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중옥(中玉), 호는 돈헌(遯軒). 1888년(고종 25) 호남지방에 대흉년이 들었을 때 진휼의 공을 인정받아 1889년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의 직첩을 받았으며, 이어 낙안군수 겸 순천진동첨절제사로 임명되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무남영우영관(武南營右領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2월 최익현(崔益鉉)과 더불어 구체적인 의거계획을 수립했다. 그는 각 도·군에 윤통문(輪通文)·군율(軍律) 등을 발송하는 등 초모(招募)·군량 및 병사훈련의 책임을 맡았으며, 기우만(奇宇萬)·이항선(李恒善)·장제세(張濟世) 등 호남지역의 유림들과 연락하면서 의거에 관한 방책을 강구했다. 4월 13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대규모 의병을 일으켜 홍주의병장 민종식(閔宗植)과 서로 연락하면서 태인·정읍·순창·곡성 등지를 습격하여 관곡(官穀)을 취해 군량으로 삼고 진용을 정비해갔다. 그러나 6월 12일 순창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중 최익현과 함께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후 감금 2년형을 선고받고 쓰시마 섬[對馬島]으로 유배되었다가 1907년 1월 귀국했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국권을 상실하자, 은거하면서 재차 기의를 도모했다. 1912년 고종의 밀조를 받고 독립의군부 전라남도순무대장에 임명되어, 각지에 격문을 발송하고 의병조직을 확대·강화했다. 그해 12월 독립의군부 육군부장 전라남북도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1913년 1월 아들 응철(應喆)을 서울로 보내 이인순(李寅淳)·곽한일(郭漢一)·전용규(田瑢圭) 등과 협의케 하는 한편 호남지방의 유생 임태흥(林泰興)·임창현(林昌鉉)·김덕장(金德長) 등과 같이 전라남북도 조직 정비에 착수했다. 1913년 2월 전라남북도 순무총장 겸 사령장관에 임명된 그는 호남지방의 조직을 완료하고 독립의군부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와서 이명상(李明翔)·이인순 등과 협의하여 독립의군부의 편제를 재정비했다. 그는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총독을 비롯하여 모든 일제 관헌들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제출하여 한일합병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외국에 대해서도 일제의 통치에 한국민이 불복하고 있음을 알리는 한편, 국민대중에게 국권회복의 의기를 일으켜 일시에 일제를 구축하려는 항일 의병운동을 계획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동지 김창식(金昌植)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독립의군부 조직을 자백함으로써 독립의군부의 국권회복운동은 실패했다. 많은 간부와 동지들이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자 경무총감과 면담, 한일합병의 부당성을 통박하고 국권반환 및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했으며 일본의 한국독립 보장만이 동양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역설했다. 6월 1일 재차 총독과 총리대신에게 서한을 보내 면담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옥중에서 3차례에 걸쳐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6월 13일 거문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인 〈돈헌문집〉에 병오의병 당시 일제에 체포되어 취조받을 때의 기록을 비롯하여 이 시기 항일의병전쟁과 관련된 자료들이 실려 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네이트 백과사전
선생은 1906년 전남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창의(倡義)의 기치를 들었으며, 경술국치 후 광무황제의 밀칙(密勅)을 받고 전국적 규모의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의병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제에 체포되어 거문도에 유배되었으며 고초를 겪으시던 중 순국하셨다.
일찍이 학문을 배워 어려서 신동(神童)이라 불리다
임병찬(林炳瓚, 1851. 2. 5~1916. 5. 23) 선생은 1851년 2월 5일 전북 옥구군(沃溝郡) 서면(西面) 상평리(上坪里)에서 임용래(林榕來)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중옥(中玉), 호는 돈헌(遯軒). 세 살 때 천자문을 읽었으며 한번 읽어 내려가면 바로 외어버려 부친이 재주가 지나칠까 두려워하여 가르치기를 그쳤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총명했다. 5살 때부터 동리 사숙(私塾)에서 본격적인 학문의 길로 접어 들었다.
