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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4월27일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청주] 다 이루어 주겠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사도 13, 44 - 52
† 복음 : 요한 14, 7 - 14
★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한다. 다른 민족들은 이들의 증언에 기뻐하였으나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그들을 박해하고 그 지방에서 내쫓는다.
그래서 두 사도는 이코니온으로 떠난다(제1독서).
★ 필립보가 예수님께 하느님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사고 청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서 하느님 아버지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필립보는 아직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께서 긴밀한 일치를 이루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예수님께 이렇게 청합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신학생 때였습니다. 어느 날 밤 성체 조배를 하면서 주님께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주님, 지금 제 귀에다가 대고 무언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저는 그것을 제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겠습니다.”
저는 무언가 제 귀나 눈으로 주님을 느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만 있다면 사제직을 준비하는 데 충분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몇 분이 지났습니다. 제 마음에 이러한
울림이 퍼졌습니다. ‘얘야, 나는 이미 너에게 내가 할 말을 다했단다.’
저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주님께서는
제게 모든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성경을 통해, 성인들의 고귀한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당신께서 제게 하고자 하셨던 모든
말씀을 다 건네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 자신은 그것을 소홀히 여긴
채 무언가 특별하고 새로운 것을 청하였던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보고도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필립보처럼, 우리도 성경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과 일상의 수많은
사건 속에서 주님을 발견하지 못한 채 새롭고 특별한 계시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 매일 미사 -
◈ [청주] 다 이루어주겠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4월27일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요한14,7-14
다 이루어주겠다.
충북 음성군 감곡면의 특산물은 복숭아입니다. 매년 복숭아
꽃 축제를 합니다. 오늘은 축제일입니다. 풍성한 수확을 희망하며
기도하는 날입니다. 올 한 해 복된 결실을 이루기를 기원하며 두
손을 모읍니다. 변덕스런 날씨에도 다행히 꽃을 피우고 있어
기대가 됩니다.
복숭아나무는 추위에 약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겨울을 준비합니다. 짚으로 나무를 감싸주는 이도
있고 페인트를 발라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전에 비해 동해를
많이 받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무 둘레의 땅을 파고 퇴비
등 밑거름을 주는 대신 비료 등 웃거름을 주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뿌리는 거름을 향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밑거름이 충분하면 뿌리를 땅속 깊게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웃거름에 의지하게 되면 뿌리가 겉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니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속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쉽게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뿌리를 제대로 내려야 합니다. 밑거름이
풍성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을 잃어버립니다. 기도는 신앙인의 호흡입니다. 호흡을 멈추면
죽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를 회피하는 것은 신앙인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숨을
곳을 찾으려고 땅을 파는 두더지처럼 몸과 마음을 땅으로 굽힙니다.
그들은 현세적이고 지나가는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는 주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내 이름으로 내 바람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바람을 알아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침묵해야 합니다.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은 침묵하는 사람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깊은 침묵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사실 눈과 입은 닫고
가슴과 귀를 열면 무엇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책에서
하느님을 탐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을 발견하는 것은 기도
안에서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그분 손에, 그분의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음성을 조용히 들으십시오.
피아노를 치면서 피아노를 배우듯 기도를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기도를 자주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의 참 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잘 하려거든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기도의 본질적
요소는 많이 생각하는 데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 따라서 많이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혹 구해도 얻지 못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청했는지 짚어보십시오.
분명 주님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 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기쁨이며 희망이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더욱 더 부족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한번 다녀온 여행지를 또 다시 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아
보입니다. 그들은 “나, 그곳에 다녀왔는데...”하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며칠 여행한 것으로
그 여행지 전부를 알 수 있을까요?
몇 년 전, 프랑스 성지순례를 다녀올 때에도 그런 말을 많이
들었지요. 순례지가 프랑스라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다녀온 곳이라서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프랑스 어디를
다녀오셨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수도인 ‘파리’만을 잠시 들렸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파리만 들렸어도 그들은 프랑스를 다녀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신앙인들에게 자주 비쳐지곤 합니다. 주일미사
참석 하는 것으로 교회의 모든 활동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요.
