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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 낙천주의 사상의 진수: (반경환 행복의 깊이 제1권}
제1장: 행복의 깊이
반 경 환
시는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시는 우리 인간들의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이때에 낙천주의라는 말을 다만 쾌락주의적인 어떤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수많은 종교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낙천주의는 좌절과 실망을 불러 일으키는 여러 요소들을 잠 재우고, 그 물적 토대 위에서 행복한 삶을 구상하여 보자는 대 전제 아래 쓰여진 것이지, 그야말로 즐거움을 유일한 낙으로 삼는 이 땅의 퇴폐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 쓰여진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행이 없는 행복한 삶과 낙천주의는 분리가 가능한 어떤 것이 아니다. 시를 쓰고 시를 논하는 사람은 아무도 행복이란 말 속에서 자유롭지가 못하다. 만일 시의 사회적 기능을 종교적인 것과 교육적인 것, 그리고 축제적인 측면에서 조명하여 볼 수가 있다면, 그 말은 더욱더 타당성을 띠게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찍이 시와 노래가 분리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시가 종교적 기능을 대신했었고, 모든 공동체 사회의 질병과 재앙을 달래거나 그 사회의 소원 성취를 노래라는 형식을 빌어서 그 제의적 기능을 다했던 것이다. 또한 시는 새로운 지식과 삶의 지혜를 창조하고, 그 지식과 지혜를 보존하는 기능과 함께, 모든 떠돌이--나그네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선사해 주는 기능을 떠맡아 했었다. 문자가 성립되어 있지 않거나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에는 일정한 운율과 리듬을 지닌 시의 형식이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고 보존하는 교육적 기능에 가장 알맞았으며, 그 시가 전달할 수 있었던 삶의 지혜와 그 독특한 가락 때문에, 매우 흥겨운 정취를 자아내는 축제적, 혹은 카니발적 기능을 간직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떠한 종교적(제의적) 의식 행위일지라도, 그것은 반드시 시라는 양식----예를들면 찬송가나 주문과도 같은----을 필요로 하게 되어 있다. 호머의 일리어드와 오딧세우스와도 같은 대단한 삶의 지혜마저도 구비문학의 전통 아래서 그것에 적절한 운율과 리듬을 부여할 수가 없었다면, 그 대단한 삶의 지혜마저도 아무런 쓸모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의 종교적 기능이나 교육적 기능에 즐거움이라는 요소가 없게 되면, 그 기능들의 사용가치가 아무리 유용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박제화되거나 모든 사람들의 기피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의식이나 삶의 지혜마저도 즐거움의 산물이어야지, 고통의 산물이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고통의 산물은 기피의 대상이지만, 즐거움의 산물은 축제(혹은 참여)의 대상이다. 시의 축제적 기능은 현실원칙 위에 쾌락원칙이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말해준다. 욕망이 충족되면 기쁨과 즐거움이 따르지만,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면 불쾌감과 고통이 따른다. 이밖에도 시의 사회적 기능은 엘리어트나 옥타비오 빠스의 말대로 ‘민족어의 세련’이라는 기능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기능이지, 시의 주요한 기능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아니, 시인이 자기 자신의 모국어를 갈고 닦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거론할 필요조차도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의 언어는 생명의 언어이며, 숨결의 언어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그 언어의 자유를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처럼 사회가 주도면밀하게 조직화되고 분업화되기 이전에는 시인이 사제이며, 삶의 지혜를 전수해주는 대 스승이었고, 또한 위대한 소리꾼 중의 소리꾼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시의 사회적 기능을 종교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 그리고 축제적인 기능으로 정리가 가능한 것이라면, 나는 이 모든 기능들을 종합하여 시는 우리 인간들의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 보고 싶은 것이다. 시는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며, 행복한 꿈의 한 양식이다. 우리는 시가 있기 때문에 불행한 현실을 참고 살아갈 수가 있다.
종교 사회학자들은 우리 인간들의 삶의 조건이 우연성과 무력성, 그리고 결핍성 등에 둘러싸여 있다고 말한다. 우연성이란 우리 인간들의 불확실한 상황과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안녕과 복지가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하고, 무력성이란 우리 인간들의 능력과 삶의 조건을 통제하는 영향력이 증대되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그들이 한계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결핍성이란 산업기술의 발전과 생산성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재화의 가치가 서로 다른 분배를 야기시켜” 그 결핍의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우연성과 무력성, 그리고 결핍성들이 우리 인간들에게 좌절과 상실감을 안겨주게 되고, 그러한 삶의 조건들이 종교의 모태가 되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와 신화를 분리할 수가 없듯이 시와 종교 역시도 분리할 수가 없다. 종교의 기능이 우리 “인간들이 불행에 대처하고 적응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형태로 구현된” 것이듯이, 시의 기능 역시도 좌절과 실망을 일으키는 여러 요소들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꿈의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고도 볼 수가 있는 것이다(1: 15)*. 우리는 시가 있기 때문에 불행한 현실을 참고 살아갈 수가 있다. 시는 종교와도 같은 말이고, 꿈과도 같은 말이다. 우리는 시가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들의 소망을 기원하거나 꿈을 꿀 수가 있다. 따라서 수많은 시인들의 시는 그것이 비극적이든, 희극적이든 간에, 잘 삶의 한 요소를 이루어야 하고, 행복의 여러 유형, 혹은 행복의 여러 원형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박목월의 「나그네」라는 시가 이 글의 편리한 출발점이 되어 줄는지도 모른다.
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나그네」 전문
박목월의 「나그네」는 우리 한국인들의 보편적인 정서에 걸맞는 애송시라고도 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애송시라는 영광은 아무 작품에나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애송시라고 해서 반드시 대중정서와 야합한 것도 아니며, 그것이 애송시로서 회자되고 있는 까닭은 세월의 풍화작용에 견뎌낼 만한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그네는 떠돌이로서 비극의 주인공일 수도 있고, 희망에 찬 어떤 유형의 인물일 수도 있다. 박목월의 「나그네」는 후자의 유형의 인물이며 행복한 인간의 원형이다.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마음이 어찌 어두울 수가 있겠으며, “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의 발걸음이 어찌 가볍고 경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박목월의 나그네의 마음은 어두운 것도 아니며, 또한 그 발걸음이 무거운 것도 아니다. 그의 마음은 “타는 저녁 놀”처럼 밝고 환하고, 그의 발걸음 역시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볍고 경쾌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극도로 절제된 언어와 여백이 더욱더 풍요로워 보이는 시적 공간이 그것을 말해 주고, ‘강나루, 밀밭 길, 구름, 달’ 등의 이미지들이 ‘나그네’라는 인간과 더없이 평화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 준다. ‘술 익은 마을’은 모든 떠돌이-- 나그네들을 따뜻하고 포근하게 감싸주는 훈훈한 인정을 환기시켜 주기도 하고, ‘타는 저녁 놀’의 아름다움은 그 관계의 상징적인 밀도를 환기시켜 주기도 한다. 박목월의 나그네는 술 익은 마을을 찾아가는 행복한 인간의 원형으로서의 나그네이다. 나그네의 시간은 영원성으로 변모된 시간이며, 그 떠돌이 방식으로 황홀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나그네이다. 이러한 「나그네」의 사회 역사적 배경을 두고 그것의 현실도피주의적인 요소를 지적할 수는 있고, 또한 초기의 박목월의 시세계에 있어서 ‘화자’(꿈꾸는 사람), ‘대상’(임), ‘슬픔’의 관계를 도식적으로 적용시켜서, 시인과 세계와의 관계를 불화의 관계로 읽어낼 수는 있다(2: 211). 하지만 첫 번째의 오류는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해야 될 시를 사회 역사적인 문제로만 환원시켜버린 현실주의자들의 오류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고, 두 번째의 오류는 도식적인 비평가의 논리적 맥락에 따라 시의 풍요로움을 사상시켜버린 오류에 속한다고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여러 좋은 시들을 문학비평가(철학자)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고, 삶의 즐김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다 본다. 또한 이 도전적이고 야심만만한 문학비평 행위마저도 문학비평가의 입장에서 쓰지 않고, 시인의 입장에서 시를 쓰듯이 쓰고 있다. 이것이 문학비평가(철학자)로서의 나의 무모한 모험이고 도전적인 글쓰기인 것이다. 나는 문학비평을 지향하지 않고 철학예술, 혹은 비평의 예술을 지향하고자 애를 쓰고 있다. 문학비평은 문학비평이기 이전에, 철학예술이어야 하고, 이 척박한 한국문학의 토양에 값진 자양분이 되어야만 한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듯이 비평가의 헛된 비평이 제멋대로 시를 질식시키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살인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고 자행하게 된다. 가령, 나의 첫 평론집, 시와 시인을 악의적으로 서평한 어떤 시인을 삼류 시인이라고 폄하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시인이 대단히 훌륭한 시인이라고 말하기는 쉽지가 않다. 첫 번째의 경우는 비평가의 선입견이나 이념형의 잣대를 들이대면 그만이지만, 두 번째의 경우는 그가 왜 훌륭한 시인인가를 만인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비평이란 이처럼 무섭고도 두려운 작업인 것이다. 문학비평은 더부살이로서 숙주의 몸에 위해를 가할 수도 있지만, 철학예술(비평예술)은 상호 간에 공감할 수 있는 화해의 세계를 마련하게 된다. 그 시인이 폄하했던----의도적인 왜곡과 그 오독의 결과에 따라서----낭만주의는 전통적인 낭만주의가 아니라, 내 나름대로 정식화시킨 시대를 초월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낭만주의이며, 또한 그가 비판했던 ‘빛나는 개성주의’도 내 나름대로 정교하게 정식화시켜 보려했던 ‘빛나는 개성주의’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퀘퀘묵은 묵살의 대상을 공격하기 위해서 씌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 비평, 혹은 철학예술은 언제든지 텍스트 중심이어야 하며, 그러한 분석을 토대로 하여 더 큰 사회 역사적 차원과 인류학적 차원의 범주로 폭넓게 접목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이 땅의 수많은 시인의 시들은 그것이 슬픔으로 채색되어 있든, 고통으로 얼룩져 있든 간에, 잘 삶의 한 요소를 이루어야 하고, 행복의 여러 유형, 혹은 행복의 여러 원형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시는 잘 삶의 한 요소이며,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왜, 문학비평가들은 공감할 수 없는 시들을 그처럼 끈질기게 거론하고 있는 것이며, 왜, 또한, 그들은 단 하나의 편견이나 이념형의 잣대로 수많은 시들을 질식시키고 학살하고 있는 것인가? 저널리즘적인 인민재판의 권위주의 때문인가, 아니면, 비루먹은 문학비평가로서의 옹색한 강단의 입지점 때문인가? 나는 그들에게 헛된 살상무기를 버리고, 니체를, 쇼펜하우어를, 마르크스를, 칸트를, 소크라테스를, 아리스토텔레스를, 하이데거를, 바슐라르를, 조셉 캠벨을, 쟝 피에르 리샤르를, 알베르 베갱의 글들을 수없이 읽고, 또 다시 읽어볼 것을 권한다. 시가 행복한 꿈의 한 양식이듯이, 철학예술은 ‘감동의 총화’이지 않으면 안 된다.
