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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1. 묵상글 들 ( 사순 제1주일 - 광야에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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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1.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순 제1주일 - 광야에서
사순 제1주일-2012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오늘 복음에서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모십니다.
그런데 광야란 어떤 곳입니까?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사람 사는 데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생명과 안위를 위협하는 것들만 있는 곳입니다.
먹을 것, 마실 것, 가릴 곳은 없고,
불볕, 해충, 독충들은 득실거리는 곳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 살 곳이 못 되고, 그래서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광야란 무엇보다도 사람이 없는 곳, 아주 고독한 곳입니다.
우리 인생도 어떤 때 이렇게 광야로 내몰릴 때가 있습니다.
내 주변 온통 나를 잡아먹으려는 사람들뿐이고,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너무도 고독합니다.
그런데 이곳으로 우리를 내모신 것은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을 광야로 내모신 성령께서는 우리도 광야로 내모십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왜 예수님을 광야로 내모시고,
우리를 광야로 내모실까요?
일단은 사탄의 유혹과 시련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악과 대면하고 사탄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스콧 팩이라는 정신과 의사가 있는데
이분은 다른 정신과 의사와 달리 악령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룹니다.
저도 동의하는 바, 이분의 주장에 의하면
악령이란 심령이(심리 정신적으로) 허약한 사람을 노리는데,
심리, 정신적으로 허약한 사람이란 고통을 견디는 힘이 없는 사람이고,
고통을 견디는 힘이 없는 사람은 사랑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옛말에 사랑할수록 자식을 고생시키고 여행을 시키라고 하였지요.
정말 사랑을 하면 자식을 고생시키고,
정말 자기를 사랑한다면 악과 고통에 직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으로 고통을 감수하고 이겨내는 사람이 심령이 강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인데 영적으로 허약한 사람은
성장 과정에서 사랑과 고통을 적절히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랑 없이 너무 큰 고통만 받았거나, 부모가 너무 또는 잘못
사랑하여 제 나이에 받아야 고통을 제대로 받지 않은 겁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영적으로 강하게 하려면
그가 사랑 안에서 고통을 견디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모시지만
또한 천사를 보내어 시중을 들게 하십니다.
천사란 바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우릴 도와주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도 잘못하면 사탄의 하수인이 될 수 있는데. 이 천사의 도움으로
사탄과 싸워 이기는 심령이 강한 자가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를 광야로 보내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아무도 없는 고독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고독이란 하느님의 자리이기에 여기서 하느님을 만나고
모세가 광야에서 소명을 받듯 하느님의 소명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명이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광야의 승리자 주님은 이제 세상에 나아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복음 선포를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지금 온갖 시련과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전도사가 되고 희망의 무지개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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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1. 고 도미니코 ofm. 사순 제1주일.-터키 에페소 기도의집
사순 제1주일을 시작하면서 주님께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회개와 복음을 믿는 것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광야체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광야의 체험을 일상 안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고독을 찾을수록 유혹이 그 만큼 심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광야에서 유혹을 받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광야의 나그네는 이성적으로 알 수 없는 신비를 향해 예측하지 못한 세계를 향하여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의 의지하여 나아갑니다.
복음의 기쁨은 검증할 수 없는 신비스런 영역으로부터 오는 침묵의 광야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회개와 복음의 사람이 되는 것은 주님의 말씀과 삶을 관상하고 자신이 살아온 경험을 관상하는 것입니다. 추상적 신비를 관조하는 것이 아니고 길을 걸으며 구체적으로 실현해 본 그 신비를 관조합니다. 이 침묵의 광야는 실현되지 않는 이념들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일상안에서 구체적인 행위로 드러내도록 해 줍니다.
우리는 바로 침묵의 광야속에서 관상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나날이 새로운 관상, 아침에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시작하여 하루를 마칠 때 아침에 읽은 말씀과 하루에 실천한 말씀이 일치되었는가 성찰하는 것이 관상입니다.
옛 사람들에게 광야는 악령이 머무는 곳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광야는 악령이 머무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는 곳이기도 합니다. 광야는 시련의 장소요 하느님의 영광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사탄과 들짐승 그리고 천사들이 공존하는 광야체험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면의 광야에서의 악령과의 싸움은 많은 유혹을 수반합니다. 유혹은 우리들이 악령을 만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유혹을 견디어 내고 악령을 극복하는 가운데서 우리의 힘과 내적 확신이 성장합니다. 유혹은 일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동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유혹은 걸림돌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없어서는 안될 디딤돌입니다. 유혹이 없을 때 하느님을 자기 자신을 위해 받아들이거나 하느님의 위대한 능력을 하찮게 보는 교만이 자리하게 됩니다.
유혹을 통하여 인간은 실존적으로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거리를 알게 됩니다. 하느님은 절대적인 사랑이시지만 반면에 인간은 끊임없이 악으로부터의 유혹을 투쟁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 인간의 비천함을 인정하게 되며 회개하는 가운데 주님의 복음을 온전히 믿게 됩니다.
고 도미니코 o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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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1. 키엣 대주교님묵상. / 주님을 만나는 곳, 광야로 들어가십시오 /(사순 제1주일)
욕망과 유혹, 시련을 이길 때만이 하느님의 영이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셨습니다.
광야는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뼈가 시릴 정도로 추운 사막의 모래를 견뎌야 하고 어두운 밤에는 굶주린 들짐승과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살 수 있는 척박한 땅입니다. 그러나 광야는 단지 시련만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합니다.
요한이 잡힌 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세례자 요한의 죽음으로 구약시대는 끝났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심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여셨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먼저 새로와져야합니다. 나의 과거를 돌아보고 잘못을 직시해야 합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참회의 시작입니다. 과거를 묻어두고 새롭게 태어날수 없습니다. 반성과 참회의 눈물만이 과거를 청산할 수 있습니다. 잘못을 뉘우치는 처절한 고통만이 다시는 죄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가장 중요한 첫째 조건입니다.
“복음을 믿어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기위해 이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서로 형제 자매가 되었습니다. 권능과 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너무나 인간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영광은 없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위안을 주시고 절망에 빠졌을 때 희망을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진실로 믿고 실천해야 좀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수 있습니다.
이번 사순시기에는 내 맘 깊은 곳에 성령을 모실 수 있도록 예수님과 함께 광야를 체험해보십시오. 광야는 이제 더 이상 물리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떨어진 공간, 그곳이 바로 현대의 광야입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광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고통과 어려움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리고 어떤 유혹에도 항상 주님께 의탁하겠다는 굳건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광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내 뜻을 버리고 언제나 주님의 뜻을 행하겠다는 의지입니다.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영적 평화를 유지한다면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는 주님의 "사랑스런 자녀"가 되어야합니다. 고통과 시련앞에 좌절하고 돌아서는 길 잃은 자녀가 아닌 정의와 믿음의 길로 가는 진정한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에게 광야란 무엇입니까?
2. 나는 나를 얼마나 알고있습니까?
3. 이번 사순시기에는 나만의 광야에서 진정한 회개와 믿음에 대해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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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1. 사순 1주일.<유혹은 은총의 시작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는 용기를 통해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특별히 유혹에 관해 묵상하며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지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시조 한 수 읊어 드리겠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는 고려왕조를 뒤엎고 조선왕조를 창건하려는 야심을 품은 이방원이 충신 정몽주를 회유하려고 시조 한 수를 들려주면서 마음을 떠본 내용입니다. 칡덩쿨처럼 서로 얽혀서 옛 왕조, 새 왕조 따지지 말고 오래오래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한 것입니다. 이에 정몽주가 시조 한 수를 지어 변절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결국 정몽주는 이런 충절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천주교회는 100여년의 박해 속에 만 여명이 넘는 순교자를 낳았습니다. 온갖 유혹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임 향한 일편단심”을 버리지 않은 분들이 순교자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성사를 청하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였고 온갖 허례허식과 마귀를 끊어버린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서약을 잘 지켜야 합니다.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시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주님보다 세상의 소유와 지배, 재물과 권력에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온갖 유혹에서 자유롭기를 기도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간교한 뱀이 여자를 유혹하는데 “여자가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 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그 열매를 다 먹고 같이 사는 남편에게도 다 주었다”(창세3,6). 고 했습니다.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게 문제 입니다. 다른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떡은 더 커 보이는 법입니다. 재물이나 명예, 권력에 대한 욕심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밟고 올라서게 하는 죄로 이끕니다. 시기 질투하는 마음, 이기심, 미움에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식욕이 때로는 탐식하게 만들고 성적인 욕망이 음란의 죄로 이끌고, 휴식에 대한 욕망이 게으름에로 젖어들게 합니다.
잠언에 보면 “달콤한 말로 꾀고 꿀맛 같은 말로 유혹하자 젊은이가 따라 나서는데 마치 푸줏간에 끌려가는 소와도 같이 올가미에 걸려드는 사슴같이 제 발로 창애에 걸려드는 새 꼴이 되어 언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고 따라가다가 결국 간에 화살이 박히고야 말리라”(잠언 7,21-23)하고 말합니다.
결국 유혹이란 부정적으로 보면 어리석은 자를 꼬이는 것을 의미하고, 올바른 생활 원칙에서 돌아서게 해서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것은 첫째로 자만해서 입니다. “네가 실컷 나쁜 짓을 하면서도 ‘나를 감시할 눈이 없다.’하고 자신만만이구나. 너는 지혜로운 체, 세상일을 다 아는 체하며 ‘이 세상엔 나밖에 없다’고 하다가 제 꾀에 넘어가리라”(이사47,10). 둘째로 ‘남 들이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모든 마음을 살피시고 모든 생각을 꿰뚫어 보십니다”(1역대28,9). 집회서를 보면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 마디도 숨길 수 없다”(집회42,20). 잠언서에는“사람의 길은 주님 앞에 펼쳐져 있고, 그분께서는 그의 모든 행로를 지켜보신다”(잠언5,21)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하는 일을 남이 모른다고 생각할 때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눈 아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 욕심에 끌려서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면 좋겠는데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고 싶은 욕심이 우리를 흔듭니다. 정말이지 그칠 줄을 알면 부끄러움이 없고 분수에 맞으면 세상이 여유로운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 옵니다”(야고 1,14-15).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해 가정이 파탄되기도 하고, 재물에 눈이 어두워 속이고, 뇌물 받고 그러다가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뇌물 받아 망한 사람 많지만 요즘 대통령 주변의 많은 사람들, 심지어 국회의장, 국회의원, 경찰청장 대기업 사장 등 모든 명예를 잃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술과 도박, 권세에 집착하다가 제 명대로 못사는 분도 많습니다. 분수에 맞지 않게 카드 빚 쓰다가 감당 못해 목숨을 끊는 사람도 많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은 긍정적으로 볼 때 은총의 시작입니다. 이 유혹을 통해서 나의 현주소를 확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내 자신의 상태를 결정적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대의 유혹은 주님께서 주시는 시험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이 지상의 순례생활에는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진보는 유혹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유혹을 당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유혹을 받지 않을 만큼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완벽하게 살려는 사람일수록 더 큰 유혹을 받게 마련입니다. 이 유혹에서 지면 보통사람이고, 이기면 그야말로 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마태6,11-13).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시고 세 제자에게 돌아와 보시니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너희는 나와 함께 단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단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마태26,40-41)한탄하셨습니다. 결국 기도함으로써 유혹을 극복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 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 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6,10-17)하고 권고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그분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히브2,18).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유혹이 없기를 바라지 말고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유혹을 통해 오히려 우리의 인격을 연마하고 우리가 주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유혹은 더없이 큰 은총입니다.
