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36]
강정자 (姜禎資) - 말씀따라 모든 사연 뒤로하고
23. 말레이시아 국가메시아
1 1996년 참아버님께서는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지도자들을 한국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청평에서 40일 수련을 받게 하셨다. 그때는 청평 수련소가 천막으로 되어 있을 때였다. 수련이 끝나갈 즘에 심지를 뽑아 임지 국가를 결정하게 되었는데 남편은 말레이시아를 뽑았다.
2 말레이시아 국가메시아 발령을 받고 임지국에 도착하였다. 협회 본부 건물은 월세를 내며 빌려서 쓰고 있었다. 말레이시아는 무슬림 나라로써 참아버님을 소개하는 종교 이름으로는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3 개종을 하면 손을 잘라야 할 만큼 법으로 종교에 관해서 엄격했다. 그래서 부모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허락하셔서 “Pure Love True Family for World Peace Association”을 등록시켜 그 이름으로 활동을 하였다. 통일교라는 종교적 이름을 빼고 ‘참가정 순결운동’ 이름으로 활동을 한 것이다.
4 말레이시아 사회복지부 장관이 여자였는데 그 장관이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주었다. 약 두 달에 한 번씩 순결과 참가정을 주제로 열린 대회는 40회까지 이어졌다. 제40회의 Pure Love True Family for World Peace 콘퍼런스를 통해 13개 주에 커미티를 조성하여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5 참가정 순결운동을 하면서 재미난 해프닝도 있었다. 대학교수만을 초정한 대회에서 설문지 조사를 하는데 가족관계란에 부인 이름을 두 개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 부끄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당당하게 부인들 이름을 썼다.
6 일부다처제라는 법은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 많아서 그 사람들을 보살피려고 만든 법이라지만, 현재는 그 법으로 인해 돈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이용해 욕구를 충족하는 도구로 전략해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 사람들을 놓고 일부일처주의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했다.
7 대회는 회를 거듭할수록 성공적이었지만 월세로 있는 협회 본부가 발목을 잡았다. 대외활동을 많이 하다 보니 사람들이 자주 협회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 보기에도 아담한 곳으로 협회 본부를 옮겼다. 그리고 잔금을 치러야 하는데 헌금으로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플라워 전시회에 대한 영감이 떠올랐다.
8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지만 미국에서 꽃으로 만물 복귀를 하던 경험을 살려 드라이플라워(피어있는 상태 그대로 말린 꽃)로 작품을 이백 점가량 만들었다. 작품 하나하나가 참부모님과 참사랑, 참가정이란 테마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을 꽃으로 묘사했다. 정성을 들여 완성한 작품을 가지고 두 번의 전시회를 열었다.
9 첫 번째 전시회에는 국회의장을 오피시에이터로 초대했고, 두 번째 전시회에는 여왕을 오피시에이터로 초대했다. 작품들은 전시회를 통해 전부 팔렸고 그 작품을 책으로 발행하고 카드, 달력으로 만들어 팔아 모은 돈으로 제대로 된 협회 본부 건물(Blue house)을 마련할 수 있었다.
10 책을 발간했을 때 마하티르 수상 부인 시티 하시마가 머리글을 써주었다. 머리글에서 사랑을 내면적 심정 세계의 마른 꽃으로 묘사한 데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말레이시아에서 아티스트가 됐다.
11 우리는 계속 카드와 달력을 만들어 펀드레이징을 하여 지금의 하타마스 교회와 사업 본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풀타임으로 일하는 공직자들의 생활을 지원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했다.
12 그 시절 나는 하루에 많이는 2시간 어떤 때는 30분간만 눈을 붙이며 꽃꽂이를 준비했다. 잠자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길을 걷다 보면 휘청거렸다. 꽃꽂이 전시회를 준비하는 도중에 여러 번 피를 토했다. 속으로 몹쓸 병에 걸린 줄 알았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검사를 해보니 날씨가 덥고 습한 데다 과로로 인한 기관지 확장증이라고 했다. 한국에 돌아와 쉬니까 그냥 회복되었다.
13 집은 마련됐으나 커튼 하나 없고 의자 하나 없으며 손님을 모실 접시 하나 없는 말레이시아 본부 Blue House였다. 그 뒤 국회의장과 상하원, 장관, Sunway 그룹 회장을 초대했을 때 처음으로 접시 세트를 장만했다.
14 나중에 VVIP 6명을 초대했을 때 접시 6명 분을 장만했다. 나중에 여왕을 초대 했을 때 접시 12명 분을 장만했다. 커튼도 한 달에 한곳씩 여러 번 나누어서 준비를 마쳤다. 그래서 VIP 20명을 초대할 수 있는 준비를 했다.
15 참부모님과 참자녀님 가정을 모실 준비도 한꺼번에 할 수가 없었다. 모실 때마다 조금씩 나누어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의전을 갖추어 준비하기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열악한 환경이었다.