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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섭의 우리역사찾기
 
 
 
카페 게시글
역사 관련 소식 스크랩 민족의영웅. 의병장.독립운동가 홍범도장군.
예형 추천 0 조회 226 12.05.26 16:02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의병장, 독립운동가 홍범도장군.

(1868. 8. 27 ~ 1943.10.25 )

 

 

- 대한독립군단 부총재
1920 ~ 청산리전투 북로군정서 제1연대 대장
1920 ~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수상내역

1962 건국훈장 대통령장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

 

경축연환회 봉오동대첩 승리 모임 우리사람들의 기쁨이란 말할수 없었을것이고 이것을 계기로

향우 모든 무장투쟁의 열렬한 봉화가 타오르게 된것입니다.

우리나라 최북단 두만강변-

 

일본군의 충격은 대단한 것이였다. 그동안 풍문으로만 듣거나 무시하기만 했던 조선 독립군의 실체와 그 역량을 확인했기 때문이였다.

일본군은 깔보고 덤볏다가 당한 봉오동 전투의 경험을 살려 대토벌 작전을 벌리지 않을수 없었다. 관동군의 위신이 걸린 문제였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북간도 지역은 남의 나라영토였다 그곳에서 토벌작전을 벌릴려면 새로운 명분이 필요했다 중국인 들은 조선인들의 항일투쟁을 내심 지원했기 때문에 우리독립군에게 관대했다 그래서 일본이 조작한 사건이 바로 훈춘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조작의 명수다.

 

일본내각은

간도지역 불령선인 초토계획를 1920.8 수립하면서 이지역의 마적을 매수하여 자기내 영사관을 습격하게 만든다

영사관 직원과 가족이 11명이나 희생되었다 그리고 조선인들이 저지른 사건처럼 조작했다

이사건이 벌어진 1920년 10월2일 당일로 중국측에 항의 하고 당일로 경원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 제19사단이 두만강을 넘었다

이러한 신속한 진군자체가 조작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조작사건을 주도했던 일본 낭인의 입을 봉하기 위해 일본군이 그 낭인을 죽이려 하니까 그는 도망쳐 조작의 진상을 불었던 것이다. 경원에 있는 19사단 일본군대가 두만강을 넘어옵니다. 그러면서 남쪽에서는 나남19사단이 올라오게되고 북쪽에서는 북만주 파견군이 내려오게 되고 서쪽에서는 단동에 본부를 둔 관동군이 들어오게 되고 동쪽에서는 시베리아에 파견됐던 포조군이 들어오면서 사방에서 공략해서 ................

 

-한국독립운동사 中 -

 

홍범도, 김좌진

 

 

홍범도 [ 洪範圖 ]

1868(고종 5) 평양~1943.의병장·독립운동가.

의병전쟁 및 항일독립전쟁기의 대표적 장군으로 봉오동(鳳梧洞)·청산리(靑山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민족주의와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하는 철저한 무장투쟁노선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일명 범도(範道).

 

청년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작은아버지 집에 기거 했다. 1883년(고종 20) 평양우영(平壤右營)에서 나팔수로 복무하다 탈영하여 황해도 수안 총령(蔥嶺)의 제지소에서 3년간 일했다. 1891년경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 2년간 상좌로 있으면서 지담(止潭)으로부터 글을 배우고 승군(僧軍)의 활동 등에 대해 들으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강원도 철령(鐵嶺)에서 소규모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이듬해 14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함경남도 안변으로 가 석왕사(釋王寺)에 주둔하고 있던 유인석(柳麟錫) 의병과 연합하여 싸웠다. 을미의병 해산 이후 체포를 피해 돌아다니다 북청에서 산포수(山砲手) 생활을 하면서 소규모 항쟁을 계속했다. 1907년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국에서 정미의병일어나자, 일제는 '총포급화약류단속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을 만들어 항쟁의 확산을 저지하려 했다. 이를 계기로 차도선(車道善)·태양욱(太陽郁)·송상봉(宋相鳳)·허근(許瑾) 등과 함께 북청 후치령(厚峙嶺)에서 포수·농민 들을 모아 다시 기병했다. 처음에는 600~700명의 부대원들을 이끌고 기동 유격전술을 펼쳤으나, 일본군이 대규모 토벌 공세에 나서자 소규모 부대를 중심으로 한 매복·기습 전술로 전환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1907년 12월 삼수 전투에서 일본군 함흥·북청·갑산 수비대를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어 이원·단천·혜산 등지에서 37회에 걸친 전투를 승리로 이끌자,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진회원(一進會員)들을 사주하여 아내 이씨(李氏)를 체포·처형했다. 이후 갑산·무산·종성에서 전투를 벌이다 국내에서의 항쟁의 한계와 근거지 건설에 기반을 둔 지속적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느껴 지린[吉林]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해외무장투쟁

1911년 망명 직후 서간도 만간구(萬干溝)에서 차도선·김택룡(金澤龍)·홍사현(洪思鉉) 등과 함께 의병 중심의 친목회를 조직하여 독립군으로의 전환을 모색했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부두·광산·농업 노동자로 일하는 한편 노동회(勞動會)를 조직, 임금의 일부를 군자금으로 비축했다. 아울러 이종호(李鍾浩)·이상설(李相卨) 등이 중심이 된 권업회(勸業會)의 사찰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니콜리스크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했다. 1918년 8월 일본군이 러시아 10월혁명을 탄압하고 백위파(白衛派)를 지원하면서 한인(韓人) 민족운동을 말살하기 위해 연해주 지방에 침입하자, 호범도는 김만겸(金萬謙) 등이 주축이 되어 건설한 대한국민회의(大韓國民會議) 간도·훈춘[琿春] 지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100여 명의 대원을 이끌고 적군(赤軍)과 함께 반일·반백위군 투쟁을 벌였다. 1919년 우수리스크를 거쳐 중국령 따차무정재[草帽頂子]·하마탕[蛤莫塘]을 경유하여 국내로 진군하면서 부대를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으로 개칭·재편했다. 같은 해 8~10월 혜산진·만포진·자성 등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다음해 3~6월 온성·종성 일대로 진격했다. 이어 1920년 5월 28일 봉오동에서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武都督府),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부대 및 신민단(新民團) 독립부대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결성하고 북로제일군(北路第一軍) 사령부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6월 4일 삼둔자(三屯子)에서 일본군 중대병력을 궤멸시키고 다음날 후안산(後安山)에서 적 대대병력을 격파했다. 이어 추적해오는 일본군 19사단 병력을 7일 새벽 봉오동으로 유인, 매복전술로 적 300여 명을 사상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대한독립군의 근거지를 옌지 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이도구(二道溝)로 옮기면서 같은 해 9월 신민단·의군부(義軍府)·국민회군·한민회군(韓民會軍) 등 800여 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1920년 10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김좌진(金佐鎭) 부대, 최진동 부대와 연합하여 청산리의 백운평(白雲坪)·완루구(完樓溝)·천보산(天寶山)·고동하곡(古洞河谷) 등에서 일본군 37여단 1만 5,000여 명을 맞아 싸워 3,000여 명을 살상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제는 만주군벌 장쭤린[張作霖]에게 압력을 가해 독립군 토벌에 끌어들이는 한편,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수립, 대병력을 투입하여 보복했다. 일제의 학살 만행 및 독립군에 대한 대대적 공세로 인해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말까지 안투[安圖]를 거쳐 미산[密山]으로 이동하여 재집결했다. 1921년 4월 이만에서 노령·만주의 36개 독립운동단체가 모여 창설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에서 부총재로 선출되었다. 1921년 3월 제3인터내셔널 동양비서부는 임시고려혁명군정회의(臨時高麗革命軍政會議)를 조직하고 만주·노령의 독립군부대들을 자유시(自由市)로 불러들였다. 같은 해 6월 브라고예시첸스크에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상해파(上海派)를 지지하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측과 이르쿠츠크파를 지지하는 소련 적군과의 충돌로 인한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으로 많은 독립군부대가 피해를 입었으나, 그의 부대는 엄격한 중립을 지켜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21년 11월 독립군부대들이 제3인터내셔널 동양비서부에 의해 소비에트 적군 제5군단 직속 한인 여단으로 개편되자, 그 대표로서 레닌과 면담하여 지원을 요청했다. 또 유동열(柳東說)·김만겸·김표돌 등과 함께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오하묵(吳夏默)측에 가담했다. 다음해 1월 하순에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한인대표로 참석했고, 브라고예시첸스크에서 고려공산당과 한족공산당(韓族共産黨)이 통합하여 조직한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에 참여하여 최고려(崔高麗)와 함께 고등군인징모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22년 볼셰비키 정권이 일본의 시베리아 철수 조건으로 내건 한인독립군의 해산을 받아들여 이를 명함에 따라 이후 무장투쟁 활동은 더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말년

1923년 연해주 이남 구역 차우돈카에서 농업 콜호스를 조직하여 활동했고 1927년 정식으로 러시아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공화국으로 옮겨져 연금으로 생활했다. 1943년 10월 크슬오르다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천도(天道)가 순환하고 민심이 응합하야, 아(我) 대한독립을 세계에 선포한 후 상(上)으로 임시정부가 유하야 군국대사를 주하며, 하(下)로 민중이 단결하야 만세를 제창할 새 어시호(於是乎) 아(我)의 공전절후(空前絶後)한 독립군이 출동되었도다(…)당당한 독립군으로 신(身)을 탄연포우(彈煙砲雨) 중에 투하야 반만년 역사를 광영케 하며, 국토를 회복하야 자손만대에 행복을 여(與)함이 아(我) 독립군의 목적이오 또한 민족을 위하는 본의라.

