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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8편 2절-3절: 오히려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의 강포를 달아주는도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2절: ‘오히려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의 강포를 달아주는도다.’ 악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의 기준에서 보는 악이 있고, 또 하나는 선악과를 따먹고 저주받은 인간의 기준에서 보는 악이 있는데, 하나님의 공의에서 보는 악은 인간의 영원한 것에, 영적인 면에 손해를 주는 것을 말하고, 인간기준에서 보는 악은 물질적인 면, 육신 면에 손해를 주는 것을 말한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선악과 따먹고 영이 죽었기 때문에 영적인 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를 못한다. 그래서 일반사람들이 일반적인 생각을 가지고 ‘선이다. 악이다’ 하는 것은 무슨 기준? 선악과 따먹은 기준이다. 안 믿는 사람들이 선악과 먹은 지식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에게 육신적으로 좋게 해 주면 선이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선의 기준이 하나님의 의의 기준이 아닌 선악과 따먹은 지식의 기준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악이라고 하신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영의 눈으로 보는 에덴동산이다. 왜 에덴동산이냐? 하나님의 신이 운행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역사를 하신다 그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동산이라고 하는 거다. 그런데 창: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동산에서 뭘 따먹으라고 하느냐? 생명과를 따먹으라고 한다. 믿는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현실을 이런 계시의 눈으로 보는 거다. 우리에게 주신 현실이 에덴동산이다. 여기에서 생명과를 따먹으며 살아야 한다. 이게 현실을 영의 눈으로 보는 거다.
이걸 좀 더 좁혀서 보면 모든 교회가 에덴동산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동산이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동산이다. 계:에 보면 예수님이 일곱 촛대 가운데로 다니신다. 이게 현실의 교회를 말하는 거다. 성경을 깨닫는 것은 수천 년 전에 있던 일이라도 이걸 현실에 끌어다 놓고 현재의 자기와 교회들의 신앙상태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거다. 그래서 내가 수천 년 전에 살지는 않았지만 성경에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일을 현재의 내 앞으로 끌어다 놓고 현재에서 하나님의 공의성을 가지고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거다. 이게 신앙의 정신세계다. 신앙의 정신세계는 시간을 초월하는 거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는 분이다. 하나님은 참 신이기 때문에 장소를 초월해 버린다. 우리는 신앙심을 가지고 시간을 초월할 수는 있지만 물질적인 몸을 가졌기 때문에 장소는 초월할 수 없다. 그러나 장차 변화 부활을 하게 되면 장소고 시간이고 막 초월을 할 수 있는 영체로 변해진다. 이때는 불속에 들어가도 안 탄다. 우리가 믿는 신앙정신 사상이 이런 거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속에 들어있는 그 정신 사상을 지금의 우리도 가지는 거다. 다니엘 속에 들어있는 정신 사상을 지금의 우리도 가지는 거다. 이게 생명과를 먹은 종들의 신앙정신 사상이다. 그래서 우리가 긍지를 가져야 한다.
선악과를 따먹고 영이 죽어서 타락된 사람의 소원 목적은 세상이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거고, 물질의 것이고, 고로 우리의 신체 몸은 세상에 속한 거다. 믿는 사람은 영이 살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사는 존재다. 그렇다면 안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에게 육신적으로 좋게 해 주는 것과, 안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공의성을 가진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에게 육신적으로 좋게 해 주는 것이 그 속에 움직이는 마음이 똑같겠느냐, 다르겠느냐? 다 같다. 둘 다 선악과 따먹은 타락된 정신으로 좋게 해 주는 거다.
그러면 안 믿는 사람이 궁극교회 교인들에게 육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좋게 해 줄 때 싫다고 내버리겠느냐, 좋다고 받아먹겠느냐?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냐? 우리는 그들의 그런 일반적인 선심을 이용해야 한다. 어떻게 이용을 하느냐?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일단은 고맙다고 하면서 그 사람을 복음으로 정복할 수 있는 좋은 찬스로 삼아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게 이용이다.