행복한 시인의 두 유형: ‘아폴로 유형’과 ‘디오니소스 유형’
니체의 모든 저작들이 그러하지만, 그의 처녀작인 비극의 탄생은 우리들의 고전이고, 모든 시인들이 꼭 한 번은 읽어야 될 필독서에 값한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니체는 기독교주의자도 아니었고, 염세주의자도 아니었다. 또한 그는 계몽주의자도 아니었고, 낭만주의자도 아니었다. 쇼펜하우어와 마르크스, 그리고 프로이트와 함께, ‘회의의 대 철학자’로 잘 알려진 니체의 비판이 가장 날카로웠던 것은 우리 인간들의 ‘생을 적대시’하고 있었던 기독교 사상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소크라테스적 미학주의’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우리 인간들의 생을 적대시 하고 있었던 기독교적 원죄 의식에 반발하여 삶의 본능의 옹호자로 자처할 수밖에 없었고, “이성은 미덕이며 행복이다”라는 소크라테스적 미학주의에 반발하여 그리스 신화와 함께, 그리스 비극 예술을 옹호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기도 했던 것이다(3: 32). 니체의 건강한 염세주의는 “건강함에서, 생의 풍요에서 유래하는 두려움, 병, 문제점들에 대한 지적 편애”를 뜻하지, 영원한 죄인이라는 기독교적 올가미를 뜻하지는 않는다(4: 24). 또한 그의 건강한 염세주의는 우리 인간들의 삶의 본능의 옹호를 뜻하지, 이성의 광기와 회의가 죄였던 시대의 이념을 뜻하지는 않는다. 니체는 그리스인들이 그러했듯이, 실레노스의 지혜를 뒤집어서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나쁜 것은 곧 죽는다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나쁜 것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라는 잠언적 명제를 이끌어낸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가장 하찮은 노예의 신분일지라도 이 세상의 삶을 원하고 있지,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며, “곧 죽어버리는 것이 차선次善의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4: 47). 실레노스의 지혜도 우리 인간들의 삶의 본능을 옹호하지 않지만, 기독교 사상도 우리 인간들의 삶의 본능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실레노스의 지혜가 기독교 사상이고, 기독교 사상이 실레노스의 지혜이다. 실레노스의 지혜와 기독교 사상이 다른 점은 실레노스의 지혜가 염세주의로 가득차 있다는 점에 반하여, 기독교 사상은 유일신에 대한 맹신을 근간으로 해서, 유토피아적인 환상으로 가득차 있다는 점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미학주의는 그리스 신화를 압살하는 미학주의에 불과하고, 또한 소크라테스적 미학주의는 그리스 비극 예술을 압살하는 미학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성이 미덕이 되고 행복이 될 때, 다양한 제신들은 질식하고, 기독교적인 유일신만이 탄생하게 된다. 이성이 미덕이 되고 행복이 될 때, 모든 비극 예술은 주변적인 위치로 밀려나게 되고, 이성의 광기와 회의가 죄였던 시대의 합리적인 사고만이 최고의 자리로 올라서게 된다. 비극 예술이 이성보다는 감정에 호소한다는 소크라테스의 비난이 그것을 말해 주고, ‘무오류성의 왕홀’로 과감한 우상파괴 작업을 감행한 기독교 사상이 그것을 말해 준다. 플라톤의 국가론에는 인류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대 서사시인 호머가 단죄시 되고 있고, 예수의 출현 이후, 중세의 르네상스 직전까지는 어떠한 세계적인 대 서사시인도 출현한 바가 없다.
하지만 신화는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꿈의 산물이다. 시 역시도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꿈의 산물이다. 우리는 종교 사회학자나 하이데거, 그리고 사르트르를 비롯한 실존주의의 철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존재론적 모순의 문제와 과감하게 맞서 싸워나가야 하는 것이지, 자포자기하거나 무의미한 체념으로 염세주의를 펼쳐나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는 그 존재론적 모순 속에서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시나 비극 자체를 추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적 미학주의자들은 비극 예술을 추방하거나 몰아내야 할 어떤 것으로만 알았지, 비극의 주인공이 됨으로써 행복한 인간의 삶이 있다는 것은 알지도 못했다. 또한 그들은 그들의 무오류성의 왕홀로 ‘기계장치의 신’(유일신)만을 옹립할 줄을 알았지, 다양한 제신들이 살아 있는 풍요로운 사회는 알지도 못했다. 니체는 그의 일생 내내 기독교 사상과 소크라테스적 미학주의에 과감하게 맞서 싸워왔다고 할 수가 있는 데, 그것은 그가 생을 적대시 하는 어떤 사상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니체가 행복한 짜라투스트라이고, 짜라투스트라가 니체의 비극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것이다.
니체가 정식화시킨 예술가의 두 유형이 있는 데, 그 하나가 아폴로 유형의 인물이고, 나머지 하나가 디오니소스 유형의 인물이다. 아폴로는 그리스 신화 속에서 조형 예술의 신이며, 예언의 신이고, 디오니소스는 포도재배의 신이자 축제의 신이다. 아폴로 유형의 시인들은 우리 인간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하여 눈을 감아버리지만, 디오니소스 유형의 시인들은 자아를 망각한 존재의 무근거 상태로서, 그러한 고통과 슬픔마저도 풍요롭게 살아가고자 한다. 아폴로 유형의 시인들은 과도함과 지나침을 요구하지 않고 아름다운 꿈과 가상의 세계에서 살아가고자 하지만, 디오니소스 유형의 시인들은 죄를 짓고 죄악을 정당화할 수 있는 황홀한 도취의 세계를 살아가고자 한다. 아폴로 유형의 시인들은 쾌락원칙을 옹호하지, 현실원칙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들은 아름다운 꿈과 가상의 세계를 옹호하지, 밝은 ‘대낮의 현실’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아폴로 유형의 예술가들(호머, 라파엘, 소포클레스 등)은 그들의 상상력을 통하여 이 세계에 영원히 존재하는 근원적 고통을 변형시키고, 그것을 살만 한 어떤 것으로 만들어 놓고 있는 데, 왜냐하면 그 근원적 고통--재앙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우리 인간들은 잠시도 마음 놓고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꿈과 가상은 ‘하나의 미적 베일’에 불과하며, 서사 시인들과 조각가들이 그것을 사랑한다. 다시 말해서, 아폴로 유형의 예술가들은 과도함과 지나침을 요구하지 않고, ‘개별화의 원리’에 따라 그 예술가들의 절도를 요구하게 된다.
하지만 아폴로 유형의 시인들은 개별화의 원리만을 강조하지, 서정시인들의 주관적 자아를 망각한 황홀한 도취의 세계를 강조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들은 개인적 구원을 위한 소승적인 삶만을 강조하지, 공동체 사회의 일원으로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대승적인 삶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니체의 독특한 견해에 따르면, 아폴로 유형의 시인들(서사시인과 조각가들)의 자아는 개별적이고 객관적인 자아에 불과하지만, 디오니소스 유형의 시인들(서정시인들)의 자아는 자아를 망각한 존재의 무근거 상태, 즉 통개인적인 자아를 뜻하게 된다. 그러니까 아폴로 유형의 예술가인 소포클레스는 개별적인 소포클레스에 불과하지만, 디오니소스 유형의 예술가인 아이스퀼로스는 “더 이상 아이스퀼로스가 아니고 세계 예술가이며, 자기의 근원적 고통을 인간 아이스퀼로스로 내세우는 비유 속에서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예술가의 겉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이 니체의 독특한 견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4: 54). 디오니소스 유형의 예술가들은 아폴로 유형의 예술가들----개별화의 원리와 소승적인 삶, 그리고 아름다운 꿈과 가상의 세계를 강조하는----과는 달리, 공동체 사회의 일원으로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대승적인 삶을 강조하고, 죄를 짓고 죄악을 정당화할 수 있는 황홀한 도취의 세계를 강조한다. 포도재배의 신이자 축제의 신인 디오니소스는 자기 자신의 한계 상황과 존재론적 모순에 묶여 있는 모든 인간들을 해방시키고, 또한 모든 노예들을 해방시킨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고통의 화신이 되어 티탄들의 처벌이든, 헤라의 처벌이든 간에, 온몸을 갈기갈기 찢기우는 형벌을 받게 된다. 디오니소스 제전은 해마다 봄날 닷새 동안 열렸는데, 그 기간 동안은 모든 죄인들도 자유의 몸이 되어 그 축제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디오니소스 유형의 예술가들은 우리 인간들의 실존적인 삶의 조건들----우연성, 무력성, 결핍성 등---- 앞에서, 프로메테우스와 외디프스의 길을 자유롭게 선택했던 것이지, 무의미한 염세주의와 소크라테스적 미학주의의 길을 선택했던 것은 아닌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는 가장 용기 있는 자의 삶을 형상화시킨 신화적 사건의 전형이고, 외디프스 신화 역시도 가장 용기 있는 자의 삶을 형상화시킨 신화적 사건의 전형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신들만의 특권인 귀중한 불을 우리 인간들에게 훔쳐다가 준 어떤 인물이고, 외디프스는 일개 떠돌이 왕자의 신분으로서 스핑크스의 수수께기를 풀어버리고, 테베 지역의 대재앙을 평정시킨 어떤 인물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우리 인간들의 문명과 문화를 가능케 한 위대한 영웅이면서도, 동시에 비극적인 인물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그는 카우카소스의 바위산에 묶여서 제우스의 神鳥인 독수리에게 하염없이 간을 쪼아 먹혀야만 했기 때문이다. 또한 외디프스 역시도 우리 인간들의 위대한 영웅이면서도, 동시에 비극적인 인물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외디프스는 그의 슬기로운 지혜에도 불구하고 머나 먼 이역의 땅, 콜로노스로 추방을 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영웅신화의 저자인 조셉 캠벨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저자인 에디스 헤밀턴이 강조하고 있듯이, 모든 신화란 우리 인간들의 상상력의 산물이지, 실제의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모든 신화란 우리 인간들의 근원적 고통과 대재앙을 다스리기 위해, 수많은 신들마저도 인간화시켜 놓은 것이지, 실제의 신들이 숨을 쉬고 살아 움직이는 세계가 아니다. 니체가 프로메테우스와 외디프스 신화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득죄신화得罪神話----니체의 용어를 따르자면 ‘능동적 죄’이지만, 나는 그가 다르게 설명하고 있는 셈족의 ‘득죄신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셈족의 신화에서 그것은 ‘호기심, 거짓에 속아 넘어감, 유혹에 약함, 好色, 요컨대 일련의 여성적 情念’ 등이지만, 나는 득죄신화라는 용어를 니체의 ‘능동적 죄’에 해당되는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4: 76)----의 본질적인 국면인데, 왜냐하면 그 신화들이 곧 ‘죄악을 정당화’시켜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프로메테우스가 없었더라면 우리 인간들은 어떠한 문화의 전취戰取도 가능하지가 않았고, 또한 외디프스의 삶의 지혜가 없었더라면 어떠한 인류의 지혜의 전취도 불가능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들만의 귀중한 특권인 불을 훔쳐오는 것도 있을 수가 있는 일이고,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동침하는 것도 있을 수가 있는 일이다. 득죄신화란 우리 인간들이 자기 문화를 형성하고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한 신화에 불과하며, 바로 그 죄악을 정당화한 것에 지니지 않는다. 프로메테우스는 인류의 문명과 문화를 가능케 한 불을 훔쳤고, 외디프스는 그 슬기로운 지혜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동침한 대죄악을 범했다.