이때 이미 오언(五言), 고풍(古風), 수귀(數句)를 읽을 수 있을 만큼 뛰어나 모든 이들이 그를 신동이라 일컬었다 한다. 그 후 향시 백일장에 나가 ‘대고풍’(大古風)으로 수석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낙안군수에 부임하여 부정부패 척결에 앞장서다
15세가 되던 해에 전주부 감시(監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이때 가세가 빈궁할 대로 빈궁해 생계를 위하여 사역(使役)에 종사하였다. 이렇게 곤궁한 가운데서도 면학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1888년 호남에 대흉년이 들자 돈 4,000냥과 조 70석을 내어 구휼하고 1석에 25전의 저리를 받아 백성을 구하였다. 그리하여 1889년 봄 도내 유림의 천거로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의 직첩을 받았다. 그 뒤에도 휼민을 잘하여 7월에 낙안군수(樂安郡守)(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에 임명되었다. 낙안군수에 부임하여 탐관오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를 막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1890년 그 동안의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향리인 회문산(回門山) 북쪽 종송리(種松里,현재의 종성리:宗聖里)에서 학문에 전념하던 중 1894년 무남영우영관(武南營右領官)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사양하고 향민교육에 온 힘을 기울였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동민(洞民)을 거느리고 뒷산에 올라 궁궐 쪽을 바라보며 통곡하기도 하였다.
<임병찬 상언>(1906) 임병찬이 의병 거병의 뜻을 밝히며 고종에게 상소한 글.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무성서원에서 창의(倡義)하다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 중 1906년 정월 경기도 포천에서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이 호남으로 내려 왔다. 이때 정읍군 산내면(山內面) 종송리에서 거사를 준비 중이던 선생을 만나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선생은 최익현을 맞아 사제(師弟)의 의(義)를 맺고, 최익현에게 병권(兵權)을 위임하였다. 이리하여 동년 6월 4일(음력 윤 4월 13일) 전북 정읍군 칠보면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창의(倡義, 의병을 일으킴) 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사방에 격문을 돌리고 그 날로 태인을 정복하여 군량과 군기를 확보하였다. 이어 정읍, 순창을 격파하고 8일에는 곡성을 점령하는 동안 근방 포수들이 모여 진영은 900명으로 늘어났다. 이와 같이 면암과 선생이 지휘하는 의병진 앞에 왜군은 도망하고 군수와 그 관속(官屬)은 엎드려 사죄하였으며 민중의 호응도 대단하였다. 6월 12일 의병진이 순창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전주와 남원진위대 군사가 공격해 왔다. 여기서 일제의 침략문제를 놓고 동족끼리 살상을 해서는 안되겠다는 뜻에서 의병을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가운데서 관군의 공격을 받아 중군장 정시해(鄭詩海)가 전사하였으며, 선생을 비롯하여 최익현 등 13명은 일본군 사령부로 붙잡혀가 동년 7월 9일에는 대마도(對馬島) 엄원군(嚴原郡) 위수영(衛守營)에 감금되었다. 그 후 면암이 단식항쟁(斷食抗爭)으로 순절(殉節)하였으며 선생은 이듬해 1907년 1월에 유배가 해제되어 귀국하였다.
<해외일기>(1906) 임병찬이 대마도에 유폐되어 있던 시기에 기록한 일기의 사본.
광무황제의 밀명(密命)으로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이 되다
191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국권이 완전히 상실되자 향리에 재차 거의할 것을 도모하던 중 1912년 음력 9월 28일 공주(公州) 유생 이칙(李?)으로부터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북도 순무대장(全羅南北道巡撫大將)으로 임명한다는 광무황제(光武皇帝, 고종)의 밀명을 받았다. 광무황제는 열강들에 대하여 국권을 만회할 원조를 구할 목적으로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으로 조직하여 무력항쟁을 추진하기 위하여 1906년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던 선생을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으로 지명하였다. 그러나 의병활동을 경험한 선생은 이 막중한 임무를 감당하기에는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다고 느껴 수차에 걸쳐 이 책임을 면하기를 상소하였으나 1913년 정월 전참판 이인순(李寅淳)이 다시 황제의 밀조(密詔)를 전하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선생은 의병 활동때부터 나름대로 구상했던 의병(義兵)전략과 당시 일제하에서의 독립운동방략을 분석하고 앞으로의 독립의군부 활동방법을 제시한 <관견>(管見)을 작성하여 상소하였다. 이 <관견>은
(1)論天下大勢(논천하대세) (2)論時局形便(논시국형편) (3)知己(지기) (4)知彼(지피) (5)天時(천시) (6)制勝(제승) (7)定籌(정주) (8)料人(료인) (9)料史(료사) (10)備禦(비어)로 구성되어 있으며 누구나 쉽게 보고 행할 수 있도록 국한문의 문답형식으로 되어 있다. 일종의 독립의군부에 대한 종합활동계획서와 같은 것이다. 이 상소가 받아들여져 1913년 2월 광무황제로부터 사령총장(司令總將) 겸 전남북순무총장(全南北巡撫總將)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향약(鄕約)과 5가작통(五家作統)의 중요성에 착안하여 독립의군부를 조직할 때 이 구상을 적용하였다. 1913년 음력 정월에 아들 임응철(林應喆)을 서울에 보내 전참판 이인순?이명상(李明翔)?곽한일(郭漢一) 및 전용규(田瑢圭) 등과 협의하여 음력 2월 김태흥?임당?송재준 등과 함께 전라남북도의 조직을 완료하였다. 1914년 2월에는 임병찬이 상경하여 이명상?이인순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하여 대한독립의군부 편제를 구성하였다. 중앙원수부에 병마도총장(兵馬都總將)과 참모총약장(參謀總約長)을 두고 서울, 강화, 개성, 수원, 광주(廣州)에 5영(營)을 두어 사령총장, 참모부약장(參謀副約長) 각 1명, 매 부(府)에 관찰사(觀察使) 1명과 도약장(道約長) 1명, 각 군(郡)에는 군수 1명과 군약장(郡約長) 1명을 그 밑에 향장(鄕長), 면장, 이장, 통장(統長)을 배치하여 조직적인 편제를 갖춘다는 것이었다.
