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11일 동불사에서 세린강을 따라 걸었다. 날씨가 무덥지 않아 여행하기에는 좋은 날이였다. 세린강은 로두구향 일신촌 서쪽의 황가구에서 발원한다. 도중에 많은 개울들을 회합하여 흐르다가 동불사 류정에서 푸르하통하에 흘러든다. 세린강은 길이가 약 30여리에 지나지 않는 작은 내에 불과하지만 지나날에는 이 강줄기를 따라 4천여세대에에 달하는 조선족마을들이 별처럼 촘촘히 들어앉았었다. 세린강의 하구로부터 옥정동, 수북, 세린, 수남, 중평, 문화, 일신, 장성등은 모두 조선족 마을이다. 하지만 지금은 세린강 량안의 큰 마을은 작은 마을로 작은 마을은 아예 사라져서 약 천5백여세대의 촌민들이 세린강에 매달려 살아갈뿐이다.
동불사에서 새로 닦은 길로 얼마 가지 않으면 비교적 큰 마을인 수북촌이 있다. 세린강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고하여 수북촌이라고 한다. 하지만 썩 오래전에는 이곳에 모래가 많다고하여 沙窝라고 불리웠다. 1930대초에 이민들이 대거 몰려오면서 수북이라고 제멋대로 이름지은것이 지금까지 사용한다. 그때 수북촌부근에서 물 맛 좋고 깨끗한 구럭우물을 발견했는데 사람들이 그 구럭우물을 들러싸고 집을 지으면서 玉#마을이 생겨나고 또 펑퍼짐한 땅에 광진소학교를 지으면서 광진평이라는 마을도 생겨났다. 지금의 수북촌 부근 마을들이다.
수북촌에서 강을 거슬러 약 40분을 걸으면 세린촌이 보인다. 세린촌은 워낙 황백나무가 많아서 처음에는 黄柏洞이라고도 불리웠는데 후에 어떻게 되여 세린촌이라고 불리웠다. 세린촌은 세린강줄기를 타고앉은 마을 가운데서 가장 큰 마을이다. 중국의 북방에는 细鳞河 혹은 细鳞江이라고 불리우는 강이 많은데 그것은 산천어의 일종인 细鳞鱼가 서식하고 있는 강이기에 그렇게 부른것이다. 지금은 강마다 오염이 심해서 산천어가 거의 없어 양식을 하고 있다. 细鳞鱼는 차고 개끗한 강이나 개울에서 서식하는데 다 큰 고기는 몸집의 길이가 약13-17cm된다. 숭선에 가면 지금도 세린어 즉 산천어가 있다. 그러나 세린하에서는 세린어를 보기가 어렵다. 강물을 유도하여 저수지를 만들고 모래를 파내느라 강줄기를 돌려놓은데서 젓줄기같은 강이 초라한 모습으로 신음하고있다.
과거에는 세린촌에 조선족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한족이 절반이상이다. 촌의 서기와 촌장은 오성의라는 한족이 겸해한다. 마을의 모든 일들이 오승의와 그의 형 오승량이 주물러 만들기에 촌민들은 어쩔수가 없다. 석삼년이 지나도 촌민회의가 한번도 없고 위의 정책이 어떤지도 조선족촌민들은 모르고 있다. 그래서 낡아빠진 반도체를 베개머리에 놓고 저녁마다 듣고있다. 거기에서 국가의 농업정책을 알고나서 조선족농민들끼리 수근수근하다가 용기를 내여 촌에 찾아가면 촌간부들은 “그런 일들이 있는가? 아직 촌에까지 락실되지 않았으니 기다려라”고 하면 그뿐이다. 몇년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다.
언젠가 조선족교회가 마을에 들어앉았다. 조선족들이 모여 활동할수 있는 공간으로 된것이다. 그러자 촌에서는 허락을 받지않고 교회를 마음대로 지었다고 폭파약을 싣고와서 폭파해버리겠다고 을러멨다. 조선족촌민들이 나서서 손이야발이야 빌어서야 겨우 교회를 구하였다. 오승량은 촌의 기업을 틀어쥐고 큰 돈을 벌고있다. 얼마전에 기업내의 6쌍의 한족부부를 배동하여 해남도에 여행을 다녀왔다. 오승량 본인은 여러번 세계각지를 여행했다. 그래서 한때 신문에서는 농민들이 세계여행을 다니는 부유한 마을이라는 기사까지 실렸다. 사실 몇명 사람들만이 잘사는 촌인데...