레지오나 빈첸시오 등 교회 단체에서 활동하면 교회의 모든
봉사활동을 혼자서 다 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구역장이나 반장을
하게 되면 동네 사람들을 모두 알고 또 자기가 휘두를 수 있는
부하 정도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과연 자신의 조그마한
활동만으로도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을까요?
앞을 보지 못하는 형제님이 코끼리의 코를 만지고서 “코끼리는
얇고 또 길게 생겼어.”라고 말을 합니다. 정말로 코끼리가 얇고
길게 생겼습니까? 코끼리의 코만을 만지고서는 코끼리 전체를
말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정말로 직접 만져봤다니까!”
직접 만져보았지만 틀렸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이런 모습을
취합니다. 즉, 자신의 부족한 신앙생활과 너무나 적은
봉사활동으로도 충분히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교회의 여러 가지 활동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들에게 계속 보여주시지요. 그러나 우리들의 안일한
마음과 세상의 잘못된 기준만을 내세우는 모습으로 인해 주님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를 이루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도
하느님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아직도 많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지금 모습은 이대로 충분할까요?
더욱 더 부족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과 희생, 봉사의 삶을 다시금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이 모든 부분에 충실할 때, 분명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를 이루시는
주님을 뜨겁게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곳을 빠져나가는 최선의 방법은 그곳을 거쳐 가는 것이다
(로버트 프로스트).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인 자유공원의 벚꽃.
내면의 아름다움.
어제 인터넷을 보다가 ‘대한민국 성형미인 논란’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와 있더군요. 외국 언론과 네티즌들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한국 미스코리아 참가자 사진을 모아놓고 보니 소름끼친다. 다
똑같이 생겼다. 이건 모 클론(aka 복제인간)이냐.”
이코노미스트 (The Economist)에는 며칠 전에 “성형수술 가장
많이 하는 나라?”로 우리나라가 당당히 선정되었더군요. 그러면서
어떤 한국 여성의 인터뷰가 나와 있었습니다. 그 인터뷰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국에서 성형은 메이크업 하는 것과 같다.”
아름다움을 간직하려는 마음은 당연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개성을 버리고 인위적인 아름다움을
쫓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40대 이후가 되면 외모는
거의 평준화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동안이라서 젊어 보이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분명히
외모는 평준화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인정을 받게 되지요.
겉으로 보이는 인위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내 내면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데 더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내면의 아름다움은 절대로 노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깨달음의 길
2013년 다해 4월26일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요한 14,7-14
<깨달음의 길>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 제자로 간택하신 필립보 사도,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그가
오늘은 정말이지 전혀 엉뚱한 말을 해서 예수님 속을 긁어
놓습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안타깝게도 필립보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랫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신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오랜 공을 들여 제자들에게 특별 과외까지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 필립보의 모습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비애나 상심은 무척이나 컸던가봅니다. 필립보를 향한
예수님 책망의 강도가 아주 큽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우리네 인생이란, 그리고 우리들 신앙 여정이란 지속적인
깨달음의 길입니다. 너무나 크신 하느님이시기에 우리
인간의 짧은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하느님, 때로 알쏭달쏭한 하느님, 인간의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하느님이시기에 납득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간절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진리를 볼 수 있는 맑은 눈이 필요합니다.
깨어있기 위한 부단한 자기 단련이 필요합니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깨닫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보다 본격적인 도약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참된 영적 예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평생 죽을 고생을 다했지만 죽기 일보 직전까지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그 인생처럼 불행한 인생도 다시 없을
것입니다.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인생은 참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삶을 동물적인 삶, 돌덩어리나
나무토막과도 같은 삶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획득해야 할 깨달음을 과연 어떤
깨달음입니까? 예수님께서 간단하게 그리고 명명백백하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 하느님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는 하나라는
것. 예수님은 곧 그리스도, 메시아, 더 나아가 하느님 아버지
자체라는 것.”
