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산도
조선수군 근거지이자 한산대첩 현장
통영 중앙시장은 평일에도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가까운 망일봉 자락에 통영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는 이순신공원이 있다. 중앙시장 앞 강구안에는 통제영 거북선과 좌수영 거북선이 떠 있어 이순신의 고장임을 느끼게 한다. 오후 6시 이전에는 내부 모습을 둘러볼 수도 있다. 중앙시장에서 조금만 가면 서호시장이 나오고 시장 건너편에 통영 여객선터미널이 있는데 이곳에서 한산도 가는 배를 탈 수 있다.
한산도에서 전남 여수를 잇는 뱃길(한려수도)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말을 듣는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이다. 한산도는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돼 있던 조선 수군의 근거지였으며 앞바다에서는 한산대첩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로 시작되는 이순신 장군의 시조로 유명한 '수루'도 여기 있다.
한산대첩 하면 누구나 학익진(鶴翼陣)을 떠올린다. 학이 날개를 편 형상이라 붙은 이름인데 육지전투에서 쓰던 전형적인 포위·섬멸전 형태다. 사방에서 포위하고 한꺼번에 공격하는 것이다.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는 한산도 앞바다는 배가 침몰됐을 때 헤엄쳐 나갈 길이 없다. 한산도는 당시 무인도나 다름없어 상륙한다 해도 굶어 죽기 알맞았다.
왜선은 속도가 빠르기는 했으나 서둘러 회전을 하기는 어려운 구조였다. 그래서 뒤쪽에까지 전선을 배치할 필요는 없었다. 왜군은 대부분 전사했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명 가량은 양식이없어 13일 동안 바다풀을 뜯어 먹다가 뗏목을 만들어 겨우 달아났다. 이순신의 한산대첩은 권율의 행주대첩, 김시민의 진주성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힌다.
한산대첩 이후 한산도에 들어선 제승당(制勝堂, 사적 제113호, 당시 이름은 운주당運籌堂)은 1593년부터 원균의 참패로 불타 없어진 1597년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었다. 해군작전사령관실과 같은 곳이다.
제승당에는 이순신 영정이 있는 영당을 비롯해 한산대첩기념비, 유허비, 많은 송덕비와 활을 쏘던 사정인 한산정, 수루 등이 있다. 'ㄷ'자 모양인 바다 건너편에 과녁이 있는데 이런 사대는 전국에서 하나뿐이라 한다. 배를 타고 바다를 오갈 때 거북등대가 보인다. 뱃길을 일러주는 것이 아니고 한산대첩 승전지가 거기임을 알리는 데 목적이 있다.
수루는 이순신과 관련해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에 담고 있는 장소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閑山島明月夜 上戍樓撫大刀 深愁時何處 一聲羌笛更添愁)>라는 '진중시'의 탄생지다. 또 1491일간의 난중일기 가운데 1029일 간의 일기가 여기서 쓰여졌다. 이순신은 여기서 시도 많이 남겼다. 사람들은 이순신을 성웅이라고 부른다. 겉으로는 강직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적인 고민과 갈등과 외로움을 시와 일기로 달랬을 뒷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
세병관(洗兵館, 국보 제305호)은 선조 37년(1604년) 이경준 제6대 통제사가 한산도의 본영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완공한 삼도수군통제영의 중심건물이다. 앞면 9칸·옆면 6칸 크기로 웅장하다. 네 면이 모두 트여 있고 안쪽에도 막힌 데가 하나도 없이 기둥만 가지런하다. 우리나라 목조건물 가운데 서울 경복궁 경회루, 전남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평면이 가장 넓은 건물로 꼽힌다.
소설가 박경리를 비롯해 등 통영 출신 유명 인사들이 '국민학교'를 다닐 때 학교 건물로 쓰였다.
- 국립진주박물관
격전지 진주성 안에 있는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
통영 충렬사(忠烈祠, 사적 제236호)는 세병관 가까이에 있는데 충무공 이순신 위패를 안치하고 제사를 지낼 목적으로 세워진 사당이다.
선조 39년(1606년) 7대 통제사 이운룡이 왕명으로 세웠고 현종 4년(1663년) 남해 충렬사와 함께 충렬사 현판을 하사받았다. 해마다 역대 통제사들이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충무공의 주된 활동 무대가 한산도를 비롯한 통영 근처였기 때문에 이순신이 숨진 장소인 남해 관음포 이락파와 이곳에 사당을 세웠다.
통영에서 고성 당항포까지는 30분 정도 걸린다. 고성군 회화면과 동해면 사이 당항만은 이순신 장군이 선조 25년(1592년)과 27년(1594년) 두 차례에 걸쳐 왜선 57척을 수장한 전승지다. 당항포 해전과 관련해 재미있는 지명이남아 있다.
'속싯개'는 당항포 일대를 일컫는다. 기생 월이가 왜군 첩자의 지도에다 실제와는 다르게 그려넣어 당항만이 막힌 만이 아니라 트인 바다로 알도록 속였다 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잡안개라는 지명은 왜군을 잡았다는 '잡은개'에서 바뀐 말이다. 당항리 동쪽 '핏골'은 당시 피로 물들었다 해서, '도망개'는 왜군이 도망간 길목이라 해서, 당항만에 들어오는 좁은 해협을 이르는 '당목'은 닭의 목처럼 길고 좁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당항포 해전이 있었던 옆에는 당항포관광단지가 들어서 있다. 당항포해전관·거북선체험관·충무공디
오라마관·승충사 등이 있다.
국립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 최대 격전지인 진주성에 있는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이다. 특정 인물 중심 영웅사관이나 순국사관에 매몰되지 않고, 임진왜란이 일본이 일으킨 참혹한 침략전쟁인 한편 조·명·왜 삼국간의 국제전쟁임을 알리고 있다.
- 남해 이락사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숨을 거두고
이순신의 격전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길의 마지막은 남해 이락사(李落祠) 일대다. 정식 이름은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으로 사적 제232호다.
관음포 앞바다는 이순신 장군이 숨을 거둔 바다라는 뜻으로 '이락파(李落波)'라 한다. 이락사는 순조 32년(1832년) 왕명에 따라 세운 제단과 유허비·비각이다.
이순신은 여기 앞바다에서 1598년 11월 벌어진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숨을 거뒀다. 200척밖에 없는 이순신은 곱절이 넘는 왜군 앞에서도 전투를 명령했다. 200척 넘는 왜군이 격파됐고 나머지 50척 남짓만이 관음포 쪽으로 겨우 달아났다.
이순신 장군은 달아나던 왜적을 뒤쫓다가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싸움이 지금 급하니 함부로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말라."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공후사(先公後私)를 했다.
관음포 앞바다는 저녁 해질 무렵이면 붉은 핏빛으로 물든다. 이락사에서 바다 쪽으로 500m 들어가 첨망대에 오르면 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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