- 대한독립군 대장으로서 선생이 공포한 유고문(諭告文) 중에서 (1919. 12)

 

15세에 평안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

 

홍범도(洪範圖, 1868. 8. 27∼1943. 10. 25) 선생은 1868년 평남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 홍윤식(洪允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여천(汝千)이다. 선생은 매우 어렵게 성장하였다. 태어난 지 7일만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여 동네 부인네들로부터 젖을 얻어먹으며 자랐고, 또 9살 되던 해에는 부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선생은 작은 아버지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지내다가 어느 부잣집의 머슴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15살이 되던 해인 1883년 나이를 두 살 올려 평안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하게 되었다. 3년여 간의 병영생활은 선생에게 생활의 안정을 가져다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모순을 체험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군대의 핵심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보위하여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진 군교들의 부정과 비리를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선생은 날로 심해가는 군교들의 부정부패와 사병들에 대한 학대를 보다 못해 그 가운데 한 사람을 구타하고 병영을 탈출하고 말았다.


 

 

평양성을 빠져 나온 선생은 황해도 수안군 총령(悤嶺) 아래에 있는 제지소에서 노동자로 3년간 일하기도 하였고, 또 1890년부터 약 1년 반 가량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 들어가 지담대사의 상좌승으로 수도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 때 선생은 이순신의 후손이기도 한 지담대사로부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을 비롯하여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등의 활약상을 듣게 되었다. 이 같은 경험은 개항 이후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침략하는 일제의 행동에 분노하고 있던 선생의 반일의식을 더욱 증폭시켜 갔다. 1895년, 선생은 파계한 뒤 신계사에서 멀지 않은 강원도 회양군 먹패장골이라는 곳에서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군대에 있을 때 익혔던 사격솜씨로 사냥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즈음 일제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중 자국 상인과 거류민 보호를 이유로 군대를 파견하더니, 그 해 6월 21일 경복궁에 난입하여 무력으로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친일정권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청나라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우리 민중의 자주적 근대화 운동이요, 방일 민족운동인 동학농민운동을 탄압하였다. 더구나 1895년 8월 일제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을미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지방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양력 사용을 강용하고, 단발령을 강제 실시하는 등 우리나라의 주권을 제약하여 갔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뒤, 의병활동 시작

이와 같은 상황이 도래함에 따라 각지에서 국모보수(國母報讐)와 축멸왜이(逐滅倭夷)를 위한 의병 봉기가 이루어졌다. 선생 또한 1895년 11월 강원도 회양에서 김수협과 의기상통하여 봉기한 뒤, 경기, 강원 지방과 관북지방을 연결하는 길목인 철령에 매복하여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소총과 탄약 등 전리품을 노획하여 함경도 안변의 학포(鶴浦)로 이동한 뒤, 여기에서 12명의 동지를 모집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최초의 홍범도 의병부대로 불린 이 부대는 안변의 석왕사에 주둔하면서 1896년 8월 북천지계(北遷之計)에 따라 북상하던 유인석 의병부대와 연계하여 일본군과 세 번의 전투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 와중에서 김수협은 전사하고 나머지 의병들 또한 전사하거나 도주하여 선생 혼자 남게 되었다. 때문에 이후 선생은 1897년까지 평남과 함남, 그리고 황해도 접경지역에서 일본군을 살상하고, 친일 관리와 부호들을 응징하는 등 단독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선생은 함남 북청에 정착하여 1907년 후반까지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에 거주하며 사냥과 농사에 종사하였다. 특히 이 때 선생은 안산사 일대 포수들의 동업조직인 포연대(捕捐隊)의 대장으로서 포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선생은 포연대를 주축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포수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여 갔다.

 

한편 망국적 상황에서 포수들의 반일의식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1907년 9월 3일 제정 공포된 ‘총포 및 화약류 취체법’의 강제 시행이었다. 이 법의 주요 내용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무기와 탄약 및 무기가 될 수 있는 모든 장비를 정부와 관청에서 거두어들이고, 그 위반자를 처벌하도록 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법은 일제가 이 시기 전국적으로 파급되던 의병전쟁을 봉쇄하고 탄압할 목적으로 강행한 것이었지만, 총으로 수렵하여 먹고 살던 산포수들에게는 매우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산포수들은 일제의 침략에 대해 민족적 분노와 더불어 생활상의 위협을 직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같은 상황이 전개되자 선생은 일제 침략자를 쳐부수고 자기의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궐기하자고 포수들을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11월 15일 선생과 차도선은 북청의 안산사와 안평사 포수들의 동업조직인 포계를 주축으로, 화전 농민과 광산노동자, 그리고 북청 진위대의 해산군인 등 70여 명을 모아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봉기하였다. 이 의병부대는 선생과 차도선의 지휘 아래 봉기 직후 일진회 회원이며 친일 관리인 안평면장을 처단하면서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날으는 홍범도’ 여러 곳에서 일본군 격파

홍범도 부대가 사용한 수류탄과 탄환 사진


선생의 의병부대는 같은 달 22일 포수들의 총을 압수하여 북청으로 반출하는 일본군을 후치령에서 습격하여 적군 2명과 일본인 순사 1명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25일에도 이곳에서 미야베(宮部) 대위가 지휘하는 일본인 군경 70여 명과 3시간 동안 격전을 벌여 적군 3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선생의 의병부대는 1908년 11월 선생이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1차 망명하기까지 수십 차례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며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삼수성과 갑산읍을 탈환하기도 하고, 헌병분견소, 순사주재소, 우체국, 일본군 관사 등을 습격 소각하기도 하고, 일진회 회원, 친일 관리와 부호, 일본인 군관민 등을 응징 처단하기도 하고, 일본인 금광을 습격하여 금괴를 빼앗아 군자금으로 이용하는 등 실로 대담무쌍한 활동을 벌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날으는 홍범도’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국내에서 활동이 어려워 1908년 11월 만주를 거쳐 노령 연해주로 망명한 이후에도 선생은 의병활동의 재기를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군자금과 무기를 조달하기 위해 선생은 연추에서 이범윤을 만나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유인석과 항일투쟁의 방략을 논의하기도 하면서 재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추풍에서 최원세의 도움으로 군자금을 마련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1910년 4월 초순 선생은 러시아에서 구입한 총기로 무장한 30여 명의 의병부대원들과 함께 추풍을 출발하여 국내로 진격하였다. 그 해 4월 중순 간도를 거쳐 함북 무산에 진입한 선생의 의병부대는 5월 초순까지 무산과 종성 일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수 차례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처음 의병전쟁에 참가한 병사들이 많았고, 병력 또한 적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체포되어 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그 해 5월 중순 다시 만주의 안도현과 길림을 거쳐 러시아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의병과 계몽운동의 공동전선 모색

재차 노력 연해주로 망명한 선생은 유인석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13도의군(十三道義軍)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13도의군은 의병 지도자들이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의 의병을 하나의 군단으로 통합, 작전과 지휘를 단일 계통으로 통일하기 위해 1910년 6월 결성한 것이었다. 이 조직은 실제 전투력을 지녔던 창의군과 장의군 두 부대로 편제되어 있었다. 이범윤이 창의군총재, 경성의병 출신의 이남기가 장의군총재로 각기 선임되어 도총재 유인석의 지휘를 받았다. 그리고 이상설은 외교통신원으로 13도의군의 사무와 조직을 관리하는 실질적 책임을 담당하였다. 선생은 이진룡, 이갑 등과 함께 동의원(同義員)으로 선임되었다. 선생과 이진룡 등은 의병장 출신인데 비해, 신민회의 핵심인물들이었던 안창호와 이갑 등은 무장투쟁노선과는 종래 그 성격을 달리하던 계몽운동 계열이었다. 결국 이들이 13도의군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때까지 민족운동선상에서 의병 계열과 대립 혹은 갈등 관계에 있던 계몽운동 노선이 의병과 합일, 공동전선을 모색하여 간 증거인 것이다.


엄인섭(좌)과 선생(우). 엄인섭은 1908년 노키예프스크에서 동의회를 조직하였고 1911년 권업회 결성에 적극 가담하였다

 

선생이 참여하였던 13도의군의 활동 기간은 8월 국치 때까지 불과 2, 3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이 기간 유인석과 이상설은 대규모 항일전을 전개할 계획 아래 광무황제에게 연명상소를 올려 내탕금으로 군자금을 지원해 줄 것과 연해주로의 파천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의 의병 통합을 표방하고 편성된 13도의군이 미처 항일전을 개시하기 전에 조국이 병탄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을 비롯한 13도의군의 간부들을 중심으로 성명회(聲明會)가 조직되었다. 성명회는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조치에 강력히 항의하고, 그 부당성을 천명하기 위해 조직된 항일결사이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소식이 연해주에 전해졌다. 이 소식에 충격을 받은 선생을 비롯한 민족운동자들은 한인학교에 모여 비상시국에 대처할 방안을 논의한 결과 ‘대한의 국민 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를 맹세하고 성취’할 것을 결의하고 성명회를 조직하였다. 8월 26일 다시 모인 선생을 비롯한 성명회의 주요인물 50여 명은 빗속에서 조국독립의 결의를 거듭 다짐하면서 독립 전쟁의 방략을 논의하였다. 이후 성명회는 취지서와 각종 격문을 중국, 러시아에 산재한 한인사회에 배포하는 등 그 활동을 확대해 나갔다. 선생을 비롯한 한인동포들이 성명회를 조직하여 이처럼 활발한 반일운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러시아 정부에 강력히 항의를 제기하였다. 동시에 선생을 비롯한 유인석, 이상설, 이범윤 등 주요 인물들의 체포 인도를 요구하고 나왔다. 이에 러시아 당국은 핵심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항일운동을 탄압함으로써 성명회는 1910년 9월 해체되고 말았다.

