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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노인 간호 학교(Altenpflege Schule) 체험기
어학 코스 1년을 마친 후 노인 간호학교에 입학했다. 서독출신 학생이 가장 많았고, 동독인, 이탈리아인, 그리고 한국인 등 총 28명 학생들이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 독일에는 마이스터 고등학교처럼 직업과 연계하여 공부할 수 있는 학교가 많고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선택의 기회가 많았다. 이 학교에서 입학을 허가해 주었으므로 유학생 신분으로 독일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이 학교 과정은 3년인데 블록 수업으로 진행되었다. 몇 주 동안 학교에서 이론을 배우고 기초를 익혔다. 이어서 다음 몇 주 동안은 배운 것을 토대로 실습을 했는데 간호사와 똑같이 일했다. 양로원의 각 병동에 옮겨 다니며 일하는 것이 재미있고 새로웠다. 양로원 뿐 아니라 일반 병원의 내과병동 실습, 방문 간호 실습, 정신병원 실습 등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실습 후엔 수간호사에게 평가를 받기에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 못지않게 열심히 배우면서 최선을 다했다. 학생 신분이지만 실습기간 동안 노동력을 제공하기에 재학기간동안 일정하게 월급을 받았다. 수입이 생기니 국민연금도 자동으로 가입하게 되고 좀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노인 간호에 필요한 해부학(아나토미), 심리학, 병리학, 재활치료, 실습 후 보고서 쓰기, 목욕시키기 및 섭생 등등 새로운 것들을 배웠다. 생물을 좋아해서 해부학을 배울 때 재미있었다. 선생님들이 칠판에 쓰면서 가르치실 때 단어의 뜻을 잘 모르니 철자도 정확히 몰라 옆에 앉은 학생들에게 묻고 또 그들의 노트를 보고 기록할 때가 많았다. 용기 있는 한국 동료 한 명이 교재를 복사해 달라고 요청하여 나누어 공부하고 서로 공유하기로 했다. 복사한 것을 사전을 찾아가며 한 단어 한 단어를 해석하며 공부했다. 한 페이지를 공부하는데 몇 시간씩 걸렸다. 끙끙거리며 사전을 일일이 찾아가며 공부하느라 진도에 맞춰 따라가기가 엄청 어려웠다. 다행히 교회에 그 간호학교 선배인 독일자매가 한 명 있어서 여러 가지 정보를 알려 주었다. 말로 설명해주는 것은 쉽게 알아들을 수 있어서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많이 도움이 되었다.
이론 수업을 받을 땐 시험을 자주 보았는데 100%논술이었다. “간의 역할을 써라”라는 식이었다. 공부한 것을 깨알같이 빼곡하게 써야 좋은 점수가 나왔다. 어학실력이 부족했던 초기에 문제의 뜻을 정확히 이해 못했을 때 더러 실수로 다른 내용을 섞어 써도 감점하지 않아 위로를 받았다. 시험문제 자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엇갈린 답을 쓰면 화살표로 줄을 이어주고 점수를 주었다. 학생이 알고 있는 것은 정답처리를 해 준 것이다.
이론 공부가 끝나고 실습을 할 때 학생 스스로 실습장소를 찾아야 했다. 이 사실을 몰랐던 나는 첫 실습을 할 때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학교에서 실습 장소를 정하여 알려주는 줄 알고 그냥 기다렸던 것이다. 실습 날짜가 내일로 다가와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상황을 어찌할지 몰라 걱정했더니 선배선교사님이 잘 아는 양로원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시며 내가 직접 전화해 실습자리를 구해보라고 했다.
“짧은 독일어 실력으로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되어 가슴이 떨렸다. 전화 통화 시 질문할 것을 문장으로 미리 작성하여 놓고 전화를 걸었다. 떨리는 마음이었지만 용기 내어 천천히 말하니 상대방도 천천히 대답해 주었다. 다행히 그 곳에 한 자리가 비어 있어서 차질 없이 바로 실습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은 소심하던 내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고 적극적으로 실습에도 임하게 했다.
실습하러 간 첫 날 수간호사가 안내하며 방문을 열자 독특한 냄새가 코를 강하게 자극했다.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강렬하고 낯선 냄새가 온 몸을 휘감았다. ‘여기서 과연 일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첫날의 강한 인상과 달리 매일 그 곳에서 새로운 일을 배우며 적응하니 이론 공부시간보다 실습시간이 더 빨리 가고 일도 금방 익숙해졌다.
실습생은 수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어떤 노인을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간호하고, 시중들어야 하는지 할 일을 부여받는다. 그 곳에는 간병인이 없고 씻기고 옷 입히고 밥 먹이는 등 간호사들이 하는 일을 시키는 대로 다 해야 했다. 생명이 다하여 임종이 임박한 분의 임종과정을 지켜보아야 할 때도 있었다. 임종하신 분을 씻기고 새 가운을 입혀 작별을 하는 과정도 경험하였다.