<대마도 일기>. 임병찬이 최익현의 순국 사실을 기록한 책. 임병찬은 최익현이 순국할 때까지 병을 간호하며, 일본 관리들과의 접촉에서 일어난 사건, 제자, 친척, 친구들과의 내왕 사정 등을 기록하였다.
전국적인 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대규모 의병전쟁을 준비하다
1914년 3월 23일 이명상?이인순과 상의하여 각도 각군 대표를 선정하여 편성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각도 대표)> 경기도 : 崔永卨(최영설) 충청도 : 柳濬根(유준근) 경상도 : 權鎭遠(권진원) 전라도 : 李重翼(이중익), 崔永?(최영풍), 吳啓?(오계화), 朴在求(박재구), 李權濟(이권제) 강원도 : 徐相烈(서상렬) 함경도 : 金性文(김성문) 평안도 : 李道成(이도성) 황해도 : 柳應斗(유응두), 吳昌根(오창근), 宋洛善(송낙선)
<의병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발간한 독립신문 1920년 5월 1일자 기사의 사본. 최익현과 함께 거의한 임병찬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독립의군부의 활동목표는 일본의 내각총리 대신과 조선총독 및 주요 관리들에게 한국강점의 부당성을 깨우쳐 주고 대규모 의병전쟁(義兵戰爭)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1914년 5월 일정한 날을 정하여 첫째, 참모총약장 1명, 참모부약장 5명, 참모약장 8명 등 14명은 각국 공사(公使)에게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고 있음을 알리고, 이어 일정한 장소에 모여 연명 날인(捺印)하여 총독부(總督府)에 투서하며, 도약장은 각각 해당 부(府), 경무부(警務部)에 투서하고, 부?군약장은 각각 부, 군, 병참(兵站)에 투서하며, 투서 2일전 새벽이나 밤을 이용하여 각 지역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거사 일이 지나면 곧바로 향약(鄕約)을 실시하려 하였다. 1914년 5월 3일 선생은 함경남도 관찰사 겸 순무총장에 중임(重任)되어 조직을 북부지방까지 확대하던 중 5월 23일 동지 김창식(金昌植)이 일경에 붙잡힘으로써 독립의군부 활동이 일경에 발각되었다.
대한독립의군임병찬선생창의기념비(전라북도 정읍 소재).
