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2020도쿄올림픽에서 거둔 성적 중 최악은 '리듬체조'라고 할 수 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부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까지 러시아가 5개 대회 연속으로 금메달을 놓치지 않았던 종목이었다. 러시아가 리듬체조 강국으로 불린 이유였다. 국내서 리듬체조로 이름을 알린 손연재, 신수지 등이 일찌감치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도쿄올림픽 리듬체조 개인 종합 결선에서 이스라엘의 리노이 아쉬람(22)이 러시아 쌍둥이 자매 디나, 아리나 아베리아를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 충격은 올림픽이 끝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리노이 아쉬람 올림픽 승리후 악성댓글에 인스타그램 계정 폐쇄/얀덱스 캡처
현지 언론에 따르면 러시아 자존심을 꺾은 아쉬람은 11일 인스타그램 계정을 비공개로 전환했다. '악성 댓글' 때문이다.
아쉬람은 이스라엘로 귀국하는 날, 공항에서 수백 명의 팬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네티즌들로부터 악성 댓글 공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귀국 환영장에서 "내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경험이자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라며 "따뜻한 환영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또 자신을 도와준 코치진과 컨디션을 최고조로 올려준 의료진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감격해할 만했다. 그녀는 그동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단 한번도 시상대에 오른 적이 없었다. 유럽선수권대회에서 2020년, 2021년 금메달을 딴 것이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귀국 공항에서 대대적인 환영에 흐뭇해하는 아쉬람/동영상 캡처
대대적인 환영을 받은 모습을 누군가는 가만히 지켜보지 못했다. 앞뒤 맥락을 무시한 채 "모든 선수는 운동 능력으로 승패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러시아로 추정되는 네티즌들의 공격에 아쉬람은 인스타그램 등 개인 SNS 계정을 닫아야 했다.
은메달에 머문 디나 아베리아도 현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악성 댓글 공격 중단을 호소했다. 그녀는 “나도 리나 아쉬람처럼 소셜 네트워크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다"며 "우리에겐 아무 죄도 없다. 심판진이 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스타니슬라프 포즈드냐코프 ROC 위원장은 국제체조연맹(FIG)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국제체조연맹, 비네르-우스마노프 러시아 국가대표 감독 비난에 대응/얀덱스 캡처
그러나 FIG는 11일 심판진이 특정 선수에 대한 편견이나 공정하지 않았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하다며 러시아측의 이의 제기를 사실상 기각했다. FIG측은 “FIG 주관 주요 대회와 마찬가지로 올림픽에서도 경기 후 분석을 실시한다"며 "심판진의 불공정 행위가 드러날 때만 공개한다"고 말했다. 도쿄올림픽 경기를 리뷰(재점검)했지만, 불공정 행위는 일체 없었다는 뜻이다.
이에 이리나 비네르-우스마노바 전 러시아 국가 대표팀 감독은 도쿄올림픽에서 세계 리듬체조는 완전히 망가졌다고 비판했다.
이같은 리듬체조 분란이 한 셀럽(유명) 여성의 등장으로 뒷전으로 밀린 것은 아이러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리듬체조 금메달리스트 알리나 카바예바가 러시아 국영 TV '러시아-1'의 프로그램 '60분'에 출연하면서 현지의 관심은 온통 그녀에게도 옮겨갔다.
전 리듬체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카바예바의 방송 출연 장면/러시아-1 TV 캡처
카바예바는 일부 외신들에 의해 푸틴 대통령의 숨겨진 연인으로 알려져 있다. 푸틴 대통령의 자녀를 낳았다는 소문과 함께 몇년간 대중에게서 완전히 사라진 그녀였다. 지난 2018년 어린이 리듬 체조 축제 참가를 끝으로 완전히 잠수를 탄 상태였다. 가끔 SNS에 사진을 올릴 뿐이었다.
카바예바가 다시 방송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언론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했다. 그녀는 빨간 원피스에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나왔다. 가장 먼저 눈에 띄게 날씬해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리고 빨간 원피스가 미국 패션디자이너 '오스카 드 라 렌타'의 여름 컬렉션 중 하나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쭘백화점' 온라인몰에서 253,500루블에 팔린다는 것도 SNS를 통해 퍼졌다. 당연히 그 원피스는 바로 매진됐다.
카바예바가 낀 반지의 가격과 구입 가능한 곳이 곧 인터넷 서핑을 통해 알려질 것이라고 현지 여성 매체 womam.ru는 전했다.
카바예바의 원피스를 분석한 현지 여성신문 woman.ru 보도/캡처
1990년대 옐친 전대통령과 함께 러시아 민주화 기수로 꼽힌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 아나톨리 소브차크의 딸이자 전직 대선후보였던 크세니아 소브차크도 빠지지 않았다. "카바예바의 반지도 멋지고 원피스도 아주 잘 맞는다"고 칭찬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카바예바가 TV에 등장한 이유, 러시아 리듬체조와 은메달에 그친 올림픽 성과에 대한 이야기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겨우 이스라엘의 아쉬람 선수를 살짝 편든 전직 리듬 체조 선수의 발언에 대해 "시끄럽다. 올림픽이든 세계선수권이든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한 선수는 말할 자격조차 없다"고 호통친 것외에는 현지 언론도 별로 다루지 않았다.
올림픽 은메달에 그친 디나 아베리아의 연기 모습/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