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짜잔 드디어 24차 정모 후기가 완성됐습니다~
안녕하세요 귀하고 귀한 울 삼태극 식구님들**
지난 24차 정모 훈훈한 후기를 올려 드립니다^^
빠미라님, 묘법화님, 삼신할미님 그리고 저 이렇게 넷이 시작한 삼태극 참역사책 만들기 모임이
좌충우돌 겪다 정모로 바뀌며 정확히 2년이 다 됐는데 참 감개무량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둘도 모이고 셋도 모이고 그러다 다섯이라도 모이면 그날 대박이라며 막걸리 맛이 그렇게 좋았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못모여도 열댓명이 모이니 참 격세지감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정을 돌보는대신 나라역사를 더 걱정해 실증방법으로 현지를 누비며 참역사 반열에 오르신
성헌식선생님 열강도 분위기 일구는데 한몫 단단히 하신걸 다들 잘 아실겁니다.
이게 다 울 조상님들인 한인한웅한검님, 칠성님께서 조직으로 밀어주시니 우리 삼태극은 순풍에 돛이 달린 겁니다 ㅎㅎ
그날 귀한 시간을 내주신 우리 식구들은요~설악님, 뎅기님, 서정님, 희망봉님, 이영희님, 순한님(주역의 저자이며
한,양의사선생님), 서울사나이님, 초자유인님, 신완순님(재야사학자), 배달의 후예님(삼면의 영해를 지키시는 이순신
장군 후예랍니다), 박정규님(천부경 저자), 빠미라님, 성훈님, 그리고 둥근이 저 해서 14분에 그날 단제(군은 안쓰는게
좋은거 아시죠)할아버지가 내려오셔서 지켜보시니 다해서 15분 마감입니다.
어쨌든 한민족은 13579 홀수로 가야 하거든요 ㅎㅎㅎ
본론으로 들어가면 지난 강의에 이어 2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나라 조선"을 다뤘습니다.
미리 준비된 자료로 수업이 되니 필기양이 적어 무척 좋았고 집중도 잘 됐던것 같습니다.
다만 강의내내 성선생님 혼자 읽어나가니 목에 부담이 않됐을까 싶은데 다음 시간부터는 읽을 분량이 되면
초딩때 교실에서 철수 읽고 영희 그 다음 읽었듯이 그시절로 돌아가서 돌아가면서 읽어가면 훨씬 재미나지 않을까요?
제목에서 보듯이 원래 조선인 것을 여태 고조선이라 불렀는데 이성계가 세운 조선을 이씨조선이나 근세조선 아님
후기조선으로 규정하여 단제조선의 정체성을 다시 찾아야겠습니다!
<대한민국 백과사전> ~ <삼국유사>에 따르면, 곰과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되기를 원하자...중략...환웅이 잠간
몸을 변하여 웅녀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는데 이가 곧 단군왕검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곰은 웅(熊)족, 호랑이는 호(虎)족으로 토템의 은유적 표현인데 신화를 아직까지 정사로 사전적으로 다루니
단제조선의 역사적 실재는 아직 완결된게 아닌것이 현실입니다.ㅠㅠ
1. 단군왕검의 도읍지 아사달
<단군세기>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이고 어머니는 웅씨의 왕녀이며 신묘년(기원전 2370년) 5월 2일 인시(새벽 4시)에
박달나무 밑에서 태어났다. 14세 갑진년(기원전 2357)에 웅씨의 왕은 그가 신성하다는 말을 듣고 비왕으로 삼고
큰 읍의 다스림을 대행하도록 하였다.
무진년(기원전 2333년) 제요도당(요임금)때 단국으로부터 아사달의 단목의 터에 이르니 온 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의 아들로 모시게 되었다.
이에 9환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고 신과 같은 교화가 멀리 미치게 되었다.
이를 단군왕검이라 하니 비왕의 자리에 있기를 24년, 제위에 있기를 93년이었으며 130세까지 사셨다"
또 <단군세기>에 "단군왕검의 재위 원년은 무진년이라. 개천 1565년 상월(10월) 3일에 이르러 神人왕검이
오가의 수장으로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목의 터에 자리를 잡았다.
마침내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어 그 다스림이 높고 크고 또 대단하였으니 9환의 백성들이 모두 마음으로 따르며
천제 化神이라 하고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니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신시의 옛 법도를 되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하였다(立都阿斯達建邦號朝鮮)"
내용에서 보듯 개천 1565년에 조선을 건방한거로 건국은 아니며 단군왕검과 개천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개천절은 양력 10월 3일이 아닌 음력 10월 3일로 다시 제정되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아사달에 자리잡은게 아닌 이동하여 와서 도읍한거니 이로 역사는 더 유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삼성기전 상> "뒤에 신인왕검께서 불함산의 박달나무 터에 내려 오셨다.
