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변흥의와 매초풍이 만남
매초풍은 해검계를 떠나자 진현풍이 생각났다.
그가 자기를 위해 목숨이 위태로운 것을 무릅쓰고 천 년 묵은 산삼을 먹고 그 뒤에는 여소
교를 죽여 버리겠다며 쫓아가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던지라 자기에 대한 진현풍의 마음이 진
심이라고 여겨졌다.
불현듯 매초풍은 진현풍에게 진한 연민의 정을 느꼈다.
'참, 천하의 사내들이란 모두 이런가 봐. 나비가 꽃을 찾듯이 여인을 보면 건드리고 싶은 건
아마도 사내들의 천성인 모양이야. 더군다나 그 여우 같은 여소교가 꼬드겼으니 얼떨떨한
김에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지.'
그러자 진현풍과의 애틋한 정이 그녀 가슴속에 새롭게 피어 올랐다.
매초풍은 발걸음을 재촉하여 시가지로 들어갔다. 지난 번 그 묘 쪽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마
치 진현풍과 첫 밀회라도 하는 듯이 가슴이 콩콩 뛰고 온몸이 떨렸다.
이윽고 묘 앞에 이르렀다. 그녀는 문을 가볍게 밀어 보았다. 열려 있었다. 진현풍이 묘 안에
있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열려진 틈으로 살짝 들여다보다가 그만 온몸이 굳어져 버리고 말았
다. 그녀의 가슴은 천만 길 되는 절벽에서 떨어져 내렸고 눈앞이 아찔했다.
묘 안의 향안 위에서 긴현풍과 여소교가 나체로 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여소교는 몸에 실
한 오리 걸치지 않고 진현풍의 몸을 타고 앉아 낑낑거리고 있었고, 진현풍은 웃옷을 입은
채 죽은 사람처럼 두 눈을 꼭 감고 누워 있었다. 매초풍은 진현풍이 <구음진경>의 후반부
가 들어 있는 웃옷을 웬만해서는 벗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로소 매초풍은 모든 것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여소교가 진현풍의 체내의 원양과 천 년
묵은 산삼의 양열지기(陽熱之氣)를 빨아들였기 때문에 경공이 대단한 호수들처럼 빨리 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두 남녀가 분명 해검계에서 운우지정을 나누었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진현풍에 대한 매초풍의 애틋한 정은 순식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머리 끝까지 화
가 치민 매초풍은 달려들어 수치도 모르는 이 한 쌍의 남녀들을 마구 때려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는 이미 진현풍과의 관계를 단절해 버렸으므로 그가 다른 여
인과 유쾌하게 보내는 것을 나무랄 바가 못 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 일이 자기와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따라서 성을 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매초풍은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나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또다
시 고개를 쳐들었다.
'진현풍, 당신이 그 여자와 재미를 보는데 나라고 그런 짓을 못할 줄 알아요? 난 왜 이런
사내를 그처럼 아껴 주었던가?'
매초풍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걷고 있는데 앞에서 오혈궁 제자 몇이 급급히 달려오고 있
었다. 모두들 당황한 기색으로 말 한마디 없이 시가지 밖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매초풍은 그들이 곁을 지나갈 때 맨 뒤의 오혈궁 제자의 발을 걸어 그를 넘어뜨렸다.
오혈궁 제자가 훌쩍 일어서더니 눈을 부라리며 주먹으로 매초풍을 때리려고 들었다. 매초풍
은 코웃음을 치며 오른손으로 그의 팔목을 잡고 왼손으로 팔꿈치의 곡지혈과 소해혈(小海
穴)을 가볍게 눌러 제압하였다.
오혈궁 제자는 오른팔을 쓰지 못하게 되어서야 이 여인이 고인(高人)이라는 것을 알아차렸
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의연한 자세로 소리 질렀다.
"빌어먹을 년, 감히 오혈궁 문하 사람을 건드리고도 살아 남을 듯싶으냐!"
매초풍은 그의 몸에 있는 혈도 몇 곳을 더 찔러 놓은 다음 그를 끌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누가 빌어먹을 년이란 말이냐?"
오혈궁의 제자는 그제야 미모의 이 여인의 무공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금세 기가 죽었다.
"날 어쩔 셈이시오?"
매초풍은 손바닥을 그의 가슴에 갖다 대고 다시 물었다.
"어서 말해! 누가 빌어먹을 년이란 말이냐?"
오혈궁의 제자는 가슴이 아프고 숨이 막혀 애원조로 말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래, 그렇게 고분고분 말을 들어야지. 내 말에 고분고분 대답하면 고통을 당하지는 않게
돼."
오혈궁의 제자는 평소 오만무례하기 그지없는 자였으나 지금 매초풍의 손아귀에서는 비굴하
기 짝이 없는 소인배였다.
"예, 소인은 꼭 아씨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매초풍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너희들은 방금 전 당황한 기색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묘 궁주께서 해검계에서 암해를 받아 중상을 입었지요. 그래 여혈의 사형께서 사람을 파견
하여 시가지에 있는 제자들더러 급히 철거함으로써 사악한 자들에게 잡혀 죽지 않도록 하라
고 영을 내리셨습니다."
매초풍은 깔깔거리며 웃다가 감개무량한 듯이 입을 열었다.
"휴, 삼십 년을 하서(황하 서쪽을 가리킴)에서, 삼십 년을 하동(황하 동쪽을 가리킴)에서 풍
운을 주름 잡으며 흥성하던 오혈궁이 하루아침에 망할 줄 어찌 알았으랴!"
그러자 그 오혈궁의 제자가 언성을 높였다.
"묘 궁주께서 암해를 당하기는 했지만 그분의 신공(神功)은 세상에 으뜸이라 동사, 서독, 남
제, 북개 이 사대 고수들과 어깨를 겨누지 않습니까? 묘 궁주께서 상처가 나으시면 꼭 그
놈들을 찾아 원수를 같을 것입니다."
"묘상이 치료를 해도 상처가 낫지 않고 죽으면 어떻게 할테냐?"
오혈궁의 제자는 그 말에 두 눈을 부릅떴다. 당장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남의 손아귀에
든 몸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묘 궁주의 상처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그분한테는 제자들이 많습니다. 그중
여혈의 사형의 무예는 아주 고강하여 그런 놈들 따위는 적수가 되지 못할 겁니다."
매초풍은 오만하고 안하무인인 이 오혈궁 제자의 대답이 여간 재미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
를 빤히 쳐다보며 또 물었다.
