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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카나프 (전기자전거,코라텍,대나무자전거,폴딩미니벨로) 원문보기 글쓴이: defunct
스포일러가 되지 않기 위해서
(Spoiler는 망치다 라는 뜻을 가진 spoil에 er을 붙여서 망치는 사람 이라는 뜻인데요..
영화 내용을 미리 알려서 영화 보는 재미를 반감시키는 사람에게 사용합니다.
스포일러의 예를 들면...)
아무튼, 조심 조심 하면서 글을 쓰겠지만요...
우선은 영화를 보신 분들만 글을 보시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도 됩니다. ^^
저는 분명 미리 말씀 드렸어요. ^^
지난 토요일에 설국열차를 봤습니다.
사실 영화를 매우 좋아해서, 혼자 영화 보러 다니는 경우도 종종 있는 편인데요...
너무 폭력적인 영화는 잘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설국 열차는 매우 폭력적이지요.
그래서 근본적으로 제 취향의 영화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영화 전반에 흐르는 현실 세계에 대한 비아냥 거림이 너무나 통쾌하고
또 공감이 많이 갔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셨는지요?
이 영화의 배경은 지구의 멸망 이후의 시대입니다.
지구가 멸망하게 된 것은 지구 온난화에 대응하기 위해 내린 전 지구적 조치가
결국 태양빛을 가로 막아 엄청난 빙하기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런 생각이 조금 먼 미래처럼 보이고,
현실 감각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남극, 북극에서 사는 동물들이나
남반구 뉴질랜드나 호주 같은 국가 사람들에게는 이미 현실적인 문제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북극의 눈물같은 다큐멘타리를 보셔서 빙하가 무너져 내리고
극지방의 기후가 바뀌면서 펭귄과 북극곰이 굶주리며 죽어가는 현실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동물만의 일이 아니지요.
호주나 뉴질랜드에서는 아이들이 모자를 쓰지 않으면 체육활동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오존층이 점점 얇아 지면서 지구 온난화가 심해 지고 있는 것은 잘 아실텐데요...
오존층이 극지방에서부터 사라지고 있나 봐요.
그래서 하늘에 오존층 구멍이 뚤리고 그 구멍으로 인해 사람에게 해로운 광선들이
그대로 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체육 시간에 모자를 쓰고 무릎까지 가리는 옷을 입기도 한다고 합니다.
( http://blog.daum.net/triplesis/695293 에서 퍼왔습니다. 블로그 주인장분께서
혹시 싫어 하시면 삭제하도록 할께요^^ 호주의 체육복이라고 하네요. )
여러분들은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미래에 대한 모습을 담은 SF류의 영화에서
미래의 인간의 모습이 많이 바뀌어 오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SF류 하면 대부분 우주로 진출해서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
외계인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들이 주류를 이루었지요.
은박지 비슷한 옷을 입고 군대 처럼 계급화 된 우주선을 타고 다니면서
온갖 정보를 다 제공해 주는 영상 통화 장치... (사실 지금의 핸드폰이 그 영화속 장치와 대동소이합니다.^^)
를 들고 있는 모습에서,
비록 외계인, 혹은 외계 생물로 인한 전투는 있으되 지구 몰락의 암울한 그림자는 찾기 어렵지요.
그런 의미에서 혹성 탈출이라는 영화가 안겨 준 충격은 매우 예외적이면서도 또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인류가 멸망할 수 있다라는 생각 자체가 매우 뜻밖의 생각이었기 때문이지요.
혹성 탈출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습니다.
우주선을 타고 자신이 불시착한 곳이 원숭이가 인간을 학대하는 이상한 별이라고 믿었던 주인공은
원숭이들로부터 탈출해 도망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마주하게 된 것은
바로 자유의 여신상이 무너져 내린 장면이었습니다.
원숭이가 지배하는 이상한 별이 곧 인류의 실제 미래상이었다는 것으로 끝나는
혹성탈출은 마음 속에 큰 충격을 주는 엔딩 장면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외적이었던 인류 멸망의 모습이 이제는 지구의 미래를 다룬 영화에서
아주 보편적인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
인류의 미래는 더 이상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사실 인류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미래 학자들도 쉽게 말하지 못하고 있는 질문이지요.
