었으나,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경천으로 물러났다. 이때 전주에 있던 김개남은 북상을 시작하여 24일 '청주로 가는 길을 열고자' 금산을 점령하였다. 금산을 친 것은 공주전투의 성원(聲援)이 되기 위해서였다.
11월 초순 노성과 경천일대에서 전열을 정비한 농민군은 일본군․관군과 전면 전투를 벌였다. 농민군이 공주성 2차 공격에 나선 것은 11월 8일이었다. 공격에 나선 농민군은 2대로 나뉘어 이인과 판치의 관군을 공주쪽으로 몰아 붙였다. 판치의 관군은 농민군의 대대적인 진격에 밀려 효포와 웅치로 후퇴했다. 농민군은 계속 돌진하여 효포와 웅치의 뒷면까지 진출, 주위에 깃발을 꽂고 기세를 올렸으나 더 이상의 공격은 하지 않았다. 판치 쪽에서는 관군이 일방적으로 후퇴함으로써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인의 상황은 약간 달랐다. 관군은 선봉진의 후퇴 명령을 시행할 사이도 없이 농민군에게 포위되었다. 이들은 밤중이 되어서야 겨우 퇴로를 뚫어 10리쯤 떨어진 우금치까지 도망칠 수 있었다. 9일 날이 밝으면서 동학농민혁명의 전과정에서 가장 처절한 싸움으로 기록되는 이른바 우금치 전투가 벌어졌다. 이날 농민군은 총집결하여, 동으로 판치 뒷봉우리에서 서쪽으로 봉황산 뒷편까지 30~40여리에 걸쳐 산 위에 진을 쳤다. 북쪽을 제외하고 삼면에 진을 치며 공주감영을 둘러싼 것이다. 일․관(日․官)연합군은 우금치를 중심으로 왼쪽 봉우리에 모리오 대위의 일본군이, 맞은편 견준봉에는 백낙완, 고개 밑에는 성하영 부대가 각각 배치돼 주방어선을 형성했다. 또한 동남쪽으로 금학동, 웅치, 효포의 봉수대, 그리고 금강나루와 산성쪽, 공주감영 뒷편 봉황산 방면에 각각 수비대를 배치했다. 일․관(日․官)연합군 역시 전면 전투 채비를 갖춘 것이다. 곧 효포 쪽에서 전투가 시작되었고, 전봉준의 주력부대가 우금치를 공격하자 일본군과 관군이 무차별 포격을 가함으로써 전투는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우금치를 지키던 성하영 부대가 농민군의 공격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모리오 대위는 우금치 견준봉 사이의 능선에 일본군을 배치하였다. 공격해 오는 전봉준 부대를 향해 이들은 산마루에 나란히 서서 일제사격을 가했다가 산 속으로 은신하였다. 농민군이 고개를 넘고자 하면 곧바로 또 산마루에 올라가서 일제히 총을 발사했는데, 이렇게 하기를 40~50차례 거듭하자 농민군의 시체가 온 산에 가득히 찼다. 농민군은 잘 훈련된 일본군과 그들의 최신 병기의 화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수천 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낸 채 끝내 패하고 말았다.
9일의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은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전투는 이후 11일까지 계속되었지만, 이미 전면적 전투가 아니었다. 수만에 이르는 농민군은 일본군 200여명 관군 2,500여명 등 2,700여명에 불과한 진압군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이런 수적 우세에도 참혹하게 패배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지적이 있으나, 공주전투에서 패한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은 전투 수행능력과 화력의 차이였다. 일본군은 잘 훈련된 정예병이었고 대포와 연발총, 최대사거리가 2,000m에 이르는 미제 스나이더 소총과 무라다 소총 등 최신식 무기로 무장했다. 그러나 농민군은 말 그대로 농민이었고 대부분 칼과 활, 죽창을 지녔다. 일부가 지닌 재래식 화승총은 사거리가 100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차이로 농민군은 산 정상을 지키고 있는 일본군에게 접근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6. 퇴각, 그리고 해산
우금치에서 밀린 전봉준은 잔여부대를 이끌고 노성으로 후퇴, 일단 진용을 정비했다. 이곳에서 농민군과 관군이 연합하여 항일투쟁에 나설 것을 조선군대에게 호소했으나 이미 승세를 잡은 데다 일본군의 지휘하에 있던 관군이 이에 호응할 리 없었다. 이 사이 금산에 있던 김개남이 5,000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11일 회덕과 신탄진을 경유하여 13일 청주를 공격하였다. 이때의 북상 또한 전봉준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공주를 공격하던 전봉준의 후원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김개남 역시 청주영병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9월 재봉기에서 전봉준과 김개남이라는 두
최고 지도자가 북상로를 달리 했다는 점을 두고, 이것이 농민군이 패한 하나의 원인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양 지도자가 갈등과 대립관계에 있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공주, 청주로의 분산공격은 3월 봉기에서 보여준 농민군의 전략과 유사한 것이었으며, 그 목적은 농민군을 전력을 키우고 진압군을 분산시켜 공격효과를 최대화하는데 있었다. 9월 재봉기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의 전라도 농민군과 최시형, 손병희의 충청도 농민군이 일치된 전략 속에 치른 총력전이었던 것이다.