 


권업회와 노동회 조직, 투쟁역량 배양

이후 선생을 비롯한 러시아의 한인 민족운동자들은 현실적이고도 장기적이며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방략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을 비롯하여 이종호, 이상설, 최재형 등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자들의 발기로 ‘조국독립’을 최고 이념으로 하는 자치결사로써 권업회가 1911년 5월 연해주에서 창립되었다. 권업회의 목적과 이념은 한인사회의 권익을 증진시키는 ‘실업(경제)’ 문제와 독립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는 ‘항일(정치)’ 과제를 결부시키는 전술을 취하면서 조국독립을 달성하려는 데 있었다. 선생은 처음에는 권업회의 부회장, 나중에는 사찰부장에 선임되어 활동하면서 신문발간 사업, 민족교육 사업, 그리고 한인의 경제력 향상 및 권익 보호에 심혈을 쏟았다. 선생은 권업회에 관여하면서도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회원들 모두가 노동하면서 그 노임의 일부를 독립전쟁을 위한 군자금으로 비축하는 노동회를 1912년 조직하였다. 이 회의 회장으로서 선생 또한 1913년부터 약 3년 동안 연해주 지역의 항구와 금광 등을 전전하며 노동하여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이 자금으로 선생은 소총과 탄약을 구입한 뒤, 이를 숨겨놓고 동지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국내 진공의 기회를 엿보았다.

 

 

연해주 한인 빨치산 간부 사진(1922). 뒷줄 제일 오른쪽이 선생이다

 

 

 

대한독립군을 편성, 봉오동전투에서 대승거두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이제야 말로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당시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던 노령 대한국민의회의 군무부와 상의하여 그 해 8월 마침내 항일무장투쟁의 길로 다시 나서게 되었다. 선생은 우선 간도로 가서 그곳에서 독립군 병사들을 추가 모집하여 부대를 확대한 뒤 국내로 진공할 예정이었다. 이에 따라 선생은 노령에서 대한국민의회 군무부 소속 군대의 일부를 인솔하고 그 해 9월 간도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의 부대는 간도 대한국민회의 재정 지원과 인원 지원을 받아 대한독립군을 편성한 뒤, 본격적으로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초기 대한독립군은 3개 중대에 약 300여 명의 병력, 소총 200여 정과 권총 약 30정의 화력, 그리고 지휘부는 사령관에 선생, 부사령관에 주건, 참모장에 박경철로 구성되어 있었다. 선생이 지휘한 대한독립군은 1920년 초반 경부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연합하여 대규모 국내 진공작전을 감행하였다. 이 같은 대한독립군의 활동은 다른 독립군 부대에도 영향을 주어 끊임없이 국내 진공작전이 수행되었다. 그리하여 일제의 경비 강화에도 불구하고 독립군 부대들은 국내 진공작전을 계속 결행하였고, 그 전과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효과적이었다.

 

독립군의 국내 진공을 방어하기 위하여 군사 및 경찰력을 대폭 강화했음에도 대대적인 기습을 받게 된 일제는 ‘조선군’ 제19사단 소속 남양수비대의 1개 중대와 헌병경찰 중대로 독립군을 추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추격군은 삼둔자의 서남방에 매복해 있던 최동진의 군무도독부 소속 독립군에게 재차 격퇴당하고 말았다. 독립군에 의해 연달아 참패를 당한 일제는 이번에는 약 250명의 병력으로 ‘월강추격대’를 편성하여 1920년 6월 7일 봉오동(鳳梧洞)으로 진군해 왔다. 이곳에는 이미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선생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및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이 통합하여 조직한 대한북로독군부군(大韓北路督軍府軍), 그리고 이흥수가 이끄는 대한신민단이 일본군 침입자들을 맞아 전투를 벌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선생이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는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의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일본군 추격대를 유인하여 격파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 선생이 이끈 독립군 통합부대가 승전하게 된 요인은 지형을 이용한 전술 구사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독립정신이었다.

  • 1 봉오동 전투 지역 사진. 당시 일본군은 봉오동 상촌의 독립군이 잠복해 있는 포위망 가운데로 들어왔으며 홍범도의 명령에 따라 독립군은 동, 서, 북 3면에서 일본군을 협공, 격파하였다

     

  • 2 일본군이 작성한 봉오동 전투 약도로 독립군의 진공로를 표기하고 있다

 

 

 

<독립신문>(1920. 12. 25)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사살되고 수많은 인원이 중경상을 입었고, 독립군측은 4명의 전사자에 2명의 중상자만을 내었을 뿐이었다. 독립군의 빈번한 국내 진공전에 의해 큰 피해를 입게 된 일제는 1920년 8월 소위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작성하고 첫 단계로 ‘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 일제는 중국 마적을 매수하여 1920년 10월 2일 훈춘의 민가와 일본영사관 분관을 습격, 13명의 일본인과 한국인 순사 1명을 살해하고 3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일제는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중국측에 그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였다. 나아가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그들 자신이 직접 병력을 투입하여 마적단을 토벌하겠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중국측의 답변이 있기도 전에 일제는 대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독립군의 항전사상 가장 빛나는 승첩인 청산리대첩은 이 같은 일본군의 간도 침입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훈춘사건’이 있기 이전에 독립군측은 일본군의 간도 침입을 이미 간파하였다. 그리하여 독립군 부대들은 근거지에서 대규모의 일본군과 정면 승부할 경우 본영은 물론이고 간도지역의 한인들도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백두산록 서쪽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20년 10월 20일 선생의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북로군정서, 대한신민단, 국민회군 등의 독립군 부대는 백두산록으로 향하는 길목인 화룡현 2도구(道溝)와 3도구에 집결하게 되었다. 독립군의 이러한 동태를 첩보원의 보고에 의해 파악한 일제는 침략군의 일부를 2, 3도구 방면으로 진입시켜 독립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따라서 독립군과 일본군은 이곳에서 피할 수 없는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전투가 일어난 지역은 한인마을이 있던 청산리 일대였다. 첫 전투는 3도구 방면에서 포진하고 있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일본군 야마다(山田)토벌대 간에 10월 21일 오전 8시경부터 전개된 백운평 전투였다. 김좌진이 지휘하는 독립군은 일본군을 백운평 골짜기 깊숙이 유인하여 섬멸함으로써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선생이 사령관으로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는 2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 일본군에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선생이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와 북로군정서는 합동으로 10월 26일까지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천보산, 고동하곡 등지에서 일본군과 10여 회의 격전을 치렀다. 이들 전투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의 전과 및 피해는 자료마다 서로 다르지만 임시정부가 조사하여 발표한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의 전사자는 1,200여 명에 부상자는 2,100여 명이었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30여 명, 부상자 220여 명뿐이었다.

 

 

자유시 참변 후 한인 권익보호운동

이후 선생은 700여 명의 독립군 통합부대를 이끌고, 일본군 간도토벌대와 격전을 치르면서 1921년 1월 하순 우수리강을 건너 러시아령 이만을 거쳐 자유시로 들어갔다. 이 시기 연해주 각지의 한인 무장부대와 간도 독립군은 자유시 일대로 집결하고 있었다. 그것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한인 부대의 전격을 통합하고 볼셰비키 정부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항일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결한 한인 부대의 통솔권을 둘러싸고 지도부간에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국동공화국 한인부에서 조직한 전한군사위원회 산하의 대한의용군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후원 하에 조직된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지도하는 고려혁명군 간의 군권대립이 그것이다. 전한군사위원회는 상해 임정과 연관을 가지고 있었고, 중심 인물은 이용, 채영, 박일리아 등이었다. 군정의회에는 김하석, 오하묵, 최고려, 유동열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선생은 처음 대한의용군에 참여하여 부총재로 선임되기도 하였으나, 6월 초 예하 부대원 440여 명을 대동하고 군정의회측에 가담함으로써 고려혁명군 제3연대로 편성되었다.

 

6월 28일 군정의회 지도부는 완강한 대치상태에 있던 대한의용군의 무장해제를 결정하였다. 장갑차 등 중화기까지 동원한 고려혁명군은 대한의용군이 주둔한 자유시 부근의 수라세프카 일대를 포위한 채 대규모 공격을 가하여 쌍방간의 대충돌이 발생하였다. 자유시사변으로 불린 이 같은 한인 무장세력 간의 분쟁으로 사상자가 속출하고, 대한의용군 부대는 사방으로 흩어짐에 따라 독립군의 투쟁역량이 크게 훼손되었다. 자유시사변 이후 한인무장세력은 러시아 공산당의 강력한 통제로 인하여 활동에 많은 제약이 가해졌고, 이로 인해 선생도 항일무장투쟁의 꿈을 간직한 채 이만, 연해주 등의 집단농장, 협동농장 등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농민층의 생활 향상과 한인동포들의 권익보호에 힘썼다. 그 후 1937년 9월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선생은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봉오동, 청산리전투서 일본군에 대승

 

 

 

 

 

 

 

 

 

 

 

 

 

 

 

 

 

 

 

 

 

1.홍범도의 출생연도.