세린촌에는 땅을 다 떼우고 그럭저럭 살아가는 조선족농민들이 있다. 돈을 벌수있는 작은 구멍을 하늘처럼 믿고 땅을 그냥 내여놓았다가 결국엔 게도 구럭도 다 잃은 신세가 되였다. 후에 땅을 찾겠다고 올리뛰고내리뛰여보았으나 “제가 돈을 벌겠다고 버릴때는 언제이고 남이 땀을 흘리며 잘 다루어 놓으니 이제와서 찾겠다고 하느냐.”하면서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량심없는 이기적인 인간이 되여버린것이다.
세린촌에서 문화촌까지는 꽤나 먼 거리다. 약 15리가 된다. 나는 문화촌으로 향하다가 그냥 세린강을 건너 산으로 올랐다. 워낙 문화촌을 거쳐 장성촌쪽으로해서 룡문에 들어서려고 했는데 그렇게돠면 해가 떨어지기전에 연길에 갈것 같지 못해서 단념했다. 세린촌과 문화촌에서 강을 건너 산을 넘으면 투도구와 룡문향이 된다. 문화촌에서 골을 타고 넘으면 투도구진 룡문촌이이 가깝고 세린촌에서 골을 타고 엄으면 투도구진과 가깝다. 산이라야 해발 400메터도 되지 않는 거의 언덕에 가까운 산이다. 산세가 낮고 유연하고 늘차서 마치 한마리의 룡이 시름없이 누워있는 형국이라할가? 그래서 이곳의 지명들은 룡자가 들어간다. 쌍룡, 룡수동, 룡남동등이다. 산에서 내려다보니 세린하는 참으로 밭이 많고 땅이 비옥해 보였다. 특히 강 남안의 느슨한 산비탈은 모두가 기름진 한전이다.
세린하라고하면 사람들은 “쑨개”를 먼저 떠올린다. 쑨개는 중국인 지주 손영명을 말하는데 조선족들은 그냥 “쑨개”라고 한다. “쑨”은 성씨 “孙”을 호칭하는 중국식발음이고 “개”는 “氏”를 이르는 또다른 표현인 “家”의 함경도 사투리다. 해반전에는 세린하일대의 거의 모든 밭들이 쑨개의 밭이였고 거의 모든 농민들이 쑨개의 소작농이였다. 쑨개의 밭은 세린하뿐만아니라 투도구, 이도구, 남고성, 동불사와 흑룡강의 가목사에까지 널려 있었으며 그 면적이 무려 9천여헥타르에 달했다. 또1700헥타르에 달하는 삼림도 갖고있었다. 그리고 기름방, 술공장, 제분소, 벽돌가마, 석회가마가 있었고 사립학교도 갖고있었다. 연길에는 가게도 있었다. 손영명은 연변에서 명실공히 가장 큰 지주였는데 그의 가옥만하더라도 360칸이나 되여 한꺼번에 수백명의 사람들을 류숙시킬수 있었다.
쑨개의 장원은 지금의 일신촌에 있었다. 일신촌에 가면 지금도 그 옛터를 볼수 있다. 쑨개의 장원이 얼마나 크고 웅장했는지를 말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쑨개가 연길도윤공서의 陶氏를 청해서 대접했다. 대접을 받고난 陶氏는 쑨개의 장원대문이 연길현 관청의 대문보다 더 크고 호화로운것을 보고 은근히 질투했다. 그래서 어느해 년말, 관원들에게 줄 설소비가 없자 눈을 딱 감고 쑨개에게 벌금으로 관첩(돈)을 일곱마대나 안겼다. 손영명이 눈이 둥그래서 “무슨 벌금이 이렇게 엄청나냐?”고 걸고들자 도씨는 “돈을 모아 관속에 넣어 가겠소? 나라가 어려운 때에 부패하고 사치한 생활을 누려서야 어디 쓰갰소?”하면서 기어이 내라고 압력을 가했다.