전봉준이 이끄는 3,000여명의 농민군은 14일부터 일본군, 그리고 이규태와 이두황이 합류한 관군의 본격적인 추격을 받기 시작했다. 농민군은 14일 노성에서 공격을 받고 논산으로 밀려났고, 15일에는 논산 황화대에서 접전을 벌였다. 황화대 전투는 전봉준이 2차 봉기 이후 조직적으로 저항할 수 있었던 마지막 싸움이었다. 이후의 농민군은 저항력을 상실한 채 토벌군의 소탕전에 일방적으로 희생당하고 말았다. 농민군은 막대한 희생자를 낸 채 강경으로 패주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강경에서 만났으나, 이들의 조직과 세력은 이미 완전히 허물어진 상태였다. 이들은 함께 남하하여 11월 19일 재봉기의 출발지인 전주에 이르렀다. 그러나 계속되는 패배로 이미 농민군의 전력과 사기를 크게 꺾였고, 더욱이 일본군과 관군은 그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전면 전투는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22일밤 전봉준, 손병희는 고부방향으로, 김개남은 남원방향으로 흩어졌다. 농민군이 철수한 전주에는 이튿날 일본군 경군이 들어와 전주성을 장악하였다. 전주에서도 밀려난 농민군은 25일 금구 원평에서 접전했다. 한나절 동안 전개된 원평 구미란(龜尾卵) 전투에서 농민군은 또다시 적지 않은 희생자를 내고 태인으로 패주했다. 27일에는 태인전투가 벌어졌다. 태인 일대의 농민군까지 가세하여 5,000~6,000명의 세력을 이룬 농민군은 하루동안 세 차례에 걸친 접전을 벌이며 혼신의 힘을 다했으나, 일본군과 관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온 몸을 던져 새 세상을 열고 나아가 외세의 침략을 막고자 했던 농민군의 의지와 행동이, 일제의 야욕과 무력 간섭으로 좌절되고 만 순간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반일항쟁으로서의 의미는, 역설적이지만 농민군이 꺾인 후 거국적인 저항 한 번 못하고 조선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7. 최후의 항쟁
전봉준이 휘하 농민군을 해산시킨 데 이어 11월 27일 광주를 점령하고 모여 있던 손화중과 최경선도 곧 휘하 농민군을 해산시켰다. 이처럼 각 지역의 주요 농민군은 해산 길에 접어들었다. 이들은 산간벽지로 숨거나 타지역으로 도피했다.
그러나 일부는, 특히 광주에서 해산한 농민군은 전라도 서남해안의 장흥과 강진 쪽으로 내려갔다. 이들은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이곳의 농민군에 합류하여 일본군과 관군에 최후까지 저항하였다. 당시 장흥, 강진 일대의 농민군은 이방언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이 무렵 여기에는 광주의 농민군 만이 아니라, 인근 남평, 보성, 능주, 화순 등지의 농민군도 합류했다. 또한 전봉준 본영에서 활동했던 금구대접주 김방서 부대도 합류했다. 이로써 장흥 농민군의 군세는 1만~3만여 명으로 크게 강화되었다. 이들은 12월 3일 벽사역과 장흥부 인근까지 진출했다. 12월 4일 벽사역(碧沙驛)을 점령하고, 다음날에는 장흥부성을 점령한 후 강진현과 강진병영으로 방향을 돌렸다. 9일 농민군은 강진현도 점령하였다. 농민군은 강진현을 함락시킨 여세를 몰아 10일 강진병영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처럼 농민군이 장흥․강진 일대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는 동안, 나주에 머물던 관군은 일본군 미나미 소좌의 지시에 따라 강진으로 향했다. 관군의 추격 소식을 들은 농민군은 영암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바꿔 다시 장흥으로 돌아갔다. 장흥으로 가던 도중인 13일 농민군은 관군과 일군의 선발대와 만나 1차 접전하였다. 농민군은 2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물러났다가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장흥부로 진출을 꾀했다. 그리하여 15일에 수만의 농민군은 교도병 및 일본군 본대와 장흥 석대들에서 전면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또 패하여 수백명의 희생자를 내고 퇴각길에 올랐다. 이들은 17일에 장흥 옥산리에서 최후의 항쟁을 벌였으나 여기서도 1백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이 옥산리 전투를 끝으로 장흥, 강진 일대 농민군도 해산했다. 전라도 일대에서의 조직적 저항은 이렇게 끝이 났다.
