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2학년 때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에 실린 전태일열사의 일기를 저의 노트에 옯겨 적으며 많이 울었습니다. 동료에게 자기 차비로 풀빵을 사 주고 자신은 밤길을 몇 시간 걸어서 통근을 하는 모습, 고된 노동을 하는 틈틈이 법을 연구하고 동료들을 모아 함께 다양한 방법으로 요구하다가 결국은 스스로 분신을 하실 때까지의 일기를 읽으면서 열사의 인간성에 감동했을 뿐 아니라 노동현실을 알게 되었고 잘못된 현실을 바꾸어야 한다는 사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노동계급성을 철저하게 가져야 민중의 이익을 위해 끝까지 변치 않고 운동할 수 있다는 역사의 진실을 배우면서 노동운동에 대한 동경을 가졌습니다.
뒤늦게 대학 3학년 때 학생운동에 뛰어 들었고 약대학생회장으로서 건국대에서 열린 애학투련 집회에 참가하였다가 구속, 집행유예를 받았습니다. 짧은 감옥생활이었지만 돈 없고 배경없는 사람만 처벌받는 현실을 생생하게 보았으며 사람을 교도하자는 곳에서 사람을 동물취급하며 망가뜨리는 범죄를 국가가 저지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6월 항쟁 덕분에 사면, 복학을 하기 직전 그렇게도 다니고 싶던 구로공단 옷공장에 보름동안 다녀보았습니다. 감옥처럼 생긴 공장기숙사, 산업체 야간학교를 다니며 낮에 일하여 고향에 돈을 부치는 10대 노동자, 긴 생머리의 착한 얼굴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제가 다닌 때가 7, 8월 노동자대투쟁 전야였습니다. 제가 나와서 복학을 준비하는 동안 노동자들이 대거 민주노조를 만드는 위대한 역사를 보았습니다.
1988년에 저는 성남 성공회교회를 다니며 뜻있는 분들을 모아 생활야학을 함께 만들고 이름을 알기교실이라고 붙였습니다. 야학에 오는 노동자들과 사귀며 생활한 1년동안의 시간은 그 때까지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습니다. 정을 많이 받았고 저도 많이 쏟았습니다. 노동운동 지도자가 아니 저로서 그들의 삶을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다는 한계를 느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1992년에 다시 성남 터사랑청년회에 가입하고 성남중앙병원 약제과에 근무하면서 공장은 아니지만 노동자로서 사회생활을 배웠습니다. 1993년에는 약국을 차리고 주민등록까지 옮겨 단독세대주로서 객지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95년에 청년회원들의 선거운동이 주민들을 감동하게 하여 제가 성남시의회의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1996년 12월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때 김형찬군이 안기부원들에게 고문받다가 분신한 사건의 대책위원회 대외협력국장으로 활동하면서 의회 안에 갇하지 않고 민중의 요구를 찾아 뛰는 의정활동의 보람을 느꼈습니다.
1997년 IMF 사태 후 실업자가 주체가 되어 실업문제를 사회에서 책임지게 만들자는 취지로 경기동부지역 건설일용노동조합, 청년회, 노동자회, 주부모임 등이 함께 '고용안정과 실업자문제 해결을 위한 경기동부실업자대책위원회(약칭 경기동부실대위)'를 만들었고 저도 공동대표로 참여했습니다.
설문조사를 통해 실직자들이 생계비 다음으로 자녀교육 걱정을 많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건설노동자가 많이 사는 성남시에 IMF 영향이 훨씬 크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수정, 중원구 어느 집이나 건설노동자가 살고 있지 않은 집이 없고 두 집 중 한 집에 실직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업극복국민운동에 '실직가정자녀 방과후 학습지도와 무료급식을 하는 푸른학교' 사업과 '건설노동자 무료취업알선센타' 사업, '범국민결연 생계비지원'사업 제안을 하였고 채택이 되어 사업을 하였습니다.
1999년 1월에 저도 공공근로 현장에 나가 일해 보았습니다. 복정동에 있는 무료취업센타에는 새벽 4시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서 공공근로 일자리를 얻으려고 하고 어느 날은 밤을 새우며 줄을 지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999년 2월 상대원 푸른학교 아이들이 복지회관 공간을 잠시 빌려 쓰다가 쫓겨났을 때 시청앞 집회를 계속 하였습니다. 건설일용노동조합 조합원들이 많이 집회에 참여했다고 해서 나중에 이태영 위원장님께서 수배를 받아 명동성당에서 농성하셨다가 노동자 수배해제 때 불구속 처리되었습니다. 저는 9월에 결혼할 때 성남 건설노동자의 상징이신 이태영 위원장님께 길눈이말씀(주례)을 부탁드렸습니다.