현재 소련 원동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된 그의 홍범도일지에 의하면 1868년 8월 27로 명기되어있으며 그의 출생지 또한 일지에 의하면 평양 서문안 문열사 앞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홍범도장군의 본관이 남양 홍씨로 남양 지금의 경기도수원과 화성일 때의 옛 지명이었고, 여천(汝千)이라는 호는 뒷날 의병장이 되어서야 가지게 되었다.

2.성장과정.

홍범도장군은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아홉살 때 아버지마저 별세하여 고아가 되었다. 그후. 15세까지 머슴을 살았으며1883년 나이 두살을 올려 평양 1883년부터 1887년까지 보병 부대에서 나팔수로 복무하였으나 군교들의 부정부패와 사병들에 대한 학대를 보다 못해 한사람을 구타하고 병영을 탈영하였으며 이때의 군영생활은 이후 그가 무장 항일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는데 있어서 전술적인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본다.

1887년부터 1890년까지 황해도 수안 지방 부근의 총평 동네 종이공장에서 일을 하였고 이곳에서도 임금문제로 사주와 싸운 다음 금강산에 있는 신계사로 들어가 1890년부터 1892년에 신계사( 강원도 고성군 외금강면 창대리)에서 지담대사 상좌로 수행하면서 간단한 한자나 한글을 깨우쳤으며 이때 지담 대사( 이순신장군의 후손)를 통해 항일의식을 전수 받았을 것으로 추정 된다.


홍범도장군은 얼마 동안 전전한 끝에 함남 단천으로 가서 금을 캐는 광산의 노동자로 2년간 일하고 그곳에서 삼수 출신의 부인과 결혼을 하였으며, 이것이 인연이 되어 1893년경에 다시 삼수로 이거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출중한 사격술이 인정되어 산포수대(山砲手隊)에 들어가 직업적인 산포수 생활을 하였고 얼마 뒤 다시 북청으로 이거, 그곳의 산포수조직인 안산사포계(安山社砲契)에 가입, 동료들의 인정을 받아 포연대장(捕捐 大將)에 뽑혔다.

이는 관리들과 교섭하여 포획물의 일정량을 세금으로 정하고 이를 납부하는 일을 담당하는 직책으로 그는 1907년 의병항전을 개시할 때까지 14년 동안 삼수, 갑산, 풍산, 북청 일대에서 산포수 생활을 하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3.홍범도 장군의 의병활동시작.

홍범도장군이 의병 활동을 시작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1907년 9월 3일 일제가 공포한 '총포급화약류단속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의 졸속한 시행에 있었다. '총포 및 화약류를 판매하는 자는 관찰사의 허가를 얻어야만 한다' 는 법령은 군대해산에 뒤이어 모든 한 국민을 완전히 무장 해제시켜 무력저항을 미연에 방지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홍범도장군은 안산사포계의 동료들과 함께 일제의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고 즉각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홍범도장군의 인솔하에 약 70여명의 산포수들은 머리에 혁관(革冠)을 쓰고 1907년 11월 15일 북청군 안평사(安坪社) 엄방동(嚴方洞)에서 회집하여 항일 의병전에 나설 것을 천명하였다.

그 이튿날 거사의 성공을 비는 혈제(血祭)를 지내고, 일진회 회원으로 친일파인 안산(安山)면장 주도익(朱道翼)을 총살하고, 계속해서 인근의 부일배들을 소탕하였고 이로써 홍범도장군은 항일독립운동의 대열에 나서게 되었으며, 이후 일생 동안 항일무력전선에 온갖 정력을 쏟았던 것이다. 70여명의 산포수를 근간으로 봉기한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는 점차 광산노동자, 해산군인, 화전민, 토막민(土幕民) 등의 의병지원자를 받아들여 이듬해에는 1천여 명에 달하는 대 부대가 되었다. 이에 따라 거의 초기에 7지대로 나뉘어 십장제(什長制)로 편제되어 있던 의병부대를 이때에 와서는 구한국군의 편제를 모방해서 개편하였다.

4.홍범도장군 의병부대의 최초의전투는 후치령(厚峙嶺)전투로 알려져있다.

1907년 11월 22일 홍범도장군의 의병들은 북청 후치령(厚峙嶺)에서 매복하였다가, 기만적인 방법으로 무기를 회수해 가던 일군 무기수송대을 섬멸시켜 버렸다. 이를 이어 홍범도장군의 의병은 역시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갑산으로부터 북청으로 향하던 우편마차 호위 일군을 공격, 전멸시켰으며 그 다음 날에도 홍범도장군의 의병은 후치령에 잠복, 북청에서 혜산진으로 향하던 일군들을 전멸시키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이와 같은 의병들의 잇다른 승리에 놀란 일군 북청수비대는 궁부(宮部) 대위의 지휘하에 2개 소대 52명을 후치령으로 급파, 홍범도장군의 의병을 공격케 하였다.그러나 홍범도장군의 의병은 이를 알고 11월 25일 후치령에서 잠복, 대기하고 있다가 역시 유리한 지형에서 유격전으로 이들을 격퇴시켜 승리를 거두었다.

후치령 전투를 시발로 홍범도 의병부대는 삼수, 갑산, 북청 등지에서 험산준령을 타며 유격전을 펼쳐 이들을 추격해 오는 일군토벌대를 맞아 연전연승을 거두어 점차 그 명성을 더해 갔다.

5.홍범도장군 의병활동의 고비와 일본군에의한 일가족 몰살

그러나,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는 1908년 3월 차도선(車道善), 태양욱(太陽郁) 등 의병수뇌부가 일제의 회유공작에 말려 수난을 겪게 되었고홍범도장군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차도선, 태양욱 양인은 '귀순'을 원하던 2백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1908년 3월 17일 일군에게 '귀순'해 버렸으나 일군들은 무장해제 유예기간 1개월의 약조를 지키기는커녕 '귀순'의병들을 즉각 무장해제시켜 버렸고 이에 저항하던 태양욱은 총살되었고, 차도선 등은 홍범도를 유인할 목적에서 피체, 투옥되었습니다.

이들의 '귀순'은 의병부대의 전력에 중대한 손실을 가져와 항일전 수행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이 무렵 일제는 홍범도장군을 위협, 유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의 아내와 아들 용범(龍範) 등 가족을 구류시켜 인질로 삼는 비열하고도 잔인한 짓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홍범도장군은 구국대의를 위해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의병부대의 전열을 가다듬기에 바빴고 결국 그의 가족(부인과 큰아들)은 끝내 일군에게 희생되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그후 불굴의 투지로 의병부대의 재편성에 착수한 홍범도장군은 1908년 4월부터 5월 중순까지 삼수, 갑산, 무산, 북청 일대를 몸소 돌아다니면서 아직 의병부대에 가입하지 않은 산포수들과 청년들을 권유하여 의병에 가담시켰다.


그 결과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는 재편되어 1908년 4월 말에는 5백여명, 다시 5월 중순에는 650여 명에 달해 새로운 항일전을 펼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홍범도장군은 1908년 4월부터 의병항전을 재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같은해 12월 노령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길 때까지 삼수, 갑산, 장진(長津), 북청 등지를 오가며 각처에서 일군과 조우,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일진회 회원 등을 비롯한 부일주구들을 처단, 민족반역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기도 하였다.


홍범도장군은 한반도 북부지방의 의병항일전을 주도하는 핵심인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이 일대의 주민들로부터는 열렬한 추앙을 받게 되었다.


이때 당시 함경도 북부지방에서 그의 의병부대의 항일전을 찬미하며 불리던 노래가
“날으는 홍범도가“이다.

 

 

 

 

 

 

 

 

 

 

 

 

 

 

 

 

 

 

 

 

이처럼 홍범도장군이 도처에서 일군들을 격파하며 의기(意氣)를 드높히자, 일제는 크게 당황해 일군 동부 및 북부수비관구 전 병력을 동원하여 6, 7월 2개월을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 '대토벌' 기간으로 정해 놓고 홍범도 의병 '토벌'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홍범도장군은 신속한 유격전술을 효과적으로 벌여 이들의 예봉을 피해가며 영웅적인 항전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할수록 홍범도 의병부대는 전력이 점차 소모 되었다. 한 기록에 의하면,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가 1907년 11월 15일 봉기 이후 탄약 고갈로 고통을 받던 1908년 9월까지 일군과 약 37회의 대소 회전을 치뤘다고 한다.

홍범도장군이 연해주로 건너간 것은 무기와 탄약을 구입하는 일방, 연해주 일대의 의병부대 및 남한의 의병부대와도 연락을 취해 대규모 의병항전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그는 그러한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가 없었다. 안중근(安重根), 엄인섭(嚴仁燮) 등이 인솔하는 의병이 국내진입작전에서 일군에 패한 뒤 연해주의 의병항전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었던 까닭에 그의 의병규합노력은 여건상 불리한 형편이었고 결국홍범도장군은 1910년 3월 마침내 일단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서간도의 장백현(長白縣) 왕개둔(汪開屯)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1913년 그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노령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겼고이로써 홍범도장군의 의병항전은 종료되었다.