거문도(巨文島)에 유배되어 순국하다
독립의군부의 계획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총사령인 선생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에게 직접 면담을 요구하고, 윤 5월 23일자로 총독 및 일본 내각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大?重信)에게 ‘국권반환요구서’(國權返還要求書)를 보냈다. 5월 29일 총독 대리로 온 경무총감(警務總監) 입화소일랑(立花小一郞)에게 국권침탈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국권반환 및 일군의 철병을 요구하였으며, 한국의 독립만이 동양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역설하였다. 그 해 6월 1일 다시 데라우치 총독과 일본 총리 대신에게 서신을 보내 일제의 한국침략을 강력히 규탄하였다. 이에 일경은 동월 3일 선생을 체포하고 독립의군부 간부들을 투옥시켰다. 선생은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 12일 1년 감금(監禁)의 선고를 받고 거문도에 유배(流配)되었다. 유배된 후 단식으로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16년 음력 5월 23일 유배지에서 향년 66세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중옥(中玉), 호는 돈헌(遯軒). 1888년(고종 25) 호남지방에 대흉년이 들었을 때 진휼의 공을 인정받아 1889년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의 직첩을 받았으며, 이어 낙안군수 겸 순천진동첨절제사로 임명되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무남영우영관(武南營右領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2월 최익현(崔益鉉)과 더불어 구체적인 의거계획을 수립했다. 그는 각 도·군에 윤통문(輪通文)·군율(軍律) 등을 발송하는 등 초모(招募)·군량 및 병사훈련의 책임을 맡았으며, 기우만(奇宇萬)·이항선(李恒善)·장제세(張濟世) 등 호남지역의 유림들과 연락하면서 의거에 관한 방책을 강구했다. 4월 13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대규모 의병을 일으켜 홍주의병장 민종식(閔宗植)과 서로 연락하면서 태인·정읍·순창·곡성 등지를 습격하여 관곡(官穀)을 취해 군량으로 삼고 진용을 정비해갔다. 그러나 6월 12일 순창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중 최익현과 함께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후 감금 2년형을 선고받고 쓰시마 섬[對馬島]으로 유배되었다가 1907년 1월 귀국했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국권을 상실하자, 은거하면서 재차 기의를 도모했다. 1912년 고종의 밀조를 받고 독립의군부 전라남도순무대장에 임명되어, 각지에 격문을 발송하고 의병조직을 확대·강화했다. 그해 12월 독립의군부 육군부장 전라남북도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1913년 1월 아들 응철(應喆)을 서울로 보내 이인순(李寅淳)·곽한일(郭漢一)·전용규(田瑢圭) 등과 협의케 하는 한편 호남지방의 유생 임태흥(林泰興)·임창현(林昌鉉)·김덕장(金德長) 등과 같이 전라남북도 조직 정비에 착수했다. 1913년 2월 전라남북도 순무총장 겸 사령장관에 임명된 그는 호남지방의 조직을 완료하고 독립의군부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와서 이명상(李明翔)·이인순 등과 협의하여 독립의군부의 편제를 재정비했다. 그는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총독을 비롯하여 모든 일제 관헌들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제출하여 한일합병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외국에 대해서도 일제의 통치에 한국민이 불복하고 있음을 알리는 한편, 국민대중에게 국권회복의 의기를 일으켜 일시에 일제를 구축하려는 항일 의병운동을 계획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동지 김창식(金昌植)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독립의군부 조직을 자백함으로써 독립의군부의 국권회복운동은 실패했다. 많은 간부와 동지들이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자 경무총감과 면담, 한일합병의 부당성을 통박하고 국권반환 및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했으며 일본의 한국독립 보장만이 동양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역설했다. 6월 1일 재차 총독과 총리대신에게 서한을 보내 면담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옥중에서 3차례에 걸쳐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6월 13일 거문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인 〈돈헌문집〉에 병오의병 당시 일제에 체포되어 취조받을 때의 기록을 비롯하여 이 시기 항일의병전쟁과 관련된 자료들이 실려 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네이트 백과사전
선생은 1906년 전남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창의(倡義)의 기치를 들었으며, 경술국치 후 광무황제의 밀칙(密勅)을 받고 전국적 규모의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의병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제에 체포되어 거문도에 유배되었으며 고초를 겪으시던 중 순국하셨다.
일찍이 학문을 배워 어려서 신동(神童)이라 불리다
임병찬(林炳瓚, 1851. 2. 5~1916. 5. 23) 선생은 1851년 2월 5일 전북 옥구군(沃溝郡) 서면(西面) 상평리(上坪里)에서 임용래(林榕來)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중옥(中玉), 호는 돈헌(遯軒). 세 살 때 천자문을 읽었으며 한번 읽어 내려가면 바로 외어버려 부친이 재주가 지나칠까 두려워하여 가르치기를 그쳤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총명했다. 5살 때부터 동리 사숙(私塾)에서 본격적인 학문의 길로 접어 들었다.