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문화의 수호신’의 신화이고, 외디프스 신화는 ‘성자의 승전가’의 신화이다. 모든 문명과 문화는 힘에의 의지의 결과이며, 잔인성이 양식화된 결과이다. 우리 인간들이 얻을 수 있는 최선--최고의 것은 신성모독에 의해서 얻어진다는 것, 바로 이것이 니체 철학의 핵심적인 전언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시도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고, 신화 역시도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낙천주의는 희극의 진수 속에서 꽃 피어나지 않고, 비극의 진수 속에서 꽃 피어난다. 또한 낙천주의는 소멸의 슬픔과 퇴폐적인 쾌락 속에서 꽃 피어나지 않고, ‘생성의 기쁨’과 ‘창조적 명랑성’ 속에서 꽃 피어난다. 낙천주의는 비극의 진수와도 같고, 비극의 진수는 고문받는 순교자의 황홀한 환상과도 같다. 모든 시인들은 마치 프로메테우스나 외디프스처럼, 우리 인간들의 행복을 위해서 신성모독을 범하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모든 시인들은 어떠한 고통이나 불행에도 불구하고, 생성의 기쁨과 창조적 명랑성을 노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염세주의자들은 그들의 비극적인 고통에 초점을 맞추지만, 위대한 낙천주의자들은 그들의 비극적인 고통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공동체 사회의 일원으로서 풍요로운 축제에 그 초점을 맞춘다. 그러니까 디오니소스 유형의 예술가, 아이스퀼로스는 사적 개인이 아니라, 세계 시인으로서의 통개인적인 아이스퀼로스인 것이다. 시, 혹은 예술은 우리 인간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더없이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삶에의 의지를 북돋아 주고, 비록 일시적이고 자그만 성공일지라도 하늘을 찌를듯한 환희에의 기쁨으로 우리 인간들을 인도해 준다. 우리는 시를 통해서 이 세계와 사물의 이름을 명명하고, 또 시를 통해서 이 세계와 그 모든 것들을 더욱더 아름답게 미화시켜 나간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우리 인간들은 그 예술의 영원성에 기대서서 자기 자신들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그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들의 삶의 본능을 옹호해 나간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 속에서도 시의 사회적 기능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는 데, 풍요롭고 다양한 신화 자체가 그것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와 프로메테우스와 외디프스 신화는 시의 종교적 기능과 맞닿아 있고, 그들의 삶의 지혜는 교육적 기능에 맞닿아 있으며, 그리고 그 신들을 위한 제전은 시의 축제적 기능에 맞닿아 있다. 니체가 정식화시킨 아폴로 유형의 예술가와 디오니소스 유형의 예술가들을 보더라도 한국문학에 있어서 신화적 상상력의 문학적 구현은 그 무엇보다도 가장 시급하고 도전적인 과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엘리어트와 보들레르, 에즈라 파운드를 보더라도 그렇고, 제임스 조이스나 토마스 만, 가브리엘 마르께스를 보더라도 그렇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그의 편협한 민족주의자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는 저작이긴 하지만, 그리스 신화를 통해서 위대한 독일 정신을 꿈꾸었던 초기의 세계관이 사실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현대시에 있어서 신화적 상상력의 문학적 구현의 모범적인 전거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행복의 원형으로서 아폴로 유형과 디오니소스 유형의 시들은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박목월의 「나그네」는 전자의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가 있는 데, 왜냐하면 그 떠돌이--나그네의 주변성이 자족적인 세계에만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나그네」는 술 익은 마을을 찾아가는 시적 화자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꿈과 환상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어떤 것이지, 그 소승적인 차원을 뛰어 넘어서서 대승적인 차원을 노래하고 있는 시는 아니기 때문이다.
1960년대, 김춘수의 ‘무의미’의 세계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가 있다.
은종이의 天使는
울고 있었다.
누가 코밑 수염을 달아주었기 때문이다.
제가 우는 눈물의 무게로
한쪽 어깨가 조금 기울고 있었다.
조금 기운 天使의
어깨 너머로
얼룩 암소가 아이를 낳고 있었다.
아이를 낳으면서
얼룩 암소도 새벽까지 울고 있었다.
그해 겨울은 눈이
그 언저리에만 오고 있었다.
----(「處容斷章」의 1의 x) 전문
김춘수의 ‘무의미’의 세계란 일종의 심리적 ‘방기 상태’에 지나지 않으며, 그의 심리적 방기 상태란 또 하나의 미적 베일에 불과하다. 그것은 “시와 대상과의 거리가 없어진 데서 생긴 현상”이기도 하고, 그 “대상을 놓친 대신에 언어와 이미지를 실체로 인식하게” 된 데서 생긴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5: 52). 김춘수의 무의미의 세계에서는 “은종이의 천사”가 울기도 하고, “얼룩 암소가 아이를 낳”기도 한다. 하지만 ‘처용’이라는 신화, 혹은 전설의 세계가 아름답다고 해서, 그가 은폐시켜버린 의미의 세계가 완벽하게 가려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는 그 무의미의 세계에서마저도 두려움을 느끼고, 그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 속에서 행복하게 살지도 못한다. 김춘수의 시적 화자의 눈물은 이중적인 의미를 띤다고 할 수가 있겠는 데, 그 하나는 무의미의 세계에서까지도 드러나고 있는 현실성의 의미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 미적 베일 앞에서 시인이 느끼고 있는 두려움이라고 할 수가 있다. 구체적인 현실과 그 대상을 외면했을 때, 시인은 두려움을 느낀다. 그 두려움은 아름다운 꿈과 환상 속에서만 살려고 하는 그의 의식까지도 잠식해 버린다. 이러한 심리적 현상이 곧잘 드러나고 있는 「처용단장」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삶의 한 요소를 이루고 있는 것같다. 슬픈 현실이 외면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 정서에 속하고, 또한 전대미문의 전인미답 지역(전위적인 실험정신, 즉 무의미의 세계)에서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도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인 정서에 속한다. 은종이의 천사의 어깨가 기울어지고, 아이를 낳은 얼룩 암소가 새벽까지 울고 있다는 「처용단장」의 세계는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폴로 유형의 예술가들의 한계와 함께, 김춘수의 순수시의 침몰 현상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 더욱더 아름답고 슬픈 것이다.
김춘수는 좀 더 극단적이고도 뜨거운 열정으로 말라르메나 발레리가 걸어간 길을, 혹은 바슐라르나 박목월이 걸어간 길을 가야만 했던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 방향에서, 신성모독의 죄를 짓고, 그 죄악을 정당화했던 시인들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김춘수의 반대 방향에서는 1960년대의 대표적인 참여 시인 김수영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박목월이나 김소월의 반대 방향에서는 이상 시인과 윤동주 시인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상 시인의 [烏瞰圖」의 세계는 대표적인 신성모독의 세계에 속한다.
罪를품고식은寢床에서잤다.確實한내꿈에나는缺席하였고義足을담은軍用長靴가내꿈의白紙를더럽혀놓았다.
----(「烏瞰圖」 詩第十五號) 중에서
이상 시인은 “죄를 품고 식은 침상에서” 자며, 일제 식민지 현실을 살해하고(“天眞한 村落의 畜犬들아 짖지 말게나”(「空腹」)가 그것이다), 유교적인 가부장제도를 살해한다(“憤塚에 계신 白骨까지 내게 血淸의 原價償還을 强請하고 있다”(「危篤」)가 그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囚人들이 만들은 小庭園」의 황홀한 세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문받는 순교자의 황홀한 환상과 그 고통은 이렇게 해서 얻어진다.
이상과 동시대적 인물, 혹은 그보다 한 세대 밑의 인물로서 윤동주의 시세계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가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序詩」 전문
디오니소스적 유형의 시인--예술가로서의 윤동주의 「서시」는 가히 ‘부끄러움의 미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를 바란다는 것은, 그러나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는 시구는 그 부끄러움의 극치에 해당되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시구는, 그 부끄러움을 통해서 그 부끄러움을 극복해 나가고 있는 자의 삶의 본능의 옹호에 해당된다. 이때에 그의 부끄러움은 떳떳함에 대비되고, 그 떳떳함에 비추어 그 부끄러움이 단죄된다. 잎새에 이는 바람은 존재의 성숙을 가로막는 내적, 외적 장애물의 총체이며, 흔들리지 않으려고 흔들리는 육체는 우리 인간들의 고통의 화신이 된다. 그의 시는 부끄럽지 않은 삶에 지배받기를 위한 일종의 고양된 싸움이다. 그는 니체적 의미에서 펜으로 시를 쓰지 않고, 자기 자신의 붉디 붉은 ‘피’로써 시를 쓴다. 삶의 지혜가 값싼 교양으로 겉돌지 않고, 자기 자신의 피로써 육화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하얀 백골을 들여다보며 “지조높은 개는 어둠을 짓는다(「또다른 故鄕」)”라는 시구도 마찬가지이고, “불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푸로메디어쓰(「肝」)”라는 시구도 마찬가지이다. 김수영에게는 윤동주의 ‘부끄러움의 미학’이 한 걸음 더 나아가 ‘비겁한 자의 자기 학대’로 나타난다.
김수영 시인은 자기 학대의 대가이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絶頂 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어느날 古宮을 나오면서」에서
김수영의 ‘비겁함’에 대한 반성은 윤동주의 부끄러움보다도 그 울림이 더 크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무서운 것은 정상이 아니라 비탈”이기 때문이다(6: 184). 그 비탈은 위에도 까마득한 절벽이고, 아래도 까마득한 절벽만으로 이루어진 비탈이다. 김수영은 “太陽의 다음가는 自由(「記者의 情熱」)”를 위해서, 그 아찔한 현기증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보인다. 自利卽利他, 즉,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 중생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그의 자기 학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며,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라는 시구에서처럼, 이타적인 사랑의 또다른 면모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이타적인 사랑, 그 사랑의 길에는 어떠한 우회로도 없고 까마득한 절벽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의 비탈은 외부에서 주어진 비탈이 아니라, 시인이 스스로 찾아나섰던 비탈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자기 학대는 몰락을 사랑하는 자의 의지의 소산이다. 그의 자기 학대는 몰락하지 않기 위해서 몰락을 사랑하고, 몰락을 사랑하기 때문에 몰락해 가지 않으려는, 몰락한 자의 처절한 사랑의 의지이기도 한 것이다. ‘깨알’보다도 더 작은 글씨로 시를 써 나가는 「이 韓國文學史」가 그것을 말해 주고, ‘드러눕지 않기 위해 더 빨리 드러눕는’(「풀」) 초록의 생명력이 그것을 말해 준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7: 253).