 

홍범도 洪範圖

 

홍범도(洪範圖)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뚜렷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인물이다. 홍범도는 의병항쟁과 항일독립전쟁을 이끌며, 日帝의 침략에 항거하여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던 김좌진 (金佐鎭), 지청천 (池靑天)과 더불어 무력 독립운동의 3대 영웅 (三大英雄)으로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출생(出生)과 성장(成長)에 관한 기록이 분명치 않고, 다만 전설적인 일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날으는 홍범도가

 

 

 

홍대장이 가는 길에는 해와 달이 명랑한데 / 왜적군대 가는 길에는 눈과 비가 내린다 /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 오연발 탄환에는 군물이 돌고 / 화승대 구심에는 내굴이 돈다 /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 괴택이 원성택 중대장님은 / 산고개 싸움에서 승리하였오 /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 홍범도 장군님은 동산리에서 / 왜적수사대 열 한 놈을 몰살시켰소 /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 도상리 김치갱 김도감님은 / 군량도감으로 당선되었다네 /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 왜적놈이 게다짝을 물에 버리고 / 동래 부산 넘어가는 날은 언제나 될까 /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 왜적군대 막 쓰러진다.

 

 

 

 

홍범도의 출생

 

홍범도 (洪範圖. )의 출생연도는 여러 설이 있으나, 현재 러시아 원동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1868년 8월27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출생지 또한 평안남도 양덕(陽德), 평안북도 자성(慈城), 평양 외성리(外城里) 등 여러 설이 있으나, 평양에서 출생하였다는 설이 타당하다는 의견이 많다. 뒷날 의병장(義兵將)이 되어서야 '여천(汝千)'이라는 호(號)를 가지게 되었다.

 

홍범도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죽었고, 그가 9살 때 아버지마저 사망하였다. 3년간 삼촌 밑에서 지낸 뒤 생활이 어려워지자 이웃의 지주(地主)집에 들어가 머슴을 살았다. 일자(一字) 배움도 없이 어린 시절을 남의 집 머슴살이로 지냈던 것이다.

 

그 후 홍범도는 고향을 떠나 각지를 전전하던 중 황해도 수안군 수구면 신현리 (遂安郡 水口面 新峴里)의 어느 제지소(製紙所)에 노동자로 5년간 (1883~1887) 정착하게 된다. 그러나 오랫동안 밀린 임금(賃金)을 요구하자, 주인은 오히려 숙식(宿食)비용을 내라고 하는 탓에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그만두었다. 1887년 경 홍범도는 제지소를 그만두고 군인이 되고자 나이를 두 살 올려 평양진위대(平讓鎭衛隊)에 입대하였다. 여기서 그는 사격술을 익힐 수 있었다. 그러나 구한말 한국군대의 부패한 모습과 사병들에 대한 학대를 보고는 더 이상 군인 생활을 할 수가 없어 장교 한 사람을 구타한 후 탈영(脫營)하였다. 하지만 이때의 군인생활은 이후 그가 무장항일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는데 있어서 전술적인 도움을 주었으리라 추측된다.

이후 '홍범도'는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1890년부터 1892년까지 신계사(新溪寺 ... 강원도 고성군 외금강면 창대리)에서 '지담대사' 상좌(上座)로 수행하면서 간단한 한자나 한글을 깨우쳤으며, 이때 지담대사 (이순신 장군의 후손)를 통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활약을 들으면서 항일의식을 전수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홍범도는 신계사(新溪寺)를 떠나 다시 각지를 전전하다가 단천으로 가서 금(金)을 캐는 광산에서 2년간 노동을 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삼수(三水) 출신의 부인과 결혼하였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삼수(三水)로 이사하였다.

 

 

 

 

 

산포수 山砲手

 

 

 

 

 

 

 

 

 

 

삼수(三水) 출신의 부인과 결혼을 인연으로 삼수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출중한 사격술이 인정되어 홍범도는 산포수대(山砲手隊)에 들어가 직업적인 산포수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북청(北靑)으로 이사, 그곳의 산포수 조직인 안산사포계(安山社砲契)에 가입, 동료들의 인정을 받아 포연대장(捕捐大將)에 뽑히게 되었다. 포연대장(浦捐大將)은 관리들과 교섭하여 포획물의 일정량을 세금으로 정하고 이를 납부하는 일을 담당하는 직책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1907년 의병항전(義兵抗電)을 개시할 때까지 14년 동안 삼수, 갑산, 풍산, 북청 일대에서 산포수 생활을 하며 비교적 안정된 분위기에서 지낼 수가 있었다.

 

 

 

 

 

의병활동 義兵活動

 

홍범도가 의병항전에 투신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07년 9월6일 일제가 공포케 한 " 총포급화약단속법 (銃砲及火藥團束法) "의 졸속한 시행에 있었다. " 총포 및 화약류를 판매하는 자는 관찰사의 허가를 얻어야만 한다 " 및 " 총포 및 화약류는 경찰관서의 인가를 받아야만 소유할 수 있다 "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이 법은 한국 군대 해산에 뒤이어 모든 한국인을 완전히 무장 해제시켜 무력저항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즉, 이 법은 한국군의 강제 해산 이후 전국에서 의병의 불길이 거세지자 일제는 의병(義兵)의 무장봉기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 공포한 것으로, 이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된 것은 산악지역에서 수렵으로 생계를 꾸리는 산포수들이었다.

 

일제의 무기, 탄약 회수반이 함경도의 산포수(山砲手)들을 찾아와서 총기류(銃器類)의 납부를 요구한 것은 1907년 10월의 일이었다. 함경도 일대에는 지역적 특성상 무기를 소지한 산포수들이 많았으므로, 일제가 특히 신경을 쓰던 지역이었다. 이에 日帝는 북청 각면(各面)의 면장들로 하여금 산포수(山砲手)들의 무기(武器)를 회수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홍범도는 안산사포계(安山社砲契)의 동료들과 함께 일제의 이러한 요구를 거부한 채, 즉각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즉 홍범도의 인솔 하에 약 70명의 산포수들은 머리에 혁관(革冠)을 쓰고, 1907년 11월15일 북청군 안평사 (安坪社) 엄방동(嚴方洞)에서 회집(會集)하여 항일의병전에 나설 것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튿날에는 거의(擧義)의 성공을 기원하는 혈제(血祭)를 지내고, 일진회(日進會) 회원으로 친일파인 안산면장(安山面長) 주도익(朱道翼)을 총살하고, 계속해서 인근의 부일배(附日輩)들을 소탕하였다. 이로써 홍범도는 항일독립운동의 대열에 나서게 되었고, 이후 일생 동안 항일무력전에 온갖 정력을 쏟았던 것이다.

 

 

1,000여 명의 의병부대

 

70여 명의 산포수(山砲手)들을 근간으로 봉기한 홍범도의 의병부대는 점차 광산 노동자, 해산된 군인(軍人), 화전민(火田民), 토막민(土幕民) 등의 의병 지원자를 받아들여 이듬해에는 1천여 명에 달하는 대부대가 되었다. 이에 따라 거의 초기에 7지대로 나뉘어 십장제(什長制)로 편제되어 있던 의병부대를 이때에 와서는 구한국군의 편제를 모방하여 개편하였다.

즉, 분대 (25명), 소대 (50명), 중대(100~150명)의 계통으로 편제하였던 것이다. 또한 군무를 관장하는 별도의 부서를 두어 이를 효과적으로 운영하였다. 군율(軍律)을 관장하는 도감사(都監司), 이를 집행하는 군중기찰(軍中機察), 군량의 보급과 운반을 맡은 군량도감(軍糧都監), 일본군의 동정을 정탐하는 유사(遊士) 등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병부대의 지휘관으로는 의병장(義兵長)을 두고, 그 밑에 부의병장(副義兵長)을 두어 조직체계를 완비하였다.

후치령 전투 厚峙嶺 戰鬪

 

 

 

 

 

홍범도 의병부대의 최초의 전투는 후치령(厚峙嶺) 전투이다. 1907년 11월22일, 의병들은 북청(北靑) 후치령에서 매복하였다가, 기만적인 방법으로 무기를 회수해 가던 일본군 무기수송대를 섬멸시켜 버렸다. 이어서 홍범도 의병부대는 역시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갑산(甲山)으로부터 북청(北靑)으로 향하던 우편마차 호위 일군(日軍)들을 전멸시키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그 다음 날에도 홍범도 의병부대는 후치령에 잠복, 북청에서 혜산진으로 향하던 일본군을 전멸시키고 각종 무기를 노획하였다. 이와 같은 의병들의 잇달은 승리에 놀란 일본군 북청수비대는 궁부(宮部)대위의 지휘 하에 2개 소대 52명을 후치령으로 급파, 홍범도 의병부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홍범도 의병은 11월25일 후치령에서 잠복, 대기하고 있다가 역시 유리한 지형에서 유격전으로 이들을 격퇴시켜 승리를 거두었다.