내 쪽에서 저 쪽으로 물질이 건너가던, 저 쪽에서 내 쪽으로 물질이 건너오던 다 상대를 위한다고 하는 건데, 우리는 거기에 푹 빠지면 안 되고 그걸 진리의 관계성을 지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까 믿는 우리는 물질을 주던 받던 사람을 바로 세우는 목적으로 들어가는 거다.
안 믿는 사람은 아무리 사람의 육신을 위한다고 해도 이거는 안 믿는 마음을 가지고 위하는 것인데, 믿는 사람이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사람의 육신을 위하게 되면 상대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오히려 사람이 더 미련해져 버린다. 하나님의 옳은 것을 받지 못하게 돼버린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사람을 위해 물질을 쓸 때도 안 믿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생각과 목적을 가지고 해야 한다.
내가 물질을 쓸 때는 관계성을 가지자는 거다. 무슨 관계성이냐? 진리의 관계성, 신앙 믿음의 관계성을 가지자는 거다. 이게 옳은 거다. 이게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바로 사용하는 거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사람의 육신을 위한 일을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의인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 큰 문제다. 그 일 자체는 좋은데 그걸 하나님의 의인 것처럼 생각하는 게 큰 문제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이런 일이 얼마나 많으냐?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악과, 세상사람들이 자기들의 기준에서 보는 악을 분명히 구별 분별해야 한다.
믿는 우리가 육신을 위할지라도 건강한 몸을 이뤄서 하나님의 일에 수종을 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목적이라면 이것은 악이 아니라 선이다. 육을 위하는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데 있기 때문에 선이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이름으로 한다고 해도 물질을 주고 육신을 위해주는 목적이 단지 자기 교회 교인으로 만들기 위해 그런 일을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선이냐, 악이냐? 악이다. 목적이 하나님의 공의의 기준과는 다르기 때문에 악이다.
예수이름으로 할지라도 신앙의 질적인 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선이 있고, 아닌 게 있다. 교회의 설교도 선이 있고, 악이 있다. 악을 외치는 목사가 있고, 선을 외치는 목사가 있다. 같은 성경을 놓고도 그렇다. 그러니 분별을 하자 그 말이다. 무조건 교회에 다니면 안 된다. 분별을 해야 한다. 첫째는 듣는 면에 귀문이 열려야 한다. 듣는 면에 분별이 들어가야 한다. 뭐가 육에 속한 건지, 뭐가 영에 속한 건지? 영을 위한 건지, 육을 위한 건지? 듣는 면에 분별이 있어야 한다. 선악이 분별이 되었으면 그 다음에는 깨달은 말씀을 실천 실행으로 지켜야 한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전부가 하나님의 기준이요,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의사성이다. 다윗도 성령에 감동이 되어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이 말을 하고 있다. 영을 위해 영이 잘 되라고 주시는 말씀을 육이 잘 되라고 육을 위한 목적적으로 해석을 하면 안 된다. 이건 하나님 앞에 있을 수없는 일이다.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하나님께서 하얀 것을 주었는데 어떻게 까만 것이라고 하며 줄 수 있느냐 그 말이다. 하나님은 선을 주셨는데 어떻게 악을 줄 수 있느냐 그 말이다. 하나님은 불에 안 타는 영원한 것을 주시는데 목사가 어떻게 불에 타지고 썩는 것을 줄 수 있느냐 그 말이다.
우리가 일반적인 악을 자기 마음중심에 품으면 이것을 자기도 알고, 또 남도 알 수도 있다. 자기가 나쁜 마음을 품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도 알게 된다. 그런데 교인들의 영을 신앙 사상적으로 절단을 내는 영적인 면의 악은 영의 눈이라야 보이는 것이지 일반적인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신앙사상 신앙정신 면에서의 악을 모른다. 그래서 세상 속화된 목사들이 ‘돈 돈. 부자 부자’ 라고 해도 세상사람들은 이걸 악이라고 보지 않는다. 보는 눈이 없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그것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보는 눈이 있어야 속지 않게 된다.