이상이나 윤동주 시인도 디오니소스 유형의 예술가이고, 김수영 시인도 디오니소스 유형의 예술가이다. 그들의 신성모독 행위는 일제의 식민제도나 군부독재에 대한 것만도 아니고, 타인들과 그 이웃들에 비해서 자기 자신들의 윤리적 정당성을 변호하기 위한 것만도 아니다. 그들은 인간 해방과 세계 해방을 위해서, ‘囚人들이 만든 小庭園’으로 몰락해 들어가기도 하고, ‘태양의 다음가는 자유’를 위해서, 끝없는 비탈길로 몰락해 들어가기도 한다. 악이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그것을 거부하는 것도 신성모독에 해당되지만, 자기 자신의 윤리적 정당성을 부인하는 것도 신성모독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타인들이란 우상을 파괴하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파괴하는 것이 더욱더 어렵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 시인이나 윤동주, 그리고 김수영 시인 등은 그것 자체를 디오니소스 제전 때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즐겼다고도 보여진다. 죄를 품고 식은 침상에서 자는 것도 기쁜 일이고, 흔들리지 않으려고 흔들리는 것도 기쁜 일이고, 몰락하지 않으려고 몰락을 사랑하는 것도 기쁜 일이다. 이상은 27세 때, 그 기쁨을 완성했고, 윤동주는 28세 때, 그 기쁨을 완성했다. 김수영 역시도 48세 때, 그 기쁨을 완성했다고 볼 수가 있다.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폐결핵 말기의 환자라도 좋은 일이고, 머나 먼 이국 땅, 불령선인이라는 옥사獄死마저도 좋은 일이며, 뜻밖의 윤화輪禍마저도 좋은 일이다. 어찌 행복하지 않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까 비극의 주인공은 ‘저 왕궁의 음탕’함과 자기 자신의 비겁함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인의 한 유형이 되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가짜 시인이나 가짜 예술가들은 생을 적대시 하지 않으려고 죄를 짓는 자의 기쁨도 알지 못하고, 흔들리지 않으려고 흔들리는 자의 기쁨도 알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몰락하지 않으려고 몰락해간 자의 기쁨도 알지 못한다. 이상 시인은 한국 현대시세계에 있어서 ‘죄인’의 원형이고, 윤동주 시인은 ‘부끄러운 자’의 원형이며, 김수영 시인은 ‘자기 학대’의 원형이다. 그 행복한 시인들은 개인적인 육체성을 떠나, 탈 역사적인 인류학적 보편성을 띠게 된다. 한국어가 변방어가 아니라면, 그들은 ‘세계적인 사건’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와 외디프스에 대한 서구인들의 찬양처럼, 나 역시도 그 시인들을 ‘문화의 수호신’이나 ‘성자의 승전가’로 찬양해 보고 싶은 유혹을 어쩌지 못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아폴로 유형의 시인들과 디오니소스 유형의 시인들은 한국 현대문학의 커다란 두 줄기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신문학의 대두 이후, 수많은 시인들이 배출된 것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신화적 상상력의 문학적 구현과는 다른 말이다. 이제 행복의 시학, 혹은 행복의 깊이를 구상하여 보는 것은 철학예술을 지향하는 나의 몫일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적 미학주의자들도 모든 예술을 압살하고, 이 땅의 염세주의자들도 모든 예술을 압살한다.
모든 시와 철학예술(비평예술)은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득죄신화의 사회적 의미
그리스 최고의 비극 작가인 아이스퀼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그의 명성만큼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감히, 그것을 무시하거나 거부할 수 없을만큼의 야심만만하고도 도전적인 주제로 되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첫 번째로는 인간이라는 종의 생성과 그 기원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문명과 문화의 전제조건으로써 ‘불의 효용성’에 부여한 그 의미 때문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로는 무리를 짓는 동물, 혹은 사회적 동물로서 우리 인간들이 프로메테우스에게 부여한 역할과 그 숭배 사상 때문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이야기 세계의 신화,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는 티탄족의 일원으로서, 제우스와 티탄족 간의 싸움이 일어났을 때, 그가 소속된 티탄족의 편에 가담을 하지 않고, 제우스의 편에 가담을 했다고 한다. 그는 티탄족의 일원으로서 종족의 배신자가 되기는 했지만, 제우스가 올림프스의 제신이 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제우스는 그의 아버지 크로노스를 살해하고 마침내 올림프스의 제신이 되자, 어떻게 하면 신들의 위상과 그 지위를 더욱더 화려하고 빛나게 할 수 없을까라는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전지 전능하고 영생불사하는 신들로서의 위엄과 그 영광----,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올림프스의 제신들을 끊임없이 우러러보고 찬양할 수 있는 존재자들이 없다면, 한낱 속빈 강정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다. 제우스는 그의 구상과 이러한 창조작업에 적당한 인물들을 물색해 보다가, 티탄족 출신인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에게 그 임무를 맡기기로 결심을 하였다고 한다. 프로메테우스는 그 이름의 어원이 ‘미리 생각한다’이고, 에피메테우스는 그 이름의 어원이 ‘때늦은 생각’이다. 프로메테우스는 모든 점에서 신들보다도 더 영리하고 현명한 인물이었고, 에피메테우스는 그만큼 꼭지가 덜 떨어지고 우둔한 인물이었다. 프로메테우스가 지상으로 내려와 잠시 한 눈을 팔고 있는 사이, 에피메테우스는 우리 인간들을 창조하기도 전에, 수많은 동물들에게 “힘, 민첩성, 용기, 교활함, 모피, 날개, 껍질” 등과도 같은 것들을 모두 다 주어버렸다고 한다(8: 87). 따라서 우리 인간들은 수많은 동물들을 제압할 수 있기는 커녕, 자기 자신들을 방어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게 되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수많은 생각과 궁리 끝에, 우리 인간들을 신들처럼 두 발로 설 수 있게 해주었고, 신들만의 귀중한 특권인 불을 훔쳐다가 주었다. 뿐만 아니라, 프로메테우스는 우리 인간들에게 “나무를 태우고 금속과 연장을 만드는 방법, 음식을 요리하고 꽁꽁 언 겨울을 지내는 방법, 어둠을 밝히고 밤에도 여행을 하거나 일을 할 수 있는 방법, 땅을 파고 옥수수와 약초를 재배하는 방법, 집을 짓고 이엉으로 지붕을 엮는 방법, 숲의 짐승들을 길들여 일을 시키는 방법”과 그리고 우리 인간들에게 만물의 영장으로써 사유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9: 88). 그 결과, 프로메테우스는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듯이, 카우카소스의 바윗산에 묶여서 제우스의 神鳥인 독수리에게 하염없이 간을 쪼아먹혀야만 되었던 것이다.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고, 오직 고통과 고통만이 가중될 수밖에 없는 최고급의 형벌----, 이것이 제우스의 무자비하고 교활한 복수극이자 그에 대한 신성모독의 댓가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화란 무엇인가?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란 무엇이며, 그 역사 철학적 의미란 무엇인가? 신화의 모든 저자들이 예술가(시인)들이었듯이, 모든 신화는 한 편, 한 편의 예술작품일 수밖에 없다. 시와 신화와 종교는 나의 말대로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이 세상을, 이 세계를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게 미화시키고 찬양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 인간들은 이 어렵고 힘든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다. 또한 자기 자신과 인간이라는 종을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게 미화시키고 찬양을 하지 않는다면, 이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자의 삶을 참고 살아갈 수가 없다. 추함은 쇠퇴, 위험, 무력을 상기시키지만, 아름다움은 성장, 고양, 힘의 감정을 생성시킨다. 낙천주의는 이 세상을 넓고 아름답고 풍요롭게 바라보려는 사상이며, 우리 인간들의 행복한 삶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세상을 넓고 아름답고 풍요롭게 바라보는 것, 이것이 모든 예술의 궁극적인 원리이자 낙천주의 사상의 핵심적인 전제가 된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가 있듯이, 모든 신화와 종교의 생성 조건은 ‘우연성’과 ‘무력성’과 ‘결핍성’에 맞닿아 있다. 우연성이란 최선의 노력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뜻밖의 흑자부도를 맞이하였거나 사지를 절단당하여 그 꿈(대 재벌, 대 학자의 꿈)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무력성이란 가난한 자나 화재를 당한 이웃이나 물에 빠진 자를 돕지 못할 때의 힘의 감정을 말하고, 결핍성이란 사회적 재화의 양이나 애정이 부족할 때 느끼는 욕구불만의 감정을 말한다. 우리 인간들은 이러한 우연성과 무력성과 결핍성을 몸소 겪고 체험할 때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수많은 제물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된다. 왜냐하면 아버지 신은 전지전능하고 영생불사하는 존재이고, 이러한 우연성, 무력성, 결핍성은 전혀 염려할 가치조차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은 날이면 날마다 자기가 소속된 종족의 신들에게 끊임없이 예배와 기도를 드림으로써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 극복과 자기 초월을 꿈꾸어 왔던 것이다. 상대적 완전성과 상대적 절대성을 통하여 전지 전능한 신이 된다는 것, 언제나 고통과 슬픔 뿐인 삶을 극복하고 영원히 행복한 삶을 영위하겠다는 것, 이것이 모든 신화의 생성 기원이며, 그 목표인 것이다.
하지만 신은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가상이며 상징적 존재라는 데 그 비극의 역사가 시작된다. 신화와 종교의 역사는 신성모독의 역사이다. 이러한 신들의 역사는 신들이 우리 인간들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다양한 신들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더없이 명료하고 정확하게 증명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우리 인간들은 프로메테우스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그의 뜻대로 두 발을 사용하고 불을 이용하여 문명과 문화를 건설하고, 이 세상의 만물을 지배하는 동물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프로메테우스가 우리 인간들의 걸작품이라는 나의 전제가 맞는다면,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통해서 우리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찬양하고 미화시킨 대목을 지적해야 하고, 두 번째로는 원시 인류가 불에 부여한 가치의 효용성과 세 번째로는 우리 인간들이 프로메테우스를 ‘문화의 수호신’이라고 성화시키고 있는 대목을 따져보지 않으면 안된다. “힘, 민첩성, 용기, 교활함, 모피, 날개, 껍질” 등, 다른 동물들과 비교를 하여 어느 것 하나 우월한 것이 없었던 우리 인간들이 프로메테우스라는 가상의 인물(신)을 창조해냄으로써, 두 발로 걷고, 두 손을 사용하고, 불을 이용하여 문명의 이기들을 생산해낼 수 있는 이성적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수많은 짐승들을 창조해낸 에피메테우스는 그만큼 꼭지가 덜 떨어지고 우둔한 인물이고, 우리 인간들을 창조해낸 프로메테우스는 그만큼 영리하고 현명한 인물이다. 에피메테우스는 조롱의 대상이고, 프로메테우스는 숭배의 대상이다. 그리스 신화는 인간 중심주의적인 입장에서 수많은 짐승들을 폄하하고, 우리 인간들을 창조해낸 프로메테우스를 성화시켜온 역사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화의 어두운 그늘이 엿보이는 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호랑이나 곰처럼 단독자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이 선악을 넘어서서 모든 영역을 자기 마음대로 넘나들지를 못하고, 무리를 짓는 가축떼와도 같은 사회적 동물이 된 것은 에피메테우스의 바보같은 짓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육체적으로 매우 허약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 인간들은 자기 자신들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하고, 공격본능과 방어본능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커다란 삶의 방법----자유로운 삶의 방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도덕, 법, 제도, 국가, 정당, 민족, 직장, 가정 등, 우리 인간들은 더없이 나약한 동물들로서 어쩔 수 없이 사회적 동물이 된 것이다.