더불어 우리가 획득해야 할 깨달음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하느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죄와
비참으로 얼룩진 이 세상 한 가운데, 고통 받는 우리 동료들
안에 현존하신다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
“죽음은 생의 끝맺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을 시작하기 위해
묶은 껍질을 벗어버리는 과정임을 깨달음, 마지막 날은
우리네 인생 곡선 안에서 가장 하한선을 긋는 절망의 순간이
아니라 절정의 순간임을 깨달음, 하느님은 똑똑하고 잘난
내가 아니라 부족하고 죄인인 나를 사랑하신다는 깨달음,
나란 존재의 부족함을 아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깨달음, 고통스런 매일의 현실이 사실은 꽃봉오리처럼 소중한
것임을 깨달음, 부족해 보이는 이웃들이 눈물겹도록 고마운
대상임을 깨달음...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성인이 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 사도는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필립보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얼핏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게는 아버지를 뵙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세속적인 욕망을 버릴 만큼의 용기도 있었습니다. 성부를 만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갈망은 중요합니다. 요한 보스코 성인에게는 제자가 여럿
있었는데, 어느 날 성인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
하고 묻자, 그 가운데 도미니코 사비오라는 어린 학생이 “저는 장차
성인이 되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했답니다. 그러자 요한 보스코 성인은
그에게 “그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답했답니다.
그 뒤 도미니코 사비오는 15세라는 어린 나이로 스승 요한 보스코보다
31년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도미니코 사비오는 1914년에 시복
예정이었으나, 요한 보스코 성인보다 먼저 시복될 수 없다는 반대가
있었는지 요한 보스코가 1934년에 시성되고 나서, 1950년에 시복되어
1954년에 시성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과연 어떤 신앙의 갈망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필립보 사도처럼 얼마나 아버지를 뵙고 싶어하는지, 또한
성 도미니코 사비오처럼 얼마나 거룩하게 되기를 갈망하는지 성찰하며
뜨거운 갈망의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은혜를 청해야겠습니다.
- 윤종국 신부(서울대교구 동작동천주교회) -
◈ [기타] 당신은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2013년 다해 4월27일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일도 하게 될 것이다.“ (요한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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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명확한 말씀이시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아직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는지 식별하는 좋은 기준이다.
나의 삶이 그분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표현을 쓰고자 한다면 그에 응당한
삶을 보여야 한다. 아니, 보이지 못한다 하더라도 노력하는 모습은
진실하게 보여야 한다.
그러나 이 말씀에 실망할 필요도 없다. 처음부터 좋은 꼴을
갖추고 시작할 수는 없다. 모든 것에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은 아프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할 것이다.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듯한 믿음이란 사실 그만큼 위험한 구석을 품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지금 이 글을 마음으로 읽고 계신 여러분께서는 잘 살고 계신 것
이다. 최소한 귀를 기울이고,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자기반성이 허락된 분들이라 믿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매력을 느꼈고, 그분의 삶이 아름답게 보였고, 더
나아가 참된 행복의 열쇠가 그분의 가르침에 있다 여겨진다면,
그분의 모습을 닮아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보는 거다.
물론, 경험으로 비추어볼 때, 우리의 의지보다는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해서 우리의 모습이 다듬어져 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는
우리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길을 그분께서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그분을 닮고자 하는 마음과 자기싸움만은 포기하지 말았으면
한다. 넘어질 수도 있고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분께서 일러주신 길을 걷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한,
그분께서 이끌어주심을 믿어야만 한다.
언젠가 이 세상을 마감하는 날, “그래도 애썼습니다. 이끌어주심에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가능한 우리라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시리라 믿는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기타] <내맡긴영혼은>
내맡기신(봉헌) 분들께 - 이해욱신부
2013년 다해 4월27일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내맡기신(봉헌)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아마, 언제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에 대한 글이 73항으로 종결될 것입니다.
길고 지루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많은 분량의 글은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단순 명료함"이 그 특징이며,
무엇보다 73항의 글로써도 아주 충분히 그 내용을 잘 전달할 수
있다는 저의 판단에 이만 글을 닫아볼까 합니다.