교회 안에서 아무리 성경을 들고 주장을 할지라도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은 지식을 기준으로 말을 한다면, 즉 썩고 불타고 임시적이고 육적이고 물질적인 세상과 세상 것에 목적을 둔 말이라면 이 주장성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따르지 않는 악한 말이다. 교회들이 일반적인 세상기준의 개념과 목적으로 성경을 가르치게 되면 그 신앙정신 사상은 하나님의 뜻과는 완전히 대립이 되는 신앙사상이 되니 하나님 앞에 악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 말이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성경을 듣고 깨달을 때 ‘예수 믿고 부자 되자. 어쩌자’ 이런 말을 듣거나 할 수는 없는 거다. 사람이 영특한 사람이 되고 고상한 사람이 되는 말을 듣거나 하려니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아야 하고, 마음이 돌아가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면을 얘기하자니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얼마나 힘이 들겠느냐? 눈에 보이는 것만 말을 하면 금방 알아 듣겠는데 사람의 정신과 마음이 돌아가는 것을 말하려니 얼마나 힘이 드느냐? 자기가 어떤 면에 정신을 쓰고 있으면서 이게 영에 속한 정신을 쓰고 있는 건지, 아니면 육에 속한 정신을 쓰고 있는 건지를 아느냐? 이걸 아는 게 쉬운 게 아니다. 그러니 주님께 지혜를 구하는 수밖에 없는 거다.
‘땅에서 너희 손의 강포를 달아주는도다.’ 손은 뭐하는 손이냐? 손은 일하는 손이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손으로 일을 하면 그 일이 눈에 나타나 보인다. 이걸 역사라고 한다. 그래서 손은 일하는 손이요, 손은 역사를 말한다.
집을 지을 때 손으로 돌을 붙이고 시멘트를 바르고 한다. 손이 부지런할수록 돈이 많이 들어온다. 그런데 게으른 사람은 손을 안 놀리려고 한다. 손을 안 놀리면 손톱만 자란다. 그러니까 손톱이 긴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다. 잠언에 보면 현숙한 여자가 부지런하냐, 게으르냐? 부지런하다. 그러니까 재산이 자꾸 불어난다.
‘강포’란 완강하고 포악한 것인데, 일반적으로 포악하고 완강한 성질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신앙 사상적으로 보는 포악성 완강성이 있는데, 예수 믿으면서 자기 속에 들어있는 타락성을 굽혀야 자기가 살겠는데 이것을 안 굽히려고 하는 완강성이 대단한 사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면을 볼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과 의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완강히 거부하는 것은 교만이다. 교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완강성 교만성을 가진 사람이 많다. 목사님들의 세계에도 이런 게 참 많다. 세상 속화된 목사들 속에는 전부가 이 완강성이 들어있다.
‘너희 손의 강포를 달아주는도다’ 라고 하는 것은 자기들의 사역을 분담시킨다는 것인데, 교인들에게 이렇게 해서 일에 대한 충성봉사가 곧 하나님의 일이요, 자기는 주의 말씀대로 했노라고 박박 우기게 만드는 거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완강한 고집이다. 하나님께 영광될 일을 업적으로 크게 만들어 놨다고 하는데도 이게 고집이다. 그러면 이게 고집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성경이 아니면 모르는 거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해 놓고도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는 이 고집불통,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에 대해 말을 하는데 자기는 그걸 부정하면서 자기가 손으로 일을 어떻게 크게 해 놨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것을 안 받아들이려고 하는 그 고집성, 그 완강성, 이게 하나님 앞에 강포다.
3절: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이 말씀은 첫째로 원죄로 내려오는 유전 죄를 말한다. 그래서 부모들부터 자기가 나면서부터 하나님의 곁길로 나가는 것을 모르고 있고, 그러니 자식들에게 하는 교육도 하나님과 멀어진 교육을 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 중생을 하고 하나님의 본질적 진리의 교훈을 받기 전에는 여기에서 돌아오기란 어렵다. 이방세상은 이런 것을 전혀 모른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 중생이 된 후에 신앙의 교육이 시초부터 잘못됐다는 말이다. 가르치기를 잘못 가르쳤고, 배우기를 잘못 배웠다는 거다. 이걸 볼 때 가르치는 인도자와 가르치는 부모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그런데 이것을 뼛속 깊이 느낄 줄 모르는 인도자와 부모가 아닌가?
