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쪽에서 잠시 휴식
하희경
재미있다. 기껏해야 100쪽이나 될까싶은 책이 흥미진진하다. 이야기가 시작부터 정신없이 휘몰아쳐 눈을 떼질 못하겠다. 50쪽이 넘어가도록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한편으론 징그럽기까지 하다. 어쩌면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주인공을 휘두르는지. 납득하지 못하고,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끝내 손에서 놓지 못하는 책 한 권의 무게가 비를 잔뜩 머금은 눈 같다. 깃털만큼 가벼우면서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하얀 눈송이.
마지막 기말시험이 끝났다. 완전 망했다. 8학기 동안 시력이 내려가는 것처럼, 성적이 점점 하강했다. 처음 야무지게 장학금을 노리던 나는 간데없고 간신히 졸업하게 되었다. 이 년 동안 올 A에서 삼 년차 들어 어쩌다 보이던 B. 그리고 마침내 사 년차, 그래도 맛은 봐야지, 하면서 C와 D가 등장했다. 처음 성적표에서 C를 보던 날의 충격이 잊히지 않는다. 밖으로 표현은 안하지만 난 완벽주의자다. 독학으로 일 년 만에 중ㆍ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보면서도 합격이 아닌 100점을 목표로 했다. 하다못해 운전면허 시험까지도 100점 받을 정도로 은근 승부욕이 있는 여자다. 그런데 이럴 수가?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현실을 인정하는 수밖에.
형편없는 점수를 받아서일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만사 제쳐두고 책이나 읽자. 그동안 읽고 싶은 책들을 쟁여만 두었는데 이번 기회에 마음먹고 활자 사냥이나 해야겠다. 겨울잠 자는 곰처럼 집을 동굴 삼아 둥지를 틀었다. 작년에 노벨문학상을 타면서 떠들썩해진 한강의 책 『소년이 온다』부터 시작해서 『채식주의자』까지. 그리고 김금희의『대온실 수리 보고서』, 양귀자의 『모순』, 문미순의『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고수리의『마음 쓰는 밤』, 콜슨 화이트헤드의『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등. 소설과 에세이, 판타지 세계를 두서없이 넘나들며 부유했다.
12월 한 달 동안 꼭 필요한 일 외엔 외출도 안 하고 책만 읽었다.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낸 셈이다. 잠자야 내일 움직이지, 하는 부담 없이 자고 싶으면 자고, 잠이 안 오면 일어나 커피 한 잔 들고 독서 등을 켰다. 그러고 보니 틈만 나면 활자를 만지작거리던 꼬맹이가 떠오른다. 조그만 단발머리 여자아이가 슬프거나 기쁘거나 힘들 때마다 책이 구명줄인 냥 매달렸다. 활자들의 숲을 통통거리며 달렸다.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면서 끝없는 갈증과 허기에 허덕거리며 활자들 사이에 숨고는 했다.
동그랗게 등을 말고 무릎 위에 책을 펼치던 꼬마가 고개를 들고 말한다. ‘난 소설가가 되고 싶었어. 글을 쓰면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 그런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어. 왜냐하면, 그때 나는 초등학교를 겨우 나온 공순이였거든. 생각해 봐, 구로공단 공순이가 선생님이 되고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하면 말이 안 되잖아. 그래서 입을 다물고 살았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가슴에 구멍이 커다랗게 뚫렸어. 구멍에서 바람이 일고 시커먼 그림자가 자랐지. 꿈과 현실 사이에 낭떠러지가 깊고 아득했어. 그래서일지도 몰라. 내 마음이 안주하지 못하고 늘 바람 길을 걸었던 건 말이야.’
그랬다. 조그만 단발머리 소녀가 꿈꾸던, 내가 있었다. 사는 게 신산해서, 너무 번잡해서 까맣게 잊고 살았던 꿈이 있었다. 차마 부끄러워 말하지 못하던, 혹시나 누군가 알아채고 손가락질할까봐 꼭꼭 숨겨두었던 꿈. 너무 깊숙이 숨겨 나조차도 잊어버린 그 꿈이 생각났다. 그래서였나보다. 눈 때문에 제대로 시험문제를 보지 못하면서도 방송대 교육학과에 가고, 국문학과를 복수 전공하는 욕심을 부린 건.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이기에 몇 번의 위기에도 졸업만 하자하면서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쓴 까닭이 말이다.
나도 안다. 방송통신대를 졸업한다고 해서 교사가 되고 소설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그럼에도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던 내가 고집스럽게 대학까지 졸업했다. 어쩌다보니 소설가는 아니지만, 작가라는 소리도 듣고 있다. 게다가 평생교육사 자격증까지 취득했으니, 이제 마음만 먹으면 누군가에게 작은 것이나마 건네줄 수 있는 자격은 갖춘 셈이다.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뒤늦게 작가가 되고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나를 이끌어 온 것은 무엇일까.
그건 분명코, 어린 날에 무심코 했던 생각들이 나를 잊지 않고 찾아와 인도한 덕분일 것이다. 책과 책으로 만든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톡 던져놓았던 씨앗 중에 하나가 죽지 않고 싹을 틔워 나를 잡아끌었다. 얇은 책 한 권 중간을 조금 넘어 63쪽에서, 연푸른 초록 잎이 작은 손을 내밀고 있다. 이 작은 잎에서 어떤 꽃이, 언제, 어떤 식으로 필지 모르지만, 나는 믿는다. 오래 전에 던진 씨앗이 지금까지 나를 이끌어왔듯이, 앞으로도 인도해 가리라는 걸 말이다. 지금 나는 펼쳐놓은 책 63쪽에서 잠깐 쉬면서 재충전을 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