 

 

 

 

 

 

 

연전연승 連戰連勝

후치령 전투를 시발로 홍범도(洪範圖) 의병부대는 삼수, 갑산, 북청 등지에서 험산준령을 타며 유격전을 펼쳐 이들을 추격해 오는 일본군 토벌대를 맞아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두어 점차 그 명성을 더해 갔다. 의병(義兵)들은 한때 삼수갑산(三水 甲山)을 차례로 점령,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대승하기까지 하였다.

유격전에서는 지역주민들의 협조가 필수적인 요건이 된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그곳 주민들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아, 군량미를 조달하는 일이나, 적의 동정을 파악, 첩보활동을 하는일 등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또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부대의 이동을 신속히 하여 군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는 지휘자의 능력이 요구되는데, 홍범도는 정확한 판단력과 탁월한 지휘 통솔력으로 그러한 능력을 십분 발휘, 매 전투마다 승리를 쟁취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배 의병장 유인석(柳麟錫)은 승리를 찬양하는 글을 홍범도에게 보내면서 ... 족하(足下 .. 홍범도를 지칭)는 대의(大義)를 품고 의거(擧義)하여 충모용략(忠謨勇略)으로 사람들을 신복케 하였으니, 전후 연전에서 왜적을 토멸하여 성명이 일국을 진동시켰다 ..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일본의 회유작전

 

그러나 홍범도 의병부대는 1908년 3월 차도선(車道善), 태양욱(太陽郁) 등 의병부대 수뇌부가 일제의 회유공작에 말려 수난을 겪게 된다. 일제는 무력만으로는 홍범도 의병을 격파할 수 없음을 깨닫고 갑산, 장진군수를 내세워 치밀한 회유공작(懷柔作戰)을 펼쳤다. 일제는 의병들이 "귀순(歸順) "해 올 경우, 일개월 간의 유예기간을 둔 뒤, 아무런 조건없이 자유인의 신분을 보장하겠다는 제안을 해와 , 의병 수뇌부들 간에 갈등을 빚어내었던 것이다.

홍범도는 이것이 일제의 간계(奸計)임을 즉각 간파하고 완강히 반대하였으나, 차도선(車道善)과 태양욱(太陽郁) 등은 이러한 제안을 수락, 후일을 도모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의병들은 탄약과 군량미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겼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이 간절했던 것이다.

홍범도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차도선, 태양욱 두 사람은 귀순을 원했던 200여 부하들을 이끌고 1908년 3월17일 일본군에게 귀순해 버렸다. 그러나 일본군은 무장해제 유예기간 1개월의 약조를 지키기는 커녕, 귀순 의병들을 즉각 무장해제시켜 버렸다. 이에 저항하던 태양욱(太陽郁)은 총살되었고, 차도선(車道善) 등은 홍범도를 유인할 목적으로 체포, 투옥되었다. 그 후일본군 구치소를 탈출한 차도선은 자신의 행동을 크게 후회하고, 다시 홍범도 휘하에 들어가 장진 부근에서 의병전을 계속 펼쳐 나갔다.

 

 

 

 

차도선 車道先

 

 

 

 

 

차도선(車道善)과 홍범도(洪範圖)는 1907년 11월 15일, 68명의 포수가 모인 가운데 북청군 안평사 언방골에서 무장 봉기를 선포하였다. 당시 44세로 연장자인 차도선(車道善)이 도대장(都大將), 39세인 홍범도가 부대장(副大將)을 각각 맡았으며, 의병부대 이름은 ' 차도선 의병대 ' 또는 ' 홍범도 의병대 ' 등으로 불렸다. 이들은 봉기 다음 날인 16일 친일파 모임인 일진회(一進會) 회원이며 안산면장인 주도익(朱道翼)을 처단하고, 22일, 23일 이틀 동안 북청 후치령에서 일본군과 순사 등 10여 명을 사살한다.

차도선, 홍범도 의병부대가 봉기한 이후 3개월 동안 일본군은 10여 차례에 걸쳐 토벌에 나섰으나, 소탕은 커녕 피해가 막심하였다. 일본군은 2월부터 3월까지 의병의 가족을 인질(人質)삼아, 의병이 산에서 냐려오면 식량을 준다는 등 선무공작(宣撫工作)과 귀순공작(歸順工作)을 전개하였다. 당시 의병부대는 탄약이 떨어지고 삭량난에 처하는 등 어려운 시기이었다. 1908년 3월 12일 서간도(西間島) 임강현장(臨江縣長)에게 보낸 문건에는 당시의 급박한 상황이 담겨 있다. 총대장 격인 모사장(謨事裝) 박충보(朴忠保)와 도대장(都大將) 차도선, 부대장(副大將) 홍범도 명의로 보낸 공함(公函)의 내용은 이러하다.

 

 

 

 

 

 

 

敬啓者 淸韓兩國 本是脣齒之勢也 脣亡則齒寒 傍觀可乎 扶傾可乎臆 彼倭酋 何敢猖獗於 兩境哉 甲午之變 貴國之所憤 丙申之變 我國之所恥 ------- 청나라와 대한민국은 본래 입술과 이빨의 관계로서, 입술이 없으면 이빨이 시리 듯, 어찌 수수방관만 하겠는가. 倭가 감히 창궐하여 두 나라의 국경을 범하였으니, 甲午의 變은 귀국으로서는 분노이고, 丙申의 變은 우리나라의 수치가 아니던가

 

所憤所恥 豈不報雪 而俯其首廳其命 故離我國偏在海隅之偏小 豈無一二人義士特倡小義

然器械之利鈍 士卒之鍊習不足不及 故玆敢仰請 照亮後器械千機特許之切要 ----- 그 분노와 수치의 원수를 어찌 갚지 않으리오. 고로 머리를 숙여 명을 받들겠사오나, 우리나라가 편벽한 바다 한 쪽에 자리하고 국토 또한 작으며, 한 두 사람의 義士가 거사를 창의하였으나 무기가 낙후하고 병사들의 훈련 또한 매우 부족한 형편이므로 특히 청을 드리는 바이다. 공문을 보신 후 무기 千 기를 허락해주기를 요청하는 바이다.

 

 

차도선(車道善)과 적지 않은 의병(義兵)들이 굶주려 죽어가는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하산하였다. 차도선은 홍범도의 반대를 무릎쓰고 일제의 회유책(懷柔策)을 역이용하여 엄중한 위기를 넘기겠다는 계산으로 휴전(休戰) 제안을 띄웠고, 이를 담판 짓기 위하여 3월7일 25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일본군 '오쿠무라 중위'를 만났다. 그러나 일본군은 약속을 어기고 바로 무장해제(武將解除)시켰으며, 이에 저항하는 좌대장(左大將) 태양욱(太陽旭)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은 홍범도(洪範圖)를 유인하기 위하여 차도선을 감금하였다. 2개월 넘도록 갑산 헌병분견소에 갇혀 있던 차도선은 5월 7일 탈출하여 홍범도 부대에 합류하였다. 홍범도는 과오(過誤)를 반성하며 백의종군하겠다는 차도선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차도선(車道善)은 도대장(都大將)이 아닌 의병(義兵)으로 계급장을 떼고 무장투쟁에 다시 나섰다.

 

 

일본군은 차도선(車道善)이 탈주하자 그의 집에 불을 지르고,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차도선의 아내와 친형(親兄) 차도심에게 인두질 등 고문을 가하였다. 고문 끝에 풀려난 아내는 1916년 3남1녀의 자식들과 조카 차원식(차도심의 외아들)을 데리고 중국 무송현으로 떠났다. 가는 길에 굶주림이 심해지자 외동딸을 민며느리로 주었다.

 

차도선은 1938년 3월, 일제에 참변을 당한다. 중국 동북 3성에 괴뢰만주국(傀儡滿洲國)을 세운 일제가 무장투쟁의 근거가 될 수있는 마을을 소개(疎開)시키기 위해 두지동 마을 전체에 불을 지른 것이다. 고령의 독립운동가 (당시 74세)는 자신의 집과 마을이 잿더미로 주저앉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인근 동대툰 집단부락으로 소개(疎開)된 차도선은 새로 살 집을 짓다가 병을 얻어 1939년 2월8일 무송현 추수동 동대툰에서 75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의병부대의 재편성

 

 

 

차도선, 태양욱 두 사람은 거의(擧義) 이후 줄곧 홍범도와 함께 의병부대를 지휘해 온 핵심인물이었으므로, 이들의 " 귀순(歸順) "은 의병부대 전력에 중대한 손실을 초래하여 항일전 수행에 큰 타격을 주었다. 또한 이 무렵 일제는 홍범도을 위협, 유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의 아내와 아들 용범(龍範) 등 가족들을 구류시켜 인질(人質)로 삼는 등 비열하고도 잔인한 짓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홍범도는 구국대의(救國大義)를 위하여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의병부대의 전열을 가다듬기에 열과 성을 다하였다. 그의 가족은 끝내 일본군에게 희생되는 비운(悲運)을 맞고 말았다.