부모고 목사고 간에 사람을 잘못 가르쳤다고 하는 이 면을 놓고 통탄을 해 봤느냐? 잘못된 것을 알았으면 당장 고쳐야 한다. 목사 입장에서는 목회를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교인들이 죽고 사는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에 당장 고쳐야 한다. 성경이 지금 뭐라고 하느냐?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이게 뭘 말하는 거냐? 모든 인간은 아담 타락 이후로 하나님과 멀어졌고 죄악으로 치닫고 있음을 알라는 거다. 그러니 교회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종들의 세계에서는 선악과 따먹은 일반적인 소원 목적이나 일반적인 가치판단 평가성으로 가르치면 절대로 안 된다. 세상기준으로 가르치면 안 된다. 처음부터 이렇게 가르치면 안 되는 거고, 처음부터 이런 걸 용납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이와 같은 개념을 가지고는 성경을 깨달을 수 없다.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도 안 되고,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예수를 믿어도 안 된다. 이건 하나님 앞에 용납이 안 된다. 성경은 자기 기준, 일반사람들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종 모세가 홍해를 건너고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정신과 사상과 문물을 가르쳤느냐?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애굽의 성질은 뽑아내고 시내산 하나님의 말씀의 정신으로 갈아 넣는 게 교회다. 이게 하나님 앞이다. 하나님의 종은 이 일을 한다.
애굽을 출발하여 가나안을 향해 가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애굽의 바로 왕이 와서 가르칠 수 있느냐? 애굽을 출발해서 광야생활을 하면서 시내산의 말씀의 교육을 받는 이스라엘에게 애굽의 바로 왕이 달려와서 ‘내가 교육을 시키겠다’고 한다면 이게 될 일이냐? 만일 애굽 왕이 이스라엘을 가르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디로 끌고 갈까? 가나안으로 끌고 가겠느냐, 애굽으로 끌고 가겠느냐? 애굽으로 끌고 간다.
교회 안에서 애굽으로, 세상으로, 땅으로, 아래로 끌고 가는 사상의 가르침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이겠느냐?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본질인 진리에서 이탈된 가르침이 있다면 이런 가르침은 전부가 비진리요, 세상적이요, 육본주의요, 인본주의요, 애굽성의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은 질적 본질적 근본적으로 뿌리부터 잘못된 거다.
만일 애굽 왕이 예수를 믿고 애굽에 살면서 사람들을 가르친다면 이 가르침이 옳은 거겠느냐, 근본적으로 잘못된 거겠느냐? 근본적으로 잘못된 거다. 무슨 근본이냐? 뭘 보고 근본이라고 하느냐? 아예 뿌리부터 잘못됐다는 거다. 애굽에 산다는 것은 애굽 왕이 자기의 생각의 뿌리를 어디에 박아 놓았다는 거냐? 세상 애굽에 박아 놨다. 그러니까 애굽의 정신 사상이 근원이 되어 나온 말은 듣기에 아무리 성경적인 것 같아도 다 악한 말이 되는 거다.
성도가 잘못된 것을 받을수록 하나님과의 거리는 엄청나게 멀어진다. 잘못된 가르침을 받으면 자기의 정신과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성질과는 전혀 다르게 거리가 멀어진다. 우리는 정신세계의 멀어짐과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믿는 부부라면 각자가 예수를 믿어갈수록 주님과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고, 이 믿음의 정신으로 부부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믿어나갈수록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믿어갈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사람도 있다.
교인들이 믿어갈수록 하나님과 의사단일로 되어져야 하는데 믿어갈수록 충성봉사는 더 많이 더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과는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는 일도 있다. 세상을 목적으로 예수를 믿으면 믿어갈수록 하나님과 엄청나게 거리가 멀어진다. 믿어갈수록 사망운동이 돼버린다.
우리는 예수를 믿되 신앙사상 면에 있어서 이치를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 한다. 이게 남 얘기가 아니라 각자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이렇게 되지 않는다면 자기에게 심판이 들어가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