"여봐, 임잔 이름이 뭐야?"
"전 변홍의(卞紅衣)라고 부릅니다."
"오 변홍의라. 거 듣기 좋은 이름이군. 그런데 변이라는 성은 좀 괴상하군 그래."
"변씨 성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지만 영웅 호한들이 적지 않답니다!"
"임자네 변씨 가문엔 도대체 어떤 영웅 호한들이 있나?"
"첫번째의 호한은 천하 군웅들이 듣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탈명한추(奪命寒錐)'이지
요."
"임잔 탈명한추 변청교(卞靑郊)를 말하는 것이겠지?"
"아씨 같은 젊은 여자도 견식은 있구만요."
"그런 소린 그만둬. 듣자니 탈명한추 변청교는 천하에서 암기 쓰는 데는 으뜸가는 고수라더
군."
"맞았어요. 그분의 이름난 암기 '탈명한추'는 무게가 석 냥 석 돈 삼 푼이고 길이가 세 치
삼 푼 삼 리인데, 뿌리면 유성과도 같이 빨라 천하에 그것을 막아내는 사람이 없지요. 한번
은 유주(幽州) 십팔거도(十八巨盜)들이 매복하여 그분을 사경에 몰아넣으려고 했지요. 참,
그런데 그 놈들은 미련하게도 변청교를 둘러 쌌답니다."
"유주 십팔거도가 함께 공격하면 당해 낼 사람이 적은데 왜 미련하다고 하나?"
"제 뜻은 유주 십팔거도들이 자기 힘을 잘 모른다 그 말입니다. 그 놈들이 어찌 탈명한추
변청교의 적수가 된단 말입니까? 변청교는 살펴보니 모두 무명소졸들이라 그들을 안중에 두
지도 않아 그 유명한 암기도 꺼내지 않았지요. 그분은 다만 표낭에서 열여덟 대의 마름쇠를
꺼내 뿌렸지요."
흥이 난 변홍의는 손시늉을 하면서 설명하려고 했지만 몸의 혈도들이 막혀 있었으므로 그럴
수가 없었다.
"당신 같은 아씨는 그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 수 없지요. 먼 곳에서 싸움 구경을 하던 십
팔거도의 서른여섯 분의 압채부인(押寨夫人)들이 모두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 변청교
더러 거두어 달라고 간청하였지요. 에 참, 그 서른여섯 분의 여인들은 모두 꽃같이 아름다운
부인들이었는데 물론 아씨 같은 경국지색에 비기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자색이 뛰어난 여인
들이었지요. 하지만 변청교는 그녀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버렸지요."
그는 그때 일을 아주 감회 깊게 그려 보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아름다운 부인들은 변청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슬피 눈물을 흘렸지요. 그녀들은 그의
발자국에 입까지 맞추었답니다. 참…… 얼마나 위대한 영웅입니까!"
매초풍은 변홍의의 말에 매혹되어 저도 모르게 그 탈명한추 변청교의 영웅적 자태를 그려
보았다. 하지만 매초풍 역시 강호를 주름잡고 돌아다닌 경력이 풍부한 여인이라 금세 정신
을 차렸다.
"변홍의, 임잔 유주 십팔거도가 어떻게 되었다는 얘길 안했어. 내가 듣기에는 십팔거도들이
악랄하고 무공도 괜찮다고 하던데 그렇게 쉽사리 죽어 버렸단 말인가?"
"만일 제가 아씨를 눈은 있어도 망울이 없다고 말한다면 아씨는 꼭 화를 내실 거고 저의 귀
싸대기까지 때릴 겁니다."
매초풍은 과연 변홍의의 귀싸대기를 본때 있게 후려쳤다.
"날 감히 욕하다니!"
"여인한테 미움을 사지 말아야지요. 꽃같이 아름다운 여인한테는 더군다나 미움을 사선 안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변청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열여덟 개의 마름쇠를 자기 주위의 열
여덟 유주 도적들한테 뿌렸는데 마름쇠들이 모두 도적들의 미간에 있는 인당혈(印堂穴)을
명중했다고 합니다. 그게 어찌나 정확하든지 방금 아씨가 나의 혈도를 찌른 것보다 더 정확
했지요."
그는 연거푸 마름쇠 열여덟 개가 박히는 소리를 흉내냈다.
"거의 동시에 열여덟 사람의 미간에 있는 인당혈을 명중했고 또 거의 동시에 그들의 두골에
구멍이 나면서 마름쇠가 뇌 속에 박혔다 그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 열여덟 사람은 미처 어
쩔 사이도 없이 거의 동시에 거꾸러졌지요."
변홍의는 숨을 들이쉬고 나서 계속 말을 이었다.
"아씨께서 만일 그때 작은 새가 되어 공중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면, 열여덟 사람이 한
영웅을 둘러싸고 있다가 모두 뒤로 넘어져 그 모양이 해바라기꽃이 피어 있는 듯했을 겁니
다. 그들이 넘어질 때 먼지도 거의 동시에 날렸고 서른여섯 분의 압채부인들도 거의 동시에
변청교의 풍채에 감복되어 엎드렸지요."
"임자가 그처럼 상세하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마치 그 십팔 명의 도적을 변청교가 아니라
변홍의가 죽이기라도 한 듯하군."
"제가 아씨를 속이는 게 아닙니다. 제가 바로 변청교의 친동생이니 물론 형님의 일을 잘 알
지요."
"임자가 탈명한추 변청교의 동생이라구?"
매초풍은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변홍의는 그녀의 놀라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는 신이 나 떠들었다.
"변청교한테 나같이 위무당당하고 영준하게 생긴 동생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매초풍이 참지 못하고 키드득 웃으며 면박을 주었다.
"절로 제 자랑을 늘어놓는 게 부끄럽지도 않아?"
"부끄럼은 여인들이나 탈 것이지 나야 당당한 사내 대장부인데 뭐가 부끄러워요? 변씨 가문
에서 나온 영재들은 모두 떳떳하고 광명정대한 호한이지요."
"임잔 변청교를 변씨 가문이 낳은 첫번째 영웅 호한이라고 하였는데 그래 변씨 가문엔 또
어떤 영웅 호한이 있는가?"
"변씨 가문의 두 번째 영웅은 저 변홍의지요."