그는 神의 덕과 성인의 어짐을 겸하여 갖추었으니 이에 능히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었으니
나라를 세운 뜻과 법은 높고 넓고 강하고 열렬하였다.
이에 9환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복종하여 그를 천제의 화신이라 하고 그를 帝로 모셨다.
그가 곧 단군왕검으로 신시로부터 전해지던 오랜 법을 되찾고 서울을 아사달에 설치하여 나라를 열었으니
조선이라 불렀다 (都阿斯達開國號朝鮮))"
아사달이 阿耳斯타(인류조상 나반이 아만과 처음 만난 곳?)란 입장도 있으니 참고하세요.
한웅=신시에 도읍함이 개천, 단제왕검=아사달에 도읍한게 조선이며 개국으로 정리하면 되겠습니다.
환단고기는 고대지명을 이해하는데 있어 원전으로 참고가 많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맹자는 "하은주시대에 땅이 천리를 넘지 못했다" 했으니 당시 하은주 주변은 누구이겠는가? 당연 한민족인 사이이지요.
사이를 지리적으로 고증한게 환단고기가 됩니다.
기자조선은 번조선의 역사중 기자조선(6대)에 불과함을 부풀려 정사로 왜곡시켜놓은게 이조의 역사왜곡이고
위만조선은 도적떼에 불과한 무리를 기자때보다 더 뻥튀기한게 그 실체인데 강단의 식민반도사학자들은
정사로 꾸미려 애쓰니 딱하기가 그지 없습니다.
그래도 이병도란 식민사학자의 원조 양반은 뒤늦게 말년에 이태형박사의 말에 따라
"단군은 신화아닌 우리 국조"라고 1986년에 논설을 발표 과거 식민사관을 수정했으나 그가 키운 후학들은
스승을 따르지는 않고 스승이 노망이 들었다며 역사왜곡을 지금까지 해나가니 그야말로 개판 강단사학인 셈입니다!
2.순임금과 관련된 역사
<단군세기> "단군왕검 정사 50년(기원전 2284) 홍수가 크게 나 백성들이 쉴 수가 없었다.
단제께서는 풍백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하고 높은 산과 큰강을 평정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였으니
우수주(牛首州)에 그 비석이 있다.
갑술 67년(기원전 2267)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도산에서 우사공과 만나게 하였다.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방법을 전하고 나라의 경계를 정하니 유주와 영주가 속했으며
회대(淮岱)지방의 제후를 평정하여 분조(分朝)를 두고 다스렸는데 우순(虞舜))에게 그 일을 감독케 하였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단군왕검은 제요도당(帝堯陶唐=요임금)과 나란히 군림했다.
요임금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서로 땅을 다투는 일을 쉬지 않았다.
천왕(天王)은 마침내 우순에게 명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병력을 파견하여 주둔시키더니 함께
요임금의 唐나라를 치도록 약속하니 요임금이 마침내 힘이 딸려 순임금에 의지해 생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양보하였다.
이에 순임금의 부자 형제가 다시 돌아와 같은 집에 살게 되었으니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공경스럽게 효도함을 앞세우게 되었다.
9년 홍수를 당해 그 피해가 만백성에 미치니 단군왕검은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순임금과 약속하고 초청하여
도산에서 만났다.
순임금은 사공인 우(禹)를 파견하여 조선의 오행치수의 법을 배우게 하니 마침내 홍수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에 우를 낭야성에 두어서 이로써 구려분정(九黎分政)의 뜻을 정했다.
바로 <서경>에서 말하는 "동순(東巡)하여 망제를 지내고 마침내 동후(東后)를 찾아뵙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진국(辰國)은 천제의 아들(=단군)이 다스리는 곳이다. 고로 5년마다 순수하는데 낭야에 한번씩 이른다.
순의 제후는 때문에 진한(辰韓)에 조근(朝覲)하기를 네번씩 하였다"
위지역이 <번한세가>에 기록됨은 그곳이 번한의 땅이라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요임금에게 10명의 아들이 있고 맏아들 단주가 거만 포악하고 게으르고 놀기만 좋아해
단주를 남방으로 추방하여 제후로 삼았는데,
순임금에게 왕위가 넘어간다 하자 단주가 반란을 일으켜 부자간 전쟁을 하고 요임금이 두번의 전투에서 승리한다.
