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들장 생각
임병식 rbs1144@daum.net
요즘처럼 추위가 심해져서 운신하기 어려운 형편이고 보면 따끈하게 데워진 고향집 아랫목 생각이 많이 난다.어렸을 적 바깥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방에만 들어서면 따뜻해 언 몸이 금방 눈 녹듯이 풀렸다.
그때 보면 아랫목에 항상 담요로 감싸 둔 것이 있었다. 따뜻한 밥 밥공기로 외출한 가족이나 불시에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마련해 둔 것이었다. 따로 보온시설이 없던 시절이라 어머니는 늘 준비를 해두었는데 난감한 상황에 대비한 삶의 지혜가 아니었던가 한다.
어려서 나는 그러한 경험을 많이 했다. 겨울철, 학교가 파하여 집에 들어오면 언 손과 발을 녹이려고 담요 속에 밀어 넣곤 했는데, 그때마다 주발이 만져지곤 하였다. 그 기억 때문에 날씨가 추워지면 나는 고향집의 따뜻한 아랫목이 많이 생각난다.
해방 이듬해 태어난 나는 세 번의 방바닥 풍경이 바퀸 경험을 했다. 첫 번째는 대오리로 짠 죽석(竹席)에서 생활했다. 이것은 장단점이 있었다. 습기를 차단하고 보온상태를 지속하는 효과가 있었지만 무엇이 엎질러지면 완전히 닦아내기가 쉽지 않고 또 그것이 오래되어 너설이 생기면 자칫 가시가 생겨 발이나 손가락에 박히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 다음에는 골판지가 등장했다. 그것은 5.16혁명이 나고 경제개발이 진행될 무렵에 나온 신상품이었다. 두꺼운 장판이 판매 되었는데, 이것은 반영구적인 것이었다. 그것을 깔고 피면에 들기름을 먹이면 광택도 나고 물을 엎질러도 베어들지도 않았다.
그다음으로 등장한 것이 비닐제품이다. 이것은 지금도 주 장판재료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것이 깔린 아랫목은 늘 표시가 났다. 아궁이에서 땐 불길이 곧바로 아랫목에 닿는 바람에 달아오른 열기로 그 부분이 자국이 생겼다.
아랫목을 생각하면 그것 말고도 떠오르는 것이 있다. 바로 구들장이다. 구들장은 우리고장의 특산품이었다. 다른 고장도 나긴 하겠지만 우리고장의 것에는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한때는 전국 구들장 수요의 70%를 공급했다. 그것은 최근에 그 효용성과 함께 문화적가치가 새삼 조명되고 있어서다. 맥반석인데다 가볍고 단단하며 공극(孔隙)이 되어 있어서 열전도율을 물론 지속성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공급 시기는 1930년대 후반에서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얼추 40년간. 그 바람에 득량역 광장은 여기저기 구들장이 쌓이고 그것을 덮개 없는 하물차량이 쉬지 않고 실어 나렸다. 그것이 여간 이색적인 볼거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어 버렸다. 붐비던 화물이 자취를 감춘것은 물론, 역사(驛舍)는 기차가 정차하지 않아 이용객이 없이 방치되어 버렸다.
한데, 최근 추억을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주거환경의 변화로 구들장 뿐 아니라 채석한 것을 실어 나를 일도 없는데, 그 구들장 채석지가 국가문화재에 등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한 데는 한때의 전성기를 누린 산업현장을 기념하자는 뜻인지, 아니면 근대문화유산으로서 보존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그런 결정을 한 것인지는 몰라도 쇠락한 역사의 현실에 비춰볼 때, 다소 뜸금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어련히 알아서 결정했을 것이다.
암튼, 예전에 새집을 짓거나 방을 수리를 할 적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구들장이었다. 그 구들이 열기를 보존하고 건강을 지켜주었던 것이다. 문헌에 보면 구들문화는 우리나라가 유일무이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역사는 사뭇 길어서 고조선시대까지 올라간다. 학계에서는 이것의 사용 여부를 따져서 문화의 갈래를 크게 나누기도 한다.