그런데 과거에 비해 낙관론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각종 매체와 소설 등에서도 인류의 미래가 점점 암울해 지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특히 설국열차가 다루고 있는 인류의 미래는,
전 세계가 눈 속에 잠겨 인류가 살아 갈 수 없는 상황이 된 그 시점에도
여전히 권력과 폭력, 다스림이 존재할 것이며
그것이 파괴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기 보다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지켜져야 하는 그 무엇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영화 속 미래를 넘어선 인류의 생존 형태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영화를 혹시 보셨나요?
이 영화 속에서도 암울한 미래의 어느 시점이 등장합니다.
어느 날 모든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걸려 눈이 멀게 됩니다.
군인들은 눈먼 자들을 차에 실어 무작정 수용소에 강제로 집어 넣습니다.
그 수용소 안에서는 각 방별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생활하게 되는데,
지급되는 보급품은 적고 눈이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생활하게 되니
지저분하고 불편하기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남편을 따라 한 여인이 눈이 멀지 않은 채로 오게 됩니다.
그 여인은 유일하게 그 곳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지요.
며칠 지나지 않아 적은 보급품으로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하게 되는 시점에서
총을 든 한 남자가 나타나 모두를 위협합니다.
그리고 보급품을 강탈한 채 각 방별로 배급을 주기 시작합니다.
보석을 가져와라... 뭔가 귀중한 것을 가져 오면 배급을 주겠다.
사람들은 시계와 반지를 걷어서 먹을 것을 바꾸어 갑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곧 그는 여자를 요구합니다.
눈이 멀지 않은 여주인공의 방에서는 누구를 보낼 것인지 논의가 일어나지요.
모두가 눈이 멀었지만, 그곳에서 눈이 멀지 않은 여주인공은
그 악당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지만, 결국은 죽이지 않습니다.
제가 살펴 보니 이 영화나 혹은 원작을 읽으신 많은 분들이 적은 글들은
인간의 본원적인 욕심 같은 것에 주목하고 계신데요...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권력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새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총을 든 사람을 죽인다면, 4개의 수용소 방 안에 갇힌 사람들은 더 큰 무질서 속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악당을 놓아 둔 채, 각 방에서 보석과 여자를 가져다가 바치는 지금의 상태가
더 낫다 라고.... 타협을 합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쉽게 긍정할 수 없습니다.
제가 "해외에서 자전거 타기"라는 주제로 연작의 글을 적고 있는데요,
결국 도달하게 될 질문은 "한국인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주제인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동의하지 않으실 수도 있는데요,
저는 한국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를 "반권력적 성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당 시대의 한국인들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은 반권력적, 권력 해체적, 저항적 특성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볼까요?
만약 여러분이 어느 호텔에 예약을 하고 비행기를 타고 그 나라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호텔에서 방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두바이에 가서 실제로 겪었던 일입니다.
저는 당연히 싸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사람들이 저를 상대를 안 해 주더군요.
이런 일은 두바이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뮌헨 공항에서, 암스텔담 공항에서...
블라디보스톡에서... 베이징에서...
아, 호텔이 예약이 안 되었다는 것이 아니구요.... 말도 안되는 일들이 일어났을 때
그것에 대해서 제가 하소연하고 따져도, 아무 결과도 일어나지 않을 뿐더러... 저만 속타고 마는
그런 일들이 왕왕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비행기가 연착될 때, 세관에서 면세 도장을 받을 때, 기차가 제 시간에 오지 않을 때...
호텔에서 디파짓된 돈을 취소했을 때 관련된 서류를 달라할 때... 등등...
수많은 경우에 손님을 대하는 그 사람들은 불친절했고, 또 권위적이었으며,
제 하소연을 제대로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해외에서 거주하는 한국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하다 보면
흔히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외국에서 사는 삶이 힘든데, 그게 사람을 무시하는 것 같다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은 한국이 참 유일하게... 약자가 강자한테 소리 지르고 달려 들 수 있는 나라이다 라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권력에 대한 뿌리깊은 저항 의식이 있는 민족 같습니다.
식당에서 맛 없는 음식이 나올 때,
머리카락이 떨어졌을 때,
물건을 샀는데 곧 고장이 났을 때...
이런 모든 경우에 한국은 호통치고 열불 내며 당연한 보상을 요구하지만,
한국 외의 많은 나라들에서, 호통 치는 것, 소리 지르는 것, 싸우는 것 등등이 잘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아니, 의외로 위험하기도 합니다.