 

의병항전의 再開

 

 

가족들이 일본군에 의해 희생된 후 그는 불굴의 투지로 의병부대 재편성에 착수한 홍범도는 1908년 4월부터 5월 중순까지 삼수, 갑산, 무산, 북청 일대를 몸소 돌아다니면서 아직 의병부대에 가입하지 않은 산포수(山砲手)들과 청년들을 권유하여 의병에 가담시켰다. 또한 의병부대를 소부대로 나누어 이 지방의 각 마을에 내려가서 남은 무기를 수집하고, 식량과 금품을 기부받아 군수물자를 비축하기도 했다. 그 결과 '홍범도 의병부대'는 재편되어 1908년 4월 말에는 5백여 명, 다시 5월 중순에는 650여 명에 달하여 새로운 항일전을 펼칠 수 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한반도 북부지방의 의병항일전(義兵抗日戰)을 주도하는 핵심인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이 일대의 주민들로부터는 절대적인 추앙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홍범도가 도처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여 의기(義氣)를 드높히자, 일제는 크게 당황하여 일본군 동부 및 북부수비관구 전 병력을 동원하여 6, 7월 두 달 동안을 홍범도 의병 " 대토벌(大討伐) " 기간으로 정해 놓고, 전력을 기울여 의병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홍범도는 신속한 유격전술을 효과적으로 벌여 이들의 예봉을 피해가면서 영웅적인 항전을 계속해 나갔던 것이다.

 

 

러시아, 沿海州로 이동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홍범도의 의병부대는 전력(戰力)이 점점 약해져 갔다. 그 가운데에서도 연이은 격전으로 인해 탄약이 점차 고갈되어 갔다는사실은 홍범도의 의병항전에 가장 커다란 제약으로 작용하였다. 7월에 접어들면서 탄약사정은 더욱 악화되어 홍범도 의병부대는 일본군과의 대규모 접전을 피해 삼림(森林) 속으로 은신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홍범도는 삼수, 갑산, 무산 등지의 삼림 속에 의병들을 잠복시켜 놓은 채 1908년 12월 말, 20여 명의 부하만을 데리고 러시아령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한 기록에 의하면, 홍범도 의병부대가 1907년 11월 15일 봉기 이후 탄약 고갈로 고통을 받던 1908년 9월까지 일본군과 약 37회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뤘다고 한다.

 

 

홍범도가 연해주로 건너간 것은 무기와 탄약을 구입하는 한편, 연해주(沿海洲) 일대의 의병부대 및 한국의 의병부대와 연락을 취하여 대규모 의병항전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 없었다. 안중근(安重根), 엄인섭(嚴仁燮) 등이 인솔하는 의병이 국내진입작전(國內進入作戰)에서 일본군에 패한 뒤 연해주의 의병항전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었던 까닭에, 그의 의병 규합노력은 여건상 어려운 상황이었다.

 

서간도, 왕개둔 (汪開屯)으로 망명

 

연해주에서 의병 규합노력이 좌절된 후, 홍범도는 마침내 1910년 3월, 일단의 부하를 거느리고 서간도의 장백현(長白縣) 왕개둔(汪開屯)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이 무렵 홍범도의 의병항전을 만류하기 위하여 홍범도에게 보낸 의병장 유인석(柳麟錫)의 다음과 같은 편지에서, 항전(抗戰)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형편을 짐작할 수 있다.

 

 

듣건데, 이제 그대가 千 명도 안 되는 병력으로 항일전에 나가고자 한다니, 잠간의 전성(戰聲)을 바라는 것인가 ? 아니면 일을 이루기를 바라는 것인가 ? 일을 이루기를 바란다면, 그처럼 적은 병력으로 저 세계 최강의 큰 도적들과 대적하는 것은 반드시 일을 이룰 수 없으리라. 그것은 지(智)가 아니라 다만 몽매함이며, 용(勇)이 아니라 다만 어리석음일 뿐이다. 이제 일을 이루고자 한다면, 한 두 사람의 지모나 용력으로 可한 것이 아니고 일국인(一國人)의 꾀와 힘을 합한 연후에 가하리라

그러나 홍범도는 망명지에서도 의병항전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한중국경(韓中國境)의 중국영토 안도현(安圖縣) 방면에다 20에이커에 달하는 광대한 개간지에 부하 수 백명을 집단 이주시켜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의병항일전에 대비하는 한편, 농사와 사냥으로 그 경비를 충당케 하였다. 둔전병(屯田兵) 제도와 흡사한 집단생활을 한 것이다.

 

 

 

 

 

 

 

 

이처럼 망명지에서 지내던 도중에 홍범도 의병부대는 1911년 3월, 박영신(朴永信)을 선봉장으로 하여 함경북도 鏡原의 세천동(細川洞)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는 의병항전을 벌였다. 또한 홍범도는 이듬해에 평안도 의병장 채응언(蔡應彦)과 장백부(長白府)에서 회동하고 십장 심석만(沈石萬) 등을 국내에 밀파, 일본군의 경비상황을 조사케 하는 등 무장투쟁을 집요하게 벌였다.

 

 

그러나 홍범도의 왕개둔 근거지는 경재적인 압박을 심하게 받아 더 이상 유지되기가 어려워졌다. 이처럼 상황이 점차 악화되자, 그는 의병항전을 중단한 채 근거지를 옮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1913년 그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다시 러시아령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로써 홍범도의 의병항전은 종료되었고, 이후 그는 독립군으로 변신, 무장항일전을 지속적으로 펼쳐 나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국내에서 의병항전을 벌이던 인물들이 1910년 국치 이후 만주, 노령 등지로 망명, 독립군으로 전환하여 무장독립투쟁을 계속하던 일반적 경향을 대변하는 전형적인 예가 되고 있다.

 

 

 

義兵에서 獨立軍으로

 

 

 

1913년 노령 연해주로 옮겨간 홍범도 일행은 블라디보스톳 등지에서 노동회(勞動會)를 조직하고, 시베리아 철도 부설공사 등 각종 노동현장에서 일하면서 무장항일투쟁의 적기(適期)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 거족적인 항일기운이 일게 되자, 홍범도는 즉각 독립군 조직에 착수하여 그해 3~6월 사이에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을 창설하게 이르렀다. 그리고 그해 8월에는 간도의 백두산 부근으로 근거지를 옮겨왔다.

 

 

 

 

 

 

 

대한독립군 大韓獨立軍

 

 

 

 

 

대한독립군은 1919년 국내에서 일어난 3.1운동 이후, 홍범도의 주도 하에 舊 의병 출신과 沿海州와 간도(間島)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중심으로 창설한 항일 독립군 부대이다. 그리고 그해 8월에는 간도의 백두산 부근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間島로 근거지를 옮긴 직후인 8월에 독립운동가들의 숙원이었던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혜산진(惠山鎭)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 이들을 섬멸시켰다. 이것은 3.1운동 이후 전개된 최초의 국내진입작전으로, 이후 왕성하게 펼쳐지는 독립군 항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이어 10월에 대한독립군은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에 진입하여 그곳을 점령하고 자성(慈城)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일본군 70여 명을 살상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독립군 통합

 

이듬해 1920년 봄이 되자,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대규모 국내진입작전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분산되어 있는 독립군단을 하나로 통합, 군사력을 집중시키는 일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었다. 이에 홍범도는 독립군단 통합에 착수, 우선 大韓國民會의 國民軍과 대한독립군을 통합하였다. 간민회(墾民會)의 자치와 전통을 계승, 間島에서 결성된 대한국민회는 3.1운동 이후 간도지방에서 가장 세력이 큰 항일단체로 부상하면서, 군무위원 안무(安武)를 지휘관으로 하는 國民軍을 편성하고 있었는데, 이를 홍범도의 주장에 따라 대한독립군과 통합한 것이다.

 

그 통합된 군단의 행정과 재정은 국민회가 관장하였으며, 군무는 대한독립군을 홍범도가. 국민군을 안무가 담당하여 지휘하도록 하고, 군사작전을 전개할 때에는 홍범도가 두 군단을 " 정일제일군사령관 (征日第一軍司令官) "이라는이름으로 통수케 하였다. 이어 征日第一軍은 최진동(崔振東)이 이끄는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의 통합도 이룩하였다.

 

 

결국 홍범도 등의 독립군 통합 노력에 의하여 1920년 5월 28일에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대한국민회가 주도하던 국민군 그리고 최진동이 이끌고 있던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ㅎ ㅏ나의 독립군단인 대한군북로독군부 (大韓軍北路督軍府)를 조직하고 화룡현(和龍縣) 봉오동(鳳梧洞)에 병력을 집결시키면서 강력한 국내진입작전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 무렵 대한군의 병력은 군무도독부 系가 약 670명, 홍범도와 安武 系가 약 550명으로 도합 1,200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봉오동 전투 鳳梧洞 戰鬪

 

 

 

 

 

홍범도의 주도로 1920년 5월28일 홍범도의 < 대한독립군 >과 대한국민회가 이끌던 < 국민군 >, 그리고 최진동의 < 군무도독부 >가 연합하여 大韓軍北路督軍府로 독립군 통합을 이루고, 원래 군무도독부의 軍營이었던 화룡현(和龍縣) 봉오동에 병력이 집결되면서 강력한 국내진입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삼둔자 전투 三屯子 戰鬪

 

 

위와 같이 통합된 독립군단은 1920년 6월7일에, 청산리 대첩과 더불어 독립군 항전사에 영원히 기록될 봉오동 승첩을 거두게 된다. 봉오동 승첩은 그 전단이 독립군단이 수행하던 통상적인 국내진입작전에서 비롯되었다.