두 번째로 불은 문명과 문화의 원동력이며, 우리 인간들은 불이 없으면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다. 사유하는 인간, 두 손으로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인간, 그리고 마침내 불을 발명한 인간, 바로 이 세 가지에 의하여 우리 인간들의 문명과 문화의 건설이 가능해 졌고, 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은 사유하는 인간의 이성에 그 빛을 더해 주고,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인간에게 그 노동의 강도를 높여주고, 모든 악의악식과 어렵고 힘든 육체적인 노동으로부터 우리 인간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가볍고 화려한 옷과 더없이 정중하고 세련되고 겸손한 말과 수많은 건강식품과 미식취미와 날이면 날마다 예술과 축제의 생활이 가능하도록 해준 것도 불의 발명의 성과에 의해서였다. 외딴 집의 방과 성스러운 신전을 밝혀주고 있는 불, 재래식 아궁이와 물레방앗간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 정월 대보름의 쥐불놀이와 마을 잔칫날의 불, 사창가나 선술집에서 밑빠진 인생들과 부단히 음모를 꾸미며 타인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의 불, 선남선녀의 모습으로 불륜의 욕정을 태우거나 타인들을 질투하거나 시기하는 자의 불, 酒池肉林의 환락의 도시와 신성한 숲과 자연을 파괴하는 불, 다이나마이트와 이 산 저 산을 다 잡아먹고도 巨食症으로 그 내장까지 벌겋게 타오르고 있는 불, 이 세계의 死神이 되어가고 있는 오펜하이머의 불----. 우리 인간들은 불(관능의 불) 속에서 태어나 그 불의 운명에 따라서 죽어간다. 불의 효용성은 그 무엇보다도 크지만, 다른 한편, 그 위험성도 그만큼 크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쨌든 우리 인간들은 프로메테우스를 숭배하는 拜火敎徒들이며, 또 그것을 넘어서서, ‘불의 종족’ 그 자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요컨대 불의 고귀함, 거룩함, 신성함이 원시인류가 그 불에 부여한 가치였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고귀하고 거룩하고 신성한 불은 어떠한 인간이 발명을 했던 것이며, 그 발명의 댓가는 무엇이었던 것일까? 프로메테우스는 자기 자신이 창조한 예술 작품(인간)에 대한 지나친 사랑 때문에 제우스 신의 불을 훔쳤고, 그 죄의 댓가로 카우카소스의 바위산에 묶여서 제우스의 神鳥인 독수리에게 하염없이 간을 쪼아먹혀야만 하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리스 신화와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속에서는 우리 인간들이 프로메테우스의 걸작품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신화나 모든 비극 작품이 하나의 허구이며 가상의 그것이라는 나의 전제가 맞는다면, 거꾸로 프로메테우스가 우리 인간들의 걸작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로서 자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프로메테우스라는 가공의 인물을 창조하고, 그 신의 힘에 의지하여 이 세상을 지배하는 만물의 영장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바보같고 하루살이와도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신적인 지위를 포기한 범죄자이지만, 우리 인간들의 입장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와 그 문명과 문화의 삶을 가능케 하는 수호신일 뿐이다. 따라서 프로메테우스의 범죄 행위가 끊임없이 찬양되고 성화되고 있는 것이며, 여기에는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 잣대가 적용되지를 않는다. 우리 인간들은 선한 것을 욕망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욕망하고 그것을 선이라고 부른다. 스피노자, 마키아벨리, 니체, 소피스트들의 윤리학이 바로 이것을 증명해 준다.
그러나 아이스퀼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그 구성의 원리가 비교적 단순하고, 등장 인물의 성격도 구체적으로 살아 있지 않다. 그것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창조하고 불을 훔쳐오는 과정을 무대의 배경으로 깔면서도, 그가 제우스에 의해서 형벌을 받고 있는 장면만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더욱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형벌의 장면만이 집중적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형벌의 고통이 생략되고, 그가 우리 인간들에게 베풀어 주었던 여러 가지 지혜와 기술들과, 신성모독자의 의지만이 단조롭게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역동적인 장면이 제거되고 등장 인물들의 성격이 지나치게 단순화된 것이 그 험(흠집)이 되기는 하지만, 진정한 문화의 수호신을 다룬 주제만큼은 무엇보다도 장중하고 그 울림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헤르메스이 악한아, 표독하고도 표독한 놈. 불을 도둑질한 녀석. 신을 배반하고 인간에게 명예를 돌려준 네놈에게 얘기하는 거다. 아버님의 명령이시다. 도대체 왕위를 빼앗고야 만다고 네가 뽐내며 지껄이고 있는 그 혼인이란 과연 무엇인지 아뢰라시는 분부시다. 말을 하되 수수께끼와 같이 얼버무리지 말고 조목조목 명백히 말을 해야 한다. 내가 두 번 걸음을 하지 않도록 하란 말이다. 프로메테우스, 제우스 신께서 애매하고 모호한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 건 너도 알고 있겠지?
프로메테우스잘난 체하는 그 말투, 뽐내는 꼴, 과연 신의 심부름꾼답구나. 폭정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된지라 네가 살고 있는 궁전에는 영영 슬픔이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는군. 하지만 이미 그 자리에서 폭군이 둘이나 쫓겨나는 걸 내 눈으로 본 걸. 그리고 세 번째는 지금 왕이지. 그가 완전히 망하는 걸 보고야 말테야. 새 신들 앞에서 내가 허리를 굽히고 벌벌 떨 줄 알았든가? 천만의 말씀, 썩 가거라! 오든 길을 다시 돌아가란 말이다. 아무리 물어도 대지 않을테니(10: 53).
주지하다시피, 프로메테우스는 예술가로서 자기 자신의 작품에 대한 지나친 사랑 때문에 신성모독을 범했고, 제우스는 그것에 걸맞는 최고급의 형벌을 부과했다. 제우스는 천둥과 번개로써 프로메테우스의 목숨을 단 번에 끊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그처럼 가벼운 형벌로써 간단하게 처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무시무시한 고문을 가하되, 뼈를 깎는 듯한 반성과 참회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형벌, 따라서 하나의 훌륭한 본보기로서의 형벌만이 그의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시사한 바가 있듯이, 프로메테우스 신화에는 우리 인간들의 권력 투쟁의 역사와 형벌의 기원이 담겨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카우카소스의 바위산에 묶여서, ‘오케아노스의 구명 운동’이나 ‘헤르메스’와 ‘힘’과 ‘폭력’에 의한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의 죄를 뉘우치거나 반성을 하지 않는다. 아니, 참회와 반성을 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는 자기 자신의 죄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모든 고통을 가볍게 받아 들인다. 그의 스토아 학파적인 견인주의 앞에서, 제우스의 절대 권력에 어떤 균열의 조짐이 드러나고, 이 반전에 의해서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극적인 효과를 띠게 된다. 크로노스가 그의 아버지 우라노스를 살해했고, 제우스가 그의 아버지 크로노스를 살해했듯이, 제우스 역시도 그의 아들에 의하여 살해를 당할 것이라는 프로메테우스의 예언이 바로 그것이다. 헤르메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제우스의 불을 훔친 파렴치범이라고 단죄를 하면서도 어떤 아들이 제우스를 살해할 것인가를 알지 못해서 야단법석이고, 프로메테우스는 천고의 형벌을 받고 있는 범죄인으로서 더욱더 과감하고 용기 있게, 제우스의 파멸을 지켜보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아이스퀼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문화수호신의 이야기이며, 권력 투쟁과 형벌의 기원이 담겨 있는 신화이다. 절대 권력자는 그의 신민들에게 무조건의 복종과 예배만을 강요하고, 피 지배자는 절대 권력자의 공적이나 업적보다는 그의 권력에 흠집을 내고, 그것을 물어뜯기에 바쁘다. 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떤 권력도 다양한 투쟁 전략에 부딪치지 않는 권력이 없으며, 지배와 피 지배의 관계가 항구적으로 보장되는 절대 권력도 없다. 브라만과 부처와의 싸움, 하나님과 예수와의 싸움,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와의 싸움, 바로 이 싸움이 신성모독적인 권력에의 의지에서 비롯된 싸움이며, 문화를 움직여 가는 근본적인 힘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무리를 짓는 동물로서의 권력은 삶의 본능의 옹호이며, 그 자체인 것이다. 권력을 부정한다는 것은 삶 자체를 부정하는 생명부정에의 의지이며, 염세주의자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불이 없으면 우리 인간들의 삶이 가능하지 않고, 그 불은 최고급의 신성모독에 의해서 얻어진다는 것, 이것이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핵심적인 전언인 셈이다. “거인적 경지로 드높아가는 인간은 자기 스스로 문화를 전취戰取하며, 신들에게 인간과 결속하도록 강요”한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얻어낸 지식을 가지고 신들의 목숨을 수중에 넣고 그들을 규제”한다(4: 74). 아이스퀼로스의 싸움은 신과 인간의 싸움이며, 우리 인간들에게 너희는 어떠한 신성모독을 범하고 그 형벌의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모든 새로운 것, 새로운 지혜, 새로운 종교나 사상은 근본적으로 기존의 도덕과 법과 제도와 종교와 앎의 체제를 파괴하는 불순한 것이고, 그 주체자는 그 형벌의 고통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인간들은 황금의 종족, 은의 종족, 돌의 종족, 청동의 종족, 철의 종족이 아닌 ‘불의 종족’----내가 내 식으로 불러본다면----이며, 이것이 바로 세 번째의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숭배 사상의 핵심적인 요체인 것이다.
신화의 시대에도 모든 역사는 신성모독의 역사이고, 득죄신화를 필요로 하는 역사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탈 현대사회에 있어서조차도 모든 역사는 신성모독의 역사이고, 득죄신화를 필요로 하고 있는 역사일는지도 모른다. 골드만은 그의 저서, 계몽주의의 철학에서 18세기에는 중요한 객관적 역사적 질문이 ‘계몽주의냐? 구체제와 기독교 신앙이냐?’이었다는 것과 함께, 19세기에는 그 질문이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라는 질문으로 대체되었다고 밝혀놓고 있다(11: 137). 따지고 보면, 계몽주의도 기독교 사상을 압살한 것에 불과하고, 기독교 사상도 모든 신화들을 압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 사상의 단초는 B.C 5세기 경의 파르메니데스 학파에서 그 전거를 찾아볼 수가 있는 데, 왜냐하면 파르메니데스 학파는 소크라테스적 미학주의자들의 원조元祖에 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이 미덕이 될 때, 모든 제신들은 질식하고, 그 미덕이 행복이 될 때, 유일신의 사상인 기독교의 모태가 생겨나게 된다. 신화의 시대에는 자연을 ‘나와 당신의 관계’로 파악했지만, 기독교는 자연을 ‘나와 그것의 관계’로 전복시키고 그 자연을 파괴시켰다. 신화의 시대에는 자연이 다양한 제신들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이며 숭배의 대상이었지만, 신과의 관계만을 나와 당신의 관계로 파악하고 있었던 기독교 시대에는 자연은 다만 도구이며, 파괴의 대상일 뿐이었던 것이다. 만일, 자본주의의 정신적 지주가 계몽주의이고, 계몽주의의 물질적 지주가 자본주의라는 나의 전제가 맞는다면, 기독교 사상이 모든 신화들을 압살했듯이, 자본주의와 계몽주의는 다같이 기독교 사상을 압살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회학적으로 자본주의의 역사는 경제의 역사이지, 도덕이나 종교의 역사가 아니다. 또한 경제의 문제는 성공이나 실패의 문제이지,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초기의 부르조아지들이 고리대금업을 금지한 기독교 전통을 반 사회적인 것으로 낙인을 찍어버린 사실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 주고, 또한 그들이 종교적인 문제까지도 공동체의 관심사에서 개인적인 것으로만 축소시켜버린 사실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 준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구체제의 기독교가 아니라 순치된 기독교이며, 또한, 기독교의 예배 형태도 전통적인 예배의 형태가 아니라 타락한 예배의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의 정신적 지주를 기독교로, 그리고 기독교의 물질적 지주를 자본주의로 설명하고 있는 데, 그것은 아주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막스 베버의 말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성장과 함께, 자기 계급의 위기의식을 느낀 부르조아지들이, 이 순치된 기독교를, 자기 자신들의 사회적 은신처로 삼았다는 사실에서만 그 일면의 타당성이 있는 말인 것이다.