한국의 권리 주장 경향은 어떻게 보면 그만큼 한국이 단일 민족이라는 국가적 형태 속에서
안전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다 못해 술집에만 들어가도 총을 든 사람들이 몸 수색을 하고 들여 보내는 러시아 같은 나라에서
화가 난다고 소리 지르며 싸우는 일은 거의 없지요.
미국도 그렇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행동은 자칫하면 위험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유럽 같은 경우는 몰상식하다 라는 인식... 후진적이라는 인상과 함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왕따 시키는 현상을 경험하게 될 수 있지요.
일본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일본에서 아이 키우는 부모들은, 밖에 아이들 데리고 나가기도 힘들다고 하지요.
아이가 울기만 해도 모든 사람들이 눈치를 주니까요....
동의하실지 모르지만...
한국 사람들은 뿌리 깊은 권력에 대한 불신이 잔존하고 있고...
(실제로 권력은 정당하지 못하고 불신할 만한 것이기도 하지요^^)
또 자신의 권리가 침해 당하는 것을 잘 못 참습니다.
권력에 대해 비아냥 거리는 트렌드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학생들의 반항적인 기질도 놀라울 것이 아니지요.
한편으로는 그 이면에 우리의 슬픈 역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일제라는 기형적인 정권, 폭력과 억압의 지배 속에서 억눌렸던 기억
그리고 엄청난 전쟁의 광기와 그 뒤를 이은 철저한 가난
짧은 시간 안에 이룬 경제 발전 속에서 그 과거의 기억들이 우리 민족을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더 이상 식민지에 있지 않아,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아,
더 이상 독재 정권 밑에 있지 않아,
예전에 한 외국인이 한국에 대한 에세이를 남겼는데, 그 내용에 공감이 많이 갑니다.
왜 한국 사람들은 걸을 때 팔꿈치로 사람 치는 것을 예사로 아는가 하는 글이었는데요...
여러분은 그런 생각 하시나요?
사실 저도 제가 그런 줄 몰랐는데요...
외국 관광지를 다니다 보면 저를 포함한 한국 사람들, 정말 위태위태 합니다.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 자기 발 옆에 다른 사람 발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비집고 지나 가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외국인이 이런 면을 지적했더라구요.
한국은 본래 사농공상의 계급 체계가 있었는데, 그것이 무어지면서,
과거 양반이었던 사람은, 아니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이러면서 으스대구요,
과거 하층민이었던 사람은, 너만 양반이냐? 나도 양반인다.. 이러면서 으스댄다는 거여요.
사실 우리 나라의 경제 발전의 이면에는 국민들의 근면성, 그리고 누구나 성공해 보겠다는 성취 의욕 같은 것들이
그 원동력이 되었는데,
그 뿌리를 살펴 보면 625 전쟁으로 인해 그 이전까지 존재했던 계급적 체계가 무너지면서,
양반은 양반대로 과거의 영광, 가문의 체면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고
또 못 살던 사람, 하층민들은 하루라도 빨리 그 위치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을 쳤던 것이
그 원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만약 625 전쟁이 없었다면, 그런 계급적 체제가 조금 더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있지요.
모든 민족이 전쟁으로 인해 있던 곳을 떠나 다 뒤섞여 버린다는 것은
매우 역사적으로 예외적인 현상이구요...
어떻게 보면 그것이 근본적인 경제 시스템의 변화를 뒷받침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 민족은 뿌리 깊은 반골 기질을 형성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글들에서도 적어 보겠지만,
그런 우리의 반골 기질이 좋으냐, 나쁘냐를 떠나서...
마음껏 써 먹을 수 있는 국가는 많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너만 잘났냐?" 라는 심정은 현재의 우리 국민들이 보편적으로 가진 마음가짐 중 하나 같습니다.
이것이 한국 민족을 성장 시킨 저력 중 하나이지요. ^^
작은 차는 작은 차대로, "차 작다고 무시하냐?" 하고 끼어들고,
큰 차는 큰 차대로, "내 차가 얼마 짜린데..." 이러면서 막아 서고...
조금만 불편을 당해도, "나 무시하냐?" 라고 소리 치게 되는 심리 속에는...
억압 받은 역사와 해쳬된 계급 구조가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권력의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아주 아주 민감한 부분입니다.
최근 들어 우리에게 더욱 살갖게 의식되게 된 "갑/을" 문제 역시 그런 부분 중 하나이지요.
성인 남자들은 군대에서 그것을 더욱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 할 것 없이 민감한 권력 문제를 첨예하게 겪은 이후 사회에 진출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국은 참을성 없는 나라, 조금만 건드려도 화를 내는 나라 라는,
외국과 비교하면 쉽게 열을 내는 나라가 된 것 같습니다.