주님께서는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대답하길 원하십니다. 따라서 어떤 유혹 앞에서도 분명히 대답하십시오. “좋은 일에는 ‘예’, 나쁜 일에는 ‘아니오’. 하느님의 뜻에는 ‘예’, 인간의 뜻에는 당연히 ‘아니오’”, 대답은 이렇게 하시면서도 속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열차를 타고 의자에 앉았는데 옆자리에 할머니께서 앉으셨답니다. 할머니께서 피곤하신지 꼬박 꼬박 졸다가 젊은이에게 기대서 주무시는 겁니다. 그래서 젊은이가 기도했습니다. “주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어느 날 복이 많은지 예쁜 젊은 여자가 옆자리에 앉는 겁니다. 여인도 피곤했는지 졸더니만 급기야 젊은이 어깨에 기대어 자는 겁니다. 그래서 젊은이가 기도했습니다. “주님, 당신 뜻대로 하소서.” 혹 우리의 마음이 아닌지요?
세례를 받은 후 더욱더 심하게 유혹을 받는다고 생각될 때, 왜 나에게는 이런 유혹이, 시련이 오느냐 투덜대지 말고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신 후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았고 또 말씀으로 물리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루카복음을 4,1-13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1). 돌더러 빵이 되게 해 보라는 악마의 경제적 유혹 앞에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하셨습니다. 2). 내 앞에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정치적 유혹 앞에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3).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천사들이 떠받쳐 주리라고 하며 자신을 위해 기적을 남용하라는 유혹 앞에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마라.”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하시며 유혹을 멀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습니다. 다음 기회를 노렸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도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힘을 입어 얼마든지 유혹을 극복할 수 있고 은총의 기회로 만들 수 있음을 믿으십시오. 바닷가에 가보면 벼랑 끝의 소나무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면서 뿌리를 땅 속 깊이 내리고 가지를 튼튼하게 뻗었습니다. 우리도 유혹과 시련의 시험을 통해 더 강해지기를 희망합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신 이유가 뭘까요? 그곳에 구원해야 할 인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목마르고 배고프고 외롭고 쓸쓸한 곳입니다. 황량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바로 온갖 유혹이 있는 이 세상이 광야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몸소 유혹을 받으시고 우리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그분이 유혹을 받으셨기에 유혹받는 우리를 이해하시고 더 큰 사랑으로 보듬어 주십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연약함을 너무 쉽게 유혹에 노출시키지 마십시오. 가능하면 유혹 당할 수 있는 기회를 피하십시오. 왜냐하면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흔들비쭉, 작심삼일입니다. 아무쪼록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지 말고, 주님의 시험으로 받아들여 은총으로 만드는 한 주간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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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1.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사순 1 주일)
오늘은 사순절 첫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새로운 때”와 “그때에 해야 할 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의 끝부분을 들려줍니다.
이는 새로운 창조 이야기입니다. 그야말로 홍수의 물로 씻겨 진, ‘새로운’ 인류가 탄생하게 됩니다.
곧 “새로운 때”, “회개의 때”를 알립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노아의 방주를 ‘세례’를 미리 보여주는 예표로 말하면서, “세례는 몸의 떼를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1베드 3,21)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시, “새로운 때”, “그리스도의 부활로 하느님의 바른 양심을 입을 때” 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나가시어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마치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에게 유혹을 당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광야’에는 사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활동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그러기에 광야는 시험을 받는 장소임과 동시에, 은총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혹은 “은총의 때”를 몰고 오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광야’는 모세에게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이집트에서 나와 주님께 제사를 드린 곳이요, 주님의 자비와 보호를 체험한 곳이었고, 엘리야에게는 하느님의 보호를 체험한 곳이요, 호세아에게는 주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이끌려나갔던 곳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광야’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주선합니다.
그야말로 ‘광야’는 하느님과의 만남의 장소요,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순례의 삶’을 살아갑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첫 사랑의 외침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발설하신 ‘첫 번째’ 말씀입니다. 그것은 “때”가 찼음을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때가 찼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기 시작하신 일이 그저 아무 때나 우연히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요, 이전의 모든 시간이 지금의 이 “때”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곧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신 이후 줄곧 준비해 온 “때”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 지를 제시해주는 방향이요 목표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다스림의 나라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곁에 가까이 있다’는 말로 이미 와 있는 것을 말합니다.
곧 당신과 함께 와 있는 하느님 나라는 선물로 주어져 이미 현재에 와 있는 나라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현존하는 나라임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으니, 하늘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 루카 11,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는 믿음에로의 전환을 말합니다.
‘이미 먼저 선사된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예수님께서는 ‘회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하느님 나라”는 선사되었습니다.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 입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는 것이 바로 “회개” 입니다.
그러니, ‘회개’란 이 ‘먼저 베풀어지고 선사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일 때라야 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에서의 ‘회개’란 뉘우치고 돌아옴을 말합니다.
곧 내면적인 뉘우침과 동시에, 돌아오는 인격적인 행위를 포함합니다(슈브. 메타노이아).
그러니 단지 뉘우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올 곳을 먼저 알아야 진정한 회개는 가능해 집니다.
그것이 바로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인 ‘하느님의 나라’ 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에로의 돌아옴입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건설되도록 자신을 수락하는 것을 뜻합니다.
곧 하느님 사랑 안에로의 전환입니다.
우리의 사랑으로가 아닌,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건설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다스리고 실현시키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곧 하느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셔 들이는 일이요, 하느님의 의로움과 뜻에 전적으로 돌아서는 일, 바로 그 일 말입니다. 단지 도덕적인 참회와 윤리적인 통회만이 아니라, 생각과 태도와 가치관과 삶의 전인격인 전환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
제 삶 안에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제 자신을 빠져나가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어디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따라 당신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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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1. 사순 제1주일 : 나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사순절은 하느님의 현존을 더욱더 깊이 느끼며 파스카의 빛을 향한 광야의 고달픈 길을 가는 여정이다. 이 시기는 참으로 나 자신과의 싸움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광야의 시련, 하느님께 대한 체험, 마음의 정화 등이 오늘의 주제이다.
제1 독서와 제2 독서는 노아의 홍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노아와 그 아들들은 홍수의 물로 씻긴 '새로운' 인류를 의미하며, 하느님께서는 '무지개'(창세 9,13)라는 평화의 징표를 통해 이 인류에게 생명과 사랑을 영원히 베풀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창세 9,14-15). 베드로 사도는 홍수가 많은 사람에게 멸망의 원인이 되었지만, 비록 소수라 해도 몇몇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오늘날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세례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1베드 3,21). 세례의 물을 통하여 묵은 인간을 벗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이미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파스카이며 우리의 파스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 사순절이란 세례를 통해 부여받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충실성의 요구에 따라 살아야 함을 재확인하고 노력하는 시기이다.
복음: 마르 1,12-15: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오늘 복음은 사순절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즉 사탄과 격렬한 투쟁을 벌이면서 동시에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따름으로써 내적인 승리를 거둔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즉 광야에서의 유혹에 관한 이야기(12-13절)와 첫 번째 복음의 선포 이야기(14-15절)로 되어있다. 이 둘을 연결하면 사순절의 총체적인 의미가 나올 수 있다.
다른 복음에서와같이 마르코 복음에도 예수님의 유혹이 나타난다. 그러나 다른 복음과는 달리 간결하게 표현했지만 풍부하고도 효과적인 면이 드러나고 있다. 이 이야기를 보면 유혹은 예수께서 광야에 있는 사십일 동안 계속된 것같이 보인다. 이것은 그 유혹이 극복하기가 힘들고 피곤한 것이라는 것 그리고 악의 세력과의 격렬한 싸움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또한 예수님의 공생활 전반에 걸쳐 악의 세력과 싸우시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사탄을 거슬러 하는 싸움은 예수께서 광야로 나가는 데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께서 당하신 유혹이 어떤 것인지는 전해주고 있진 않다. 그러나 그 유혹은 십자가를 통해야 하는 어렵고도 험난한 메시아사상과는 반대로 쉽고 승리감에 넘치는 메시아 상으로 바꾸려는 술책이다. 이는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후에 '사탄'이라고 크게 꾸짖으시며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 33) 하신 것과 같다. 이 유혹은 십자가 위에까지 계속될 것이나,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당신 자신을 맡김으로써 극복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유혹은 세상 마지막 날까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다가올 유혹일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곯아떨어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이 사순시기에도 우리에게 하실 것이다.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르 14,38).
오늘 복음에서 광야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광야는 무한한 고독의 상징처럼 다가오지만, 이 광야는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이루게 하는 곳이며, 동시에 인간적인 모든 자신감을 털어버리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즉 자신의 무능력, 나약성, 무력감을 가장 절실히 느끼게 되는 곳이다. 예수께서는 사십일 동안 광야에 머무시는 동안에 하느님과 더욱더 깊은 만남을 체험하신다. 즉 광야에서 예수께서는 사탄의 정면 공격을 물리칠 힘을 주시는 하느님의 더욱더 강한 현존도 체험하신다. 이 광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보내신 분이 바로 성령이심을 마르코 복음에서도 강조하고 있다(12절). 이 광야에서 40일을 지내셨다.