나는 감히 자본주의의 정신적 지주는 계몽주의이고, 계몽주의의 물질적 지주는 자본주의라고 말할 수가 있다. 하지만 계몽주의 역시도 그 자체 내의 수많은 문제점과 모순들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유와 평등의 문제만 하더라도 그렇고, 사적인 이익의 추구와 공동체의 행복이라는 문제만 하더라도 그렇다. 한 사람의 자유는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짓밟고, 만인의 평등은 최소한도의 사회적인 위계질서마저도 위태롭게 한다. 마찬가지로 사적인 행복의 추구는 공동체 사회의 행복을 낳지 않고, 만성적인 빈곤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낳게 된다. ‘자유’라는 말은 그 주체자의 책임이라는 말에 구속되어 있고, 만인의 평등은 문화적인 혼란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가치판단이나 일반원칙은 어떤 식으로든지 개인의 양심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는 저 계몽주의적인 명제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허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계몽주의적 이성과 합리성도 하나의 환상에 불과했던 것이고, 계몽주의가 배태한 자본주의 역시도 그토록 잔인한 악마들의 흑주술(최고 이윤법칙)에 불과했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경제적 결정론’은 경제라는 하부구조의 성격이 정치, 종교, 철학, 문학 등 모든 상부구조의 성격을 결정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헤겔에게 있어서는 우리 인간들의 노동 과정마저도 그것이 사유의 대상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정신적 과정이었지만, 마르크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물질적 대상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물질적 과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모든 생산 양식을 장악하고 있는 지배 계급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한다고 보았다. 자본은 개인적 힘이 아니라 사회적 힘이다. 하지만 이 지배 계급이 바로 국가기관을 장악하고 있어서 결코 ‘역사의 무대’에서 제 발로 걸어나가지 않으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에 의해서만이 그것을 타도할 수 있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유명한 ‘공산당 선언’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계획 경제 체제 아래서는 경제가 없고, 또 사용가치만이 있고 교환가치가 없는 원시사회에서도 경제는 없다. 소련이나 동구권이 그 위대한 사회주의 혁명의 실험무대이었지만, 그 위대한 혁명은 한낮의 백일몽에 지나지 않았다. 그 반면에, 서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절대 빈곤화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 계급의 주요 구성원들을 신흥 중산층 계급으로 통합시키는 데도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사회도 1980년대로 들어오면서부터, 절대 빈곤 사회를 벗어나 어느 정도 서구 사회를 뒤쫓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요컨대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는 중요한 역사적 질문이 그 유효성을 상실한 것이고, 이제는 그 질문마저도 ‘탈현대 자본주의 사회이냐? 신화의 시대이냐?’라는 새로운 질문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된다.
혹자는 벌써부터 ‘역사의 종말’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의 가능성도 없어지고, 탈현대사회는 그만큼 풍요로운 재화를 축적하게 되었다는 말일 것이다. 일견 그럴듯한 이야기로 들리기도 하고, 그 증거로써 무제한적인 소비가 미덕이 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탈현대사회는 영혼이 없는 산업사회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평등주의와 주체의 자율성을 강조했던 계몽주의적인 가치관도 무너지고, 다른 한편, 비인간화되고 사물화되어 있는 인간들이 만성적인 빈곤과 그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는 주체의 자율성조차도, 아니, 그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저마다 독특하고 개성적인 목소리마저도 획일적인 코드 속에 묶이게 되고, 소비자의 자유마저도 현란한 광고의 유혹 속에 그 구매의사 결정능력을 상실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컴퓨터나 영상 매체 앞에서 사고하지 않고 반응하게 된다. 아는 것은 보는 것이며, 더 빨리, 더 많이 반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자 매체나 영상 매체가 인쇄 매체를 몰아내고 그 주도권을 장악한 시대는 더 이상 시인이 필요 없는 시대일는지도 모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예술가, 철학자, 사유인들을 몰아내고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인간, 로버트나 인조 인간만을 필요로 하는 시대일는지도 모른다. 과연 로버트나 유전자 공학에 의한 복제 인간이 우리 인간들의 최고의 이상적인 모델이 될 수가 있는 것일까? 역사의 종말이란 이처럼 무서운 자승자박의 함정을 지니고 있는 말인 것이다.
벵상 데꽁부는 동일자와 타자에서 ‘역사의 종말’을 이렇게 설명해 놓고 있다.
역사의 종말은 헤겔주의자들이 생각하듯이 의미의 승리이다. 그것은 최종적인 화해, 보편적 인지, 혹은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일반적인 포응이나 단순히 상상가 자신에 의한 현실의 포응일 수 있지만, 그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고도의 종합, 부정의 부정 속에서의 부정의 무화, 진리의 현전과 현전의 진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무의미의 절정이기도 하다. 행해야 할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으며(그러므로 모든 행동은 부조리하다), 그 어떤 것도 말할 것이 남아 있지 않기(그러므로 모든 말은 무의미하다) 때문이다. 역사의 종말에서 인류는 치유할 수 없는 권태와 끝없는 무목적성에 빠져들게 된다. 이것은 아마 니체의 교훈일 것이다. ‘신의 죽음’과 ‘최후의 인간의 무목적성’을 알림으로써 그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위대한 현대의 이상향을 제시한 바 있다. 코제브는 이미 역사의 종말은 인간의 죽음과 동등하다고 말한 바 있다. 블랑쇼도 그의 모든 작품에서 역사의 종말 속에 놓인 이러한 인간의 운명이 현대문학이 탁월하게 증언해 주는 후기 역사 속의 인간의 운명인 죽음 이후의 이러한 삶을 묘사했다. 죠르쥬 바따이유는 역사의 종말 이후에도 인간의 부정성은 사라지지 않으며, 다만 사용되지 않게 될 뿐이라고 말했다(12: 140).
그러나 ‘역사의 종말’이라는 선언적 명제는 우리 인간들이 거꾸로 신화의 시대로 되돌아갈 시기임을 알려주고도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이 가고 모든 것이 되돌아온다. 불교적 의미에서 영겁회귀의 징조이며, 신화의 시대는 기독교의 유일신이 아니라 ‘이신교’, 혹은 ‘다신교’의 가면을 써야 될는지도 모른다. 신화의 시대에 기독교는 하나의 신성모독을 범했고, 그 죄악을 정당화시켰다. 자본주의(계몽주의) 역시도 하나의 신성모독을 범했고, 그 죄악을 정당화시켰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 불경을 범했고, 탈현대사회는 사회주의에 또 하나의 불경을 범했다. 이 점은 문학 예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영원한 것’, ‘보편적인 인간성’, ‘지속적인 가치’, ‘절제와 조화’, ‘고귀한 정신’을 부르짖었던 고전주의의 가치관을 짓밟고 우리 인간들의 이상과 동경을 정식화시켰던 낭만주의, 세목의 진정성 이외에도 전형적인 상황에서의 전형적인 인물의 창조를 부르짖으면서 세계의 해석보다는 그 변혁을 역설했던 현실주의, 우리 인간들의 무의식을 풀어놓고 현실주의의 장벽을 뛰어넘고자 했던 초현실주의, 일상적 언어에 조직적 폭력을 가하면서 ‘낯설게 하기’의 기법을 정식화시켰던 러시아 형식주의, 텍스트의 기원이 저자라는 통속적인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 반 인본주의의 입장에서 ‘저자의 죽음’을 부르짖었던 구조주의 등, 어느 것 하나 전대의 사유 앞에서 신성모독을 범하지 않은 예가 없는 것이다. 모든 역사는 신성모독의 역사이며, 그것은 세계에 대한 혁명적 이해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는 말이 있듯이, 득죄신화의 사회적 의미는 매우 넓고도 깊고, 행복한 사회에 대한 구상은 이처럼 끈질기고도 속 깊은 것이다.
득죄신화란 보다 나은 사회, 보다 행복한 사회를 위한 일종의 고양된 투쟁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악의 정당화가 반드시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는가에 대해서는 하나의 커다란 의문이 남는다. 신화의 시대, 기독교의 시대, 계몽주의의 시대도 마찬가지이고, 사회주의 시대나 탈현대의 시대(‘역사의 종말’)도 마찬가지이다. 행복한 사회는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것인가? 나는 이 질문 앞에서,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모골이 송연해 지지 않을 수가 없다. 때때로 나에게는 프로메테우스 신화나 외디프스 신화마저도 한낱 어릿광대들의 서커어스의 놀음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진정으로 행복한 사회가 도래하지 않는 것은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우리 인간들이 일을 좋아하지 않고, 그들의 욕망을 반대하는 어떤 제안마저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모든 신화가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듯이, 시 역시도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모든 득죄신화는 이러한 낙천주의를 구체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적인 장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곧 바로 무제한적인 욕망의 극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낙천주의는 우리 인간들의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사상을 말하는 것이지, 욕망의 극대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낙천주의는 좌절과 실망을 달래주는 어떤 것으로서 비극의 진수 속에서 꽃 피어나지, 어떤 퇴폐주의 속에서 꽃 피어나지는 않는다. 유한한 존재의 병듦마저도 기뻐하고, 아내의 죽음마저도 기뻐하는 莊子의 「至樂」편을 다같이 읽어보기를 바란다. 생사를 넘어서서 그 어떤 불행도, 고통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며, 삶을 향유하고 있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 바로 그 즐거움(낙천주의) 속에 용해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관점의 문제이며, 그 관점에 따라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1970년대 초, 정현종은 그의 시선집, 고통의 祝祭에서 다음과 같이 삶에 대한 충일성을 노래해 놓고 있다.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事物의 꿈 1」 전문
정현종의 「사물의 꿈」은 삶의 본능에 대한 옹호에 값하며, 이러한 삶의 본능에 대한 옹호는 삶의 충일성에 대한 노래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의 시는 삶에 대한 충일성의 현재화이지, 삶에 대한 적대감과 그 증오가 창조성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꾼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는 시인이며,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 시인이다.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시인만이 참다운 시인이 될 수가 있다. 시인은 시를 통해서 숨을 잘 쉬고, 꿈을 잘 꾸게 되어 있다. 햇빛에 입맞추는 시인의 언어는 숨결의 언어이며, 보슬비에 뺨 부빌 수 있는 시인의 언어는 생명의 언어이다.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시인만이 낙천주의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고,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시인만이 삶의 본능의 옹호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며, 또한 그것이 어떻게 생성--변모되어 나오는 것인가를 알고 있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흔들리는 기쁨도 있지만, 흔들리려고 흔들리는 기쁨도 있는 것이다. 모든 생성과 회춘의 적인 메피스토펠레스가 오히려 그것을 촉진시켜주는 악마이듯이, 바람은 「事物의 꿈」의 정현종을 단련시켜주는 기제일 뿐인 것이다. 좀 더 강력하고 험난한 과정, 좀 더 강력하고 거센 바람, 바로 거기에서 우리 인간들의 삶의 역동적인 모습이 생성되어 나온다. 온갖 만고풍상을 겪으면서도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 있는 소나무와 천하 명산의 단애, 그것이 모든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들의 인생인 것이다. 죄악 없는 성화가 있을 수가 없듯이, 흔들림이 없는 나무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바람, 생을 증오하지 않고 푸른 힘으로 인식할 수 있었던 삶의 지혜는 정말로 대단한 삶의 지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물의 꿈」은 1970년대의 가장 뛰어난 시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정현종은 그 바람, 생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고통마저도 육화시켜 나간다. 그는 “고통의 축제가 가장 찬란한 축제”(「고통의 축제」)라고 말하고, 모든 고통마저도 관능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요컨대 삶의 본능에 대한 옹호가 관능의 정신화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젖은 안개의 혀와/ 街登의 하염없는 혀가/ 서로의 가장 작은 소리까지도/ 빨아들이고 있는/ 눈물겨운 욕정의 親和”(「交感」)라는 시가 그것이다. 관능은 존재의 무근거 상태로서 우리 인간들의 행복의 성감대라고 할 수가 있다. 정현종 시인은 생성의 기쁨과 창조적 명랑성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시인이다.