(제 글에 대해서 여기 저기 왔다 갔다... 글이 방향이 없다고 불평하시는 분이 계셔서..
적다 보니 조심 스럽네요. ^^
그렇지만.. 이번 글은 그냥 영화 보고 나서 생각난 것들을 막 적어 보는 것이니까..
양해 부탁 드립니다. ㅠ.ㅠ 꾸벅 ~ )
아무튼, 이런 부분들은 나중에 "해외에서 자전거 타기" 연작글을 써 나가면서
보다 더 정돈된 글로 다시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어수선 하네요...^^ 인정 ~!!
그런데 이런 한국인들의 권력에 대한 민감함이, 우리 영화에 많이 반영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번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더욱 각별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한국 감독이기에 더 열정을 가지고 매달렸을 법한 그런 테마가 바로 이 영화를 이루고 있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만약 헐리우드에서 이 영화를 다루었다면,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권력의 문제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제국 주의라고 부르는 시대를 지나 왔습니다.
제국 주의는 가난한 나라를 영속적인 착취 구조 속에 몰아 넣음으로써
권력을 가진 부자 나라가 지속적인 영화를 추구하는 국가 간 권력 관계를 의미합니다.
무서운 그림이죠..?
원주민의 입에 위스키를 부어 넣고 황금을 얻어 내는 이 장면은 사실 제국주의의 본질을 여실히 보여 줍니다.
미국 진출 초기, 인디언을 만나 그들과 전투를 벌이던 미국 초기 이주민들은
곧 손 쉬운 정복 방법을 알아 냈습니다.
그들에게 술을 주는 것이지요.
원주민들은 술에 빠져 서서히 무너져 갔습니다.
그런데 이 제국주의가 꽤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었지요.
남미를 무너 뜨린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잔인한 정복사는,
정말 눈 뜨고 제대로 볼 수 없는 참혹한 장면들입니다.
그들이 노린 것은 엘도라도의 황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작 하나님을 모르는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위선적 가면을 쓴 채
본국 사람들을 안심시켜 가면서 일확 천금을 위해 서슴없이 살인을 자행했지요.
이후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노예로 차출하여, 다시 남미에 집어 넣고,
그 결과 "삼보"라는 흑인과 남미 주민의 혼혈 민족을 새롭게 탄생시킨 것도 바로 이 제국주의의 짓입니다.
제가 갑자기 제국주의를 들먹이는 이유가 뭘까, 궁금하시죠?
바로 저는 이 영화를 제국주의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제국 주의를 자행하던 시대, 정말 아이러니칼 한 것은,
그 이면에 이데올로기적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초기 황금을 노린 단순한 침략 위주의 제국 주의 시대에는 그것이 명확하지 않았지만...
유럽에 개신교 문명이 확산되면서 선교의 열정이 불타 오르던 18세기, 19세기,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측면의 확산은 놀라운 변화를 가져 옵니다.
즉 그들은 제국 주의의 이면에 계몽 주의라는 묘한 마약을 주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교도들, 신을 모르는 민족들은 노예와 같다..아니 그들은 이미 노예이다....
그들을 교화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식민지를 삼고 그 곳에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경제적인 착취 구조는 그들을 선진화 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고,
그것을 본국 사람들이 다 알 필요는 없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 그 나라 사람들도 선진화 될 것이고,
결국 전 세계는 야만의 시대를 지나 낙관적인 새 시대로 돌입할 것이다 라는...
그런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이데올로기...결국은 착취 이데올로기이지만,
계몽주의라는 허울을 쓴 괴상한 환상이 유럽 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도 비슷하지요.
한국은 미개한 나라, 그들에게 선진화된 국가의 체계를 세워 준 것은 일본이며
그 당시 그 시대적 사명을 가지고 오히려 서구 열강에 사로잡히기 직전에 있는 한국을
우리가 구해 주었다 라는... 말도 안 되는 의식이
지금도 일본 사람들에게는 팽배합니다.
제가 한국 사람들의 특징을 "반권력적"이라고 진단한 이면에는
일본과 구분되는 뚜렷한 민족 특성에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일본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한국 사람들과 크게 다른 면 중 하나가
"근본적인 권력 추종"적이라는 점입니다.