부자간 전쟁은 정권쟁취 이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수 없다. 장자가 자격미달이면 다른 아들에게 넘길수 있으나
혈통이 전혀 다른 동이족인 순임금에게 왕위가 넘어갔다는 것은 외부 압력이 아니고는 절대 있을수 없다 봅니다.
즉 자의가 아닌 단제왕검에게 나라를 뺏긴 것으로 봐야 합니다.
박제상의 <부도지>에서는 요임금이 두딸로 미인계를 써 순임금을 유혹했다고 기록합니다.
맹자 <이루장구하(離婁章句下)> "순임금은 제풍에서 태어나고 부하로 이사하시고 명조에서 죽으셨는데,
제풍.부하.명조가 동이족의 땅이니 그는 동이사람이다"
<중국지명대사전> "명조:고대지명으로 지금의 산서성 운성 안읍진 북에 있다.
은탕왕이 하 걸왕을 정벌한 전투지이다. 고후원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산서성 운성시 하현의 서쪽, 일설에는 하남성 낙양 부근, 또 일설에는 하남성 신향시 봉구 동쪽에
있다고 한다."
<대명일통지> "순임금이 기주의 동북을 나눠 유주와 금주로 했다. 상나라의 고죽국이며 주나라의 유주땅이다.
진나라땐 요동군땅 또 유주는 요서군이 되었다. 한나라때는 무려와 양평현의 땅이었으며 요동군에 속했다.
당나라에서는 유성현을 설치했으며 영주에 속했다"
순임금의 죽음
<단군세기> 2세 부루단군 재위 58년 "제순유우(帝舜有虞)가 유주와 영주의 두 주를 남국(藍國)의 이웃에
두었기 때문에 단제께서 병사를 보내어 이를 정벌하여 그 왕들을 모두 다 쫒아내시고, 동무와 도라 등을 보내어
그곳의 제후로 봉하여 공을 표창하였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 "치두남이 경자년에 요중(遼中)에 12개의 성을 쌓았으니
험독,영지,탕지(=안시),통도,거용,한성,개평,대방,백제,장령,갈산,려성이 그것이다."
백제는 산서성 남부지역으로 온조가 개국하고 백제라는 국호도 지명에서 추정된다.
요중은 바로 유주를 말하는 것으로 험독과 탕지(=안시)는 요동군, 영지와 개평은 요서군, 대방과 여성은 낙랑군,
거용은 상곡군에 속한 현임을 <한서지리지>를 통해 알 수 있다.
갈산=갈석산으로 북평군과 요서군과 낙랑군에 걸쳐있는 지금의 중조산(中條山)이며, 통도와 한성과 백제와 장령의
정확한 위치는 미상이다.
이 지역은 순임금이 다스린 유주와 중복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순임금의 도읍 포주(蒲州)는 요서군의 땅으로 고죽국이 있던 곳으로 지금의 산서성 영제시 일대입니다.
<중국통사참고자료고대부분-4>, "람수는 산서성 둔류현 서남에서 나와 동뽁으로 흘러 장으로 들어간다."
<중국고대지명사전> "강수:산서성 둔류현 서남 80리 반수산 남쪽에서 나와 동으로 로성현 경계와
만나는 장촌까지 흘러 장수로 들어간다.
<수경주>는 진수라 한다. <청일통지> 수경주에 강수라고 있는데 무람수라 하는데 그 물길이 모두 같다.
다른 이름으로 진수라 한다.
'위서지형지'에는 강수와 람수가 있는데 물길이 같다. 즉 강수=람수)
<한서지리지>
유주:요동군,요서군,낙랑군,현토군,상곡군,북평군,어양군
요동군-양평,험독,안시,서안평/ 요서군-영지(유호죽성-영지현에 있는 고죽성),비여,임유/
낙랑군-운장,25개 현 중 조선현,대방현 있음. 현토군-고구려 등/ 상곡군-탁록 /우북평군-대게석산=갈석산 /어양군
위에 소개한 <단군세기> 내용은 2세 부루단군이 군사를 보내 중국총독이었던 순임금을 정벌한 후 파직시키고
새로운 제후들을 보낸 것으로 해석, 순임금이 왜 갑자기 죽었는지 그 의문을 밝혀주는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단군왕검 명에 의해 요임금의 왕위를 빼앗은 후 중국총독이 된 순임금은 초기에는 상국인 조선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며
충성을 다했으나 점차 단제의 명령에 불복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에 조선이 무력을 동원해 순임금을 정벌하고 해임시키고, 치수에 공이 많은 우사공이 그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이 禹가 하나라 시조가 된다.
신라 박제상이 지은 <부도지 제 19장>에 따르면 순임금은 단제왕검이 요임금의 반란을 바로잡기 위해
특사로 파견한 유호씨의 아들이었다.