관급공사현장에서 퇴직공제, 고용보험,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제도를 시행하는지에 대해 저는 시의회 행정사무감사와 시정질문을 통해 점검하고 요구하였습니다. 택시운송수익금 전액관리제를 잘 시행하는지 성남시 집행부가 철저히 감독하라는 문제도 자주 제기하였습니다. 택시노동자가 봉건시대의 도급제로 임금을 받는 등 우리 사회 각 부문 노동자의 기본권조차 보장되어 있지 않는 현실을 완전히 바꾸어야 겠다고 절실하게 느낍니다. 2001년 4월 11일에는 이태영 위원장님의 권유로 경기도 건설노조의 조합원이 되었습니다.
2002년 2월부터 두 달 동안 성남의 옷공장에 다니기도 했습니다. 전업시의원만 하다가 무디어진 생활감정을 노동생활 속에서 다시 추스리고 현실을 배우고자 했습니다. 공장은 15년 전보다 나아진 것이 없었습니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빠른 대중가요를 들으며 일하고 화장실 가는 것조차 눈치를 보아야 했습니다. 탈의실이 없어서 화장실을 문짝만 뜯고 변기가 그대로 있는 곳에서 겉옷을 벗어 걸어두고 가방을 두고 작업장으로 나옵니다.
6월 경기도의원선거에 나왔다가 낙선한 뒤 약국에 취직을 하였습니다. 주 3일을 근무하고 그 외 시간은 지구당위원장과 자주여성회 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활동했습니다. 11월부터는 약국을 그만두고 대선 선거운동을 하였고 다시 2003년 1월부터 10개월동안 약국에서 주 2일 전일근무(9:00-18:30, 9:00-22:00) 하면서 비정규노동자 생활을 하였습니다. 주 2일은 휴일을 피해 꼭 근무해야 하고 수당과 휴가와 4대보험이 일체 없는 비정규직이었습니다.
올해 7월 인하병원 폐업 뒤부터 인하병원 노조원들이 단결되게 조직적으로 실천하며 성남시민들이 주인으로 참여하는 성남시립병원설립운동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옆에서 겪으며 감동했습니다. 100여 명 노동자들 모두가 존경스러웠습니다. 노동자의 조직력이 얼마나 크고 강한지를 직접 보았습니다. 그것을 이끌어내는 간부의 헌신과 신념을 보면서 '저런 분들이 참다운 정치가이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살아온 이야기 중에서 노동자와 관련된 부분만 추려서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민주노동당 생활은 생략하였습니다.
저는 경기도 건설산업노동조합 조합원임이 자랑스럽습니다. 1992년 성남건설일용노동조합 때부터 항상 조합 행사에 참여하여 발전과정과 승리하는 투쟁의 현장을 보아온 저로서 그 기운을 닮고 싶습니다. 특히 성남의 도심형성 역사가 빈민들이 스스로 집과 도로, 수도를 건설한 역사이고 서울과 전국의 건설현장으로 생계를 위해 출장을 다닌 역사입니다. IMF 경제위기의 피해를 가장 많이 받고 노동3권과 4대보험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의 대명사 1순위가 건설노동자입니다. 하지만 투쟁 속에서 스스로 지위와 권리를 확보하는 모습을 보고 겪으면서 항상 배우고 있습니다.
10년 20년을 건설현장에서 살아오신 분들이 국회에 가셔야 합니다. 지금은 까마득한 후배인 제가 앞장을 섰지만 제가 길을 터놓겠습니다. 제가 먼저 국회에 들어가서 건설노동자는 물론 우리 노동자들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의정활동과 실천을 잘 하겠습니다. 두 번의 시의원활동을 통해 국회 의정활동을 잘 할 자신감과 경험을 충분히 쌓았으며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속에서 끊임없이 노동자의식과 사회의 근본변화를 추구하고 몸을 던지겠습니다.
함께 힘을 모아 주실 것을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2003년 11월 27일
경기도 건설산업노조 조합원 김미희 올림
- 이 곳 카페에 글이 많이 올라와 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다시 힘이 나시나 봐요.
성남의 역사를 쓰고 계시는 인하병원 조합원님들! 존경합니다.
첫댓글 내년 총선에서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힘내시구요.화이팅!
시청에서 했던 공청회때 뵈었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힘있는 목소리와 성남시의 발전을 위해서는 꼭 필요하신 분이라는 것을 .. 저희도 존경합니다.
I love you!
하하하님, Margaret님, 이쁘니님, 고맙습니다. 힘이 많이 납니다. 인하병원 노동조합원들과 성남시민들의 필승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