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23. 주일예배설교
사무엘상 28장 3~25절
하나님이 두렵지 않은 지도자,
하나님이 두렵게 하시리라!
■ 근대국가의 탄생은 전제적(專制的) 왕정 제도의 붕괴로부터 시작됐습니다. 물론 이렇게 일반화하는 것은 질문을 받을 소지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왕이나 군주의 노예로서의 백성에서, 국가의 주인인 국민으로의 대전환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로써 국민이 중심이 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대변동이 시작됐고, 이후 이러한 시스템은 자연스러워졌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에 근거한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동안에도 지도자의 필요성은 여전하였고, 지도자는 국가의 중심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왕정 제도가 붕괴했을 뿐, 지도자의 역할은 여전히 막강합니다. 그렇기에 대통령이나 수상이 어떠냐에 따라, 한 나라의 분위기나 신세가 달라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중요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성경의 예가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최악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오늘은 이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만나고자 합니다.
■ 사실 이스라엘에는 왕이 필요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왕의 역할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도자는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등은 지도자였지만, 왕은 아니었습니다. 왕은 오직 하나님이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이러길 원하셨습니다. 이를 신명기 33장 5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수룬에 왕이 있었으니 곧 백성의 수령이 모이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함께 한 때에로다.”
여기에 있는 “여수룬”은 이스라엘의 애칭입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는 정확하지 않다고 하는데, 우리 말에 ‘아이고, 내 새끼!’ 정도의 애칭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여수룬에 왕이 있었으니”라고 한 표현은 왕이 있었다, 왕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신명기는 이스라엘에 왕이 있기 전 상태입니다. 그런데 왕이 있다고 합니다. 이해가 안 되죠? 그렇습니다. 이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신명기 33장 26절을 보시면 이해가 됩니다.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왕의 역할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역할은 이스라엘의 시작부터 줄곧 하신 것입니다. 이에 신명기 33장 5절의 “여수룬에 왕이 있었으니”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예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영원히 이스라엘의 왕의 역할을 하시겠다는 결심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땡큐입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 살면서 지도자들에게 집요하게 왕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에 들어가 보니 이미 정착한 나라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보니 너무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것이었습니다. 부러웠습니다. 얼른 그렇게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된 이유를 살펴보니, 왕이 있어서 그런 풍요롭고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지도자들을 들볶았고, 드디어 사무엘 시대에 왕을 허락받았습니다. 그러나 허락은 하셨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좋지 않으셨습니다. 곧 후회하게 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본문이 이 사실을 적극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 사실 사울의 시작은 신실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도 사람들에게도 신실함을 인정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으로 선택받았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정말 잘했습니다. 다윗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정말 잘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다윗이 천하무적인 적장 골리앗을 돌맹이 하나로 쓰러뜨리고 난 후, 백성들의 관심이 다윗에게 쏠리자, 그만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승전 환영 길에서 백성들이 부른 노래가 결정적이었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이날부터 사울의 질투심은 불같이 타올랐고, 결국 이러한 질투심은 그의 마음과 신앙을 무너뜨리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을 극도로 미워했고, 죽이려고 하기를 수차례, 결국 죽이지 못하고 오늘 본문에 이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최대 적인 블레셋의 대대적인 공격에 속수무책이 된 상태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렇다면 속수무책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블레셋이 가장 무서워하는 다윗의 부재(不在)였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의 최고의 자랑이었던 골리앗을 물리친 용장으로 이후 블레셋에게는 최고의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사울의 질투와 살기로 인해 곁을 떠났는데, 사울을 피해 간 곳이 블레셋 지경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7장 1절입니다.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다윗이 이스라엘에 없음을 블레셋이 알았으니 이스라엘로 쳐들어온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무엘의 부재(不在)였습니다. 3절입니다.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두고 슬피 울며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사울을 왕으로 찾아냈고, 평생 사울의 조언자요 조력자였던 사무엘이 죽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영적 아버지였던 사무엘의 부재가 속수무책의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이렇게 다윗과 사무엘의 부재는 사울을 당황하게 했고, 극도로 예민해진 그는 결국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가 모두 쫓아낸 신접한 자/무당들 중 한 명을 찾아간 것입니다. 참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입니다. 사실은 이 속수무책의 상황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할 수 있는 기회였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질투심으로 인한 분노는 인간의 가장 밑바닥을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사울의 요청은 죽은 사무엘을 불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엘, 죽은 자를 불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11절입니다. “여인이 이르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하니, 사울이 이르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하는지라.”
결국 사울은 사무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만나자마자 한 일은 14절에서 보시듯,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듯, 하나님께 해야 할 행동을 한 것입니다. 참으로 사울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대통령이 교회에서 하나님을 말하면, 그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착각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사울을 만난 사무엘, 사무엘을 만나 사울, 두 사람의 대화는 15절에서부터 19절에 있습니다. 그 대화는 이랬습니다. ‘왜?’ ‘급해서요.’ ‘뭔데?’ ‘블레셋 때문에요.’ ‘그건 하나님이 하신거다.’ ‘네?’ ‘하나님이 하신 거라고.’ ‘네?’ ‘하나님이 너 때문에 너 정신 차리라고 벌이신 일이야. 망하라고 하신 거야, 이놈아! 그러니 가!’ ‘헉~’
이 대답을 들은 사울은 정신이 다 나갔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20절입니다. “사울이 갑자기 땅에 완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의 기력이 다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루 밤낮을 음식을 먹지 못하였음이니라.”
이후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대패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시작은 신실함이었으나, 끝은 배신이었고, 비참함이었습니다.
■ 이런 가정을 해볼까요? 사울이 왕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랬으면 이런 일은 안 일어날 수도 있었겠죠?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왕이 됐어도 같았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울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도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도자는 반드시 사고를 치기 때문입니다. 사울과 같지는 않아도, 사울처럼 사고를 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을 믿거나, 자신보다 힘센 그 어떤 존재를 믿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기 신념이고, 강자에 대한 절대 의존적 태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도자는 반드시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반드시 망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는 그 어떤 예외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긴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치권에 당장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십시오.!” 물론 전광훈씨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하긴 전광훈씨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두려워하게 하니 다르긴 합니다.
■ 여하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도자는 반드시 하나님을 두려워할 날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한 지도자 때문에 나라가 위기와 위험에 빠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이 나라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