이때 이미 오언(五言), 고풍(古風), 수귀(數句)를 읽을 수 있을 만큼 뛰어나 모든 이들이 그를 신동이라 일컬었다 한다. 그 후 향시 백일장에 나가 ‘대고풍’(大古風)으로 수석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낙안군수에 부임하여 부정부패 척결에 앞장서다
15세가 되던 해에 전주부 감시(監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이때 가세가 빈궁할 대로 빈궁해 생계를 위하여 사역(使役)에 종사하였다. 이렇게 곤궁한 가운데서도 면학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1888년 호남에 대흉년이 들자 돈 4,000냥과 조 70석을 내어 구휼하고 1석에 25전의 저리를 받아 백성을 구하였다. 그리하여 1889년 봄 도내 유림의 천거로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의 직첩을 받았다. 그 뒤에도 휼민을 잘하여 7월에 낙안군수(樂安郡守)(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에 임명되었다. 낙안군수에 부임하여 탐관오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를 막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1890년 그 동안의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향리인 회문산(回門山) 북쪽 종송리(種松里,현재의 종성리:宗聖里)에서 학문에 전념하던 중 1894년 무남영우영관(武南營右領官)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사양하고 향민교육에 온 힘을 기울였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동민(洞民)을 거느리고 뒷산에 올라 궁궐 쪽을 바라보며 통곡하기도 하였다.
<임병찬 상언>(1906) 임병찬이 의병 거병의 뜻을 밝히며 고종에게 상소한 글.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무성서원에서 창의(倡義)하다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 중 1906년 정월 경기도 포천에서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이 호남으로 내려 왔다. 이때 정읍군 산내면(山內面) 종송리에서 거사를 준비 중이던 선생을 만나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선생은 최익현을 맞아 사제(師弟)의 의(義)를 맺고, 최익현에게 병권(兵權)을 위임하였다. 이리하여 동년 6월 4일(음력 윤 4월 13일) 전북 정읍군 칠보면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창의(倡義, 의병을 일으킴) 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사방에 격문을 돌리고 그 날로 태인을 정복하여 군량과 군기를 확보하였다. 이어 정읍, 순창을 격파하고 8일에는 곡성을 점령하는 동안 근방 포수들이 모여 진영은 900명으로 늘어났다. 이와 같이 면암과 선생이 지휘하는 의병진 앞에 왜군은 도망하고 군수와 그 관속(官屬)은 엎드려 사죄하였으며 민중의 호응도 대단하였다. 6월 12일 의병진이 순창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전주와 남원진위대 군사가 공격해 왔다. 여기서 일제의 침략문제를 놓고 동족끼리 살상을 해서는 안되겠다는 뜻에서 의병을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가운데서 관군의 공격을 받아 중군장 정시해(鄭詩海)가 전사하였으며, 선생을 비롯하여 최익현 등 13명은 일본군 사령부로 붙잡혀가 동년 7월 9일에는 대마도(對馬島) 엄원군(嚴原郡) 위수영(衛守營)에 감금되었다. 그 후 면암이 단식항쟁(斷食抗爭)으로 순절(殉節)하였으며 선생은 이듬해 1907년 1월에 유배가 해제되어 귀국하였다.
<해외일기>(1906) 임병찬이 대마도에 유폐되어 있던 시기에 기록한 일기의 사본.
광무황제의 밀명(密命)으로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이 되다
191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국권이 완전히 상실되자 향리에 재차 거의할 것을 도모하던 중 1912년 음력 9월 28일 공주(公州) 유생 이칙(李?)으로부터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북도 순무대장(全羅南北道巡撫大將)으로 임명한다는 광무황제(光武皇帝, 고종)의 밀명을 받았다. 광무황제는 열강들에 대하여 국권을 만회할 원조를 구할 목적으로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으로 조직하여 무력항쟁을 추진하기 위하여 1906년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던 선생을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으로 지명하였다. 그러나 의병활동을 경험한 선생은 이 막중한 임무를 감당하기에는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다고 느껴 수차에 걸쳐 이 책임을 면하기를 상소하였으나 1913년 정월 전참판 이인순(李寅淳)이 다시 황제의 밀조(密詔)를 전하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선생은 의병 활동때부터 나름대로 구상했던 의병(義兵)전략과 당시 일제하에서의 독립운동방략을 분석하고 앞으로의 독립의군부 활동방법을 제시한 <관견>(管見)을 작성하여 상소하였다. 이 <관견>은
(1)論天下大勢(논천하대세) (2)論時局形便(논시국형편) (3)知己(지기) (4)知彼(지피) (5)天時(천시) (6)制勝(제승) (7)定籌(정주) (8)料人(료인) (9)料史(료사) (10)備禦(비어)로 구성되어 있으며 누구나 쉽게 보고 행할 수 있도록 국한문의 문답형식으로 되어 있다. 일종의 독립의군부에 대한 종합활동계획서와 같은 것이다. 이 상소가 받아들여져 1913년 2월 광무황제로부터 사령총장(司令總將) 겸 전남북순무총장(全南北巡撫總將)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향약(鄕約)과 5가작통(五家作統)의 중요성에 착안하여 독립의군부를 조직할 때 이 구상을 적용하였다. 1913년 음력 정월에 아들 임응철(林應喆)을 서울에 보내 전참판 이인순?이명상(李明翔)?곽한일(郭漢一) 및 전용규(田瑢圭) 등과 협의하여 음력 2월 김태흥?임당?송재준 등과 함께 전라남북도의 조직을 완료하였다. 1914년 2월에는 임병찬이 상경하여 이명상?이인순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하여 대한독립의군부 편제를 구성하였다. 중앙원수부에 병마도총장(兵馬都總將)과 참모총약장(參謀總約長)을 두고 서울, 강화, 개성, 수원, 광주(廣州)에 5영(營)을 두어 사령총장, 참모부약장(參謀副約長) 각 1명, 매 부(府)에 관찰사(觀察使) 1명과 도약장(道約長) 1명, 각 군(郡)에는 군수 1명과 군약장(郡約長) 1명을 그 밑에 향장(鄕長), 면장, 이장, 통장(統長)을 배치하여 조직적인 편제를 갖춘다는 것이었다.