순임금이 미인계에 빠져 요임금의 두 딸인 아황과 여영을 아버지 몰래 아내로 맞아들이게 된다.
그리하여 요임금과 협조하면서 현인들을 죽이고 계속 묘족을 정벌하는 등 단제조선의 이념(홍익인간)과 대립하게 된다.
결국 요임금 뒤를 이어 임금에 올랐으나 아버지 유호씨의 노여움을 사서 수년간 피비린내나는 부자지간
전쟁을 벌이다가 패해 멀리 창오(蒼梧)의 들로 달아나다가 우에게 살해되고, 그의 두 아내도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순임금 죽음에 대한 중국의 전설은 결론적으로 '순임금이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다'
그런데 사서의 기록과는 내용이 상이한데
<<사기>> <하본기>와 <<맹자>> <만장>에서는 "순임금이 만년에 옛날의 영명함을 잃어버리고
놀기만 좋아하는 아들 상균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며,우는 여기에 불복하고 강제수단을 동원하여
순을 창오로, 상균을 양성으로 추방한 다음 왕위를 찬탈하였다"고 기록돼 있으니 이런 모순이 있는가?
<중국지명대사전> 양성 : "고양성읍~" (고양성읍 : <맹자만장>에 우가 순임금의 아들을 피했다.
하남성 등봉현 동남 35리에 있다) 하 시조 우가 단독으로 정변을 일으켜 순임금의 왕위를 찬탈한게 아닌
중국총독인 순임금이 조선의 부루단군에게 해임당하고 우가 그 후임이 됨.
당시 정세로 조선 허락없이 우사공이 단독으로 단독으로 정변을 일으켜 순임금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할 수는 없기 때문.
즉 순임금이 중국총독에서 해임된 이후 동정호 이남으로 유배된 것인데 중국 전설에서처럼 멀고 먼 남방에서
일어난 삼묘족 반란을 평정하러 가는 위험한 길에 두 부인을 데려간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기록으로
멀리 유배를 갔기 때문에 두 부인이 따라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곳은 남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요임금 아들 단주와 삼묘족의 활동무대인 언(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백과사전>에는 "순임금이 도허(하남성 범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원래 성은 요(姚) 이름은 중화(重華)
자는 도군(都君)으로, 30세부터 28년간 섭정을 했으며 요임금이 죽자 제위를 물려받아 39년간 제위에 있었다.
남방을 순시하다가 창오의 들에서 죽었으며 강남에 있는 구의산에 장례지냈다."
순임금이 남방에서 순시하다가 창오에서 죽었다는 내용은 <사기 하본기>와 상이하기 때문에 왜곡된 기록이다.
순임금의 죽음과 관련있는 창오와 구의산은 동정호의 남쪽인 지금의 호남성 영주시 영원현에 있는데
산서성 남부가 본거지인 순임금이 그 멀리까지 친정할 이유가 없다.
<사기> 기록에는 순임금이 창오의 구의산에 묻혀있다 했는데, 죽은 장소가 맹자가 말한 곳과 다르다.
요임금 아들인 단주가 남방 삼묘족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고, 단주가 죽은 후에도 삼묘족이 계속 반란을 일으키자
순임금이 직접 토벌위해 친정에 나섰다는 건데, 당시 단주가 있던 언(偃)이란 지명은 현 산동성 복현 근처 견성현,
순임금이 단주와 삼묘족을 정벌하려 했다면 이곳으로 와야 한다.
언주성=산동성 복현 25리에 있다. 본명은 주가부이다. <맹자의 만장>에 순이 요의 아들 단주를 남하의 남쪽으로 피했다.
<괄지지>에 따르면 언주고성은 견성현 서북 15리에 있다. 즉 순이 단주를 피한 곳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동이족인 순임금이 죽은 곳이 동이족의 땅"이라 했으니,
역설적으로 중국 호남성 영원현도 동이족의 강역인 것이다. 또한 순임금에 관한 기록이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번한의 땅은 순임금 활동무대인 유주
즉 산서성 남부와 황하 주변 하남성 일대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땅은 서울로 치면 중구 일대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동이족의강역이 입증된 것이다.
이상으로 환단고기의 기록과 중국 사서의 기록, 그리고 중국자료를 통한 지명의 고증으로
그간 의혹으로 생각됐던 대륙의 강역이 이해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내용중에 맹자가 말한 "하은주 시대는 땅이 천리를 넘지 못했다" 라거나
"순임금은 제풍에서 태어나고 부하로 이사하시고 명조에서 돌아가셨는데, 제풍 부하 명조가 동이족의 땅이니
그는 동이 사람이다" 등을 보면 확실한 한민족 조선의 역사를 확신하게 됩니다.