40이라는 숫자는 성경상으로 거룩한 숫자이며 광야의 체험과 연결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40년간 광야에서 시련을 겪었고(신명 8,2-3.15-16 참조), 모세는 사십일 동안 산꼭대기에서 기도하고 단식했으며(탈출 34,28 참조), 엘리야는 사십일 낮과 밤을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음식만으로 연명하며 광야를 거쳐 호렙산에까지 여행을 하였다(1열왕 19,8 참조). 이 사십일이라는 기간의 의미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 우리의 존재가 무엇임을 깊이 깨달을 때야 하느님께 대한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성경에 나타나는 인물들이 하느님 앞에 자신들이 가졌던 그 자세로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느꼈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새롭게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침묵의 공간을 즉 광야를 만드는 시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삶 속에서 왜곡된 하느님의 얼굴만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을 쳐 이기심으로써 세상을 새롭게 하고 평화를 주시며 인간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준다. 천사들의 시중(13절)은 바로 이 승리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변화'도 암시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광야 체험을 하신 후에 제일 먼저 선포하시는 내용이 사탄과의 싸움을 통해 당신 안에 실현하신 '새로운 변화'의 필요성을 알리는 것이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5절). 사순절이 요구하는 회개라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사탄을 몰아내고 하느님을 우리의 삶의 첫 자리에 모시는 일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길고도 험한 광야를 체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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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순 제1주일.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르 1, 13)
봄은
그냥 오지
않는다.
오히려
광야에서
하느님이라는
은총의 길을
찾게된다.
지나가는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 삶이다.
너무나
많은 것에
마음을 빼앗겨
살아가는
우리들을
만나게된다.
하느님께서는
서두르지
않으신다.
광야의 의미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체험하는
만남의 자리이다.
하느님을
우리 삶의
광야에서
만나는 것이
사순의
첫의미이다.
광야는
부질없는 것들을
내려놓는 회개의
시간이다.
광야는
우리 힘으로
지나가는 곳이
결코 아니다.
오직
하느님의
힘만으로
지나가는
은총의
광야이다.
광야가
소중한 것은
하느님 안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광야에도
길이 있다.
예수님께서
먼저 길이
되어주신다.
삶의 방향을
새로이
잡아주신다.
우리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길이 있다.
40년을
돌고 돌아
약속의 땅을
밟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의 삶또한
그러하다.
광야는
십자가를
의미한다.
나의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한다.
광야의 절실한
하느님 체험이
삶을 이겨낼
힘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소명을
광야에서
생생하게
깨닫게된다.
광야는
새롭게
태어나는
변화의
자리이다.
우리의 삶또한
광야와
십자가로
더 깊어지고
더 아름다운
삶이 될 것이다.
어렵고
힘들어도
삶은 은총임을
믿는다.
이제 우리는
꽃을 준비한
봄을 맞이할
것이다.
겨울을
힘겹게
지나온
봄이다.
겨울이 있기에
봄이 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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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1. 사순 제1주일 (마르 1,12-15) <유혹>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2-15)”
예수님께서 광야로 가신 것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와 묵상을 하면서 준비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가득 차서 광야로 가셨다는 뜻입니다.
‘광야’는 고난과 시련의 장소를 상징하기도 하고,
하느님을 더 깊이 체험하는 은총의 장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하느님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사십 일’이라는 기간도 고난과 시련을 상징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다는 말은,
인적이 끊어진 곳에서 고독한 생활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4,2; 루카 4,2).
천사들이 시중을 들었다는 말은 음식 접대를 했다는 뜻은 아니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겼다는 뜻이라고 해석됩니다.
천사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긴 것은
예수님의 메시아 직무 수행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사탄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항상 방해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단식하면서 기도하신 사십 일이
사탄에게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일을 방해할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다가온 사탄의 첫 번째 유혹은 ‘빵의 유혹’입니다.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3-4; 루카 4,3-4)”
이 유혹은, ‘말씀’보다 ‘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유혹인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라는 유혹과 ‘하느님의 아들의 권능’을
물질적인 일에(쓸데없는 일에) 사용해 보라는 유혹을 겸하고 있습니다.
이 유혹은, 우리에게는 먹고사는 일에 관한 걱정과 재물의 유혹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가시덤불’의 경우가 이것에 해당됩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태 13,22).”
먹고사는 문제에 관한 걱정과 재물에 관한 욕심 때문에
숨이 막힐 정도라면, 사탄의 유혹이 성공한 것입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빵도 필요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진정한 힘은 빵이 아니라 ‘말씀’에서 온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또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사탄에게 증명해 보일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라는 사탄의 요구는, 자기를 예수님보다
위에 놓는 말이기 때문에 신성모독죄에 해당되는 대단히 교만한 말입니다.
그리고 마치 마술사가 마술을 부리는 것처럼 돌을 빵으로 만드는 것은
참으로 쓸데없는 일입니다.
아무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두 번째 유혹은
하느님을 시험해 보라는 유혹입니다(마태 4,5-6; 루카 4,9-11).
(루카복음에는 세 번째 유혹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유혹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라는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십니다(마태 4,7; 루카 4,12).
이 유혹에서, 물 위를 걸으려고 했던 베드로 사도의 일이 연상됩니다.
“...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14,28-31).”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꾸짖으신 것은, 그가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워해서
물에 빠진 것 때문이 아니라, 물 위를 걸으려고 했던 것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그 상황에서 그가 물 위를 걷는 일은,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남들은 못 하는 일을 해 보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주님이 가지고 계시는 권능을 흉내 내고 싶었던 것일까?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요청을 들어 주신 것은,
아마도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얻으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에는 그처럼 ‘믿음의 힘’으로 기적을 일으켜 보고 싶은 유혹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마태 17,20)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믿기만 하면 누구나 마음대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정말로 기적을 일으켜 보려고 시도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을 시험하는 태도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진짜 뜻은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을 믿어라.”입니다.
기적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일으키시는 일입니다.>
사탄의 세 번째 유혹은 자기에게 경배하라는(자기를 섬기라는) 유혹인데,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라는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치십니다(마태 4,8-10; 루카 4,5-8).
세속의 재물이든지 권력이든지 명예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들을 하느님처럼
섬긴다면(그것들만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추구한다면),
그것은 사탄을 섬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탄을 섬기는 사람은 사탄이 멸망당할 때 사탄과 함께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다가오는 유혹에 맞서 싸우는 생활입니다.
유혹은 사탄에게서 올 수도 있고, 내 안의 본능에서 올 수도 있고,
세속에서 올 수도 있습니다.
어디에서 오든지 간에 유혹을 물리치는 유일한 무기는 ‘기도’입니다(마르 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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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1. 사순 제1주일 /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 말씀의 무대는 광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을 머무십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광야를 향하여 나아가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광야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하고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 속에서 광야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십 년간의 유랑을 마치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광야 여정은 어떠하였습니까? 배고프고 목마르다고 투정을 부렸으며, 하느님을 시험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다가도 하느님께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이집트를 탈출하였던 ‘노예 집단’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성장해 갑니다. 그들은 광야라는 그 척박한 공간에서 조금씩 성숙합니다.
광야는 그런 의미에서 성장과 성숙의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노예 신분이었어도 모든 것이 보장되고 안정적인 이집트에서는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고기는 아니어도 빵이라도 편하게 먹을 수 있었던 익숙하고 안정된 이집트에서 벗어났을 때,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 백성의 여정을 걸어갑니다.
광야는 편안함보다 불편함을, 생명보다 죽음을, 희망보다 절망을 먼저 생각하게 하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불편함 때문에, 죽음의 공포 때문에, 절망 가득한 신음 때문에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고, 그 체험은 신앙의 성숙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광야에서의 시간이 피곤하고 피하고 싶은 시간이 아닌, 머물러야 하는 은총의 시간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박형순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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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1.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사순 제1주일
제1독서(창세 9,8-15)는 하느님께서 노아와 계약을 맺으시면서 징표로 무지개를 주십니다.
무서웠던 홍수가 그치고 하늘을 가르는 아름다운 무지개를 징표로 세우면서 하느님께서는 살아남은 노아의 가문과 계약을 맺으십니다. 더 이상 홍수로는 땅을 파멸시키지 않으시겠다는 장엄한 약속과 더불어 사람과 동물이 세상에 공존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느님께 불성실했던 인간의 죄를 씻어내기 위해 엄청난 양의 비를 쏟아 부으신 하느님께서는, 마치 후회라도 하듯이, 타락한 피조물의 상황을 좋게 바꾸신다는 것이며, 세상의 질서를 회복하면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재앙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악에 빠질 때 자기 종족이 말살된다는 위기의식과 더불어 인간은 신이 아니라 단지 피조물뿐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용서와 사랑의 계약의 징표인 무지개는 아름다움과 슬픔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무지개 뒤편에는 항상 비가 오듯이, 인간이 언젠가는 또 다시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으로 살아갈 것을 암시합니다. 마치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예수님)에게서 물러갔다.”(루카 4,13)고 하는 듯합니다.
복음(마르 1,12-15)은 새 계약을 위한 준비와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말합니다.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내려오신 성령께서(마르 1,10)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고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하여 활동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광야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잘 드러나듯이 모세를 원망했고(탈출 14,11-12; 16,3), 하느님을 시험했던 장소이며(민수 14,22), 하느님의 사랑의 속삭임을 듣고 결단을 내리던 곳입니다(호세 2,16).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지내면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고, 들짐승과 함께 지내셨으며,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셨다고 간략하게 서술합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가 지니고 있는 상징은 다양합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40일 동안 단식하면서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했고(탈출 34,28), 엘리아는 광야에서 천사가 건네주는 빵과 물을 먹고 40일 동안 걸어서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1열왕 19,8)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후 40년 동안(한 세대) 광야에서 지내게 하시면서 당신께서 하신 일들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자기를 낮추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지 그들의 마음속을 알아보려고 시험하신 것이었습니다(신명 8,2).
복음은 예수님께서 몇 번, 어떤 종류의 유혹을 받으셨는지 밝히지 않고,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이 예수님의 인간적 조건을 무시하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유혹이란 고통을 겪는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어떻게 일어서는지 밝히는 것으로, 그리고 죄에 빠질 위험에 직면한 상황에서 인간의 굳은 결의를 시험해보는 것으로 자주 인용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기 위해 40년이라는 기간이 필요했듯이, 예수님께서 광야에 계셨던 40일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기 위한 준비기간입니다. 하늘에 자리를 차지하면서 온 세계를 속이던 사탄은(묵시 12,7-9) 인간처럼 행동하고(욥 1장), 마치 거룩한 계획의 경쟁자로 자처하면서 예수님께 끊임없이 대들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적대감과 시비를 말해줍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느님의 아드님의 계획을 망칠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마르 3,23.26; 8,33).