<대마도 일기>. 임병찬이 최익현의 순국 사실을 기록한 책. 임병찬은 최익현이 순국할 때까지 병을 간호하며, 일본 관리들과의 접촉에서 일어난 사건, 제자, 친척, 친구들과의 내왕 사정 등을 기록하였다.
전국적인 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대규모 의병전쟁을 준비하다
1914년 3월 23일 이명상?이인순과 상의하여 각도 각군 대표를 선정하여 편성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각도 대표)> 경기도 : 崔永卨(최영설) 충청도 : 柳濬根(유준근) 경상도 : 權鎭遠(권진원) 전라도 : 李重翼(이중익), 崔永?(최영풍), 吳啓?(오계화), 朴在求(박재구), 李權濟(이권제) 강원도 : 徐相烈(서상렬) 함경도 : 金性文(김성문) 평안도 : 李道成(이도성) 황해도 : 柳應斗(유응두), 吳昌根(오창근), 宋洛善(송낙선)
<의병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발간한 독립신문 1920년 5월 1일자 기사의 사본. 최익현과 함께 거의한 임병찬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독립의군부의 활동목표는 일본의 내각총리 대신과 조선총독 및 주요 관리들에게 한국강점의 부당성을 깨우쳐 주고 대규모 의병전쟁(義兵戰爭)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1914년 5월 일정한 날을 정하여 첫째, 참모총약장 1명, 참모부약장 5명, 참모약장 8명 등 14명은 각국 공사(公使)에게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고 있음을 알리고, 이어 일정한 장소에 모여 연명 날인(捺印)하여 총독부(總督府)에 투서하며, 도약장은 각각 해당 부(府), 경무부(警務部)에 투서하고, 부?군약장은 각각 부, 군, 병참(兵站)에 투서하며, 투서 2일전 새벽이나 밤을 이용하여 각 지역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거사 일이 지나면 곧바로 향약(鄕約)을 실시하려 하였다. 1914년 5월 3일 선생은 함경남도 관찰사 겸 순무총장에 중임(重任)되어 조직을 북부지방까지 확대하던 중 5월 23일 동지 김창식(金昌植)이 일경에 붙잡힘으로써 독립의군부 활동이 일경에 발각되었다.
대한독립의군임병찬선생창의기념비(전라북도 정읍 소재).
거문도(巨文島)에 유배되어 순국하다
독립의군부의 계획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총사령인 선생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에게 직접 면담을 요구하고, 윤 5월 23일자로 총독 및 일본 내각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大?重信)에게 ‘국권반환요구서’(國權返還要求書)를 보냈다. 5월 29일 총독 대리로 온 경무총감(警務總監) 입화소일랑(立花小一郞)에게 국권침탈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국권반환 및 일군의 철병을 요구하였으며, 한국의 독립만이 동양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역설하였다. 그 해 6월 1일 다시 데라우치 총독과 일본 총리 대신에게 서신을 보내 일제의 한국침략을 강력히 규탄하였다. 이에 일경은 동월 3일 선생을 체포하고 독립의군부 간부들을 투옥시켰다. 선생은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 12일 1년 감금(監禁)의 선고를 받고 거문도에 유배(流配)되었다. 유배된 후 단식으로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16년 음력 5월 23일 유배지에서 향년 66세의 생애를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