혹시라도, 주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글을 열어 주신다면
언제든지 다시 글을 올려 드린다는 것은 물론입니다.
이미 올려진 73항을 틈틈이 "수정보완"을 해 나갈 것입니다.
내맡긴 영혼들은 내맡김의 영성을 여러 차례 읽으셔서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과 자신의 신앙체험"을 종합하여
자신만의 강의록을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어떤 누구 한 사람의 영성이 아니며
이미 말씀드렸듯이, 구약의 아브라함이 보여준 내맡김,
신약을 열게 하신 성모님의 내맡김,
성모님의 내맡김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의 성부(聖父)의 뜻에 대한 내맡김, 내맡김의 모범이
되신 그분들의 내맡김을 실천한 모든 내맡긴 영혼들이
살아가셨던 영성이기에 또한 여러분의 영성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여러분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다 내맡겨 드리셨다면,
분명 이곳의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여러분의 것이 확실합니다.
이 글은 또한 내맡긴 우리 모두의 글입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통해
글을 올리게 하셨고 저는 글을 그냥 썼을 뿐입니다.
이 글이 분명 우리 모두의 글이기에, 아니, 하느님에 대한 글이기에
하느님께 내맡겨 하느님의 것이 되고, 그럼으로 하느님을 소유하게
된 모든 이는 자신이 소유한 하느님을 다른 이에게 알려야 하는
것이며, 또 알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분께서 우리 안에만 계시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체험하고 소유한 이의 큰 특징은
하느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다른 이에게 전하지 않는 내맡김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며, 바로 그것으로 "1%의 부족한 내맡김"이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1% 부족한 내맡김은 내맡김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맡김"입니다.
"맡김"의 삶은 지금도 많은 이들이 살고 있습니다.
"맡김의 삶"을 살던 우리들이 너무나 잘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맡겼다가도 곧 다시 찾아오고, 맡겼다 찾아왔다, 맡겼다
찾아왔다의 끝없는 반복!
"거룩한 내맡김"은 100%입니다.
아주 영원히 내맡겼기에 잠시 찾아옴도 하느님의 허락하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맡긴 영혼들은 자신의 체험을 알려야 합니다.
자신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소유한 하느님을 알려야
합니다.
이곳의 글과 여러분의 체험을 섞어서 한, 두 시간 내지 세
시간짜리의 강의록을 틈틈이 만들어 보십시오. 강의록을 완성하신
분들은 제가 점검해 드릴 것이며, 또한 강의를 지도해 드릴
것입니다.
여러분의 발길은 전국으로, 전 세계로 퍼져 나갈 것입니다.
혼자서, 때로는 둘이나 셋이나 여럿이 함께 나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거룩한 내맡김 영성의 전도사"가 될
것입니다.
어려워하실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영을 열어 당신의 지혜를 내려 주시고,
입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저를 보십시오!
저는 정말 지금과 같이 하느님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글을 잘 쓸 줄도 몰랐던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저의 모든 것을 당신이 다 알아서 해 주시고 계시기
때문에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된 이유는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저의 모든 것을 다 내맡겨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내맡김"은 참으로 "신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엉터리 사제가 이러한 삶을 사는 그 자체가
기적이요 신비가 아니고 그 무엇입니까?
저를 보시고 용기를 내십시오.
정말로 "하나하나", "나날이 조금씩", "때로는 엄청" 이끌어
주시는 그분을 우리는 누구나 다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때로는 엄청"을 경험하신 분이 계시다면,
저와 함께 체험을 나눌 기회를 저에게 주십시오.
그 영적대화는 다른 분들에게는 정말 엄청난 힘이 될 것입니다.
이제 정말 하느님은 여러분에게,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거룩하시고, 위대하시고, 놀라우시고, 오묘하시고, 희한하시고,
웃기시는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 주실 겁니다.
믿으십시오, 굳게 믿으십시오.
그리고 "강의록"을 준비하십시오!
- 동경한인성당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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