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기도시리즈, 사명,1./출애굽기 3:1-10
1 <불붙는 나무> 모세가 이드로의 양 떼를 돌보고 있던 때의 일입니다. 이드로는 미디안의 제사장이며 모세의 장인입니다. 모세는 광야의 서쪽으로 양 떼를 몰고 갔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산인 호렙 산에 이르렀습니다. 2 그 곳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의 불꽃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나무는 불붙고 있었지만, 타서 없어지지는 않았습니다. 3 그래서 모세는 “가까이 가서 이 이상한 일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어떻게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을 수 있을까?” 하고 말했습니다. 4 여호와께서 모세가 그 나무를 살펴보려고 올라오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무 사이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며 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5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더 가까이 오지 마라. 네 신발을 벗어라. 너는 지금 거룩한 땅 위에 서 있느니라. 6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두려워서 얼굴을 가렸습니다. 7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또 이집트의 노예 감독들이 내 백성을 때릴 때에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들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를 알고 있다. 8 나는 그들을 이집트 사람들에게서 구해 주려고 내려왔다. 나는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해 내고 그들을 넓고도 좋은 땅으로 인도하여 갈 것이다. 그 곳은 젖과 꿀이 넘쳐 흐를 만큼 비옥한 땅이며, 가나안 사람, 헷 사람, 아모리 사람, 브리스 사람, 히위 사람, 그리고 여부스 사람들의 땅이다. 9 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고,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괴롭히는 것을 보았다. 10 그래서 나는 지금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려 하니, 가거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어라!” (쉬운 성경)
영국의 시인 엘리자베스 바렛 브라우닝(Elizabeth Barrett Browning, 1806-1861)은 이렇게 오늘 말씀을 노래했습니다. “땅은 하늘로 채워져 있고, 모든 덤불마다 하나님으로 불붙어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자만이 그의 신을 벗는다.”
오늘 말씀은 흔히 “불타는 가시떨기나무(Burning Bush)”로 알려진,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는 말씀으로 유명합니다. 사명과 거의 같은 개념으로 쓰는 말 중에 소명(calling)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명과 소명은 거의 같은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굳이 구별하자면, 소명은 사명이 보다 구체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면 됩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소명은 그 사람의 직업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의 직업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gifts)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사명을 말하기 전에 먼저 모세가 태어났던 시대적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때(God’s timing)와 관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그의 때에 그의 뜻과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한 사람을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 솔로몬이라는 사람은 그 시대가 낳은 천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박학(博學)하고 다재 다능한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시적인 재능이 뛰어나서 많은 1,005개의 시를 썼고, 지혜가 뛰어나서 3,000개의 잠언을 남겼습니다(열왕기상 4:32). 그런 그가 쓴 말씀 중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He hath made every thing beautiful in his time., 전도서 3:11)”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불러서 “내가 너를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겠다(창세기 12:2)”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무려 700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들은 때가 75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었으니까 100년을 더하고, 그 후 한 세대를 약 100년으로 계산하면 이삭, 야곱, 그리고 고센에서 야곱의 가족이 약 400년을 살았으니까 그 때까지를 계산하면 약 700년이 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렇게 700년이라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 이렇게 나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또 이집트의 노예 감독들이 내 백성을 때릴 때에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들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를 알고 있다. 나는 그들을 이집트 사람들에게서 구해 주려고 내려왔다. 나는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해 내고 그들을 넓고도 좋은 땅으로 인도하여 갈 것이다. 그 곳은 젖과 꿀이 넘쳐 흐를 만큼 비옥한 땅이며, 가나안 사람, 헷 사람, 아모리 사람, 브리스 사람, 히위 사람, 그리고 여부스 사람들의 땅이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고,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괴롭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려 하니, 가거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어라!” (출애굽기 3:7-10)
여러분, 성경은 흥미진진한 한편의 완벽한 드라마입니다. 완벽한 드라마라고 하는 이유는 구성과 전개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치밀합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보았던 드라마 중에 제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수사반장”인가 하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숨은 간첩을 잡는 이야기인데, 그 구성과 전개가 아무 엉성합니다. 감쪽같이 숨어서 위장하고 사는 간첩을 어떻게 잡는지, 낮에는 직장 생활하고, 밤에는 이불을 둘러쓰고 북한으로 무전을 쳐서 정보를 보내는데, 그 사람의 정체를 아무도 모릅니다. 이 간첩을 어떻게 잡습니까? 무슨 단서가 있어야 할 텐데, 어느 날 형사가 어떻게 알았는지 그 사람의 집 옆에 잠복해 있다가 갑자기 덮쳐서 잡습니다. 그러면 보는 사람들이 너무 허망해서 “에이! 뭐 그런 게 있어?” 하면서 재미없어 합니다.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속에 극적(劇的)인 반전(反轉)이 있어서 손에 땀을 쥐게 합니다. 모세 이야기는 하나님의 드라마의 백미(白眉)를 보여 줍니다. 애굽의 고센 땅에 정착한 야곱의 식구들은 그 때부터 고센의 비옥한 땅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수가 불어납니다. 나중에는 애굽의 바로에게 위협이 될 정도로 그 수가 불어납니다(출애굽기 1:9-10). 그래서 바로는 이들을 국고(國庫)를 짓는 노동에 동원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흙을 이기고, 벽돌을 굽는 노동을 시킵니다. 이런 정책도 아무 소용이 없이 히브리 사람들은 불어납니다. 바로는 히브리 산파들(midwives)에게 남자 아이가 나오면 감쪽같이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 바로의 명령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히브리 산파들의 말은 한편의 코미디처럼 들립니다. “히브리 여자들은 이집트 여자들보다도 훨씬 튼튼합니다. 그래서 히브리 여자들은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 다급해진 바로는 모든 히브리인들은 남자 아이가 나오면 나일강 가에 내 버려야 한다는 무서운 명령을 내립니다.
