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알라코크와 필리베르트 라멩의 딸인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arita Maria Alacoque)는 1647년 6월 22일 프랑스 샤롤레 지방 베로브르의 로트쿠르에서 태어났고, 그녀가 8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자 샤롤레의 성녀 클라라(Clara) 수녀회의 기숙학교에 보내졌다. 그러나 15세가 될 때까지 5년 동안은 류머티즘 열로 인하여 자리에 누워서 지냈는데, 어릴 때부터 성체께 대한 신심은 남달리 뛰어났다. 그녀는 결혼을 거절하고 1671년 6월 20일 파레르모니알(Paray-le-Monial)의 성모 방문 수녀회에 입회하였고, 그 이듬해 11월 6일 ‘마르가리타 마리아’라는 수도명으로 수도서약을 하였다. 그녀는 모범적인 수녀였으나 유머 없는 수녀로 통했던 것 같다.
그녀는 1673년부터 1675년 사이에 그리스도의 환시를 4번이나 경험하였다. 이러한 환시에서 그리스도는 그녀에게 당신의 성심께 대한 신심을 널리 전하는 도구로 선택되었음을 알렸고, 특별히 첫 번째 금요일에 영성체할 것과 매주 목요일 밤에 성시간을 갖고 구속사업에 참여하라는 신심을 그녀에게 교육시켰으며, 예수 성심 축일의 제정을 요구하셨다. 그녀는 자신이 환시 중에 받은 교육을 따르려는 노력 중에 장상으로부터 수많은 퇴짜를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노력하여 온갖 장애를 극복하였으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발현 문제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당신의 수녀회원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녀는 당시 수녀원의 고해신부였던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Claude de la Colombiere, 2월 15일) 신부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콜롱비에르 신부는 파레르모니알의 예수회 원장이었는데, 그는 마르가리타의 환시가 올바르다고 선언하였다. 1684년 멀랭 수녀가 원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수도원 내의 반대도 종식되었으며, 후일 그녀는 수련장이 되었다. 1686년 초에는 수녀원에서 예수 성심 축일을 거행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고, 2년 후에는 예수 성심께 봉헌된 경당이 수녀원 뜰에 세워졌고, 곧이어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내는 관습이 전세계의 성모 방문 수녀회로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마르가리타 마리아는 1690년 10월 17일 수녀원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1864년 9월 18일에 시복되었으며, 1920년 5월 13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마르가리타와 성 요한 에우데스(Joannes Eudes, 8월 19일) 그리고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는 ‘성심의 성인들’로 불린다.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은 1765년에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선포되었으니, 그녀의 사후 75년 만의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