적당한 용어가 없어서,.. 제가 그냥 그렇게 이름 붙였는데요... ^^
양해해 주세요.
일본 사람들은 마음 깊숙히 절대적인 권력 하에 사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향수..그리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절대적 국가 권력이 없이 15세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투 속에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삶을 이어 와서일까요?
일본 사람들의 절대 권력에 대한 그리움은 정말 상상을 초월합니다.
자신의 배를 가르고 죽을 수 있는 그 명예로운 절대 권력..그것을 그들은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지요.
뭐가 되었던 자신을 얽매이는 그 무언가가 자기를 지배하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두 나라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
아주 두 극단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 닌자와 사무라이들... 정말 키가 작네요....^^)
일본은 사무라이 정신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사무라이 정신이 무엇인지.. 그것이 왜 그들에게 소중한 가치를 갖는지를 정말 의아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의 뿌리가, 결국은 절대적 권력에게 복종하는 것이 그들에게 중요한 삶의 가치를 이루기 때문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지요.
사무라이 정신의 요체는 절대적인 권력에 대한 충성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그 권력에 충성함으로 또한 절대적인 권력을 보장받습니다.
"베어 버려서 미안"이라는 말만 남기고 아무라도 베어 버릴 수 있는
그 절대적 권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지요.
(칼이 잘 드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이유 없이 불러다가 베었다는 사무라이들의 얘기는
먼 옛날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무섭지요..ㅠ.ㅠ)
우리는 절대적인 권력이 없는 것, 그런 것이 있더라도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삶의 목적이고
근본적인 지향점이지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지고...
의 정신은
아무런 제약 없이 내 삶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권력, 무통제는 곧 불안함..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음으로 일어나는 불안정감과 연결됩니다.
그들이 믿는 세계관은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보여 주는 세계관입니다.
우리가 참 이해하지 못 하는 것 중 하나가...
왜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가 하는 것인데요...
제가 한 일본인 교수에게 이 부분을 질문했다가, 이해하기 힘든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 분이 대답하시기를... (이것이 일본 전체의 답변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국 사람들 정말 답답하다...
독일은 히틀러가 죽었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 천황이 살아 있다."
이게
무슨 답변인가요?
저는 어리둥절 했는데요...
일본인들에게는 그 절대적 충성의 대상이 곧 천황인데,
그 천황의 잘못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죠.
우리는 천황 같은 존재가 있다면, 매일 같이 데모해서,
아마 스스로 내려 와야 할 거여요.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나도 정부 잘못을 연일같이 성토하는 나라가 우리 나라인데,
그런 권력을 위해서 전 국민이 역사를 왜곡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데 이 세계관이 곧 이 영화 속에서도 등장합니다.
모두가 주어진 통제, 주어진 위치를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한다라는 의식은
일본의 숙명적 의식 세계와 매우 유사합니다.
얘기를 조금 더 진전시켜 보지요.
이 이야기의 슬픈 점은, 이런 억압적인 체제...
곧 열차 끝 칸에 갇혀 끊임없이 통제 받고 살아야 하는 그 최하층민들과,
앞칸에 속해 안락함을 누리는 귀족층의 엄격한 신분 구분,
그리고 출생부터 정해진 그 계급 제도가,
어쩔 수 없이 지켜져야 하는 그 무엇이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열려져 있고 신분제의 구조를 깨고 상승할 수 있는
사다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영속적인 구조 속에 갇히게 되는데,
문제는 세기말, 지구가 멸망한 상황 속에서 그것을 벗어나려 하는 것은
곧 인류 전체의 몰살이라는 비극을 빚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본격적인 스포일러가 될까봐 두렵습니다만....^^
완벽한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파괴될 수 밖에 없는 열차 안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 권력, 계급의 피라미드를 지키는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변수가 되는 인구수 통제를 위해서,
폭력과 살인도, 곧 생존을 위한 필요악이라는 것이죠.
여러분들은 이 논란을 보면서, 어쩌면 전 지구적 상황과 연결짓지 않고 영화적 허구로만 보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이것이 현실 지구의 환경과 너무도 닮아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미래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가장 큰 인류 미래의 변수는 곧 인구입니다.
현재 지구 환경은 50억 이상의 인구가 살아갈 수 있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류가 먹어 치우는 양, 소비하는 자원의 양이 곧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이 50억의 인구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용량을 지구가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러면 어쩌면 마르크스의 노동 가치설이 성립할 여지가 있습니다.