손영명은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졸부이다. 그는 백부를 따라 봉천에서 세린하에 왔는데 오자마자 한 비적무리에 가담하여 로략물을 감추어두는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비적무리가 길림지구에 가서 로략질하다가 군벌에게 포위를 당해 한놈도 살아남지 못했다. 오직 그날 로략질에 참가하지 않은 손영명의 백부만이 살아났았다. 호박이 넝쿨채로 떨어졌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고 손영명의 백부는 동불사순경국을 매수하여 아들을 순관으로 만들었다. 그런다음 순관의 힘을 빌어 조선이주민들을 대량 세린하에 이주시켜 황무지를 개간케 했다. 오늘의 문화촌이 그때 생겨난 마을인데 이주민들이 집단으로 이주를 한데서 그때는 집단촌이라고 불리웠다. 손영명대에 이르러 손영명 즉 쑨개는 재산을 눈덩이 구을듯 구을러나갔다. 대회동에다 아편을 심어팔고 또 70헥타르에 달하는 과수를 가꾸어 과일을 대도시에 가서 팔았다. 그리고 주위의 밭들을 야금야금 빼앗아내거나 사들였는데 그 수단이 교활하고 악랄했다.
쑨개는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일본놈들과 결탁하여 자위단을 묶었다. 자위단의 단장은 김익룡이였다. 쑨개는 김익룡을 앞에 내세워 갖은 만행을 저질렀는데 이들의 손에서 살해된 항일투사만 하더라도 44명이나 된다. 약수동쏘베트정권의 김순희, 정태중, 김영신 허정숙등도 김익룡의 자위단에 의해 살해되였다. 대회동에서만도 림창렬등 7명의 투사가 한꺼번에 참살되였다. 쑨개는 일본놈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투도구에 있는 밭을 일본놈들에게 떼여주어 神社를 짓게하기도 했다.
1945년에 쏘련홍군들이 세린하에 들어와 쑨개네 재산을 몰수했는데 장물이 두 자동차를 꽉 채웠다. 그후 정부에서 4차례에 걸쳐 쑨개를 청산했는데 4차 청산때에도 금과 은이 수십근이나 발견되여 쑨개의 재산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를 누구도 몰랐다. 1947년에 세린강반에서 악질지주 손영명이 처단되고 49년에 손영명의 압잡이 김익룡이 처단되였다.
수북촌에 차도남이라고 부르는 70여세의 로인 한분이 계신다. 그는 아버지대로부터 신분을 알수 없는 항일투사의 묘지를 지켜오고 분향하여왔다. 장장 70년여년이다. 1932년 5월의 어느날, 차도남의 부친이 석양노을속에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한무리의 자위단 놈들이 총을 쏘며 웬 사람을 쫓고있는 것을 보았다. 행여나 하고 지켜보고있는데 지금의 단결촌 부근 골짜기에 들어서는 순간 땅! 하는 총소리에 쫓기우던 사람이 폭 꼬꾸라졌다. 놈들은 죽음을 확인하고 발로 둬번 걷어차고는 오던 길로 돌아갔다. 차도남의 부친이 어둠을 리용하여 골짜기로 다가가 죽은 사람의 시체를 업고 수북촌에 돌아온다음 뒷산 언덕에 묻었다. 죽은 사람은 바로 김용국렬사다. 세린하의 춘황투쟁을 이끌어온 적위대원이다. 김용국렬사의 가족은 김용국렬사의 희생으로하여 뿔뿔히 흩어졌다. 부인은 재가를 가고 딸을 한족집에 팔려가고 아들은 먼 친척에 맡겨지였다. 70여년이 지난 어느날 연변 뇌과병원서 퇴직한 렬사의 손녀가 차도남이 렬사의 묘소를 지켜왔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찾아갔더니 그 묘소의 주인은 바로 할아버지였다...
과거의 일신촌은 쑨개네 장원으로 하여 사철 북적거렸다. 하루에도 수십명의 사람들이 장원으로 들낙날락하면서 일을 했고 쑨개를 찾아오는 손님들의 발길이 장선촌으로 가는 갈림길까지 잇닿아있었다. 인가가 많아 아이들의 떠들썩하는 소리가 진동했으며 가을이면 과수원에 수백명에 달하는 여성들의 치맛자락이 펄럭이였다. 산에 소들은 모두가 쑨개네 소들이여서 소몰이군들의 풀피리소리가 구슬프게 들리였다. 겨울에는 일신촌의 포수들이 멀리 천보산일때까지 누비며 사냥을 했는데 사냥물이 쑨개네 장원안에 가득 쌓여있었다. 포수들중 함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그것은 일신촌이 워낙 함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세운 마을이기때문이다. 그래서 일신촌을 함흥촌이라고도 한적이 있다.