매초풍은 손가락으로 변홍의의 얼굴을 찌르면서 웃어젖혔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놈아! 온 천하를 다 돌아다녀도 너처럼 제 자랑 하기 좋아하는 허수
아비 영웅은 없을 거다. 나 같은 연약한 여인도 이기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영웅이란 말이
냐?"
변홍의도 쑥스러운지 헤헤 웃어댔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가 있는 법이고 세상엔 상승장군이란 없는 법입니다. 이 변홍의가 지금
보잘것없지마는 이제 머지않아 절세의 신공을 갖게 될 것입니다."
"임자의 그 탈명한추 형님이 절기를 전수해 주려 한단 말이지?"
변홍의는 그 말에 갑자기 시무룩해져서 대꾸했다.
"누가 형님의 탈명한추 초수를 대단하게 생각하는 줄 아십니까? 형님한테서 무예를 전수받
기란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힘든 일이지요."
사실 그가 형님의 절기를 대단하게 생각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근본상 배워 낼 수가 없
었던 젓이다.
'포도를 따먹을 수 없게 된 여우가 그 포도가 시고 맛이 없다고 푸념을 늘어 놓았다는 우화
가 꼭 이자를 두고 한 말이군.'
"여봐, 자네 형님은 왜 동생인 자네한테 무공을 가르치려 하지 않나?"
"형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성미가 사나워 사람 죽이는 일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니까 무공
을 배우면 함부로 사람을 죽여 조만간에 큰 재앙을 입어 죽고 말리라고 말씀하셨지요. 사람
좀 죽이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 돼서 그랬겠습니까? 분명히 구실을 만들어 절기를 나한
테 가르치지 않으려고 그런 거지요."
그는 형님한테서 무공을 전수받지 못하게 되어 오혈궁에 들어 갔던 것이다. 본래부터도 그
런 여지가 있던 그는, 여러 해 동안 오혈궁 제자로 있으면서 오혈궁 사람들이 개미를 밟아
죽이듯이 사람을 제멋대로 죽이는 것을 보고는 다른 사람의 목숨쯤은 초개로 알게 되었다.
매초풍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사람을 죽이는 무공을 닦기 위한 것인데 오혈궁의 제자들은 완전히 심심풀이로 사람
을 죽이는구나. 그러니 절정공자 탁운백, 유정아, 전진철자 그리고 개방 사람들이 한마음같
이 오혈궁 사람들을 대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로구나.'
이때 골목 저쪽에서 세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들은 전진칠자 중의 마옥, 구처기와 손
불이였다. 세 사람은 매초풍을 만나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구처기는 성미가 불 같은 사람이라 대번에 검을 뽑아 들었다.
"철시, 네 년은 또 남을 상하게 만들었구나. 이 구 모는 네 년을 용서할 수 없다!"
그는 이렇게 소리치며 검으로 매초풍의 왼쪽 어깨를 내리쳤다.
매초풍은 그 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걸음 썩 나서서 왼쪽 장으로는 구처기의 오
른쪽 팔목을 치고 오른쪽 손은 갈고리처럼 만들어 가지고 그의 목줄띠를 끌어 잡으려고 하
였다.
이 초수는 공격하면서 방어하는 구음백골조 중의 무서운 초수였다. 구처기는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동생, 그래도 영문이나 물은 다음에 손을 쓰는 게 옳은 일이었네."
마옥이 구처기를 잡아당기며 나무라고 나서 매초풍에게 말했다
"철시, 빈도(貧道)는 임자가 더는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대답한 적이
있었어. 그런데 임잔 그 나쁜 버릇을 아직 고치지 못하는구만."
"마 도장, 당신은 오해를 하고 있군요. 이 놈은 오혈궁의 제자인데 나한테 잡혔어요. 그래
지금 내가 나쁜 짓을 그만두고 선량한 사람이 되라고 권고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렇지 않은
가, 변공자?"
매초풍은 변홍의를 흘겨보면서 말하였다.
변흥의는 자기를 붙잡은 여인이 흑풍쌍살 중의 철시라는 것을 알고는 벌벌 떨었다.
"그렇죠. 매초……풍, 저 여인은 나더러 나쁜 짓을 하지 말고 바른 길을 걸으며 사람을 함부
로 죽이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마옥이 살펴보니 변홍의는 확실히 오혈궁 사람들의 복색을 하고 있었고, 이런 말까지 들으
니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매초풍, 임자의 스승님인 황 선배께서는 동사라는 별호를 갖고 있고 행위가 아주 괴상하기
는 하지만 무분별하게 살인하는 일은 없지 않은가? 임자가 개과자신을 한다면 도화도의 명
성을 더럽히지 않게 되는 셈이야."
구처기는 속으로 반신반의하였으나 매초풍이 나쁜 짓을 하였다는 근거를 잡을 수 없었으므
로 침묵을 지켰다. 손불이는 매초풍을 조금도 믿지 않았으나 마옥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더 이상 참견할 수가 없었다.
매초풍이 전진칠자를 바라보며 능청스럽게 말하였다.
"세 도장께서는 이 여인이 저 놈한테 설교하는 것을 들으시렵니까?"
그러자 마옥이 웃는 얼굴로 대답하였다.
"임잔 여기 그대로 남아 저 사람한테 권고를 하도록 하게. 구 사제, 손 사매, 우린 가세나."
세 사람은 그 자리를 떠났다.
둘만 남게 되자 변홍의가 놀란 기색으로 불쑥 물었다.
"당신이 정말 철시 매초풍인가요?"
"왜, 내가 철시 같질 않아 보이나?"
"듣자니 흑풍쌍살은 사람을 과녁으로 삼아 무공을 익히며 악독하기 그지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전 철시가 아주 무섭게 생긴 여인인 줄 알았거든요. 후에 듣자니 몇몇 동료들이 말
하기를 철시가 미인이라고 하더군요. 전 그 말을 믿지 않았지요."
"이젠 믿을 만한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더니 당신은 실로 하늘 땅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미인이군요.
옥장(玉 )이 다시 살아오고 초비(貂婢)가 세상에 살아 있다 하더라도 아씨한테는 발뒤꿈치
에도 못 따라갈 것입니다."
매초풍은 변홍의가 일부러 자기를 추어주느라고 그런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쨌든 기분은 좋
았다.
"임잔 남의 비위를 맞출 줄 아는 재주를 가졌어."
"제가 한 말은 참말입니다."
그러자 매초풍은 낯색을 바꾸면서 비웃었다.
"흥, 임잔 감언이설을 늘어놓기 좋아하는 사람이야. 소요공자 악처후를 찜쪄 먹을 인간이
야."