바로 이 때, 히브리인 중에 레위 지파 집안의 한 사람이 결혼을 합니다. 그 부부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부부는 이 아이를 세 달 동안 숨겨서 길렀습니다. 성경에는 이 아이의 엄마의 눈에 이 아이가 너무 잘 생겨서 내다 버릴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NLT 성경에는 “She saw that he was a special baby”라고 썼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이 아이를 숨겨 기를 수 없어서 이 부부는 이 아이를 갈대 상자에 넣어 강가의 갈대 숲에 놓아 두었습니다. 누구든지 남자 아이를 낳으면 강 가에 내다 버리라는 바로의 명령을 비웃듯이 이 아이는 뜻하지 않게 마침 강 가에 목욕을 하러 나왔던 애굽의 공주에게 발견이 되어 공주의 아들로 키워집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자기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돌려 보내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는 히브리 민족을 억제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그의 막강한 권력을 동원하지만, 아이러닉하게도 강 가에 버려진 이 히브리 아이는 죽지 않고 오히려 애굽의 궁중에서 애굽의 왕자로, 애굽의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합니다. 이 아이가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가 어떻게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성경은 성경으로 푼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모세의 부모는 믿음이 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비범한 아들을 주셨다는 것을 알자 그 아기를 잡아 죽이라는 애굽 왕의 특명이 내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아기를 구원해 주시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석 달 동안 숨겨 놓고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어른이 되었을 때 애굽 왕의 손자로 불리는 것을 거절한 것도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잠시 동안의 쾌락을 위해 죄에 빠지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나누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히브리서 11:23-25) 모세의 민족의식은 믿음의 부모에게서 받은 것으로 봐도 좋지 않겠습니까? 모세의 친 어머니였던 요게벳(Jochebed, 출애굽기 6:20)이 모세의 유모가 되어 모세에게 젖을 먹이지 않습니까?
이제 모세의 사명에 대한 말씀으로 드려야 하겠습니다. 자기 민족 히브리인들을 위한답시고 히브리인들을 학대하는 애굽 사람 하나를 때려 죽인 것이 빌미가 되어 모세는 도망자가 됩니다. 모세는 바로가 자기를 찾을 수 없는 머나먼 지역으로 떠납니다. 그 지역이 미디안(Midian)입니다. 지도에서 보면 미디안은 시나이 반도 끝에서 동쪽으로 아카바 만(Gulf of Aquaba)을 건넌 지역입니다. 그 정도 떨어진 지역이면 충분히 바로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모세의 나이 40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Jethro )의 사위가 된 모세는 양을 치면서 다시 40년을 보냅니다. 정작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때는 그의 나이 80이 된 때였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지금보다 좀 오래 살았다는 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그 때는 모세에게 이미 혈기왕성한 때가 지난 때였습니다. 이제는 자기 속에 뜨거웠던 민족의식도 어느 새 사그라들고, 미래의 삶에 대한 의욕도 사그라들었던 때였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마치 그 때를 기다리셨다는 듯이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날 모세는 서쪽으로 양 떼를 끌고 가서 호렙산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호렙산은 시내산이라고도 합니다. 호렙산은 시나이 반도 거의 끝에 있는 산입니다. 후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 율법을 받는, 바로 그 산입니다. 풀려지지 않는 미스터리입니다. 왜 그 날 모세는 서쪽으로 양 떼를 몰고 갔겠습니까? 지도를 보면 단순히 서쪽으로만 가면 아카바 만이 있기 때문에 건널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밑으로 내려 와야 합니다. 양을 몰로 간다면 족히 한 달은 걸려야 하는 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네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낸 후, 너희 모두는 이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인데, 이것이 너를 보내는 증거다.” (출애굽기 3:12) 이 말씀이 이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을까요?
떨기 나무 불꽃 중에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출애굽기 3:5-6) 이 말씀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거룩한 땅”, “신발을 벗으라” 이런 말씀들이 우리 주목을 끕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모세는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Here I am, 출애굽기 3:4)”하고 응답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내 백성을 인도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모세에게 주신 사명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사명은 모세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벅찬 것이었습니다. 모세에게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충분한 자질(資質)이 없었습니다. 모세는 바로를 겁내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미 그런 일을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아 힘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모세는 말을 잘 못해서 대중의 마음을 휘어 잡을 수 있는 웅변술이 없었습니다.
사명이라는 주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주제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가장 치명적인 오류 중의 하나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은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것만을 감당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런 것은 사명이라기 보다는 봉사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명은 자기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세도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고 했고, 예레미야도 그랬고, 그 후에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기에게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사명은 여러분이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여러분이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오해하고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은 거절합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있는 것만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시대에 참다운 사명자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나를 찾고, 나의 인도를 받고, 나를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모세는 이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단 한번 모세가 이 사실을 망각하고 마치 자기에게 능력이 있는 것으로 착각했을 때, 하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네가 이 많은 백성들 앞에서 나의 영광을 가리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약속으로 주겠다던 그 땅으로 백성을 인도하지 못할 것이다.” (민수기 20:12)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