오후 2시가 되여 산언덕에 올라섰다. 남쪽으로 평강벌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나는산등성이에 난 길을 따라 동쪽으로 한창 걷다가 룡평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이 길이 투도구진으로 들어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기때문이다. 약 30분을 부지런히 걸어 룡평에 도착했다. 룡평촌에는 150명의 로인을 모신 룡평경로원이 있다. 경로원에서는 소며 돼지며 닭은 직접 사양하고 또 많은 밭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고기와 채소를 사들이지 않고 직접 해결한다. 식사때마다 고기가 떨어지지 않아 로인들이 좋아한다. 경로원의 로인들은 대부분이 화룡일대의 로인들이다. 자식들이 차에 싣고와서 맏겨놓고는 어디론가 떠나갔다고 한다. 그러기에 로인들은 경로원의 비용이 얼마나 되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도시와 얼마 떨어지지 않는 야외에서 경로원을 늘 보게된다. 로령화사회를 겨냥하여 나온 산물이다. 옛날에는 경로원이라면 국가에서 운영하고 오보하나 렬사유가족들이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사영 경로원이 많이 생겨나 누구나 돈을 내면 자유롭게 들어가 생활할수 있다. 개인이 운영하는 경로원이나 아니면 국가 혹은 병원에서 운영하는 양로원이건 그래도 두 다리가 성해있을때 가는 곳이지 중풍이 왔거나 너무 년로하여 운신이 불편하면 참으로 비참하다. 경로원 혹은 료양원에는 간호원이 별로 없다. 로임을 적게 주기에 간호원으로 나서는 사람이 적은데다 간호원 한명이 10여명을 돌보는 형편이다. 간호원도 사람이니 제 안속을 채우느라 옆채기에 조금 찔러주면 간호를 잘 하는척 하다고도 보호인들이 돌아가면 환자를 아예 거들떠보지 않는다. 환자는 얼마 못가서 욕창이 생기여 뼈가 훤히 들여다 보인다. 그리고 보호인들 대부분이 의학에 대해 문외한이기에 몇원 안되는 싸구려 주사를 한대 놓고는 몇십원 지어 몇백원을 뜯어낸다. 가족에서는 엄청난 비용에 의심을 하면서도 확실한 근거가 없기에 그대로 맡겨두는수밖에 없다. 집으로 도로 모셔간댔자 돌보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의료보험카드를 맡기면 사람이 죽어 나올때는 빡빡 긁어 쓰고는 그것도 모자라서 이런저런 명목으로 현금을 떼여낸다. 국가공무원들은 그래도 30%를 부담하기에 괜찮은 편이지만 그런 혜택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울며겨자먹기다. 지금의 자식들은 부모님들께 돈이나 이밥지 않게 푼푼히 쥐여주면 자식의 도리를 다 한것으로 알고있다. 부모의 그 메마른 가슴에 파고드는 고독을 어찌 다 읽을수 있으랴?!
세린강을 따라 6시간의 여행 아니 산책을 하면서 순수한 사실주의 “그림”과 "이야기"들을 마음껏 감상하고 음미해본다. 그러노라면 시간이 가는줄 모르고 산행이 힘든줄 모른다. 오후 4시가 되여 귀로에 올랐다.
|
첫댓글 안녕하세요? 그저 하나의 평범한 등산행으로 보기엔 너무나 가슴아프게 읽어봅니다.퇴색되여 가고있는 조선족마을;그에 잇달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속에서 무언가 제시도 해주는 좋은글로 수요일 아침을 열어갑니다.도솔님,전에 올려주신 글과 사진속에 저의 고향마을과 소학교모습도 실어주셨지요.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 전해드리며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바래봅니다.
서투른 글을 그냥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고마울뿐입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노래가 맘에 들어 모셔갑니다. 감사합니다.
도솔님의 남다른 문장실력에 감탄했습네다.사진,음악과 함께 감하고 갑니다.
그냥 길 가다 얻어들은 소리들입니다. 읽어주어 고맙습니다.
얫추억이 떠올리게 하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당년에 세린하 문화에 하향했었는데 지금과 같이 퐁토지리지식과 력사도 잘 몰랐는데 오늘 많은걸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