예수님께서는 들짐승들과 마치 친구처럼 함께 지내셨다는데,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아무런 위협이 없이 지내셨음을 말해줍니다(이사 11,6-9; 65,25). 한편 동물들과 함께 지냈던 아담을 상기시키면서(창세 2,19) 예수님을 새로운 아담으로(1코린 15,45) 표현하려는 의도도 엿보입니다. 천사의 등장 역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이들을 언제든지 당신의 뜻을 전해줄 심부름꾼으로 쓰실 것임을(마르 13,27; 시편 91,11) 말해줍니다. 광야생활과 사탄의 유혹 이겨내신 예수님께서는 천사들과 권력은 물론이요 권능까지도 모두 복종할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아드님(1베드 3,22)이시라는 것입니다.
광야생활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시면서 당신의 복음(마르 1,1절)이 아니라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수확할 때가 되었다는 것으로서(마르 11,13; 12,2) 이는 곧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은 임금님”(이사 52,7)이시고, 제자들은 “하느님의 시종들이라 일컬어지리라.”(이사 61,6)고 선언하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르코 복음은 시작부터 예수님의 세례와 더불어 공적인 생활을 말하면서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고 한 백인대장의 고백을 암시합니다. 물론 이에 앞서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마르 8,31; 9,31; 10,33; 14,41)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그를 “묶어 놓은 뒤에”(마르 3,27)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르 16,6)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제2독서(1베드 3,18-22)는 세례식에서 했던 권고였습니다.
의로우신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난은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여러분”으로 지칭되는 세례를 받을 이들을 하느님께 이끌어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옛 계약을 어긴 인간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강조하는데, 아마도 세례예식에서 신앙고백을 듣기 전에 했던 권고인 듯합니다. 의로우신 예수님께서 왜 고난을 겪으셨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알아야 하며, 참다운 신앙 공동체를 유지하려면 박해에 맞설 수 있는 확신을 가지라고 합니다(1베드 3,7-18). 박해와 고통의 모범으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예수님을 내세우면서 그분께서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셨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부활시키셨고, 승천하게 하셨다(1베드 4,6)고 합니다. 죽으신 뒤에 생명을 받으신(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천사들과 권력들과 권능들도 복종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늘에 오르시어 세례를 보증해주시는 성령과 함께 죄인들을 바른 양심으로 살게 하시어 하느님께로 이끌어주실 수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노아와 맺은 계약을 기억하며, 물로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시겠다던 그 약속의 원형인 세례를 통하여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주셨다.”(1베드 2,24)고 합니다. 그래서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게 된 세례(로마 6,11)는 몸의 때를 씻어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힘입어 바른 양심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합니다.
사순절은 사랑이 아니라면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신비를 이해하기에 적절한 때입니다. 인간의 불순종을 순종으로 바꾸어놓으신 예수님의 삶을 본받기 위하여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되새겨야 합니다(요한 5,39).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인간이 되셨고, 그것도 모자라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이 되게 하시려고(로마 6,18) 40일 동안 광야에서 특별히 하느님의 뜻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단순히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만 묵상하는 기간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을 넘어서는 기쁨과 희망을 그리워하는 때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이제는 우리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돌아올 수 있었음’(1베드 2,25)에 감사드리는 때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유혹과 시련의 어두움이 아니라 부활의 빛을 볼 수 있는 희망의 기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순절 동안 우리가 무지개와 십자가의 계약을 비교하면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단식과 절제와 희생을 통하여 삶의 어려움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를 교회는 권고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새로운 계약의 표징인 고통의 신비와 십자가의 길을 자주 묵상할 것을 권고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깨닫는다면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 순종의 표시인 십자가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이며(1코린 1,18) 자랑거리임을(갈라 6,14) 알게 될 것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기”(로마 6,6) 때문입니다. 이번 사순절은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심으로써 많은 이가 의롭게 되도록 자비를 베풀어주신 예수님(로마 5,19)을 본받아 세상의 유혹과 악을 이겨내도록 합시다. 그렇기 되기 위해서는 굳건하고 갈라지지 않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의 속삭임인 말씀을 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 방효익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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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1. 새벽을 열며. 사순 제1주일. 빠다킹 신부님.
신학생 때를 떠올려 봅니다. 그 당시 즐거운 놀이는 장기였습니다. 그래서 식사를 마친 뒤에는 휴게실로 몰려가서 장기를 두곤 했습니다. 그러나 장기판의 숫자가 제한적이라서 모두가 장기를 둘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나머지는 장기 두는 것을 옆에서 구경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기판 옆에는 이런 사람이 꼭 있습니다. 옆에서 지켜 보고 있다가 “그렇게 두면 안 되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훈수를 두는 것이지요. 그러면 반대편에서 장기 두는 사람은 “어디서 훈수를 둬?”라며 화를 내곤 했습니다.
이렇게 훈수를 잘 두는 사람이 꼭 장기를 잘 두는 사람은 아닙니다. 장기를 직접 두지 않고 훈수할 때만 실력 발휘를 하는 것일까요? 바로 멀리 떨어져서 장기판을 보기 때문입니다. 가까이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면 잘 보이는 것이지요. 아마 노안이 온 사람은 이해가 될 것입니다. 약간 떨어져야 잘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도 이렇지 않냐는 생각을 해봅니다. 악의 유혹이 너무나 많아서 너무 힘들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유혹을 이겨내고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고 싶지만, 그 유혹의 무게가 너무 크다는 것이었지요.
유혹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면,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따뜻한 사랑을 볼 수 있는데, 유혹만을 그리고 죄의 뿌리만을 바라보면서 힘들어합니다. 유혹 자체를 없앨 수 없습니다. 이 유혹은 예수님도 받으셨습니다.
하와를 시작으로 예수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모든 것이 풍족한 에덴동산에서의 유혹이었고, 예수님은 모든 것이 부족한 광야에서의 유혹이었습니다. 더 어렵고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하와는 뱀의 유혹에 단번에 넘어가는 것도 부족해서 아담까지 유혹 안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 결과 온 인류가 원죄에 빠지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사십 일 동안이나 유혹을 받으셨지만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온 인류가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하셨습니다. 유혹을 이겨낸 뒤에야 세상에 외칠 수가 있었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우리도 많은 유혹을 겪게 됩니다. 그 유혹은 너무나도 달콤하고 내게 큰 기쁨을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항상 답답하고 어두운 마음만을 갖게 합니다. 세상에 기쁨을 외칠 수가 없게 됩니다.
사순 제1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유혹을 이기시고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던 모범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유혹이 다가올 때, 조금 떨어져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와 힘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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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진리를 알 수 있다(성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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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사는 비결
어느 지역의 최고령 할아버지에게 한 기자가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이렇게 장수하신 비결이 뭐예요?”
이 질문에 할아버지는 별 감응 없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비결은 무슨…. 안 죽으니까 오래 살았지!”
기자는 “할아버지 그동안 살면서 미운 사람도 많았을 텐데 스트레스도 없이 어떻게 그런 걸 다 참고 사셨어요?”라고 묻자, 할아버지는 이번에도 별문제가 되지 않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미운 사람들 많았지. 하지만 그냥 내버려 뒀어. 그랬더니 80~90살쯤 되니까 알아서들 가던데 뭘~!”
미운 사람이 참 많습니다. 미운 사람이 잘못될 방법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행복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모든 것이 별것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해서 행복에서 멀어지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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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1. 사순 제1 주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영화를 볼 때입니다. 어린 남매가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됩니다. 부모님은 옥(玉)으로 된 패물을 반으로 갈라서 나누어줍니다. 나중에 서로를 알아 볼 수 없게 되면 옥으로 된 패물이 두 사람이 남매임을 알려주는 증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남매는 성장하여 어른이 되고, 옥으로 된 패물을 맞추면서 서로가 남매임을 알게 됩니다. 요즘은 과학이 발전하여서 굳이 옥으로 된 패물을 반으로 가르지 않아도 됩니다. 간단하게 'DNA' 검사를 하면 가족임을 확인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득 미국에 살면서 저를 드러내는 것들을 생각합니다. 그것들이 제가 미국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사회보장 번호(SSN), 운전면허증, 여권, 성직자 신분증’이 있습니다. 사회보장 번호가 있어야 취업이 가능하고, 세금보고를 할 수 있습니다. 운전면허증이 있어야 차량을 운전할 수 있습니다. 운전 면허증은 신분증과 같은 효력을 지닙니다. 여권이 있어야 외국으로 나갔다가 들어 올 수 있습니다. 성직자 신분증이 있어야 공적으로 성사를 집전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무지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홍수’로 타락한 세상을 심판하였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고, 방주에 들어갔던 사람과 동물, 식물은 심판을 면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은 이것이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와 내 계약을 세우니, 다시는 홍수로 모든 살덩어리들이 멸망하지 않고,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하느님께서는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끝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 곧 여덟 명만 방주에 들어가 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가리키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이제 구원의 방주는 ‘세례’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사함받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무지개’를 계약의 표징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계약의 표징을 세워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신 만찬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가신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교우들에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의로움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으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해마다 거룩한 성사로 사순 시기를 지내는 저희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달아 회개의 삶으로 열매를 맺고, 고난을 겪으면서도 희망을 키우고 유혹을 받으면서도 덕행을 쌓아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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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1. 사순 제1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령을 받으면 만남의 광장이 된다>
‘광야’라는 장소는 성령을 받으면 누구나 향하게 되는 자기와의 싸움의 장입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은 세례를 통해 성령을 받고 광야로 나가 사탄의 유혹을 받으신 사건을 아주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세속-육신-마귀의 욕구와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마태오와 루카 복음과는 다르게 마르코 복음은 그 싸움의 결과에 대해 더 관심을 둡니다.
“그때에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들짐승과 천사들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입니다. 천사가 들짐승과 사귈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기신 그리스도 안에서 천사와 들짐승이 만나게 됩니다. 마르코는 성령으로 사탄의 유혹을 이기면 천사와 같은 사람과 들짐승과 같은 사람을 함께 만나게 하는 만남의 광장과 같은 사람이 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곱 살 강우는 뇌종양으로 투병중이었습니다. 부모가 신자는 아니었지만 지인의 부탁으로 대세라도 받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베드로 수녀님이 일하는 병원 원목실에 찾아온 것입니다.