변홍의는 그녀가 갑자기 성을 내자 깜짝 놀라 대번에 자라목처럼 움츠리고는 말을 더 이상
하지 못했다.
매초풍은 머리를 돌리다가 뜻밖에 여소교가 골목길에 나타난 것을 보게 되었다.
'나쁜 년, 그 더러운 놈과 재미를 실컷 본 모양이로구나. 걷는 꼴만 봐도 구역질이 난다.'
뒤미처 매초풍은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진현풍이 여소교를 뒤를 따라 머리를 숙인 채 맥없
이 걷고 있었던 것이다. 변홍의는 매초풍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해지고 봉긋한 젖무덤이 세
차게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매초풍이 갑자기 변홍의 앞에 가까이 달려와 그를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불쑥 말
했다.
"오관이 단정한 게 영준하게 생겼구나! 가자, 날 네가 묵고 있는 객점으로 인도해라!"
그러더니 매초풍은 그의 두 다리에 있는 혈도를 풀어 주었다.
변홍의가 영문을 몰라 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입 다물엇! 더 지껄이면 죽여 버릴테다!"
변흥의는 질겁하여 부들부들 떨면서 골목길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매초풍을 자기가
묵고 있는 객방으로 인도했다.
이 객방에는 원래 오혈궁의 제자 네 사람이 들어 있었는데 나머지 세 사람은 벌써 도망했으
므로 방안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매초풍은 문을 닫아건 뒤 문발을 쳐놓았다. 그런 다음 변홍의 앞에 다가오더니 다짜고짜로
허리띠를 잡아 끊고 장삼을 벗겼다.
변홍의는 상반신은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침상 곁으로 물러서면서 놀라 더듬거렸다.
"아……아씨, 당신은 날 과녁삼아…… 공력을 닦으려는 게 아닙니까?"
매초풍은 머리를 저으면서 천천히 자기 옷을 벗었다.
변흥의는 멍청한 표정으로 매초풍의 백설 같은 피부와 봉긋 솟은 젖무덤을 물끄러미 바라보
았다. 변홍의는 온몸이 굳어지면서 한 가닥의 뜨거운 기운이 아랫배로부터 얼굴로 뻗쳐 오
르는 것을 느졌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여인의 나체를 보았던 것이다.
변홍의는 사람을 유혹하는 여인의 사타구니를 쳐다보았다. 옷을 벗고 난 매초풍이 변홍의
앞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변홍의, 임자 보기엔 나의 몸매가 어때?"
"아름답지요. 기막히게 아름답고 말고요."
변홍의는 그녀의 풍만한 젖무덤, 가는 허리, 아름다운 다리 등을 감상하기에는 자기의 눈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매초풍이 냉소하듯 물었다.
"변홍의, 임잔 내 몸을 가질 생각이 없나?"
"왜 싫겠어요. 아씨를 노엽힐까 봐 두려워 그럴 뿐이지요."
매초풍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을 집어 던졌다. 변
홍의는 찻잔에 맞자마자 봉해졌던 혈도가 모두 풀렸다. 그는 팔을 놀려 보면서 이불 위로
얼굴만 내민 매초풍을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임잔 내가 싫나? 왜 가까이 오지 않는 거야? 사내라는 게 나보다도 더 부끄러워하다니
……."
변홍의의 가슴은 후둑후둑 뛰었다. 그는 매초풍의 핀잔에 시름을 놓고 바삐 옷을 벗은 뒤
침상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서둘러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변홍의는 매초풍의 몽글몽글한 살결이 닿자 전기에 댄 듯이 부르르 몸을 떨며 움츠러들었
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변홍의는 그제야 용기를 가다듬고 손으로 그
녀의 풍만하고 부드러운 젖무덤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변흥의의 하신에서는 기막
힌 반응이 일어났고 그의 호흡이 가빠졌다.
삽시에 온몸의 피가 끓어오른 그는 매초풍의 부드러운 몸 위를 덮쳤다. 매초풍도 처음에는
긴장하더니 뒤미처 가느다란 신음을 토했다.
'진현풍, 내가 당신한테 보복을 하겠다고 말하지 않던가요. 당신이 여인을 가지고 장난하면
나도 사내를 가지고 놀겠어요.'
변홍의는 처음으로 여인과 살을 섞는 일을 하는지라 접촉하자 마자 사정해 버리고 말았다.
그는 그 느낌이 그렇게 좋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는 사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매초풍에게 치근덕거렸다.
매초풍은 변홍의를 침대 밑으로 와락 떠밀고는 버럭 화를 냈다.
"물러갓! 물러가란 말이야!"
이렇게 소리치고 나서 그녀는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변홍의는 천천히 기어 일어나서 어두운 방안 한쪽 구석으로 갔다. 그는 옷을 주워 입지 못
한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다시는 침대 곁으로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연신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방바닥에 널려 있는 옷을 주워 들었다.
매초풍이 물기 어린 음성으로 명령했다.
"옷을 입지 말어!"
변홍의는 깜짝 놀라 의복을 도로 방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우두커니 선 채 겁먹은 얼
굴로 통곡하는 매초풍을 쳐다보았다.
약 반 시진쯤 지나자 날씨가 어두워졌다. 변홍의는 캄캄해진 방안에서 추위에 덜덜 떨었으
나 감히 옷을 입지 못하였다.
매초풍이 울음을 멈추고 속으로 탄식하였다.
'남을 원망할 게 아니다. 내가 진현풍한테 보복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왜 이리도 괴
로울까? 내가 아직도 진현풍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인가? 이런들 어떻단 말인가. 그 배신자
가 없어도 난 얼마든지 사내를 찾아 낙을 누릴 수 있어.'
매초풍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이 사내는 진현풍보다 더 영준하고 또 퍽 젊다. 나와 함께 한 침대에서 즐길
만한 사내다.'
매초풍은 자기와 살을 섞을 때 열광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다시 마음이 동한 매초풍이
입을 열었다.
"이리 와!"
변홍의는 멍하니 매초풍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은 마치 '저 말인가요?' 하고 묻는 듯했다.
매초풍은 이불 속에서 손을 내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변 공자, 이리로 와요."
갑자기 부드러워진 매초풍을 보자 변홍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갔
다. 매초풍이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러고는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
제야 변홍의도 그녀의 가는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반나절이나 얼었던 몸이 매초풍의 따
뜻한 몸에 닿자 음성(淫性)이 또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그렇게 마구 덤비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속의 온갖 시름을 털어버리고 마음껏 즐기려 했다.