즉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는데, 행복하려면 노동을 해야 하고
노동을 해서 창출되는 가치의 양은 전 인류가 필수적인 욕구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서 분배의 문제만 해결하면, 노동은 인류의 생존과 번영의 문제를 해결할 키가 된다...
라는 것이 노동 가치설을 단순화한 설명일텐데요...
지금의 시점은 그런 맑시즘이 통용되지 않을 위기 상황에 와 있는 것이지요.
이 설국 열차와 비슷합니다.
전 인류가 먹고 살기에 충분한 용량의 한계를 지나서고 있습니다.
이에 관련한 여러 보고서들... 이 있습니다만... 너무 지나치니까... 생략하구요...
(찾아 보려면..저도 힘들어요^^)
아무튼,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일루미나티라는 단체가 있는데, 그들이 전 세계 인구를 15억명으로 통제하고
영속적인 권력을 추구한다고...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음모론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권력, 돈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단체를 만들어 공통의 이익을 위해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얘기죠.
그런데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너무 아픕니다.
많은 분들이 엔딩 크레딧이 약하다라고 하시는데...
윌포드의 말은 영화 속 현실의 적나라한 인정을 넘어서,
현재 우리 글로벌 경제 환경이 직면한 현실과 매우 유사합니다.
만약 열차 전체를 통제할 권력을 갖게 된다면,
귀족층을 없애고 평민층을 귀족층으로 만들 수 있나요?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 될까요?
현재의 시스템을 깨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요?
죠지오웰의 1984년에서는 혁명을 이렇게 말합니다.
극소수의 상층부와 그 상층부 아래 위치한 2계층, 그리고 대다수의 극빈 하층민으로 구성된 사회 조직 속에서
2계층이 하층민들을 선동합니다.
그래서 혁명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2계층 중 일부가 상층부로 올라가고 상층부는 와해됩니다.
그러나 하층부는 여전히 하층부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래도 죠지오웰은 권력의 구조로만 이해한 것이지,
인류의 생존 환경과 연결지어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인류의 생존 환경의 문제가 극단적으로 우리에게 와 닿아 있는 것이지요.
만약 지금의 시대가 종말적 시대가 아니고,
인류가 정말 슬기롭게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한 극단적 기술들을 도입해서
온난화와 자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면 그 이후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어떤 과학자들은 하늘을 뒤덮는 거대한 열기구들을 띄워 인위적인 그늘을 만들자고도 합니다.
또 황산염 에어로졸을 뿌려 황산염 층을 만들어 온난화 문제를 막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어떤 조치들로 이 세기말적 현상을 지연시킨다고 하면,
그러면 인류 사회가 조금 더 나아지는 어떤 방향성을 갖게 될까요?
이 영화 속에서는 가장 아이러니칼 할 대답을 이 장면으로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그 아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주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윌포드가 그들에게 주고 있는 것은 윌포드에 대한 신격화입니다.
그 체제를 믿고 따르도록, 그들을 세뇌시키지 않으면 그 체제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편리함을 누구나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 편리함이 우리를 곧 굴복시키고 내면적으로 붕괴 시킨다는 점을 잘 인식하지 못 하지요.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것이 우리들 속성입니다.
군대에 있을 때 너무 힘든 기합을 받게 되면
그 중간에 항상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끝난다. 끝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지요..고통은 곧 지나갑니다.
그리고 고통이 사라질 때 그곳에는 명백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이 있다고 하더라도 삶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 가는 수많은 인류의 하층민들도 그 고통을 감내하면서
착취의 하부 구조 속에서 생을 영위합니다.
꼭 불행하고 못 견딜만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삶, 생명 자체가 스스로를 견뎌 낼 그 무언가를 잉태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하부 구조 사람들의 그 견딤의 힘을 의지해서,
착취하는 상부 구조가 있습니다.
그 상부 구조는 어떤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나마 저 하부 구조를 먹여 살리고 있다라는... 그런 것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생산, 소비, 분배의 문제에 대해 이 상 하부 구조를 의식하면서
정치, 경제 시스템을 만들어 왔습니다.
(최근 들어 제 3의 물결을 쓴 앨빈 토플러는 이런 양분된 구조를 완전히 우습게 여깁니다.
저도 그 말에 동감하구요...이런 위의 말은 제 의견이 아니고..그냥 도식화한 설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러분, 염두에 두셨으면 해요. ^^)
그런데 이 영화 속에 현실의 무서움은..