워낙 똑똑하고 호기심이 많은 아이라 예수님에 관해 말해주는 것이 편했습니다.
“강우는 정말 예쁘고 똑똑하네. 딱 하느님의 아들 하면 되겠다.”
“그럼 나도 세례 받으면 하느님 아들이 될 수 있는 거야?”
강우 어머니는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왜 하느님이 계시면 자기 아들이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강우는 손을 잡아끌고 나가려는 엄마와는 달랐습니다.
“엄마, 나 하느님 아들 될 건데 왜 가자고 해? 나 안 갈래!”
엄마는 떼를 쓰는 강우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강우는 수녀님을 아줌마라고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빨리 하느님 아들 만들어줘. 하느님 아들 되려면 뭐하면 돼? 어떻게 하면 돼? 기도가 뭐야? 어떻게 기도해?”
수녀님은 세례를 받고 기도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면 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수녀님은 임마누엘이란 세례명으로 강우에게 대세를 주고 14처 패가 달린 15단짜리 커다란 묵주를 주며 “하느님 아버지 사랑합니다.” 열 번, “성모님 사랑합니다.” 열 번, “예수님 사랑합니다.” 10번씩 반복해서 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이는 그거는 쉬운 거라 말했습니다. 아이의 치유만을 바라고 왔던 어머니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아이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강우는 수녀님에게 받은 묵주를 항상 몸에 두르듯 걸치고 기도했습니다. 불편하니 묵주를 벗으라고 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어머니는 아이 부탁으로 기도서를 읽어주었는데 조금만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몰라 지쳐버렸습니다. 강우는 그러면 아버지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수녀님이 보고 싶다며 보챘습니다.
수술이 있는 날 밤 11시가 넘어서 강우를 찾았습니다. 강우는 큰 묵주를 몸에 감은 채 정자세로 십자가를 쥐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강우는 “하느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성모님, 감사합니다.”를 열 번씩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며 “수녀님! 나 하느님 아들 맞지?”라며 물었고, 수녀님은 “맞지. 하느님이 다 낫게 해 주실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강우는 “그렇구나. 근데 안 낫게 해 줘도 괜찮아.”라고 말했고, 어머니는 심장이 저며 오는 듯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수녀님이 다녀간 후 아이는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수녀님이 하느님 사랑을 많이 주고 갔어. 그러니까 엄마도 하느님 사랑해 해 봐! 성모님도 사랑해 해 봐!”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세례를 받으라는 강우의 말에 엄마는 건성으로 대답했습니다. 강우는 치료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갔습니다. 투병한 지 1년 반여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강우는 시력을 잃어갔지만, 엄마 마음이 아플까 봐 일부러 물건들의 색을 외워 엄마에게 대답했습니다. 의사의 말에 화가 난 엄마는 믿을 수 없다며 끊임없이 아이에게 물건을 집어 색과 글을 맞춰보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그런 엄마의 목을 작은 두 팔로 꽉 껴안으며 말했습니다.
“엄마! 나 엄마 사랑해. 엄마 많이 사랑해요.”
슬픈 일이었지만, 어머니이기에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했습니다. 솔직하게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 엄마는 오열했고 아이는 그때마다 엄마 목을 끌어안고 “사랑한다, 괜찮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엄마는 ‘칠흑 같은 어둠과 극심한 고통 속에 사는 아이가 어떻게 저렇게 담대하고 평화로울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이제 성호경과 묵주기도를 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뇌 압력이 오를 때마다 아이는 고통에 소리를 지르며 떼굴떼굴 구르면서도 잠시 고통이 멈추면 성호경을 그었습니다. 엄마는 아이의 그 모습에서 자신의 가족을 위해 고통을 당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봅니다.
하지만 죽음을 준비하라고 수녀님이 주신 요셉 배지를 달아주는 것은 달갑지 않았습니다. 고통 속에 성호경을 긋던 아이는 그 배지를 달아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배지를 단 강우는 “엄마, 빨간 목도리를 한 하얀 옷 입은 사람들이 와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엄마는 나중에야 그분들이 순교자들이었음을 알았습니다.
“강우야, 엄마가 너무너무 미안해.”
“엄마가 뭐가 미안해요. 왜 미안해요. 내가 너무 미안해요.”
“아들 잘 자, 사랑해.”
“사랑해요, 엄마. 안녕히 주무세요.”
그날 새벽 4시 25분. 엄마는 무심히 고개를 돌려 누운 아이를 바라보았습니다. 아이의 손이 하늘 쪽으로 번쩍 들려 있었습니다. 아이는 누운 채로 왼손은 가슴에 올린 채 말없이 성호경을 그었습니다. 두 번을 다 긋지 못하고 손이 힘없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의식이 더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그 순간이 아이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의식으로 살았던 순간이고 연명치료는 아이에게 고통만 줄 뿐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는 아이에게 용서를 청하고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수녀님은 미안하단 말보다는 고맙고 사랑했고 행복했다는 말을 해 주라고 권했습니다. 임마누엘은 고맙고, 사랑했고, 행복했다는 부모의 말을 들으며 아버지 집으로 갔습니다. 이후 아버지 어머니는 세례를 받고 봉사도 많이 하는 성가정이 되었습니다.
[출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비움]
성령을 받으면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 그렇지 못했던 들짐승의 본성과 싸워야 합니다. 물론 그 가운데 자신을 도와주는 천사들을 만납니다. 강우로서는 수녀님이 천사였습니다. 들짐승은 강우 부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하느님 자녀로서 광야에서 동물의 본성으로 끌어내리려는 사탄과 싸워 결국 들짐승과 천사가 하나로 만나는 장이 되셨듯이, 강우도 그렇게 수녀님과 부모님을 연결해 주었습니다.
우리 삶은 이렇듯 성령을 받으면 광야의 삶을 살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처럼 천사와 들짐승을 이어주는 하느님 자녀의 삶임을 알게 됩니다. 성령께서 광야에서 우리 자신과 싸우게 하시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닮은 천사와 들짐승이 만나는 광장이 되게 하심입니다. 행복합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하느님 자녀라 불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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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1. 사순 제1주일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깊은 광야로 들어갑시다!>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성지 순례 때 잠시나마 광야 이곳저곳을 걸어 다닌 적이 있습니다. 즉시 다가온 느낌은 황량함이요 삭막함이었습니다.
광야 한 가운데 서서 아무리 둘러봐도 제대로 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머무를 곳도 쉬어갈 곳도 없는 불모지, 뱀과 전갈만이 위협하는 고통과 죽음의 땅이 광야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시시각각으로 기후가 변하는 곳, 때로 뜨거운 태양의 열기나 무지막지한 광풍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곳, 우리의 미성숙, 거짓신앙, 값싼 신앙, 유아기적 신앙이 낱낱이 드러나는 곳, 한 마디로 고통스러운 장소가 광야입니다.
모든 것이 결핍된 장소, 우리 각자의 맨얼굴과 인간적 한계를 명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장소, 생각과 마음이 단순화되는 장소, 하느님께 더욱 절박하게 매달리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때로는 고통의 장소, 때로는 은총의 장소인 광야를 40년 동안 걸어가면서 자신들의 신앙 안에서 그릇된 요소들을 정화시켜나갔습니다.
우상숭배에서 유일신이신 하느님께로 돌아섰습니다. 형식적인 신앙, 위선적인 신앙에서 진실하고 견고한 신앙으로 변모시켜나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약속의 땅에 입국하기에 합당한 신앙공동체로 거듭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가끔씩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일수록 더 자주 광야로 몰아넣으십니다. 우리가 원치도 않는 쓰디쓴 광야를 체험케 하시는데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순시기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과제 중에 하나가 ‘광야’에 대한 의미부여 작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광야 체험을 통해 나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게 하십니다. 또한 광야 체험을 통해 나 자신의 어둡고 부끄러운 내면을 직시하게 하십니다. 더불어 광야 체험을 통해 우리의 뾰쪽뾰쪽 모난 부분은 다듬도록 인도하십니다.
깊은 고독과 단절 속에 걸어온 광야 체험 힘겨운 여정이었지만, 동시에 거듭 날 수 있었던 은혜로운 순간들이었습니다.
이번 사순시기 동안 우리는 본격적인 공생활의 시작 전 예수님의 40일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성령의 인도로 그분께서는 유다 광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장 40일 동안이나 유다 광야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단둘이 머물면서 그분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간절히 찾으셨습니다.
그냥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하셨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그분께서는 정답을 찾으셨고, 기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세상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는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깊은 광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우리 안에 내적 광야, 텅빈 공간, 마음의 여유를 마련해야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나 단둘만 들어올 수 있지, 그 누구도 침해하지 못하는 나만의 감실, 내 안의 성전 하나를 건설해야겠습니다.
이번 사순시기, 우리 손에서 놓으면 죽을 것 같은 것이 무엇인지 한번 곰곰히 헤아려보면 좋겠습니다. 사실 손에서 놓으면 죽을 것 같았는데, 놓아보니 꼭 그렇지도 않더군요.
우리 시대 또 다른 하느님이 되신 스마트폰, SNS, 신용카드, 술, 담배, 깊이 빠져버린 취미활동...과감히 우리 손에서 한번 내려놓고, 하느님 아버지와 나 단둘만 머물수 있는 내 안의 성전으로 자주 들어가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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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1. 사순 제1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를 삽시다
-광야, 회개, 낙원-
수도원의 주변 풍경은 언제나 좋습니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좋습니다. 사순시기를 맞이한 초봄의 자취 연연한 배밭 분위기도 좋습니다. 배밭 곳곳에 산처럼 쌓였던 2500여개의 퇴비 부대중 수도원 위쪽의 배밭 배나무 마다 가지런히 놓인 것이 궁금해 마르코 수사에게 물어봤습니다.
-“배밭 퇴비 부대 누가 놓았습니까? 수사님은 다리가 불편해 힘들텐데요?”
“아,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원장 수사가 차로 날라다 놓았고 저는 나무를 베었습니다.”-
순간 충격이었습니다. 소리없이 드러나지 않게 그 많은 배나무마다 퇴비 부대를 배치한 원장 수사의 근면, 겸손이 살아있는 감동이었습니다. 즉시 사진과 더불어 격려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 큰 배밭에 퇴비 포대 배치가 완료되었네요! 우보천리牛步千里의 기적같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침맞은 다리는 괜찮습니까?”