두 사람은 몇 번이나 미친 듯이 즐겼다. 두 사람은 기진맥진해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 비로
소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변홍의는 남녀 사이의 쾌락을 한껏 맛보고 나서는 피곤했던지 곧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매초풍은 한 시간쯤 자고 나서 변홍의를 흔들어 깨웠다.
"당신에게 물어 볼 게 있어요."
변흥의는 비록 그녀의 몸은 차지하였으나 그녀의 마음은 아직 알 수가 없었다. 매초풍이 지
독한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조금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서 정신을 바짝 차렸
다.
"무슨 일인지요? 아는 대로 다 대답하지요."
매초풍이 가느다란 손가락 끝으로 변홍의의 가슴을 이리저리 긁으면서 말하였다.
"아까 낮에 당신이 하던 말을 똑똑히 모르겠군요. 당신이 절세의 신공을 갖게 될 거라고 말
했는데,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죠?"
변홍의는 눈을 껌벅거리기만 할 뿐 금방 입을 열지 않았다. 매초풍이 부드러운 팔로 그의
목을 껴안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내가 당신한테 몸까지 주었는데도 날 속이려 드는 거예요? 어서 말해 봐요."
"무슨 말 못할 것은 아니지요. 천산(天山)의 마귀할멈이 절 제자로 받기로 했어요."
"천산의 마귀할멈이라니? 당신 또 거짓말하는 것 아니에요?"
매초풍이 뾰로통한 기색으로 그를 살짝 흘겨보았다. 변홍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귀엽게
느껴져 매초풍의 입을 맞추었다.
"내가 어찌 당신을 속일 수 있겠어요. 강남에서는 천산의 마귀 할멈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적
을 뿐만 아니라 그 마귀할멈을 아는 사람들 반은 죽고 말았지요."
"저의 사부님인 동사 황약사는 당세의 고인이어서 강남의 일에 대하여 모르는 게 없지요.
그 어른께서 강남의 일들을 늘 우리한테 얘기해 주었지만 천산의 마귀할멈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의 말씀도 없었어요."
"천산의 마귀할멈은 오혈궁보다도 신비하답니다. 황 도주께서는 그 할멈이 어떤 점이 괴상
한지를 모르고 계신 거지요. 오혈궁 사람들 가운데 오로지 사형 여혈의 한 사람만이 천산의
마귀할멈에 대하여 알고 있지요."
"여혈의가 알고 있다구요?"
"사형 여혈의도 아주 신비한 사람이지요. 그 사형은 나와 함께 오혈궁에 들어와 무예를 배
웠는데 난 지금도 보통 제자로 있지만 그 사람은 사형의 보좌에 앉았지요. 뿐만 아니라 그
사형은 무공에 진보가 빨라 묘 궁주조차 깜짝 놀라고 있답니다."
"아마 그 사람은 워낙 체력이 좋은데다 부지런히 연마하였기에 그런 성과를 거둔 거겠지
요."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지요. 사형 노로의가 말하는 것에 의하면 오혈궁의 무공은 단시
일 내에 배워 낼 수 없고 아무리 체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십 년 정도 해야 기초를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사형 초천의는 십오 년을 배웠고, 사형 노로의는 삼십 년을 배워서
야 그만큼의 공력을 닦았다고 합니다. 묘 궁주께서는 타고난 무인이라 하지만 이십삼 년이
나 무예를 닦아서야 무림의 고수가 되었지요. 그런데 사형 여혈의는 나이가 젊은데도 무공
이 노형과 초형을 초과하였고 묘 궁주한테도 별로 뒤지지 않거든요."
"알 만해요. 반드시 여혈의가 그 밖에 무슨 사파의 무공을 배웠기에 이처럼 진보가 빠른 걸
거예요."
"아씨는 과연 대단히 총명하군요. 바로 알아맞혔어요. 여혈의의 무공은 천산의 마귀할멈한테
서 얻은 거죠. 그런데 천산의 마귀할멈은 그한테 내공만 가르쳐 그가 겉으로는 오혈궁의 장
법과 도법을 쓰게 했지요. 그러므로 묘 궁주와 사형 노로의는 비록 의심을 가지기는 하였지
만 아무런 근거도 잡지 못했지요. 그리고 여혈의가 오혈궁의 일을 위해 전심전의로 힘쓰고
수차 공로를 세웠기에 궁주와 노로의는 더 캐고 들지 않았던 거지요."
"문제는 이 일을 당신한테 들키고 만 거군요."
"그렇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난 여혈의와 천산의 마귀할멈 간의 비밀을 알게 되었지요."
그러자 매초풍이 혀를 차면서 말하였다.
"내가 당신을 만난 건 묘한 인연이군요."
그 말을 들은 변홍의는 휘둥그래진 눈으로 한참이나 매초풍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그
는 아주 격앙된 얼굴로 매초풍을 꼭 끌어안았다.
"아씨, 당신은 선녀같이 예쁜데다 무공도 대단하군요. 난 당신한테 장가들고 싶은데 나한테
시집오겠어요?"
너무도 뜻밖의 물음이라 매초풍은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몰랐다. 그러자 변홍의가 금세
시무룩한 표정으로 한탄했다.
"내가 아씨와 짝이 기운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아씨가 나와 한 침대에서 자게 된 건 일시
적인 기분 때문일 거예요. 내가 주제 넘은 생각을 한 건지도 모르지요."
매초풍이 눈을 깜박거리면서 손으로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당신이야말로 일시적인 기분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이 어찌 나 같은 여자한테
장가를 들겠어요?"
변홍의가 매초풍을 힘껏 껴안으며 부르짖었다.
"아씨, 난 참말로 아씨를 좋아해요! 진심으로 말입니다……!"
매초풍은 그가 진심인 것을 보자 약간 망설이다가 말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어서 말씀하십시요. 무슨 조건이든지 전 다 동의해요."
변홍의가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것을 보자 매초풍은 그를 속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목
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한테 장가들려면 나를 오혈궁에 데리고 들어가야 해요. 그렇찮으면 난 밖에서 독수공방
을 해야 하니 너무나도 쓸쓸하지 않겠어요?"
"오혈궁엔 본 문의 제자들만 드나들기로 되어 있는데 아씬 변홍의가 난색을 짓자 매초풍이
얼른 말하였다.
"나도 오혈궁에 가입하면 되잖아요."