그런 도식적 구조가 잘못된 것을 알아도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럼 지금 우리의 글로벌 경제 시스템은 어떨까요?
신자유주의라는 말 들어 보셨나요?
세계 각국의 경제 체제에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 할 때, 자유로운 무역 거래가 증진되면서
결국 전 세계의 부의 총량이 늘어나고, 또 각 나라는 다같이 잘 살게 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신뢰해야 한다..라는 이론인데요....
그런데 최근 들어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결과적인 자유 무역의 증진은 선진국의 부의 가속적인 착취와
후진국의 영속적인 피폐만을 낳고 있다는 반성이지요.
그래서 장하준 교수님의 글은 많은 반성할 질문들을 던지고 있습니다.
즉 보호 무역 주의를 채택한 나라들이 부를 이룬 이후...
즉 지금의 선진국들이 과거 보호 무역, 혹은 제국주의적 착취 구조로 부를 쌓은 이후,
지금 와서 약해 빠진 나라들한테 다 문 열어라..하는 것은 깡패같은 짓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저는 장하준 교수님께 다시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지금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려서 보호 무역 주의로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되면 결국 잘 사는 나라들도 보호 무역 주의를 할 테고...
현실은 더 나빠지지 않겠어요?
그래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답은 가난한 나라들을 더 배려하고,
부자 나라들이 양보하는 형태가 최선의 답이 되겠지요.
그런데 누가 그렇게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열차 안에서... 어느 누군가가 앞 칸에서 벗어나 맨 끝 칸으로 가려고 할까요?
얼마 전 들은 얘기입니다.
필리핀에서 가난한 필리핀 사람들을 돕고 있는 한국 가정이 계신데,
그 곳에 가 보니 주방과 거실은 커튼이 쳐져 있고,
거실은 에어콘 바람이 시원하게 돌아가지만, 주방은 에어콘이 차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불볕 더위 속에서 뜨거운 불과 함께 일해야 할 주방에 에어콘 바람이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그 곳은 가정부가 일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말도 안 되는 얘기같죠?
그런데 그들에게 우리가 누리는 것과 동등한 것을 줄 수 없는 어떤 특정한 체제가 그 속에서
가동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들을 돕는 우리도 그들과 같은 위치로 내려가서 도우면 좋으련만...
인간의 어떤 이기적인 마음... 혹은 더 내려가지 못하는 마음이 그렇게 못 하도록 한다는 것이죠.
제가 운영하는 회사에서는 해마다 어려운 지역에 우물을 짓는 사업을 시작해서 지금 4번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우물을 짓는 곳을 한번 가보고 싶어도... 그것 자체가 무척 어렵습니다.
비행기 타고 내려서 작은 경비행기 타고 섬으로 넘어가고,
도로도 없는 곳으로 누군가가 차를 몰고 나와서 저를 데리고 다시 그곳으로 가야 하는데...
경비도 경비이지만, 너무나도 폐가 되는 일이라서... 그것 자체가 큰 무리이고 모험이 됩니다.
우리는 그런 것 자체를 상상하지 못 하잖아요.
아이티의 아이들은 진흙으로 구운 쿠키를 먹는다고 하는데요...
엄마들이 진흙 쿠키를 사먹이는 이유는 그것이 다른 먹을 것보다 더 싸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그런 삶을 지금에 와서 감내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참 상향지향적입니다.
그래서 아래로 정말 못 내려 가죠.
군대 갔다 온 사람에게 다시 군대 가겠느냐고 물어 보면 대답은 뻔한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지금 전 지구적인 극심한 양극화 현상은...
참 막기 어려운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도 너무나 부질 없지요.
제 글에 어떤 도덕적인 결론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글을 적으면서 제 스스로 생각을 곱씹어 보고
또 여러분들도 한번쯤 현실을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특히 저는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에서, 제가 어떤 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형태의 결론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 한계를 여러분들께서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저 역시 이 나무처럼.. 그냥 서 있는 것 외 뭐 별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잖아요? ^^
하지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각이 곧 힘입니다.
그리고 생각하면 변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냥 영화 보고 일어난 갖가지 생각들이 너무 많아서...
글을 좀 적어 봤습니다.
긴 글 읽어 주신 여러분들께 정말 감사 드립니다.
첫댓글 아래 글이 엑박이신 분들을 위해서 재개시 합니다.이번에는 엑박이 아닐 거여요...^^
모바일에서 엑박이신 경우가 있는 것 같아서 재개시 했어요.^^
배가 산으로 갔다가...우주로 간 느낌이네요...