한편 북접 손병희가 지휘한 농민군은 태인 전투 이후 장성 갈재를 넘어 순창을 거쳐 임실로 들어갔다. 손병희는 11월 초순부터 임실 청웅면 새목티에 머물러 있던 최시형을 만나 함께 도피길에 올랐다. 임실을 떠난 이들은 장수 장계로 가던 도중 관군과 여러 차례 접전한 뒤 금산을 거쳐 12월 5일 무주를 점령하였다. 다시 북상길에 오른 손병희는 충청도 지역을 넘어가 9~10일 청산, 황간, 영동을 잇따라 함락하였으나, 청주영병 및 보부상, 민보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산하였다. 이때 손병희는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나와 보은 북실로 향했다. 북실에 주둔한 농민군은 17,18일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아 300여명이 사망했다. 북실을 떠난 손병희는 청주 화양동을 거쳐 충주 회서촌으로 갔다. 이 곳에서 관군의 습격을 받아 충주 무극시장으로 옮긴 손병희 부대는 24일 관군의 공격을 받아 대오가 완전히 흐트러졌다. 이에 최시형은 해산령을 내렸고, 최시형을 비롯한 손병희 등은 강원도 홍천으로 향했다. 이들은 강원, 충청도를 오가며 이후 4~5년 동안 세상의 이목을 피해 숨어 지냈다.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남접 핵심지도자들이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을 당한 반면, 손병희 등 동학교단의 지도자 상당수는 관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살아남았다. 손병희 등은 뒷날 동학교단을 다시 일으켜 천도교(天道敎)로 교명을 바꾸고, 근대개혁운동과 항일민족운동에 헌신하였다.
해가 바뀌어 1895년 1월 24일, 대둔산(大屯山:전북 완주군 운주면과 충남 금산군의 접경, 해발 878m) 정상부근으로 도피하여 요새를 세우고 있던 농민군 25명이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에 맞서 저항하다가 전원 몰살당하였다. 이 대둔산 전투는 규모는 작지만 동학농민혁명 전과정 중 기록에 전하는 가장 마지막 전투다. 대둔산 정상 부근에는 갑오년 11월 중순께부터 농민군 일부가 험한 암벽을 의지한 천연요새에 은거해 있었다. 이곳에는 어린 소년 1명과 28~29세의 임산부를 포함한 26명의 농민군이 마지막까지 항복을 거부한 채 저항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의 일제 사격으로 쓰러져 갔다. 어린 소년을 제외한 25명 모두가 장렬히 산화했다. 이것을 최후의 항전으로 해서 동학농민혁명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튿날부터 전라도 일대에 있는 일본군과 관군은 모두 전라도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농민군이 패퇴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전봉준, 손병희, 김개남이 이끈 주력 농민군에 참여한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외에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농민군도 일본군에 의해 잔혹하게 처벌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농민군 진압에 혈안이 되었다. 그것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는데 있어 무엇보다 큰 장애가 되는 세력이 바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관군 및 향촌 유림을 중심으로 조직된 민보군에 의한 자의적인 살육이 뒤따랐다. 그리하여 1894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조선 전역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희생된 농민군 숫자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당시의 문서들은 20만명 이상, 혹은 30만명, 혹은 30~40명이 전사 또는 학살되었다고 기록하였다. 농민군 지도자들 역시 대부분 체포, 처형되었다. 김개남은 12월 초순 태인 종송리(현 정읍군 산내면 종성리) 매부 서영기의 집에서 잡혀 전주에서 효수되고, 전봉준은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쌍암리)에서, 손화중은 고창 부안면 수강산 산당(山堂)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전봉준은 '일본에 협조하면 살려준다'는 일본의 수 차례에 걸친 유혹을 당당히 뿌리치고 이듬해 3월 29일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과 함께 의연하게 교수대에 올랐다. 이런 잔혹한 토벌 속에서도 살아남은 이들의 행로는 어땠을까? 이들의 대다수는 1895년 일본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터져 나온 의병대열에 합류하여, 또 다시 항일민족운동에 헌신하였다. 의병의 절반은 비류(농민군)라는 당대의 기록이 이런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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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