“아직 이천리를 더 가야 합니다. ㅎㅎㅎ 다리는 완전히 다 나았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자기와의 싸움에 승리하였습니다! 그래도 무리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하세요!”-
환경이 좋아서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 아니라 관계가 좋고 깊어야 천국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나와 너의 도반 관계, 자연과의 관계, 나와의 관계입니다. 참으로 날로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의 살아있는 만남의 관계가 있을 때 비로소 천국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살 줄 몰라 지옥이요 살 줄 알면 천국임을 깨닫나이다.”
산책중 즐겨 부르는 노래 한 대목도 생각납니다.
“낙원이 어디냐고 묻지 말게나
심으며 웃는 얼굴 어화 낙원이로구나
내가슴엔 비가 개어 하늘 푸르고
내가슴에 언제나 봄 바람 분다.”
지금 여기서 낙원을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못삽니다. 똑같은 자리가 하느님을 향해 살면 천국이지만 하느님을 등지고 살면 지옥입니다. 마침 퇴비 부대 천연색 사진도 아름다워 사진에 담았고 글귀도 신선했습니다.
“친환경 농업을 선도하는 태농, 여러분의 수호천사! 태농 특등급 가축분 퇴비”
수호천사란 말마디를 보니 반가웠습니다. 태농회사 사장이 가톨릭 신자분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모저모로 참 자연스런 수도원 풍경이 그대로 천국임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마침 어제도 43년전 신림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로부터 또 쌀 한 포대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사랑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친구들과 같은 마음입니다. 하루 늦었지만 늘 건강하시고 기쁨 가득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6-6 윤학순”
43년전 낡은 빛바랜 사진을 찾아보니 학순이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메시지와 더불어 사진도 제자에게 전송했습니다. 지금은 하느님이 제 삶(사랑)의 전부이지만 당시는 아이들이 제 삶(사랑)의 전부였습니다. 참으로 어디서나 사랑이 충만한 곳 거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입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입니다. 광야와 천국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토마스 머튼은 사막(desert)을 사막으로 받아들일 때 거기가 낙원(paradise)이라 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후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장면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유혹을 받으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전 생애의 축소판임은 물론 우리 삶의 축소판입니다. 참 고맙고 힘이 되는 것은 이런 예수님께서 우리 광야 여정중에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지만 천사들은 그의 시중을 들었고 들짐승들과는 평화롭게 공존하신 주님의 모습이 그대로 광야이자 낙원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유혹에는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유혹이 없는 삶은 세상 어디도 없으며 유혹이 없다면 영적 성장도 성숙도 없습니다. 바로 함께 하시는 성령과 수호천사와 늘 친밀하고 깊은 소통관계에 있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의 광야 세상 유혹도 끊임없이 계속되지만 외로워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불안해할 것도 없습니다. 사탄의 유혹도 있지만 주변의 참 좋은 천사같은 도반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선물한 43년전 제자들 역시 저에게는 저를 격려하는 하느님 보내주신 사랑의 천사들처럼 보입니다.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그 곁에는 늘 성령과 천사가 주님을 호위하고 계시며 주님과 소통중이니 사탄도 어쩔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보다 우리는 훨씬 유리합니다. 우리의 광야여정중 1.성령과 2.수호천사와 더불어 3.예수님과 4.수호성인이 늘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협력자라 일컬어 지는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보나벤투라를 스승이자 수호성인으로 삼아 소통한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하느님의 나라 천국은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어떻게 하면 광야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 수 있겠습니까? 바로 다음 예수님 말씀이 답을 줍니다. 40일 광야 피정중 예수님의 깨달음이 농축된 결정체 같은 말씀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시공을 초월하여 만고불변의 살아있는 진리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임재臨在한 하느님의 나라를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전제 조건이 회개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마음 활짝 여는 회개입니다. 회개의 눈이 열릴 때 그대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회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 생전의 말씀뿐 아니라 그분의 부활이후에도 교회에서 게속 가르치는 진리도 믿으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도와 더불어 말씀 공부로 회개를 늘 새로이 하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눈이 열릴 때 곳곳에 보이는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이런 회개의 표징은 동시에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됩니다. 이런 표징이 우리 모두 깨어 오늘 지금 여기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합니다.
대표적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둘이 무지개와 십자가입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노아와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며 다시는 홍수로 인한 심판을 내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계약에 관한 표징이 바로 무지개입니다. 그러니 무지개를 볼 때 마다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생생히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 베드로 1서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궁극엔 주님의 십자가가 참으로 회개의 표징,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임을 일깨웁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가 하느님의 나라이며 구원의 방주임을 깨닫습니다.
“노아와 몇몇 사람만 방주에 들어가 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가리키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계시는데, 그분께 천사들과 권력들과 권능들이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희망의 표징인 하늘의 무지개는 신약의 파스카 예수님의 십자가로 대치됨을 깨닫습니다. 세례로 구원되어 바른 양심으로 구원의 방주이자 하느님 나라의 실현인 교회 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하여 어디에나 높이 달린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말씀하시는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 파스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광야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낙원이자 구원의 방주입니다. 끊임없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때 광야는 낙원이 됩니다. 성령이, 예수님이, 수호천사가, 수호성인이 우리를 도우시어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광야에서 낙원의 천국을 살게 합니다. 바로 최고의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인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 천국을 살게 합니다.
“주님,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십니다.”(시편25,5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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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1.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사순 제1주일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 성령의 作戰: 죄의 誘惑에 맞서는 代贖信仰, 共同善을 위한 使徒職의 實踐
창세 9,8-15; 1베드 3,18-22; 마르 1,12-15 / 사순 제1주일; 2021.2.21.; 이기우 신부
⒈ 사순 제1주일인 오늘 말씀의 주제는 죄의 유혹을 이겨내도록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먼저 제1 독서에서는 대홍수 동안 방주(方舟) 덕분에 살아남았던 노아와 그 가족들은 물론 함께
살아남은 모든 생명체들과 하느님께서 계약을 맺으시며, 그 표징으로서 무지개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류와 맺으신 이 첫 계약은 노아처럼 그 후손들이 하느님의
마음을 들 만큼 선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전제가 달려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노아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인간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선하게 살면 재앙을 겪을 염려를 하지 않고도
평화롭게 살 수 있게 해 주시겠다는 이 첫 계약은, 그래서 생명과 평화의 계약이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⒉ 그런데 불행하게도 생명과 평화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후손들
가운데에서도 죄는 또 다시 저질러졌고 이전의 무법천지를 방불케 할 만큼
죄를 저지르는 바람에 죄가 퍼지고 퍼져서 급기야 죄로 가득 찰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재앙적인 심판을 하시는 대신에 노아보다 더 충직한
아드님을 보내시어 세상에 퍼진 죄를 없애고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 대해 마르코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때에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마르 1,12).
그러니까 성령께서는 먼저 세례 운동으로 온갖 죄인들을 불러 모아
회개시키고 있던 요한을 찾아가신 예수님으로 하여금 죄인처럼 세례를 받게 하시고는
곧바로 유다 광야로 나가게 하시어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대홍수 심판의 교훈을 잊어버린 노아의 후손들이 죄를 짓게 되는
과정을 몸소 겪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죄를 짓기 전에 반드시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사탄이 건네는 유혹을 받으시며
사탄과 맞서시고 끝내 이기시는 영적인 싸움을 사람들이 배우게 하셨습니다.
⒊ 이를 두고 베드로는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하느님께서는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끝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 곧 여덟 명만 방주에 들어가 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노아의 방주가 아니라 세례의 물이 사람들을 구원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 세례는 요한이 베푼 것처럼 죄를 씻어 내고 마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받은 세례는 물의 세례를 넘어서는 부활의 세례요, 십자가의 세례이며,
불의 세례인가 하면 성령의 세례입니다.
이 두 가지 차원의 세례가 분명히 구분되는 것은,
물의 세례가 자기가 지은 죄를 씻는 것인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는
그분처럼 불의한 자들이 세상에서 저지르는 죄까지도 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처럼 거룩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물의 세례로써 자신의 죄도 씻어야 하고,
그러나 그분을 본받으려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불의 세례, 성령의 세례,
십자가와 부활의 세례로써 다른 이들의 죄까지도 씻으라는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이를 대속신앙(代贖信仰)이라 합니다. 이 대속신앙으로 모인 교회가 새로운 방주입니다.
⒋ 이러한 하느님의 말씀이 비추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어떠할까요?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들처럼 국제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파렴치한
행위를 하지 않으면서도 경제를 부흥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를 담은 한류를 세계에 전파하여 큰 호응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한국의 근현대사 150여 년 동안 한국인들은 일본의 식민통치도 받았고,
억울하게도 미국에 의한 일본 대신 강제분단도 당하고, 동족상잔의 전쟁에다가,
빈곤과, 군사독재 마침내, 민주화의 시대를 모두 거치면서 살았습니다.
이런 고난의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한(恨)많은 정서를 간직하기도 했지만,
그래서 워낙 슬픈 시절이다보니 조금이라도 흥겨운 일이 있으면
춤을 추며 그 기쁨을 드러내는 정서도 간직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최근 들어 한국 드라마나 영화들이 아시아권에서는 물론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큰 호응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인의 정서는 세계적으로 독특합니다.
나라를 잃어버렸었고, 전쟁통에 삶의 터전과 가족들까지 잃어버려야 했던 설움을
뼈저리게 겪은 슬픔이 마음과 얼국 속에 깊이 배어있는데다가,
분노스러운 군사독재까지 겪으면서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도 알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 와중에 산업화와 민주화까지 성취하면서 생긴 자신감을 바탕으로,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 국제경기에서 한국 선수들이 선전하면 자기 일처럼 기뻐하면서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표현하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그 모든 정서들이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 속에 다 녹아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⒌ 더 있습니다. 못된 자들이 저지르는 사회적 불의나 부패,
갑질이나 패악질 등을 보면 기어이 척결하고야 마는 정의감도 남다릅니다.
시간 낭비를 참지 못해서 ‘빨리빨리’해 치우고 마는 정서도 공통적으로 한국인들에게 깔려 있습니다.
이런 정서는 다른 나라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이고 그래서 세계인들이 부러워할 만한 의식입니다.
