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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대 건축물 문화재 제44호인 나주 노안성당 전경. 성당 외벽과 지붕 모두가 붉은 색인 것이 이채롭다. 2. 강당 모양으로 전체가 트여 있는 노안성당 실내. 마루바닥이 소박하면서도 정겨워 보인다.3. 성당 창을 장식하고 있는 `행복선언`유리화 중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내용을 표현한 유리화.4. 성당 마당에 서 있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조각상. 사제복인 수단 차림에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를 새기고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
광주에서 13번 국도를 타고 나주로 가다 보면 노안면 양천리 계량마을이 나온다. 마을 입구에 성모상이 서 있어 '성모고을'이라고도 불리는 천주교 교우촌이다.
마을 진입로를 따라 동네 어귀로 들어서면 멀리 언덕 위에 붉은 건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바로 노안성당이다. 붉은 벽돌과 붉은 색 아스팔트 싱글 지붕 단층 건물로 소박하면서도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노안성당은 그 독특한 맵시 때문에 2002년 문화재청에서 근대 문화재 제44호로 지정했다.
1908년 설립된 노안본당(주임 배기성 신부)은 나주 지역 최초의 본당이다. 지금의 성당은 1927년에 지어진 건물을 토대로 계속해서 증ㆍ개축돼온 성당이다.
초대 주임인 까다르(1878~1950,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는 3000여평 성당 부지와 임야 수천평을 매입해 40평 규모 초가성당을 마련하고, 직접 벽돌을 찍어 2층 양옥 사제관을 지었다.
교세가 급속히 성장하자 1926년 부임한 박재수(요한, 1899~1983) 신부는 벽돌 사제관을 서구식 성당으로 확장, 신축해 1927년 완공했다. 이때 성당은 '일자 마루형' 성당이었다.
지금의 라틴 십자가 모양 노안성당은 1957년 늘어난 신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제단을 중심으로 좌ㆍ우 소매채를 증축하면서 바뀐 것이다.
노안성당은 주출입구에 돌을 쌓아 3면에 반원 아치를 두었고, 그 위에 붉은 벽돌로 종탑을 쌓고 꼭대기에 십자가를 세워 놓았다. 성당 내부는 강당 모양으로 트여 있으며 마루바닥이다. 벽면은 같은 형태 창을 규칙적으로 두어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지루함을 해소해 주고 있다.
창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행복선언'(마태 5장)을 주제로한 유리화로 장식돼 있다. 이 유리화는 한손스테인드그라스(주)가 1985년 제작, 설치했다.
성당 마당에는 '성모 동굴'과 특이한 모습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조각상이 있고, 아름드리 사철나무와 은행나무, 벚나무들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노안성당은 이처럼 화려하기보다는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대적ㆍ지역적 여건에 따라 최소 공간에 최대 기능을 부여하며 변화를 거듭해온 교회 건축물이다.
노안 땅에 본격적으로 가톨릭 신앙이 전래된 것은 1900년이었다. 노안 주민 이민숙(바오로)ㆍ이화서(바오로)ㆍ이진서(토마스) 세 사람이 산 너머 함안군 나산면에서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던 서울 출신 정락(요한)씨로부터 가톨릭을 전해들은 후, 무안에 있는 이내수(아우구스티노)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돌아와 공소를 세우면서부터다.
노안성당은 그 역사만큼이나 많은 일화를 갖고 있다. 그 중 하나는 본당 설립에 얽힌 이야기이다. 1900년대 초반, 한국교회 관할권을 갖고 있던 파리외방전교회는 호남지역 선교를 위해 목포에서 내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선교 거점 지역을 물색하고 있었다.
이 일을 책임맡은 드애 신부와 뚜르뇌 신부는 나주와 계량에서 약 7km 떨어진 남산부락에 성당 부지를 매입했다. 남산에는 비록 천주교 신자가 단 한명도 없었지만 평야 지대인데다 사방 4km 안에 40여개 부락이 있어 교세 성장에 따른 지리적 요건을 감안해 성당 부지로 선정했다.
그러나 땅 주인이 묘를 이장하기 위해 무덤을 파보니 시신들이 그대로 있어 '명당'이라며 매매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해 버렸다. 마을 사람들도 선교사들에게 땅을 파는 것에 대해 크게 반대했다. 이렇게 되자 충돌을 우려한 선교사들은 남산을 포기하고, 나주 지역의 유일한 신자 거주지인 계량마을을 성당 설립지로 정했다.
또 다른 일화는 한국전쟁과 관련돼 있다. 영광 불갑사에 본부를 두고 있던 빨치산들이 노안성당을 불지르려고 계량마을로 들어섰는데 언덕 위에 있는 성당이 불길에 휩싸여 있는 것을 보고 '다른 병력들이 먼저와 성당에 불을 질렀구나'생각하고 되돌아갔다. 놀랍게도 이런 일이 세차례나 있었다. 건물 전체가 붉은 노안성당 모습을 한번도 보지 못한 빨치산들이 멀리서 성당이 불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제5대 교구장이었던 현 하롤드(성 골롬반 외방전교회) 대주교가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에 기고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노안성당 첫 이름은 '계량성당'이었으나 1927년 성당 신축과 함께 '나주성당'으로, 다시 1934년 나주에 새 본당이 설립되면서 '노안성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노안본당은 낙후된 나주 지역 청소년들을 위해 1936년 김창현(바오로) 신부가 4년제 보통학교인 '신성학술강습원'을 설립해 해방 이후 노안초등학교가 세워질 때까지 졸업생 수백명을 배출했다. 또 1961년부터 1984년까지 '성 골롬반 중학교'를 운영, 지역사회에 교육의 장을 제공했다. 본당은 이후 교정을 광주대교구 청소년수련장으로 개조, 전남 지역 청소년들에게 호연지기를 키워주는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찾아가는 길
광주에서 13번 국도를 타고 나주로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노안면 양천리 계량마을이 나온다. 마을 입구에 성모상이 서 있어 '성모고을'이라고도 불리는 100년이 넘는 천주교 교우촌이다. 마을 진입로를 따라 동네 어귀로 들어서 성모상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멀리 보인는 붉은 건물이 노안성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