여러 병동에 돌아가며 근무하다 보니 구성원에 따라 일하는 방법이 다양함을 보았다. 부지런한 간호사들이 많이 근무하는 병동에서는 노인들이 귀찮아 할 만큼 자주 목욕을 시켜 욕창이 잘 생기지 않았다. 어떤 분은 치매로 욕을 하며 때리려고 위협을 하기도 하고 쉬지 않고 비상벨을 눌러 달려가게 하는 분도 많았다. 침대에 누워 꼼짝 못하고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다양한 모습을 보며 이런 분들을 돌보는 일은 아름다운 배려가 필요함을 보았다.
이론공부를 할 때는 학교에서 시험을 보지만 실습할 때는 담당 선생님이 학생이 일하는 양로원까지 직접 출장을 오셔서 실습 시험을 보았다. 실습 시험을 위해서 미리 시간과 대상을 정해야 한다. 치료할 일이 많은 분을 선택하면 다소 힘들지만 배우는 것이 많지만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대상을 정한 다음 대상이 되시는 분에게 미리 말씀드린 후 신뢰와 안정감 속에서 서로 교감이 되도록 연습했다.
대장암 수술을 하여 배에 인공항문을 가지신 분을 대상으로 시험을 보기로 했다. 먼저 주무시는 분을 깨워 상반신을 일으켜 미지근한 물로 양치를 시켜드렸다. 다시 상반신을 평평하게 눕히고 물수건으로 얼굴과 목을 닦아드린 후 가슴에서 먼 쪽인 손과 팔을 닦았다. 가슴과 배를 닦아 드린 후 이어서 인공항문의 거즈를 갈고 등 쪽을 2회에 나누어 닦은 후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제거하고 윗옷을 입혔다. 그 다음 하반신도 앞과 뒤를 꼼꼼하게 씻긴 후 옷을 입혀드렸다. 정해진 시간 안에 해야 할 모든 일을 순서대로 하고 편안한 상태에서 다 마치자 선생님이 웃으며 가장 좋은 점수 ‘1’점을 주었다. (점수체계 1점=A, 2점=B···6점=F)
에르고 테라피(작업 치료) 시험은 노인들을 여러 명 모시고 준비했다. “꽃으로 꾸미기”를 주제로 잡았다. 손의 미세한 부분을 운동시켜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들에 핀 화려한 빛깔의 양귀비꽃을 뿌리 채 뽑아서 꽃병에 꽂아놓고 보면서 꾸미는 치료수업을 하였다. 도화지에 꽃 모양의 밑그림을 그린 후 얇은 색종이를 찢어 작게 동글동글하게 만든 후 양귀비를 꽃과 줄기 잎에 색깔별로 구분하여 풀로 붙여 완성하도록 하였다. 노인들은 손의 감각이 퇴화되어 매우 느린 속도로 작업을 했다. 그 작업을 마친 후에는 자리를 옮겨 스트레칭을 하고 아주 가벼운 쉬폰 수건을 천정 쪽으로 던졌다가 잡으며 동작이 큰 팔다리운동을 하였다. 모든 활동은 심장이 먼 곳부터 시작하여 가까운 곳으로 했다. 한국에서 아이들과 체육수업을 했던 경험들이 이런 일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일반 내과 병동에서 실습은 양로원보다 많이 복잡하였다. 실습생은 첫 며칠 동안은 간호사를 따라 다니며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 배웠다. 그 다음엔 정식 간호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한다. 학생들에게 간호사는 실제업무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이었다. 병원에서 실제적인 상황을 접하며 생생하게 현장의 일을 배웠다.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갑자기 일이 많아질 때에는 발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많이 뛰어다니며 심부름을 했다. 환자들이 들어오면 발병 원인을 문진하고 필요한 서류를 작성했다. 검사처방이 나온 환자는 누워 있는 채로 침대를 끌고 검사실이 있는 병동으로 옮기는데 힘이 많이 필요했다. 일의 종류와 요구되는 수준이 양로원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잡했다. 환자가 퇴원하여 나가면 시트를 치우고 침대를 철저히 소독하여 새 환자를 맞을 준비를 했다. 환자가 자주 바뀌니 할 일의 종류도 많았다. 바쁘다 보니 그 곳의 실습기간은 꽤 빨리 지나갔다. 일에 익숙한 간호사들은 환자가 자주 바뀌는 것에 익숙하여 그런 시스템이 좋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매우 바쁘게 돌아가는 내과병동 일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6주 정도 일하고 적응할 만 하니 실습이 끝났다.