그런가요~?^^
저도 간만에 지난주 개봉일에 가서 보고 왔는데...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영화입니다.
예~^^ 그렇지요~^^
이글이 영화의 해석을 담았네요 ^^
그런가요~?^^
한번에 다방면의 견해를 읽을수 있었습니다~ㅎ
감사합니다~^^
오 좋은글입니다. 설국열차를 보지는 못했지만 적절한비유로 생각되고, 방대한내용을 잘 적으셨네요. 탁구탓컴님의 생각을 공유합니다. 존경하게되고 기업가로 좋은영향을 줄것같아요. 감사드리고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영화를 보고 싶게 하시는군요^^
사소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드는 점이 있어서 의견을 듣고 싶네요. "당 시대의 한국인들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은 반권력적, 권력 해체적, 저항적 특성"이라는 말씀을 하시면서(사용하신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무척이나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어서 상당히 망설여지는 대목이기는 하지만, 거기까지 가려는 것은 아니고요) 여러 예를 드셨는데요. 호텔 예악이나 교통편 사용, 식당과 물건 구입의 사례, 모두 서비스 사용자 혹은 구매자의 입장에서 약속되거나 기대한 것에 미치지 못한 결과 앞에서 불만을 토로하는 예들을 드셨네요.
외국에서 살면서 한국에 가끔씩 들어오면, 정말로 말씀하신 그런 장면들을 일상 생활에서 자주 보게 되는데요(이곳 클럽에서도 탁구 제품 구입과 관련해서 종종 벌어지는 일이죠). 하지만 저는 서비스 사용자나 구매자가 "호통치고 열불 내며 당연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을 볼 때마나 마음 한 켠이 착잡합니다. 제게는 이런 장면들이 "약자가 강자한테 소리 지르고 달려 들 수 있는 나라"의 모습보다는,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동의할 수 있는 '정당한' 권력이 부재한 곳에 돈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회의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돈을 지불하며 그 댓가를 요구할 수 있는 자리가 권력의 자리가 되는 사회의 모습요.
스스로를 사회적 약자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돈을 지불하고 손님 혹은 구매인(몇 년 전부터는 '고객님'이라는 단어로 통일되면서 일상화 되었더군요. 한 두 해 사이에 확 바뀐 언어 문화에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의 자리에 있게되면 그에 따른 권리를 마치 권력처럼 누리려는 현상이 일반화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씀하시는 "권력에 대한 뿌리깊은 저항 의식이 있는 민족"이라는 표현은, 다른 맥락에서는 저도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적어도 예를 드신 부분에서만큼은 완전히 반대되거나(많은 이가 돈의 권력에 맹종하는 사회의 모습이니까요), 맥락이 잘 맞지 않는 내용이 아닐까 싶습니다(돈을 사회 통제 권력의 도구로써...
...인정하지 않아야 말씀하시려는 뜻에 부합하는 예들을 드셨으니까요).
이런, 댓글이 이렇게 길어줄 줄 몰랐네요. 300자 안에 쓰려했었는데요^^; 기대치나 약속에 못 미치는 서비스나 제품을 구입한 구매자가 '호통치고 열불내지'않고 정당한('당연한'이란 말은 잠시 후에 쓰고 싶네요) 보상을 요구하며, 서비스 제공자나 판매자의 인격을 존중하는 당연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만연한 사회를 보고 싶다는 말을 하려한 건데요. 글의 일부분을 너무 확대해서 제가 마음대로 이해한 것이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습니다. 다시 한 번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넥시 포럼에 써주시는 글 늘 잘 읽고 있어요(아리랑 소개글 많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 완전 공감합니다.
한국만큼 소비자가 큰 소리치는 나라가 또 있을까요~?^^
언제 제가 속에 있는 얘기 할 날이 있을거에요~^^
한국 사람들, 크게 깨달아야 합니다.
친절함, 따뜻함, 관용함을 베풀면 나도 그것을 되돌려 받지만, 내가 타인에게 무례하면 곧 그것을 돌려받지요...
탁구닷컴 직원들도 속이 썩습니다~^^;;
헐 난 완전 착한 소비자인데...
가격 에러난거 다시 전화해서 가격올려서 구매해주고
반품이나 그런거 없음... 왜?
물품 정확하게 배송해주고 라켓 무게 딱딱 맞춰주는데 고맙지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