195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까지, 고은은 생을 적대시했고, 그 이후로는 편협한 민족주의자로서 삶에 대한 증오를 창조성으로 변모시켰다. 그는 “어버이도 아들도 벗도 베어라/ 만나는 것들/ 어둠 속의 칼날도 베허 버려라”(「殺生」)라고 노래하고, “조직노동자 억눌린 시절/ 이 지하실 불밝혀 한방 가득 찼구나”(「노동학교의 밤」)라고 노래한다. 이미 앞에서 시의 사회적 기능을 살펴본 바가 있듯이, 삶에 대한 적의를 정신화시키면 시는 질식하고, 모든 정서가 메마르게 되고, 우리 인간들의 다양한 문화와 삶은 질식하게 된다. 우리 인간들의 삶은 회의되거나 부정되기 이전에 향유되어야만 하고, 이 대전제 앞에서만이 우리 인간들의 삶을 향유할 수 없게 하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이 가능해 진다. 데카르트의 사유가 ‘회의를 위한 회의’나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닌, ‘방법적인 회의’였던 것처럼.
「錦江」의 신동엽도 적의를 정신화시켰고, 黃土의 김지하도 적의를 정신화시켰다.
황톳길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손엔 철사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래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둣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황톳길」 전문
김지하의 「황톳길」은 늙으신 어머니의 입장에서, 한국의 역사와 그 시대 정신에 항거를 하다가 비명횡사를 한 아들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그 뒤를 쫓아가고자 하는 어머니의 심정이 아주 처절하게 나타나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그 아들은 아마도 “부둣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죽어간 모양이지만, 일정한 시일이 경과한 후에도, 늙으신 어머니는 그 한의 슬픔과 아픔을 씻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늙으신 어머니는 “네가 죽은 곳”으로 애타게 찾아가며, 마침내는 그 아들을 따라, 이 세상의 삶을 하직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비극적인 심정은 우리 한국인들의 ‘어머니의 상’과 전면적으로 배치되고, 우리 인간들의 삶에의 의지와도 반하게 된다. 우리 한국의 어머니들은 대부분이 어떠한 시련과 그 아픔 속에서도 그것을 꿋꿋하게 참고 견디어 왔으며 세기말적인 염세주의가 만연되어 있을 때에도, 오히려, 거꾸로, 전 인류의 숫자는 증가되어 왔던 것이다. 과연, 오딧세우스가 머나 먼 이역 만리에서 그처럼 엄청난 고통을 겪어왔으면서도 이 세상의 삶을 저주하고 비방해 왔단 말인가? 프로메테우스가, 외디프스가, 오를레앙의 소녀인 잔 다르크가, 이 세상의 삶을 저주하고 비방해 왔단 말인가? 김지하의 생명부정에의 의지와 그 적의의 정신화는 일면의 타당성이 있지만, 이 세상을 넓고 아름답고 풍요롭게 보지 못한 염세주의자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김지하의 「황톳길」은 ‘애비’의 죽음에 대한 도덕적인 긍지도 없고, 자랑스러운 어머니의 긍지도 없고, 비극의 주인공다운 삶에의 의지도 없다. 바로 그곳에서 모든 시와 예술이 질식하게 되고,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며, 곧바로 죽어버리는 것이 차선”이라는 실레노스의 염세주의만이 자라나게 된다. 동정심에서 이민족을 독살한다는 말도 있지만, 김지하의 ‘염세주의’가 바로 그렇다. 그렇다면 김지하는 왜 염세주의 철학의 실천 주체가 되어가지 못했던 것일까? 실상 김지하는 염세주의자도 아니며, 그 염세주의를 교사하는 사기꾼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황톳길은 민주주의 외피의 가면이며,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또다른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선량하고 무지한 이 땅의 민중들을 ‘순교’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며, 또한, 그것을 이용하여 ‘민주화 투쟁의 애국지사’와 ‘민족시인이라는 월계관’에 대한 야심을 불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이 삶에 대한 적의를 증폭시켜 나가고 있는 시인들은 삶의 본능의 옹호라는 대 전제와 우리 한국인들의 미래의 희망을 제시해 보지도 못한 채, 자유와 사랑과 평등이라는 사탕발림으로, 적의 건강, 적의 행복, 적의 위대함을 물어뜯기에 바쁜 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선악의 이분법에 사로잡혀서 그 적들을 물리치고, 그 적들과 똑같이 사악한 방법으로 이 땅의 민중들을 지배해 보겠다는 권력욕망만을 가중시켜 나가고 있을 뿐인 것이다. 자유와 사랑과 평등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며, 그 분노의 핵심은 황태자와도 같은 권력 욕망일 뿐이다. 현실주의자들의 외피는 가면의 외피이지만, 비극의 주인공들의 외피는 비극, 그 자체의 외피이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저 천박한 황태자의 어릿광대 노릇을 때려치워 버리고, 진정한 삶의 본능의 옹호자로서 그 기쁨을 노래하게 된다. 시인들이란 언제나 그 시대의 사생아들인 것이고, 사생아와 황태자와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보다도 더 크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황태자는 한 시대를 주름잡을 수 있는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을 수가 있지만, 사생아에게는 그것이 없다. 아니, 그는 그것 자체를 행복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득죄신화의 사회적 의미이고, 디오니소스 제전의 진정한 의미인 것이다. 시와 신화는 “꺾꽂이 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기후나 풍토를 막론하고 어디서나 성장하는 나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13: 79). 신성한 입문 의례가 없고, 불경스러운 입문의례만이 있는 이 시대에, 시와 신화의 영속적인 보편성은 한줄기의 가느다란 실핏줄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행복의 깊이: 그 내면의 관점과 확산의 관점
시는 잘 삶의 한 요소이며, 행복한 꿈의 한 양식이다. 그러나 디오니소스 유형의 사회성은 득죄신화의 사회성이고, 위대한 거절의 사회성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낙천주의자의 길은 득죄신화를 필요로 하고, 타협 없는 극단적인 부정 정신을 필요로 한다. 이것을 망각한 염세주의자들이나 소크라테스적 미학주의자들은 반드시 예술의 무대에서 사라지거나 변신하게끔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주의라는 그럴듯한 외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충동의 무조건 긍정’으로부터 출발한 오늘날의 민족문학 진영 내의 현실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탈냉전 시대와 함께, 좌표를 잃은 그들의 신념이 그러하고, ‘창작과비평사’의 도덕적 엄숙성에 걸맞지 않은 동의보감이라는 베스트셀러물이 그러하다. 다시 말해, 전자는 민족문학이라는 절대 명제가 ‘자본주의 우월론’에 투항한 모습이고, 후자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노골적인 상업주의를 표명한 겉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시대를 초월한 문학적 신념에 예술의 기초를 쌓은 것이 아니라, 목전의 당위성에 따라서, 정치적 충동을 문학이라는 외피로 은폐하고 나섰던 것이다. 창작과비평사는 재빨리 선정적인 무대를 마련하고, 박노해라는 영어囹圄의 몸을 그 대표적인 광고모델로 내세우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 점은 순수문학을 표방하며 한국문단을 이끌어 온 문학과지성사도 마찬가지이다. 문학과지성사와 카지노 업계의 代父인 전낙원 회장과의 야합은 그야말로 한국문학의 세기말적인 추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순수문학이 마피아 두목의 가슴에 안겨 자신의 알몸을 맡기고, 그것을 ‘아름다운 로맨스’라고 우겨대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어차피 김현이 바슐라르와 프로이트와 르네 지라르와 골드만과 아도르노에게 자기 자신의 알몸을 맡기고 무차별적으로 놀아난 바가 있는 데----그야말로 무자비하게 그들의 글을 베껴먹은 바가 있는 데----, 그들에게 순결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사창가의 우스개 소리 밖에는 되지가 않을 것이다. 창작과비평사와 문학과지성사, 그 두 출판사의 세속화 현상은 이미 노정되어 있었던 것이고, 수많은 구역질 중에서도 가장 더럽게 오염된 청정지대의 구역질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그들에게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처럼, 득죄신화의 사회적 의미를 가르쳐 주고 싶기도 하고, “이미지 하나가 전 우주를 침범한다”는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을 가르쳐 주고 싶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니체와 바슐라르를 결합시킨다는 것은 어렵고도 분에 넘치는 노릇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내가 이 글을 썼던 1990년대 초, 분명히 니체와 바슐라르를 결합시키고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었지만, 1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그 욕망은 저절로 소멸되고 말았다. 나는 니체와 바슐라르보다도 나의 ‘낙천주의 사상’을 통하여 최고급의 행복론을 연출해 내고 싶은 꿈을 꾸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바슐라르는 그의 몽상의 시학에서 우리는 행복하게 ‘숨을 잘 쉬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몽상가는 한계도 유보도 없는 몽상 속에서 자기를 매혹한 우주적 이미지에 육체와 넋을 부여한다. 몽상가는 세계 속에 있다. 단 하나의 몽상의 이미지가 그에게 몽상의 단위, 세계의 단위를 제시한다. 다른 이미지들이 최초의 이미지에서 태어나며, 서로 모여, 서로를 미화한다. 이미지들은 결코 서로 반박하지 않는다. 세계의 몽상가는 자기 존재의 분할을 모른다. 세계의 온갖 열림 앞에서 세계의 사고가는 주저함의 존재이다. 이미지 때문에 세계가 열리면, 세계의 몽상가는 그에게 주어진 세계에 거주한다. 고립된 하나의 이미지에서 우주가 생겨날 수 있다(14: 195).