"오혈궁에서는 열다섯 살이 넘은 사람을 제자로 받은 일이 없어요. 더군다나 소문난 강호객
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답니다."
"그건 근심할 것 없어요. 당신이 여혈의를 불러내다 나와 만나게 해주기만 하면 난 즉시 오
혈궁의 제자가 될 수 있어요. 어때요, 변랑?"
매초풍이 애교 있게 그를 '변랑(卞郞)' 하고 불러 주었다. 변홍의는 흐뭇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는 그 어떤 위험이 닥쳐오더라도 피할 생각이 없는지라 선뜻 대답하고 말았다.
이튿날 그들 두 사람은 행장을 수습하고 시가지를 떠나 서남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한 남녀가 나는 듯이 시가지에서 나오고 있었는데 다름아닌 여소교와 진현풍이었다.
여소교의 몸놀림은 어제보다도 민첩하였고 속도도 매우 빨랐다. 옷매무새가 말이 아닌 진현
풍은 두 손으로 허리춤을 쥐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는 허리띠가 없어 바지춤을 잡고 쫓
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오빠, 날 따라잡아요. 날 따라잡으란 말이에요."
여소교가 깔깔거리며 수림 속으로 달려갔다.
진현풍은 힘에 부친 모양인지 몹시 헐떡거렸다 여소교한테 너무나도 많은 진기를 빼앗긴 것
이 틀림없었다. 진현풍의 경공은 평소의 삼 할밖에 되지 않았다. 진현풍이 뒤쫓아가면서 큰
소리를 질러댔다.
"이 년, 네 년이 날 해쳤어. 내가 네 년을 죽여 버릴테다!"
매초풍이 이미 옷을 갈아입고 얼굴에 면사포까지 쓴 탓에 진현풍은 그녀 옆을 지나가면서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순간 매초풍은 가슴이 후둑후둑 뛰었다 그러나 곧 화가 치밀어 올랐다. 변홍의가 웃으며 말
하였다.
"이 두 미치광이는 정말 체면도 없군요. 아씨! 저 놈들을 관계치 말아요."
그러자 매초풍이 톡 쏘아붙였다.
"당신이야말로 미친 놈이고 체면이 없어요."
변홍의는 진현풍과 여소교를 모르기 때문에 매초풍이 왜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
만 맘을 몽땅 매초풍한테 빼앗긴 그는 금세 기가 죽어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그녀는 웃음을 머금고 변홍의의 손을 살그머니 잡았다.
"아직도 성이 났어요?"
"아니에요, 난 성을 내지 않아요."
"당신이 기쁘시다면 됐어요."
변홍의가 빙그레 웃었다. 매초풍도 미소를 살짝 띄우면서 그의 팔을 끼고 응석을 부렸다. 그
러면서 속으로 생각을 더듬었다.
'여혈의가 그 젊은 나이에 그처럼 높은 무공을 갖고 있는 데 대하여 나는 벌써부터 의심을
가졌었지. 내가 황약사한테서 도망쳐 나올 때 <구음진경>을 훔쳐 가지고 나와 매일같이 부
지런히 무예를 닦았는데도 그를 이기지 못하지 않았던가. 알고 보니 여혈의는 천산의 마귀
할멈한테서 기공을 배운 거로구나.'
그녀는 변홍의를 힐끔 쳐다보면서 속다짐을 하였다. 기어이 여혈의에게 접근하여 그를 통해
천산의 마귀할멈을 스승으로 모셔 그 신공을 배우리라고 결심했다.
'그렇게만 되면 천하에 위세를 떨칠 수 있고 누가 감히 나에게 시끄럽게 굴 수 있겠는가!'
변흥의가 갑자기 매초풍을 붙잡으면서 말하였다.
"저 앞에 나쁜 놈들이 있군요!"
매초풍이 건너다보니 멀지 않은 곳에 밋밋한 산등성이가 있는데 한 절름발이가 쌍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그는 바로 육승풍이었다. 그 옆에는 막여인이 손에 귀두도를 들고 서 있었
다.
매초풍이 그들 두 사람을 보고 비웃는 투로 말하였다.
"육 사제, 막 장문, 어제 해금계에서 전진칠자, 개방의 장로 그리고 석 선배께서 말씀하시었
는데 무림의 사람들은 이제 더는 이 매초풍을 괴롭히지 않는다면서요?"
육승풍이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 질렀다.
"흥, 도화도의 제자들은 바깥 사람을 안중에 두지도 않는 거야. 이 육 모는 잔폐가 되긴 하
였어도 무슨 일이나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어!"
동사 황약사는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으로서 확실히 세상이 놀랄 만한 무공을 갖고 있는 기
재였다. 세상에 이름이 난 뒤 그는 안하무인이었고 세속의 예법을 개방귀처럼 여겼으며 남
이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대로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수하에 있는 제자들도 점차
그를 닮아 가서 성미가 다소 포악하였다.
매초풍이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육 사제는 아직도 나를 도화도로 잡아가 공을 세울 셈인가요?"
"그렇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기어이 방법을 대어 네 년을 잡아다가 사부님한테 바칠테다. 그
리하여 사부님의 노여움이 가셔지면 우리 네 사형제는 다시 사부님의 문하에 돌아갈 수 있
을 거야."
"좋아, 육승풍. 내가 도망가지 않을 테니까 어서 잡아 보란 말이야. 그 병신이 된 다리를 가
지고 덤벼들겠다니 내가 경공으로 놀리지마는 않을걸."
막여인이 귀두도를 들고 소리쳤다.
"매초풍, 너무 우쭐거리지 말아라. 이 막 모가 오늘 여씨 문중을 위해 원수를 갚을테다!"
"그 무슨 쓸데없는 고생을 사서 하는 건가? 당신은 당당한 한 무술 문파의 장문인으로서 여
부의 뜨락에서 무술 선생 노릇을 하고 지금은 또 남 대신에 죽으려 든단 말이오. 정말 노복
의 근성이 골수에 배인 자로군."
변홍의가 그들의 말을 얼마간 들어 보더니 영문을 좀 알아차렸는지 매초풍에게 아첨을 떨면
서 큰소리를 질렀다.
"이 놈들아, 네 놈들이 감히 이 아씨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내가 너희들의 껍질을 벗
겨 신바닥을 만들테다!"
"속시원하게 욕 한번 잘했어!"