1920년 6월 4일 새벽, 박승길(朴承吉)이 지휘하는 30여 명으로 구성된 일단의 독립군 소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鐘城) 북방 5里 지점의 강양동(江陽洞)으로 진입, 일본군 헌병순찰소를 격파한 뒤, 날이 저물어 두만강을 건너 귀환하였다. 이 패배를 설욕하고자, 일제는 남양수비대 (南陽守備隊) 소속의 1개 중대와 헌병경찰 중대로 하여금 독립군을 추격하게 하였으나, 삼둔자에 이르러 독립군 부대를 발견하지 못하자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도리어 이들은 독립군의 반격으로 전멸되고 말았다. 이것이 봉오동 전투의 序戰에 해당하는 삼둔자 전투이다.

 

 

 

일제는 삼둔자 전투의 대패 소식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함경남도 나남(羅南)에 사령부를 두고 두만강을 수비하던 일본군 제19사단은 즉시 안천(安川)소좌가 인솔하는 " 월강추격대 (越江追擊隊) ... 220명 "를 편성하여 두만강을 건너 중국령 北間島에 진입, 독립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들은 상부로부터 시달 받은 작전명령에 따라 안산(安山) 방면을 거쳐 고려령(高麗嶺)을 향해 곧바로 봉오동 입구로 진입하여 왔다.

 

 

봉오동 승첩 鳳梧洞 勝捷

 

봉오골 이라고도 불리던 봉오동은 사면이 야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의 천영요새지이었고, 입구에서 오지까지는 25里로서, 그 골짜기 입구부터 하동, 중동, 상동의 마을이 30 ~ 60호 씩 몰려 살던 곳이었다.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은 일본군 추격대의 진로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만반의 요격계획을 세워

포위망을 쳐 놓고 이들의 진입을 기다렸다. 즉, 봉오동 주민들을 모두 대피시킨 뒤, 험준한 사방고지에 독립군 각 중대를 매복, 배치하여 일본군 추격대를 유인, 포위하여 일만타진한다는 작전을 세워 놓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독립군의 매복 상황을 알지 못한 채, 일본군 추격대는 이화일(李化日)이 이끄는 독립군 유인부대와 접전을 벌인 뒤, 7일 오후 1시경 완전히 독립군의 포위망 속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홍범도는 일제사격의 신호탄을 발사하였다. 그동안 은인자중하며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이를 신호로 삼아 삼면 고지에서 일본군을 향해 집중사격을 개시하였다.

 

 

 

 

 

 

 

대한독립군 지휘부 (최진동, 안무)는 동북부 산 속에 엄폐, 1중대 (이천오)는 봉오동 상촌 서북단에 엄폐, 2중대 (강성모)는 동산에 엄폐, 3중대 (강시범)은 북산에 엄폐, 4중대 (조권식)는 서산 남단에 엄폐, 그리고 2개 중대은 홍범도의 지휘 하에 서산 중북단에 엄폐, 신민단은 상촌 남단에 엄폐, 군무국 (이원)은 본부병력과 잔여 병력으로 서산 최서북부에 엄폐하여 탄약 공급과 퇴로를 확보하기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2중대 3소대 1분대 (이화일)는 고려령 북쪽고지에서 대기하다가 일본군과 교전하면서 유인하기로 하였다.

 

 

 

 

 

불의의 기습공격을 받은 일본 추격대는 신곡(神谷) 중대와 중서(中西) 중대를 전방에 내세워 결사적인 돌격을 시도하는 한편 기관총대로 하여금 응전토록 하였으나, 지형적 우세를 점하고 있는 독립군의 일제 공격을 감당할 길이 없어 사상자만 속출할 뿐이었다. 전투가 한참 진행 중이던 오후 4시 40분 경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와 우박과 폭풍이 거세져 서로 상대를 구별할 수 없도록 기상이 악화되자 홍범도는 부대원들에게 퇴각명령을 내렸으며, 이틈에 일본군도 패주학 시작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봉오동에 남아있던 어린이와 부녀자 16명을 살해하였다. 이러한 포위망 속에서 3시간 동안 필사적인 저항을 하던 일본군 추격대는 더 이상 응전하지못하고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독립군 제2중대장 강상모(姜尙模)는 부하들을 독려하여 퇴각하는 일본군 추격대를 맹렬히 추격, 다시 큰 타격을 가하였다. 이로써 독립군 본영을 일거에 분탕하려던 일제의 월강추격대는 봉오골에다 엄청난 전사자만 남겨 놓은 채 동남방의 비파동(琵琶洞)을 거쳐 유원진(柔遠鎭)으로 패퇴하고 말았다.이것이 봉오동 승첩의 경과이다.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의 발표에 의하면, 봉오동 승첩에서 올린 전과는 일본군 사살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에 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한편 봉오동전투에서 뜻밖에 일격을 당한 조선군사령부는 국내 언론을 통해 일본군의 패전을 숨기고 전투상황을 다음과 같이 왜곡하기에 급급하였다. 이 싸움에 소원(小原) 헌병대 대위 이하 약 10명과 갈성(葛城) 警視 이하 약 10명은 일본군대와 그 행동을 같이 하였으며, 이 싸움에 참여한 조선사람의 수효는 약 250명이었다. 그리하여 이번 싸움에 일본인 측에서는 전사자가 한 사람, 부상한 자가 한 사람이었으며, 조선사람 측에는 내어버리고 간 시체가 근 30명에 달했고, 사로잡힌 사람이 6명이었고, 소총 7정, 탄약 1,495발, 육혈포 2개, 망원경 12ㅐ, 한국 국기 1개, 기타 잡품을 배았았고 기타 부상한 조선 사람은 부인 4명, 아동 1명이 있었는데, 이 다섯 사람은 자기의 남편과 부형이 집 속에서 일본인을 쏠 적에 일본군의 탄환에 맞은 모양이더라. 일본인 추격대는 6월 8일 사단장의 명령에 의하여 9일 오전 8시경에 철퇴하기를 시작하여 당일 내에 조선으로 돌아왔다더라.....

 

 

위의 내용은 봉오동전투와 관련하여 조선군사령부가 발표한 내용이다. 봉오동전투에 참가했던 독립군의 수는 약 250~300명이었으며, 일본군은 전사자 1명, 부상자 1명의 피해를 입었다고 하여 일본군측의 피해를 크게 축소하였다.

 

 

봉오동 전투 이후

 

일본군 19사단이 봉오동까지 침입한 사태는 중국측의 반발을 초래하였고, 양국이 진상조사에 나서 본 결과 독립군의 군세가 예상 외로 강함을 알게 되었다. 일본은 독립군의 강한 군사력을 이유로 더욱 더 중국을 압박하였으나, 중국의 거부로 목적을 관철하지 못하였다. 7월 16일 일본은 " 일본군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으로 2개월 간 간도 지역의 불령선인(不逞鮮人)을 토벌하겠다 "라고 중국 길림성장(吉林省長)이 수용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에 길림성장은 중국군이 독자적으로 토벌작전을 수행하겠다고 나섰다.

 

길림성은 혼성 2여단 예하 1단(맹부덕. 120명)을 동원하여 7월에 준비를 마친 후 8월에 작전을 개시하기 직전에 국민회 등에 중국군의 계획을 미리 알리고 " 우리의 입장을 이해하고 협조하기 바란다. 토벌 기간중 도시나 대로변에서의 행동을 자제하고, 산 속으로 숨거나 기지를 연길로 변두리의 돈화현 또는 안도현 접경 지역으로 옮기도록 하라 "며 제안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범도는 군무도독부를 떠나 약 3백명의 부하들과 함께 연길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러나 일제가 間島지역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압박을 계속 가해옴에 따라, 여러 한국독립군단은 1920년 8우러부터 새로운 항전기지를 찾아 장정(長征)을 떠나게 되었다. 홍범도가 거느리는 대한독립군단이 제일 먼저 근거지 이동을 개시하여 안도현(安圖縣) 방면의 백두산 기슭으로 향하고, 뒤이어 대한국민회의 국민군, 의군부(義軍府) 등의 독립군단도 이도구(二道溝) 방면으로 이동하였으며, 김좌진의 북로정서군도 왕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를 떠나 삼도구(三道溝)로 향하였던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국민회의 지언을 받아가면서 군사통일에 주력하는 한편, 간도 일대의 지리를 연구하며 목립군의 전력을 강화시켜 장차 있을 독립전쟁에 대비하였다.

 

 

 

청산리 전투 청산리 전투

 

 

 

1990년,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고국에 알려진 한 독립투사의 일지.

일지의 주인은 봉오동, 청산리 전투 대승의 주역인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洪範圖) 장군.

"일병 103명이 내 처와 아들을 잡아가 내 행방을 물으려 반죽음을 시켜도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 1908년 2월 18일

"정평에서 50명 일병과 싸워 의병 여섯과 중대장이던 내 아들 양순이 죽었다."
- 1908년 5월 18일

함께하던 두 아들과 아내마저 잃어야 했던 고난의 독립투쟁.

그러나 꿈에 그리던 해방을 2년 앞두고 타국땅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다.

홍범도(洪範圖)

고난 속에서도 조국을 먼저 생각했던 당신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큰 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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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5.28 09:54

    첫댓글 독립군 가운데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 12.05.29 09:29

    소중한 자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글을 아직 다 읽어 보진 못했습니다만 혹시 홍범도 장군과 홍범식 금산 군수가 같은 집안의 사람 인지요!

  • 12.06.06 08:20

    전투에 대한 것만 알고 있었는데 생애와 가족에 대한 자료 잘 알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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