이처럼 자기를 매혹한 우주적 이미지에 그 육체와 넋을 부여한 몽상가가 어찌 행복한 시인이 아닐 수가 있겠는가? 바슐라르의 존재론은 낙천주의를 그 본질적인 핵자로 갖고 있고, 낙천주의는 그의 의식의 기원이며, 그의 세계의 씨앗이다. 바슐라르의 몽상의 세계는 그 즐거움 속에서 모든 것이 태어나고, 모든 것이 서로를 미화시키게 된다. 그에게는 억압된 노동도 없고, 어떠한 콤플렉스도 있을 수가 없다. 그의 몽상의 세계 속에서는 곧 바로 일이 유희가 되고, 유희 역시도 일이 된다. 하지만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은 하나의 미적 베일에 불과한 데, 왜냐하면 그는 우리들의 근원적 고통--대재앙을 하나의 미적 베일로 은폐시켜버린 것이지, 외디프스나 프로메테우스처럼, 비극의 주인공이 됨으로써 그것을 정면으로 돌파해 버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론적 신화는 오르페우스나 나르시수스에 맞닿아 있지, 외디프스나 프로메테우스에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니다. 바슐라르의 비사회성은 그 자체로서는 많은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이지만, 그 비사회성을 사회성으로 환원시켜 버린다고 해도, 그의 ‘몽상의 시학’은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우리 인간들은 호이징가의 말대로 ‘놀이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는 잘 삶의 한 요소이며, 행복한 꿈의 한 양식이다. 니체가 아폴로 유형의 시인들의 소승적인 삶의 태도를 정면으로 거부하지 못한 것도 그가 바로 아폴로적인 삶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존재의 무근거 상태로서 축제에 참여하고 있는 디오니소스 유형의 시인들 역시도, 그 비극을 향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아폴로 유형의 예술가들과 매우 일치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박목월의 「나그네」가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인 정서를 노래한 것이듯이, ‘몽상의 시학’도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인 정서를 노래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몽상의 시학도 하나의 조용한 축제이며, 바로 그 몽상의 즐거움 때문에, 모든 몽상가들은 홀로 된 자의 고독을 살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미화시켜 나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의 사회성도 비사회성의 사회성이고, 순응하지 않는 위대한 낙천주의자의 사회성이다.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의 매력은 모든 것을 미화시켜 떠돌이--나그네들로서 그 조용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데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니체의 득죄신화의 매력도 모든 것을 김수영이나 짜라투스트라처럼, 혹은 외디프스나 프로메테우스처럼, 온몸으로 전복시켜 버리게 하고, 그 죄악을 정당화시켜 나가게 하는 데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의 본능을 옹호하게 되면 아폴로 유형과 디오니소스 유형의 두 시인들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자칫 잘못해서 그 두 유형의 예술가들을 몰이해하게 되면, 전자의 유형으로서 후자를 비판하고, 후자의 유형으로서 전자를 비판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전자는 후자를 몰상식한 소영웅이나 광인쯤으로 치부하게 될 것이고, 후자는 전자의 탈역사적인 비사회성을 들어서 한낱 쾌락주의자들이라고 치부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1960년대의 순수시와 참여시의 논쟁은 비록 그것이 가짜 논쟁이긴 했지만, 더 이상 우발적인 논쟁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시가 잘 삶의 한 요소일 때, ‘행복의 깊이’는 수직적인 깊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때에 ‘깊이’라는 수직적인 개념은 매우 큰 울림과 반향을 갖고 있어서, 무한한 동심원을 이루고 있는 확산의 관점과 깊이 깊이 울려 퍼지는 내면의 관점을 지니고 있는 어떤 말이지 않으면 안 된다. 수평적인 공간의 확대 없는 수직적인 깊이가 어디 있겠으며, 수직적인 상승 없는 수직적인 심연의 깊이가 어디 있겠는가? 행복의 깊이는 입체적인 공간을 지시하고, 그 공간은 자연스럽게도 우주적 공간과도 만난다. ‘깊이’라는 말은 통시적으로는 원시사회에서 탈현대 사회까지를, 공시적으로는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을 폭넓게 끌어안는 어떤 말이지 않으면 안 된다. ‘행복의 깊이’는 그러니까 ‘낙천주의 방법론’에 충실할 것이며, 그것은 행복에 대한 우리 인간들의 그 모든 것들을 가능하면 축자적으로 파헤쳐 보게 될 것이다.
누구나 우리 인간들의 삶이 행복해야 된다는 명제에는 동의하면서도, 그 행복에 대한 인식은 매우 진부하거나 상투적인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도 압도적으로 나타나고, 18세기 계몽주의의 철학자들의 사상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만,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이나 자유에 대한 방임주의적인 환상은, 행복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언제나 환원주의적인 고정관념에만 일치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즉, 그들의 고정관념은 고통을 몰아내고, 슬픔을 강제적으로 배제하고만 있는 것이었다. 과연 고통을 몰아내고 슬픔을 강제적으로 배제할 수 있기나 한 것일까? 고통을 몰아내면 행복한 감정이 고양되는 것일까? 그들은 그러한 질문을 던질 줄도 몰랐고, 또 그 해답을 찾아낼 수도 없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그들의 고정관념은 하나의 프로쿠르스테스 침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시와 예술에 있어서 고통이나 슬픔은 몰아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다. 시와 예술에 있어서 고통이나 슬픔은 그 ‘감정들의 격심한 방출’을 통해서 조정해야 될 어떤 것도 아니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고통과 슬픔을 넘어서서 “자기 자신 안에서, 생성의 영원한 기쁨을 실현하기 위해서----파멸에 대한 기쁨까지도 포함하는 그 기쁨을 실현해내기 위해서 말이다(3: 115)”----, 그 고통과 슬픔 속에서 살아가는 어떤 인간들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미학주의자들, 혹은 그 행복론자들은 비극의 진수인 슬픔이나 고통을 알지도 못한다. 디오니소스적인 축제의 의미도 모르고, 아폴로적인 행복한 꿈의 세계도 알지 못한다. 행복이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렇게 풍요로운 사회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생을 적대시 하고 있는 기독교와, 무의미와 권태 뿐으로 이루어진 ‘역사의 종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라! 슬픔이 없으면 기쁨도 없고, 고통이 없으면 행복도 없다. 시인은 삶의 충일성을 노래하지, 적어도 생을 적대시 하지는 않는다.
송찬호의 「구두」는 1990년대에 가장 뛰어난 시들 중의 하나에 속한다.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 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넣어 본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새장에는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다
그것이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새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 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는 한 척의 배,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인 삶의 한 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 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 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 넣어 보는 것이다
----「구두」 전문
나는 송찬호의 「구두」와도 같은 좋은 시들을 찾아갈 작정이다. 송찬호는 값싼 교양으로 시를 쓰지 않고, 자기 자신의 붉디 붉은 피로써 시를 쓴다. 그는 ‘날개 달린 시인’의 원형이며, “새의 육체 속에” 자기 자신의 발을 집어 넣어 볼 수 있는 시인은 적어도 사적인 개인성을 뛰어넘은 시인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구두」의 아름다움은 인류학적 보편성의 원형이며, 그만큼 울림이 큰 시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괴테도 세계적인 사건이었고, 보들레르도 세계적인 사건이었고, 호머도 세계적인 사건이었다. 나는 니체에게, 바슐라르에게, 호머에게, 괴테에게 우리 한국에는 송찬호 시인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해 주고 싶다. 송찬호는 얼마나 높이 높이 자유롭게 날아가고 있는 시인인가? 날개와 날개를 강조하지 않아도 되는 시인,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니면서도 높이 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 시인...... 나는 이 글이 진행되는 동안 송찬호와도 같은 시인들을 다양한 관점과 일관성 있는 지적 성찰로 찾아가 볼 작정이다.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인들에게 사상이란 최고의 목적이며, 그 모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고 이 세계의 종말이 온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사상만은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지식인들의 한결같은 꿈이다. 사상은 새로운 세계의 개진이며, 행복에의 약속이다. 사상은 그 어떤 것보다도 고귀한 명예이며, 삶의 완성이며, 보다 완전한 인간의 표지이다. 우리는 그 사상가의 신전 앞에서 언제, 어느 때나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며, 찬양과 찬송을 하게 된다. 또한 우리는 그 신전 앞에서, 우리 인간들의 존엄성을 바치고, 가장 좋은 예물을 바치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항상 자기 자신을 갈고 닦으면서, 그 사상의 위업을 이어나갈 것을 맹세를 하게 된다. 나는 이 행복의 깊이를 통해서, ‘세계는 나의 범죄의 표상이다, 고로 행복하다’와 ‘나는 신성모독을 범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두 개의 명제를 동시에, 밀고 나갈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한국문학의 역사상, 최초로, ‘낙천주의 사상’을 정립하게 될 것이다. 한국의 호머, 한국의 셰익스피어, 한국의 니체, 한국의 칸트, 한국의 톨스토이, 한국의 괴테가 나올 수 있을 때, 우리 한국인들이 문학 이전의 야만의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는 것이듯이, 나의 도전적이고 야심만만한 과제는 우리 한국인들이 고급문화인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제1권 행복의 깊이, 제2권 한국문학비평의 혁명(행복의 깊이 제2권), 제3권 어느 철학자의 행복({행복의 깊이} 제3권)은 우리 인간들의 ‘삶의 양식’과 ‘의지’와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세목’들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궁극적으로는 나의 ‘행복론’ 속에 그 신전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지난 10여 년 가까운 세월동안의, 그토록 잔인하고 멀고 험난했던 과정들을 조금쯤은 쓸쓸하고, 기쁘고, 행복하게 되돌아보면서, 제1권 행복의 깊이를 다시 써보고자 한다. 오직, 자기 자신의 두뇌와 그 명명의 힘으로, 인류의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독창적인 ‘사상의 신전’을 짓고 우리 한국인들을 고급문화인으로 인도해줄 수 있는 세계적인 대스승이 있었더라면, 나의 행복론은 보다 더 빨리 깊어지고 완성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2권 한국문학비평의 혁명(행복의 깊이 제2권)과 제3권 어느 철학자의 행복(행복의 깊이제3권)이 출간된 뒤, 다시 행복의 깊이를 써야만 하는 이 쓰디 쓴 모멸감, 이 멀고 험난하기만 했던 우회로,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던 어린 아이 앞의 수많은 난제들, 어쨌든 나는 대부분의 난제들을 해결하고, 더욱더 깊어지고 성숙한 철학자로서 십여 년 전의 책상 앞으로 되돌아와 앉아 있다. 아아, 가장 야심만만하고 도전적인 과제들이여, 나에게 더욱더 어렵고 힘든 고통을 주시되, 이 세상을 저주하거나 원망하지 않게 해주시기를......! 항상 이글이글 생살이 타는 듯한 고통으로 나의 마비된 감각과 의식을 깨우쳐 주시되, 더욱더 불행한 인간의 이상적인 전형이 되어감으로써 행복한 인간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를......! 더욱 더 자기 자신의 불행에 충실하고 그 불행한 삶을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를 행복한 인간이라고 부를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어쨌든 철학예술을 꿈꿀 수밖에 없었고, 나의 삶의 본능에 대한 옹호가 하늘 높이, 하늘 높이, 울려 퍼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시는 행복한 꿈의 한 양식이며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참고문헌
1, 토마스 오데아, 자네트 오데아, 종교사회학, 이화여대 출판부, 1989
2, 이승훈, 「사물로 통하는 하나의 창」, 박목월 전집 해설, 지식산업사, 1981
3, 니체, 우상의 황혼 청하, 1984
4, 니체, 비극의 탄생, 청하, 1982
5, 김춘수, 의미와 무의미, 문학과지성사, 1982
6,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청하, 1984
7, 김수영, 김수영 전집, 민음사, 1984
8, 에디스 헤밀턴, 그리스 로마 신화, 을지출판사, 1985
9, 에이미 크루즈, 이야기 세계의 신화, 푸른숲, 1998
10,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희랍비극 1, 현암사, 1989
11, 골드만, 계몽주의의 철학, 청하, 1983
12, 벵상 데꽁부, 동일자와 타자, 인간사랑, 1990
13, 보들레르, 시의 이해, 민음사, 1983
14,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기린원, 1989
*(1: 15)는 1의 책 15면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