매초풍이 한바탕 웃어대더니 막여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막 장문, 임자가 여씨 가문의 원수를 갚는다면서 왜 어제 해검계에서 여소교를 보았을 때
구해 주지 않았어?"
어제 막여인은 확실히 여소교를 보았다. 그런데 여소교의 경공이 괜찮은 것을 보자 그녀가
고인을 만나 도움을 받은 줄로만 알았다. 그는 또 여소교가 진현풍을 놀려대고 진현풍이 부
아가 치밀어 여소교를 추격하였지만 근본적으로 따라잡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시름을 놓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육승풍을 보살펴야 했으므로 여소교를 뒤쫓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매초풍이 여소교의 이야기를 꺼내자 막여인은 여소교가 소요공자 악처후의 구원을 받아 그
를 따라간 일이 생각났다. 그리하여 막여인을 여소교의 경공은 악처후한테서 배운 것으로
짐작했다.
막여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소요공자가 여소교 아씨를 보호하고 있으니 이 막 모는 완전히 시름을 놓고 있는 거야. 흥,
그러니 너희들 흑풍쌍살인들 어쩔 수가 없지."
매초풍이 비웃듯 깔깔 웃어댔다.
"아마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요. 여소교는 악처후한테 몸을 망치고 나서 소요관에서 쫓겨났
지. 이젠 몸으로 생계를 이어 나가고 있단 말이야. 휴, 연약한 여인이란 혼자 나돌아다니게
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지. 막 장문, 그렇지 않은가?"
"매초풍, 넌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지?"
막여인이 뒤통수를 얻어맞기나 한 듯이 멍하니 있다가 이렇게 말하자 매초풍이 여전히 깔깔
거리며 대꾸하였다.
"호호호, 믿어지지 않으면 육승공한테 물어 보란 말이야. 저 사람은 소요공자가 어떤 물건짝
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막여인이 육승풍을 바라보며 따져 물었다.
"육 공자, 저 말이 사실이오?"
육승풍이 무표정한 얼굴로 설명을 해주었다.
"소요관에는 소요루란 집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열흘에 한 번씩 처녀를 바꾸어 들이고 있다
오. 그러니 악처후란 놈이 어떤 물건짝이라는 게 뻔하지 않소?"
막여인은 육승풍의 말을 듣고 따지듯 말을 내뱉었다.
"육 공자, 당신…… 당신은 왜 진작 말하지 않았소? 내가 만일 그 악처후란 놈이 음적인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그 놈이 여소교를 소요관으로 데려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요."
"흑풍쌍살이 여소교를 악처후한테 보내어 희롱당하게 하려고 작심하였는데 당신이 그걸 막
아낼 수 있단 말이오? 여소교가 소요관에 갇혀 있는데 당신이 그곳에 뛰어들어갈 수 있단
말이오?"
막여인이 화가 나서 귀두도를 휘두르며 산등성이에서 달려 내려왔다.
"매초풍, 내가 네 년을 죽여 버릴테다!"
매초풍이 미처 나서기도 전에 변홍의가 칼을 뽑아 들고 막여인을 막았다. 두 사람은 서로
탐색전으로 몇 번 초수를 써보더니 한 덩어리가 되어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하였다.
매초풍은 변홍의의 도법이 이만저만이 아니고 무공이 만만치 않은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
다.
'어제 내가 불의에 기습했었기에 저 사람을 손쉽게 사로잡을 수 있었지 정면으로 맞닥뜨렸
더라면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을 거다.'
변홍의가 싸우는 것을 보고 마음이 놓인 매초풍은 육승풍을 돌아보며 빈정거렸다.
"육 사제, 사제는 왜 날 붙잡지 않소? 내가 두려운 거지요."
매초풍의 조롱에 화가 난 육승풍은 쌍지팡이를 짚으면서 천천히 산등성이에서 내려왔다.
"매초풍, 이 육 모는 비록 너의 적수가 되지 못하지만 우리 일곱 사람이 함께 싸우면 네 년
은 당해 내지 못할 거야."
'막여인까지 합해야 둘뿐인데 일곱 사람이라니……?'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매초풍이 뒤를 돌아보고는 신음을
내뱉었다.
"아뿔싸!"
태호오교와 금도 임청이 달려오더니 육승풍과 함께 매초풍을 에워쌌다. 해검계에서 육승풍
은 태호오교들과 하마터면 다툴 뻔했었다. 하지만 육승풍은 태호오교들이 흑풍쌍살을 없애
버리려 한다는 것을 알자 옛날 일은 잊어버리고 그들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임청은 태호에
와서 오교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은 터라 그들을 도와주고자 따라온 것이었다.
무수한 싸움에서 시련을 겪은 철시 매초풍은 당황하지 않고 즉시 손발을 번개처럼 놀려 눈
깜짝할 사이에 삼사십 장을 휘둘러 포위전을 흐트려뜨렸다.
"저 년을 둘러싸라! 그러치 않다간 하나하나 모두 격파되고 만다!"
태호오교와 임청은 흑풍쌍살한테 혼이 난 적이 있는지라 포위권이 흩어지기만 하면 그녀가
자기들을 몽땅 해치울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잘 협력하여 결
사적으로 싸웠다.
매초풍은 손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휙휙 소리를 내면서 구음백골조의 초수로써 육승풍을 끌
어 잡으려 했다. 육승풍은 지팡이로 미처 반격할 겨를이 없게 되자 황급히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매초풍은 먼저 우두머리부터 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계속 육승풍에게 공격의 예봉을 돌렸
다. 육승풍은 물러서는 한편 오른쪽 지팡이로 그녀의 아랫도리를 갈겼다. 매초풍은 민첩하게
지팡이를 훌쩍 뛰어넘으면서 손으로 육승풍의 정수리를 끌어 잡으려 했다.
육승풍이 깜짝 놀라 급히 왼쪽 지팡이로 위쪽을 갈겼다. 매초풍이 양쪽 지팡이를 장으로 내
리쳤다. 그 바람에 두 지팡이가 모두 땅에 떨어진 육승풍은 그대로 땅바닥에 넘어지고 말았
다.
그 틈에 매초풍은 수리개가 땅으로 내리덮치듯이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으로 육승풍의 정수
리를 끌어 잡으려 했다. 그녀가 구음백골조의 공력을 제대로 안 쓴다면 정수리에 구멍이 펑
뚫리지는 않더라도 두개골이 깨지고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다.
육승풍은 쌍장으로 매초풍의 공격을 막았다. 매초풍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아래로
내리꽂혔다.