방문 간호는 간호사들이 먼저 사무실에서 순회하며 치료받을 사람을 배정했다. 간호사 한 명과 학생이 파트너가 되어 환자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 필요한 치료를 해주었다. 차를 타고 환자를 찾아가 다 간호해야 했다. 병원보다는 비교적 일이 가벼운 편이었다. 수염을 깎아 드리는 일, 식사준비 등 일상적인 일을 해드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때때로 체격이 크고 무거운 환자를 침대에서 일으켜 씻기고 휠체어에 앉히는 등 혼자 하기 어려워 끙끙 댈 경우도 있었다. 아주 쉬운 경우는 등에 연고만 바르면 되었다. 욕창이 생겨 뼈가 드러난 환자의 환부에 소독을 하고 거즈를 붙이는 일을 하고 나면 가슴이 아렸다. 당뇨병환자에게 인슐린 주사를 놓아드리는 일은 자주 있었고 너무 야위어서 주사바늘을 어디에 꽂아야 할지 망설였던 경우도 허다하다.
가장 특별한 실습은 정신병동에서의 경험이었다. 항상 열쇠를 가지고 다니며 일을 해야 했다. 험하게 행동하시는 어르신들을 돌볼 때 손이나 발을 침대에 고정시켜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 번은 휠체어에 앉아 있던 환자를 다른 병동으로 이송하는데 갑자기 폭력을 행사해 잠시 도망간 적이 있었다. 또 내 목에 걸고 있던 청진기를 확 빼앗아 때리려고 위협하는 환자를 만나 놀라기도 했다. 어떤 우울증환자는 아침식사 후 부동의 자세로 자리에 그대로 앉아 하루 종일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 있어 안타까웠다. 우울증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분을 통해 우울증의 심각함을 보았다. 예쁜 할머니 한 분은 치매에 걸리자 아기와 같이 변하여 남편이 보호자가 되어 아기처럼 돌보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 세상엔 정말 병의 종류도 많고 할 일도 다양하다는 것을 체험했다.
생활패턴이 바뀌고 한국에서 안하던 육체노동을 하니 종종 몸이 아팠다. 팔과 등, 허리가 아파 종종 의사의 처방을 받아 마사지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음식도 맘대로 먹기가 조심스러웠다. 김치를 먹고 근무하면 마늘 냄새가 나서 그런지 어르신들이 꺼려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생마늘을 사용하는 요리는 절제하고 익혀서 것으로 택하곤 했다.
간호사들의 3교대 근무조건은 내게 무엇보다 힘들었다. 새벽에 근무했다가 오후에 근무하면 식사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속이 아프고 소화에 문제가 생겼다.
밤 근무를 몇 번 해보았는데 밤새도록 깨어 있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혈압이 심하게 낮아져 맥박이 잘 뛰지 않았다. 바이오리듬이 바뀌어서 그런지 낮에 잠을 자려고 까만 안대를 하고 잠을 청하여도 잠들지 못했다. 낮에는 잠을 자고 일어나도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밤 근무를 밥 먹듯이 자주 하시는 분들은 어떻게 하실까 궁금했다. 밤에는 역시 잠을 자야 온전하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중도에 그만두는 학생들이 생기며 재학생수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함께 시작했던 한국 동료 한 명은 체코로 갔고 다른 한 명도 중간에 그만두고 다른 길로 갔다. 마지막에는 입학생의 50%정도 학생들만 남아 국가고시를 보고 자격증을 획득했다. 끝까지 다녀서 졸업을 하게 된 것이 큰 은혜였다. 새롭고 다양한 공부와 실습을 하면서 지낸 3년의 시간은 정말 빨리 흘러갔다. 노인 간호학교 과정이 끝나가니 독일어 실력이 늘어 독일 생활이 편안해졌다.
독일에서 선교하며 살다가 죽어 뼈를 묻고자 결단하고 독일에 갔고 공부도 마쳤으니 간호사로서 일자리를 얻고 체류문제를 해결하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졸업만 하면 선교사로서 탄탄대로를 가게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주님의 인도하심은 달랐다.
독일 체류 4년간은 공부하느라 바쁘면서도 신나게 잘 살았는데 그 후 체류문제와 더불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배우는 코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이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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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 갈끔하게 정리 잘하셨네요. 멋져요~~~
감사합니다. 늘 격려해 주셔서 힘이 됩니다.
일사각오의 자세로 주님을 섬기고 지금도 그런 복음정신으로 학생들을 지도하시는 권선생님 자랑스럽습니다. 늘 힘찬 박수와 응원을 보냅니다.
예쁘게 봐주시는 우리 선교사님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힘내서 주님의 사랑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