요임금이 단제 부재시 도읍을 점령하자 단제왕검이 옮겨 아사달에 도읍을 이루며 순임금을 통해 요임금을 징벌하고
중국총독으로 내세워 대리통치합니다. 그런데 순임금도 요임금의 술수에 넘어가(부도지에 두 딸을 이용한 미인계)
홍익이념을 저버린 통치를 하자 사공인 우(하나라의시조)로 하여 순임금을 징벌하고 이어서 통치를 하게 되는게
그시대를 바라보는 정확한 해석이라 말할수 있습니다.
내용전개를 보면 우리 사서인 <단군세기>에서 시작하여 <삼성기전 상>, <단군세기의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부도지> 등으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역사흐름을 서술한 것이고 우리 사서 내용을 <중국고대지명
대사전>, <서경>, 맹자의 <이루장구하>, <대명일통지>,<중국통참고자료고대부분-4>, <한서지리지>, <사기의 하본기>,
<맹자의 만장>, <중국백과사전> 등의 중국 참고자료를 통해 검증한 것이니
몇번을 읽다 보면 대체적인 상황 이해가 될것입니다.
이런 귀한 강의를 다같이 들으면 좋겠지만 불가피하게 참가못한 회원들 위해 강의자료에 있는 원전 본문을
다 수록한 것이니 옛날 책 읽듯이 읽다 보면 내공이 쑥쑥 자랄것임을 굳게 믿습니다.
헌신적인 강의고 삼태극 회원들 역사 내공을 위해 매달 수고를 아끼지 않는 성헌식 선생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 강의는 3.진시황 병마용갱의 주인은? 부터 시작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정모는 11/24일(토) 구리시 주최 개천 5909년 기념 고구려 학술대회로 하게 되니 착오없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리며 재미나고 간결하게 쓰지 못한점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고 혹시 내용에 빠졌거나
설명 부족이나 잘못 표현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첫댓글 둥근이님, 대단하십니다.
덕분에 다시 한번 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주에 다시 한번 더 보겠습니다.
편히 주무세요.~~~
서정님이 열공하면 전 백공하겠습니다~
제가머리가 더 나쁘니깐요~~^^
아공~ 그 날, 강의하시느라 애쓰셨던 성 헌식 선생님 못지않게 방대한 양의 후기를
올리셨네요.
까마귀 고기는 먹지도 않건만 까먹기라면 9단의 수준인지라 다시한번 그 날의 수업을
되새겨 봅니다. 또 까무룩~흘려버리게 될 기억이겠지만요. 고맙습니다. 둥근이님~
설악님의 정신일도 하사불성에 조금이라도 보탬되면 좋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후기를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후기에도 용기를 주셔서 넘 고맙습니다^^
둥근이님! 항상 후기 올리시느라 고생 많으십니다~~저는 계산 해야지요 ㅎㅎ~~그날 오신 회원님들 서정,설악,희망봉,순한,서울사나이,둥근이,초자유인,신왕순,배달의 후예,님이,2만원씩회비내셨고,우리의 역사강의 열공하는샘은빼고 손님,박정규1만원 ,이영희씨는 손님인데 참여해보신다고 했고요 그래서 회비가 총21만원모여서,식사및 뒤풀이 대금 128,000원,강의실 대여료20,000원 보내고,이번에는 제가 조금 늦어서 서정님께 간식과 차를 부탁드렸는데,찬조해주셨습니다,
210,000-128,000-20,000=62,000원 남아서 통장에 있던돈 627,500+62,000=689,500원이 통장에 모여 있습니다,참여해주신 회원님들 감사 하고요,
좀 더 많은 분들이 함께 모여 우리의 참역사 공부에 함께 했으면 하는 마음 입니다,다들 건강하시고 ,추운겨울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빠미라님이 돈줄을 쥐고 있으니 삼태극은 부도는 영영 없습니다~~
변함없이 애쓰는 대표운영자님 이하 우리의 가족들 조만간 우리의 안방마님의 지갑이 두둑해지길 바라고
참역사의 진실이 만방에 퍼지는 그날까지 우리는 끝까지 가는것입니다 고고 ~ 씽
초자유인님 감기는 쑤욱 나셨죠~
그럼요 끝까지 참역사가 자리잡는날까지 말입니다^^
애궁.. 언제 정모에 함 가볼꼬..
한달에 하루인데 나들이 하시죠~
노심초사로 그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월정처사님~
험께 하시면 더 즐겁고 더 행복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