임청이 제때에 달려와 금도로 매초풍의 허리를 갈겼다. 매초풍이 그 기세대로 육승풍을 공
격하면 상대방을 죽일 수도 있었으나 자기도 금도에 맞아 허리가 동강이 날 판이었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흑풍최림(黑風催林)'의 초수를 쓰면서 왼손을 뒤로 돌리더니 금도의
칼끝을 붙잡았다. 그녀는 구음백골조의 초수를 오랫동안 연마하였기에 두 손이 겉보기에는
섬약하게 보이지만 창칼에도 베어지지 않았다.
이때 낭리교 주지청, 번파교 오비용이 동시에 들이닥쳐 각기 양쪽으로 매초풍의 양 옆구리
에 네 개의 작살을 들이찔렀다. 매초풍은 비록 외문의 무공을 익혔으나 아직 마공은 이루지
못한지라 몸뚱이에 창칼이 박히지 않을 정도까지는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작살을 막
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자 매초풍은 '일비충천(一飛沖天)'의 초수로 두 장 남짓한 높이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
녀가 뛰어오르자마자 앞뒤에서 열 개의 작살, 한 자루의 금도, 하나의 지팡이가 요란하게 한
데 맞부딪쳤다.
매초풍은 공중에서 독룡은편을 꺼내더니 사방으로 마구 휘두르며 땅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육승풍, 임청과 태호오교들은 그 사나운 채찍을 당하기 어려워 분분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
했다.
육승풍이 큰소리를 질렀다.
"여러분, 필경 철시는 여인이므로 힘이 모자랄 거요. 뿐만 아니라 저 년은 내공이 잘 다듬어
지지 않았으니 오래 견뎌 내지 못할 거요. 우리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 분명 저 년이 기진
맥진해질 때가 있을 거요!"
그 말에 매초풍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육승풍, 네 놈은 참 지독하구나! 도화도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동문을 죽이는 것도 마다
하지 않는구나! 좋아, 네 놈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해보자!"
매초풍은 채찍을 사방으로 휘두르며 맹공격을 해댔으나 육승풍과 임청 그리고 태호오교는
그녀를 둘러싼 채 그녀의 공격을 피하기만 했다. 그들은 매초풍이 기진해진 다음에 공격할
생각이었다. 매초풍은 그들한테 공격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하여 힘껏 채찍을 휘두르는 수밖
에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과연 육승풍이 짐작했던 대로 매초풍은 기진맥진해졌다. 매초풍은 그냥
이러고 있다가는 지쳐 죽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어 채찍을 휘두르면서 몸을 앞으로 이동하여
포위를 뚫고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들도 쉽게 틈을 내주지 않았다.
매초풍은 오래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자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는
채찍을 휘두르고 왼손으로 육승풍의 뒤를 가리키면서 부르짖었다.
"여보, 나와 함께 이 놈들을 죽여요!"
육승풍은 비록 흑풍쌍살이 해금계에서 서로 사이가 벌어진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믿
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매초풍이 '여보!' 하고 부르자 진현풍이 뒤로 달려드는 줄 알고
멈춰 서서 더 물러서지도 못했고 매초풍의 채찍 때문에 뒤를 돌아다 보지도 못하였다.
금도 임청은 육승풍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으므로 매초풍이 꾀를 부린다는 것을 알았다.
"육 공자, 철시의 꾀에 넘어가지 마시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매초풍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채찍을 뒤로 휘둘러 임청과 태호
오교들을 물러가게 하는 한편 왼손으로 육승풍의 면상을 끌어 잡으려고 하였다.
육승풍이 임청의 일깨움으로 형편을 알아차리고는 급히 지팡이를 내질렀다. 그러나 매초풍
이 지팡이 끝을 잡아쥐고 옆으로 낚아채자 육승풍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옆으로 나뒹굴었
다.
매초풍이 육승풍이 넘어진 틈을 비집고 빠져 나가 보니 변홍의가 한창 막여인과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매초풍은 나는 듯이 달려가 막여인의 목을 채찍으로 후려쳤다.
막여인이 급히 귀두도로 채찍을 가로막으려 하는데 채찍 끝이 살짝 위로 올라가며 눈으로
날아오는 것이었다. 막여인은 급한 나머지 뒤로 한 장이나 물러났다.
막여인이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공격을 하려 했을 때는 이미 매초풍이 변홍의를 끌고 서쪽
으로 도망가고 있는 중이었다.
태호오교와 임청이 그 뒤를 바싹 추격하기는 하였으나 매초풍이 계속 채찍을 후려치는 바람
에 더 이상의 접근은 어려웠다.
매초풍은 변홍의보다 경공이 아주 높아 왼팔로 그의 허리를 밀어 주면서 두 사람은 눈 깜짝
할 사이에 멀리 도망하였다. 두 사람은 밀림 속을 이리저리 헤쳐 나가면서 기를 쓰고 도망
했다.
이십여 리나 도망하고서야 그들 두 사람은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뒤를 돌아보니
온통 황야였고 망망한 바다처럼 펼쳐져 있는 수림에는 정적이 깃들어 있었다.
변홍의는 몹시 지쳤던지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이 악한들이 감히…… 오혈궁의 제자를 죽이려 들다니! 개자식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막여인을 내어놓고 그 나머지 놈들은 모두 당신을 죽일 수 있는 자들이에요. 그 놈들은 당
신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모두 나한테 덤벼들었단 말이에요."
"당신을 죽이게 되면 그건 날 죽인 것과 같지요. 우리 둘의 운명은 한데 이어졌기에 이승에
선 이젠 갈라놓을 수 없어요."
"당신 말솜씨 하나만큼은 알아주어야겠네요."
변홍의가 매초풍을 억세게 껴안더니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난 당신을 사랑해. 영원히 당신을 아끼고 싶어요."
매초풍이 그의 품에서 벗어나면서 눈을 흘겼다.
"대낮에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다시 이래선 안 돼요!"
변홍의가 허리를 굽실거리며 이죽거렸다.
"예잇, 이 아들은 꼭 어미 말을 잘 듣겠습니다."
그 말에 매초풍은 그의 귀싸대기를 한 대 갈겨 주고 싶었지만 참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왜 내가 이 사람 귀싸대기를 때리지 못하는 거지? 이 역겨운 사내한테 반했기 때문일까?
아니야, 나는 다신 다른 사내한테 반하지 않을 거야.'
첫댓글 잘봅니다..^^
즐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