중국인들은 주로 부엌을 중앙에 두어 방을 빙 둘러서 만들고, 일본인은 다다미를 사용하는데 비해 우리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아궁이에다 불을 때면 그 불길이 방안을 빙 돌아나가게 되어 온기가 유지된다. 나는 어렸을 적 어른들이 하신 말씀을 많이 들었다. 피곤하거나 어디가 아프면,
"아랫목에서 삭신을 푹 지져라.”하곤 했다.
어려서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맥반석 성분이 많은 고향 구들장이 특별히 피로를 제거하는 성분의 물질이 많은 것을 알고서 이해하게 되었다.
고향 오봉산 자락에는 구들장을 실어 나르던 우마차길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소싯적에 달구지에다 가득 구들장을 싣고 산에서 내려오던 광경을 잊지 못한다. 몇 채의 수레들이 구불구불한 험로의 비탈길을 곡예 하듯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니 내가 다 오금이 저려왔다. 구들장을 가득 실은 소는 그 짐이 얼마나 힘에 겨운 지 고리눈을 희번덕이며 입가에 거품을 물고 내려왔다. 그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그런 채석장이 국가 문화제로 등재가 되었다니, 그렇다면 각종 조형물도 함께 세워질까. 조형물이 세워진다면 구들장을 떼 내던 채석과정, 실어 나르던 우마차도 재현해 놓아야 하지 않을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채석을 할 때 산골짜기를 찌렁찌렁 울리던 석수장이의 망치소리도 음향으로 재현해 두면 좋지 않을까 한다.
돌아보면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유일하거나 최초인 것들이 여럿 있다. 고대로 부터는 고인돌 군을 비롯하여 금속활자와, 비색청자, 그리고 팔만대장경판, 한글과 조선왕조실록, 조선의궤, 난중일기 등 기리고 보존할 것들이 많다.
거기다 최근의 것들로는 세계 최고인 메모리반도체, 가스운반선과 쇄빙선, 철강시설도 있다. 그런데 구들장 채석장을 먼저 착안하여 산림문화자산으로 등재한 것은 나름 가치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구들장을 채취는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다. 나의 초등학교친구는 70연대 인근 구들장 채석장에서 일을 하는데 그 친구를 만나려 한 번씩 가면 인근에서는 돌 깨는 망치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콰당! 콰당! 꽈당!”
계곡을 빠져나온 소리는 앞산에 부딪쳐서 크게 메아리쳤는데, 이제는 들을 수 없는 옛일이 되었다. 그렇지만 구들장이 놓인 아랫목에서 추위를 물리치던 일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기만 하다. (2021)
첫댓글 온돌방도 어느 결에 아련한 추억이 되었군요 간혹 시골살이로 정착한 귀농 귀촌인들이 구들을 놓아 황토 찜질방을 만드는 정도로 겨우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듯합니다 어린시절 아궁이에 큰 풍구를 대고 고랫구멍을 틔우던 일, 구들을 걷어내고 소제를 한 다음 다시 구들을 놓던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추억을 깨우는 글 음미했습니다
득량산 구들장은 전국 공급의 70%를 차지했는데 맥반석으로 유명합니다.
한때는 득량역 주변이 구들장 화물로 가득했지요.
지금은 찾는 사람도 없지만 물량도 고갈되어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보도에 따르면 산림청에서는 문화유산으로 관리한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퍽 반가운 소식입니다.
득량산 구들장은 전국 공급의 70%를 차지했는데 맥반석으로 유명합니다.
한때는 득량역 주변이 구들장 화물로 가득했지요.
지금은 찾는 사람도 없지만 물량도 고갈되어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보도에 따르면 산림청에서는 문화유산으로 관리한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퍽 반가운 소식입니다.
2022 봄호 푸른솔문학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