이런 의식 속에는 무려 역사가 반만년에 이르고, 빼어난 역량을 발휘한 선조들을 두고 있다는
자부심도 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수많은 분야에서 혁신하는 실력이 한국은 세계 최고입니다.
더군다나 가난한 나라들에 가서 그 실력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고 있습니다. 대단한 나라입니다.
이제는 이런 정서와 실력으로 우리 사회를 물질적으로만이 아니라
가치에 있어서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남에게 죄를 짓지 않는다는 정도로 착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할 것이 아니라,
뒤처진 이들을 부추겨 세우면서 더 공정하고 더 평등하며 더 정의로우며
더 인간다운 사회로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야무지게
착해야 하는 이유는 눈부신 우리나라 성장의 그늘에는 부끄러운 현실도 있기 때문입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8년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 가운데에서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1위를 차지했습니다.
한 해 동안 1만 3,67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고, 하루 평균 37.6명이 자살한 것이며,
인구 10만 명당 사망자 수인 자살 사망률은 26.6명으로 그 전 해보다 늘었고, 계속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이 수치로 자살률 1위를 연속적으로 16년 동안 차지하고 있습니다.
왜 자살을 합니까?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어 자살하는 겁니다.
부쩍 높아진 대한민국의 국격으로 잘 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진 또 다른 한편 구석에서는
코로나 사태 때문에 먹고 살기가 어려워 아예 세상을 등지겠다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겁니다.
예수를 믿는 크리스챤이 천만 명도 넘는다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치고는 너무나 창피한 일 아닌가요?
⒍ 우리의 신앙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라면
그분이 어떻게 고난을 겪으셨는지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광야의 유혹 기사는 공생활 이전에 겪으신 일만을 전해주는 것 같아 보여도,
실제로는 공생활 내내 그분이 겪으신 유혹입니다.
사탄은 사십 주야 동안 단식하여 몹시 허기진 예수님께 이렇게 유혹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응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던 자리에서 당신이야말로 생명의 빵이심을
밝히시는 말씀으로 이어졌고,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에 참여하여 영성체하는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빵의 유혹이 의미하는 것들
즉 돈과 물질과 편리함의 유혹에 대항해서 말씀의 힘으로 맞설 줄 알아야 합니다.
⒎ 또한 사탄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권능을 시험해 보라는 유혹도 건넸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고 응수하시기는 했지만, 사실 이 유혹은
공생활 내내 그분에게 다가왔던 억울하고 터무니없는 고난을 회피하고자 하는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어 주는 것이 겟세마니의 기도입니다. 옳은 일을 하면 이해받거나 인정받아야
하는데 오해를 받거나 심지어 의심받는다면 그 당사자가 겪어야 하는 고난이 이토록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가 피할 수 있도록 거두어주소서.” 하고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 고난을 피하고자 하는 유혹이 그만큼 끈질긴 것이었습니다.
아마 밤새 이 유혹에 시달리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끝내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하고 순명하는 믿음으로 이겨내셨습니다.
간사한 사탄은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 유혹으로 집요하게 공격해 왔습니다.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사실 누구에게나 고난의 방식 대신 좀 더 쉬운 방식으로 일을 성취해 내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는 말씀으로 그 끈질긴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⒏ 이렇듯 사탄의 유혹들은 하느님께만 충실하려는 믿음으로만 물리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려면 하느님 아닌 것이 하느님으로
위장하여 유혹하여 다가올 때에 정신 차리고 저항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으려면 우상이 동원하는 그럴 듯한 유혹 논리에
넘어가지 않아야 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돌아올 영광이나 이익이나 명예에 대해서조차도 마음을 비울 줄 알아야 합니다.
노아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표징은 무지개였고, 이는 생명과 평화의 계약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인류의 물질문명과 패권국가들이 이 계약을 정면으로 어기는 범죄를 저질러온 역사가 이제까지의 흐름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후손들이자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생명과 평화를 위해 거듭 다짐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복신앙을 넘어서는 대속신앙에 바탕해서, 이를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 공동선에 기여하는 사도직을 다짐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공동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 앞에 보여드려야 할 생명과 평화의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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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1. 사순 제1주일 복음묵상.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셔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단식을 하셨기 때문에 배고픔의 고통 속에서 이런 유혹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상황을 묘사를 하긴 하되 조금은 뉘앙스가 다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성령의 인도는 마치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런 느낌이 들지만 오늘 복음 마르코 복음에서는 성령이 광야로 내보내신 것은 마치 어떤 강력한 힘에 의해 강압적으로 예수님께서 광야로 내몰리는 상황과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광야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허허벌판처럼 광활한 땅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모습이 연상이 될 것입니다. 외롭고 고독한 이미지도 상기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그들은 40여 년의 세월 동안 광야를 걸었습니다. 실제 거리는 불과 얼마 되지도 않은 거리였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이집트 백성을 그토록 오랜 시간을 고생하게끔 하셨을까요? 바로 그 기간은 인내와 시련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려는 하나의 시험장이었던 것입니다.
광야를 걸어갈 때는 수많은 무리를 지어서 갔을 겁니다. 광야가 상징하듯이 광야의 그 여정은 메마름을 또한 상징할 겁니다. 우리의 삶 또한 메마른 광야를 지금 순례하는 순례자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무리 속에서 간다고 하지만 자신이 주체가 되어 홀로 걷는 과정입니다. 40일 동안 단식을 하시면서 광야에서 지내신 것도 세례를 받으신 후에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40일이라는 숫자가 여러 가지를 상징하지만 여기서 저는 ‘정화’를 상징한다고 묵상하고 싶습니다. 40일은 우리의 삶에서는 우리가 사는 삶 전체와 같을 거라고 봅니다. 태어나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시간 말입니다. 또 하나는 세례를 받은 후부터 하느님 나라에 가는 시간까지로 봐도 될 것입니다. 아마도 후자가 더 가까운 뜻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정화는 어떤 정화일까요? 바로 죄를 씻는 과정일 겁니다. 죄를 씻는 과정에서는 고난이 수반되는 게 하나의 법칙과도 같습니다. 그 고난을 우리는 일명 이름하여 ‘보속’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제2독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불의한 자 즉, 저희를 위해 고난을 겪으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 고난은 바로 예수님의 피 흘림으로 인해 죽으심을 말할 겁니다. 몸은 죽으셨지만 영으로 다시 생명을 받으셨다고 베드로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영은 성령을 의미하는 것일 거라고 보여집니다.
제1독서에서도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노아의 방주를 통해 방주에 들어간 사람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때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2독서에도 나옵니다. 바로 물입니다. 아마 이 물이 성령을 상징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독서 21절에 이것이 세례를 상징하고 또 이게 구원으로 이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베드로 사도는 이때의 이 세례는 단순히 몸의 때를 씻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로 이어져서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좀 더 단순화시켜서 한번 정리를 한다면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삶과 그 삶의 궤적을 따라 걸어야 할 겁니다. 예수님의 그 고난의 최종 종착역은 구원입니다. 그 과정의 일부가 바로 세례였던 것입니다. 그 세례는 그 고난의 끝에서 이루어진 영광스런 부활이 가져다준 힘으로 바른 양심을 청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른 양심이 과연 무엇일까요? 모르긴 몰라도 아마 하느님의 마음과 같은 게 아닐까요? 죄로 물든 몸을 성령의 물로 깨끗하게 씻어져 거룩한 하느님의 영으로 다시 거듭나야 하는 것일 겁니다. 우리는 새롭게 부활할 몸을 입기 위해서 지금 예수님과 함께 나흘째 골고타 언덕을 올라가고 있습니다. 골고타 언덕 너머에 영광스러운 부활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언덕을 올라가는 게 힘에 겹습니다. 조롱과 멸시도 있습니다. 그 조롱과 멸시도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당신의 자녀들이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을 살리시고자 그 모진 고통을 오로지 당신 혼자의 몸으로 모든 걸 감당하시면서 이겨내셨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도 광야의 여정과 똑같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악마로부터 받은 유혹 외에도 골고타라는 그 광야를 지나면서도 아마 스스로에게서도 유혹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묵상을 한번 해봅니다. 그 유혹은 아마도 십자가를 지시는 걸 포기하고 싶은 유혹 말입니다. 왜 그런 추측이 가능하느냐면 예수님께서는 신성만 가지고 계신 게 아니라 한편으로는 인성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절대 그런 유혹이 있었다고 하셔도 굴하지 않으셨습니다. 골고타 언더을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설령 넘어지시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당신의 십자가는 끝내 당신의 힘으로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할 겁니다. 그 힘은 고통 속에서 그 고통을 인내하면서 얻어진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때 그런 인내력을 키우지 않으면 부활의 힘은 그만 좌초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의 영광을 맛볼 수도 없습니다. 이 부활의 영광은 마치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하느님께서 모든 세대를 위해 세우신 계약의 표징인 무지개와 같을 것 같습니다. 이 무지개는 하느님의 아름다운 약속의 징표입니다.
맑고 화창한 날에는 아름다운 무지개를 볼 수가 없습니다. 무지개는 비가 온 뒤에 볼 수가 있습니다. 비도 구름이 있어야 내릴 수 있습니다. 비도 구름 뒤에 있는 해에서 햇빛이 비쳐줄 때 아름다운 무지개를 볼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 비는 우리의 삶에서 비바람과도 같은 고난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이 무지개가 우리와 하느님을 이어주는 든든한 다리가 되어 줄 겁니다.
이 다리는 하느님이 만들어주시지는 않습니다. 노아가 구원의 방주를 스스로 만들었듯이 이 다리도 스스로 자기가 놓아야 할 겁니다. 그 다리는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일어나는 모든 유혹을 잘 이겨내면 그냥 덤으로 자연적으로 비온 뒤에 구름 뒤에 해만 있으면 자연적인 현상으로 생기듯이 힘든 인생이라는 광야를 지나는 저희 뒤에서 태양처럼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실 겁니다. 그러니 희망의 무지개를 향해 오늘도 다시 한 번 더 힘차게 골고타 언덕을 올라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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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1. 김 로마노 형제님.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사순 제1주일 제1독서(창세9,8~15)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내가 땅 위로 구름을 모아들일 때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 나는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살덩어리들을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겠다. (13~15)
본문에 언급된 계약은 홍수 이전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약속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너와는 내 계약을 세우겠다. 너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 들어가거라.'(창세6,18) 이제 그 약속이 현실이 되어 체결되고 있는 것이다(창세9,9).이처럼 신실하신 하느님께서는 대홍수 심판 가운데서 노아와 그와 함께 한 가족들을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황폐해진 세상의 모습에서부터 다시 살아가야 할 앞날을 우려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이들에게 재차 찾아 오셔서 장래를 보장해주는 계약을 맺으신 것이다.
