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서가에서 낸 《도연명 시집》(김창환 역주, 2013)을 보면서
한국에서 도연명 시에 대한 한글 번역은 이미 몇 가지가 나와 있다. 도연명이 워낙 유명한 시인이기도 하겠고, 또 한국의 옛날 문인들에게 끼친 영향이 많아서 이기도 하겠고, 또 얼핏 보기에 그 시가 담박하고 평이하여 보이고, 또 작품 수가 그렇게 많지도 않아서 다루기에도 그리 큰 힘이 들지 않겠다는 생각이 작용하여서 그럴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실상, 도연명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또 시에서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하게 알아내기는 매우 힘든다고 한다. 나도 도연명 문집은 분량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주석을 참고하여 가면서 다 읽어 보았고, 또 중국의 몇 가지 정사 책, 진서晉書, 송서宋書, 남사南史 등에 실린 열전을 모두 한글로 번역하여 본 일도 있다.-대구, 중문출판사의 《위진남북조문인열전선》
지금 내가 도연명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인상이라는 것은, 그가 쓴 〈귀거래사〉 같은 글이 과연 일반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정말 그의 인품이 고상하기만 하여 벼슬을 헌 신짝처럼 버리고 미련 없어 떠나는 홀가분한 마음을 적은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아니면 아주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에게 벼슬은 정말 좋은 것인데, 이 좋은 것을 아무 대책도 없이 어찌할 수 없이 버리고 떠나야만 해야 하니,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솟지만, 그것을 억지로 억누르고 담담하고 초연한 것 같이 포장한 것이나 아닌가? 하는데 대한 판단 중 과연 어느 쪽이 맞을지 다소 헷갈린다.
도연명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어떤 성격을 지닌 사람인가? 시에 보면 늘 직접 밭을 메고 김을 뽑는 농부와 같은 모습을 자랑스럽게 적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비록 자주 끼니를 이을 양식이 떨어지고, 추위에도 헐 벋고 살기도 하였던 것은 사실이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는 비록 그가 살고 있는 동안에 망하여 버린 나라이긴 하지만, 진나라 귀족의 집안사람이며, 독서를 할 수 있는 인테리[사士]의 신분이 아니었는가? 여기 태생적인 비애가 도사리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한말에 매천선생이 "인간세상에 정말 어렵구나 독서인 노릇하는 것이人間難作讀書人"란 시를 적어 놓고 절명한 것 같은.
그의 성격에 관하여서도, 흔히 생각하듯이 평화롭고 담박한 것만 한 것 같이는 보이지 않는 측면이 분명 강하게 도사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젊을 때 환현桓玄이니 유유劉裕니 하는 장군들 밑에서 참모로 근무한 일도 있었는데, 이 두 장군들은 뒤에 모두 스스로 나라를 세워 황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 중에 환현은 곧 실패하였지만, 유유는 성공을 하여 남경에 도읍한 남조南朝에 속한 송宋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만약 도연명이 그런 장군들에게 잘 협력을 하고 순종을 하였더라면, 뒷날에 그는 그런 나라에 재상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옛날 알고 지내던 장군이 황제가 되어 국사편찬위원장[저작랑著作郞] 같은 좋은 자리를 주고 부르는데도, 마다하고 술만 퍼마시고 끼니조차 떨어져 굶주리기를 밥 먹듯이 하였다니, 이런 성격을 어떻다고 해야 하겠는가? 그의 성격이 평화롭기만 한 것인가?
내가 지금 이 새로운 도연명의 시 한글 번역문을 읽어 보니, 도연명의 이러한 “생각의 복잡함”을 다시금 간간이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의 저명한 중국문학자인 길천행차랑吉川幸次郞 선생 같은 분은 몇 10년 전에 경도대학에서 퇴직을 할 때 고별강연에서, 자기는 평생을 중국문학을 공부하면서 두보에 관하여서는 좀 이해가 가지만, 도연명은 참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다.-한글 번역 두보강의(조영열 박종우 옮김) 참조
한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데, 더구나 사는 것 자체가 죽는 것보다도 더 치욕스러운 평탄치 못한 시대를 살아가다가 보면, 앞서 먹었던 목표와 생각이 허물어 질 수도 있고, 그러한 일에 대하여 좌절하고 분노하기도 하지만, 또 체념하고, 다시 마음을 다스려 보려고 자기 마음을 구스려 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이 도연명의 시들을 보니, 즐겁기 보다는 나는 참 가슴이 아파진다. 그도 얼마나 속 탔으면, 늘 술만 퍼마셨겠는가? 이렇게 어려운 세태를 겪어 가면서도 그래도 중국의 옛날 지식인들은 어느 때나 줄곧 바르게 살아보려고 애를 쓴 것이 중국의 위대한 문화전통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보니, 도연명이 남긴 시 57 제題 125 수首를 모두 우리말로 풀고 어려운 말에는 간단한 역주를 달았으며, 시의 제목 밑에는 짧막한 해제를 하고, 시 한 수가 끝날 때 마다 자못 간결하면서도 친절한 감상을 적었다. 이 역자는 앞서 을유문화사에서 《장자》 역주 3권과 《도연명의 사상과 문학》이라는 책을 낸 일도 있는데, 그 장자 책은 내가 좀 읽어 본 적이 있다. 매우 간결하면서도 요령있게 잘 정리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의 도연명에 관한 저서는 아직도 읽어 보지 못하였다. 아마 역시 잘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책은 왕숙민王叔岷 교수의 《도연명시전증고陶淵明詩箋證稿》라는 책을 저본으로 삼았다고 하니 더욱 반갑다. 대만대학 중문과에 계셨던 그 분은 한국에서 이전에 도연명 시를 번역하였던 나의 지도 교수 차주환 선생님이나, 몇 년 선배인 김학주 교수의 스승이기도 하고, 내가 대만에 유학할 때에도 또 직접 가르쳐 주신 잊을 수 없는 은사이기도 하다. 그 선생님이 장자를 강의하실 때, 가끔 “타오옌밍 센성陶淵明 先生님께서는 이 구절을 따다가 이러한 시를 지으셨지!”하시면서, 매우 감회에 어린 표정을 지어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전란 통에 이산가족이 되어 대만 땅까지 밀려 와서 사시는 자신의 괴로운 심사를 가끔 장자의 문구나 도연명의 시구를 읊조리면서, 위안을 삼으시려는 것 같이 느껴졌다.
왕숙민 선생님은 중국 고전의 교감학의 대가로 매우 많은 여러 가지 명저를 내셨지만, 위에서 말한 도연명에 관한 이 책도 이 분야에서는 가장 잘된 책의 하나이다.
좋은 책을 저본으로 삼아서 좋은 번역을 새롭게 낸 것을 반갑게 생각한다.
첫댓글 선생님의 글은 늘 제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잘 읽어 주셨다니 고맙습니다.
일전에 선생님을 뵈러 갔다가 말씀하신 김창환선생의 도연명시집을 구해 차주환선생의 도연명 전집과 맞추 보다가
말씀처럼 도연명의 생애에 대한 궁금함이 생겼었는데...
선생님 덕분에 실타래가 풀린 듯합니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이 참으로 맞는것 같습니다.
방학동안 곽말약의 이백과 두보를 다시 보며 그런 생각이 더욱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