창세기 9장12절에 보면,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라는 말이 나온다. '표징'으로 번역된 '오트'(oth)는 '징조', '기호', '증거'로도 번역되는 단어로서 누구나 알 수 있도록 객관적으로 뚜렷이 드러나는 어떤 물증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계약을 맺으시되, 의심많고 변덕스러운 인간이라도 이 계약을 굳게 신뢰할 수 있도록 너무나 뚜렷한 증거물로서 무지개를 세우셨다. 그러나 '계약'(berit) 그 자체는 계약을 보증하는 '표징'(오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따라서 계약은 그 증거물에 의해 보증된다기 보다는 그 자체로서 절대적 권위를 지닌다.
'무지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쉐트'(qesheth)는 일차적으로 '활'(1사무2,4)이란 뜻도 있다. 활의 모양이 무지개와 비슷하기 때문에 동일한 단어가 활에도 사용된 것인지, 아니면 활의 모양을 본따서 동일한 이름을 무지개에 적용했는지 그 순서는 확실치 않다.
어쨌든 자연의 세계와 인간의 도구의 이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무지개가 활로 비유된 사례는 고대 근동 지방의 신화에도 나온다.
예를 들어, 아라비아 신화에는 무지개가 쿠자(kuzah)神이 사용한 무기였으며, 싸움이 끝난 뒤에 이를 구름 사이에 걸어 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바빌론 신화에서도 무지개는 므로닥(Marduk; 예레50,2)신(神)이 악한 신(神) 티아맛(Tiamat)을 물리치는 활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이 신화들은 무지개, 즉 활을 하늘에 걸어 둔 것은 전쟁이 없는 평화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이 세상을 다시는 홍수로 심판치 않겠다는 하느님께서 주신 평화의 선언을 확증하는 증거로서 무지개를 하늘에 두셨다는 성경 말씀이 다소 와전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구름'에 해당하는 '아난'(anan)과 '모아 들이다'(덮다)에 해당하는 '아난'(anan)은 동일한 어근이며, 다만 '구름'의 모음이 장모음이란 점만 다르다. 본문에서 '모아들이다'(덮다)로 변역된 '아난'(anan)의 어원적인 의미는 '드러내다', '나타나다'이며, 특별히 '장애물로서 개입하다'라는 뜻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동사의 주어가 '하느님'이란 사실로서 자연현상의 배후를 주관하시고 지배하시는 분이 창조주 하느님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본문을 '하느님께서 하늘을 가리우기 위해 구름을 나타나게 하실 때'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구름을 고난과 위험을 비유적으로 나타낼 때에도 여러번 사용되었다 (에제30,3.18; 32,7; 34,12). 하지만, 먹구름 속에서도 인자하신 하느님께서 평화의 무지개를 준비해 주신 것을 기억하는 신앙인은,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짙게 하늘을 덮은 구름 속에도 찬란한 무지개가 감추어져 있음을 믿으며, 난관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15)
본문의 '기억하다'에 해당하는 '자카르'(zakar)는 원래 '새기다','표시하다'는 말에서 유래하며 마음에 깊이 새겨 절대 잊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무지개란 표징을 주신 이유가 계약에 대한 하느님 자신의 기억을 위한 것이란 사실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기억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 불변하시는 하느님의 기억에 그 계약의 바탕을 둠으로써, 결단코 계약의 파기나 망각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만천하가 다 알수 있도록 확실하게 해 준 것이다.
따라서 무지개를 볼 떄마다 인간이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도 잊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계약을 신실히 지켜 가시는 하느님의 모습이며, 그 약속에 따라 새 하늘과 새 땅까지 우리를 인도해 가실 그분의 강력한 의지인 것이다(2베드 3,13).
마지막으로 우리가 본문을 통해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국지적인 홍수는 발생할 수 있지만, 바로 노아 홍수와 같은 이 세상 전체를 멸하는 그러한 홍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 대한 심판 자체가 없을 것이란 의미는 절대 아니다.
성경은 이 세상 마지막 날 사람들이 노아의 시대와 같이 먹고 마시며 향락에 젖어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불현듯 재림하셔서 홍수 심판보다도 훨씬 두려운 불의 심판으로써 모든 죄악된 것을 징벌하실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마태24,38.39; 2베드3,6.7).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마지막 날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항상 깨어서 그 날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24,44)
사순 제1주일 복음(마르1,12~15)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12~13)
마르코 복음 1장 12절과 13절은 예수님의 세례 사건(마르1,9~11)에 이어서 예수님의 또 다른 공생활 준비인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와 루카 복음사가가 비교적 길게 기록한 내용(마태4,1~11; 루카4,1~13)을 마르코 복음사가는 단지 두 절로 짧게 기록하고 있다.
마태오와 루카는 '예수님의 사탄에 대한 승리'라는 하나의 독립된 주제로 단락화시킨 반면에, 마르코는 앞으로 공생활 기간 동안 끊임없이 반복될 '사탄과의 대결의 시작'이라는 관점에서 기록했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 1장 12절의 '곧'으로 번역된 '카이 유튀스'(kai euthys; and immediately; at once)는 직역하면 '그리고 곧'이다. 그러니까 '광야의 유혹'과 바로 이전의 '예수님 세례 사건'이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고, '곧'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쉴새없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로(마태4,1) 사탄의 유혹을 받기 위해 광야로 가셨다는 사건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을 평탄한 길로만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라, 때로는 고난이나 시험의 길로 인도하심을 알게 한다(요한16장 참조).
마르코 복음 1장 12절의 '광야'에 해당하는 '에레모스'(eremos; wilderness; desert)가 팔레스티나 서북쪽의 콰란티니아(Quarantania)인지, 모세가 40일 동안 단식을 한 시나이 산인지, 타볼 산인지 불확실하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광야란, 사람들이 살지 않는 황폐한 곳이며, 사람들과의 접촉이 없는 고독한 곳, 그리고 의지할 아무 것도 없고 짐승들이나 악령들이 주로 거주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1장 12절의 '내보내셨다'에 해당하는 '에크발레이' (ekballei; sent; driveth)는 직설법 현재 동사로서, 직역하면 '그가 내던지고 있다'이다.
특히 마르코가 사용한 단어는 마태오가 사용한 '아네크테'(anechthe; '그가 이끌리어')와 루카가 사용한 '에게토'(egeto; '그가 이끌려')에 비해서 훨씬 역동적인 뉘앙스를 준다. 또한 '광야'에서 '~로'에 해당하는 '에이스'(eis; into)는 '안으로'이기 때문에, 본문은 '그가 그 광야 안으로 내던지고 있다'가 된다.
말하자면, 성령께서 예수님을 사람들과 단절된 고립된 상태로,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는 곳으로 강하게 내던져, 예수님으로 하여금 혼자 외롭게 시련과 더불어 공생활 준비 과정을 겪게 한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사십 일'에 해당하는 '텟세라콘타 헤메라스'(tesserakonta hemeras; forty days)는 유대인들이 '땅'의 숫자로 여기던 '4'와 '하늘'의 숫자로 여기던 '10'을 곱한 수로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어떤 일을 준비하는 기간을 상징하는 수이다.
성경에서는 주로 '고난의 기간들'을 상징하는 숫자로 쓰였는데, 하느님께서 노아 시대에 모든 생물들을 없애기 위해 사십 주야 동안 세상에 비를 내리셨고 (창세7,12),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뒤에 광야에서 40년간 살았으며 (신명8,2), 모세가 단식하며 사십 주야를 시나이 산 위에서 있었고(탈출34,28; 신명9,9.11.18), 엘리야는 광야를 사십 주야 걸어서 호렙산에 도착했다(1열왕9,18).
마르코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마태오와 루카는 예수님께서 광야에 계시는 40일 동안 아무 것도 드시지 않으셨는데(마태4,2; 루카4,2), 이것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받기 전 시나이 산에 올라가 40일 단식했던 모세의 모습과 동일하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님께서 모세 이상으로 하느님의 백성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이끌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철저히 준비하셨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사탄'으로 번역된 '사타나'(satana)는 '적대자'(the Adversary)라는 뜻으로 구약의 '사탄'(satan)을 음역한 단어이다(욥2,7). 사탄은 신,구약에서 끊임없이 하느님과 그의 백성들을 적대하고 하느님 대전에 참소(고발)하는 영적 존재로 등장한다.
여기서 '유혹을 받으셨다'에 해당하는 '페이라조메노스'(peirazomenos; tempted)의 원형 '페이라조'(peirazo)는 '(넘어지게)시도하다', '증거를 진술하다'라는 뜻이다.다시 말해서 이것은 넘어지게 하는 유혹(temptation)의 의미와 인간을 더욱 성숙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단련(test)이라는 이중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받으신 유혹도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메시야로서의 사명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한 사탄의 유혹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련은 단지 유혹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 아래서 예수님의 인성을 단련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광야와 들짐승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예수님깨서 받으신 외적인 시련(outer trial)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했고, 마태오나 루카는 예수님께서 유혹받으신 세 가지 내용을 기록하여 내적인 유혹(inner temptation)을 강조했다.
마르코 복음 1장 13절의 '들짐승들'에 해당하는 '테리온'(therion; wild beasts)은 사나운 야생 짐승을 가리키는데, 예수님께서 유혹 받으신 유대 광야에는 실제로 표범이나 여우같은 들짐승들의 위협이 항상 존재했다.
원조 아담과 하와는 짐승의 위협도 없고 배고픔의 고통도 없는 에덴 동산에서도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 대전에 죄를 지었지만, 제2의 아담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을 굶으시고 주변에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련을 이기셨다.
끝으로, 마르코 복음 1장 13절에서 타락한 천사인 사탄과 선한 천사(히브1,14; 탈출14,19; 33,2)의 대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사탄은 하느님을 섬기고 찬양하는 자신의 의무를 망각하고 오히려 하느님과 같이 되려고 했고 예수님을 유혹하고 있는 반면에, 선한 천사는 본래의 사명에 충실하여 예수님을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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